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벌 전쟁

현대 중국을 연 군웅의 천하 쟁탈전 1895~1930

권성욱 지음 | 1396쪽 | 48,000원



현대 중국을 만든 용광로, 

20세기의 "춘추전국시대"를 가다!


청조 멸망 후 중국은 전국에서 할거한 군벌들로 조각나 있었다. 황제가 되고자 한 위안스카이, 동북왕 장쭤린, 중원의 패자 우페이푸, 남방의 혁명가 쑨원 등 전국 각지의 군벌들이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경쟁했다. 쑨원과 장제스가 지도하는 국민당은 혁명을 완수하고 현대적인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노력을 수십 년간 거듭했다. 마오쩌둥의 공산당 역시 한쪽에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중국 군벌 전쟁은 현대 중국이 그 형태를 갖추어가는 ‘용광로’와도 같은 시기였다.

군사력으로 볼 때 가장 약체였던 국민당은 쑨원마저 죽고 사분오열의 위기에 처했지만, 장제스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벌 전쟁을 감행한다. ‘북벌은 망상’이라며 모두가 코웃음 치는 가운데 시작된 장제스의 통일전쟁은 수많은 역경과 난관 속에서도 거대한 성공으로 나아간다. 마침내 장제스는 중국 최대 군벌인 만주의 장쭤린과 천하의 패권을 놓고 최후의 전투를 벌인다.




누가 중국을 통일할 것인가?

『중국 군벌 전쟁』은 청조 말부터 중일전쟁 발발까지 20세기 초반의 중국 역사를 다룬다. 특히 전국 각지에서 할거한 군벌들로 갈기갈기 찢어진 중국을 삼민주의 혁명의 이념 아래 근대적인 국민국가로 통일하려 했던 쑨원과 장제스의 군사적 활약상을 중심으로 개괄한다.

중국 현대사는 우리에게 분실된 블랙박스와도 같다. 특히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망한 뒤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할 때까지의 역사는 거의 공백이나 다름없다. 중국에서조차 근대사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다. 기껏해야 쑨원과 마오쩌둥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신해혁명 과정의 혼란상과 공산혁명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설명할 뿐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허구와 신화가 있다.

▲ 우창봉기에 참여한 혁명군 병사들


마오쩌둥의 투쟁사는 로빈후드 이야기처럼 영웅적으로 채색되었지만 장제스와 대부분의 군벌은 제국주의 열강과 결탁하여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은 매판 세력으로 치부되었다. 마오쩌둥의 오합지졸 농민 군대가 최신 무기를 갖춘 장제스의 군대를 격파한 것은 ‘위대한 신화’로 포장되었지만, 장제스 또한 북벌전쟁에서 그에 못지않게 빈약한 무기와 오합지졸을 이끌고 훨씬 잘 무장하고 막강했던 군벌 세력을 이겼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 『중국 군벌 전쟁』은 1,4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서 그동안 전혀 조명받지 못했던 중국의 군벌들을 저공비행으로 살펴보며, 난세를 살았던 각양각색의 인물 군상을 펼쳐 보인다. 이 책에 수록된 135장의 사진 및 도판 자료와 27개의 전황 지도는 독자들이 이 시대를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현대판 “춘추전국시대”, 군벌 시대의 개막

신해혁명으로 선통제 푸이가 퇴위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었을 때, 그 과실을 차지한 쪽은 혁명파가 아니라 청조 내에서도 수구파였던 위안스카이였다. 그는 탁월한 정치가이자 유능한 관료였지만 공화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다시 황제가 되고자 하는 헛된 꿈을 꿨다. 그의 역량은 중국의 위기를 극복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위안스카이가 죽자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각지의 군사 실력자들이 천하 패권을 놓고 싸움을 시작했다. ‘군벌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1922년 제1차 펑즈전쟁 당시 장쭤린과 우페이푸는 서로를 향해 ‘군벌’이라고 불렀다. 장제스는 북벌전쟁에 나서면서 북방의 군사 지도자들을 ‘군벌’이라고 불렀으며, 공산당은 그 장제스까지 포함해 죄다 군벌로 치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대방을 향해 군벌이라고 부르면서도 자기 자신은 군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위안스카이(앞줄 가운데)가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한 후 각국 공사들과 찍은 사진


중국 근대사에서 ‘군벌’이란 중국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으며 국가와 민족에 큰 해악을 끼친 악당이라는 것이 오랜 통념이다. 실제로 군비 확보에 혈안이 되었던 많은 군벌들은 총칼을 이용해 온갖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특히 폐해가 가장 심했던 쓰촨성의 경우, 심지어 100년 뒤에 낼 세금까지 미리 징수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벌들이 폭정을 일삼았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북왕 장쭤린이다. 그는 제 이름 석 자도 쓰지 못하는 마적 출신이었지만 아편 밀매를 금지하고, 교육을 보급하고, 근대산업의 육성에 힘써 동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광둥 군벌 천중밍은 민중 계몽가였다. 산시성 군벌 옌시산은 낙후한 그곳을 발전시켜 전국에서 손꼽히는 모범 성으로 만들었다. 윈난 군벌 룽윈은 민주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한때 중원을 호령하던 군벌 우페이푸는 대표적인 반일 민족주의자였다.

▲ 앞줄 왼쪽부터 동북왕 장쭤린, 산둥군벌 장쭝창, 중원의 패자 우페이푸


대개 군벌 내전이라고 하면 소말리아나 아프가니스탄, 시리아처럼 무법천지 세상을 연상하게 된다. 이 나라들은 질서가 무너지면서 정치와 경제가 마비되고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군벌 시대의 중국은 로마제국의 멸망처럼 한 국가가 붕괴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새로 태어나는 과정이었다. 청조 몰락 후 각지에서 군벌들이 일어서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중국이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든 것은 아니었다. 군벌들의 통치가 비록 봉건적이고 억압적이었다 해도 중국이 외세의 침략과 식민 지배를 경험하지는 않았다. 군벌들은 흉포한 도적 떼가 아니라 한 지역을 통치하는 정치 지도자들이었다. 마오쩌둥 신화에 가려지긴 했지만 군벌 시대는 『초한지』, 『삼국지』의 재현이었다. 항우와 유방의 싸움을 떠올리게 하는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파란만장한 대결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다. 위안스카이를 몰락시킨 차이어, 문무를 겸비한 수재 장군 우페이푸, 천하통일의 문턱까지 갔던 장쭤린, 장제스와 천하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붉은 장군 펑위샹, 북벌군을 거의 패배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남방의 명장 쑨촨팡 등 군벌 시대는 기라성 같은 군웅의 천하 쟁탈전 시대였던 것이다.

