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과학사학회지> 33-1 (2011), 241-248쪽에 "과학과 회의론의 사이에 선 과학사"라는 제목으로 실린 서평으로, 학회지와 저자의 허락을 받아 이곳에 싣습니다. 서평에서 다뤄진 책은 이후에 2012년 1월 『의혹을 팝니다』(유강은 옮김, 미지북스)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 출간됐습니다.
과학과 회의론의 사이에 선 과학사
김준수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박사과정
『의혹을 팝니다』, 유강은 옮김, 미지북스, 2012.
(Naomi Oreskes and Erik M. Conway, Merchants of Doubt: How a Handful of Scientists Obscured the Truth on Issues from Tobacco Smoke to Global Warming, New York: Bloomsbury Press, 2010.)
한때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 여겨지던 지구온난화가 언제부터인가 회의론의 공격에 휘말리게 되었다. 2001년에 영어로 출간되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회의적 환경주의자』에서 비외른 롬보르는 여러 통계자료를 제시하면서 환경주의자와 기후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지구온난화의 위협을 지나치게 과장한다고 주장했다. 애당초 지구온난화가 인간 활동 때문이 아니라는 주장도 대중 속을 파고들었다. 이산화탄소 증가가 지구온난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지구온난화가 이산화탄소 증가를 불러오는 것이며 사실 지구온난화는 활발한 태양 활동 때문이라는 식의 주장을 고스란히 담은 다큐멘터리 <지구온난화 대사기극(Great Global Warming Swindle)>은 2007년 영국에서 방영되자마자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지구 온난화가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거나 인간의 손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런 현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차차 확산되는 가운데, 코펜하겐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를 전후로 일어난 이른바 “기후게이트”와 “빙하게이트”는 회의론자들에게 다시 한 번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입맛에 맞지 않는 연구 결과를 사전에 봉쇄하고 주장과 어긋나는 근거를 숨기려 하는 기후변화 연구자들의 모습, 그리고 기후변화 정부간 위원회(IPCC) 제4차 보고서에서 발견된 수치상 오류는 기후과학에 대한 신뢰를 크게 떨어트렸고, 그만큼 회의론이 수용되기 쉬운 상황을 만들었다.
▲ (좌)미국 앨버커키에서 한 티파티 참가자가 "지구 온난화는 사회주의자들의 사기"라는 팻말을 들고 있다.
▶ (우)지구온난화 회의론 풍자 만화.
어느 때보다 지구온난화 회의론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때, 과학사학자 오레스키스와 콘웨이는 『의심을 팔아먹는 자들(Merchants of Doubt)』을 통해 이와 같은 회의론을 과학에 대한 위협이라고 규정하면서 적극적으로 전선에 뛰어들었다. 얼핏 지구온난화를 둘러싼 ‘논쟁’은 지구 온도 상승의 원인과 파급 효과를 둘러싸고 서로 대립되는 과학적 의견이 팽팽히 맞서는 일종의 과학 논쟁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저자들은 ‘논쟁’이라는 틀 자체가 과학적 사실에 흠집을 내려고 노력해 온 회의론자들이 만들어낸 허구적 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과학계 내의 의견불일치, 즉 과학 대 과학의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계에서 어느 정도 합의에 도달한 문제까지도 논란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려는 회의론자들의 비과학 내지는 반과학적 행태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들이 사용하는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전략은 과학사로부터 끌어온 교훈을 토대로 회의론과 과학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각각의 이슈에서 과학자사회가 도달한 합의와 회의론자의 주장을 대비시키고, 회의론을 펼치는 자들이 어떻게 과학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흐리려 했는지를 강조했다. 저자들의 두 번째 전략은 회의론의 역사적 연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두 저자는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회의론의 역사적 연원을 추적하면서, 지구온난화를 둘러싼 잡음에서 두드러지는 과학에 대한 공격이 이미 1950년대부터 직간접 흡연의 유해성, 전략방위계획, 산성비, 오존층 파괴 등 다양한 이슈에 걸쳐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처럼 『의심을 팔아먹는 자들』은 두 명의 과학사학자가 자신의 전문가적 역량을 십분 활용하여 현안에 목소리를 내려는 적극적 시도의 결과물이다.
