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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북스의 책/인문

『삶은 왜 의미 있는가』- 속물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의 나침반

 

 

 

삶은 왜 의미 있는가

속물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의 나침반

이한 지음 | 미지북스 | 384쪽 | 16,000원

 

 

불완전한 시대를 살아가는 자유인들의 나침반

사유의 근육, 성찰의 언어로 찾은,

‘속물 사회에서 자유인으로 살아남는 법’

 

 

삶은 무의미한 것일까?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삶은 왜 의미 있는가』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속물 사회’로 규정한다. 속물이란, 사람의 가치가 사회에서 그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로 결정된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속물은 자기보다 못생긴 사람,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 자기보다 무능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로 자기 삶의 가치를 측정하고 삶의 방향을 세운다.

저자는 속물의 삶이 의미 있는 삶인지 묻는다. 그리고 속물의 삶이 의미 없는 삶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삶의 기초적인 의미를 찾는다. 의미 있는 삶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노력하는 한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나갈 수 있다고 말이다. 타인의 권리를 해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가치로 채울 때, 우리는 더 이상 속물의 평가에 휘둘리거나 짓눌리지 않고 자유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내일', '나중에', '네가 출세를 하게 되면', '나이가 들면 너도 알게 돼'하며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살고 있다. 이런 모순된 태도는 참 기가 찰 일이다. 미래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니 말이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에서

 

인생에는 객관적인 의미나 가치가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삶의 '참여자'로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야 한다.

 

삶의 의미는 존재하는가?

우리는 이리저리 분투하며 살아가다가 우리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을 때, ‘인생이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곤 한다. 때로는 허무주의적인 생각으로 괴로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당장 눈앞에 해야 할 일들을 감당하느라 이런 생각을 잠시 마음 한 켠으로 치워버리기도 한다. 과연 인생에는 의미가 없는 것일까?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보통 ‘인생이 의미 있다’는 대전제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든다. 그래서 그들은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추상적으로 규정한 다음 인생의 모든 개별적인 활동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지금 먹고, 자고, 느끼고, 계획하고, 노동하고, 사랑하고, 공부하고, 돌보고, 이야기하는 모든 활동들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무의미 논증‘).

그러나 삶이 의미 있는지 질문하고 고민할 때,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참여자’로서 질문하고 고민한다.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먼 우주의 관점이나, 인간을 관찰하는 초월적인 존재의 관점에서 삶의 의미를 질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삶의 의미에 대한 대답도 삶을 살아가는 관점에서 나와야 한다. 즉 ‘삶은 의미 있는가?’라는 질문은 앞으로 더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 관점, 참여자이자 실천자의 관점에서 인생의 무의미를 주장하는 회의주의는 힘을 잃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의 참여자이자 실천자로서 삶의 구체적인 활동인 ‘먹고, 자고, 느끼고, 노동하고, 사랑하고, 이야기하는 모든 활동’을 매일 직접 경험하며 그것을 의미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삶의 의미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삶의 참여자이자 실천자로서 내일을 더 살기로 결심하는 구체적인 경험이 존재한다면,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전제는 거짓이 되는 것이다. (‘유의미 논증’).

유의미 논증은 무의미 논증보다 논리적으로 더 탄탄하다. 왜냐하면 논증은 더 확실한 것을 전제로 삼아 덜 확실한 것으로 진행될 때 더 탄탄하기 때문이다. 무의미 논증은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추상적인 진술을 내세운 다음. 우리가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활동의 가치들을 부인하도록 만들지만 유의미 논증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이다.

 

인생의 내용적 가치와 배경적 가치

인생에 의미가 존재한다면, 구체적으로 인생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저자는 ‘가치’를 구현하는 경험에서 삶의 의미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가치에는 크게 내용적 가치와 배경적 가치 두 가지로 구분된다.

