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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북스의 책/인문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권성욱 지음 | 미지북스 | 916쪽 | 33,000원

 

 

역사의 판도를 바꾼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

왜 일본 제국은 중국을 이길 수 없었나?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을 온전히 받아낸 중국의 불굴의 항전사

전쟁의 용광로에서 현대 중국이 태어나다!

 


 
중일 전쟁은 중국과 일본 두 나라가 모든 것을 걸고 맞붙은 진검 승부이자 20세기 아시아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아시아의 판도를 바꾸었고 세계사의 흐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청조 멸망 이후 군벌들로 사분오열된 중국은 국내외 혼란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일본의 침략에 직면한다. 초기 전황은 만주를 시작으로 화북과 화중에서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점철된다. 그러나 개전 후 일 년이 지나면 전쟁은 완전히 양상이 변하여 두 나라 앞에는 끝없는 소모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 진용을 갖추기 시작한다. 이 책은 17년간의 장제스와 국민 정부, 중국군의 불굴의 항전사를 담았다. 거의 모든 전투가 소개되며, 전투마다 그 배후에 놓인 중일 양국의 전략과 전술, 병사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 사열 중인 장제스 직계의 독일식 사단. 일명 '독일식 사단(德械師)'은 독일식으로 훈련 및 편제된 부대로 중일 전쟁 발발 전에 8개 사단이 있었다.  이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독일제 장비로 무장한 중국군 최정예 부대였다. 장제스는 일본과의 결전에 앞서 적어도 60개 이상의 근대화된 사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목표를 이루기 전에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중일 전쟁의 주역은 누구였나?

중일 전쟁은 1945년 종전 이듬해부터 시작된 국공 내전과 더불어 20세기 전반기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국공 내전의 승자는 중국 공산당이었고 중국의 근현대사는 중국 공산당을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그동안 중국 정부는 중일 전쟁에서 “팔로군이 일본군의 90퍼센트를 상대했다”고 선전해왔다. 많은 학자들 또한 마오쩌둥의 ‘유격전’이 중국 현대 군사전략의 대명사인 양 극찬한 반면, 장제스는 일본과의 전쟁을 회피하고 내전에만 열중했다는 식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중일 전쟁의 주역은 장제스와 국민정부군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일 전쟁은 1백만 이상의 병력이 맞붙는 대규모 전투만 수차례에 달하는 거대한 전쟁이었다. 8년 1개월의 전쟁 동안 국민정부군은 일본군과 정면으로 맞붙은 주체였고 막대한 희생을 감당하였다. 국민정부군의 사상자는 공식적으로 321만 명에 달했고 (그 두 배가 넘는다는 설도 있다) 두 명의 집단군 사령관을 포함해 206명의 장성급 지휘관들이 전사하였다.

국민정부군은 연합국의 대전략에서 소외되는 굴욕을 감수하면서도 일본 육군의 수십만 병력을 중국 대륙에 묶어두며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했고, 최정예 부대들이 버마 원정에 참여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특히 1945년 초부터 중국군은 일본군을 대륙 동쪽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장제스와 국민 정부는 결코 연합군의 승리에 무임승차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이 항전의 일익을 담당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중일 전쟁에서 항일은 중국 공산당의 주요 목표가 아니었다. 전쟁이 개시된 시점에 마오쩌둥은 공산당 고위간부들과의 비밀회의에서 "일본과의 항쟁은 우리 당이 발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우리는 70퍼센트를 역량 확대에, 20퍼센트를 국민당과의 투쟁에, 10퍼센트를 일본과의 투쟁에 사용해야 한다"고 정하였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은 일본과의 결전을 회피하며 세력을 급격하게 확대했다.


2천만 명의 사상자를 낸 8년 1개월간의 전쟁

1928년 관동군은 만주에서 황구툰 사건을 일으켜 중국 동북의 지배자 장쭤린을 살해한다. 이 사건은 앞으로 일어날 전쟁의 예고편이었다. 1931년 관동군은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차지하고 이어서 만리장성 이북을 점령하여 베이징으로 쇄도했다.

