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의 저자 이한 변호사와 책의 편집자가 나눈 대화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비판과 반론, 지적에 대해 저자의 생각을 묻고 들어보았습니다. 정치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거라 확신합니다. (원고지 165매 분량의 매우 긴 글이니, 아래 PDF파일이나 한글 파일을 다운 받으셔서 이용하시면 편합니다).
독자들의 비판에 답하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이한 변호사와의 특별 인터뷰
- 차례 -
1. 마이클 샌델의 목적론
2. 이론의 토대 ‘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
3. 누가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을까
4. 샌델의 이론 내부의 근본적인 결함
5. 미끄러운 경사면의 오류
6. 샌델은 국기모독죄를 어떻게 생각할까
7. 자유주의자가 실업수당과 복지제도를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
8. 좋은 삶의 조건
9. 상대주의와 개방성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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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편집자: 이한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한: 반갑습니다.
편집자: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를 읽은 분들의 반응과 의문, 반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오늘 이렇게 뵙게 되었는데요.
이한: 네. 정의에 관한 논의는 개방적으로 계속되는 것이니, 무척 의미 있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1. 마이클 샌델의 목적론 편집자: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독자들의 지적을 하나씩 살펴볼게요. 한 독자께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의 저자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와는 다른 목적론적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샌델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고 단호하게 평가해주셨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한: 먼저 유물론이 주로 쓰이는 두 가지 맥락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는 정신 현상이 물질현상의 일부라고 보는 이론입니다. 육체 속에 영혼이 따로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뇌의 물리적 작용의 현상이 정신 작용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이 맥락이 샌델과의 논쟁에 아무런 관계가 없음은 당연합니다. 다른 한편 유물론은 사회의 경제적, 물질적 조건이 사회의 사상이나 법을 근본적으로 규정한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치철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의 사상을 통해 사회의 경제적, 물질적 조건을 올바르게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뜻하기 때문에, 이 맥락에서도 유물론은 논점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정치철학에서 목적론이란 좋음을 옳음과 독립적으로 규정하고, 좋음을 최대한 많이 성취하는 것이 옳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샌델 스스로 자신이 목적론을 따른다고 하고 있고 또 여러모로 보나 목적론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목적론은 결국 이론에서 규정한 ‘좋음’, 즉 지배적 목적(dominant ends)을 최대한 많이 성취하는 것을 겨냥하여 옳음을 규정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릇으로서의 인간관’과 연결됩니다. 토머스 스캔론(Thomas Scanlon)은 목적론을 ‘연성(軟性) 목적론’과 ‘경성(硬性) 목적론’으로 나눈 바 있습니다. 연성 목적론은 공리주의처럼 개별 주체의 주관적 효용의 합산을 극대화합니다. 경성 목적론은 완전주의(perfectionism)처럼 이러저러하게 규정된 ‘탁월성’을 최대한 많이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당연히 제가 따르는 롤즈(Rawls), 스캔론, 드워킨(Dworkin) 등의 자유주의자(liberalist)들은 목적론적 관점과 대비되는 철학을 합니다. 그러나 그 이론의 구조가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 이론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론이 다른 사람들은 서로 아무런 비판도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점은 제가 목적론과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목적론의 약점을 얼마나 잘 드러내고 비판했는가입니다. 저는 우선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의 2장에서 공리주의를 다루면서, 샌델이 허투루 비판한 공리주의를 다시 제대로 세워놓고 보면, 공리주의의 주된 약점은 그 목적론적 구조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논했습니다. 그리고 ‘미덕’을 증진하고자 하는 샌델 같은 완전주의자들은 공리주의의 그런 약점을 공유한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5장에서는 ‘미덕’을 규정하는 것이 맥락과 범주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자의적으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2. 이론의 토대 ‘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 편집자: 선생님은 샌델이 순환 논리를 펼치고 있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여기에 한 독자는 ‘저자의 논리도 마찬가지로 밑동, 즉 근본적인 토대가 없으며 저자 자신도 인정하고 있듯 넓은 의미에서 보면 그 역시 순환 논리를 보여줄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샌델을 향한 선생님의 비판은 공정하지 않다는 거죠. 이한: 제가 ‘넓은 의미에서 보면 순환’의 모습을 보인다고 한 것은 로널드 드워킨이 『고슴도치를 위한 정의Justice for Hedgehogs』에서 표현한 바를 따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지식에 대한 한국 사회의 어떤 편견과 부딪히게 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원리와 숙고된 판단들을 널리 충분히 검토해 나온 결론’(A)과 ‘좁은 직감적 판단들만을 비교하거나, 하나의 직감적 판단에서 곧바로 결론을 도출하는 것’(B)의 논증 가치의 차이였습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어떤 굳건한 토대가 있고 그 토대에서 모든 것이 연역되는 방식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우리가 가장 명료하다고 생각하는 분야의 규칙들을 다루는 수학이나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학에서도 참인 명제가 모두 증명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괴델이 보여준 바 있습니다. 과학에서도 가설을 검증하는 모든 관찰은 그 관찰의 정확성을 보증하는 다른 이론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그 다른 이론들을 검증하기 위한 관찰 역시도 또 다른 이론에 의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과학을 탐구하지 못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매번 검토하려는 가설을 다르게 설정하거나, 전제로 고정하는 이론을 다르게 함으로써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콰인(W. V. Quine)이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모든 지식은 ‘아직 잠정적으로 논박되지 않은 믿을 만한 신념(beliefs)들의 잘 짜인 그물망’ 속에서 평가되고 구성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일도 해가 뜨리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참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일단 우리가 내일도 지구가 자전한다거나 해가 존재하고 있으리라는 예측 자체를 다시 검토하는 경우가 아니라면(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것은 더 이상 참이 아닐 것입니다) 그 명제는 일단 고정해놓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내일 해가 뜨리라는 신념과 내일 해가 뜨지 않으리라는 신념의 진리치가 동일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어떤 이론에서도 정치철학은 단일한 토대에서 연역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봤자 무슨 이점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이론의 최종적인 토대로 제시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의 토대를 또 당연히 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세상이 그냥 떠 있을 수는 없으니 거북이가 밑에서 받치고 있다고 누군가 답을 하면, 그럼 그 거북이는 뭘 딛고 서 있냐고 다시 묻고, 결국 거북이 밑에 거북이가 있고 다시 거북이가 있는 무한한 반복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미리 말씀드렸듯이 인간의 지식은 최후의 거북이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흔히 쾌락 공리주의가 ‘쾌락은 좋은 것이다.’