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대항해

- 뗏목과 카누로 바다를 정복한 최초의 항해자들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4년 | 520쪽 | 24,000원



고고학계의 세계적 석학 브라이언 페이건 신작

호모 사피엔스 최후의 팽창을 그린 장대한 서사시


GPS, 디젤 엔진, 나침반도 없이 

고대 인류는 어떻게 대양의 머나먼 섬들을 정복했는가?

인류는 왜 한 번도 탐험된 적 없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갔는가?




오늘날 인류에게 바다는 해독이 완료된 곳처럼 보인다. GPS(위성 항법 장치)와 디젤 엔진, 점점 거대해지는 대형 선박 안에서 인류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바다에서 안전해졌지만 그만큼 바다로부터 멀어졌고 무지해졌다. 수천 년 전 돛과 노, 태양과 별으로 연안 바다와 대양을 항해한 고대 인류에게 바다는 인격적인 존재였다. 고대 인류는 창의력과 눈부신 적응력, 억누르기 힘든 활동성을 기반으로 10만 년에 걸친 여정, 호모 사피엔스 최후의 위대한 팽창을 매듭지었다. 


고고학계의 세계적 석학 브라이언 페이건은 인류의 가장 초기 항해의 역사로 거슬러 가서 다음의 물음에 답한다. 인류는 왜 한 번도 탐험된 적 없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갔는가? 무엇이 사람들을 수평선 너머로 이끌었는가? GPS, 디젤 엔진, 나침반조차 없이 어떻게 대양의 머나먼 섬을 정복했는가? 


수천 킬로미터의 망망대해를 건너 하와이 제도와 이스터 섬 그리고 어쩌면 남아메리카 대륙까지 항해한 폴리네시아 카누부터, 기원전 10세기에 발사 나무 뗏목을 타고 멕시코까지 오간 안데스인의 여정, 서기 10세기에 북아메리카 동쪽 끝에 발 딛은 노르드 바이킹에 이르기까지 브라이언 페이건은 바다와 인류 문명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되살려낸다.



▲ 본문 4~5쪽에 수록된 세계 지도. 『인류의 대항해』가 다루는 지역과 주요 항해 경로를 간략히 보여 준다. 

 

 

최초의 항해자들은 어떻게 바다에서 길을 찾았을까?


작은 보트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은 대부분의 인생을 육지에서 보내는 이에게 잊지 못할 경험이다. 육지에서 멀어질수록 해변이나 눈에 띄는 곶 같은 친숙한 지형지물로부터 벗어나, 주위를 둘러싼 수평선이 유일한 우주가 된다. GPS와 컴퓨터, 엔진이 없으면 망망대해에 떠 있는 작은 배에서 우리 현대인들은 불안감과 무력감을 느낀다. 그리고 선조들이 거쳐 간 거리가 어머어마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항해가 아니었다. 역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들이 항해를 나섰던 바다 풍경은 결코 어둠과 미지의 세계가 아니었다. 최초의 뱃사람들은 오늘날 우리보다 바다와 훨씬 더 가까웠다. 바다와 인류 사이에 기술이 한 겹씩 늘어날 때마다 인류는 그만큼 바다로부터 멀어졌고, 수천 년에 걸쳐 쌓아온 경험을 잃고 무지해졌다. 선조들의 배는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 때 보잘것없는 카누와 뗏목뿐이었지만, 그들은 바다에 관한 매우 방대하고 세부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다. 


▲ 19세기 초 피지인이 이용한 돛 단 아웃리거 카누. 11~13세기 남태평양을 항해한 폴리네시아인의 카누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 인류가 태평양과 대서양, 인도양을 수천 킬로미터 항해하는 데는 노와 돛이 있는 튼튼한 선박 이상의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고대 인류는 별을 보고 방위와 위도를 측정했고 풍향이 언제 바뀌는지를 오랜 시간에 걸쳐 확인하며 귀환 가능성을 높였다. 서기 11~13세기 폴리네시아인은 돛 단 카누를 타고 나침반도 없이 수천 킬로미터의 망망대해를 건넜다. 기원전 10세기 안데스인은 오늘날의 에콰도르 해안에서 발사 나무로 만든 뗏목을 타고 수천 킬로미터를 가로질러 마야 문명과 왕래했다.



고대인들에게 바다는 어둠의 심연이 아니라 친숙한 삶의 일부였다


오늘날과 달리 인류는 언제나 바다를 두려워했고 존경을 담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육지와 바다는 확연히 구분되는 경계가 아니라 하나로 어우러진 풍경을 이루었다. 바다는 조상과 초자연적 존재가 지배하는 영역이었다. 고대인이 바다를 신화적 질서 안에 놓고 항해에 제의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인류 최후의 낯선 자연을 육지와 연결된 우주론의 일부로 포섭하려는 것이었다. 고대인들에게 바다는 점점 살아 있고 친숙한 것, 인격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인간과 바다는 정신적으로 연결되었다. 


항해는 바닷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연안 바다를 탐험하는 것은 강과 호수를 건너는 물가에서의 삶을 연장한 것에 불과했다. 연안 바다는 지형지물을 활용하고 수심과 조수의 흐름을 파악하며 물길을 탐사하는 기본적인 항해 기술이 활용되는 장이었다. 


그다음 카누나 뗏목이 육지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는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기원전 1200년 이후 남서태평양에서 라피타인이 카누를 타고 뉴기니 동쪽의 오세아니아 원해까지 진출했다. 더 이후에 인도양에서는 몬순 계절풍을 이용해 홍해와 아라비아, 동아프리카에서 인도 남서부 해안과 그 너머로 항해했다. 기원전 2세기에 이미 그리스인 히팔루스는 아라비아에서 인도까지 직항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15세기 유럽인이 대항해시대를 개막하기 수백 년 전에 이미 북유럽의 노르드인은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거쳐 북아메리카 연안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 모든 영웅적인 항해 이면에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역사의 조명을 받지 못한 연안 항해의 끝없는 움직임이 존재했다. 영구 운동 기관과도 같은 이 교역과 교류의 물결은 인간이 바다로 첫발을 내딛은 이래로 끊이지 않고 이루어졌으며, 이것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태평양 - 지구 상에서 가장 외진 섬들을 식민화한 호모 사피엔스 최후의 팽창


태평양은 광활한 바다이다. 작디작은 섬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고 어떤 섬은 대단히 먼 거리에 외따로 떨어져 있다. 수천 년 전에 이 섬들을 최초로 발견하고 이주한 사람들은 라피타인이다.

여러 고고학 정보를 바탕으로 추정한 결과 인류 최초의 장기 항해는 5만 5천여 년 전 동남아시아 앞바다에서 일어났다. 당시에 해수면은 오늘날보다 낮았으므로 육지 간 거리는 상대적으로 짧았다. 수만 년에 걸쳐 오세아니아 근해(뉴기니 섬 동쪽 앞바다로 비스마르크 제도, 솔로몬 제도를 포함한다)에 사람들의 이주가 완료되었다. 


그러던 중 대단히 뛰어난 항해가이자 식민지 개척자 집단이 나타났다. ‘라피타인’이라 불리는 이 집단은 농경민족이자 해양민족으로 기원전 1200년경부터 장거리 항해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들은 오세아니아 근해에서 동쪽으로 더 멀리 나아가 피지, 사모아, 통가, 바누아투 등 폴리네시아 전역의 무인도를 개척했다. 그들은 지구 상에서 최초로 식량 공급원을 외부에서 들여와 의도적으로 번식시켰다. (라피타(Lapita)라는 명칭은 캘리포니아대학교 인류학자 에드워드 기퍼드가 1952년 뉴칼레도니아 고고학 탐사에서 발견한 유적지에 라피타라는 이름을 붙인 데서 기원했다.)


