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저자 이택선 박사님과 중앙일보 유성운 기자님의 서면 인터뷰 내용입니다. 흥미로운 내용이 많지만 지면의 한계로 기사로는 싣지 못한 원문을 일부 편집하여 게재합니다. 



 

1. ‘취약국가’라는 개념은 기존 브루스 커밍스 등 수정주의 학자들이 제기한 과대성장 국가론이나 파시즘 국가론과 어떻게 다른가요?


- 제가 책에서도 기술했던 것처럼 수정주의 학자들이 제기했던 이론들의 핵심은 국가가 계급성을 지니고 있고 국가의 개입은 전체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을 보호하려는데 있음을 밝히고자 하는 네오마르크시스트 이론을 입증하는데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제가 제기하는 취약국가론은 국가의 객관적인 능력과 건설과정을 중시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 국가들의 국가 건설 과정을 보면 국가가 자본가계급에게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율성을 가지고 발전을 주도하는 특징이 발견됩니다.

기본적으로 수정주의 학자들이 제기한 과대 성장 국가론이나 파시즘 국가론은 이미 근대 국가에 맞는 부르주아와 국가기구들이 만들어져 있고 지배계급이 존재하는 그런 모습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비해서 한국은 부르주아나 근대국가의 틀이 만들어졌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국가 건설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적, 인적, 그리고, 국제정치적 자원이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죠. 그나마 국가 기구는 일제 지배 말기에 전쟁 수행을 위해서 일본식 문명 기준에 맞추어서 구성되었지만 그 상당 부분을 일본의 자원과 인력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썰물처럼 빠져나갔습니다. 게다가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당시 15위로 전략적 중요성이 큰 지역도 아니어서 미국의 지원도 보잘 것 없었습니다.

또 해방 직후에 과대 성장 국가론이나 파시즘 국가론의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강압적인 국가기구에 종사하는 인원의 수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해방 직후 경찰, 군대, 그리고 기타 행정부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중학교 졸업 출신의 학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수가 약 2만5천명 밖에 안됩니다. 과대 성장 국가론이 성립하려면 관리들이 충족 인원수보다 2-3배는 많아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이 사람들이 다 일해도 경찰이나 군대에 필요한 인원수의 1/3에서 1/4정도 밖에 동원이 되지 않습니다. 이 수치는 제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지원한 국가건설 사례를 가지고 랜드연구소에서 작성한 표준 국가 모델에서 작성한 국가기구 인원수와 비교해볼 경우 더욱 더 벌어집니다. 사실 국가기구에서 일하려면 이전에 관리와 준하는 사전 경험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그것조차 무시하고 그냥 학력 정도만 고려해도 이렇습니다.

 

2. 당시 지배적인 계급이 집단으로서 존재하지 않았나요?


- 해방 직후 한국에는 부르주아 계급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나마 경제적으로 잘 살았던 사람들인 지주의 수가 토지개혁을 추진했던 정치인 중 한 명이자 제헌국회 산업위원장이었던 서상일의 증언을 통해 발견되는데 대략 500여명 정도 됩니다. 서상일은 토지개혁을 추진했던 정치인 중 한 명입니다. 여기에 제가 기술한 것처럼 커밍스 교수가 제시한 자료들을 포함하여 면밀히 상호대조하여 보면 이 소수의 사람들이 땅을 독점해서 문제가 발생한 것도 아니고 그냥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농지 자체가 부족한 것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레닌을 직접 만나기도 했었던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출신이며 국회 부의장을 지낸 백봉 라용균은 전라북도에서 본인이 직접 농지를 개간했고 토지개혁에 포함되지 않은 자신의 땅을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토지 자체가 적으니까 본인이 직접 황무지나 갯벌을 농지로 만들고 토지개혁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에는 조건 없이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준 거죠. 그런데, 이를 그 혼자만 한 것이 아니고 역시 독립군 출신의 초대 국회의원 장홍렴 의원(현 주중 대사인 장하성 대사의 친척 할아버지)도 전남에서 했다고 하니 유사한 사례가 더 많을 겁니다. 그러니, 한국에 소위 타도의 대상이 될 유의미한 부르주아나 유산계급이 대규모로 또는 조직적으로 존재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서양 근대국가처럼 근대국가 건설을 주도할 부르주아지가 존재하지 않아서 토지개혁과 적산불하를 통해서 부르주아를 육성하는 것이 제1공화국과 이승만의 정책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에 공권력이 개입하기 때문에 개인의 순수한 노력으로 부르주아가 되는 것이 아니므로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이죠.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고 시민사회를 주도할 계층이나 집단이 한국 사회에 거의 존재하지 않으므로 한국은 지금까지도 취약국가의 상태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 제 취약국가론의 또 다른 핵심 주장 중 하나입니다.