라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단일 명제로부터 연역해나가는 이론이라고 오해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쾌락이 그 자체로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이라는 점이 의심될 수밖에 없거니와(살인자의 쾌락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인가?), 또한 여러 사람들의 여러 가지 쾌락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그 명제와는 독립적인 다른 명제들을 들여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고전적 공리주의는 쾌락의 총량을 최대화하려고 하지만 평균 공리주의는 쾌락의 평균 수준을 최대화하려고 합니다. 고전적 공리주의에 의하면 쾌락이 마이너스나 0이 아니라면 무조건 인구를 늘리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 되지만 평균 공리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쟁점은 공리주의와 관련된 많은 쟁점 중 극히 일부일 뿐이며, 결국 공리주의 역시 도덕적 신념들의 그물망 속에서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갖춰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렇게 우리의 숙고된 도덕 판단들과 신뢰할 만한 원리들을 조정해가면서 서로 지지하고 수렴하는 바를 찾아내는 정합성 논증, ‘들어맞음’을 보는 것을 롤즈는 ‘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이라고 불렀습니다. 노먼 다니엘(Norman Daniels)은, 도덕 심리학이나 인간의 물질적 여건, 안정적 성향까지 고려하여 어떤 규범을 평가하는 일을 넓은 의미의 반성적 평형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면에 좁은 범위의 쟁점에 관한 자신의 기존 견해나 직감에 맞는지만 결론으로 내세운 뒤, 그걸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은 반성적 평형과는 전혀 다른 노골적인 순환 논증입니다. 노골적인 순환 논증은 논증의 가치를 전혀 가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순환 논증이 타당하다면, 어떤 명제나 내세워도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칼 포퍼는 『추측과 논박』 2권에서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학을 비판하면서, 모순을 포함하는 논리학은 아무 명제나 참으로 다 도출하기 때문에 논증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노골적인 순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논증이 가능합니다. 요정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요정은 존재한다. 이런 뻔한 순환논증이 요정이 없음에 관한 많은 증거를 토대로 한 논증과 동일한 가치를 가지지는 않죠. 설사 그 많은 증거들이 서로 지지하고 수렴하는 그물망 속에 있을 뿐 모두 확실한 토대로 소급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런 노골적인 순환 논증은 사람들이 쉽게 발견하며 우스운 주장으로 치부합니다. 그런데 중간에 약간의 트릭이 들어가면 적잖은 사람들이 혼란을 느낍니다. (1) 요정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날개가 달린 작은 인간 같이 생긴 존재다. (2) ‘요정론’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요정론’ 서문에는 저자 자신이 요정이라고 되어 있으며, 본문에는 요정의 많은 이야기들이 쓰여 있다. 이 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요정이 직접 쓴 것이므로 사실일 수밖에 없다. (3) 따라서 요정은 존재한다. 여기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이라는 요정의 속성이 전제에 미리 포함되고, 그 전제를 다시 다음 논증 고리에서 언급함으로써, 가정된 것을 결론으로 바꾸는 트릭이 있습니다. 그런데 샌델의 논증에서 그가 ‘본질’이나 ‘덕’이라고 규정한 것 또는 ‘공동체의 공유된 생활양식’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위 증명 과정의 (2)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요정’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혼란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폭넓은 고려 사항과 원리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아주 좁은 범위의 순환 구조만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이나 ‘본질’이라는 말로 포장되기 때문에 그 뻔한 순환성이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제1장에서 “교육 기회의 평등을 위해 과외를 금지하는 것이 정당성 있는 정책인가?”라는 질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평등’이 우선한다, ‘평등과 자유가 조화되어야 한다.’며 그럴듯하게 이름 붙이거나 또는 자신의 직감을 포장한 주장을 제시하는 것은 아무런 논증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평등을 위해 과외 금지가 정의롭다는 주장을 했던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한 축구팀이 다른 팀보다 더 많은 보수를 주고 좋은 코치를 둘 수 없게 해야 하는가? 아니면 가정 형편이 어려워 부모님의 일을 방과 후에 돕거나 가사 일을 도맡아서 할 수밖에 없는 학생과의 형평성을 위해, 다른 학생들의 공부 시간을 제한시켜야 하는가? 즉, 이것이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원리인가?”라는 질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적절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냥 그런 사례는 ‘과외’에 관한 것이 아니다, 과외 사안은 과외 사안 자체로만 봐야 한다고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쟁점에 대하여 고려해야 할 사항이란 이렇게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여러 고려 사항들을 끌어들이며 주장하고 논박하는 논증 대화(discourse)의 가운데서 풍부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아무리 대화를 해도 “응응, 그렇구나, 그래 이 좁은 사안의 네 직관은 그렇지, 그렇지만 이 좁은 사안에 대한 내 직감은 이렇거든.”이라고 맞받아치면 논증 대화의 목적은 달성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고려했던 사정들만 열거하면서 곧바로 결론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 결론을 뒷받침하는 원리(principle)를 정식화해서 그것이 다른 원리 및 우리의 숙고된 판단과 정합적으로 들어맞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누가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을까 편집자: 선생님은 샌델의 이론이 공동선을 위해 개인을 수단화할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비판하셨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한 독자는 선생님이 제시한 예들이 극단적이며, ‘미끄러운 경사면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했고요. 더 나아가 저자는 샌델을 전혀 잘못 읽었으며 실제로 샌델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므로 선생님의 비판은 “허수아비 때리기”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한: 먼저 예가 극단적이라는 비판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이는 정치철학의 목적을 자기 자신의 확신 속에서 제자리걸음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가능한 주장입니다. 정치철학에서 어떤 이론을 따랐을 때 허용되는 요소를 극단화하고 사고실험을 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논의 과정의 일부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살아오는 동안 우리에게 친숙한 사안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한 확신을 갖고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결론을 구체적 사안에 비추어 다시 검토해보라고 하면 내켜하지 않습니다. 이미 확신에 차 있기 때문이죠. 논증 대화의 목적은 그 결론을 다시 한 번 검토해볼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안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자신의 결론만을 내놓고 계속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된 이유들을 논의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제시한 이유에 동의할 경우 우리의 숙고된 판단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말하자면 극단적인 결론)이 허용되거나 강제된다면, 그 사람이 제시한 이유의 타당성을 의심할 상당한, 또는 유의미한(significant) 근거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리주의를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공리주의가 노예제를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고 적절히 논의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리주의는 효용의 합을 최대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노예의 수가 극히 소수이고, 그보다 훨씬 많은 다수가 노예의 봉사를 받음으로써 생기는 약간의 쾌락의 총합이 극소수 노예의 고통보다 크다면, 공리주의에서 의해 노예제는 옳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논증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보다 덜 극단적인 예로 차츰차츰 옮겨왔을 때, 공리주의자들이 서슴없이 정당화하려는 다른 사안들의 정당화 근거 역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소수의 흑인들에 대한 기회의 불평등을 부인함으로써 다수의 백인이 적어도 내가 흑인보다는 낫다는 자부심을 가지는 경우, 소수의 종교인들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부인하거나 불평등하게 제한함으로써 다수 종교인들이 종교적 일체감을 느끼는 경우, 인기가 없거나 터무니없는 잘못된 데다 체제 전체에 대해 비판적이기까지 발언을 하는 사람에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경우, 그리고 상당수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주는 비판을 사회 전체가 제한하는 경우, 로 차츰 논의의 지평을 옮겨볼 때 승인 여부에 대한 결론은 달라질지 몰라도 공리주의가 제시하는 근거는 한결같습니다. 