내용적 가치는 자신과 타인의 쾌락을 증대하고 고통을 감소하는 것, 자연과 인간의 노력이 투여된 ‘좋은 것(good, 학문, 문학, 예술 등)’을 음미하고 그것에 기여하는 것, 사람들과 애착과 유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내용적 가치는 개인의 삶을 풍부하게 채운다. 배경적 가치는 타인을 그 자체로 목적인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그에 따라 의무를 이행하고 배려하는 것, 그리고 이를 보장하는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해 자기 몫의 책임을 다하는 것(정치적 책임)이다.

배경적 가치는 나의 인생뿐만 아니라 타인의 인생에서도 내용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배경적 가치는 내용적 가치의 전제이자 제약이 된다. 예를 들어 예술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부당하게 해를 입히는 경우 그 창작 행위는 의미가 박탈된다. 배경적 가치를 위반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자아실현이나 행복과 같은 ‘개인의 삶’에 몰두하는 것만이 의미 있는 삶이라는 주장과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공공의 문제’에 참여하는 것만이 의미 있는 삶이라는 주장이 양극단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자의 주장은 자기에 매몰되어 사회의 위계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데 몰두하면서 공공의 문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정당한 현실로 수용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후자의 주장은 자기를 부정하고 희생을 감수한다는 생각에 억울해하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며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지옥’으로 손쉽게 규정해버리는 편향을 낳는다. 양극단의 두 관점은 개인이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아무런 실천적인 해답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과연 우리는 개인의 관심과 공공의 문제를 동시에 돌볼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찾을 수 있을까? 저자는 자신의 삶과 여건에 맞는 기꺼운 방식으로 내용적 가치와 배경적 가치를 추구할 때, 자존감과 의미로 충만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속물의 세계관 : 남보다 얼마나 우월한가

현대사회는 속물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속물적 세계관은 우리로 하여금 가치와 절연된 인생을 살아가도록 요구한다. 속물의 세계관은 허공의 충동과 의무감을 만들어내고 확산시킨다. 속물적 세계관이 만들어내는 명령은 실질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속에 깊숙이 들어와 영향을 끼친다. 이성에 근거하여 삶의 의미를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가치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속물적 세계관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주인 없는 삶, 의미 없이 낭비된 삶으로 전락할 수 있다.

속물이란 무엇인가? 속물은 특별한 삶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속물에게는 어떤 활동이나 속성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활동이나 속성에서 남들보다 얼마나 우월한가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일등 요리사가 되는 것이 중요하고, 타인의 권리와 복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이타적인 인간이라고 인정받고 그러지 못하는 사람을 깎아내리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속물의 꿈은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양립 가능하지 않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려면, 자신보다 아래에 있어서 자신을 우러러볼 사람들이 언제나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속물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속물의 꿈을 성공적으로 실현하는 일은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속물적인 위계에서 상위의 지위는 구조적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속물은 속물을 만들어 낸다.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속성인 부, 권력, 명예, 외모 이외에도 타인을 줄 세울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속물의 기준이 될 수 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보잘것없는 직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못생겼다는 이유로, 경멸받고 상처받은 사람은 학력 속물, 교양 속물, 심지어 도덕 속물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부유할수록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며 다른 사람들을 경멸한다면, 교양 속물은 이 말에 돈이 많아도 교양이 없다면 그 삶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반응할 것이다.

속물은 일반적으로 정형화된 삶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한다. 입학시험을 치르고, 대학교에 다니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집을 사고, 자식을 기르는 정형화된 삶의 길을 사람들이 잘 따르는지 감시한다. 누구나 당연히 이 단계들을 거쳐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자신이 속물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속물은 정형화된 삶을 무난히 따르지 않는 자들을 경멸하는 한편, 자신도 자칫 경멸당할까 봐 불안해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경멸당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남보다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처럼 보인다. 게다가 더 높은 위치에 올라서는 데 성공한다면, 타인의 존경을 얻고 그들을 경멸하면서 만족감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고통과 좌절이 실재한다고 해서 그 전제인 속물적 욕구가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손 씻기에 강박증이 있는 사람은 당장 손을 씻으면 고통을 해소하고 만족을 느낄 수 있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손을 씻으려는 욕구는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욕구가 삶의 의미에 부합하는지, 그리고 어떤 욕구가 속물 근성에서 비롯하는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속물 근성은 끝없는 지위 경쟁을 본질로 한다. 어느 지위에 올라서도 다음 경쟁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인생의 모든 시간을 경쟁적 활동에 쏟아부어도 늘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속물은 홀로 탁월한 것을 음미할 태도나 여유가 없다. 속물들은 겉보기에 그들의 인생이 대단히 분주하고 가득 찬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허하다.

