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美知 - 책 읽기

명량의 재해석 - 해전 패러다임의 세계사적 전환

영화 <명량>이 역대 최고의 흥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해상 전투는 이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봤을 해전을 실사로 본다는 건 꽤나 짜릿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전투가 가능했을까? 이 글은 조선 수군과 왜군 사이의 전투를 좀 더 세계사적으로 음미해보려는 것으로, 비슷한 시기의 중국과 서양의 해전까지 시야를 확장하게 될 것입니다. 개개 장비와 전술에 대한 치밀한 군사적 분석보다는 세계적으로 일어나던 기술사적 흐름을 확인하는 데 중점을 두었고, 이를 통해 조선 수군이 당시로서도 상당히 높은 기술적 진보와 그에 따른 전술적 우위를 누렸으며, 혁신의 성과 역시 독보적이었음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16세기 말 조선 바다의 화포와 판옥선

- 해전에서의 기술 격차와 해상 패러다임의 세계사적 전환

 

 

 

 

“천지가 생겨난 이래 가장 크나큰 분노가 뜻 있고 기개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끓어오르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지상에서 가장 큰 나라, 수천 수만 리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의 나라가 한 줌의 야만인들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들은 수가 적지만 강한가? 어째서 우리는 수가 많지만 약한가? 우리가 이 야만인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단 하나, 튼튼한 배와 효과적인 대포다.”

- 19세기 중국의 펑구이펀(馮桂芬).

- 카를로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150~151쪽에서 재인용.

 

 

 

 

조선 바다의 완전한 제압을 위해 왜군은 명량 해협으로 진출했다. 왜군의 세키부네와 아타케부네(안택선)

 

 

 

 

<명량>전투 재현
330여 척의 왜군 선단이 밖에서 내해로 드는 울돌목(명량 해협)의 거센 물살을 타고 바다를 메우면서 다가옵니다. 이순신이 휘하의 판옥선 12척에게 일자 진형을 갖추라고 명령하지만, 장병들은 ‘두려움’에 압도되어 명령을 어기고 전선을 이탈합니다. 단 한 척의 대장선만 남아 왜군을 맞습니다. 이순신은 닻을 내리고 배를 고정합니다. 그는 그곳의 조류를 잘 알고 있고 곧 그 흐름이 역전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왜군 선봉은 해적 가문 출신의 구루지마가 이끄는 선단입니다. 그의 수군은 왜군 중에서도 거센 물살에 익숙한 군대입니다. 구루지마는 제1진에게 공격 명령을 내립니다. 왜군들을 가득 태운 세키부네 수십 척이 울돌목의 조류를 업고서, 쾌속으로 이순신의 판옥선 한 척을 향해 접근합니다.

 

이순신은 화포가 집중 배치된 측면을 왜군 쪽으로 대놓고 기다립니다. 이윽고 적선이 화포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고, 이순신은 발포 명령을 내립니다. "선두의 배를 목표로 발포하라." 선두의 세키부네 몇 척이 부서집니다. 발사 직후 이순신은 판옥선을 180도 돌리라고 명령합니다. 판옥선은 놀라운 선회 능력을 발휘하며 배의 다른 측면을 왜군 쪽으로 돌립니다. 준비된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습니다. 새로 선두로 나선 세키부네 몇 척이 부서집니다. 세키부네 갑판 위의 왜병이 조총을 밀집 사격하지만 판옥선의 장갑과 갑판 위의 병사들에는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합니다. 부서진 왜군의 배는 조종 능력을 상실하고 가라앉거나 그들끼리 충돌합니다. 선두의 배들이 장애물이 되어 2선의 배들을 방해합니다. 왜군 선단은 혼란에 빠집니다. 그 위로 조선군의 불화살이 떨어집니다.

 

이렇게 이순신은 구루시마의 제1진과 제2진을 격파하자 전투를 관망하던 판옥선 중 두어 척이 대열에 합류하고 이들은 구루시마의 본대를 격파합니다. 조선군의 ‘두려움’이 점차 용기로 바뀝니다. 그와 동시에 울돌목의 조류가 바뀝니다. 내해에서 외해로 흐름이 바뀌고, 조선군은 이제 순류를 타게 되고, 왜군은 역류에 갇힙니다. 대장선의 분투에 고무되어 모든 판옥선이 전선에 합류합니다. 조선 수군의 판옥선들은 조류를 타고 역류에 갇힌 왜군 본대를 향해 돌격합니다. 원거리에서는 화포로 세키부네를 포격하고, 접근해서는 판옥선의 단단한 장갑으로 얄팍한 세키부네를 들이받아 부숴버립니다.

