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북스의 신간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는 현대 정치철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마이클 샌델의 정치철학을 비판하는 본격 정치교양서입니다. 이 책은 마이클 샌델의 철학적 방법론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예시들 뒤에 숨겨진 주장이 매우 위험하다는 점을 꼼꼼히 논증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나면 정의론의 대가로 알려진 마이클 샌델이 실제로는 정의의 ‘한계’를 주장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에게서 뚜렷한 정의론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탄탄한 논리에 기반한 이성적인 문장은 정치철학의 진면목을 독자들에게 선사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는 일단 마이클 샌델의 베스트셀러『정의란 무엇인가』의 구성을 따라갑니다. 그 여정에서 샌델이 엉터리로 비판하고 왜곡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복원하고, 그 핵심 가치인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대 정치철학에서 자유주의와 경쟁하는 주요 사상 조류인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샌델의 곡해를 걷어내고, 정치철학의 거장들이 제기한 아이디어들의 진정한 가치를 재음미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합니다. 저자는 샌델의 (공동체적 자아를 상정한) 목적론적 철학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시민의 정치적 지위를 허물어뜨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진지하게 경고합니다.
더불어 독자 여러분들은 이 책을 통해 자유와 평등의 딜레마, 재산 소유권의 한계, 징병제와 모병제의 문제, 과거사에 대한 집단 책임의 문제, 탄소배출권 제도, 의무 투표 제도, 재능 공유제 등 다양하고 풍부한 정치철학의 문제들을 풀어가는 지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정의란 무엇인가>의 대표적인 딜레마, "전차의 딜레마"를 살펴볼까요?
샌델은 “전차의 딜레마”를 해결했을까?
<정의란 무엇인가>에도 소개된 적 있는 “철로를 이탈한 전차의 사례”는 정치철학의 대표적인 딜레마입니다. 샌델은 이 사례를 통해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정치철학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과연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딜레마를 해결했을까요?
자, 전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났습니다. 이대로는 철로 위에서 일하고 있는 인부 다섯 명을 덮치고 맙니다. 첫 번째 상황. 전차의 경로를 비상 철로로 바꾸면 철로 위에 있는 행인 한 명이 죽습니다. 선로를 변경해야 할까요? 두 번째 상황. 당신은 다리 위에서 전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당신 옆에는 덩치 큰 행인이 서 있습니다. 행인을 밀어서 기차에 부딪히게 만들면 인부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행인을 밀어 인부 다섯 명을 구해야 할까요?
사람들에게 두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졌을 때, (거의 모든 문명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황에서는 선로를 변경하겠다고 답하고, 두 번째 상황에서는 행인을 밀어 넘어뜨리지 않겠다고 답했습니다. 샌델은 여기서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질문을 던지기만 할 뿐 직접적인 해답은 제시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이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바로 행인이 그 자체로 목적인 존재,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행인을 밀어 넘어뜨리기를 망설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행인을 밀거나 밀지 않을 권리가 없습니다. 자신의 몸을 던져 전차를 멈추고 다섯 명의 인부를 구할 것인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행인 자신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전차의 딜레마는 단순히 흥미로운 도덕적 딜레마를 제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가 각자의 주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웅변하는 사례입니다. 즉 스스로가 목적인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개인의 자기 결정권, 이것이 바로 마이클 샌델의 정치철학이 외면하는 것이며 현대 자유주의가 옹호하는 핵심 가치입니다.
이것에 반해, 전차의 딜레마에 대한 샌델의 숨겨진 해답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타인을 위한 희생은 공동체가 규정한 훌륭한 미덕이며, 개인은 공동체적 자아의 일부분이므로 그 행인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행인은 악덕을 저지른 것이고, 공동체에 의해 비난받아야 한다."
샌델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본질 분석에서 최고로 치는 미덕은 단연 “공화국 시민들의 미덕을 고양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공화국 시민으로서 가져야 하는 미덕을 타락시키면 잘못된 것, 고양하면 옳은 것입니다. 특정한 근거가 다른 근거들과 충돌할 때는 별다른 논증 과정 없이 거의 언제나 시민적 덕성을 강화하는 일이 우선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정치철학자 피터 스타인버거는 “샌델은 자신의 견해를 논증하기보다는 주장하고 있다”고 갈파했습니다.
샌델이 철학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
질문 “허리케인 피해 지역의 상인들이 물건값을 올려 받는 게 왜 문제지?”
답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상대로 폭리을 취하는 건 지나친 탐욕이야!”
질문 “상품권을 선물로 주는 게 왜 잘못된 거야?”