 

각자에게 맞는 기꺼운 삶의 방식

삶의 의미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삶의 방식은 모두 다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가지고 있는 기질과 능력, 처한 여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인정해야 삶을 기꺼운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 외국어를 남들보다 잘하고 싶지만 소질이 부족해 배우는 속도가 느린 사람은, 자신의 처지에 괴로워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기질과 능력, 여건을 인정하지 않아서 불필요하게 괴로워하는 것이다. 자신이 남들보다 외국어를 잘하는가 못하는가를 따지고 남들보다 더 잘하고 싶어 하는 욕구는 속물 근성이다.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사는 것이 목표라면, 외국어 실력이 내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지를 판단해야 한다. 만약 그렇다고 판단한다면 나에게 효과적인 외국어 학습 방식을 찾아 나의 여건이 허락하는 정도에 맞추어서 실력을 쌓으면 된다. 남들보다 배우는 것이 느릴 수 있지만, 느리다는 사실 자체는 내 삶의 의미와 무관하다. 형편에 맞게, 자신이 타고난 속도에 맞추어 외국어를 효과적으로 익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사람마다 기질과 능력, 여건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에 대한 폭정’을 휘두른다. 상상력이 빈곤한 이런 사람들은 타인의 활동을 우습게 보고, 함부로 교정하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속물이다. 속물 근성은 빈곤한 상상력을 낳기가 쉽기 때문이다. 속물들은 속물의 삶에 반발하는 사람들을 깔아뭉갬으로써 자기 삶의 방향을 확인하려 든다. 자신이 경멸하고 아첨하고 눈치 보느라 생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도 속물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속물이 아닌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최선인 삶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과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삶을 타인이 대신해서 또는 강제로 결정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만일 주위의 다른 사람이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지 않다면, 새로운 체험과 지식으로 시야를 확장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어떤 경우에도 마음에 대한 폭정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냉소와 절망을 넘어 정치적 책임으로

쾌락을 늘이고, 고통을 줄이고, 진리와 아름다움 같은 ‘좋은 것’을 향유하고, 나누고, 기여하고, 타인과 애착과 유대를 형성하는 활동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그런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이 선택지로 앞에 놓인다면, 누구나 그런 삶을 선택할 것이다. 나아가, 이런 활동을 보장하는 사회적이고 외부적인 조건을 지키고 보장하는 활동도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이 활동이 바로 ‘정치적 책임’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은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는 일을 주저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책임에 대해서 사람들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반응은 냉소와 절망이다. 지성으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는 사람들은 자주 실망감을 느낀다. 민주주의의 토대가 허물어지는 일을 수시로 지켜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양심적인 시민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이룰 수 있는 일의 간극에서 심각한 무력감을 느낀다. 그 결과 자신의 정치적 권리가 박탈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체념하거나, 민주주의처럼 집단적인 문제는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치부하고 자신은 관전하고 품평하는 태도를 취한다.

냉소와 절망은 우리가 사회 안에서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한, 계속해서 사회의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태도이다. 상호작용으로 인한 변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사회에 축적되어서 마침내 겉으로 보이는 변화로 전환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도 변화를 불러온다. 그 변화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해치고 퇴락시키는 변화이다. 따라서 우리가 언제든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치적 책임을 수행할 이유가 된다.