▲ 왼쪽부터 서북왕 펑위샹, 북벌군 총사령관 장제스, 산시군벌 옌시산

 

장제스는 어떻게 중국을 통일했나?

쑨원은 중국을 통일하고 근대적인 공화국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에 일평생 헌신했다. 쑨원은 혁명의 상징이자 구심점이었지만,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군벌들이 지배하는 중국의 현실은 그의 이상과 너무나 멀었다. 쑨원은 무수히 많은 봉기를 일으키고 북벌전쟁을 선포했지만 대부분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는 군사적 역량도, 자원도 부족했다. 심지어 천중밍 같은 군벌에 의해 그의 근거지인 광둥성에서조차 쫓겨날 정도였다. 국공합작을 통한 소련의 원조가 아니었다면 쑨원은 그의 뒤를 이어 장제스가 북벌을 완수할 물적 기초를 닦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쑨원은 장제스를 쓸 만한 인재로 여겼을 뿐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 쑨원과 그 뒤에 서 있는 젊은 장제스


반면 무명의 군인이었던 장제스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남방을 무력으로 평정해 국민당의 근거지를 확고히 했고, 북방 군벌들 간의 분열을 이용해 단기간에 북벌을 성공시켰다. 1926년 북벌이 개시될 때 국민군은 병력이 8만 명에 불과했으나 북방의 군벌들은 100만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경제력, 군비, 장비, 무기 생산 측면에서 북양군벌들은 압도적이었다. 장제스는 1년 안에 북벌 승리를 장담했으나 남들 눈에는 터무니없는 허세로 보였을 뿐이다. 당시 북벌군을 지원하던 소련 고문단의 평가에 따르면, 북벌군은 3분의 1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나폴레옹 시절과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껏해야 광둥성과 후난성 접경에서 몇 차례 국지전으로 끝날 것으로 예상했고, 변경의 성 한두 개로 중국 전체를 상대해 싸우겠다는 발상이라며 비웃었다.

▲ 북벌군 병사들. 낡고 해진 군복을 걸치고 발에는 짚신을 신었다. 등에는 비를 막기 위한 삿갓.


그러나 북벌은 단순한 통일전쟁이 아니라 혁명전쟁이었고,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이 북벌군을 지지하고 협조했다. 무엇보다 북벌군은 강한 군대였다. 장제스는 여러 차례의 군사적 패배, 정지적 하야, 배신과 음모 등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북방의 군벌들을 차례차례 꺾어갔다. 장제스는 마침내 동북왕 장쭤린을 베이징에서 몰아내고 1928년 6월 북벌 종료와 국가 통일을 선포했다. 북벌에 나선 지 1년 11개월 만이었다. 나중에 다시 벌어진 신군벌 내전에서 장제스에게 반기를 든 리쭝런의 말에 따르면, 북벌을 완수한 직후 장제스는 베이징에 있던 쑨원의 묘를 찾아가 한없이 울었다.

장제스는 수많은 군사적, 정치적 시련을 겪으면서 일개 장교에서 국민군 총사령관으로, 노련한 정치가로 성장했다. 쑨원 사후에 국민당 내부에는 장제스의 수많은 정적들이 있었으며, 특히 공산당은 장제스를 제거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밖으로는 장쭤린, 우페이푸, 펑위샹 같은 대군벌들과 싸워야 했고, 안에서도 탕성즈, 왕징웨이, 공산주의자들 같은 경쟁자들과 싸워야 했다. 그는 북벌 개시 전(중산함 사건), 북벌 도중(상하이 쿠데타), 북벌 종료 후(중원대전) 등 거의 모든 국면에서 적들로부터 고립무원 상태에 처하기도 했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특유의 방식으로 모두 돌파했다. 장제스는 이러한 우여곡절의 북벌 과정 속에서 처음에는 공산주의에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은 군인이었으나 점차 강경한 반공주의로 선회하게 된다.

장제스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군사적 역량, 정치가로서의 성장, 그리고 혁명의 대의와 통일에 대한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제스의 강점들이 훗날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마오쩌둥에 의해 발휘되어, 장제스가 대륙의 패권을 잃게 된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 1926년 광저우에서 북벌군 출정을 선언하는 장제스

▲ 1차 북벌전쟁의 전황도. 남쪽 광저우에서 출발한 국민정부의 북벌은 우창과 난징을 거쳐 북쪽의 베이징 점령까지 1년 11개월만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전쟁사와 국제적 시각에서 본 중국 군벌 전쟁

20세 전반기의 중국 현대사는 전쟁사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 군벌 전쟁->중일전쟁->국공내전’이라는 세 개의 퍼즐이 모여 완성된다. 중국 군벌 전쟁은 장군과 혁명가들, 여러 뛰어난 인물들의 경연장이자, 새로운 무기와 전략의 시험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 소련, 기타 열강이 외교력과 군사력을 투사하는 국제적 무대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군벌 전쟁사는 20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이라 할 수 있는 중일전쟁의 전사(前史)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전쟁사의 관점에서 중국 군벌 전쟁을 서술할 뿐만 아니라 국제적 시각에서 중국 현대사를 일별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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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권성욱

전쟁사 연구가. 개인 블로그인 ‘팬더 아빠의 전쟁사’에 전쟁사 관련 글을 쓰고 있으며, 특히 중국 근현대사와 2차대전이 전문 분야이다. 국내 최초로 중일전쟁을 다룬 역사서 『중일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를 썼으며,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컨텐츠(2014년)에 선정되었다. 래너 미터의 『중일전쟁: 역사가 망각한 그들 1837~1945』를 공동 번역했고, 『덩케르크: 세계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 『일본 제국 패망사: 태평양 전쟁 1936~1945』, 『미드웨이: 어느 조종사가 겪은 태평양 함대항공전』을 감수했다. 현재 울산에서 공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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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민 2020.07.20 09:32

    혹시 이 책 전자책 출간 예정인가요? 해외에 거주하고 있어서 전자책을 선호하는 편이라 문의합니다.

