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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북스의 책/사회과학

[중간착취자의 나라] - 비정규 노동으로 본 민주공화국의 두 미래

『중간착취자의 나라』

비정규 노동으로 본 민주공화국의 두 미래

이한 지음 | 미지북스 | 228쪽 | 13,800원 

 

 

비정규직 문제의 레드라인은 어디인가?

격화되는 비정규직 갈등, 하지만 해법은 있다!

 

'노동생산성 증가'냐 '노동 압착'이냐, 기로에선 한국 경제

경제적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을 모두 만족시키는 비정규직 해법!  

 

한국 경제는 오래전부터 성장 둔화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의 동력인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려는 노력보다는 노동 압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왔다. 오늘날 첨예한 사회 갈등의 원인이 되는 비정규직 문제나 양극화 같은 사회적 불평등은 그러한 시도의 역사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절반의 고용과 삶의 안정성이 극도로 낮은 처지로 떨어졌고, 고용 시장에서는 비숙련 노동력을 주로 공급하는 부문이 급격하게 성장했다. 이들은 실제 국민경제에 아무런 생산적 기여를 하지 않으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기생하는 존재이며, 우리 사회의 ‘중간착취자’들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정치 문화는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이분법적 사고와 폐쇄적인 진영 논리로 갈라졌지만, 정작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올바른 답을 내놓고 있지는 못하다. 한편에서는 경제적 효율성을 이유로 비정규직 제도의 확대를 이야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적 충격을 이유로 비정규직 제도의 폐지를 주장한다. 『중간착취자의 나라』의 저자 이한 변호사는 비정규직 제도의 사회적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부정적 충격과 고통을 최소화하는 새로운 해법, 즉 경제적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을 모두 만족시키는 비정규직 해법을 제시한다.

풍부한 실증 자료를 바탕으로 저자가 제안하는 해법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중간착취자’로 상징되는 현재의 경제구조, 즉 생산성 증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간접 고용 부문을 제거해야 한다. 둘째, 생산성 증가를 위해 가장 많은 부담을 지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 저자는 우리의 미래가 ‘특권층이 나머지 구성원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나라가 될지, 아니면 공정한 조건에서 협동하는 사회가 될지’는 우리가 이 중대한 문제의 고통을 제대로 포착하고, 고통을 완화하는 대안을 경제적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에 따라 수립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고 말한다.

 


 

▲ 흑사병으로 중세 유럽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자 봉건 영주들은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일부 영주는 현금으로 일정한 지대를 내게 하고 나머지 수확물을 농노가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방식은 농업 기술 혁신과 생산성 증가를 가져왔다. 그러나 많은 영주들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대응했다. 예전만큼 수확물을 얻기 위해 농노들에게 더 많은 영지에서 일하게 했다. 농노들의 예속은 강화되고 노동은 핍진적으로 착취되었다. 당연히 수많은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역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이 사회는 생산성 증가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노동 압착의 길로 갈 것인가?   

 

왜 ‘중간착취자의 나라’인가?

‘중간착취자’란 스스로는 생산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가 생산한 몫에서 일부를 가져가는 존재를 말한다. 한마디로 기생충 같은 존재다. 『중간착취자의 나라』에서는 노동시장에서 도급계약을 맺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원청 업체에 제공하는 ‘인력 공급 업체’를 중간착취자로 보고, 그와 관련된 이슈에 집중했다.

중간착취자는 농경사회에도 있었다. 바로 마름이란 존재가 그것이다. 마름은 소작인과 지주를 연결시켜주고 ‘계속해서’ 대가를 받았다. 그래서 소작인이 지주에게 바치는 지료에는 늘 지주가 마름에게 주는 중간착취의 대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땅이 없는 소작인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지주에게 착취당하고, 생산수단과의 연결 고리에 들어앉아 중간착취를 하는 마름에게 다시 한 번 착취당했다. 더 큰 문제는 마름의 존재가 개별 지주와 소작인과의 관계에서만 끝나지 않고 농업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생산의 주체인 소작인에게 농업기술의 혁신을 통해 생산성에 기여할 유인誘因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중간착취자가 존재했던 농경사회는 생산성의 발전이 없거나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다.