즉 각 사안마다 경험적으로 계산해서 효용이 최대화하는 방안이 무엇이냐에 따라 답이 정해진다는 겁니다. 혹은 이럴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두 경우에서 사람들의 의견이 갈립니다. 그런데 이 순간 당신의 의견의 논거가 무엇이냐,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원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양쪽 모두 단지 ‘왜냐하면 효용의 합이 최대화하기 때문이다.’는 답을 제시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결정적인 논박은 아닐지라도 노예제 사례가 유의미한 논증 대화로 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에서 썼듯이 공리주의자는 계산(calculation)을 제대로 하기만 하면 노예제는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충분히 반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리주의의 계산이 수학이나 물리학처럼 정확한 것도 아니고, 우리는 결국 그런 경험적 여건의 우연성 (예를 들어 노예로부터 봉사 받는 자유인이나 흑인을 비하하며 느끼는 백인의 자부심이 10이냐 100이냐)에 사람들의 근본적인 지위가 흔들리는 것은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공리주의자의 그 의뭉스러운 계산 과정에서 결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의적인 보조 규칙들이나 경험적 가설들 외에는 우리의 평등한 자유를 위한 어떤 원리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공리주의 원리에 의해 사회가 통치될 때, 현실의 여러 미묘한 사안들이 결국 인간의 평등한 근본적 지위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보는 것은 납득할 수 있는 결론입니다. 따라서 이는 상대방이 주장하는 원리에 ‘따르자면’ 도출될 수 있는 결과를 경고하는 것이지 상대방이 바로 그 결과를 주장하고 있다는 논의가 아닙니다. 저는 책에서 ‘샌델의 견해가 무엇이다.’라는 표현(A)과 ‘샌델의 논리에 따르자면 혹은 샌델의 논리를 밀고 나가보면 이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B)는 표현을 구분하여 썼습니다. 상대방의 논리를 밀고 나갔을 때 우리의 숙고된 판단이나 포기할 수 없는 원리들과 상충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논증을 거부한다면, 결국 우리는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들 위에서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유’의 타당성을 검토할 때, 실제로 샌델은 구체적 사안에 대해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은, 저 역시 표현을 구분하고 있으며, 논점을 벗어난 지적입니다. (계속) 4. 샌델의 이론 내부의 근본적인 결함 이한: (계속)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 X가 정치철학의 지배 원리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고 해봅시다. 내가 선에 대한 치열한 탐구를 통해 덕스럽다고 판단하는 것은 권장하고 강제해야 하며, 악덕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금지해야 한다. (이것을 P 원리라고 합시다.) 그러자 논쟁을 하던 Y가 “너의 그 원리에 따르면, 네가 만일 내 종교가 악덕이라고 여기면 금지할 수 있다는 말 아니냐?”라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러자 원리 P를 천명한 X가, “이 바보 같은 놈아, 왜 그런 극단적인 주장을 하느냐, 나는 선에 관한 치열한 탐구를 하기 때문에 네 종교를 악덕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너는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다.”라면서 자신의 이론이 여전히 굳건하다고 주장합니다. X의 반론은 논점을 짚고 있지 않습니다. Y가 지적하려는 것은 X가 천명한 원리에는 “X가 결론적으로 악덕이라고 보는 한, 그것은 금지된다.”라는 결정을 저지할 어떤 요소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X가 Y의 반론을 처리하려면, 자신의 ‘미덕’ 이론 내부에 Y가 지적한 것과 같은 자의성을 저지하고 자유로운 지위의 방벽이 될 수 있는 요소가 구축되어 있음을 논증해야 합니다. 그런데 X가 천명한 원리에는 그런 요소가 구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자신이 현재 그것을 금지되어야 할 악덕으로 보지 않으니 자기 이론에는 결점이 없고, 자신이 보기에 자기 이론이 최고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논의 방식입니다. 샌델의 이론에는 X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자유의 방벽을 세워줄 원리가 없습니다. 즉, 구체적인 사안에 관한 샌델의 견해와 상관없이, 샌델의 이론에 그런 결점이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샌델의 정치철학 이론은 “공동체는 선에 대한 탐구를 통하여 덕스럽다고 판단한 것은 권장하거나 강제하고, 악덕은 억압하거나 금지할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언어로 다시 진술하자면 “어떤 권리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 권리가 인간의 선을 진전시키거나 고양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어느 특정 시점의 공동체가 선을 탐구한 다음 어떤 결론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 결론에 맞지 않는 사람의 행동이나 표현의 자유는 부인될 수 있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것은 ‘공동체 전체가 선에 대한 탐구한 결과’니까요. 저는 샌델을 ‘선호의 다수결주의’라고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책 전체에 걸쳐 샌델이 ‘단순한 선호 다수결주의’를 채택하지 않음을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샌델은 ‘선에 대한 공동의 탐험’을 할 것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에 대한 탐험은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결국 실제로 차이가 발생하는 부분, 실익(actual difference)이 발생하는 부분은 무엇이 좋은 삶인가에 관한 특정 시점의 ‘탐험의 결론’을 공동체가 그 구성원들에게 강제하느냐 아니냐 입니다. 만약에 이런 실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샌델은 시민들이 서로를 설득하고 주장하면서 좋은 삶을 도모하자는 자유주의와 전혀 다르지 않은 주장을 하면서도 다른 주장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5장에서 샌델의 미덕 탐구나 본질 규정이 맥락이나 범주, 추상화 수준에 따라 자의적임을 논했습니다. 그렇다면 선에 대한 탐구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근본적 지위를 언제나 정교하게 방어해 주리라는 기대는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타당합니다. 더군다나 다원적인 시민들에게 공동으로 좋은 것으로 공유되는 것(안전, 평화, 공정한 목적 추구의 여건, 자유, 자존감 등)을 넘어서서 특정한 가치의 관철을 국가의 권한에 포함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소수의 견해를 지닌 시민의 평등한 지위를 침해하게 됩니다. 옳고 그름의 영역에는 윤리의 영역, 도덕의 영역, 그리고 정당성의 영역이 있습니다. 윤리의 영역은 무엇이 좋은 삶인가(나는 지금 유학을 가야 하는가, 배우자와 아이들과 함께 한국에 머물러야 하는가, 모태 신앙을 계속 믿어야 하는가, 신앙을 버려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윤리의 영역의 주된 관점은 일인칭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결코 주관적인 것은 아닙니다. 친구들끼리 우리는 서로의 윤리적 판단에 조언하고 논의하며 다른 사람들이 썼던 책들을 참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가 충분한 탐구 뒤에 확신을 갖고 결론을 내렸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결론을 따르도록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도덕의 영역은 윤리 영역의 일부로서,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입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외모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의 외모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내야 하는가, 친구와 약속을 했는데 어떤 예외적 상황이 발생해야 어길 수 있는가 같은 문제입니다. 도덕 영역 중 일부로 정당성의 영역은 강제력을 가진 정치 공동체가 권리와 의무를 어떻게 할당해야 하는가, 특히 그런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런 결정을 강제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관한 판단이 요구되는 영역입니다. 이 각각의 맥락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한 영역의 결론을 곧바로 다음 영역으로 옮기질 못합니다. 이 영역 간의 경계를 전적으로 허물고 윤리 영역에 관한 공동체의 탐구와 합의로 모든 것을 결정하자는 논의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의 근본적 조건을 위배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5. 