일단 과학에 대한 회의론이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역사적 산물임을 드러낸 것은 이 책에서 높이 살만한 부분이다. 이런 접근을 통해 독자들은 개별 사안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을 넘어 논란 전반을한층 넓은 시야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저자들은 과학에 대한 회의론의 출발점을 담배회사에서 찾았다. 흡연이 암을 유발한다는 연구가 언론에 보도되자, 담배회사들은 특정 개인에게 발생한 암의 원인을 흡연이라 특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했고,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담배 외에 퇴행성 질환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들에 대한 연구를 장려하면서 “의심을 만들어냈다.”(담배회사의 지원을 받아 인체에 해로운 다른 요인을 탐구한 연구자 중 한 명이 프리온을 발견한 스탠리 프루지너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저자들은 이처럼 과학의 불확실성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다른 인과관계를 제시하여 논점을 흐리는 이른바 “담배 전략”이 산성비, 오존층 파괴, 간접흡연, 지구온난화 문제에서 지속적으로 변주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회의론자들은 “담배 전략”을 본받아 산성비나 오존층 파괴와 같은 환경문제가 원인도 불분명하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 만큼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는 주장을 펼쳤고, 간접흡연의 경우에는 한층 더 공세적으로 나서 환경보호청(EPA)이 흡연량과 유해성 간의 선형적인 관계를 전제로 간접흡연이 치명적이라고 주장한다면서 환경보호청이 내놓은 보고를 “쓰레기 과학”, “나쁜 과학”의 전형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저자들은 이와 같은 회의론을 하나의 맥락으로 엮으면서, 이들이 제 나름대로 과학의 외양을 띠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별 이슈의 맥락에 뿌리를 둔 대안적 과학 이론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을 폭로한다. 그보다 이들은 산업계의 이해관계를 지키려던 시도에서 유래한 반론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회의론 간의 전략적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기여는 바로 이 책이 회의론 진영의 주축이 되었던 소수의 과학자를 밝혀낸다는 점이다. 그리고 제목과 부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바로 이것이야말로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고 싶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저자들은 프레더릭 사이츠(Frederick Seitz), 로버트 재스트로(Robert Jastrow), 윌리엄 니런버그(William Nierenberg), 프레드 싱어(Fred Singer) 등과 같은 과학자들을 지목하면서, 이들이 자신의 전공 분야와 상관없이 온갖 이슈를 넘나들며 이미 존재하거나 형성되고 있던 과학적 합의를 흩뜨리고자 애썼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1979년 담배회사와 협력하여 담배산업에 우호적인 연구를 할 만한 연구자 육성에 참여한 사이츠는 니렌버그, 자스트로와 함께 조지 마셜 연구소(George C. Marshall Institute)를 설립하고 전략방위계획(SDI)을 열렬히 옹호했다. 비슷한 시기에 니런버그와 싱어는 함께 산성비 동료심사단에 참여하여 보고서의 요약문 조작에 참여했으며, 80년대 말부터는 네 명 모두 지구온난화에 대한 논란을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저자들은 이 인적 연결고리를 물증으로 제시하면서 과학에 대한 공격이 이런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성장하며 보수적 싱크탱크, 언론, 기업체 등 다양한 세력과 접합할 수 있었다는 점을 보인다. 이렇게 보면 여러 회의론은 과학계에서 소수에 불과한 몇몇 과학자들이 제기하는 한낱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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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의심을 팔아먹는 자들』은 여러 이슈들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소수 과학자들의 활동을 부각시켜 냉전 시대의 과학이 지닌 어두운 면모를 드러내는 데 큰 공헌을 한다. 저자들은 이 과학자들이 과학을 버리고 거리낌 없이 “의심을 팔아먹는 자들”로 돌변할 수 있었던 이유를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연결 지어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 인물들은 모두 물리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며 군부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자신의 경력을 쌓았다. 가령 사이츠는 매파로 이름난 물리학자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의 수제자로, 전시에 탄도학, 원자폭탄처럼 군사적 응용과 직결된 연구에 종사한 바 있었다. 