오늘날의 인력 공급 업체 역시 농경사회의 마름과 다를 바 없다. 마름이 그랬듯 인력 공급 업체 역시 원청 업체와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력 공급만을 담당하며 중간착취를 통해 노동생산성을 낮추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미 여러 실증 자료들에서 이러한 ‘근로자 공급’이 노동생산성을 낮춘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데도, 왜곡된 신화(비정규 노동의 확대가 노동생산성을 높여줄 것)에 의해 오히려 그 범위가 더욱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낮은 소득 때문에 부채를 지고, 자살하고, 범죄를 일으키고, 내수는 침체되고, 혁신이 감소되고, 출산율이 계속해서 하락하고, 부패가 증가할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은 경찰의 권력 범위를 확대하고, 사적 경비원을 고용하고, 외국에서 노동력을 들여와 노동 압착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흑사병 이후 중세 봉건 영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른 길은? 이 사회가 동등하고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이라는 원리 위에 정초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길이다. 이득과 부담이 공정하게 할당되고, 존엄을 유지할 수 있고, 숙련과 지식을 형성할 만한 여유를 가지며, 합당하고 충분한 소득을 받고, 자신이 제대로 대우받고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에 혁신에 기여하려고 근면을 끌어내며, 내수가 활성화되고, 혁신이 증가하고, 출산율을 하락시키는 경제적 장애들이 완화되고, 부패는 감소하고, 이는 다시 생산성의 향상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두 미래 중 하나는 우리의 현실이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중간착취자의 나라’가 그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비정규직 제도의 순기능과 사회적 충격

지금의 비정규직 문제는 비정규직 제도 자체에 있지 않다. 비정규직 제도에는 역기능뿐 아니라 분명 순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비정규직은 노동력의 유연한 공급을 가능케함으로써 전체 국민경제에서 경제적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노동시장이 산업구조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자본이 노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고용하게끔 한다. 또한 수요가 쉽게 변하는 부문의 산업 활동이 증가하도록 돕는다. 이는 비정규직을 수용함으로써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길 수 있으며,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직업 경험을 쌓아감으로써 정규직으로 이전할 수 있는 기회가 창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지금의 비정규직 제도가 한 사회의 경제성장 동력인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방식 대신 오히려 떨어드리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데 있다. 비정규직 제도는 숙련 형성과 지식 축적을 저해함으로써 사회 전체적으로는 인적 자본의 감소를 불러온다. 여러 실증 연구들은 비정규직이 대폭 증가할수록 그 사회의 생산성이 낮아진다는 유력한 근거들을 보여준다. 또한 비정규직은 고용 안정이 필요한 경기 하강기에 공격적인 해고를 초래하고 이는 총수요의 감소와 결부된 경기위축을 심화시킨다. 개별 기업 입장에서 합리적인 것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다(이른바 ‘구성의 오류error of composition’이다). 더 나아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노동소득 분배율을 하락시키고 이는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제도는 노동자의 건강과 삶의 안정성을 크게 해침으로써 비정규직 노동자 자신에게 가장 큰 고통과 위험을 가져온다. 이러한 비정규직 제도의 부정적 효과와 악순환은 인력 공급 업체가 ‘중간착취자’로서 기능하는 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고 미래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경제 성장, 양립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해법은 단순하다. 비정규직 제도의 순기능을 제대로 활용하면서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비정규직 제도를 재설계하는 것이다. 새로 설계 되는 비정규직 제도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이득이 되는 제도라면, 설사 불평등한 제도일지라도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해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이익이 증진되는 경우에만 불평등이 정당화된다는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의 원칙’을 준용한다. 비정규직 제도의 문제 해결은 경제적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 둘 다를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충분히 고안될 수 있다.

그렇다면 생산성을 높이는 비정규직 제도는 어떻게 설계되어야 하는가? 『중간착취자의 나라』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 생산성 증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간접 고용은 금지한다. 둘째, 생산성 증가를 위해 정규직보다 더 큰 부담을 지는 만큼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동일 노동에 대해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한다. 그에 대한 적정한 임금은 정규직의 130퍼센트이다. 셋째, 특수 고용직 등 그 실질이 노동자인 사람들의 법적 근로자로서의 보호가 이뤄져야 한다.

이 모든 개혁을 관통하는 핵심은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공정한 협동 조건’의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질문을 통해 모든 비정규직 제도를 검토하고,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 첫째, 그 고용 형태는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통해 생산을 증가시키는가? 둘째, 증가된 생산물은 가장 많은 부담을 지는 이들을 더 열악하게 만들지 않고, 적정한 보상과 기회를 줌으로써 그들에게도 이득이 되는가?