 

판옥선 12척이 그야말로 비로 쓸듯이 왜군 선단을 들이받는 대돌격 장면을 끝으로 해전은 끝이 납니다. 그 외에 <명량>에서는 전투 초중반에 집중적으로 조선군과 왜군의 백병전을 보여줍니다. 백병전은 왜군의 주 전술이었고, 전투 내내 해상 곳곳에서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일부 허구가 있고 또 과장된 각색이 있음이 분명하지만, 그 외에는 편집의 문제일 뿐 대체로는 있음직한 전투를 보여준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달랐던 조선 수군과 왜군의 전술

이러한 전투를 요약해 보면, 조선 수군의 공격 수단은 1) 조총과 화포의 사거리 차를 이용한 공격, 2) 화포의 파괴력과 다양한 탄의 활용, 3) 판옥선의 단단한 장갑을 활용한 '충파' 전술, 4) 백병전에 임해서 상대적으로 크고 높은 판옥선의 요새로서의 활용 정도입니다. 이렇게 보면, 조선 수군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원거리 포격전이 1순위 전술이 되는 게 옳고, 백병전이 최하위가 되는 게 타당해 보입니다.

 

이에 대해 일본군의 주 전술은 1) 백병전입니다. 판옥선보다 작은 배임에도 왜군의 전함인 세키부네는 더 많은 인원을 태웠고, 그 이유는 오로지 배와 배가 붙었을 때 백병전을 벌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명량>에서 조선 수군은 적선에 올라타는 데 큰 관심이 없지만, 왜군은 사력을 다해 옮겨 타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왜군에게는 2) 조총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총의 유효 사거리는 50미터 이하로 알려져 있고, 이는 조선 수군의 화포에 훨씬 못 미칩니다. 판옥선의 주포로 알려진 지자총통의 최대 사거리는 1km 정도였습니다. 비록 파괴력에 관하여 중요한 유효 사거리가 그에 못 미치고, 또 해상에서는 그 위력이 더욱 반감됐겠지만 여전히 조총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명량>이 재현한 백병전

 

요컨대, 왜군의 전술은 조선의 배에 달라붙어서 백병전을 벌이고 배를 장악하는 방식이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조총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판옥선 하나도 격침시키거나 그 안의 병사들을 전멸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왜군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실제로 당시까지 거의 모든 전투를 그렇게 치러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왜군이 남달랐던 것은 아닙니다. 비슷한 시기 중국의 해전에 관한 기록을 보면 중국 수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화(鄭和, 1371~1433년)의 항해에 쓰인 중국의 배(정크선)는 당시 세계 최고의 범선이었습니다. 그보다 두어 세대 뒤에 서구가 지리상의 발견에 동원한 범선이나 상선용 선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내항성이나 각종 항해 능력 면에서 앞선 기술력의 배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양과 달리 중국의 정크선은 전함으로 발전하지 못하였습니다. 한 서양의 신부는 중국의 해전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16세기 후반이나 말의 기록으로 추측됩니다.

 

"(중국의) 배에 대포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많은 배가 한꺼번에 모여들어 적선을 에워싸고 그 위에 올라타는 것뿐이다. (…) 그들이 가장 열심히 하는 일은 자신들의 배로 적선의 선체를 들이받고 압도하여, 적선이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이 자신들이 배 아래로 놓이게 하는 것이다. 일단 적선에 올라타면 그들은 미늘창 혹은 (…) 몽둥이를 휘두른다."

_가스파르 다 크루스.

카를로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149쪽에서 재인용.