마찬가지로 니렌버그는 원자폭탄에 사용될 수 있는 우라늄 추출을 연구했고, 싱어는 해저 기뢰와 대기 로켓공학 연구를 수행했다. 이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공유하면서 소련의 위협에 맞대응하기 위해 군비를 대폭 증강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것이야말로 자유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기며 시장과 기업, 자본주의를 방해하는 어떤 시도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따라서 이들의 눈에 시장 규제와 정부 개입을 부르짖는 환경주의자들은 가면을 쓴 공산주의자와 다를 바 없었다. 말 그대로 “냉전의 적자”라 할 수 있는 이 과학자들의 성향과 사고방식은 그들이 왜 점차 과학계에 등을 돌리고 기업 및 보수적 싱크탱크와 점점 강력한 연대를 구축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들이 과학계와 담을 쌓고 차차 과학 자체를 싸잡아 공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계기가 전략방위계획이었다는 사실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닌 셈이다. 이처럼 회의론의 전략적, 인적 연속성을 창문 삼아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냉전 시대의 역사와 그 유산을 읽어내는 저자들의 안목은 단연 압권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두 번째 전략이 남긴 성과에 비해 과학과 회의론을 뚜렷이 대비시키는 첫 번째 전략은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저자들은 책 곳곳에서 바람직한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면서, 회의론자들이 어떻게 과학의 정상적 작동을 가로막거나 무시했는지를 강조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과학과 비과학, 반과학의 구획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과학사학자가 저술한 책인데도 그 내용이 과학자들의 과학 옹호 논변이나 대중 과학서적의 논지와 별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간 과학사와 과학기술학의 연구들이 과학과 비과학 사이의 경계가 생각만큼 뚜렷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해왔다면, 이 책의 저자들은 별다른 논의 없이 둘의 경계를 분명히 나눌 수 있다는 입장으로 회귀하는 듯 보인다. 저자들은 과학이 과학적 방법을 따르기만 하면 자연스레 도달하게 되는 사실들의 집합이 아니라 “발견의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증거를 바탕으로 가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험해보고 동료들의 엄정한 심사를 거칠 때에만 비로소 과학적 연구라고 부를 수 있다고 역설한다. 즉 과학은 과학자사회에서 확립된 제도적 장치를 통해 여러 명의 학자들이 빚어내는 공동의 산물인 것이지 개개인의 성취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면 주로 소수의 과학자에 의존하는 회의론을 과학의 영역에서 추방하는 일이 무척 간단해진다. 그런데 사실 과학자사회를 구획의 주된 기준으로 보는 관점은 과학자들이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의 활동을 변호하며 사용하는 논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기후게이트 이후 기후변화에 대한 회의론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미국 과학아카데미의 과학자 250여 명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과학적 결론이 확실성을 보장하진 않는다면서 개별 과학자의 실수를 교정하는 과학의 자기 교정 능력을 강조했다.1)
이런 식의 회귀는 언론과 전문성에 대한 저자들의 입장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저자들은 언론이 양당제에나 어울릴 만한 “기회 공평의 원칙(Fairness Doctrine)”을 과학에도 곧이곧대로 적용하기 때문에 소수에 불과한 회의론이 마치 논쟁의 한 편을 담당하고 있는 것처럼 과다 대표된다고 계속해서 지적한다. 저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언론과 대중 모두 과학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즉 과학은 민주주의와 다르므로 소수의 입장을 공평하게 대변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며, 과학적 합의가 존재할 때 언론은 합의를 알리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해결책은 소위 ‘전문가’의 명성에 기대는 대신 그 전문가가 지닌 전문성을 꼼꼼히 뜯어보는 것이다. 저자들은 현대와 같은 전문가 사회에서 과학자들이 이룬 합의가 과학과 관련된 이슈에서 우리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강조하지만, 이때 신뢰 여부는 전문가가 지금까지 보인 습성, 연구 분야, 연구경력, 이데올로기나 이해관계 등을 토대로 판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좁은 전문성”에 대한 옹호는 저자들이 말하는 “과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핵심을 이룬다. 