이 두 질문 중 하나라도 ‘아니오’라는 답이 나온다면, 그 비정규직 제도는 정당화될 수 없다. 모두 ‘예’라는 답이 나올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일부 사회 구성원들이 나머지 사회 구성원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말대신 모든 구성원들이 협동적 과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이 어떤 보상도 없이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불평등과 부담을 강요하는 비정규직 제도가 아니라, 그들이 지는 위험과 부담에 걸맞은 합당한 보상을 주는 방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비정규직 제도는 부당하게 축소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자유를 복구시킬 방안을 담고 있어야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숙련 과정을 쌓고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공정한 기회 균등을 도모해야 한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노동조건 차이가 그러한 불평등 체계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비정규직에게도 이익이 되는 원칙으로 규율되어야 한다.

 

왜 비정규직은 정규직 임금의 130퍼센트를 받아야 하는가

비정규직 제도는 노동 유연성을 통해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달성하는 데 이바지한다. 즉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고용 안정을 대가로 전체 노동생산성 증가를 위해 가장 크게 부담을 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가장 크게 부담을 지는 만큼 가장 큰 보상을 받아야 한다. 부담을 더 진다는 이유로 삶의 기회가 축소되거나 굴곡되지 않는 것에 더하여, 더 많은 보상을 합당하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종류의 유사한 업무를 하는 비정규직은 정규직보다 임금을 얼마나 많이 받아야 하는 걸까? 1배로 받는 것, 똑같이 받는 것은 부정의하다. 그러면 부담을 더 많이 지는 사람이 부담을 덜 지는 사람과 동일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1.5배 이상을 받는다면 비정규직의 고용 유발 효과가 사라진다. 이렇게 되면 정규직에게 1.5배의 임금을 주고 초과 노동을 시키는 것이 사용자에게 더 이익이 된다. 이는 사람들을 과로에 시달리게 하고, 일부 사람들에게는 취업할 기회를 주지 못할 가능성을 증대시킨다. 그러므로 1배와 1.5배의 중간 정도인 1.3배가 적정한 비정규직 임금이 될 수 있다.

 

노동생산성이냐 노동압착이냐, 우리에게 펼쳐진 두 미래

흑사병은 중세 유럽 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불러왔다. 그런데 이러한 인구 감소는 두 가지 대응과 연결되었다. 하나는 자유와 생산성을 높이는 대응, 다른 하나는 자유와 생산성을 낮추는 대응이었다. 일부 영주는 현금으로 일정한 지대를 내게 하고, 나머지 수확물을 농노가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이런 경우 농노는 농업 기술을 혁신하여 더 많은 수확을 하려는 유인을 갖는다. 이러한 변화는 영주의 땅에 예속되어 강제로 일하던 과거보다 훨씬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많은 영주들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대응했다. 즉 농노의 자유와 농업 생산성을 낮추는 방식으로 대응한 것이다. 인구가 줄어드니 같은 시간을 영지에서 일해도 수확이 예전보다 못하게 되었다. 영주들은 예전만큼 수확물을 얻기 위해 농노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영지에서 일하게 했다. 그 결과 노동은 핍진적으로 착취되었다. 당연히 수많은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성장의 둔화를 맞이하고 있다. 성장의 둔화는 이 사회에 두 가지 갈림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성장의 근원적인 동력인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생산성’은 그대로 두고, 동일한 노동비용으로 더 많은 산출을 강요하는 ‘노동 압착’을 실시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 사회의 권력층은 흑사병 이후 많은 중세 봉건 영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후자의 방향을 취하고 있다. 이는 이 사회의 장기적인 미래를 조망하고 기획하는 능력이 이들에게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들은 추상적인 용어로 구체적인 현실을 호도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던져야 할 최종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특권층이 나머지 구성원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나라인가, 아니면 공정한 조건에서 협동하는 나라인가?’ 이 두 미래는 열려 있다. 이 중 어느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는 우리가 이 중대한 문제의 고통을 제대로 포착하고, 고통을 완화하는 대안을 경제적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에 따라 수립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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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이한

변호사이자 시민교육센터 대표이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민주주의와 정치철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을 하고 있으며,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 어떻게 하면 그런 사회를 이룰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삶은 왜 의미 있는가』(2016년),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2016년),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2012년), 『이것이 공부다』(2012년), 『너의 의무를 묻는다』(2010년), 『철학이 있는 콜버그의 호프집』(2005년), 『탈학교의 상상력』(2000년), 『학교를 넘어서』(1998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사치 열병』(2011년), 『포스트민주주의』(2008년), 『이반 일리히의 유언』(2010년), 『계급론』(2005년) 등이 있다. 시민교육센터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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