 

3. 남북한 모두 ‘취약국가’일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이 북한보다 더 취약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남, 북한 모두 후발 산업화국가들로 취약국가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이 북한보다 더 취약했던 이유는 후견인 역할을 하는 미국이 소련보다 국가건설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에서의 품위 있는 철수를 지향했던 미국과 달리 소련은 한반도를 중시하여 북한의 국가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소련국적 북한인들을 대거 파견하였고 경제건설 계획안을 작성하여 주었으며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토지개혁 추진, 군대 건설 등 남한보다 빠르게 국가건설을 추진하였습니다.

소련이 미국보다 한반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경찰과 통역원, 영관 급 장교들에게 지급한 봉급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서, 1945년 9월 당시 한국 경찰의 봉급은 3달러에 불과했습니다. 그에 비해 1946년 1월경 소련군을 위해 일했던 번역원의 월급은 200루블 정도였는데, 약 40달러의 월급을 받았던 셈입니다. 또 1950년 2월경 북한의 소위가 약 260달러를 받았습니다. 이는 한반도에 대한 소련과 미국의 관심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일본의 전쟁수행을 위해서 북한지역이 남쪽 지역보다 공업화가 더 잘되어 있었고 기술력과 재력을 가진 사람들도 더 많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여기에 남쪽 지역은 농업이 주가 되었으며 북쪽 지역은 기독교 지역의 중심지였던 데다가 중국, 소련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어서 외부 선진문명을 받아들이기에도 남쪽보다 유리한 처지였음 역시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3.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인색한’ 원조는 해방 이후 38선 이남에서 혼란이 벌어지는 요인 중 하나가 된 것 같습니다. 미국의 38선 이남에 대한 원조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미국의 경우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유럽에 집중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소련과 빨리 협상하여 품위 있는 철수를 하는 것을 지향했습니다. 이에 해방 후 1년 동안 남한 경제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인데도 미군정은 장기적인 경제 건설 계획을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민생과 직결된 문제에만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했고 소극적인 관리와 유지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은 미군정 기간에 도입된 4억 3,400만 달러어치의 원조 물자 가운데 식료품이 전체의 39%를 차지한 반면, 건축자재와 철도 자재는 1.7%와 3%에 불과했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연히 적산기업이나 토지 불하에 소극적이었고 늦게 추진되었습니다.

 

4. 서북청년회 등 우익 청년단체의 발호와 관련해 공권력이 열악한 상황을 틈타 좌익들이 조직적으로 반체제 활동을 벌였고 이를 제어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우익 청년단의 반좌익 활동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설명된 것 같습니다. 좌익의 기승이 없었다면 우파 청년단체가 성장하기 어려웠다고 보시나요?


- 영화 <암살>로 유명해진 김원봉이 소련 문서에서 이승만의 영향력 하에 있는 군중의 수를 10만으로 평가하고 있고, 한국전쟁 직전에 반공을 표방한 청년단체의 규모가 600만 명으로 한국정치에서 가장 유력한 집단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본다면 우익 청년단체 역시 시기는 조금 늦을 수 있어도 상당한 성장 동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북한의 공산화 진행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남쪽보다 부유했고 고학력자가 많았던 북쪽 출신 월남민의 유입과 좌익의 조직적인 반체제 활동이 우익 청년단체의 결속과 성장을 가속화시켰을 것으로 봅니다. 그로 인해 임시정부 계열의 온건파 단체, 그러니까 극우 반공적인 성향보다는 사회민주주의적이고 온건한 성향을 지닌 단체들이 성장할 정치적 공간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5. 1946년 이후 미군정은 김규식, 여운형 등 중도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정부를 꾸리려는 의욕이 있었는데, 이 같은 중도파 중심의 정부 수립 시도가 좌절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저는 외적인 요인과 내적인 요인 모두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외적 요인을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미국의 정책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미군정이 소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므로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김구의 임시정부 세력을 지원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맹우였던 소련과의 관계를 깨지 않고 싶었던 국무부가 이를 무시하고 좌우합작을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김규식, 여운형 등이 중용되고 남조선과도입법정부의 장관으로 안재홍이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1947년 초부터 냉전의 조짐이 보이고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결국 한반도도 이에 휘말려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다음으로 한국 내부의 중도파의 세력이 부족했습니다. 보통 급변의 시기에는 이념이 선명한 정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마련인데, 한국에서는 해방 시절부터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해 좌파 세력이 친소련파로 재결집하였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와 흥업 구락부, 흥사단을 중심으로 구축되기 시작한 우파 세력 역시 한국민주당과 우파 청년단을 중심으로 친미국파로 뭉쳤기 때문에 양쪽 모두에 속하지 않는 중도파는 현실정치에서 크게 세력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가뜩이나 세력이 적었던 중도파는 1947년 여운형의 암살과 김규식의 정계 은퇴 선언, 제헌선거 공식 불참으로 정부 수립 참여 시도 자체가 좌절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6. 이 책에선 기존 통념과 달리 미군정이 민족주의적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은 일본에 협력한 B급 전범 식민지 정도로 취급되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반일민족주의에 대해선 간과했고 이것이 정치적 패착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미군정은 초기에는 한국을 일본에 협력한 B급 전범 식민지 정도로 취급했고 한국의 반일민족주의를 간과한 정치적 패착을 범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런 초기 실수들을 바로 잡고 이후에는 민족주의적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서 많은 공을 들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홍익인간이나 삼균주의의 이념을 의식적으로 강조하거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안재홍을 남조선과도입법정부의 장관으로 임명한 것, 임시정부 부주석 출신 김규식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으로 영입한 것들이 좋은 예일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자신들의 자문기관인 민주의원 총리로 임명하고 이승만에게 물적 지원을 해준 것 역시 이러한 일환이었습니다.

