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 군의 죽음 사진을 시작으로 하여 이기붕 일가의 자살 현장 사진이 대단원을 장식한 사건으로, 국민들은 '4.19'를 기억했다. 한 편의 드라마였다."

                                                                            _최정운,『한국인의 발견』, 214쪽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은 '학원의 자유'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학생들의 시위는 곧 경북 지역과 서울 지역, 3월 중순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다 3월 중순에 마산 사태가 터지고 4월 11일 김주열 군이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되어 그 사진이 전국 일간지에 실리면서, 드디어 사태는 우리가 4.19라 부르는 '사건'의 완결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힘으로, 마치 고삐 풀린 것처럼 치닫게 됩니다. 


2.28 당시 대구의 고등학생들


정치적 사건은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그 사건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합의'를 이루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건을 '날짜'로 호명하는 식으로 타협을 합니다. 3.1(만세운동), 6.25(사변), 5.16(군사쿠데타) 5.18(광주민중항쟁) 등이 그러하고 4.19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4.19의 경우 다른 사건들과 달리 선정된 날짜가 특이합니다. 보통은 사건이 시작된 날이나 끝난 날이 선택되는 데 비해 4.19의 경우 4월 19일은 사건이 시작된 날도 끝난 날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가장 격렬한 싸움이 있었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은 날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4.19라 부르는 이 사건은 2.28 또는 3.15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지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


사건으로서의 4.19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는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의 선거연설이 있었는데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런데 이날 대구의 고등학생들은 일요일임에도 등교 지시를 받았다. 경북고등학교는 학기말 시험, 대구고등학교는 토끼 사냥, 경북사대부고는 임시 수업, 대구상고는 졸업생 송별회, 대구여고는 무용 발표 등의 일정을 마련했고 전교생을 등교시켰다.[각주:1] 이에 항의하며 고등학생들은 오후 1시 20분경 열을 지어 학교 교문을 나와 도청으로 몰려들었고 "신성한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데모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그들을 막기 위해 출동한 경찰관 약 200명과 충돌했고, 경찰관들의 구타로 약 20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학생들의 데모는 곧 경상북도와 서울 지역으로 퍼졌고, 3월 중순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여기까지는 4.19 사건 진행의 첫 단계에 해당한다. 이 시기까지 시위 양상을 보면, 경찰의 폭력 때문에 다친 사람은 있었지만 죽은 사람은 없었다. 고등학생들의 폭력도 돌을 던지거나 구타를 가하는 정도였다. 또 시위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고등학생들이었고 그들의 구호는 "민주주의 살리자" 같은 내용이 없진 않았으나 주로 '학업'을 방해하는 "학원 내 정치적 간섭을 배격한다", "신성한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2월 28일부터 4월 내내 고등학생들은 사건의 중심에서 싸웠다.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3월 14일 서울 곳곳에서는 "대학생들은 썩었다"고 질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또 연세대학교 입구에는 "학도들이여 일어나자"는 제목의 호소문이 붙었다. 하지만 대학생들은 조용했다. 


사태는 정부통령 선거일인 3월 15일을 기점으로 '일반 시민'들이 시위에 대거 합류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자유당은 시민들을 3인조, 5인조 등으로 짝을 만들어 투표장에 투입시켜 이승만과 이기붕을 찍으라고 강요하고, 또 사전에 투표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을 찍은 투표를 넣었다가 총유권자 수보다 투표자 수가 더 많이 나오는 사태가 벌어지자 투표함을 불태워 이를 은폐하려 하는 등 노골적으로 부정선거를 진행했다. 이에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들은 오전에 일찌감치 더 이상의 투표가 의미없다고 판단하고 선거를 포기했다. 그리고 '부정선거 정지'를 요구하는 데모를 시작했다. 학생과 시민 약 1천 명으로 시작한 참여인원은 저녁쯤에는 약 1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승만 대통령 사선 확정" "부통령엔 이기붕 씨". 동아일보 1960년 3월 17일자이다.



시위 주체만 달라진 게 아니라 시위 양상도 변했다. 군중은 "부정선거를 즉시 정지하라"는 구호 등과 함께 전날 3월 14일까지와는 다르게 경찰서를 파괴하고 불태우는 등 폭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분노해 있었고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었다. 이날 경찰에 의한 발포가 있었고 사망자가 발생했다. 밤이 깊어가며 폭력이 고조되었고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마산총국 등이 시위대에 의해 파괴되었다(제1차 마산 사건).