구성원으로서 정치적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현재의 구조적 부정의를 유지하거나 강화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만약 책임을 이행하지 안고 시간과 정력, 권한 같은 자원을 자신만을 위한 일에 쓴다면, 그는 배경적 가치를 위반하고 그 대신 내용적 가치를 추구한 것이다. 두 가지 가치가 인생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것은 전체적으로 보아 가치가 없는 일이다. 즉, 다른 사람이 구조적 부정의로 인해 억울한 고통을 당하고 신음하는 상태로 내버려지는 대가로 자신이 내용적 가치를 추가로 조금 더 추구하는 것을 ‘가치’로 공적으로 승인받을 수는 없다. 정치적 책임은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부인할 수 없는 책임이다. 이 책임을 이행하는 사람만이, 성숙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부조리한 실존에 던져진 부담을 직시하되 현실을 합리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한다. 현재가 완벽하지 않은 것도, 부담을 감수하지 않으면 현재가 나아지지 않는 것도 부조리하다. 정의롭지 않은 이 세계에 우리가 던져진 것은 부조리하다. 그리고 부정의한 세계가 상당한 부담과 노력 없이는 정의로운 세계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부조리하다. 이 세계는 이성에 의해 세워지지 않았으며, 이성에 앞서 존재한다. 이것 자체가 이미 부조리한 일이다. 그러나 부조리를 직시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부조리에 대한 반항, 즉 자신이 지향하는 상태로 나아가려고 행위하지 않는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부조리와 불완전한 실존을 살아가는 자유인의 나침반이다. 가치를 따라 기꺼운 방식으로 살 때 우리는 속물들의 세계관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한 자유와 인생의 의미를 향유하며 정치적 책임을 다할 수 있다.  

 

불완전한 시대를 살아가는 자유인들의 나침반

‘현재에 충실하라.’는 오랜 격언은 가치를 경험하는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흔히 현재만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이 격언을 오해해서, 내일 죽음이 닥친다면 오늘 무엇을 할지를 생각하라고 조언한다. 과거는 지났고, 미래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현재만이 실재한다는 말장난이 이 조언의 근거이다. 그러나 과거는 우리가 만들어온 인생의 서사로 현재에 실재하고, 미래는 서사를 이어가기 위해 방향을 설정하는 현재와 뚜렷하게 관련이 있다. 우리 대부분은 내일 죽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일 죽을 것처럼 행위하는 것은 어리석다. 합리적 기대를 기초로 미래를 계획한다고 해서 현재에 충실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미래에 대한 계획 아래 현재에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 자리를 잡고, 활동에서 느끼는 감각 안에 온전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인은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가치를 이성으로 그리고 공적으로 공유될 수 있는 언어로 이해하고 따른다. 가치 없는 것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하여 삶을 낭비하는 일을 좌시하지도 않는다. 자유인은 함부로 후견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에 관한 판단을 내맡기지 않고, 타인의 판단을 찬탈하려고 하지 않는다. 동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접촉하고 소통하는 동료 인간의 권리를 존중하고, 이를 위해 정치적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 인간은 언제나 불완전한 시대를 살아간다. 삶의 객관적인 가치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권리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불완전한 여건에 실망하더라도 속물의 세계관이 명령하는 길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 그리하여 진심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걸어가는 의미 있는 인생의 길은, 불완전한 시대에도 그 빛을 숨기지 못하는 발자국을 남길 것이다.

 

 

지은이 이한

변호사이자 시민교육센터 대표이다. 민주주의와 정치철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 및 집필을 하고 있으며, 정의로운 사회란 어떤 사회인지, 어떻게 그런 사회를 이룰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이 책은 ‘속물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은 무엇을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한 결과물이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지은 책으로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2012년), 『이것이 공부다』(2012년), 『너의 의무를 묻는다』(2010년), 『철학이 있는 콜버그의 호프집』(2005년), 『탈학교의 상상력』(2000년), 『학교를 넘어서』(1998년)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사치열병』(2011년), 『포스트민주주의』(2008년), 『이반 일리히의 유언』(2010년), 『계급론』(200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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