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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북스의 책/인문

『스페인 은의 세계사』- 1500~1800년, 아메리카의 은은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스페인 은의 세계사』

1500~1800년, 아메리카의 은은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카를로 M. 치폴라 지음 | 장문석 옮김 | 미지북스 | 156쪽 | 11,800원


16세기, 막대한 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발견되었다!
이 우연한 사건이 바꾼 세계사의 흐름

 

세계적인 역사학자 카를로 M. 치폴라가 선보이는
은과 ‘화폐의 여왕’ 8레알 은화 이야기


 


 

 

이탈리아의 저명한 역사학자 카를로 치폴라가 생애 말년에 자신의 주 전공인 화폐사로 돌아와 저술한 책이다. 이 책은 스페인 은화의 오디세이를 통해 동서양 두 세계가 파노라마처럼 연결되는 역사적 과정을 복원해 보여준다.
은은 국제 시장에 무제한적인 유동성을 부여한 재화이자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가지려고 한 재화였다. 바로 이 때문에 스페인은 아메리카로부터 막대한 양의 은을 건네받아 인적 자원으로나 물적 자원으로나 보잘것없던 나라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은은 곧 스페인 제국의 통제를 벗어나 전 유럽으로, 더 나아가 투르크와 페르시아, 인도와 중국으로 퍼져 나갔고, 최초의 글로벌 기축통화로서 세계 경제에 풍부한 유동성을 공급함으로써 가히 혁명적인 방식으로 대륙 간 장대한 무역의 발전을 촉진했다.


 

"16세기 내내 스페인 식민지들은 모국에 1만 6천 톤 이상의 은을 실어 날라 주었다. 다음 세기에도 2만 6천 톤 이상, 18세기에도 3만 9천 톤 이상의 은이 스페인에 유입되었다. 은의 행렬이 처음에는 스페인, 다음에는 이웃 나라를 휘감아 흘렀고 그 결과는 아주 특별했다."

_ 머리말에서

 

 

스페인 은과 은화의 오디세이
15세기 말까지만 해도 보잘것없던 유럽 대륙 끝자락의 스페인은 다음 세기에 아메리카에서 발견한 막대한 양의 은(銀) 덕분에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하지만 화려한 나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유입량만큼이나 막대한 은이 스페인 밖으로 유출되었다. 유럽으로 빠져나간 은은 다시 국제 무역망을 통해 투르크와 페르시아로, 더 나아가 인도와 중국까지 전 세계로 흘러 나갔다. 스페인산 은은 엄청난 물량을 앞세워 국제 화폐 경제에 전례 없이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했고, 이로써 중세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거대한 국제 무역의 시대가 도래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스페인의 ‘8레알 은화’는 비록 스페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세계 최초의 기축 통화로 활약했다. 치폴라는 이 은의 여정과 은에 바쳐진 사람들의 열정을 미시사적 시선으로 따라가며, 점차 근대 초기 동양과 서양 두 세계가 연결되는 장대한 파노라마를 멋진 필치로 선사한다.

 

스페인이 맞은 믿을 수 없는 횡재
이 놀라운 역사의 서막에서, 스페인인들은 마치 신이 돌봐주기라도 한 것처럼 ‘믿기 어려운 횡재’를 누렸다. 우선 16세기 중반에 스페인인들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막대한 은이 매장된 광맥을 잇달아 발견했다. 페루 부왕령의 포토시와 신스페인 부왕령의 사카테카스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런데 은의 발견은 계속될 행운의 시작에 불과했다. 은이 대량 생산되기 위해선 기술적 차원이나 필요한 생산 요소의 수급 문제 등이 해결되어야 했는데, 모든 것이 때를 맞춘 것처럼 맞아떨어지며 스페인을 도왔다. 모든 조건이 갖춰지자 1570년부터 은 생산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은의 대부분은 스페인으로 향했다.