3월 15일 북마산 파출소는 시위대의 손에 불에 타 전소되었다.



4월 초에 이르러 마산 사태는 진정되는 것 같았다. 여전히 곳곳에서 시위가 있었으나 폭발력은 가라앉는 듯했다. 그런데 4월 11일 밤 행방불명이던 김주열 군이 시체로 발견되고 전국 일간신문에 크게 실리면서 사람들의 분노가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살인범을 잡아내라" "선거 다시 하라" "희생자를 살려내라" "악독한 고문경찰관을 잡아 죽이자" "경찰은 잘못을 알고 사과하라"고 외쳤고, 폭력 행위를 불사하며 경찰서나 자유당과 유관한 건물들을 파괴했다. 경찰 또한 다시 발포를 시작했다(제2차 마산 사건). 


제2차 마산 사건 이후 며칠 동안 대대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4월 14일쯤부터 17일까지는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4월 18일에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고려대 학생들이 데모를 일으킨 것이다. 그때까지 대학생들은 쥐 죽은 듯 침묵을 지켜왔는데 이때 처음으로 거리로 나선 것이었다. 특히 사달은 이들이 데모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생겼다. 종로4가쯤에서 대학생들은 유지광이 이끄는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았고 많은 학생이 죽고 다쳤다. 이 소식에 격분한 대학생들은 4월 19일 드디어 데모대를 조직하여 대규모로 서울 시내로 몰려나왔고, 그 외에 도시 빈민, 청소년들이 가담한 가운데 진압 경찰들과 격전을 벌였다. 오후에는 경찰이 발포를 개시하였고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이날 대학생을 포함하여 1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그리고 이날 처음으로 '민주주의'가 구호로 등장했고, 바로 이날이 이 사건을 대표하는 날이 되었다. 


시위는 4월 20일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4월 25일에는 <사상계> 동인들이 주동이 된 대학교수단의 모임에 이어 '시국선언' 발표와 데모가 있었고 이때 처음으로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가라"를 외쳤다. 다음 날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틀 후 4월 28일 이기붕 일가가 자살하고 그 처참한 광경이 일간신문에 실림으로써 사태는 종결되었다. 



상식의 점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4.19에 대해 나누는 이런저런 얘기들은 결국 '학생들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로 요약된다. 그런데 2월 28일부터 4월 28일까지 이 사건의 전모를 음미해보면 "그게 과연 그런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1. 우선 '대학생'은 이 4.19라는 사건에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시위의 주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4월 18일에야 사건에 모습을 드러내고 19일에 비로소 사건의 중심에 선다. 


2. 4.19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4월 12일 마산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 이전까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최소한 중심적인 구호가 아니었다. '민주주의'가 사건의 중심 구호로 등장한 것은 '대학생'이 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이다.


3. 물론 고등학생들도 '학생'이고 그들은 가장 일찍부터 사건에 참여한 주체였다. 하지만 그들의 구호는 '학원의 자유화' 범주에서 맴돌았으며 '민주주의를 요구한 학생'은 아니었다. 고등학생들이 '민주주의'를 구호로 내걸기 시작한 것은 4월 12일 이후부터로 판단된다. 


4. 즉 4.19에서 시위 주체로 '학생'을 거론할 때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구분되며, 고등학생의 경우 '민주주의'에 집착한 주체가 아니었다. 이 말은 '우리의 상식'이 사실상 '대학생'을 4.19의 주역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5.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발생한 마산 사태의 경우 '부정선거'가 기폭제가 되어 일어났다는 점에서 참여자들의 의식 저변에 '민주주의'에 관한 판단 기준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후 그들이 보여준 '폭력'이 과연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적 폭력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확실한 건 시위대는 분노해 있었고 따라서 주체하지 못하고 폭력이 터져나왔으며 중간중간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가도 새로 '연료'가 주입되면 다시 활활 타오르며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그 '분노'와 '힘'만은 진짜였다.


아래 인용문을 보자.