    • Favicon of https://mizibooks.tistory.com BlogIcon 미지북스 2020.07.20 17:54 신고

      전자책도 제작 중에 있습니다. 1~2주 안에 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 2020.07.20 11:50

    저도 문의 하나 드립니다. 꼭 소장해서 읽고 싶은데 2권이나 3권으로 분권해서 나올 계획은 없으신가요? 1400쪽은 읽을 때나 보관할 때 너무 불편할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한 번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 Favicon of https://mizibooks.tistory.com BlogIcon 미지북스 2020.07.20 17:56 신고

      처음에 저희도 분권을 고려하긴 했습니다.하지만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합본 출간으로 결정했습니다. 아쉽게도 당분간은 분권 출간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3. Favicon of https://bookwormkr.tistory.com BlogIcon 소셜홀릭 2020.07.23 16:08 신고

    페이스북 책벌레 페이지 운영자입니다. 저희 페이지에도 소개하고 싶은 책이네요. 혹시 카드뉴스나 그외에 소개할만한 자료가 있으면 kcjun65@gmail.com 으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4. 콧물이 2020.12.21 18:22

    혹시 구글북스에는 전자책 등록하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권성욱 님의 다른 저서인 중일전쟁도 포함해서요.
    그냥 개인적으로 구글북스를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문의드립니다

    • Favicon of https://mizibooks.tistory.com BlogIcon 미지북스 2021.03.09 16:44 신고

      독자님, 안녕하세요. 아직은 구글북스에 등록계획은 없습니다만 향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생을 바꾸는

탐구 습관

이민열 지음 | 224쪽 | 12,800원



책읽기, 글쓰기, 공부도 전략이다
탐구를 위한 삶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지식의 늪에 빠지지 않고 지식의 바다를 항해하는 법


바쁜 일상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탐구할 수는 없을까? 때때로 책을 펼쳤다가도 금세 휴대폰을 들고 있는 모습이 더 익숙한 현대인들. 이제는 책을 잡는 것조차 어색하다면, ‘탐구 습관’부터 길러야 한다. 법학자 이민열 교수가 쓴 <인생을 바꾸는 탐구 습관>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배움에 목마른 성인들을 위한 체계적인 공부법을 제시한다. 무조건 ‘열심히’ 읽고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책 읽기, 글쓰기, 공부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탐구’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탐구란, 살면서 맞닥뜨리는 중요한 문제들을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우리의 이해와 행위가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뜯어보는 체계적인 활동이다. 이 책은 좋은 탐구 습관을 만들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전략과 연장통을 제공한다.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꼭 필요한 책. 




반성 없는 확신 vs 정당화되는 앎

인생에서 중요하거나 복잡한 문제를 다룰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성 없는 확신’이 아니라 ‘비판적 숙고’다. 숙고란 문제의 해결책이나 선택지로 무엇이 있는지 뜯어보고, 그것들이 타당한 이유들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되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또한 비판적 숙고는 혹시 잘못된 자료나 추론을 옳은 것이라고 그릇되게 믿지는 않았는지 한층 더 깊이 조망하여 검토하는 사고다.

비판적 숙고는 그저 ‘열심히’ 생각해보는 것과는 다르다. 잘못된 자료와 추론으로 열심히 숙고해봤자 잘못된 확신만 강화된다. 만약 비판적으로 숙고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생을 우연에 맡기는 것과 같다. 지금 내가 우연히 확신하는 믿음이 반드시 참이라는 보증은 없기 때문이다.


반성 없는 확신은 어리석음으로 가는 길이다. 어리석음은 단순한 무지와는 다르다. 플라톤에 따르면, 단순한 무지는 그저 알지 못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 실존의 한 부분이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면,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시간을 들여 지식을 이해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탐구 공동체의 견해를 참조하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리석음은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여기는 것이다. 앎 없는 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받아들인 개념에 우겨넣는 방식으로 사유를 외주화하고, 자신은 게을러진다. 이미 자신이 갖고 있는 신념에 합치되는 말만 듣기 좋아하며 따르는 사람은 끝없이 자신의 인식적 입지를 훼손하다가 종국에는 어리석음에 닿을 수밖에 없다. 

 

탐구하는 삶

반성 없는 확신이 아니라 정당화되는 앎을 지향하는 활동을 ‘탐구’라 부를 수 있다. 탐구란 기존의 믿음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고 논증하며 답을 얻는 지성적 활동이다. 물론 인간이 탐구에 진력한다고 해도 진리는 인간의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탐구하는 사람은 적어도 타인의 속임수와 우연의 장난에 휘둘리지는 않는다. 거짓 신념들에 무력하게 당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리하여 삶과 세계의 문제를 그 무게에 맞게 받아들이며 경박하게 다루지 않는다.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매일매일 습관으로 벼려내는 지성의 날이 있다. 



모든 고차적이고 복합적인 일들이 그렇듯이, 탐구 역시 전략이다. 문제에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구조화하고, 풀고, 공유하는 데 효과적인 습관을 생활 속에 뿌리내리는 방법을 고민해봐야 한다. 이 책은 탐구의 습관화를 시도할 때 쓸 수 있는 연장통을 제공한다. 탐구자가 필요에 따라 쓸 만한 연장들, 즉 책읽기, 글쓰기, 습관 만들기에 대한 조언이 담겨 있다.