 

유럽의 통화 체제를 뒤흔들 만큼의 엄청난 양
그렇다면 얼마만큼의 은이었을까? 두 곳의 은광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에는 10년 동안 고작 1백 킬로그램 남짓한 은이 스페인으로 유입되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16세기 말부터 이 양은 최대 약 2,700톤에 이르기까지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수치는 공식적인 통계일 뿐 실제로는 당대에 일상적으로 행해진 밀무역을 통한 대규모 은 유입이 더해져야 했다. 결과적으로 막대한 은이 스페인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그 은은 다시 전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러한 사건은 중세를 포함하여 이전 시대까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15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중세 내내 유럽은 적절한 교환 및 지불 수단의 결여 때문에 교역과 특히 국제 무역이 방해받는 심각한 귀금속 부족 사태를 겪고 있었다. 16세기 스페인에 대량의 은이 도착했다는 사실은 유럽에서 통화 체제가 뒤집힐 만큼의 엄청난 새로움, 혁명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새로운 조건의 도래를 의미했다. 과연 이 은과 은에 대한 사람들의 열정이 결합하여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은을 옮기는 일-스페인 호송선단과 해적 시대
‘횡재’는 행운으로 치부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은을 본국으로 실어 나르는 일은 결코 운의 영역이 아니었다. 스페인인들은 열정을 발휘해 온갖 장애를 극복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생산한 은을 본국으로 수송했다. 굉장히 고된 일이지만 은은 확실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우선 라마나 노새의 등짝을 이용해 험난한 산맥과 절벽을 넘어 가며 수백 킬로미터 거리의 항구까지 은을 실어 날라야 했다. 거기서 다시 은을 스페인으로 실어갈 베라크루스나 카르타헤나, 포르토벨로 같은 항구도시로 수송해야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은을 선적한 다음에는 해적과 폭풍우가 기다리는 바다를 뚫고 나가야 했다. 대서양 전선에는 스페인의 화물에 이끌려 몰려든 해적들이 들끓었고, 이들은 스페인의 은을 가로챘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은 좌절하지 않았고 무적함대 및 호송선단을 조직해 대단히 성공적으로 은을 본국에 실어 날랐다.

 

브뤼헐의 판화에 묘사된 스페인의 갈레온(1663년)

 

‘화폐의 여왕’ 8레알 은화의 등장
스페인산 은이 유럽을 휩쓸 때 그 주역은 8레알 은화였다. 중세 주화는 원래 극히 얇았고 또 가벼웠다. 그러다가 15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 국지적으로 은화의 대형화 추세가 생겼고, 15세기 말에는 마침내 ‘메달’로 쓰일 정도의 거대 주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표적으로 이 시기에 제작된 슐리크 백작 가문의 요아힘슈탈러(Joachimsthaler)는 탈러(Taler)라고도 불리었는데 바로 나중에 미국 달러(dollar)와 네덜란드 달더(daalder)의 어원이 된 화폐였다. 본보기가 주어졌고, 성공 사례가 생겨나고 있었다. 스페인의 기본 은화는 레알이었다. 스페인도 유럽에서의 변화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1537년에 마침내 8레알 은화가 등장했고,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8레알 은화는 곧 시장에서 열렬히 선호되며 기축 통화로 활약하게 되었다.

 

너무도 형편없는, 그러나 모두가 원한 은화
그런데 레알은 품질도, 화폐로서의 안정성도 대단히 떨어지는 은화였다. 제작한 조폐소와 제조 시기에 따라 무게와 순도가 들쭉날쭉했으며, 심지어 잘 부러졌다. 게다가 어떤 시기에는 가짜 8레알(심각하게 은 함유량이 부족한 레알)이 대규모로 유통되어 신뢰에 금이 가기도 했다. 그에 반해 모범이 될 만한 화폐는 당대에도 이미 충분히 많았다. 그럼에도 레알은 당시 ‘화폐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아메리카에서 유럽, 유럽에서 다시 아시아까지 종횡하며 세계 경제를 주름잡았다. 대관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치폴라는 이에 대해 ‘미스터리’라고 하면서도, 엄청난 물량에 주목한다. 16세기와 17세기 동안에 국제 무역의 거대한 발전은 레알 은화가 세계 각지로 대량으로 확산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 당시 국제 무역이 도달한 수준이 유지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대량의 레알로 대표되는 유동성이 시장에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후퇴는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뭣보다 아시아에서 이 은화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다른 경제 전통의 중국인들에게는 굳이 화폐로서가 아니어도 레알은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밀라노 은화.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화폐 개혁의 와중인 1474년에 생산되었다. 중세 은화의 전통에서 벗어난 무겁고 두꺼운 주화였다.