“폭력은 안 된다. 부셔서는 안 된다”고 목이 터지도록 외쳤지만 (…) 이미 우체국 앞에는 한 대의 차가 불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불을 본 시위대는 흥분하여 경찰서 마당에 주차해 있는 차들을 마구 부셔대기 시작했고 일부 시위대는 현관문을 열고 경찰서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서 쏘는 총소린지 모르겠습니다만 ‘땅, 땅, 땅’ 하고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_1960년 4월 11일, 마산, 당시 21세, 1994년 인터뷰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일까? 다시 정리하면, 2월 28일부터 3월 14일까지 벌어진 전국적인 시위의 주체는 고등학생들이었고, 3월 15일 마산 사태부터는 일반 시민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4월 18일부터야 대학생이 등장한다. 평이하게 쓴 이 문장에서 '일반 시민'은 누구일까? 여기서 '시민'은 결코 지식인 부르주아들은 아니었다. 최초에는 정당에서 앞장섰지만 그들도 주체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신문팔이, 구두닦이, 넝마주이, 껌팔이 등이 포함된 '도시 빈민'이었다. 


‘양아치’란 (…) 정처 없이 부랑하는 소년, 구두닦이, 신문 파는 아이들의 불량성에 치중한 호칭이다. 3.15 마산 데모, 4.19 이래의 서울 부산 등지의 데모에 이 소년들이 단단하게 한 역할을 한 것은 우리들이 본 그대로다. 남루한 옷을 입은 소년들이 스크럼을 짜고 거리를 행진하고 트럭이며 지프차며를 징발해선 타이아가 터지도록 가득 타고 질주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리고 이들이 시위에 나선 목적이 과연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였을까? 이에 대해 그들의 구호도, 행동도 만족할 만한 답이 되지 못한다. 나아가 이들이 어떤 '결말'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어떤 '목표' 아래 단일한 '대오'를 이루었는지도 의문이다. 아마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거리를 메우고 있었으나 학생들같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산발적으로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별로 말도 없이 그저 침울한 표정으로 흘러가는 대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면 옆에서 따라서 박수도 쳐주고 하는 정도였다.

_4월 19일 서울 광화문 방면, 경찰 발포 전, 당시 명성여고 2학년 학생 일기


이들은 4월 19일에도 시위의 주된 참가자였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들은 '학생'들과 섞인 존재도 아니었다. 



정론이 만들어지다 : 우리가 아는 4.19


한편 북한은 남한에서 '인민 봉기'가 일어났다고 보도하고 있었고 일부 해외 언론도 한국의 상황이 '공산당'의 조종에 의한 게 아닌지 의심하는 보도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은 '질서'를 회복할 명분을 찾고 있었다. 이승만은 제2차 마산 사건 이후 시점에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가 있으며 어떤 난동이든 그것은 '이적 행위'라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앞서 보았듯이 정부 측의 이러한 규정이 '진실'과 다르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일단의 지식인들이 있었다. <사상계>를 중심으로 한 이들 언론계 지식인은 1950년대를 통해 쌓여온 한국인들의 좌절과 분노를 알고 있는 사람들로 이들 또한 정부와는 다른 차원에서 사태를 통제하고 '질서'를 회복할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들은 결코 '정부'와 같은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이승만 정권의 사건 규정에 반박하며 "마산 사람들의 행동은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기본적 자유권을 회복하려는 타당한 행동"이라는 전혀 다른 규정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틀대로 4.19는 완성되어 갔다. 시위 참여자들이 뚜렷한 '목표'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동안 누군가는 이를 '자유민주주의' 운동으로 조정하고 있었다. 우선 4월 18일을 기점으로 대학생이 등장한다. 대학생들은 어느 집단보다 <사상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집단이었다. 사실 앞선 시기까지 대학생에 대한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평가는 결코 좋지는 않았다. 한때 정치권을 풍미하며 역사의 적자를 자처한 4.19세대를 우리는 4.19의 주역이자 영웅으로 기억한다. 또 1960년대 한일협정 반대나 1969년 삼선 개헌 반대 등에서 보았던 것처럼 1950년대에도 그들이 사회를 '선도하고 행동하는 지식인' 역할을 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50년대에 그리고 4.19 와중에, 대학생이라 하면 '무기력' '무실력' '무가치'의 집단으로 항상 비판의 대상이었고, 고등학생들도 대학생들의 '침묵'을 비판했다. 