약간의 휴지기를 거쳐 제2차 대항해가 일어났다. 서기 1000~1300년에 폴리네시아인은 돛을 단 카누를 타고 4천 킬로미터 이상을 항해하여 북쪽의 하와이 제도와 남쪽의 뉴질랜드, 그리고 동쪽으로 이스터 섬(라파누이)을 개척했다. 라피타인의 후손들은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통일한 13세기에 태평양의 머나먼 섬을 모두 정복했던 것이다. 그들은 단 3세기 만에 호모 사피엔스의 10만 년에 이르는 전 세계에 걸친 여정의 마지막 장을 썼다.


어쩌면 그들은 라파누이에서 3,500킬로미터 떨어진 남아메리카까지 항해했을지도 모른다. 폴리네시아인의 남아메리카 발견에는 유력한 증거들이 있다. 그중 가장 명백한 증거는 칠레 해안 유적지에서 발견된 닭 뼈의 미토콘드리아 DNA가 통가와 피지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칠레 해안의 닭 뼈는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인 1321~1407년의 것이었다. 



▲왼쪽이 아웃리거 카누, 오른쪽이 쌍동선으로 된 현대 요트이다. 


그들은 어떻게 인적미답의 대양을 건너 그 먼 거리를 항해할 수 있었을까? 한 가지 비결은 바람이었다. 그들은 몇 달 동안 풍향이 바뀌지 않고 부는 우세풍을 이용했다. 동쪽으로 떠날 때는 무역풍이 잦아드는 시기를 활용하거나 우세한 무역풍의 맞바람을 받으며 나갔다가 돌아올 때는 그 바람을 타고 무사 귀환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매우 보수적이면서도 확실한 귀환 전략이었다. 또 한 가지 비결은 아웃리거 또는 쌍동선으로 변형된 카누였다. 폴리네시아인 고유의 이러한 선박 형태는 먼바다 항해에 있어 안정성과 속도를 모두 충족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해와 별의 위치를 통해 방위를 찾아냈고, 배가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알아냈다. 수만 년에 걸쳐 내려온 항해 경험의 유산과 카누 기술에서의 진보, 육지의 가시거리에서 벗어나 항해할 수 있는 항해술, 장기간 바다에 머무를 수 있는 식량 저장 능력이 없었다면 식민 개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라피타인은 미지의 태평양을 향해 왜 끝없이 앞으로 나아갔을까? 점차 증가하는 인구 압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흑요석과 같은 값나고 귀한 물건을 교역하기 위한 상업적 동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종교적 열정이나 단순한 호기심이었을까? 여정의 동기에 관해서는 이론이 무성하지만, 손위 형제자매를 우대한 사회 조직이 가장 유력한 요인으로 꼽힌다. 폴리네시아 사회는 대대로 맏이가 토지, 재산, 특권적 지식을 독점적으로 물려받았다. 따라서 아우들은 자신의 가계를 새롭게 수립하기 위해 식민지 개척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들은 자식들에게도 양질의 자원을 물려줄 수 있는 새로운 땅을 찾는 대담한 전략을 택했던 것이다.



지중해와 인도양 - 예측 가능한 바람이 만들어 낸 최초의 진정한 지구적 해상무역 네트워크


지중해와 인도양에서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교역 기회를 따라 바다로 나갔다. 기원전 2600년경에 이미 이집트는 레바논산 통나무를 지중해를 통해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었다. 기원전 1000년대에 크레타 섬의 미노스 문명이 동지중해 무역에 참여했으며 그리스, 레바논, 이집트, 북아프리카 연안에 코즈모폴리턴 풍의 항구가 들어서고 활발한 무역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연안 무역은 여유롭게 돌아가는 영구 운동 기관 혹은 짐배들의 발레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양 일대를 항해하고 있는 다우선(dhow)의 모습. 대형 삼각돛의 기다란 활대가 인상적이다. 인도양 일대에서 무역에 종사한 뱃사람들은 안 가까이 붙어 부드러운 몬순 계절풍을 받으며 항해했는데, 대형 삼각돛은 바람에 가까이 붙어서 항해할 수 있어 사각돛보다 유리했다. 


인도양을 둘러싼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강은 각기 고대 문명의 요람이었다. 뱃사람들이 인도양 바다를 해독한 것은 억누르기 힘든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각각의 고대 문명이 목재, 금속, 노예 같은 기본 상품을 다른 지역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도양 일대에 부는 몬순 계절풍은 1년 내내 대체로 온화했으며, 대체로 11~3월에 북동풍이 불고 5~9월에 남서풍이 불었다. 인도양과 예측 가능한 몬순 계절풍은 지중해 세계를 메소포타미아 및 인도와 연결했다. 기원전 100년 전후로 그리스인 히팔루스가 남서풍을 타고 아랍 해안에서 인도까지 직항으로 항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인도양의 상업적인 연안 항해는 멀리 남쪽의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이어져 유리구슬과 같은 인도의 사치품이 남아프리카의 내륙까지 들어와 코끼리 상아나 황금과 교환될 정도였다.



북대서양 - 선조들이 지배하는 바다와 노르드인이 발견한 신세계 빈란드


북해와 북대서양은 남태평양과 같이 항해하기 좋은 평온한 바다가 아니라 대단히 사납고 거친 바다이다. 여기에는 인도양의 몬순 계절풍 같은 주기적인 풍향 변화도 없었다. 대서양은 연안 바다를 항해할 때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곳이었다. 유럽인에게 대서양은 세계의 끝이었지만 결국 인류가 바다와 친숙해지면서 두려움과 미신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9세기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신에게 헌신할 수 있는 땅을 찾아 아이슬란드를 발견했다. 그들의 신앙이 워낙 강렬했기에 너른 대양의 위험은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이후 아이슬란드를 오간 노르드인(바이킹)은 5월에 몇 주 동안 우세한 동풍이 불고 이어서 편서풍이 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항해가 실패할 경우 귀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지구 반대편에서 남태평양 뱃사람들이 미지의 해역을 탐사할 때 이용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전략이었다. 그들 역시 나침반이 없었고 해와 별을 길잡이 삼았다. 노르드인은 고대 노르드어로 모험을 뜻하는 아이빈티르(æfintyr)의 정신을 품고, 권력과 명성 그리고 이동성을 좇아 더 먼바다로 나가 985년경에 북아메리카 동쪽 해안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에 자라는 머루(wild vine)를 따서 새로운 땅을 빈란드(Vinland)라고 이름 붙였다. 


노르드인들의 선장(船葬) 풍습 덕택에 우리는 바이킹 장선(長船)으로 알려진 크고 튼튼하며 빠른 스타일의 선박을 알고 있다. 이 효율적인 배는 이후 노와 돛이 결합된 외해 항해용 선박으로 개량되면서 노르드 항해의 폭발적 성장을 가져왔고, 그 대부분은 서유럽에 대한 침략의 형태를 띠었다. 노르드인의 항해 제국은 11세기 크누트 대왕에 이르러 잉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일부를 아우르는 “북해 제국”으로 정점에 달했다.



북동태평양 - 완벽히 바다에 적응한 인디언의 해양 사회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먼바다로 나가지 않았다.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도 돛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북태평양의 먼바다를 탐험할 유인 동기나 강력한 사회적 이유가 없었다. 북동태평양의 알류샨 열도와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의 인디언은 가시거리 안에 있는 연안 바다에 정통했다. 알류트족의 선조는 적어도 기원전 7000년에 알류샨 열도 바깥쪽 섬에 정착해 있었다. 거칠고 흐린 북태평양에서 지구 상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완전한 형태의 해양 사회가 발전한 이유는 이 지역에 바다사자, 고래, 대구, 연어 등 각종 해양 자원이 매우 풍부했기 때문이다. 알류트족은 수천 년에 걸쳐 환경에 적응하면서 바다에 떠내려 온 유목과 바다사자의 가죽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효율적이고 세련된 수렵용 운송 수단 중 하나인 바이다르카 카약을 만들어 냈다. 바이다르카를 탄 항해자는 신화 속 켄타우로스처럼 배와 한 몸이 되어 거친 북극 바다를 종횡무진할 수 있었다.