미끄러운 경사면의 오류 편집자: 방금 이야기하신 것이 ‘미끄러운 경사면의 오류’라는 지적에 대한 대답과도 겹치겠군요. 미끄러운 경사면의 오류는 무엇입니까? 이한: 미끄러운 경사면 논증(Slippery Slope Argument)은 순환논증이나 선결 문제의 요구(결론을 전제로 가져다 쓰는 것), 또는 모순 논증처럼 논증 형식 자체에 ‘오류’가 결부된 논증이 아닙니다. 이걸 뭉뚱그려 오류라고 부르는 것은 그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끄러운 경사면 논증의 기본적 형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미끄러운 경사면에 한 발(A)을 내딛으면 다음 발(B)도 내려갈 수밖에 없고, 그리고 그런 식으로 계속 내려가서(C, D, …) 바닥(Z)에 닿을 수밖에 없다. 둘째, 여기서 한 발(A)은 수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마지막 바닥에 내딛는 것(Z)은 수용할 수 없는 결과이므로 최초의 한 발(A)을 내 딛어서는 안 된다. 편집자: 논증의 기본 형태가 매우 추상적입니다. 제 생각에는 본질적으로 오류를 포함한다고 말하기는 힘들겠는데요. 이한: 그렇죠. 어떤 맥락에서 어떤 주의를 가지고 쓰이느냐에 따라 그 타당성은 달라집니다. 에릭 로드(Eric Lode)는 「미끄러운 경사면 논증과 법적 추론Slippery Slope Arguments and Legal Reasoning」이라는 논문에서, 조금 있다 제가 말씀드릴 국기 모독 사례를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미끄러운 경사면 논증은 구체적 사안에 대한 기존의 견해가 너무 확고하게 결정되어 있어 사람들이 다른 중요한 사항을 고려하지 못할 때, ‘바닥’의 극단성에 주의를 환기시켜 기존의 확신에 반대되는 결론의 다른 고려 사항들을 볼 수 있게 강조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편집자: 듣다 보니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그럼 타당하지 않은 미끄러운 경사면 논증은 어떤 것인가요? 이한: 버그(Wiberen van der Burg)는 「미끄러운 경사면 논증The Slippery Slope Argument」이라는 논문에서 미끄러운 경사면 논증을 몇 가지로 나눕니다. 우선 개념적인 경사면 논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A라는 원리를 허용하면 a1뿐 아니라 a2도 지지될 수밖에 없음을 보이는 논증이지요. 그리고 버그는 이런 논증은 외면상 이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더라도 미끄러운 경사면 고유의 논증에 해당하지 않으며, 비판적 도덕에 필수적인 ‘원리에 의거한 논증’이라고 분류합니다. 이건 제가 앞에서 이야기한 ‘원리에 의한 논증’과 같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류에 빠지는 전형적인 논증으로 ‘구분선 긋기의 어려움’을 지렛대로 삼아 주장을 펼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쌀이 한가득 쌓여 있는 쌀더미에서 쌀 한 톨을 빼도 여전히 ‘쌀더미’입니다. 한 톨 더 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쌀더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한 톨씩 빼다 보면 바닥에 이제 서너 톨 정도만 남게 되니까, 결국 쌀 한 톨을 빼는 일은 쌀더미 전체를 없애고 서너 톨만 남기는 결과와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는 거죠. 혹은 쌀 서너 톨은 쌀더미 전체와 같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논변이 생명 윤리에서 자주 등장하는데(예를 들어 수정란이 조금씩 변화해서 인간이 되니 수정란이 곧 인간이라는 주장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오류입니다. 저는 이런 논변을 포함시킨 바가 없습니다. 개념적 논증과 대비되는 것이, 경험적 경사면의 논증입니다. 예를 들어 A를 허용하게 되면, 주변 여건이 그에 맞춰 변화되어 B도 허용하게 되고, 그 결과 사회의 방향이 Z까지 허용하는 것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논증 자체의 형식만 가지고는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 자체로는 강력한 논증이라고 할 수도 없고 틀린 논증이라고도 할 수가 없어요. 그 논증을 뒷받침하는 구성 요소인 경험적 가설들이 타당한지에 의해 판명됩니다. 즉, 이건 그냥 경험적인 개연성에 관한 일반적인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국가가 재정 정책을 실시하면 시중의 유동성은 재정 정책에 쓰인 금액보다 더 늘어난다는 ‘승수 법칙’이라는 경험적 가설이 타당한 이유는 그 중간 고리들이 경험적으로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편집자: 그렇다면 선생님의 논증은 미끄러운 경사면의 논증입니까? 이한: 정확히 말해 미끄러운 경사면 논증이 아닙니다. 즉, 제가 책에서 샌델을 비판하며 제시한 논증의 핵심은 ‘과연 이것을 저지할 다른 요소가 이론 내에 구축되어 있는가?’라는 정치철학의 일반적인 논증 방식입니다. 즉, “원리의 보편화 가능성”을 지렛대로 삼은 논증이지, 미끄러운 경사면의 논증의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앞서 X와 Y의 이야기를 하면서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이를테면 샌델은 『정의의 한계』에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는 이유는 종교의 선택이 소중하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가 우리를 덕스럽게 하기 때문에, 그래서 종교가 가치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행위의 자유를 지지하려면 우리는 그 행위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샌델은 자유주의에 반대하여 이와 같은 논리를 자유를 보호하는 일반 원리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안에서 한 발짝만 나가면, 그 원리는 쓸모 있는 보편화 가능한 원리가 전혀 아닙니다. 종교를 갖는 것이 종교를 갖지 않는 것보다 덕스럽다면, 당연히 종교를 갖지 않는 것은 종교를 갖는 것보다 덕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를 긍정적으로 승인하는 사회는 무종교를 불승인하게 됩니다. 여기서 종교와 무종교의 가치가 똑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종교를 갖는 것이 미덕’이라는 진술을 무의미한 명제를 만듭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자유를 지지하는 이유(rationale)로 샌델이 제시한 것이 자유의 원리로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은 타당한 논증입니다. 이를 두고 샌델이 “무신론자를 차별한다거나, 세금을 더 매긴다거나, 강제로 교회에 가야 한다.”고 직접 구체적으로 주장한 적이 없지 않느냐는 반론은 논점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샌델의 자유론이 어떤 구체적인 행위가 적극적인 선을 가지고 있다는 명제에 기반한다면, 샌델의 자유론에는 실상 미덕에 의해 승인되고 허락된 행위의 영역만 있을 뿐 자유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판은 강력한 반론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유란 그 본질상 공동체의 다수가 싫어하고 불승인하는 것도 할 수 있고, 다수가 경멸하는 발언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반론을 처리하려면 ‘샌델은 구체적으로 무종교의 자유도 인정한다는 점’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 혹은 표현의 자유의 일반 원리로 ‘덕을 진작하기 때문에 어떤 자유를 승인한다.’라는 명제를 내세워도 되는지를 검토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검토는 보지 못했습니다. 6. 샌델은 국기모독죄를 어떻게 생각할까 편집자: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에 대한 한 독자의 서평은 “저자는 국가가 시민들에게 ‘떡검’, ‘견찰’ 같은 용어의 사용을 금지하게 하고, 이러한 용어 사용의 금지가 종교적 상징을 모독하는 표현에 대한 금지로 확장되는 상황을 설정한다.”고 평가한 다음 “센델이 이런 식의 반(反)민주주의적인 결정을 지지할 논리적인 이유는 없기 때문에” 저자가 제시한 사례는 극단적이고, 미끄러운 경사면의 오류를 범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말씀은 샌델이 특정 행위나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핵심 원리가 잘못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샌델의 이론에는 그런 상황을 저지할 수 있는 요소가 구축되어 있지 않다는 것, 오히려 자유를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이한: 그렇죠. 거기에 더해 ‘떡검’이나 ‘견찰’ 같은 용어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극단적인 상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도 대통령의 이름을 변형하여 동물이나 욕설에 비유하면 형법상 처벌받게 되어 있습니다. 집행하는 경우가 드물 뿐이지, 실제 수사를 하고 기소하면 처벌받게 됩니다. 이건 현실 상황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런 행위를 극단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이들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한편, 최근에 여러 분야에서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집단에 대한 비난이나 조롱 조의 평가를 범죄화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석에서 아나운서를 평가한 것이 아나운서 전체에 대한 모욕죄가 성립된다는 고소도 있었고, 발언 당사자인 정치가가 조롱의 대상이 되면서 그 고소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또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이 정부 관청 책임자에 대한 명예훼손죄라는 고소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검찰 단계에서 고소가 각하되지 않고 거의 전부 기소까지 진행되는 실정입니다. 한편 상징물인 국기에 대한 모독은 한국에서 엄연히 국기모독죄로 처벌됩니다. 