일본의 폭주는 멈추지 않았다. 1937년 베이징 근교에서 일어난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드디어 중일 전쟁의 막이 오른다. 화북에서 치솟은 전쟁의 불길은 곧 상하이로 번졌다. 무려 1백만 이상의 군대가 격돌한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일본군에 패배하였고, 이후 1938년 말까지 일본은 중국과의 대규모 회전에서 모두 승리하며 수도인 난징과 쉬저우, 우한, 광저우를 차례로 점령한다. 일본군은 난징을 함락한 후 6주 동안 포로와 민간인 30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일본은 중국의 심장부인 우한을 점령하면 중국이 항전 의지를 상실하고 화평을 제안하거나 자중지란으로 스스로 무너지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우한을 함락시킨 후에도 중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장제스는 연전연패에도 불구하고 항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후 전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전선은 교착 상태가 되었고, 일본군은 더 이상 획기적인 진격을 할 수 없었다. 중국 전선의 병력을 80만 명까지 늘렸지만 일본군의 공격력은 점점 무뎌졌다. 일본군의 앞에는 겹겹이 중국군의 방어선이 있었고, 후방에는 수십만 명의 중국군 유격대가 있었다.

 

중국 전선,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장이 되다

유럽에 독소 전쟁이 있었다면, 아시아에는 중일 전쟁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중국은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고 중국 전선은 세계대전의 주요 전장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연합국은 유럽 전선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중국 전선은 무시했다. 중국은 종전까지 강력한 일본을 상대로 외로운 전쟁을 계속해야 했다. 이 전쟁 동안에 2천만 명 이상의 중국인이 희생되었다. 그럼에도 장제스는 절망스러운 국면마다 중국이 이길 것이라고 호언하며 전략을 밝히고 전투를 독려하였다. "결국에는 중국이 이길 것이다."

일본군은 중국 전선에서 끝내 돌파구를 열지 못하자 중국 봉쇄와 자원 확보를 위해 남방으로 눈을 돌렸다. 일본 제국주의의 동남아시아 침공이 시작되었고 미국을 상대로 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끝없이 전선을 늘려갔고 점점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왜 일본은 중국을 침략했는가?

쇄국 정책을 고수한 도쿠가와 막부와 달리 메이지 정부는 빠른 속도로 제국주의를 내면화하며 외부로 팽창했다. 1879년 류큐 왕국(지금의 오키나와)을 강제로 합병하고 타이완을 정벌하였으며,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 대가로 타이완과 랴오둥 반도, 사할린 남부를 할양받았다. 1910년에는 조선을 완전히 병합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국 진영에 가담하여 독일의 점령지를 차지하여 아시아에서 열강의 지위를 확립했다.

청조 멸망 이후 중국이 여러 군벌들로 분열되자 일본은 이를 침략의 기회로 삼았다. 1920년대 후반 시점에 만주 침략은 일본의 국가적 목표가 되었다. 촉망받는 장교였던 이시와라 간지는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 간의 인류 최후의 날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만몽(만주와 내몽골)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시와라 간지는 관동군 작전참모로 부임하여 만주 사변을 일으키는 주동자 중 한 명이 된다.


제국주의의 첨병, 일본군 장교 집단의 멘탈리티

일본군의 중국 침략 과정을 보면, 일선의 군대가 독단적으로 작전을 벌이고 일본 정부가 이를 수습하는 수순으로 사건이 진행됨을 반복적으로 보게 된다. 일본 군부는 결코 국가의 수족이 아니었다. 천황은 물론 전시 최고 사령부였던 대본영과 내각은 군부를 제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제국주의적 팽창을 거듭하며 일본은 점점 더 군대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어갔다. 군부는 내부적으로도 결코 상명하복이 관철되는 일원화된 조직이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 이래 군부에서 파벌주의는 하나의 전통이었다. 일선의 장교들은 파벌이 다르면 하극상을 불사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하급 장교들이 군사반란을 일으키거나(2.26사건), 육군사관후보생들이 총리를 살해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5.15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파벌주의는 일본군 장교들의 엘리트주의와 소영웅주의, 그리고 연이은 승전과 맞물려 매우 독특한 정신세계를 만들어냈다. 일본 제국의 전선을 담당한 장교들은 누구의 명령 없이도 이미 충분히 제국주의적이었다. 일선의 지휘관들은 상부의 명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폭주하듯이 사건을 일으켰고, 전투를 개시했다. 그들에게 적의 객관적 전력이나 중장기 전략 같은 것은 중요한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황군'은 무패의 군대로 간주되었고, 황군을 후퇴시키는 명령은 격렬한 반발을 샀다. 일본 중앙정치에서 신중론자들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졌고, 어느 누구도 군부를 막을 수 없었다.