답변 “선물의 본질은 정성을 담은 마음이야. 돈을 선물로 주면 선물의 가치가 사라지게 돼!”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본 독자라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바로 마이클 샌델이 내놓은 것임을 아실 것입니다. 이 문답만 보면 샌델은 현대 사회의 골치 아픈 도덕 문제를 무릎을 치게 만들 정도로 쉽게 해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얼핏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 대답들은 샌델의 철학적 방법론을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있으며,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몇 가지 간단한 지적만으로도 샌델의 해답은 무너집니다. 어떤 욕망이 탐욕인지 아닌지는 누가 판단할까요? 선물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죠? 만약 어떤 행위가 본질로부터 이탈했다면 국가가 나서서 그것을 처벌해야 하나요?
질문 “구제 금융을 받은 금융 회사의 보너스 파티가 잘못인 이유는 뭘까?”
답변 “실패에 포상했기 때문이지. 사람들은 성공에 포상하길 원해.”
샌델은 포상의 본질은 성공에 대한 것인데, 구제 금융을 받은 금융 회사는 “실패를 포상했기” 때문에 (본질에서 벗어났으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샌델 식으로 말하자면, 파산 위기에 처한 회사에 대한 구제 금융 자체도 악덕이 될 수 있습니다. “실패한” 회사에 돈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파산 도미노로 경제가 붕괴할 위험이 생기고 궁극적으로 모든 납세자들의 삶이 훨씬 힘들어지더라도 구제 금융을 하지 않아야 할까요? 반대로, 금융 투기를 일삼아 성공 가도를 달리는 금융 회사의 보너스 파티는 문제가 없을까요? “실패를 포상하면 안된다”는 미덕이 보편적인 원칙이 될 수 있다면, 실업자에게 수당을 지원하는 것 역시 정당화될 수 없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실업자는 노동시장에서 “실패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샌델의 해법은 건실한 정치철학적 논증이라기보다는 대중의 분노에 ‘미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샌델이 도덕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떤 사안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사안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악한다.
2. 본질을 만족시키면 미덕, 본질을 벗어나면 악덕이고 타락이다.
즉, 샌델의 이야기는 본질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론이 이미 정해져있는 노골적인 순환 논증의 형태를 띱니다. 그 근거로는 미리 정해진 결론이 미덕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됩니다. 그렇다면 샌델은 본질을 어떻게 파악할까요? 샌델의 철학에서 본질이란 대개 (샌델 자신의) 머릿속에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특성들일 뿐입니다. 그것이 너무 독단적이라고 생각되면, 샌델은 공동체 구성원의 다수가 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본질이라고 말합니다(“우리는 이야기를 써나가는 존재이다”). 만약 두 번째 방식이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뿐이라는 비판을 받으면 다시 첫 번째 방식, 미덕과 본질을 분석하는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으로 연구한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샌델이 철학하는 방법입니다. 샌델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봉합해 버립니다. 봉합이란 문제의 심층적인 전제를 정합성 있게 해명하지 않고, 떠오르는 답을 그럴듯하게 덧붙이는 태도를 뜻합니다. 봉합은 문제를 결론과 수사로 꿰매어서 핵심을 보이지 않게 만들고, 다양한 문제 사이에서 일관성 있게 사고할 수 있는 원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샌델은 중요한 정치철학적 문제를 두고 직관과 감성을 근거로 들어 결론을 내리면서 미덕, 타락, 비하 같은 문학적 수사를 붙여 정당화합니다.
시민들이 정치철학에 기대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문제 해결의 지침을 제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철학은 숨겨진 심층적인 전제를 밝히고, 시민들이 문제를 둘러싼 원칙과 근거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마이클 샌델의 철학은 오히려 문제를 흐릿하게 만들고 이성적 탐구를 방해합니다.
샌델의 정의는 위험하다
샌델은 정의에 관한 세계적인 학자로 한국에 소개되었습니다. 수만 명의 청중이 몰려 그의 강의를 경청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독자 여러분들은 어렴풋이 느끼셨을 겁니다. 흥미진진한 딜레마, 공동체, 좋은 삶, 미덕과 악덕 같은 단어만 나타날 뿐 정의에 관한 체계적인 원칙은 찾을 수 없다는 점을요. 실제로 샌델은 정의를 주장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정의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철학자입니다. 그는 국가가 미덕을 진작시켜야 하고, 정의의 원칙과 개인의 권리를 중심으로 정치철학적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오히려 국가의 임무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마이클 샌델에게는 정의론이라 할 만한 체계적인 원칙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가가 좋은 삶을 규정하고 국민들이 그에 따라 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국가 완전주의라고 합니다. 국가 완전주의의 핵심 명제는 “좋은 삶이란 공동체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다”입니다. 바로 샌델이 그렇습니다. 샌델은 공동체(국가)에 실체적인 도덕적 지위를 부여합니다. 그는 정의론의 본령인 자유주의가 “정의와 권리의 영역”에만 논의를 한정하고 실질적인 정치의 영역에서 후퇴하여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무릇 정치철학이란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고, 공동체(국가)가 정치를 통해 그러한 결론(좋은 삶)을 실질적으로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샌델에 따르면,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개인의 이상과 공동체가 규정한 이상이 충돌하면 공동체가 우선합니다. 개인의 이상은 공동체(현실적으로는 정부와 사법부)에 의해 금지되고 처벌됩니다. 샌델의 미덕 이론은 개인을 미덕을 담는 그릇으로 여깁니다. 공동체가 결정한 미덕을 최대한 많이 실현하는 것이 곧 정의입니다.