형법 제105조(국기, 국장의 모독)에서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국기 또는 국장을 손상, 제거 또는 오욕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단지 무생물일 뿐인 국기를 손상했는데 5년 징역형까지 살 수 있는 겁니다. 미덕 이론에 의하면 국기가 무생물이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덕에 관한 판단입니다. 국가 공동체 내의 구성원인 국민들에게는 애국심이 중요합니다. 국가 정책에 항의하면서 국기를 불태우는 행위는, 국기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심을 더럽히고 애국심이 넘치는 공동체의 미덕에 손상을 주므로 처벌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한국에서는 외국 국기에 손상을 주는 행위 역시 형법 제109조(외국의 국기, 국장의 모독)에서 “외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그 나라의 공용에 공하는 국기 또는 국장을 손상, 제거 또는 오욕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3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법원 83.02.08 선고 82도2655 판결’은, 성조기의 소각과 미국에 반대하는 내용의 유인물 살포 행위가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 소정의 죄를 구성한다고 하여 이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보고 매우 강하게 처벌한 바 있습니다. 한국인이 미국 국기를 모독하면 이는 미국이라는 우방 국가와의 친선을 다져야 하는 공동체의 미덕을 심각하게 훼손했으므로 이만한 처벌을 받습니다. 그럼 미국에서는 어떨까요? 미국에서도 처음부터 이 문제가 간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에서도 “헌법이나 군복 또는 국기에 관해 불충하거나, 불경하거나, 악의적이거나, 모욕적인 언어를 입에 담고 인쇄하고 글을 쓰고 공표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한 간첩법이 위세를 떨친 적이 있으며, 1980년대까지도 국기보호법(Flag Protection Act)이 있었습니다. 상당한 논란을 거친 끝에 ‘국기 모독이라는 상징적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은 위헌’이라는 결정이 현재 미국 연방 대법원의 입장이 되긴 했습니다. 한번 볼까요? 스미스 대 고건 Smith v. Goguen, 415 U.S. 566 (1974): 미국 국기를 공공연하게 훼손하거나, 밟거나, 손상하거나 경멸적인 방법으로 다루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위헌이라 판결. 스펜스 대 워싱턴 Spence v. Washington, 418 U.S. 405 (1974): 학생 살인 사건 직후 미국 국기에 평화의 상징을 부착한 행위를 국기모독죄로 처벌하는 것을 위헌이라 판결. 텍사스 대 존슨 Texas v. Johnson, 491 U.S. 397, 414 (1989): 공화당 전당대회에 대한 항의의 방법으로 국기를 불태운 행위를 처벌하는 것을 위헌이라고 판결. 그런데 이런 결론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국기 모독을 금지한다니, 반민주적이야!’라고 해서 만장일치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현재에도 국기 모독을 처벌해야 한다는 사람이 미국에서도 과반수가 될 정도로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떡검’, ‘견찰’이라는 용어를 금지한다고 했을 때 ‘미덕을 진작해야 한다, 어떤 미덕을 진작하는지는 공동체가 결정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금지 입법을 시도하는 사람은 ‘떡검’이나 ‘견찰’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도 검찰과 경찰을 비판하는 일은 얼마든지 허용된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금지되는 것은 오직 그런 모욕적인 언어를 써서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국가의 공공 기관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심마저 허물어뜨리려는 특정 행위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떡검’이나 ‘견찰’이라는 말을 사용해야만 진작할 수 있는 미덕을 찾아내고, 이를 근거로 ‘선에 대한 공통의 탐구’를 수행하는 다수를 설득하는 일이 당연한 것인가요?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샌델처럼 ‘민주주의’를 이해한다면, 즉 미덕을 근거로 자유를 제한할 무차별한 권리를 다수에 주는 것을 민주주의로 이해한다면(그렇지 않은 현실에 불만을 갖고 샌델은 『민주주의의 불만』을 썼습니다.), 위의 조치들을 ‘반민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제시한 사례들은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없습니다. 행정부뿐만 아니라 수사 기관인 검찰에서도 검찰 조직에 대한 비방의 표현을 모욕죄로 포섭하려는 법리적 시도를 종종 하고 있으며, 또 ‘집단모욕죄’를 도입하려는 노력도 때때로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견찰’이나 ‘떡검’의 사례, 상징물 모독의 사례를 든 맥락을 봐야 합니다. 샌델이 공리주의의 목적론적 구조를 정확하게 겨냥하지 않고 부 극대화 이론과 공리주의를 어이없게 동일시한 채 비판하면서 얼버무린 문제들 중에는 ‘적응적 선호’의 문제가 있습니다. 공리주의에서는 충족되어야 할 선호가 무엇인지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공리주의 이론 자체에 맡기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개인을 둘러싼 여건을 어떻게 주물하고 형성하느냐에 따라 선호가 적응하는 문제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회의 근본 토대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근거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미덕 이론에서도 적응적 미덕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미국에 비해 한국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입법들을 더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표현 자체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하려는 욕구도 없고, 그러다 보니 누군가 그런 표현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전혀 공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근본주의 이슬람 사회에서는 배교 행위를 처벌하는 법을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매우 작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믿을 수도 있겠다, 종교를 가질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 자체가 드뭅니다. 공동체가 삶의 가치를 결정해주는 사회에서는 ‘좋음’을 결정하는 일이 개인의 배후에서, 등 뒤에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적응적 선호’의 위험을 매우 농후하게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덕을 이유로 자유를 제한하려면 이런 심리적 과정이 일어날 개연성을 분명히 고려해야 합니다. 적응적 미덕에 관한 저의 논증에는 부분적으로 경험적인 주장이 포함되어 있고, 저는 그 주장이 인간의 여러 사회를 살펴보았을 때 무척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편집자: 그렇지만 샌델은 실제로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런 사회를 지지하지 않고, 거기다 지금까지 말씀해주신 단점들을 피하면서 미덕을 진작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고 보는 독자들도 있는 것 같은데요? 이한: 반복해서 말씀드렸듯이, 그런 방법이 그냥 임의로 그은 구분선이 아니라 (우리는 그런 선은 침대에 누워 백만 개라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다른 숙고된 판단 및 원리에 적절한 타당한 원리의 형식으로 진술되지 않는 한, 샌델 개인의 구체적인 확신은 논점에 별 차이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샌델이 그런 사회를 확고하게 피하고 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오히려 샌델의 저술에 흩어진 구체적인 판단들은 ‘떡검’이나 ‘견찰’과 같은 과격한 표현이 금지되는 사회를 전혀 저어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웨스트 버지니아 주 교육위원회 대 바넷West Virginia State Board of Education vs. Barnette’ 사건에서 미 연방 대법원은 종교를 이유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아동을 퇴학시키고 재입학을 거부한 웨스트 버지니아 주의 조치를 위헌이라고 판시했습니다. 그러나 샌델은 『민주주의의 불만』에서 이 사례에 대해 논평하면서, "국기에 대한 경례"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고무하는 적절한 방식인데, 종교적 선택을 이유로 이와 같이 판시한 것은 타락한 절차적 공화국으로 빠져버린 일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샌델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큰 환영을 받았고 샌델 교수 본인도 한국을 무척 좋아합니다. 아주 오래된 판결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그 뒤 별도의 판결로 변경된 적이 없는 이 판결은 미덕 논리의 위험성을 잘 보여줍니다. ‘대법원 1976.4.27. 선고 75누249 판결’은 "김해여자고등학교는 ‘1950.5.16자 총제430호 국무총리의 국기에 대한 경례 통첩’과 이에 의한 ‘문교부의 국기에 대한 예절에 관한 지시’ 및 ‘1973년도 고등학교 학생교련교육 지침서’에 따라 국기에 대한 예절은 "국기에 대한 경례"의 구령으로 시작되어 경례 방법은 제복 제모를 착용한 학생들은 거수경례를 하도록 되어 있는데 위 학교의 학생인 원고들이 나라의 상징인 국기의 존엄성에 대한 경례를 우상숭배로 단정하고 그 경례를 거부한 것은 국기 예절에 관한 위 학교의 교육 방침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보아 퇴학 처분한 징계처분은 적법하다."