▲ 1937년 난징 함락 후 열린 일본군의 승전 퍼레이드. 일본군은 승자로서 거창한 입성식을 하고 있었지만 한쪽에서는 이성을 상실한 병사들이 군 수뇌부의 묵인 아래 포로와 민간인을 상대로 학살극을 저지르고 있엇다.  

 


왜 일본은 중국을 이기지 못했나?

원래 일본의 군사 전략에서 중국과의 전쟁은 소련이나 미국과의 전쟁보다 후순위였다. 구체적인 계획은 전무했고, 유사시 동원할 전력도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중국과의 개전 시 고작 최대 5~6개 사단을 동원하여 속전속결로 베이징과 상하이 등 요지를 점령한 다음 중국과 강화한다는 것이 계획의 전부였다. 만약 중국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만주와 화북에서 다른 군벌들을 속전속결로 제압할 수 있었지만, 장제스의 중국군을 꺾을 수는 없었다. 오랜 내전을 겪었던 중국군은 장비도 훈련도 빈약했으며 근대전에 대한 경험도 거의 없었지만, 일본군을 맞아 그야말로 전멸을 감당하면서 치열하게 싸웠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의 경제력과 전쟁 수행 능력은 한계에 다다랐고, 일본군은 더 이상 전격할 수 없었다.

1945년 9월 9일 중국은 오랜 항전 끝에 마침내 승전국이 되어 일본의 항복을 받았다. 그러나 절반의 승리였다. 중일 전쟁 동안 꾸준히 힘을 길러온 중국 공산당은 전쟁이 끝날 무렵에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1937년 제2차 국공 합작 때만 해도 복종을 선언했던 마오쩌둥은 1945년이 되면, 장제스에게 양쯔강을 경계로 중국을 양분하자고 제안할 정도가 되었다. 항일의 두 주체였던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전쟁이 시작되고 장제스는 패배하고 만다. 그와 함께, 중일 전쟁의 기억은 공산당 승리의 역사로 채색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포화가 쏟아지는 전장을 직접 헤쳐 가며 전쟁의 주역, 승리의 주역을 다시 확인시켜줄 것이다.

  

 

▲ 1945년 8월 북만주 하얼빈을 점령하고 시가 행진을 하는 소련군 탱크. 소련군은 관동군을 일방적으로 유린하며 만주를 휩쓴 다음 한반도로 진주했다.

 

▲ 왼쪽부터 장제스와 그의 처 쑹메이링, 그리고 미국에서 파견된 스틸웰. 장제스는 미국으로부터 기대했던 대규모 부대나 장비를 지원받지 못했고, 장제스 지원 목적으로 파견된 스틸웰과 불화했다. 미국은 중국 전선보다 유럽을 우선시했다.

 

 

 - 육전은 물론 해전과 공중전까지 모든 전투를 소개한 본격 전쟁사!

 - 주요 전황을 생생하게 담은 35장의 지도와 40여 장의 사진 수록!

 

이 책은 중일 전쟁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다수의 지도와 사진을 수록하였다. 전투는 육지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은 다른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해전과 공중전의 전황도 빠짐없이 서술하였다. 무엇보다 미국, 소련, 영국 등 주요 열강이 이 전쟁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루었는지, 냉엄한 국제 질서의 논리 속에서 분투한 중국 지도자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고사 직전에 처했던 마오쩌둥과 공산당이 어떻게 세력을 키워 장제스와 국민당에 맞설 수 있게 되는지도 상세히 설명한다. 또한 이 전쟁은 중국과 일본의 전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독립운동, 해방 후 전쟁과 분단의 역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해서도 하나의 장을 할애하여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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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권성욱

울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울산대학교 조선공학과를 졸업하였다. 학창 시절부터 전쟁사를 전공보다 더 좋아했다. 20년 동안 쏟아 부은 열정에 비례해 서재에는 동서양의 전쟁에 관한 온갖 책과 논문이 쌓여 갔고, 지식도 점점 많아졌다. 딱딱한 책들을 독파하면서 ‘좀 더 쉽고 재미있는 전쟁사’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근현대 전쟁사가 전문 분야이며, 중국 군벌 내전과 중일 전쟁, 국공 내전을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에 소개해 왔다. 그의 글은 크고 작은 전투의 세부 사항에서부터 국제 정치과 군사 전략에 이르기까지 숲과 나무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네이버 최대 군사 카페인 ‘밀리터리 군사무기 카페’의 스태프를 맡고 있고, 현재 울산에서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다. 부인과 자녀와 함께 울산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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