▲ 바이다르카 카약에 탄 알류샨족 사냥꾼의 모습.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은 빙하에 깎인 계곡과 무수한 섬, 내륙의 짙은 숲과 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연어를 비롯한 풍부한 해양 자원 덕택에 통나무 카누로 오가는 해양 사회가 번창했다. 이곳 해안은 11가지 어족과 39가지 언어가 분포한, 놀라운 문화적, 언어학적 다양성을 간직한 지역이었다. 18세기 후반 유럽인이 도착할 당시 2만 5천 명의 인디언이 해안을 따라 살고 있었다. 북서부 해안 인디언에게 수평선 너머로 배를 타고 나갈 만한 사회적 강제는 없었다. 부족 간의 분쟁과 불신이 팽배했음에도 새로운 정착지와 식량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사회도 완전히 자급자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찍이 기원전 5000년 이후부터 복잡한 교환 네트워크가 해안 부족 간의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고 있었다. 인류학 현지 조사로 유명해진 인디언의 의례적 축제 포틀래치(potlach)가 이 지역에서 발전했다. 포틀래치는 족장 및 그 친족이 다른 족장들과 부족 구성원을 접대하며 베푸는 행사였다. 부를 독차지하고 싶은 유혹이 충분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포틀래치는 부를 사회 곳곳으로 분배하는 역할과 함께 친족 내에 강한 통합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동태평양 - 바다를 두려워한 고대 문명 마야, 남아메리카 발사 나무 뗏목의 항해


고대 마야 문명은 태평양과 카리브해로 둘러싸여 있었다. 대부분의 마야인이 내륙 고지대에서 바다와 멀리 떨어진 채 살았지만 그들의 정신 세계에서 바다는 우주가 유래한 곳, 초자연적인 힘이 머무르는 ‘불타는 웅덩이’였다. 마야인은 소라고둥과 가시국화조개를 성스러운 물건으로 여겼다. 두 물건이 내는 소리는 마야 문명과 공연과 제의에서 핵심적인 요소였다. 마야인은 이것을 연안 바다에서 채집해 미로처럼 얽힌 수로를 따라 내륙으로 들여왔다. 마야의 연안 무역 네트워크는 북아메리카 남서부에서 터키석을, 중앙아메리카 저지대에서 금을, 멕시코 중부에서 흑요석을 가져왔지만 가장 긴 거리를 이동한 것은 역시 가시국화조개이다. 가시국화조개는 심지어 남아메리카에서 태평양을 가로질러 멕시코 서부 해안까지 이동했다.


가시국화조개 교역은 일찍이 기원전 3000년에 시작되어 2천 년 정도 후에 크게 확장되었다. 안데스인은 오늘날의 에콰도르 해안에서 발사 나무로 만든 뗏목을 타고 수천 킬로미터를 항해해 멕시코로 갔다. 뿐만 아니라 안데스 지역은 고대 세계에서 금속 가공 작업을 발명한 단 두 곳 가운데 하나인데(다른 한 곳은 메소포타미아이다) 발사 나무 뗏목을 탄 안데스인이 중앙아메리카로 건너가 구리 야금술을 전하기도 했다. 이들은 놀랍게도 동쪽 수평선 너머에 긴 해안선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대양을 탐험하는 일에 나서지 않았다. 



15세기 유럽인의 대항해 시대 이전에 인류의 대항해가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미지의 대양을 향해 나아간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인, 인도양 무역을 휘어잡던 아랍의 선장, 포세이돈이 호령한 지중해 바다를 순환한 이집트와 그리스의 배, 약탈거리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노르드인, 황제의 위엄을 알리려 세상에서 가장 큰 배를 타고 출항한 중국의 제독, 바다사자 가죽으로 만든 카약을 타고 북태평양을 누비던 알류트족 사냥꾼, 대구와 청어를 잡기 위해 거친 대서양 바다를 마다하지 않은 유럽의 어부…… 그들은 모두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간 위대한 항해자였다. 『인류의 대항해』는 15세기 유럽인들의 대항해에 가려 역사가 미쳐 조명하지 못한, 광대하면서도 소박한 바다 풍경을 고고학과 인류학을 통해 생생하게 복원해 낸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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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브라이언 페이건(Brian Fagan)

고고학과 인류학계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펨브로크칼리지에서 고고학과 인류학을 전공했다. 1967년부터 2003년까지 캘리포니아대학교 산타바버라캠퍼스에서 인류학 교수로 있었고 현재 명예 교수로 있다. 학생과 일반인을 상대로 수많은 고고학 개론서와 교양서를 집필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중세 온난기를 다룬 『뜨거운 지구, 역사를 뒤흔들다』(2008년)는 『뉴욕 타임즈』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크로마뇽』(2009년), The Attacking Ocean(2013년) 등의 책을 썼다. 

고고학자인 저자가 바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이다. 여덟 살 때 어부였던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항해술을 배웠고 이후 바다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혼자서 GPS 없이 영국에서 미국까지 대서양을 횡단하기도 했다. 『인류의 대항해』에서 저자는 그 자신이 수십 년 동안 뱃사람으로서 대양을 항해한 경험을 곁들여 인류가 왜 바다로 나아갔는지, GPS와 디젤 엔진, 나침반도 없이 어떻게 대양의 머나먼 섬들을 정복했는지를 풍성하게 설명한다. 


옮긴이

최파일

서울대학교에서 언론정보학과 서양사학을 전공했다. ‘바른번역’에서 번역을 공부했고, 역사 분야를 중심으로 해외의 좋은 책들을 소개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 축구와 셜록 홈스의 열렬한 팬이며, 제1차 세계대전 문학에도 관심이 많다. 옮긴 책으로는 『시계와 문명』, 『대포, 범선, 제국』, 『아마존』, 『근대 전쟁의 탄생』, 『십자가 초승달 동맹』,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등이 있다.



추천사


항해가이자 고고학자, 역사가로서의 재능을 종합해 브라이언 페이건은 대양과 먼바다를 건넌 최초의 뱃사람들이 세계 곳곳의 해안을 펼쳐 보이는 매혹적인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누구든 더 매력적인 선장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지중해사 교수 데이비드 아불라피아, 『위대한 바다』 저자


아주 재미있다. 페이건은 그 자신의 해박한 항해 경험에서 얻은 관찰을 이 책 곳곳에 효과적으로 배치해 놓았다. 그는 고대 뱃사람들이 바다의 다양한 상태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들을 처음으로 바다로 이끈 것이 무엇인지를 심사숙고했다. 페이건은 해상 문화가 발달한 세계 각지에서 바다와 기후, 인간이 복잡하게 얽혀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매우 매혹적으로 그렸다. 고고학과 역사학을 조금이라도 알고 흥미를 느끼는 독자라면 누구든 이 훌륭한 책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라이브러리 저널(Library Journal)』


초창기 인류에 관한 일화, 고고학적 해석, 먼 과거로부터 재구성한 소설적인 장면 사이를 항해하면서, 역사적 상상력이 보태진 이 소금기 어린 작품은 세계 곳곳을 여행한다. 모아이 조각가를 이스터 섬으로 실어 나른 미크로네시아의 아웃리거, 레바논의 삼나무를 파라오에게 가져다준 이집트의 목재 바지선, 트로이 성문으로 그리스 영웅들을 데리고 간 검은 배…. 페이건은 이 책에서 선조들의 성취에 애정 어린 찬사를 보낸다. 