 

7. 한반도 정책에 있어 미국의 목표는 무엇이었다고 보시나요. 시기마다 차이가 있었다면 시기별로 차이에 대해서도 부탁드립니다.


- 일단 해방 직후에는 명확한 목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동원해제령은 시작되었고 주한미군들마저 빨리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아우성치니 가능한 빨리 한국에서 철수하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한국 현지의 미군정은 임시정부의 이승만과 김구에게 권력을 이양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소련과의 협상을 통한 품위 있는 철수에 초점이 맞추어 졌습니다. 이때가 미 국무부가 미군정을 조정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고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 중심의 남조선 과도입법정부를 만들고 여운형을 끌어안으려고 노력한 때입니다. 하지만 그리스, 터키, 유럽에서 소련의 공산화 시도가 활발해지고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야심 역시 분명해지니 미국 정부도 당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게 있어서 한국은 세계전략순위에서 15위에 불과했기 때문에 소련과 협상을 통해 철수하려는 목표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중국의 공산화가 분명해지니 한반도를 일종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완충지대로 설정하여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2차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마자 불과 1년여 동안 대한민국의 국가건설을 진행시켰습니다. 이를 위해서 조선민족 청년단이라는 단체를 공식 후원하여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준을 보급시켰고 미국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한국은 미국에게 7번째로 중요한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인 군사, 경제지원을 할 수 없었고 그저 세력 균형을 유지해주는 완충지대로 기능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투자는 안하면서 가성비가 높은 나라로 존재하기를 바랐던 셈이죠.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이승만 뿐만 아니라 주한미국대사 무초, 대리대사 드럼라이트 등도 이렇게 지원을 하지 않다가는 전쟁이라도 발발하면 훨씬 더 많은 출혈이 불가피하다고 지적을 했고 실제로 한국전쟁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미국은 한국에게 지원을 늘렸지만 이후에도 세력균형 유지 쪽에 초점을 맞추었고 지금도 결국 세력균형 유지 쪽을 고수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8. 미군정을 이끈 하지 중장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하지는 2차 대전 때 자신의 전우와 부하들을 죽인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있었던 인물이었지만 한국의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는 강력한 신념을 바탕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나름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스스로도 충분한 준비 없이 갑자기 부족한 인원을 데리고 낯선 한국에 도착하여 보니 북한에서의 소련의 위협이 굉장히 커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임시정부의 김구 등을 우대하여 미군정을 꾸려나가는 한편, 미국 정부에 한국에 대한 더 많은 지원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하지는 일찌감치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야욕을 경고하고 이에 대응하는 세력을 육성하고 한국군을 창설할 것을 건의합니다