작은 몰입에 성공하기

공부를 시작할 때, 또는 중단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지루함과 난해함은 공부나 과업에서 도피하고 싶게 만드는 대표적인 원인이다. 끝없이 휴대폰을 들어 만지작거리고 인터넷 창을 띄우게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저자는 탐구에 적합한 새로운 습관을 들일 것을 제안한다. 나쁜 습관에는 다른 습관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공부나 일을 시작하려는데 마음이 분산될 때 가장 손쉬운 대처법 중 하나는 눈감기다. 눈감기는 휴대폰, SNS, 게임 같은 즉각적인 도피처로 바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마음을 이완시켜준다. 공책 쓰기도 추천한다. 자유롭게 쓰고 그릴 수 있는 공책은 과업을 분석하고 구조화하고 단순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 주된 일(주건) 외에 하나의 일(부건)을 더 정해 병행하면서 하는 방법도 있다. 기분 전환을 통해서 주건에 몰입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이다. 이것은 실시간으로 두 개 이상의 일을 하는 멀티태스킹과는 다르다. 작은 몰입에 성공하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점차적으로 몰입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생활 방식을 만들어가야 한다.   

 

장기, 중기, 단기 계획 세우기

일기를 쓰면 장기, 중기, 단기 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준다.

장기 계획은 몇 가지 기획의 성취가 합해져 하나의 커다란 성취가 발생하는 1년 이상의 기간을 필요로 하는 계획이다. 중기 계획은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몇 주 또는 몇 개월의 기간이 요구되는 계획을 가리킨다. 단기 계획은 일주일 이하의 기간과 매일매일의 계획이다.

장기 계획은 쏘아 맞혀야 하는 목표라기보다는 잠정적 궤도를 알려주는 대체적인 방향이다. 중기 계획은 정한 일을 꾸준히 실행하다보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다. 계획은 자신의 실행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세워야 한다. 시험 합격이나 승진과 같은 외적인 사건들을 포함하는 것은 중기 계획이 될 수 없다. 또한 단기 계획을 짤 때는 기계적으로 양을 할당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계획이 아니라 구속복에 불과하다. 단순하고 기계적인 계획은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 사람은 의무로 주어진 것, 고정되어 융통성이 없는 것, 기계적인 것을 하기 싫어한다. 



단기 계획이 실패해서 무너지면 무계획 상태가 된다. 그날그날 외부의 사정에 몰려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만 눈앞에 놓고 그것들을 해내기에 급급한 삶이 된다. 그러면 그 순간 가장 주의를 끄는 것들에 휘둘리기 쉽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이 모자라게 된다. 이러한 삶은 ‘분주한 무기력에 빠진 삶’이다. 세네카에 따르면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은 “반쯤만 살아 있는 것이며”, “자기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한다고 할 수 없다”.
 

지식을 모듈화하기

탐구 전략에서 중요한 것은 지식을 ‘모듈화’하는 것이다. 모듈화란 지식을 하나의 덩어리처럼 뭉쳐서 그것을 자신의 창조적인 작업에 사용할 수 있도록 부품화하는 것이다. 모듈화는 선학자의 탐구가 타당한지를 검토한 후, 타당한 한도에서 자신이 풀려고 하는 문제의 해결에 적합한 형태의 장비로 만들어놓고 연습하는 것이다.

모듈화의 대표적인 예로는 논증적 요약을 들 수 있다. 선학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논거들을 그 논리적 결합 관계를 고려하여 요약한다. 또한 선학자의 논의에 대한 여러 비판들을 점검한다. 이런 방식은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피하게 해준다.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는 이러한 점검 과정이 포함된 모듈화를 거치지 않고 선학자의 결론만을 떼어내 추종할 때 생긴다.

지식을 부지런히 모듈화해서 새겨두면, 나중에 행운이 찾아온다. 어떤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모듈로 풀 수 있는지 아닌지 알아챌 수 있고 체계적으로 풀 수도 있다. 모듈화를 하다보면 훨씬 더 혁신적인 자기만의 모듈을 만드는 능력 역시 발전한다. 



이런 모듈화를 부지런히 하는 것이 탐구의 왕도다. 절도 있는 탐구 생활이란, 보고 나면 산산이 흩어질 자료들을 ‘열심히’라는 강박 아래 들입다 먹어치운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강박에 쫓기다보면 모래로 집을 지으려는 사람과 비슷해진다. 모듈화 작업은 탐구자에게 일상이 되어야 한다. 탐구자는 지식의 늪에 빠져 망각 속에 허우적거리지 않고 모듈로 명쾌하게 매듭을 지으며 더 큰 문제 해결을 예비하며 지식의 바다를 항해한다.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기

이 세상의 지식은 거대한 규모의 천체를 둘러싸고 있는 액체와도 같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빠른 속도로 그 표면만을 훑는다고 해도, 그것의 극히 일부의 일부조차도 접하지 못하고 우리는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다. 유한한 시간과 정력의 한계 때문이다.

엄청난 양의 지식은 늪이 될 수도, 바다가 될 수도 있다. 늪에 들어서면 다리가 푹푹 빠지기만 한다. 이것저것 주워섬기듯 지식을 접하는 사람은 어느 지점에서 깊이 빠져 실질적인 것을 아무것도 더하지 못한다. 반면 늪이 아닌 대양에서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수 있다. 그 항로를 탐험함으로써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 수 있고 유용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으며 종국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대륙에 도착할 수 있다. 



누군가는 늪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자신이 쥐고 있는 모래알 더미를 세상을 향해 던지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짐짓 위장한다. 문제 설정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탐구의 핵심은 진정으로 흥미로운 문제를 포착하고 그것을 제대로 풀 수 있는가이다. 변죽을 울리는 정보들을 곁들여서 늘어놓는 것은 탐구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탐구의 결과물들은 어떤 문제를 풀려는 노력의 결정체다. 지식의 늪에 빠지는 사람들은 나침반에 되는 자신의 질문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숲을 보지 않고 수많은 나뭇잎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모듈을 만들지 않고 막연한 인상들만 켜켜이 쌓는다.