샌델이 그리는 사회,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를 공동으로 논의하고 공동으로 결정하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그 결정에 따라야 하는 사회를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런 사회의 구성원은 자신의 삶에 진정성 있는 책임을 느낄 수 없습니다. 자기 삶의 모든 것은 공동의 결정에 따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결정에 따르지 않으면 국가의 제재를 받기 때문에 그의 삶은 등 뒤에서 누군가 칼을 들이댄 채로 사는 것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자유지상주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은 이미 이런 삶의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에 대해 “노예의 우화”로 통렬히 비판한 적 있습니다. 이런 삶에는 진정한 후회, 뿌듯함, 만족, 회한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무엇이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만드는가에 대하여 스스로 검토한 것에 따를 수 있는 권리가 찬탈당했기 때문입니다.
샌델이 왜곡한 자유주의의 가치를 복원하다
사실 샌델은 자신은 공동체주의자가 아니라고 하소연합니다. 때로는 자유주의자라고 소개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샌델은 정치의 본질이 국가가 이상적인 좋은 삶을 규정하고 시민들이 그 이상에 맞춰 살게끔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유주의의 핵심 신조를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샌델이 생각하는 자유주의는 추상적 개인주의이자 가치 상대주의입니다. 샌델은 자유주의가 현실의 인간이 진실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관계나 가치를 외면하고 있으며, 개인의 신념에 간섭하지 않고 무엇이 좋음이고 무엇이 나쁨인지 판단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샌델의 잘못된 이해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좋은 삶에 대한 객관적인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개인이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신념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할 가능성을 인정하며, 그런 가능성을 인정할 때 오히려 자신의 삶에 더욱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 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좋은 삶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틀릴 수 있고 때로 수정될 수 있다는 것이 자유주의의 전제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누구나 개인적인 신념에 따라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가 본질적인 가치를 규정해 주고 그에 따라 우리 삶을 개선해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라는 점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대원칙입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자유권을 인정하는 이유는, 어떤 행동을 강제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나아진 것이 아니라는 우리의 확신을 드러냅니다. 개인이 스스로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삶의 가치에 대한 우리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그 신념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하고 검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조건들은 모든 이들에게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는 샌델에게 만족하지 못한 독자들에게 진짜 정의론을 찾는 나침반이 될 것이며, 시민의 지위를 공격하려는 모든 공격에 맞서기 위한 방패일 뿐만 아니라,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시민들에게 꼭 필요한 책입니다.
지은이 이 한
변호사 이한의 글은 꼼꼼하고 치밀하다. 모호한 딜레마로 독자를 현혹하지 않는다. 이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는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마이클 샌델의 정치철학을 깊이 해부한다. 그는 샌델의 저서 전부와 여러 학자들의 논의를 직접 검토한 다음, 샌델의 철학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진단한다. 그 결과 철학적 연구 방법뿐만 아니라 흥미진진한 사례 뒤에 숨은 주장이 매우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존 스튜어트 밀, 로버트 노직, 존 롤즈 등 샌델이 왜곡한 정치철학의 거장을 본격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샌델의 철학이 가진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이를 통해 현대 정치철학의 모습을 복원하고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여, 개인의 존엄성을 보장할 수 있는 바람직한 정의론을 제시하려 한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시민교육센터의 공동 대표로 있으면서 대안 민주주의와 정치철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 및 집필을 하고 있다.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란 어떤 사회인지, 어떻게 하면 그런 사회를 이룰 수 있는지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는 중이다. 지은 책으로 『이것이 공부다』(2012년), 『너의 의무를 묻는다』(2010년), 『철학이 있는 콜버그의 호프집』(2005년), 『탈학교의 상상력』(2000년), 『학교를 넘어서』(1998년)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사치열병』(2011년), 『포스트민주주의』(2008년), 『이반 일리히의 유언』(2010년), 『계급론』(2005년), 『성장을 멈춰라』(2004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