―『퍼블리셔스 위클리(Publishers Week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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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 정복과 착취, 경외와 공존의 5백 년』

존 헤밍 지음 |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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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최고의 아마존 탐험가가 쓴 ‘지구의 허파’ 이야기

 

아마존 토착 원주민들의 태곳적 확실성과 상대적 평온함, 그리고 고립은 1500년을 기점으로 영원히 산산조각 났다. 유럽인들은 아마존에 대한 무지와 오만을 증명하는 역사를 써내려갔고, 정복과 착취의 대상으로서 아마존 자연과 원주민들은 잔혹한 시대를 살아야 했다. 그러나 아마존에는 그곳 자연과 원주민에 대해 한없는 경외와 애정을 품고서 선지적인 기록을 남긴 사람들도 있었다. 50여 년 동안 아마존을 탐험하고 연구한 아마존 전문가 존 헤밍은 아마존 곳곳에 남겨진 도전적인 탐험가들, 열정적인 선교사들, 탐욕스러운 고무 부호들, 아마존을 사랑했던 자연학자들, 원주민 보호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그 강과 숲만큼이나 거대한 5백 년의 역사를 풀어놓는다. 

 


 



70여 컷의 화보 수록


 

 

이 책은 아마존의 거의 모든 역사를 다룹니다. 유럽인에 의한 아마존 정복의 역사, 탐험의 역사, 개발과 환경 파괴의 역사, 원주민 수난과 권익 운동의 역사, 자연과학, 고고학, 인류학에 의한 재발견 등 아마존에 관한 거의 모든 주제가 소개됩니다. 스스로 탐험가이기도 한 저자 존 헤밍은 그동안 제분야가 축적한 아마존에 관한 지식과 본인의 50년 탐험을 토대로 아마존의 방대한 역사를 보여줍니다.


생명의 나무, 아마존

위성사진으로 보면 아마존 강은 거대한 나무를 옆으로 뉘어놓은 형상입니다. 잔가지들이 큰 가지와 만나고 그것들은 다시 결절을 만들고 커지면서 거대한 가운데 몸통으로 흘러갑니다. 몸통은 아마존 강 본류를 말합니다. 본류는 대략 적도를 따라 안데스 산맥에서 대서양까지 남아메리카를 가로질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릅니다. 가지는 주요 지류를 말합니다. 이 가지들 중 십수 개는 유럽의 그 어느 강보다도 큽니다. 잔가지들은 총연장 수십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시내들, 아마존 수계에 물을 공급하는 모세혈관들을 말합니다. 지구상에 비교할 바 없이 다양한 생물 종들이 이 ‘생명의 나무’를 젖줄 삼아 살아갑니다. 


아마존 강 본류의 총연장은 7,483킬로미터로 6,695킬로미터로 알려진 나일 강보다 깁니다(2001년 갱신). 아마존 강과 주요 지류에는 대양을 오가는 외항선들이 드나들 수 있는데, 그 길이는 무려 2만 2천 킬로미터입니다. 아마존 분지의 면적은 690만 제곱킬로미터이며, 미국의 4분의 3, 한국의 70배에 달하는 이 땅 거의 전부가 강과 숲으로 이루어진 천혜의 자연입니다. 아마존 강이 대양에 쏟아내는 담수의 양은 전 세계의 수량에 비교해 20퍼센트에 해당하고, 그 아래 여덟 개 강의 수량을 합친 것과 같습니다.


이곳에 전 세계 동식물 종의 30퍼센트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민물 어류의 30퍼센트(3,000종), 81종의 영장류(그중 69종은 아마존에만 서식), 427종의 포유류(그중 173종은 아마존에만 서식), 406종의 양서류(그중 348종은 아마존에만 서식), 1,300여 종의 조류(그중 260여 종은 아마존에만 서식), 그리고 수백만 종을 넘어 어림조차 불가능한 곤충과 미생물의 보금자리입니다. 식물의 경우, “경도와 위도를 1도 옮길 때마다 식생이 절반씩 바뀐다.”는 식물학자 리처드 스프러스의 말처럼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아마존 파괴의 역사

미국의 지리학자 로이 내시(Roy Nash)는 1920년대까지의 아마존 개발을 총평하며 “지난 4백 년간 포르투갈인과 브라질인들이 야금야금 베어 먹은 양으로는 이 매머드 같은 녹색 치즈의 표면에 구멍 하나 만들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그때까지 인간이 아마존에 미친 영향이 극히 미미했다는 의미였지만 동시에 인간이 아마존을 산업적인 용도로 개발할 능력이 못 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1940년대부터 아마존을 소유한 국가들이 그곳을 열어젖히려는 노력을 경주하면서, 아마존 삼림은 점차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가속하며 파괴되기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비행기 취항을 위한 활주로가 숲 곳곳에 만들어졌습니다. 비행기는 이전에 벽과 같던 아마존 숲을 뛰어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아마존은 전기톱을 맞아야 했습니다. 모터가 달린 전기톱은 단 몇 분 만에 거대한 나무를 베어냈고, 숲사람들의 화전 관습과 결합하여 아마존은 그동안의 위엄을 상실한 채 순식간에 인간들 앞에 엎드리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적은 고속도로였습니다. 주요 도시를 잇는 고속도로가 처음에는 아마존을 빙 둘러서, 그리고 점차 숲을 관통하여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지를 치듯 주변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위성사진을 보면, 고속도로 주변으로 마치 살을 발라낸 생선 가시 같은 몰골이 된 숲이 보입니다.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체계적으로 파괴되는 숲. 브라질 혼도니아 주의 2007년 8월 현재 위성사진.


아마존 파괴를 요구하는 힘

오늘날 전 세계는 아마존 숲이 생산하는 세 가지 산물을 목마르게 원합니다. 그것은 목재, 육류(소고기), 콩입니다. 아마존은 이것들을 생산하기 위해 점점 더 빠르게 파괴됩니다.


국제 목재 시장에서 목재 수요가 증가하면 벌목업자들은 아마존으로 몰려듭니다. 아마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마호가니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낼 때마다 다른 나무 27그루가 동시에 파괴됩니다. 나무 한 그루마다 수천 개체의 생명이 서식하고 있는데, 모두 나무와 같이 희생됩니다. 벌목꾼들이 나무 한 그루를 쓰러뜨리면 덩굴식물로 연결된 이웃 나무들까지 같이 쓰러져서 추가적으로 나무들이 죽습니다. 그다음 트랙터나 스키더가 나무를 끌고 가는 길, 통나무가 트럭에 실리는 적재 장소, 마지막으로 고속도로까지 이어지는 미로처럼 뻗은 길 모두가 삼림 파괴의 현장입니다.


20세기 말부터는 가축 방목용 초지를 만들기 위해 삼림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는 이것이 아마존 삼림 파괴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브라질 군사정부는 정책적으로 20년 동안 숲을 가축 방목지로 전환하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했고, 의도대로 브라질은 주요 소고기 수출국이 되었습니다. 소고기 증산의 대부분은 아마존 숲을 파괴한 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불탄 숲에 들어서는 소 떼.


또 하나는 콩입니다. 콩은 가축의 사료로 쓰이는 주요 작물입니다. 세계 인구가 증가할수록 그리고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육류 소비가 증가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콩 수요가 치솟습니다. 세계 인구는 1900년 15억 명에서 단 한 세기 후에 65억 명이 되었고 2050년까지 90억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마존의 광대한 삼림을 밀어내고 콩과 소고기 공급을 늘리라는 압력은 점점 거세질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과 인도가 브라질의 목재와 소고기, 콩의 주요 구매자입니다.


'지구의 허파' 아마존을 지켜야 하는 이유

아마존은 종종 ‘지구의 허파’로 불립니다. 2000년 브라질에서 실시된 대규모 생물권-대기 실험(Large-Scale Biosphere-Atmosphere Experiment, LBA)에 따르면, 아마존은 한 해 평균 5억 6천만 톤의 탄소를 붙잡아둡니다. 그리고 전 세계 산소의 20퍼센트를 생산합니다. LBA의 과학자들은 만약 아마존 전역의 숲이 사라지면, 대기에 7백억 톤에 달하는 탄소가 추가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2011년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은 382억 톤이며, 한국의 탄소 배출량은 7억 4천만 톤.)