일본의 문인 나쓰메 소세키는 “우선 전반적으로 정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동서고금 수천 년의 서적을 독파하려고 계획하는” 청년들에게 조언한다. “그렇게 하면 백발이 돼도 끝내 전반적으로 정통할 시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부지런히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자력으로 문제를 설정하고 스스로 문제를 푸는 활동을 중심에 놓고, 선학자의 글은 이 활동에 도움을 주는 자료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삶을 단순화하기

탐구자는 삶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진리의 영역에 큰 기여를 했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인생을 단순화했던 사람들이다. 칸트, 뉴튼, 다윈, 디렉, 에어디쉬, 롤스와 같은 거인들은 모두 단순화된 일상에 따라 생활했다. 그들의 생활상을 보면 거의 한결같이 매일매일이 고도로 단순화되어 있다. 탐구하는 삶을 위해서는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것은 제거하고 마음의 평정 상태를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 단순화의 기예는 선택과 집중, 포기를 동반한다.

단순한 삶의 정신은 자신이 중심으로 삼은 가치와 결부된 ‘수행’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수행에 속하는 것은 자신이 주도하는 영역에 있는 것이오, 수행에 속하지 않는 것은 나와 관련은 있지만 내가 주도하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오늘 내가 무엇을 할지는 수행에 속한다. 그러나 그 일의 결과가 기대에 미치는지 여부는 수행에 속하지 않는다. 내가 주도할 수 없는 것을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오직 나의 수행만을 생각하고 몰입하는 것이 최선이다.

자신이 삶을 주도한다는 감각은, 큰 그림을 확고하게 그려두고 현재의 성취가 어디까지 왔는지 강박적으로 자주 돌아보는 것에서 오지 않는다. 큰 그림은 방향을 설정할 때만 고려하고 평소에는 작은 그림들을 차례로 완성해나가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주도적인 느낌은 오히려 더 확고해진다. 이런 감각이 일단 자리를 잡으면, 탐구를 비롯해 인생의 가치 있는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 순전한 괴로움이 아니게 되며, 그 일이 언제 완수될까 노심초사하는 일도 없게 된다. 자신의 사정과 기질에 맞는 도구를 가지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탐구의 기쁨이 충만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    *    *

  

 

지은이 이민열 (이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 교수이자 변호사이며 시민교육센터 대표이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기본권 제한 심사에서 공익의 식별」, 「가치와 규범의 구별과 기본권 문제의 해결」, 「기본권 보호 의무의 구조와 보호권」, 「국가 완전주의 쟁점과 법해석」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저서로 『철인왕은 없다』, 『중간착취자의 나라』, 『법학방법론』(공저), 『삶은 왜 의미 있는가』,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이것이 공부다』, 『너의 의무를 묻는다』, 『철학이 있는 콜버그의 호프집』, 『탈학교의 상상력』, 『학교를 넘어서』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자유의 법』, 『법복 입은 정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사치 열병』, 『이반 일리히의 유언』(공역), 『포스트민주주의』, 『계급론』, 『성장을 멈춰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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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법

로널드 드워킨 지음 | 이민열 옮김 | 612쪽 | 22,000원


법철학의 대가 로널드 드워킨이 말하는 헌법과 자유

법이 자유를 보호할 때 사회는 더욱 민주적일 수 있다.  


국가가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왜 위헌일까? 언론은 반드시 모든 사실을 확인한 후 보도해야만 하는 것일까? 국기를 불태우는 행위는 허용될 수 있을까? 포르노그래피는 금지되어야 할까? 왜 대학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연구를 한다는 이유로 학자를 해고할 수 없는 것일까? 시민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호되어야 하는 것일까?

『자유의 법』은 ‘법철학의 거두’ 로널드 드워킨이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자유’의 관점에서 일관되고 성실하게 답한 책이다. 로널드 드워킨은 ‘평등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사상’을 주창한 미국 법철학계의 최고 석학으로, 존 롤스의 뒤를 이어 영미권을 대표하는 자유주의 법철학자로 꼽힌다. 드워킨은 추상적 헌법 원리와 구체적인 소송 사건을 연결 지어 탁월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정평이 높다. 이 책 『자유의 법』에서 드워킨은 20세기 후반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이루어졌던 중요한 판결을 다루면서, 법이 자유를 보호할 때 민주주의가 더욱 강건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로 보는 자유의 역사

미국 헌법과 대법원 판결의 역사는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확대되어가는 역사였다. 특히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은 낙태, 안락사, 포르노그래피, 인종 평등, 언론의 자유 등 치열한 철학적 쟁점과 인간 현실이 법을 매개로 만나는 영역이다.

연방대법원이 헌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수많은 미국인들의 권리와 삶이 결정된다는 측면에서, 일부 정치인과 학자들은 이를 비선출직인 ‘판사들에 의한 민주주의 권력의 찬탈’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법원의 사법 심사권을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낙태와 안락사, 인종 문제에 관해 대법원이 내린 자유주의적 판결을 뒤집으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또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포르노에 대한 금지를 열정적으로 추진하며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에 나섰다.

그러나 드워킨은 연방대법원에서 중요한 판결이 있을 때마다 이를 논평하는 글을 쓰면서, 일각에서 요구하는 ‘자유의 제한’에 대해 반대했다. 그는 생명, 프라이버시, 표현의 자유 등 여러 쟁점들이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논의될 때 항상 정공법으로 논변을 펼쳐 자유를 옹호한 자유의 수호자였다.

 

판사들은 민주주의의 수호자인가 찬탈자인가?

이 책에서 저자가 진지하게 대결하는 한 가지 주제는, 헌법을 해석하는 판사들의 권한(사법 심사권)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다. (인민이 선출한)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을 비선출직 판사들이 위헌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사법 심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사실상 찬탈 행위나 다름없다는 비판이다. 레이건과 부시 같은 보수주의 대통령들은 낙태와 같은 사안에서 사법부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고 자유주의적인 판결들을 내린다고 불만을 표했다. 보수주의자들은 미국의 사법 시스템이 판사 자신의 도덕적 확신을 다수 공중에게 부과할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을 주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판사들로부터 권력을 회수해 인민에게 되찾아줄 것을 약속했다.