 

물론 중국인들은 석회 가루를 뿌려 적선의 시야를 교란하고 화살과 로켓도 쏘는 등 다른 전술도 구사했습니다. 하지만, 주 전술은 "많은 배가 한꺼번에 모여들어 적선을 에워싸고 그 위에 올라타는 것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멸하는 어조를 감안해야겠지만, 이런 맥락의 기록은 하나가 아닙니다. 1624년 중국의 『주해도편(籌海圖編)』은 "큰 배 위에서는 화포를 사용할 수 있으나 파도 때문에 조준이 매우 부정확하다. 적선을 맞힐 가능성은 희박하다. (…) 배에 대포를 싣는 목적은 순전히 심리적인 것, 다시 말해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함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요컨대, 당시 왜군의 전술이 미개하다거나 뒤떨어진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포를 굳이 실을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멍청한 무기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서양 바다의 전환기 - 대포와 범선

재밌는 것은 서양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고대 로마 시대 이래 지중해의 전통적인 해전은 적선을 들이받고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이나 왜군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동시에 대항해 시대를 예비하며, 어느 시점부터는 대포와 범선이 거듭 개량되었을 거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시기는 15세기였고, 그에 따라 전통을 고수하는 세력과 혁신에 성공한 세력이 충돌하며 해전의 개념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이 지점에 주목하면, <명량>의 해전과 비슷한 양상의 전투가 유럽 곳곳에서 벌어졌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해전에 대한 지중해식 시각. 1654년 몰타기사단과 투르크 배 사이의 교전을 묘사하고 있는데, 다수의 노를 단 갤리선이 범선을 들이받으며 전황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직 대서양으로 세계사의 흐름이 넘어가기 전, 서구 역사의 중심인 지중해에서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오랫동안 일종의 선박 분업 체제가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다수의 노를 장착한 길쭉한 갤리선은 주로 전함으로 사용되고, 돛에 의존해 동력을 얻는 둥근 배는 주로 무역선으로 쓰이는 게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3세기 말에 '대형' 갤리선이 출현하면서 둥근 배의 장점을 흡수하기도 하고, 대포가 개발되면서 대포를 실은 배가 나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17세기 말까지 지중해에서 전함의 중추는 오로지 갤리선이었습니다.

 

이 갤리선은 기본적으로 적선을 충각으로 들이받고, 적선에 올라타기 위한 배였습니다. 노 젓는 노군의 숫자로 동력을 얻고, 병사들의 숫자로 전력을 얻는 그런 체제였고, 따라서 이러한 전술을 실현하기 위해 노군과 병사들을 가득 실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있었습니다. 갤리선은 지중해에서는 무리 없이 항해와 전투가 가능했지만, 대서양의 사나운 파도와 맹렬한 바람을 버텨낼 수 없었습니다. 이 한계를 극복하고, 대서양 세력이 대두하게 되는데, 대서양 세력은 자연의 힘을 적극 활용하는 둥근 배, 즉 범선(돛으로 동력을 얻는 배)을 해군의 근간으로 삼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동안 대포와 범선이 적극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합니다.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2세는 대포와 범선의 결합을 궁리하고 그것을 발명해낸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런저런 실험 끝에 작은 캐러벨선에 얼마나 많은 대포를 실을 수 있는지 알아냈고, 이윽고 대포로 무장한 거대한 배들을 건조합니다. 그런 캐러벨선은 소수로 다수의 큰 배를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포르투갈의 캐러벨선은 바다 위에서 공포의 대상이 됩니다.

 

해전에 대한 대서양식 시각. 이 그림에서는 범선이 갤리선을 압도하고 있다.

 

한편 16세기 후반 바다의 패권을 쥔 에스파냐는 대서양과 지중해 전통을 절반씩 이어받고 있었습니다. 중요하게는 에스파냐가 해상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강력하게 의지한 쪽은 지중해 전통이었고, 따라서 에스파냐는 여전히 적선에 올라타는 전술을 염두에 두고 병사들을 많이 실었습니다. 그리고 노로 추진하는 갤리선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았습니다. 지중해에서 온 그들의 이탈리아 전문가들은 "원거리에서 대포로 적선을 맞히는 것이 해군의 목표가 될 수 없다. 해군의 주 목적은 충돌과 적선에 오르는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는 해전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에 따라가지 못하고 그만 구시대적으로 남았습니다.