한편 아마존은 그 자체로 기후 조성자입니다. 아마존의 열대우림은 자원을 토양이 아니라 거대한 생물자원(biomass)에 저장합니다. 아마존 식물들은 왕성한 생장 활동을 통해 토양의 양분을 남김없이 빨아들입니다. 그리하여 나무가 쓰러지고 드러난 토양은 관목만 무성한 초지로 바뀌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아마존 숲은 그 지역을 지나는 비구름을 북쪽의 카리브 해와 세계적인 곡창지대인 남쪽의 평야 지대로 흩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아마존 숲이 사라지면, 인간의 주요 거주 지역들은 상시적인 가뭄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도덕적 쟁점이 남아 있습니다. 자원을 마구잡이로 쓰는 인간이라는 종 하나가 우리와 이 행성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다른 수백만 종의 서식지와 생명을 파괴할 권리가 있을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 지구의 허파 아마존



아마존 탐험의 역사

이 책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아마존 탐험의 역사입니다. 아마존에 최초로 도착한 사람은 1500년 에스파냐의 비센테 야네스 핀손이었습니다. 그는 아마존 강 어귀를 탐사하고 원주민 부족과 조우하여 그들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후일 브라질을 차지하는 포르투갈인도 야네스 핀손보다 몇 달 늦게 아마존에 상륙했습니다. 세 번째로 아마존에 등장한 서구인은 유명한 아메리고 베스푸치와 그가 속한 선단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아마존 탐험은 그보다 40년쯤 뒤에 시작됩니다.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제2의 엘도라도를 찾아서 무작정 안데스 고원을 내려와 아마존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중 곤살로 피사로와 그의 부하였던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의 탐험 기록은 아주 구체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레야나는 1541년부터 1년에 걸쳐 아마존을 일주하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비록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최초로 아마존을 일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기록에 따르면, 16세기 당시 아마존 강 양편의 둑에는 각양각색의 부족 집단이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다채로운 모습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19년 후 두 번째로 아마존 강을 일주한 탐험대가 등장합니다. 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로 유명한 우르수아-아기레 원정대가 그들입니다. 이들은 10개월에 걸친 살인과 약탈, 제국에 대한 반란으로 점철된 처절한 사투 끝에 아마존을 일주했습니다.


비교적 최근의 탐험가 중에는 미국의 전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있습니다. 그는 8주에 걸쳐 1천 킬로미터가 넘는 험난한 강을 일주했습니다. 그는 오늘날 브라질의 혼도니아 주에 있는 수원지로부터 후일 그의 이름이 붙게 될 미탐험 강(당시에는 리우 다 두비다(‘의심의 강’이라는 뜻), 후일 루스벨트 강)을 탐험하고, 그다음 아리푸아낭 강을 내려가 마데이라 강까지 간 후 마나우스 인근에서 아마존 강 본류에 도착했습니다.

▲ 카누를 탄 아마존 원주민들이 배를 타고 온 최초의 유럽인들을 맞고 있다.


왜 서구인은 아마존 정글에서 무능해지는가

아마존에 들어선 콘키스타도르들은 유럽 최고의 전사 집단이었습니다. 말과 강철검을 보유한 그들은 카리브 해 지역과 안데스 산맥 인근의 개활지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마존 삼림으로 내려가자마자 그들은 대책 없이 무능해졌습니다. 문명 유럽인들이 어째서 세계에서 가장 다양성이 두드러지는 생태계에서 생존해나가는 법을 결코 익히지 못했는지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원주민들은 어렸을 때부터 숲속에서 사냥과 낚시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식량과 약초, 자재로 쓸 만한 수백 가지 식물의 잠재적 가치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한 인종은 더듬더듬 나아가며 살갗이 찢어지고 벌레에 물리고 굶어 죽어간 반면 다른 인종은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건강을 유지하며 초목 사이를 자유롭게 누볐습니다.


유럽인들은 탁 트인 개활지에 익숙합니다. 서구인들은 오로지 이빨과 발톱에 의지해 발가벗은 채로 정글에 놓이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아마존에서 산다는 것은, 자신이 직접 사냥하고 낚시하고 먹을거리를 채취하러 다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잉카족은 기니피그와 라마라도 있었지만, 그들과 달리 진짜 숲 한가운데 살았던 아마존 원주민들에게는 가축 같은 게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최초 도래 시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럽인은 결코 아마존에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마존에서 생존하기 위해 일단 정복한 다음 그들 모국의 문명과 동식물을 이식해야 했고, 영속적인 식량 생산과 상업, 심지어 탐험과 군사 활동을 위해 전적으로 원주민 노동력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유럽인들은 숲에서 언제나 곤란에 빠져 허둥거렸다. 이 그림에서 유럽인 여행객은 카누까지 인디오의 등에 업혀 간다.

 

총, 균, 쇠와 원주민 수난

서구인 도래 이후 아마존 원주민들은 잔혹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최초 탐험의 시기에는 낯선 이방인들의 총포와 금속 날에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의 쟁탈전 시기에는 총포 외에 그들이 구사하는 분할 통치 전략에 말려들어 이방인들과 한편이 되어 이웃의 적대 부족을 학살하고 노예화하는 첨병이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원주민을 숲과 강둑에서 끌어내어 선교 마을에 정착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은 전통을 박탈당하고 이방인들이 가져온 병원체에 면역 없이 노출되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정착민들이 마련한 체제 안에서 노예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절정은 아마존 고무 붐 시기였습니다. 원주민들은 고무나무가 자라는 곳이면 어김없이 노예 노동자로 편입되었고, 모든 인권을 박탈당한 채 혹사 끝에 죽거나 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마존에 투영된 인간들 꿈의 역사

서구인들은 울창한 아마존을 보며 다양한 환상을 품었습니다. 그들은 아마존에서 막대한 상업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 꿈꾸었습니다.


16세기 탐험가들은 제2의 엘도라도를 꿈꾸며 대책 없이 아마존 숲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숲이 제시하는 곤경 앞에 좌절로 점철된 기록을 남겼습니다. 향신료가 교역품으로 각광받던 시기에는 금 대신 계피나무를 찾아 정글을 헤맸습니다. 결국 최초의 유럽인들은 아마존에서 상업적으로 가치 있는 그 어떤 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따금 이뤄진 교역에서 붉은 염료의 재료로 쓰이는 브라질나무를 주로 가져갔고, 이것이 새로운 땅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을 교화하여 그들을 진정한 신의 자식, 그들의 공동체를 신정 국가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을 유럽식 정주 문화 안에 가두었고,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정복자들에게 이용당해 원주민들을 숲에서 끌어내 합법적으로 노예화하는 역할을 맡곤 하였습니다. 일부 선교사들은 정착민들이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는 세태를 강력히 비판하는 등 인도주의적이었지만, 원주민 공동체가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고, 전염병으로 떼죽음당하는 원주민들을 지켜보는 것 외에 아무런 수단도 갖지 못했습니다.


아마존이 처음으로 상업적 가치를 갖게 된 것은 19세기 말 고무가 산업 혁명의 핵심 소재로 부상하면서였습니다. 고무나무가 자라는 곳마다 고무 농장이 들어섰고 신흥 고무 부호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고무 부호들은 고무 제국 건설을 꿈꿨습니다. 그들은 고무 수송을 위해 숲을 관통하는 철도를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비용과 수많은 인명만 잃고 사업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최악의 상황은 고무 종자가 유출되어 동남아에서 대량 생산되면서 그들의 고무가 경쟁력을 상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1927년 헨리 포드는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 아마존 숲에 거대한 고무 플랜테이션을 거느린 도시를 건설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주요 고무 산지가 다른 열강의 통제 아래 놓여 수급이 자유롭지 않자 직접 고무 도시 건설을 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동남아의 품질 좋은 고무나무를 아마존에 역수입하여 수백만 그루의 고무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잎마름병이라는 전염병에 걸려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결국 헨리 포드는 1945년까지 단 한 번도 고무를 채취하지 못한 채 고무 농장을 헐값에 매각했습니다.