드워킨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적극 반박하면서, 다수가 원하는 것을 관철하는 다수결민주주의의 관점이 아니라, 시민의 평등한 지위를 전제로 하는 입헌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자고 제안한다. 입헌적 관점에서는 개인의 헌법적 권리를 지켜내는 법원의 권한이 전혀 민주주의와 배치되지 않는다. 판사들은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며, 법원은 사법 독재 기구가 아니다. 오히려 법이 자유를 수호할 때 사회는 더 민주적일 수 있고, 시민은 공동체의 진정한 구성원이 될 수 있다. 


도덕적 독법: 헌법 해석의 원리와 통합성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헌법을 해석하는 문제에 있어서 헌법을 입안한 사람들의 ‘본래 의도’에 맞게 해석해야지 도덕적 원리에 근거해서 판사들이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드워킨은 법은 도덕과 분리되지 않고 합체되어 있으며, 판사가 헌법을 해석할 때 도덕적 원리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도덕적 독법(moral reading)”을 주창했다. 도덕적 독법은 정치적 도덕을 헌법 해석의 심장부로 끌어들인다.

예를 들어 미국 공립학교에서 인종 분리를 위헌으로 규정한 브라운 판결(1954년)은, 흑인의 평등한 권리 보호를 위해 제정된 수정헌법 14조를 도덕적 독법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헌법 입안자들의 원래 의도는 인종 분리 학교를 금지하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판사들은 이 헌법이 갖고 있는 도덕적 원리를 적용하여 해석했으므로 인종 분리 학교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 독법이 판사 자신의 도덕적 견해를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도덕적 독법은 판사들에게 그들 자신의 양심의 속삭임이나 자신의 계급이나 분파의 전통을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드워킨에 따르면, 원리에 따른 헌법 해석은 어디까지나 헌법의 ‘통합성’에 맞게 규율되어야 한다. 헌법은 그것이 설계된 전체적인 구조와 과거 헌법 해석의 지배적인 방향과 일관되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도덕적 독법은 도덕 원리에 따라 헌법을 해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법 전통의 역사와 통합성이라는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드워킨은 강조한다.

 

생명 윤리, 표현의 자유, 적극적 조치

이 책은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제기된 거의 모든 헌법상의 큰 쟁점들을 논한다. 1부 <삶, 죽음, 인종>에서는 낙태를 중심으로 생명과 죽음에 관한 헌법적 권리와 쟁점을 다룬다. 여기에는 안락사와 프라이버시,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권리 등이 포함된다. 2부 <표현, 양심, 성>에서는 주로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쟁점들이 다루어진다. 언론의 자유와 검열, 포르노그래피를 둘러싼 논쟁, 그리고 학문의 자유가 왜 표현의 자유로 포괄되지 않는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지를 논한다. 3부는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들―위대한 판사들과 자질이 부족한 판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며 도덕적 독법에 반대하는 논변들이 얼마나 근거가 없으며 조야한지 설명한다. 이 책 『자유의 법』은 거장의 통찰을 통해 자유에 관한 심층적이면서도 통합적인 사유의 길로 독자들을 안내할 것이다.  



*      *      *


지은이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

‘평등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사상’을 주창한 미국 법철학계의 최고 석학으로, 존 롤스의 뒤를 이어 영미권을 대표하는 자유주의 법철학자로 꼽힌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옥스퍼드대학교 법학과와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했다. 뉴욕 소재 유명 로펌인 설리번앤드크롬웰에서 근무하다가 예일대학교 로스쿨에서 강의한 것을 계기로 학계로 진출했다. 1969년 스승이었던 허버트 하트 교수의 후임으로 옥스퍼드대학교 법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이후 런던대학교와 뉴욕대학교에서 가르쳤다. 자신의 스승이자 법실증주의 거두 하트에 반대하면서 ‘통합성으로서의 법’을 주장하는 일련의 논문과 책을 발표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후 다른 법철학자들과 평생의 논쟁을 마다하지 않고 치러냈으며, 20세기 후반 법철학의 거두 중 하나가 되었다. 2013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이 책『자유의 법』은 드워킨이 자신의 법철학 이론을 헌법 해석에 적용한 ‘도덕적 독법’으로 구체적인 헌법적 쟁점을 생생하게 풀어내고 있다. 주요 저서로 대표작인 『법의 제국』을 비롯해 『법복 입은 정의』, 『법과 권리』, 『자유주의적 평등』, 『생명의 지배 영역』,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정의론』, 『신이 사라진 세상』 등이 있다.

 

옮긴이 이민열(이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 교수이자 변호사이며 시민교육센터 대표이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기본권 제한 심사에서 공익의 식별」, 「가치와 규범의 구별과 기본권 문제의 해결」, 「기본권 보호 의무의 구조와 보호권」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저서로 『철인왕은 없다』, 『중간착취자의 나라』, 『법학방법론』(공저), 『삶은 왜 의미 있는가』,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이것이 공부다』, 『너의 의무를 묻는다』, 『철학이 있는 콜버그의 호프집』, 『탈학교의 상상력』, 『학교를 넘어서』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법복 입은 정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사치 열병』, 『이반 일리히의 유언』, 『포스트민주주의』, 『계급론』, 『성장을 멈춰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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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현대사

1871년 독일제국 수립부터 현재까지

디트릭 올로 지음 | 문수현 옮김 | 852쪽 | 38,000원


두 번의 통일, 제국과 공화국 사이를 오간
근현대 독일에 관한 거의 모든 역사


이 책은 지금껏 국내에 소개된 다양한 독일 역사서와 비교할 때 가장 정통적인 서술 방식을 따라, 전통적인 의미의 이야기식 역사 대신 독일의 국내 정치, 외교관계, 사회경제적 상황, 문화를 네 축으로 삼아 각 시대의 독일사를 풀어내고 있다. 