고 하면서 “원고들의 종교의 자유 역시 그들이 재학하는 위 학교의 학칙과 교내 질서를 해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보장되는 것”이고 “징계처분을 받음으로 인하여 종교의 자유가 침해된 결과를 초래하였다 하더라도 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대법원은 '나라의 상징'인 국기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이 국민의 당연한 미덕이라는 단언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 단언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강제하는 것이 애국심을 진작하는 적절한 방식이라는 샌델의 미덕 이론에 근거한 주장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편집자: “공동체의 미덕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사회가 움직여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주장 자체가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는데요. 이한: 이는 정치철학자의 주장을 “뻔한 소리”(truism)로 읽는 방식입니다. 자유주의를 반대하면서 나온 주장은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맥락 그대로 읽어야 합니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선문답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others being equal)” 미덕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움직이는 게 좋다는 추상적인 주장에 누가 동의하지 않겠습니까? 정치철학자의 이론이나 저술에 이런 정도의 내용만 담겨 있다면 정치철학자의 책을 읽을 이유가 없습니다. 시간 낭비, 돈 낭비입니다. 그냥 지금 판단하는 대로 결정하면 끝입니다. 그런데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서 다른 사람의 책을 읽고 뻔한 소리 이외의 것이 있는데도 이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뻔한 소리에서 갑자기 비약한 자신의 확신에 걸맞은 정도의 추론의 수고를 거치지 않은 판단을 손쉽게 보증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샌델의 주장은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이라는 제한 조항을 대담하게 뺍니다. 그는 미덕을 증진하기 위해 다시 주조해야 할 대상으로 자유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그러니 결코 그런 뻔한 소리가 아닙니다. 7. 자유주의자가 실업수당과 복지 제도를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 편집자: 선생님이 “집단적 책임”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즉, “저자가 ‘집단적 책임’을 ‘국가의 법적 책임’과 동일시”하면서 샌델의 논의를 제대로 비판하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인데요. 독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유주의의 관점에서는 어떤 행위에서 개인의 직접적 의도나 동기를 찾을 수 없다면 해당 행위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라고 설명한 다음, 따라서 자유주의에서 집단적 책임은 단지 개인의 책임과 공정성의 원리를 위반한 것으로만 비난받을 가능성이 크고, 이는 현실에서 집단적 책임의 문제(예를 들어 홀로코스트 이후의 독일인들)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자유주의적 관점을 가진 저자는 따라서 국가를 통한 법적 책임이 문제 해결에 더 효과적이라는 엉뚱한 답을 내놓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고요. 이한: 우선 지적할 점은, 국가의 법적 책임은 법적 책임을 떠안기로 하는 정치적 결단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시민들이 그 책임을 공유하기로 해야 법적 책임을 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시민들이 국가의 공무 수행 과정에서 벌어진 불운으로 생긴 피해를 함께 떠안아야 할 책임이 없다고 본다면, 그런 피해를 보상하는 입법은 이루어지지 않겠죠. 그러므로 자유주의 이론에서 국가의 법적 책임에 대한 논의가 도덕적 책임에 관한 논의와 단절된 지평에 있다는 독자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세르비아 국민들 사이에서 스레브레니차 학살에 대한 집단적 책임을 온당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면, 국제형사재판소가 그렇게 실망스러운 상징적 판결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 즉 집단적 권리와 의무가 도대체 왜 그런 내용으로 발생하는가에 관해 상세히 논했습니다. 공무 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를 보상하는 문제에 뒤이어, 저는 한 오케스트라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 오케스트라는 오래전 비열한 방식으로 다른 경쟁 오케스트라를 파멸시키고 독주해 왔습니다. 오케스트라에 새로 가입한 단원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저는 단원이 오케스트라의 과거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고 썼습니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구성원이 됨(membership)에서 자랑스러움과, 명예, 찬탄, 그리고 경제적 이득에 이르기까지 유무형의 여러 이득을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속한 오케스트라라는 집단의 구조와 여건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랑스러움은 느끼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기회주의적인 태도이며, 이는 이득과 부담의 공정성의 원리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도외시하면, 독일에서 박해를 당한 유대인 역시 과거에 독일인이었던 적이 있으므로 나치의 만행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는 스탈린에 의해 우크라이나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조차 한국의 베트남 파병에 집단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은 이상하다고 봅니다. 결국 이것은 정체성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결국 부끄러움을 느끼는 정체성의 범위는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에 따라, 즉 이득과 부담의 공정성 원리에 따라 경계가 그어지는 것입니다. 같은 땅에 살고 있다거나 같은 핏줄이라거나 하는 자연적 사실에 의해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주의가 ‘개인의 책임이 아닌 것은 보상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한다는 주장은 샌델의 전형적인 왜곡입니다. 그러면 자유주의가 실업수당과 복지 제도를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일 이유도, 한 사회의 불운을 개인들이 공유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샌델은 자유주의가 실업수당 제도를 부인한다는 점을 먼저 논증하고 자신의 그 기이한 캐리커처를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 X가 실직을 당했고, Y는 X를 해고한 사람도 아니고 전혀 무관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Y도 그 불운을 함께 공유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불운의 공유를 지지하는 법 제도를 계속해서 지지하고 그 원리를 공지하고 확인합니다. 그런 질서만이 공정한 기본 구조에 따르는 개인의 지위, 즉 개인의 자유롭고 평등한 지위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정확히 그와 같은 내용의 집단적 책임이 왜 발생하느냐는 이런 정의론에 의거해 해명되는 것입니다. 롤즈가 말하는 질서정연한 사회, 즉 정의관이 널리 알려져 있고 그런 정의관에 맞는 정의감을 구성원들이 갖게 되는 사회에서는 정의로운 질서를 회피하지 않는 집단적 책임감을 누구나 가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반면에 샌델이 집단적 책임을 설명했다고 말하면서 제시한 것이 무엇입니까? 단지 “집단적 자아”를 발명하고 그 자아가 존재한다는 존재론적 주장을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자신이 승인하고 싶은 의무에 상응하는 자아를 발명하는 것은 논증이 아닙니다. 침대에 누워서 백만 개라도 그런 자아를 발명해낼 수 있습니다. 그냥 어떤 의무를 지는 범위의 사람들을 경계 긋고 그 범위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명칭 옆에 “~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말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는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이렇게 해서는, 타당하지 않은 집단적 권리와 타당한 집단적 권리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저는 이 점을 윌 킴리카(Will Kymlicka)의 캐나다 인디언 공동체에 대한 논의를 통해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인디언 공동체가 자신의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다수자들의 이주를 제한하고 자신들의 자치권을 주장하는 것은 인디언들을 사회의 다수와 평등하게 대우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이므로 타당합니다. 하지만 인디언 공동체 내부에서 구성원의 배교를 처벌한다거나, 바깥세상으로의 이주를 제한할 수 있는 집단적 권리를 허용하는 것은, 오히려 그 공동체 내부의 구성원들에게 더 불평등하고 축소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되어 타당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에 의해서는 이런 논증이 모두 가능하지만, 단지 ‘집단적 자아’, ‘공동체적 자아’가 있다고만 말하는 주장에서는 차이를 둘 수가 없게 됩니다. 