그런데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를 판단의 근거로 끌어들이는 방법은 회의론자들이 과학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방법과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을뿐더러, 과학 활동이 기업, 정부 등과 더욱 밀착하여 이루어지는 현실에서 그리 유용한 지침도 못 된다. 또한 과학적 합의와 전문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언명은 주류 전문가 집단이 지니는 이해관계에 도전할 수 있는 길을 매우 협소하게 만들어놓음으로써 자칫 잘못하면 과학 논쟁에서 소수 파의 입지를 억누르는 논변으로 오용될 수도 있다. 대중의 과학 이해, 과학기술의 민주화 등등 그간 과학기술학에서 일군 많은 성과가 전문가 정치의 취약성과 한계를 인식하고 다양한 행위자를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전개됐다면, 여기서 저자들은 당장 회의론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다시 전문가 정치의 기치를 세우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 대한 책임을 저자들에게만 묻는 것은 가혹한 일일 것이다. 사실 저자들이 과학과 비과학의 구획이 까다로운 문제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며, 신뢰를 중심으로 하는 과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도 과학의 확실성을 거부해온 과학기술학의 성과를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도 어떻게든 회의론의 위협을 떨치려는 노력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오히려 이 책이 주는 고루한 느낌은 과학사 및 과학기술학이 풀어야 할 문제가 바뀌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들이 인용하는 『과학, 기술, 인간적 가치(Science, Technology & Human Value)』 30호에는 과학의 특수성을 탐색하며 “사회화된 구획”의 방법이 없을지에 대한 과학기술학자들의 고민이 담겨 있으며, 라투르도 한 논문에서 사회구성주의의 무기가 온갖 회의론과 음모론에서 변주되는 현실에 곤혹스러움을 표출한 적이 있다.2) 예전에 과학기술학은 과학이 합리적 방법론을 따라 형성되는 객관적 지식이라는 가정에 도전하면서 과학과 다른 사회적 실천 간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과학의 지평을 넓히려 노력했지만, 이제 일군의 과학기술학자들은 과학의 외양을 띤 여러 ‘비과학’들과도 경계를 지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다고 느끼고 있다. 아마 이 책에서 오레스키스와 콘웨이가 다루는 환경문제에 대한 회의론은 그중 대표적 사례일 것이며, 혹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온갖 회의론에서 진화론과 지적 설계론의 ‘갈등’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결국 과학사와 과학기술학은 한편으로 과학기술학이 과학의 지평을 넓히며 쌓아온 성과를 버리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비과학’과도 거리를 두는 이중의 과업을 수행해야 하는 난제를 앞에 두고 있는 셈이다. 아쉽게도 오레스키스와 콘웨이는 이런 난제를 성공적으로 넘어서지 못하고 과학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으로 회귀하는 길로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이런 아쉬움이 이 책이 갖는 중요성을 떨어트리지는 않는다. 『의심을 팔아먹는 자들』은 과학사학자가 당면한 문제를 인식하고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현실에 개입하고자 했던 보기 드문 시도이다. 그 성과는 적지 않다. 과학사와 과학기술학의 최근 논의를 반영하려 노력했으면서도 결국 과학에 대한 전통적 입장으로 회귀하는 저자들의 모습은 적어도 현재 과학기술학과 과학사를 괴롭히는 어려움을 드러내는 데 일조한다. 또한 이 책은 방대한 사료를 통해 담배회사에서 지구온난화에 이르는 회의론의 역사와 그 주축 세력을 성공적으로 드러냄으로써 학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냉전 시대 과학의 어두운 면모를 확인하고자 하거나, 여러 이슈에서 제기되는 회의론에 비판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의심을 팔아먹는 자들』은 매우 유용한 책이다.
1) “[수첩] “지구온난화 과학 폄훼 말라” 미국 과학자들 성명”, .사이언스온. 2010. 5. 11 http://scienceon.hani.co.kr/archives/7495 (4월 28일 접속).
2) Robert Evans, “Introduction: Demarcation Socialized: Constructing Boundaries and Recognizing Difference,” Science, Technology & Human Value 30 (2005), pp. 3-16.; Bruno Latour, “Why Has Critique Run out of Steam? From Matters of Fact to Matters of Concern,” Critical Inquiry 30 (2004), pp. 22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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