독일 근현대사는 각각 두 번에 걸친 통일과 세계대전 등 세계를 뒤흔든 주요한 사건들과 비스마르크, 힌덴부르크, 히틀러, 토마스 만, 마를레네 디트리히, 아데나워, 호네커, 귄터 그라스, 메르켈 등 다채로운 빛을 발했던 인물들이 펼쳐 보이는 파노라마다.

국내외 정치, 경제, 문화에 근거한 서술 방식이 일견 진부한 느낌을 줄 수 있는데도, 오히려 지루함 대신 차곡차곡 잘 정리된 서가에서 지적 향연을 누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은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충분히 부각되고, 매우 복잡한 사회적 갈등 구도와 다양한 사회 세력들이 등장하는 독일 근현대사가 응집력 있는 역사 드라마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역사적인 디테일에 대한 지은이의 해박한 지식은 때로 유머와 위트를, 때로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읽는 재미를 더하게 한다. 




잘 정리된 서가를 연상시키는 근현대 독일 이야기

이 책은 독일의 국내 정치, 외교관계, 사회경제적 상황, 문화를 축으로 근현대 독일사를 정밀하게 풀어내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정치사 부문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독일제국과 바이마르 시기의 국내 정치에서 자유주의 세력과 보수주의 세력, 중앙당과 사회주의 세력 등 네 정치 세력 간의 복잡한 관계가 어떻게 변주되었는지, 기민련/기사련, 사민당, 자민당, 녹색당 등 다양한 정당들이 서독의 의회민주주의를 공고히 만들어가는 과정과 사통당이 동독 사회 전반을 장악해가는 동시에 사회 내부의 지지를 잃어가는 과정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처럼 복잡다단한 정당 정치 구조를 중심으로 하는 설명은 통상 지루함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책이 그런 위험에서 벗어나 한 편의 대하 역사 드라마를 보듯 몰입도를 높일 수 있던 이유는 비스마르크부터 앙겔라 메르켈에 이르기까지, 1871년 독일 통일 이후 재임한 거의 모든 총리들과 그들의 정책이 정교하면서도 입체적으로 서술되기 때문이다. 디트릭 올로는 그들의 개인적 면모뿐만 아니라 정책 결정 및 권력투쟁 과정에 대한 상세한 서술로 과거의 역사를 현실로 되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비스마르크, 빌헬름 황제, 히틀러, 힌덴부르크, 콘라트 아데나워, 헬무트 콜, 앙겔라 메르켈 등 우리에게도 낯익은 이름들은 이 책이 친숙하고 생생한 느낌을 주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실제로, 바이마르공화국 후기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상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장의 대립’을 연상하게 하고, 동서 냉전으로 인한 분단 경험과 통일에 이르는 과정 또한 아직도 분단 상태에 있는 우리 사회에 역사적 교훈 내지 반면교사로서의 깨달음을 안겨준다.

독일의 전 총리 게하르트 슈뢰더는 독일인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자랑스러워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1945년 이후 민주적 성취에 대해 자랑스러워해야만 한다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역사적으로 옳고 정치적으로도 빈틈없지만 독일 역사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인 셈이었다. 하지만 슈뢰더가 자랑스러워한 1945년 이후의 역사뿐 아니라 언급하기를 회피했던 1945년 이전의 역사도 심도 깊게 다루어질 때 독일의 근현대사는 온전히 파악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독일의 국내외 정치, 경제, 문화를 중심으로 1871년 이후의 독일 역사를 차곡차곡 서가를 정리하듯 정교하게 서술한 이 책이야말로 그간 국내에선 볼 수 없었던 독일 근현대사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지금 독일 역사인가?

2019년 대한민국에서는 가히 ‘광장의 정치’라고 불릴 만한 현상이 벌어졌다. 정치적 이해에 따라 갈린 대규모 군중이 세 대결을 벌이는, 의회민주주의 역사가 깊은 나라들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견 국론 분열의 모습으로까지 보이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실 이를 두고도 극명한 대립만큼이나 정리되지 않은 의견이 무수히 도출되었다. 가늠하기 쉽지 않은 문제가 아전인수격의 해석과 해법으로 대립하는 경우 좀 더 현명하게 문제를 풀어내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비교해볼 만한 사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보다 먼저 이런 경험을 한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특히 1차대전의 폐허 속에서 탄생한 바이마르공화국의 경험을 살피는 것은 극한 내부 대립을 딛고 일어나 ‘황금기’를 구가했던 사회에서 어떻게 나치가 발흥했으며, 2차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주역이 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우리가 지금 독일의 역사를 읽어볼 만한 이유이다.

1차대전의 패망과 더불어 해체된 독일제국을 대신해 탄생한 바이마르공화국은 권위주의 전통이 강했던 독일 사회에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다원주의를 이식하려고 했지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 기간이 10여 년에 불과했던 탓도 컸고, 구엘리트층을 포함한 많은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축소된 지위와 영향력, 전쟁에서의 패배, 강대국으로서의 지위 상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만성적인 경제적, 재정적 문제를 정치적 근대화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일부 지도자들의 진지한 노력과 경제적, 사회적 진보, 문화생활의 의심할 나위 없는 광휘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바이마르 시기가 신보수주의로 대표되는 권위주의 체제의 복원과 나치의 발흥에 빌미가 되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사실 나치즘은 반유대주의와 원민족적 통합에 대한 갈망 등 몇몇 오래된 독일 전통에 뿌리를 두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대공황이 이미 마모된 사회의 가치 합의 구조를 붕괴시켰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기 5년 전인 1928년 선거에서 나치당의 지지율은 단 2.6퍼센트에 불과했지만 대공황으로 대표되는 경기 불황을 거치며 독일의 주요 정치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히틀러와 그의 심복들이 권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수백만 독일인들에게 구제를 약속했기 때문이 아니다. 의회민주주의를 거부했던 하인리히 브뤼닝,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등의 신보수주의 총리들이 그릇되게도 자신들의 통제하에서 나치가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황제 시기의 영광을 회복시킬 것이며, 당연하게도 구 엘리트층에게는 익숙한 권력과 명망의 자리를 되돌려줄 수 있다고 오판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가 익히 아는 세계적 비극이 벌어졌다.