 포드란지아 폐허. 한때 아마존에서 가장 높은 인공물이었던 물탱크도 보인다.

 

21세기 아마존 원주민

1988년 한 카야포족 여성은 그들 거주지 인근의 알타미라에 들어서는 댐 건설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의 '빈곤'을 덜어주겠다는 소리는 하지 마라. 우리는 가난하지 않다. 우리는 브라질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비참하지 않다. 우리는 인디오이다." 우리는 원주민들에 대해 낙관주의를 견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인디오들은 이미 외부 사회와 접촉하고 그들 밖의 세계가 어떻게 사는지 충분히 보았습니다. 1982년 샤반테족 족장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등 일부 부족은 외부 문명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족들은 외부를 닮기보다 그들 삶의 방식으로 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늘날 브라질 국민들은 원주민들이 그 누구보다 뛰어난 숲 지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존과 원주민 보호에 찬성합니다.


거대한 족장사회 vs 소규모 거주 집단

서구인에 의해 파괴되기 전 원주민들의 공동체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에 대해 고고학자들은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원주민들의 삶의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강둑사람들은 강둑과 바르제아라고 불리는 우기가 되면 침수되는 풍요로운 지역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했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농사와 양식을 하며 정주 생활을 했습니다. 숲속사람들은 테라 피르메(terra firme)라고 부르는 비침수 지대에 살았던 사람들로 주로 사냥과 수렵, 반(半)유목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표적인 논쟁은 아마존 원주민에 관한 두 권위자, 베티 메거스(Betty Meggers)와 애너 루스벨트(Anna Roosevelt)의 논쟁입니다. 루스벨트는 유럽인이 도착하기 2천 년 전부터 이미 아마존에는 거대한 “족장 사회”가 있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녀의 근거는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했음을 증명하는 인공 둔덕의 존재, 계층 사회였음을 증명하는 정교한 도기 문화, 최초 시기 에스파냐인들이 관찰한 끝없이 이어진 마을과 그 크기에 대한 기록, 테라 프레타라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비옥한 흑색토 지대의 존재 등입니다. 그녀는 1991년 마라조 섬에서만 수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에 신격화된 족장과 그 신하와 노예들로 이루어진 10만 명이 넘는 규모의 원주민 사회가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메거스는 “아마존 제국이라는 죽지 않는 신화”라고 비판하며, 루스벨트가 원주민들의 산발적인 거주 흔적을 집산적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외에도 메거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들은 인간 거주 흔적이 대개 10킬로미터를 넘지 못하였으며, 최장 50킬로미터 정도라고 지적했습니다.



▲ 비옥한 흑색토 지대. 그리고 한때 인간들의 거주지였음을 증명하는 수백만 점에 달하는 도기 파편들. 

과거 이 땅에는 어떤 인간 사회가 존재했을까?

 

아마존을 사랑한 사람들

열정적인 선교사들과 고고학자들 외에 자연과학과 인류학은 아마존에 대한 재인식이 가장 먼저 또 편견 없이 이뤄진 분야였습니다. 자연학자들은 아마존 전역을 누비며 점차 아마존의 가치를 발견해나갔습니다. 이 책에서는 최초의 과학 탐사부터 알렉산더 폰 훔볼트, 요한 밥티스트 폰 슈픽스, 카를 프리드리히 필립 폰 마르티우스, 찰스 워터튼, 헨리 월터 베이츠,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리처드 스프러스, 그리고 최근의 리처드 에번스 슐츠에 이르기까지 자연학자들이 남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편 초창기 계몽주의에 경도된 관찰자들과 달리 편견 없는 위대한 인류학자들 역시 아마존에 출현합니다. 카를 폰 덴 슈타이넨, 쿠르트 니무엔다주 등이 어떻게 원주민들 속에서 살았으며 모험을 했는지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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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존 헤밍(John Hemming)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아마존 탐험가 중 한 명이다. 캐나다인으로서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총무이사를 맡아 21년 동안 이끌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워릭대학교와 스털링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1년 브라질 중부를 탐험하는 이리리 강 원정대의 일원으로 아마존에 처음 발을 디딘 이래, 50여 년 동안 아마존을 탐험하고 연구하였다. 그동안 5개 이상의 미접촉 부족을 발견한 것을 포함해 40개가 넘는 원주민 부족을 방문하였고, 미탐험 지대를 탐사하는 수많은 연구 원정대에 참여하였다. 브라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가장 많은 원주민 부족을 방문한 서구인으로 평가받는다. 『잉카 정복(The Conquest of the Incas)』(1970년)으로 크리스토퍼 도서상과 여러 상을 수상하였고, 이후 30여 년에 걸쳐 아마존 원주민 역사에 관한 3부작 『붉은 황금Red Gold』(1978년), 『아마존 개척 시대(Amazon Frontier)』(1985년), 『죽을지언정 죽이지 말라(Die If You Must)』(2004년)를 집필하였으며, 아마존 연구에 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브라질 기사 훈장을 받았다. 2008년에 이전까지의 연구를 아울러 이 책을 집필하였다.


옮긴이 최파일

서울대학교에서 언론정보학과 서양사학을 전공했다. ‘바른번역’에서 번역을 공부했고, 역사 분야를 중심으로 외국의 좋은 책들을 소개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 축구와 셜록 홈즈의 열렬한 팬이며, 1차 세계 대전 문학에도 관심이 많다. 옮긴 책으로는 『근대 전쟁의 탄생』(2011년), 『스파르타쿠스 전쟁』(2011년), 『십자가 초승달 동맹』(2010년), 『대포, 범선, 제국』(2010년), 『트로이 전쟁』(2010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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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정복과 착취, 경외와 공존의 5백 년』

존 헤밍 지음 |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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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강과 생명의 숲, 그 안에서 펼쳐진 사람들의 이야기



알려진 왕국도 없고, 짙푸른 녹음만 한없이 이어져 있는 듯한 곳.

그런 아마존에도 거대한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2013년 3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아마존의 거대한 5백 년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 

『아마존: 정복과 착취, 경외와 공존의 5백 년』이 출간됩니다!


존 헤밍의 열정적인 이야기는 아마존 강의 거스를 수 없는 물살처럼 독자들을 휩쓴다.

- 파이낸셜타임즈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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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2일 콜롬비아의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은 콜롬비아의 남쪽 끝, 아마존의 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푸투마요 강의 라 초레라를 방문합니다. 그리고 그곳의 원주민들인 위토토족, 오카이나족, 보라족, 우이노나족, 미라냐족, 노누야족, 안도케족의 대표들 앞에서 1백 년 전 그 땅에서 벌어졌던 원주민 잔학상을 사과했습니다. 과거 원주민들은 그곳에 설립된 페루아마존 회사의 노예 시스템에 편입되어 일해야 했고, 1913년까지 무려 10만 명 이상의 원주민이 노동과 학살로 목숨을 잃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세기의 첫 십 년은 고무 붐에 힘입어 아마존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렸던 시기입니다. 고무나무가 자라는 땅마다 고무 사업소들이 들어섰고 숲의 질서가 급속도로 노동 착취를 목적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농장주들은 근처의 원주민을 강제로 노예(혹은 그에 준하는 노동자)로 만들어 고무를 채취하도록 했습니다. 노다지를 맞은 농장주들은 순식간에 부호가 되었습니다. 정부 당국의 치안력은 광대한 아마존 숲을 관리하기에는 턱없이 미미했고, 그 틈새에서 고무 부호들은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합니다.