 

위 두 쌍은 멕시코에서 생산된 8레알 은화이고, 아래 한 쌍은 페루에서 주조된 8레알 은화이다. 8레알 은화의 대다수는 각인 문양이나 순도 면에서 질이 크게 떨어졌다.


 
진정한 수혜자는 스페인이 아닌 유럽
스페인 제국은 곧 몰락의 국면을 맞았고, 그 과정에서 은의 유출이 두드러졌다. 스페인에 유입된 모든 은 중에서 매우 적은 양만이 스페인에 남았고, 나머지 거의 모든 은이 나라 밖으로 빠져나갔다. 1595년에 어느 논평가는 스페인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스페인인들은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으로 온 이 보물과 관련하여 자신들에게 닥친 상황을 집의 지붕에 비가 내린 것 같은 효과에 비유하는데, 그러니까 지붕 위로 비가 많이 내릴수록 처음에 비를 맞은 집이 혜택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집 전체가 허물어진다.” 스페인에서 빠져나간 은은 유입량만큼이나 막대했다. 이에 따라 진정한 의미의 은의 범람이 일어나 전 유럽을 휩쓸었고, 은을 손에 쥔 유럽의 각 국,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들은 은을 대량으로 거래하며 대아시아 무역을 주도할 수 있었다.
 
마침내 동양에 팔 수 있는 것이 생기다
8레알 은화들은 유럽에서도 오래 머물지는 못하였다. 강력한 힘이 이 은화들을 동양으로 이끌었다. 어떤 중상주의적 시도도 무의미했다. 아시아는 유럽 생산품에 관심이 없었고, 유럽인들은 아시아 생산품에 목말라 했다. 다행히 유럽인들에게는 은이 있었고, 아시아인들은 은을 원했다. 유럽인들은 은을 지불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생산품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는 비유럽 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특히 8레알 은화를 소지한 사람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통하는 구매력을 소유했다. 그 반면, 레알이 없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이 은화들, 특히 레알 은화는 유럽 민족들에게 동양과의 무역을 현저하게 팽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중국이 은의 최종 종착지가 되다
스페인이 은 유출로 몰락의 국면을 맞았다면, 이제 유럽의 국가들 또한 동양과의 무역에서 대규모 적자와 그로 인한 은 유출에 직면했다. 매년 수백 톤의 은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이사들은 어떻게 하면 대중국 무역 수지의 심각한 적자를 타개할지 골몰하면서 밤잠을 설쳤다. 무역 불균형이 심해질수록 이사들의 고민도 깊어 갔는데, 결국 그들은 18세기 후반경에 이 해묵은 문제의 답을 찾아냈다. 답은 아편에 있었다. 그리고 19세기 초가 되면, 이제 중국이 막대한 아편 수입과 은 유출에 대한 해법을 찾기 시작했다. 1839년의 아편 전쟁은 이러한 역사적 전개 속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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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카를로 M. 치폴라 (Carlo M. Cipolla)
1922~2000년. 런던정경대학(LSE)과 소르본대학교에서 유럽의 경제와 역사를 연구한 대표적인 이탈리아 경제사학자이다. “자신의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경제사가”였고 1995년에는 “동료 학자들에게 혁신 정신의 귀감이 된 역사학자”로서 발잔상(Balzan Prize)을 받았다.
그는 ‘서구의 발흥’, 특히 고대에서 근대로의 이행 과정으로서 중세에 대해 연구하면서, 유럽 문명의 연속성과 근대 유럽의 경제 성장을 인구, 상업, 지식 등 장기적인 역사적 전환의 복합적 메커니즘으로 설명하였다.
1959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미국 버클리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1991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이탈리아 피에졸레의 유럽대학교와 피사 고등사범학교에서 가르쳤다. 경제사 분야에서 국제적 명성을 얻으면서 영국 왕립역사학회, 이탈리아 린체이아카데미,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 등의 회원이 되었다. 『대포, 범선, 제국』(1965년), 『시계와 문명』(1967년), 『중세 유럽의 상인들』(1994년) 등 수많은 저서를 썼다.

 


옮긴이  장문석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민족주의 길들이기』, 『피아트와 파시즘』, 『파시즘』, 『민족주의』, 『근대정신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국부의 조건』(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만들어진 전통』(공역), 『제국의 지배』, 『래디컬 스페이스』 등이 있다.

(이 책은 이탈리어판<Conquistadores, pirati, mercatanti>의 한국어 완역본이며, 영어판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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