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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知 - 책 읽기

반지성주의에 대하여

 


 

반지성주의에 대하여

 

반지성주의는 민중의 언어가 될 수 없다. 민중은 이성을 거부해서 얻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민중이 이성을 거부하게끔 함으로써 권력자들이 모든 것을 얻는다. 민중이 반지성주의를 자신들의 언어로 받아들이면 다음과 같은 일이 생긴다.

 

첫째, 중요한 문제와 사소한 문제를 구분하지 못한다.

둘째, 세속적인 문제의 근거로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느낌을 제시한다.

셋째, 합의된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 전혀 엉뚱하고 부적절한 수단을 채택하는데도 그것이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넷째, 갈등의 당사자 중 약자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다섯째, 고통과 곤경을 낳는 구조적인 부정의가 자연의 질서처럼 불변의 것으로 여긴다.

여섯째, 무비판적인 복종과 무조건적인 근본주의 중 어느 하나에 가까워진다.

 

결국 이성의 거부는 언제나 민중이 자신들의 삶의 가치를 훼손하는 결과로 귀착된다.

 

민중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는 삼척동자도 다 알 만큼 분명하고 손쉬운 것이 아니다. 고통은 그것을 겪는 사람에게 자명하게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개인이 느끼는 고통은 자명하지만 의사소통되고 공론화된 고통은 자명하지 않다. 언제나 고통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부당하고 부정확할 수도 있고, 정당하고 정확할 수도 있다. 고통을 해석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그것을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만들어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전혀 다른 원인에서 발생한 것으로 왜곡하고 엉뚱한 해결책을 끌어들이려는 이데올로기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작동한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의 빈곤과 차별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 생긴 인과응보로 사소화한다. 양육비를 부모들이 사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사회 구조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여성이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왜곡한다.

 

어떤 중요한 문제도, 지성(intelligence)의 틀을 통해 해석하고 해결책의 규범적 정당성과 사실적 효과성을 공적으로 논증하며 합리적인 수단을 궁리하지 않고서는 다루어질 수 없다. 이런 단계와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관으로 바로 해답이 도출된다는 생각은, 전제들이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곧바로 답에 도달했다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즐겨 착각하는 사람들이 민중의 친구임을 자처하면서 반지성주의를 퍼뜨린다.

 

반지성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요지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탐구 활동은 반지성주의자 자신이 탐구 없이 갖게 된 확신을 뒷받침하고 추종하며 확산하는 일에 종속되어야 한다. 반지성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우연히 지니게 된 앎 없는 확신( doxa)에 결론이 부합하면 그 탐구 과정을 칭찬하고, 일부분이라도 자신들의 확신에 어긋나면 비난한다. 그들에게 탐구는 탐구가 아니다. 탐구는 공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리를 알아내는 체계적인 활동이다. 반지성주의자들에게 탐구란, 그들이 사적으로 갖게 된 확신을 강조하는 탄창, 우리 편에 또 한 명이 붙었다고 선전할 수 있는 전단지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검토되지 않은 신념과 가정이 주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둘째, 반지성주의자들은 본인이 즉시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개념과 논증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지식인들이 ‘음모’를 가지고 인위적으로 만든 쓰레기 같은 것이라고 여긴다. 그들이 수학이나 자연과학에 대해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법학, 철학, 사회학, 경제학에 대해서는 이런 주장을 줄기차게 한다. 그들은 자신이 배운 것이 아니면 일단 거부 반응을 보인다. 이런 모습은 그들이 사회경제적 질서와 관련된 문제들을 인간의 탐구 영역에서 분리하여 비지성적인 문제로 다루고 싶어 함을 보여준다. 또한 반지성주의자들은 논의에 쓰이는 개념을 설명해달라고 요구하는 대신 아예 그 개념을 쓰지 말라고 하고, 논증의 도구를 모조리 배척한다. 그들은 개념과 논증의 도구들은 효율과 간명함을 위해 기호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쓸모없는 것을 쓸모있게 보이도록 하는 음모가 존재한다고 시나리오를 쓴다.

 

만약 <반지성주의 철학 논고>라는 책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명제로 요약될 것이다.

 

1. 세계는 내가 아는 것들의 총체다.

   1.1 세계는 내가 아는 것들의 총체이지, 다른 이들이 아는 것들과는 관계없다.

2. 사실이란 내가 있다고 믿는 사태들의 존립이다.

3. 내가 확신하는 것들을 지지해 주는 것이 사고이다.

4. 내 확신을 지지해 주는 것이 참인 명제이다.

5. 명제는 내 확신에 부합하는가를 요건으로 하는 진리함수이다.

6. 사람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의 주요 명제들을 패러디한 것이다)

 

(...중략...)

 

거듭 강조하지만 무지와 어리석음은 같지 않다.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각자 여러 분야에 무지하지만, 우리 모두가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때로는 깨닫지 못한 채 부분적으로는 어리석을 수도 있지만, 우리 모두가 총체적으로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부분적인 쟁점에 대하여 일시적으로 어리석음에 빠지더라도, 어리석음 자체를 기본적인 태도로 삼고, 어리석음을 근거로 들며, 어리석음을 오히려 찬양하지 않는다면 반지성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다른 부분에서 얻은 이해를 근거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교정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반지성주의자들은 단순히 무지하거나 부분적으로 어리석은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반지성주의는 어리석음을 자랑스러운 것, 찬양해야 하는 것, 지적 힘을 가진 것으로 내세운다. 반지성주의자들에게는 어리석음이 거짓 신념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며 오히려 진리를 보증하는 기반이다.

 

- 이한, 『삶은 왜 의미 있는가』, 282~2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