그중 푸투마요의 라 초레라(급류라는 뜻)는 당시 고무 부호들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았던 훌리오 세사르 아라나란 자의 근거지였습니다. 그는 그곳에 페루아마존 회사 산하의 고무 사업소들을 여럿 두었습니다. 당시 푸투마요 강에는 콜롬비아 고무 세력과 페루(아라나) 고무 세력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아라나는 페루 정부에 군대를 요청해 콜롬비아 고무 세력을 '총'으로 몰아냅니다. 그리고 '총'으로 그곳을 통치합니다. 그렇게 아라나는 푸투마요에서 페루 세력 확대의 첨병을 자임하며 마침내 푸투마요 제국이라 불릴 만한 사업장을 거느리게 됩니다.


원래 고무 붐 초기만 해도 원주민들은 고무를 소량 채취한 것들을 콜롬비아인들에게 팔곤 했습니다. 그러나 아라나는 그러한 고무나무 숲 근처의 원주민들, 즉 위토토족과 보라족 원주민 등을 자신의 고무 노동자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상 노예 노동 시스템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그의 왕국 아래 놓인 원주민들은 "현대에 발생한 잔학 행위 가운데 가장 끔찍하다" 할 만한 잔혹의 시기를 살아갑니다. 숲 바깥의 세상은 고무 농장의 잔학상을 알지 못했고, 원주민들의 처우는 나아질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월터 하든버그라는 한 용기 있는 젊은이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세계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영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훗날 하든버그의 고발을 확인하기 위해 영국의 외교관 로저 케이스먼트가 아마존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는 아마존의 한 고무 사업소를 조사하고 난 후 어느 날 일기에 다음과 같은 소회를 남깁니다.


케이스먼트는 원주민들의 아름다움에 무척 감탄했다. 그는 보라족 남자들을 ‘키나 몸집이 크지는 않지만 대단히 우아하고 늘씬하다. 그들은 마치 기계처럼 흐트러짐 없이 걷고 …… 많은 이들이 비록 어디를 봐도 근육이 두드러지게 발달하지는 않았지만 강한 팔, 아름다운 허벅지와 다리, 보기 좋은 사지를 갖췄다. 여유로운 야생의 삶의 시절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그야말로 두루두루 튼튼하고 완벽하게 만들어진 숲의 자식들이었다.’고 묘사했다. ……  ‘반면 그들을 억압하는 이들을 보라. 역겹고 흉악한 얼굴들, 음험하고 잔인한 입술, 음탕한 입과 육욕에 가득 찬 튀어나온 눈. 선행이 불가능한 인간들이다.’ 회사의 대리인들은 육체노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 한줌의 살인자들이 문명의 이름으로, 그리고 영국 신사들과의 대단한 친분으로 위장하고서, 그들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타고난 착한 사람들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케이스먼트는 아마존에 발을 딛기 전에 콩고에서 벌어진 불법적인 노예제와 인권 유린 실태를 이미 서구 사회에 폭로한 바 있는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이번에는 아마존에 있는 "페루아마존 회사"와 그것의 푸투마요 강 주변 고무 사업장을 조사해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아마존으로 건너간 케이스먼트는 독자적인 채증 작업을 실시하여 그곳의 끔찍한 실태를 낱낱이 기록합니다. 위 글은 그 와중에 그가 느꼈던 비애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월터 하든버그가 찍은 가슴 아픈 사진. 위토토족 여자들이 쇠사슬에 묶여 있다.


아라나의 푸투마요 제국이 한창 번창하던 1907년, 월터 하든버그라는 한 미국인 청년이 고무 붐이 야기한 철도 건설 붐에 참여하고자 친구와 함께 아마존으로 향합니다. 그는 배를 타고 푸투마요 강에 도착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하필 아라나에게 쫓겨난 콜롬비아인을 만납니다. 여관주인이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그를 따라 본격적으로 아라나의 푸투마요 제국을 모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라나의 사업장에 진입하자마자 총포 세례를 받습니다.


탐조등이 그들의 카누를 비추었고, 그 작은 배를 침몰시키라는 명령과 함께 일제 사격이 쏟아졌다. 하든버그와 그의 동행은 마치 영화 《아프리카의 여왕》에서 …… 험프리 보가트와 캐서린 헵번이 꼼짝없이 당한 것처럼 완전히 제압당했다. 이키토스호로 다가오라는 명령을 받은 하든버그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배 위로 홱 끌어올려졌고 페루 군대의 아르세 베나비데스 대위와 …… 커피색 피부의 병사들, 선원들, “문명화 사업을 하는 회사”의 직원들에게 아주 비열한 방식으로 발길질과 구타, 모욕을 당했다. …… 말 한마디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푸투마요 악의 제국을 세상에 폭로한 월터 하든버그(왼)와 그 제국의 주인이었던 훌리오 세사르 아라나(오)


당시 서구인들은 원주민들을 흔히 무능하고 게으른 인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존』을 보면, 당대의 석학이든 열정적인 선교사든 아니면 원주민을 부려먹는 사람이든 그들의 관찰은 대개 인종적 편견을 드러냅니다. 하든버그 역시 아마존에 막 도착했을 때는 당시 서구인들이 흔히 그랬듯이 무기력한 원주민이란 인상을 공유했습니다. 그러나 하든버그 본인에게 또는 같은 서구인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를 보면서, 또 원주민들에 대한 잔인한 통치를 목격하면서 점점 생각이 바뀝니다.


엘 엔칸토에서 하든버그는 야위고 말라리아에 걸린 남녀들이 보트에서 짐을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얼마 안 되는 양의 마니오크 가루와 때때로 정어리 통조림 4분의 1을 받았다. ‘이것은 그들이 하루를 버티는 양으로, 그들은 하루 24시간 가운데 16시간을 가장 힘든 노동에 바친다. ……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움직이지 못한 채 그리고 고통에 빠진 그들을 도와줄 사람도 없이 집 주변과 인근 숲에 쓰러져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광경이다. 이 가련하고 비참한 사람들은 치료도 받지 못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추위와 비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가 결국 죽음으로 고통에서 해방된다. 그러면 가족이나 친지들이 그들의 차가운 시체를 강으로 날랐고 …… 탁하고 누런 카라-파라나 강물이 말없이 그들을 뒤덮었다.’ 하든버그는 이 ‘지속적이고 악랄한 범죄의 카니발’에 격분했다.


그리하여 아직 어리고 변변찮은 젊은이에 불과했지만 하든버그는 악의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신이 뭔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하든버그는 아라나에게서 해고당한 사람들, 그나마 인간적인 양심을 간직한 직원들, 그리고 희생자들을 상대로 집요하게 증거를 수집합니다. 그리고 언론에 제보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무시당하거나 아라나에 의해 훼방당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페루의 한 언론이 그가 수집한 증거를 기사화합니다. 끔찍한 묘사로 가득차 있습니다.


 고무 붐 시기 많은 원주민들이 마체테에 난자당했다. 마체테는 넓고 무겁고 날이 하나인 검보다 짧은 무기로 아마존 밀림을 탐험하기 위한 필수품 중 하나이다. 서구인이 최초로 도래한 시기부터 수풀을 헤쳐나가는 용도로 애용되었다. (사진의 인물은 본문과 관련이 없음.)



『라 펠파』는 아라나의 구역 소장들 …… 이 어떻게 모든 구역의 인디오마다 5아로바(75킬로그램)의 고무 할당량을 부과했는지 가르쳐주었다. 인디오들과 그의 아내들, 아이들이 이 말도 안 되게 무거운 양의 고무를 힘겹게 들고 와 무게를 달았다. 바늘이 요구한 양을 가리키면 그들은 기뻐서 웃었다. 그러나 바늘이 정해진 눈금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그들은 엎드려서 처벌을 기다렸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올 때까지 채찍으로 50대를 맞거나 아니면 마체테로 난자당했다. 이 야만적인 광경은 나머지 사람들,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자행되었다.’ 