 

1588년 유명한 칼레 해전에서 드레이크와 하워드 제독의 영국 해군이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 아르마다를 물리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1618년 영국 해군개혁위원회의 한 보고서는 의미심장합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오늘날 바다에서의 싸움은 적선에 올라타거나 활을 쏘고 작은 포탄을 던지며, 칼을 휘두르는 상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로 대포를 이용해 (적선의) 돛대와 활대를 부수고, 배에 구멍을 내거나 배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수행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 집중해, 선박이 감당할 만큼 각 배에 최대한 대포를 배정함으로써 우리 해군의 가장 큰 강점이 유지되어야 한다."

- 『대포, 범선, 제국』, 100쪽에서 재인용.

 

영국이 선도했고, 네덜란드가 뒤따랐습니다. 대포와 범선을 더 철저하게 활용하는 나라들이 우위를 차지하는 시대가 열립니다. 노잡이들은 점차 돛으로, 병사들을 대포로 대체되었고, 더욱 개량됩니다.

 

 

16세기 말 조선의 바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면, 16세기 말 조선 바다에는 화포와 판옥선이 멋지게 결합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가정을 둬야 하지만, 조선 수군은 영국군 내지 에스파냐군으로, 왜군은 지중해 시대의 수군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럽의 해상 패권은 지중해에서 에스파냐로,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고, 그 핵심에는 노잡이를 바람으로, 전투병을 대포로 대체하는 기술 혁명이 있었습니다. 물론 조선 수군은 노로 동력을 얻었고, 화포의 발전 양상을 봐도 결코 서양과 같은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었으며, 또한 판옥선은 기본적으로 원양 항해가 불가능한 연근해 전투용이었다는 데 생각이 미칩니다. 그렇지만 화포와 판옥선의 기술적 결합과 그 압도적인 전과는 세계사적으로도 마침내 일어날 일이 조선 바다에서 일어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주로 『대포, 범선, 제국』이란 책을 인용하였습니다. 저자 카를로 치폴라는 멀리 이탈리아에 앉아서 조선 앞바다에서 일어난 일을 꽤 열심히 추적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을 보겠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이순신의 돌출적인 존재감과 일본이 받은 기술적 충격,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까지 한번에 정리해줍니다.

 

"(16~18세기) 당시 중국의 선박 건조 기술자들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전함을 만드는 데 관심이 없었다. 해전에서 사용된 배들은 아주 드문 예를 제외하고는 약간의 전투 장비를 갖추고 군인들을 태운, 그저 평범한 상선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밸러드 제독의 진술에는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위대한 제독인 이순신 장군의 지도 아래 한국의 전함은 장거리 포로 무장했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드레이크와 하워드가 해전에서 추구하기 시작한 전술과 같은 방향의 전술"을 채택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수군은 조선의 수군에게 패배했는데 "수군을 단순히 병사들을 나르는 수단"으로만 운용했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은 "조총은 없었지만 대신 배에 대포를 많이 실었고" 일본인들은 "조총은 많았지만 대포가 거의 없었다."

패배 이후 일본인들은 해전에서 일본군의 열등함이 대포가 부족한 탓임을 깨닫고 배를 대포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은 1630년대 막부 정권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일본 내 기독교를 뿌리 뽑을 목적으로 일본 배의 외국 출항과 원양 항해 능력을 갖춘 선박의 건조를 모두 금지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포고령으로 일본에 쇄국의 시대가 열렸다.

_『대포, 범선, 제국』, 147-148쪽에서 재인용.

 

 

 

 

 


 

 

 

치폴라는 대포와 범선의 발전 양상을 개괄하면서, 서구 국가들이 제국을 만들 역량을 손에 쥐게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의 글을 따라가노라면, 15세기 전후 시기부터 서구에는 기술을 떠받치는 광범한 상업 네트워크가 존재했고, 그들이 몸담은 문화적 사회적 문맥이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국민 국가가 성립하고 그것이 전쟁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춰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며, 그들의 팽창과 정복의 역사와 이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점차 가까운 바다에서 먼 바다로, 해안가에서 내륙으로, 적은 인구로 다수의 외국인을 정복할 수 있게 된 그 역사적 연원을 이야기합니다. 참 작은 데서부터 거대한 이야기까지 그 전망이 닿게 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대포, 범선, 제국

1400~1700년, 유럽은 어떻게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카를로 치폴라 지음 |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0년 | 236쪽 | 15,000원

 

 

알라딘 바로 가기

예스24 바로 가기

교보문고 바로 가기

인터파크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