이는 샌델이 종교 집단 아미시 공동체의 조처를 지지한 사실에서도 드러납니다. 샌델은 아미시 공동체의 성인 구성원들에게는 공동체의 미성년 구성원들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차단할 권한이 있다는 주장을 지지했습니다. 8. 좋은 삶의 조건 편집자: 또한, 샌델이나 찰스 테일러 같은 공동체주의자들과 달리 저자는 “자신의 좋은 삶에 대한 가치 판단이 틀릴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결정할 수 있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이한: 제 생각에는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전반이 그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5장에서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좋은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으로 두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로,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도에서) 그 신념에 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둘째로, 그 신념들에 대하여 자유롭게 의문을 던지고 우리의 문화가 제공하는 모든 사례와 정보에 비춰 그것들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런 여건이 결여된 삶은 자기 자신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진정성’이 결여된, 타인에 의해 ‘지배되는 삶’이며, 사실상 다수의 판단에 따라 사는 부분적 노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이 타인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좋은 삶에 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형벌이나 징계, 세금 등의 위협에 의해 살아가는 것은 등 뒤에 총을 대놓은 채로 살아가는 것과 별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필수적인 조건을 스캔론은 “약한 자율성 조건”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조건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오로지 자기와 동일한 신념이 공동체 전체에 강제되는 것만 염두에 두고 있을 뿐,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신념이 공동체 다수에 의해 부인되어 그 신념을 추구할 자유가 부인되는 경우는 전혀 상정해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은 옳은 게 틀림없다는 오만이자, 원리란 보편적으로 수용 가능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한 소치입니다. 자유주의의 논변은 매우 강력한 것입니다. 자유주의는 종교 전쟁의 크나큰 비극에서 교훈을 얻은 사람들이 발전시켜온 이론이자 문화입니다. 이것을 뒤엎는다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게 된 바로 그 원리를 뒤엎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주장의 대담함에 걸맞은 탄탄한 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내부의 확신, 샌델이나 찰스 테일러 같은 사람들이 “공동체가 개인의 좋은 삶에 대한 가치를 결정해야 한다.”는 대담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근거들은 하나같이 허약합니다. 기껏해야 사람이 공동체를 떠나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는 곧바로 공동체가 개인을 지배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비약하는 수준의 논증밖에 없습니다. 때때로 샌델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확신을 자극하여 그런 대담한 주장을 선취하려 합니다. 예를 들어 스코키 마을의 신(新)나치 행진을 허용할 것인가에 관한 판결 같은 사안 말입니다. 한국 독자들이 잘 모르는 사실, 즉 미국에서 신나치의 표현이나 집회가 합법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안은 신나치의 표현이나 집회를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대인 피해자들의 집단적 거주지가 된 스코키 마을에 신나치의 행진을 허용하여 그 피해자들에게 큰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적 공격에 관한 원리(The Offense Principle)에 의거해서 논의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조엘 파인버그(Joel Feinberg)는 『Offense to Others』 86~96쪽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파인버그가 주의 깊게 개진하듯이 섬세한 형량(balancing)이 필요한 사안입니다. 이 사안은 단지 “그 견해가 틀렸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라는 일반 원리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신나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경멸하는 견해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입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주장의 배경이 되는 원리 일반에 대한 지지를 획득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논증이 아니라 한 사안에 대한 격렬한 공감만 얻은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신이 경멸하고 혐오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찬탄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자유를 주장합니다. 이런 본성에 부합한다는 것이 그 원리의 건전함을 이야기해주지는 않습니다. 언론의 자유에 관한 다음과 같은 제안은 어떻습니까? “우리 헌법은 악의와 추문, 명예 훼손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이 거짓이거나 나쁜 동기로, 또는 정당한 목적 없이 발표되었을 때는 말이다. 우리 헌법은 정직하고 주의 깊고 양심적인 언론을 위한 보호막이다.”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정직하고 주의 깊고 양심적인, 다시 말해 미덕을 갖춘 언론에게만 보호막을 제공해준다는 이상은 참으로 타당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문장은 미네소타 주 대법원이, 1925년에 미네소타 주 의회가 입법한 “악의적이고 추문을 일으키고, 명예를 훼손하는” 신문들을 폐간할 수 있게 한 공적생활방해법(Public Nuisance Law)을 적용하면서 썼던 판결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 폭력배들이 공무원들과 결탁하여 정부를 부패시키고 있다.”고 비난하는 기사를 실은 언론을 폐간시키는 명령에 관한 것이었죠. 이 ‘니어 대 미네소타 Near v. Minnesota’ 사건에서 연방 대법원은 폐간 명령이 수정헌법 제1조를 위반했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반대 의견을 작성한 피어스 버틀러(Pierce Butler)의 의견을 들어볼까요? 그는 미네소타 주법과 같은 조건이 없다면, 수정헌법 제1조는 “공화주의의 재앙이 될 지도 모른다. (…) 언론의 테러를 통해 가장 고결한 애국자들을 혐오스럽게 만들고, 가장 나쁜 형태의 독재를 도입함으로써 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는 모조리 추방해야 한다, 일하는 여성을 위한 복지 제도는 경제 성장에 도움이 안 되므로 막아야 한다, 동성애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등의 수많은 경멸할 만한 표현들이 오고갑니다. 그러나 무엇이 틀린 견해이고 틀리지 않은 견해인지에 따라 그것을 검열하기 시작하면 원리상 우리가 멈춰야 하는 선은 어디일까요.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검열을 열정적으로 주창한 캐서린 맥키넌(Katherine Mackinen)은 로널드 드워킨이 맥키넌의 입법안과 논변을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하자, ‘드워킨은 포르노 잡지에 추잡한 글을 써대는 작자와 다를 바가 없다.’며 격렬한 분노를 드러냈습니다. 드워킨의 자유주의적 주장이 영향력을 얻는다면 맥키넌이 그토록 혐오하며 악덕으로 비난하는 포르노그래피 허용론자들이 힘을 얻을 것이고, 맥키넌은 드워킨이 제시한 논거가 하나같이 무가치하고 오류라고 생각하므로, 맥키넌의 목적에 따르면 당연히 드워킨의 주장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논리적입니다. 이처럼 어떤 견해의 옳고 그름을 공동체가 규정하고 금지하는 일은, 인간 삶의 근본적 조건을 부패시킵니다. 우리가 민주주의 정부의 결정을 수용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에게 표현의 자유가 충분히 주어졌지만, 우리들이 다수를 설득하지 못했다고 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표현의 자유에 개입하게 되면 말할 기회가 묵살되었음에도, 어떤 사람들의 견해를 검열로 인해 듣지 못해 우리의 판단이 조작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음에도, 그런 사실 자체도 깨닫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런 고려 사항을 넘어서는, 그래서 샌델의 대담한 주장을 지지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논거를 보지 못했습니다. 9. 상대주의와 개방성의 차이 편집자: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라는 제목 자체도 폭력적이고, 또 저자가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강변하는 듯하여 보기 싫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한: 논증 대화의 특성은 대화 참여자가 각자의 확신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면서도 논변의 타당함을 평가하고자 하는 개방적인 자세에 있습니다. 