훌리오 무리에다스라는 증인은 노르만드의 사업소 라 초레라에서 한 인디오가 도망치면 ‘그들은 그의 어린 자식들을 잡아다가 손발을 묶어 매단 후 불 위에 구우면서 아버지가 어디에 숨었는지 실토하게 고문한다.’고 말했다. 무리에다스는 고무를 충분히 갖고 오지 않은 인디오들이 ‘총에 맞거나 마체테로 손발이 잘린 후 집 밖으로 내던져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부족장 네 명이 매질을 당하는 것도 보았다고 보고했다. 쿠요 족장은 ‘채찍에 맞아 죽었고 다른 족장들은 채찍질을 당한 후 여러 달 동안 쇠사슬에 묶여 있었는데 모두가 부족 사람들이 회사에서 정한 양만큼 고무를 가져오지 않은 “죄” 때문이었다.’


고무 농장에서 일하는 원주민들에게는 할당량이 부과되었고, 그것이 학대의 주된 명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고무 사업소 소장들의 원주민 학대와 학살은 본질적으로 유희이자 그곳의 문화 그 자체였습니다. 


노르만드는 나이가 지긋한 여자 세 명과 그들의 두 딸에게 다가가 나머지 부족 사람들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습격자들을 피해 숲속으로 뿔뿔이 달아났다. ‘그러자 노르만드는 마체테를 집어 들어 그 불운한 다섯 명을 아주 태연하게 살해했다.’ 시체는 집 근처에 내버려졌고 곧 노르만드의 개들이 달려들어 시체를 갈가리 물어뜯었다. ‘거의 매일 아침 토막난 팔이나 다리를 입에 문 개들이 이 괴물의 머리맡에 나타났다.’ 나머지 포로들은 나무둥치로 만든 차꼬에 채워졌고 노르만드는 그들에게 아무런 음식도 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내 ‘그들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고 고통과 절망에 찬 비명을 토해냈다. 그럴 때마다 노르만드는 마체테를 집어 들어 그들을 난자했다.’ 3주 후, 또 다른 무리가 족장과 그의 가족을 끌고 왔다. 왜 그의 부족이 고무를 원하는 만큼 가져오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자 족장은 요구량이 너무 많아서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이 대답에 노르만드는 족장의 손과 발을 쇠사슬로 묶은 후 그 불행한 희생자 주위로 장작단 세 개를 갖다 놓도록 명령했고 …… 그가 직접 …… 거기에 불을 붙였다.’  


오거스터스 월콧은 케이스먼트에게 아우렐리오 로드리게스의 명령에 따라 한 인디오가 불태워지는 것을 목격한 일을 이야기했다. ‘“그는 카우초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달아났고 한 무차초(소년 병사)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그의 두 팔과 무릎 아래 두 다리를 자르고 그의 몸뚱이를 불태웠습니다.” 질문: “그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까?” 답변: “예,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 질문: “그가 살아 있었다는 게 확실합니까? …… 그 사람들이 그를 불속에 던졌을 때 말입니다.” 답변: “예, 살아 있었습니다. 확실해요. 그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눈을 뜨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위와 같은 증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아마존』 책에도 20여 건이 넘는 증언들이 발췌되어 1900년대 초 아마존 푸투마요 강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모두 하든버그의 채증 작업으로부터 기록되기 시작한 것들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것들은 더 많았을 겁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증언들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아라나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든버그는 점차 아마존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영국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영국에서도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든버그는 아라나를 중상하는 모리배로 치부됩니다.


도시는 아라나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의 인척이 그곳의 시장이었고 그 자신은 상공회의소의 회장이었으며 그의 가족과 직원, 대리인을 통해 많은 활동을 지배했다. …… 하든버그는 런던에 도착하자 세인트판크라스 역 맞은편에 숙소를 정하고 신문사들을 찾아갔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어느 편집장도 스물두 살짜리 농장 출신 미국 청년의 터무니없는 고발을 다루려 하지 않았다. 그들 눈에 하든버그는 머나먼 아마존 정글 구석에서 참상이 자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 영국 지도층 인사가 포함된 회사를 비난한 사람으로 비쳤다.


하든버그는 낙담했습니다. 그러나 돌파구가 생깁니다. 하든버그는 당시 호주 원주민보호협회와 교류하며 반노예제협회에 몸담고 있는 존 해리스 목사를 만나게 됩니다. 존 해리스 목사는 로저 케이스먼트와 함께 콩고 스캔들을 폭로한 바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든버그의 말을 신뢰했고 케이스먼트에게 "페루아마존 회사" 조사위원회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케이스먼트는 직접 아마존을 조사한 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영국 정부에 요청해 공식 조사단을 발족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조사단의 공식 보고서가 외무성에 제출됩니다.


1911년 3월 17일 외무성에 제출된 케이스먼트의 135쪽짜리 보고서에는 바베이도스인들이 증언한 말로 형언하기 힘든 범죄 행위가 모두 담겨있었다. 에드워드 그레이 경은 ‘현대에 발생한 잔학 행위에 대해 읽은 것 가운데 …… 푸투마요 강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록이 가장 끔찍하다.’고 말했다. 외무성은 케이스먼트의 보고서를 페루에 있는 외교관들에게 보냈다. 페루의 아우구스토 레구이아 대통령은 자신이 충격에 빠졌으며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 로저 케이스먼트. 그는 위대한 인도주의자였다. 후일 아일랜드 독립을 지원하다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마침내 훌리오 세사르 아라나 제국의 실상이 공문서를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페루 언론들이 국수주의 성향을 드러내며 본질을 호도하고 아라나 역시 그들 뒤에 숨어 허울뿐인 청문회를 비웃었습니다. 심사을 거듭하던 1913년 4월 어느 날, 아라나는 늘상 그랬듯이 형식에 지나지 않도록 잘 처리해두었던 청문회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날도 그는 진실과 허구를 섞어 말을 늘어놓으면 평소처럼, 페루에서도 영국에서도 잘 나가는 인사로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날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극적인 상황을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아라나는 마나우스에 있었지만 영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처음에 그는 특별위원회 앞에서 직원들의 채찍질과 인디오들을 사냥한 행위에 대한 질문에 ‘차분하고 자신감 있게’ 답변하고 ‘결단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인상’을 풍기며 호감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의원들은 원주민들에게 사용된 라이플총이나 그들에게 자행된 만행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아라나의 항변의 신빙성을 점차 무너트렸다. 그는 거듭해서 하든버그가 위조한 신용장을 제시하고 회사를 협박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미국인 젊은이에 대한 중상을 계속하는 동안 스위프트 맥닐은 회심의 결정타를 날릴 수 있었다. 그는 갑자기 아라나에게 말했다. ‘돌아서 보십시오. 돌아서서 당신 눈앞에 하든버그를 보시오.’라고 말했다. 4년 전 푸투마요 강의 스캔들을 처음 폭로한 장본인이 하원의 위원회실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아라나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실없는 소리나 하는 청년으로 몰아냈던 하든버그가 4년의 시간을 돌아 다시 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하든버그는 어떤 증언을 했을까요?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당시 아마존 곳곳에 존재했던 수많은 고무 사업소들은 그러면 결백했던 것일까? 아라나의 푸투마요 제국이 유독 극악했던 것일까? 저자 존 헤밍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라나는 어쩌면 단지 재수가 없었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하든버그의 용기 있는 행동이 없었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 사실을 영영 몰랐을지도 모르니까요. 


어쩌면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사태는 1911년 초에 페루의 다른 지역에서 영국 고무 회사들이 인디오들을 학대한 증거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이 회사들은 페루 북서부 마드레 데 디오스 강의 수원인 이남바리 강과 탐보파타 강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 미국 회사들도 거명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들에는 여론을 환기할 만한 월터 하든버그가 없었다. 그래서 …… 결코 조사받은 적이 없었고 어느 가해자도 처벌받지 않았다.



*     *     *


2013년 3월 출간 예정!


『아마존: 정복과 착취, 경외와 공존의 5백 년』

생명의 강과 생명의 숲, 그 안에서 펼쳐진 사람들의 이야기



... 더 많은 이야기가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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