이런 하지의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정용욱 교수는 그를 “조숙한 냉전의 전사”로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소련과의 원만한 협상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철수하기를 바라던 미 국무부가 그의 건의를 묵살하고 좌우합작을 종용합니다. 이에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직업 군인이었던 하지는 이에 충실하기 위해서 김규식과 안재홍을 중용하고 어제의 적이었던 여운형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합니다. 이때 이미 한반도의 운명이 폴란드와 비슷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던 이승만과 사이가 벌어집니다. 이에 하지는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까지 공격하는 이승만 대신 김규식이나 서재필을 이승만 대신 한국의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하지는 한국에 대한 소련과 북한의 위협을 경고하여 인간적으로는 정나미가 떨어진 이승만과 보조를 맞춤으로써 그와 오월동주의 길을 걷습니다. 이후에도 하지는 매우 부족한 지원 속에서 악전고투 했지만 미국정부로부터 변변한 훈장조차 받지 못했고 한국의 역사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지에 대해 제임스 매트레이(James Matray)는 “비자발적인 십자군(The Reluctant Crusade)”로 표현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한국에 대한 소련의 야욕을 예견하고 이를 조기에 막을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한국을 떠나겠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는 한국의 좌, 우파는 물론 모국인 미국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정치력 등 자신의 능력 이상의 일을 해야 했고 실제로 한국의 공산화를 저지하는데 성공한 장군이라는 점에서 그에 대한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도, 일관성과 현실성이 결여된 미국 정부의 정책 역시 충실히 수행했던 군인의 자세를 보여준 하지에 대해서 민족주의를 중시하는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를 최근에 동티모르 등에 파견되어서 그들의 국가건설 사업을 돕는 한국인으로 대치하여 평가한다면 과연 우리가 그를 정치적으로 무능력하고 인종적 편견에만 가득 찬 인종주의자로만 바라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한국 우파 입장에서는 이승만을 방해한 훼방꾼으로, 좌파의 입장에서는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을 저지한 무능력한 인종주의자로 평가되어온 하지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9. 제1공화국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요?


- 제가 책에서 기술한 것처럼 토지개혁, 국민의무교육 실시 등을 통해서 한국전쟁 전에 국가에 대한 귀속감을 높이고 재정 균형 달성을 통해서 근대국가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대규모 원조 획득에 성공하여 한국전쟁의 재발을 막고 재건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그 점만 본다면 이승만과 제1공화국은 매우 성공적인 정부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전쟁 중 벌어진 국민방위군 사건이나 무자비한 반공주의로 인해서 국민들 사이에 불만과 원한이 생겨났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사오입 개헌안으로 이승만에게 협력하였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돌아섰습니다.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한국민주당이나 흥사단 계열 등과 공유했던 권력의 진정한 주인이 자신임을 확인 받고 자신의 소신대로 통치하겠다는 입장이었을지도 모르나 그의 수족이 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부일관료들이다보니 민족주의적 정통성이라는 이념 자원이 훼손되는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물론 제1공화국은 불과 12년 내에 부르주아지를 만들어냈고 자신들이 시행한 의무교육이 만들어낸 젊은 세대에 의해 정권까지 붕괴되는 “토크빌 효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어찌 보면 그걸 해냈던 것도 퇴진을 수용한 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승만과 제1공화국이 재평가 받으려면 일부 이승만 예찬론자들이 하는 것처럼 찬양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그냥 자신들이 존경하는 이승만을 다시 한번 더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의 통합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집약된 희생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서로가 부둥켜 안아주는 일종의 “해원 상생”일 것입니다.

 

10. 이범석과 족청계가 한국 건국과 제1공화국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 이범석과 족청계는 국가 수립 일정이 촉박한 가운데 극우 청년단체를 대신하여 미군정에 의해 선택되어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준을 한국사회 전체로 전파한 한국정치사에서 주요한 행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공산주의자들이나 좌파의 피난처가 되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굉장히 넓었습니다. 이승만에 의해 이들이 제거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유는 이들이 국가 공식 조직 기구의 권한과 능력을 뛰어넘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보수 성향 집단은 군과 경찰로 넘어가서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세력으로 성장했고 진보 성향 집단은 한국의 민주화를 담당하는 유력자들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성공 비결의 이면에는 이들의 수준 높은 선진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한 사람들 중 81%가 지금의 대학졸업자에 해당하는 중학교 졸업 수준의 고학력자들이었고 이들이 각지로 펴져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준을 보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5.10 총선거 참여를 결정하는 순간부터 대한민국 수립에 기여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이들의 단장인 이범석이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이들은 이승만의 공식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남아 자유당 창당에 참여하는 한편 이승만의 부산 정치 파동을 지원함으로써 그 건재를 과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는 이승만에게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고 결국 이승만은 이들을 제거합니다. 처음에는 이범석을 후원하였던 미국 역시 중국 대륙에서 오래 생활하여 자신들이 싫어하던 중국 국민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성향도 유사한 면이 많았던 이범석을 차츰 제거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기 때문에 이범석과 족청의 몰락은 가속화 되었습니다. 사실 민족주의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던 이범석과 족청이 제거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을 대신하여 기용된 사람들이 다름 아닌 부일 경력이 있는 관료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민족주의적 흠결 뿐 만이 아니라 이들 중 일부가 부정선거를 조직적으로 자행하여 민주주의를 훼손시켰으므로 그 아쉬움은 더 커집니다.