즉, 더 나은 의견을 찾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견해를 제시할 때는 자신의 견해가 더 낫다는 점을 보이면서 주장하는 일이 당연히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결론을 표명하지 않고 이것도 저것도 다 타당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논증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반응 교환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에 대해 ‘다르다’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적합하고 ‘틀렸다’라는 말은 결코 써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논증 대화를 기회주의적으로 회피하는 문화에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저는 그 문화의 정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첫째, 특정 견해를 논박하는 것이 그 견해를 견지하는 사람의 가치까지 깎아내리는 일로 오해하는 것. 둘째,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표현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의 말이 저마다 다 타당하다는 결론에서의 평등까지 보증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따라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적절한 행위는 어떤 견해도 논박하지 않고 짐짓 상대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전제 말입니다. 이렇게 ‘더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에 오염되고 나면 대충 생각하는 버릇에 물듭니다. “그래, 네 결론은 그렇겠지. 그러나 내 결론은 달라. 끝.”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법적 권리와 의무의 할당, 국가 권한의 내용과 그 한계’에 관해 마냥 상대주의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투표, 정책에 대한 지지 하나하나가 강제력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재산권에 관한 특정 사회 질서는 재산 소유자에게 배타적인 권리를 주고, 그 권리를 존중해야 할 의무를 부여하며, 그 의무를 어겼을 때 처벌을 안겨줍니다. 우리는 이 질서를 회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특정 권리 질서에 대한 자신의 최선의 논증을 밝히고 검토해야만 하는 상황에 실존적으로 처해 있습니다. ‘상대주의’와 ‘개방성’은 혼동되어서는 안 되는 다른 개념입니다. ‘개방성’이란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잠정적이며, 더 나은 답을 찾기 위해서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논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열렬히 지지하던 견해에 결정적인 반대 증거가 나오면 견해를 바꾸고, 반례가 제기되면 그 반례를 설득력 있게 처리하려고 하고, 상대의 주장 중 옳은 부분이 있으면 수용하는 태도 말입니다. 만약 이렇게 결론 내려도 좋고 저렇게 결론 내려도 좋은 문제를 두고 논의할 뿐이라면 개방성이 가치 있는 것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개방성은 모든 주장을 똑같은 논증 가치를 갖는 것으로 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견해를 여러 번 바꿨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자유지상주의자였던 적도 있었고, 또 복지에 비해 자유의 가치를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쟁점, 예를 들어 최저임금제, 임대료 상한제, 사형제나 모병제에 관해서도 십수 년간 한두 번씩, 많으면 세 번씩 견해를 바꿨습니다. 저는 이것은 논증 대화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봅니다. 자신의 주장이 끝나는 문장마다 “저는 개인적으로”라는 말을 앞에 붙이고 “~ 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인 것 같네요.”라고 마무리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논증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안을 충분히 검토해보고 확신을 가졌다면 일단 그 확신의 형태로 논의를 개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책의 모든 문장마다 그런 문구를 앞뒤로 삽입할 수는 없습니다. 샌델 역시 자유주의가 “틀렸다”고 하며, 자유주의가 공화국을 타락시켰다고 합니다. 저는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들을 책에 쓰긴 했지만, 이후에 더 타당한 논의가 그와 반대되는 결론을 지지하면 얼마든지 그 반대 결론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논증과 논증이 부딪히는 대화는 회피할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까지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논증의 제시는 폭력이 아닙니다. 논증 대화를 어느 시점에 종료해버리고 공동체가 특정 견해를 모든 이에게 강요할 때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 어느 쪽이 폭력의 편에 서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의견을 제시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되, 합당하고 개방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야말로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편집자: 판에 박힌 자유주의적 비판을 썼을 뿐이라는 한 줄 평도 있군요. 이한: 어떤 논증의 타당성은 ‘판에 박혔느냐 아니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1+1=2’의 수식을 판에 박힌 수식이지만 타당한 수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에서는 몇 가지 중요한 새로운 논증이 담겨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미덕이 공정성과 같은 차원에서 경쟁하는 개념이 아닌데, 이것을 같은 차원에서 서로 경쟁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샌델의 논변은 ‘범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샌델의 ‘미덕’ 파악 방법은, 그 미덕을 파악하는 맥락이나 범위를 조정함에 따라 너무나 쉽게 변형 가능해서(malleable) 어떤 정치적 주장에서도 꽤 그럴듯한 미덕의 논변을 덧붙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책에서 자유지상주의자의 ‘시민의 미덕’(자신의 경제적 생존을 스스로 책임지는 독립적인 사람)과 자유주의자의 ‘시민의 미덕’(서로 평등한, 굴종하지 않는 관계)이 모두 ‘미덕’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각각 다른 의미를 담는다는 것, 그리고 복지 제도에 관한 논의에서 ‘미덕’이라는 이름을 달고 동시에 등장할 수 있음을 킴리카의 예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그 밖에도 샌델의 미덕 이론이 공리주의와 목적론적 구조를 공유하며, 따라서 공리주의의 목적론적 구조에서 생기는 난점과 유사하다는 점, 롤즈에 대한 비판의 부당성, 자유지상주의를 지렛대로 자유주의를 공격하는 논변의 허점 같은 것도 제 나름의 기여(contribution)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핵심 명제들은 어떤 평에서도 적절하게 논의되거나 음미되지 않았습니다. 편집자: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한: 정치철학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인식론적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결정하는 일에 사용될 수 있는 논증과 논거에 대해 시간을 더 많이 들여 깊이 생각해본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우리는 결국 함께 논증 대화의 지평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논변을 뻔한 소리로 여기고 가던 길을 그대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 한국 사회에서 정치철학이 진정한 배경 문화가 되려면, 보다 구체적인 사안들에 가까이 다가가 정치철학을 논의하는 작업이 더 풍부하게 나와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기회가 닿는 대로 그와 같은 작업을 할 생각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이한 지음 | 미지북스 | 2012 추천사 쓰나미처럼 우리 지성계를 강타했던 샌델 신드롬을 잠재우며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하는 자유주의적인 비판서. - 황경식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저자의 출간 강연회 녹취록이 미지북스 블로그에 아래와 같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신장 매매, 비정규직 문제, 2009년 교원 시국 선언 등 실제 한국의 사례를 들어 샌델의 이론과 자유주의가 어떻게 다른지, 이런 사례를 정치철학은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추가적인 자료는 저자가 운영하는 홈페이지 시민교육센터(http://civiledu.org)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네 몸은 네 것이 아니다!" 신장 매매 문제 http://mizibooks.tistory.com/33
2. "노동자의 본성은 … ?" 비정규직 문제 http://mizibooks.tistory.com/34
3. 2009년 교원 시국선언, 샌델식 논리의 결론은? http://mizibooks.tistory.com/35
4. 질의 응답 http://mizibooks.tistory.com/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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