未知 - 세상 읽기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

미지북스 2014. 5. 16. 13:37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이 말은 플라톤의『국가』에 나오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시마코스의 '정의는 강한 자의 편익'이라는 명제에 대해 반론하면서 이렇게 말하죠. 선거를 맞이 하여 정치철학의 고전들에서 석학들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구절들을 선별해보았습니다.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에,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일세. 훌륭한 사람들이 정작 통치를 맡게 될 때는, 그런 벌을 두려워해서 맡는 것으로 내겐 보이네. 그리고 그때 그들이 통치에 임하게 되는 것도 그들이 무슨 좋은 일에 임하기라도 하거나, 또는 그런 일로 안락하게 지내게라도 되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부득이한 일에 임하는 것이어서, 그리고 자신들보다도 더 훌륭하거나 또는 자기들과 같은 수준의 사람들에게 그걸 떠맡길 수가 없게 되어서 일걸세. 만약에 훌륭한 사람들의 나라가 생긴다면, 그러한 나라에서는, 마치 오늘날 통치를 맡으려는 것이 싸움거리가 되는 것처럼, 서로 통치를 맡지 않으려는 것이 싸움거리로 될 것 같기에 말일세. 그리고 이 경우에 진실로 '참된 통치자'는 본성상 자신에게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게 되지 않고, 다스림을 받는 쪽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게 될 것임이 명백해질 것 같기에 말일세. 그래서 식견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다 남을 이롭도록 하느라고 수고를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남의 도움으로 자신이 이롭도록 되는 쪽을 택할 걸세. 그러므로 나로서는 이 점에 대해서, 즉 올바른 것은 더 강한 자의 편익이라는 것에 대해서 트라시마코스와는 도저히 의견을 같이할 수 없다네."

-플라톤 『국가』(서광사,1997, 101~102쪽)

 

공화국의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름지기 가져야 하는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2천5백년 전 그리스에서나 현대 사회에서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통치하는 편에서의 커다란 과오, 많은 잘못과 폐단을 야기하는 법률, 인간적인 약점에서 비롯되는 모든 사소한 비리를 인민들은 반항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감당한다. 그러나 만약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된 남용, 속임수, 술책 등 이 모든 것들이 동일한 경향을 가지기 때문에 통치자의 의도가 인민들에게 뻔히 보이게 된다면, 그리하여 인민들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다면, 그들은 들고 일어나 최초에 정부가 수립된 목적을 그들에게 확실히 보장해줄 수 있는 자들의 수중에 통치를 맡기고자 할 터인데,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한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다면 유서 깊은 명칭이나 그럴 듯한 정부 형태도 자연 상태나 순수한 무정부 상태보다 낫기는 커녕 오히려 훨씬 더 나쁠 것이다.

-로크 『통치론』(까치, 1996, 212쪽)

 

로크는 저항권을 기초한 자유주의 철학자입니다. 로크가 『통치론』에서 저항권을 웅변하는 부분 정부가 인민에게 언제나 성실해야 함을 역설하는 언제 읽어도 서슬 퍼런 구절들입니다.

 

 


 

 

인민은 철학자들이 아니라 신들과 절대주의 왕들의 계승자인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옳은지를 모를 수는 있지만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것)을 할 권리를 주장한다.

- 마이클 왈저 『정치철학 에세이』(모티브북, 2009, 42쪽)

 

마이클 왈저는 전쟁에 관한 철학자로 더 유명하지만, 민주주의의 옹호자로 존경받는 미국의 철학자입니다. 위의 말은 현대 사법부의 권력이 정치의 영역, 즉 인민의 입법적 권한을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현한 글에서 따온 인상적인 문구입니다. 여기서 철학자는 헌법을 해석하는 대법원의 판사들을 말합니다. 편집자는 '인민 주권을 침해하는 사법 권력'이라는 왈저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민주주의란 인민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와는 상관없는, 인민이 원하는 것을 산출하는 제도라는 왈저의 정의는 정곡을 찌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특히 군주의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언제나 결과만을 보게 된다. 그러기에 군주라면 무엇보다도 전쟁에 승리함은 물론 나라를 유지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모든 사람은 그의 수단을 언제나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며 또한 찬양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은 언제나 일의 피상적인 외양에 의해, 그리고 일의 결과에 의해 감명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은 오직 이러한 대중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서울대출판부, 1995, 169쪽)

 

선거는커녕 근대적인 공화주의 개념도 없던 시절에도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세상의 전부는 '인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통치와 관련된 정치적 혜안과 대담한 테크닉을 군주에게 알려주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민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투표권을 가지고 지도자를 스스로 선출할 수 있게 된 우리는 일의 피상적인 외양이나 결과에 현혹되어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전혀 야심적이지 않은 민주주의 목표에 안주하기 때문에 내가 포스트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부상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기만족 상태에 빠져 있다. 포스트민주주의 모델 하에서도 선거는 분명 존재하고 정부를 교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거의 공적 논쟁은 설득 기술에 능란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경쟁적 선거 캠프에 의해 운영되는 치밀하게 통제된 스펙터클일 뿐이며, 이런 선거 캠프에 의해 취사선택된 협소한 쟁점들만 고려에 넣는다. 시민 대중은 수동적이고 조용하고, 심지어 냉담한 역할을 할 뿐이며, 그저 그들에게 주어진 신호에 반응할 뿐이다. 선거 게임이라는 이 호화로운 구경거리의 수면 아래에서, 선출된 정부와 기업 이익을 압도적으로 대변하는 엘리트들 간의 상호 작용을 통해 진짜 정치가 만들어진다. 

- 콜린 크라우치 『포스트민주주의』(미지북스, 2008, 6~7쪽)

 

콜린 크라우치는 영국의 사회학자로 21세기 민주주의가 약화되는 모습을 '포스트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는데요, 신자유주의 경제의 정치적 쌍생아로서, 보시다시피 상당히 비관적인 풍경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모습이기도 하죠). 절차적 민주주의는 유지되지만 실상은 정부가 기업과 부자들에 봉사하고 시민의 기본권과 사회적 공공성은 후퇴하게 되는 현상은 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습니다. 이에 크라우치 교수는 거대 기업을 제어하고, 정당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며, (현재는 극우파들이 선점한) 정체성의 정치를 새롭게 재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