그러나 대학생들이 아무런 사회적 의식이 없는 존재는 아니었다. 


혁명. 피. 역사. 정치. 자유. 그런 낱말들이 그들의 자리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었으나, 그것들이 장미꽃, 저녁노을, 사랑, 모험, 등산 같은 말과 얼마나 다른지는 의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 무거운 낱말들-혁명, 피, 역사, 정치, 자유와 같은 사실의 책임을 질 만한 실제의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언어뿐이었다. '사실'에 영향을 주고, '밖'을 움직이는 정치의 언어가 아니라 제 그림자를 쫓고 제 목소리가 되돌아온 메아리를 되씹는 수인(囚人)의 언어 속에 살고 있었다. 그 속에서 그들이 몸부림치면 칠수록 현실은 더욱 멀어 보였다. 언어와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골짜기를 뛰어넘는 길은 막혀 있었다. 그 골짜기를 이을 수 있는 다리를 놓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초라한 '아이들'이었다. 

                                                                            _최인훈, <회색인> 중


최인훈의 회색인은 1963년에 쓰인 작품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대학생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다면 바로 '1958년 가을'이다. 1963년과 1958년 사이에는 4.19와 5.16이 있었다. 즉, 최인훈은 '혁명'과 '쿠데타' 이후 시기에 그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절의 기억을 회색인에 담았는데, 그 속에서 대학생들은 현실을 개탄하지만 그저 '말잔치'일 뿐이었고 무엇보다 그들 자신이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비참하고 그렇기에 "그들은 너무나 초라한 '아이들'이었다." 1958년의 그들에게는 존재감을 채울 계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4월 18일의 일을 계기로 그들은 '계기'를 확보했다. 반공청년단 정치깡패들은 데모에 참가한 고려대 학생들을 쇠파이프, 쇠갈고리, 몽동이, 벽돌 등으로 공격했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습격 사건으로 대학생들은 드디어 직접적인 '분노의 당사자'가 될 자격을 얻었다. 다음 날 419일에는 약 10만 명 규모의 대학생 데모가 서울에서 일어났고 그들은 시가행진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들은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라2월부터 고등학생들이 사용했던 구호와 함께 ' 민주주의'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구호로 사용했다.


이리하여 2월 28일부터 4월 말까지, 장차 한국 현대사에서 최초의 '혁명'으로 기록될 사건이 하나의 '규정'을 얻었다. '대학생들이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일으킨 의거이자 혁명'이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것은 이미 4월 19일부터,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4.19를 정의하는 '정론'이 되었다.


그렇다면 일단의 지식인이 급조한 '민주주의'라는 대의와 '대학생'들이 주체로 자리매김하면서 어떤 다른 '이유'와 '주체'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4.19는 왜 일어난 것일까? '일반 시민', 아니 '빈민'들의 분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은 어디서 왔고 4.19 이후 어디로 갔을까? 또 하나 생기는 질문은, 그렇다면 우리가 현대사를 통해 존경심을 아끼지 않던 '대학생 영웅전'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     *     *


이상의 이야기는 최정운 교수의 『한국인의 발견』과 그 제자인 시모카와 아야나의 석사학위 논문 「4.19 해석의 재해석: 『사상계』지식인이 만들어낸 4·19 민주혁명」에 의존한 글입니다. 결국 위 이야기를 제대로 마무리하려면 '한국인의 시대정신'을 건드려야 하고 실로 적잖은 지면이 필요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한국인의 발견』을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책에 관한 좀 더 큰 소개는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mizibooks.tistory.com/126


한국인의 발견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힘의 정체를 찾아서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688쪽 | 25,000원

 

 

만약 우리가 역사를 다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삶일까?


해방과 전쟁 후 혼돈과 죽음이 편재하던 세상에서

오늘날 우리가 있기까지

문학으로 본 한국인 굴기의 대서사 


알라딘 바로가기

교보문고 바로가기

예스24 바로가기

인터파크 바로가기



  1. 이재오 <한국학생운동사 1945~1979년> (파라북스, 2011), 147쪽. [본문으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