 

11. 취약국가에서 국가를 존립-발전하기 위해 많은 이념적 자원을 소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 미국이 지원한 국가건설 사례들을 집약하여 만들어낸 일종의 표준 국가 모델(랜드연구소)에서 제시하고 있는 국가 건설 비용과 국가기구에 종사하는 인원들과 비교하여 보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매우 저렴하게 만들어진 국가입니다.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한국은 미국의 통상적인 국가건설 자금의 1/26에 불과한 지원으로 만들어진 국가입니다. 즉, 미국이 유럽에 집중하느라 충분한 예산을 제공하지 않다 보니 이제 막 일본에게서 해방되고 일본의 전쟁수행을 위해서 착취당할 대로 당한 한국인들에게 그 부담과 비용이 전가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인들도 너무 가난했기에 정부는 한국인들이 가진 애국심, 민족주의란 이념 자원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애국기 헌납 운동”이 대표적인 사례이고 이 외에도 각종 기부금이 부과되었습니다. 미군정기 3년 동안의 재정적자가 230억원이었는데 정확하게 1948년 1년 동안 각 정부 기관과 준 정부조직이 충당한 기부금이 225억원이었습니다. 물론 세금을 내야할 부르주아 계층이 부재했기 때문이었지만 이러한 문제는 이후 정부에도 이어졌습니다. 40~50세대만 해도 학교에서 반 강제적으로 징수하다시피 내게 한 각종 기부금과 성금의 행렬을 기억할 겁니다. 1970~80년대 반공 단체와 평화의 댐 모금 그리고, 김대중 정부만 해도 IMF 위기를 금모으기 운동 등으로 극복했습니다.

우리 국민은 위기 때마다 이를 헤쳐 온 위대한 국민이었고 그 중심에는 민족주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남발되는 민족주의와 반공 이념 자원의 동원으로 인해 국민들은 지쳐갔습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민족주의는 반공 이념에 비해 아직까지 그 위력을 덜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가난해서 절대 이익(Absolute Gain)의 창출이 중요했던 냉전 시대와 달리 상대 이익(Relative Gain)이 더 중요해진 지금, 다시 말해서 국가가 잘 사는 것보다 나의 삶의 질이 더 중요해진 탈냉전시대에 들어서 그 양상이 조금씩 변화해가고 있습니다. 반일민족주의 열풍이 휩쓸었던 작년과 올해만 해도 확실히 그 위력이 예전만큼은 못해졌고 반발의 움직임까지 나타났으니까요.

 

12. 한국은 현재 국력을 감안할 때 시장경제-민주주의 국가치고는 대단히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 “항상 모습을 달리해 삼아 남아왔고 지금도 가장 강력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념, 그것이 바로 민족주의다” 앤서니 스미스(Anthony Smith)의 뒤를 이은 세계 민족주의 연구의 1인자이자 정통 후계자로 인정되는 존 브륄리(John Breuily)교수의 결론입니다. 사실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는 세계 각지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합니다. 한, 중, 일 3국이 협력을 다짐하면서도 정작 공통의 역사교과서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이렇게, 민족주의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채택한 다른 국가들에서도 활발하기 때문에 우리가 유별나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시민적 민족주의도 성장해서 종족적 민족주의와 균형을 맞추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종족적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가 두드러진 경향이 있습니다. 198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 필자들의 생각은 다르셨겠지만 종족적 민족주의가 부각되었죠. 사실, 종족적 민족주의는 일제 시절부터 우리를 지탱시켜 온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이 부분이 종족적 민족주의가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강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종족적 민족주의는 강하지만 상대적으로 시민적 민족주의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구 부족과 결혼 문제 등으로 인해 우리 정부 역시 다문화 공동체를 정책적으로도 지원했던 상황에서는 우리와 핏줄은 다르지만 한국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고 일원이 된 이들을 한국인으로 품어줄 수 있는 시민적 민족주의의 양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서로 다른 인종들로 이루어졌지만 미국인이나 영국인이라는 자부심도 강하고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혈통적으로 동일한 미국민족이나 영국민족은 없지만 같은 미국인이나 영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그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종족적 민족주의보다는 시민적 민족주의로 결속되어 있는 것인데 오랜 기간 동안 이를 형성하기 위해 국가와 사회가 공을 들였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시민적 민족주의를 성장시켜서 종족적 민족주의와 균형을 맞추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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