독자들은 독일 근현대사를 돌아봄으로써, 한국을 비롯한 오늘날 많은 민주주의 국가가 직면한 새로운 정치적 도전들에 대한 역사의 교훈과 심오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지리적 이름에 불과했던 독일을 비스마르크가 통일했다면, 히틀러는 반대로 독일의 통일을 파괴했다. 그러나 전쟁 후 서독은 안정적인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정립하고 재통일을 이루었으며, 오늘날 유럽연합을 이끌어가고 있다.   


다가오는 통일 시대, 한국인이 꼭 읽어야 할 책

2차대전 후 거의 40년간 독일의 두 절반은 남북한의 경우처럼 매우 다른 방식의 독자적인 사회였다. 하지만 1989년 말 소비에트 블록의 해체와 더불어 동독에서 벌어진 극적인 사건들은 사통당 일당독재 체제의 내적인 불안정성과 취약성을 갑작스레 드러냈다. 연로한 사통당 지도자들이 즉자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개혁을 약속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평화로운 혁명이 진행되면서 동독인들은 이들을 권좌에서 쓸어버렸다. 갑작스럽게 통일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몇 달을 보낸 뒤 미국의 지지를 얻어 독일은 다시금 통일된 국가가 되었다. 불가능해 보였던 동서독의 통일은 현실이 되었다.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우리에게 독일의 통일 과정과 그 후에 발생한 문제들은 역사적 교훈 내지 반면교사로서 생각할 거리를 준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회담으로 시작된 평화의 기운이 강해질수록 다시금 부각될 ‘퍼주기’ 논란을 서독 사회는 어떻게 해소했는지, 공산 독재 체제하의 인권 문제 등의 쟁점들을 동서독은 어떻게 넘어섰는지, 독일 통일에 우호적이지 않은 이웃 강대국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풀어갔는지, 통일된 독일 사회가 통일 비용, 과거 청산, 극우 정당, 이민자 통합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은 한국 사회의 미래를 그리는 데 매우 유용할 것이다.

▲ 통일로 가는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통일 이후에 맞닥뜨리게 될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      *      *


지은이 디트릭 올로 

미국 보스턴대학 역사학과 명예교수. 1937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미시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윌리엄앤드메리대학, 시라쿠스대학, 보스턴대학 등에서 재직했다. 1968년 출간된 《발칸반도의 나치들The Nazis in the Balkans》부터 2015년 출간된 《사회주의 개혁가들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붕괴Socialist Reformers and the Collapse of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에 이르기까지 10여 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을 출간했다.


옮긴이 문수현 

서울대학 서양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빌레펠트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 역사연구소, 경희대학 인문학연구원, 유니스트 기초과정부를 거쳐 현재 한양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Wie viel Geld für wie viel Leistung?: Weichenstellungen in der Frauenlohnfrage in Westdeutschland nach 1945》, 《서양 여성 근대를 달리다》(공저)가 있으며, 독일 근현대사, 한독 관계사 분야에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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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

카를로 M. 치폴라 지음 | 미지북스 | 128쪽 | 9,000원




우리는 언제나 어리석은 사람들의
파괴적 힘을 과소평가한다!

 

기발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유머로 통찰하는

치폴라식 인간학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 역사학자 카를로 M. 치폴라가 학술과 유머를 이상적으로 배합하여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인간 세계를 통찰하는 책. ‘후추로 보는 중세사’와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짧은 글 두 편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은 역사와 경제, 인간학과 유머가 어우러진 지적 향연을 선사한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 후추, 포도주, 정조대 같은 물건들을 주인공 삼아 ‘욕망과 경제가 교차하는 중세 유럽의 역사’를 펼쳐 보인 치폴라는, 후반부에서 일군의 어리석은 사람들에 대한 웃지 못할 이론을 소개한다. 인류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손실을 초래한 어리석은 인간들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왜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파괴적 힘을 과소평가할까? 어리석은 사람들은 어떻게 활기찬 문명을 파멸로 이끄는가? 기발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유머로 통찰하는 ‘치폴라식 인간학’의 정수.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부조리와 불의가 판치는 현실을 버텨내는 긍정의 주문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Allegro Ma Non Troppo). 이 낯선 이탈리아어는 ‘빠르지만 너무 지나치지는 않게’ 또는 ‘즐겁지만 너무 지나치지는 않게’라는 의미의 음악 용어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저명한 경제사가 카를로 M. 치폴라에게는 유머와 익살로 가득한, ‘농담 같지만 농담은 아닌’ 치폴라식 인간학의 기저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은 치폴라가 영어로 쓴 두 편의 짧은 글을 모은 책으로, 그가 자신의 친구들을 위해 한정판으로 출간했다 생각지 못한 인기를 얻자 이탈이아에서 정식으로 출판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수년 전 소개되었는데, 이번에 이탈리어판을 저본으로 삼아 새로운 번역으로 선보이는 작품이다.

치폴라는 전작인 『스페인 은의 세계사』에서 스페인 침략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은을 약탈하면서 촉발한 근대 유럽 세계를 다루었듯, 이 책의 첫 번째 글 「중세 경제 발전에서 향료(특히 후추)의 역할」에서 로마제국이 몰락하면서 시작된 중세 시대의 방대한 유럽사를 ‘후추’라는 소재로 단숨에 요약해버린다. 그런데 이 중차대한 역사를 풀어나가는 치폴라의 방식은 짓궂기 짝이 없다. 치폴라식 농담과 익살이 군데군데 개입하면서 독자들은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치폴라의 농담인지 헷갈려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세판 시트콤처럼 웃음과 유머가 가득한 역사의 장면 장면들을 속도감 있게 지나다보면, 어느새 역사학계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가설에 대한 치폴라의 유쾌한 비판을 만나게 된다.

 

후추에 탐닉한 은자 피에르, 십자군을 일으키다

치폴라는 자본주의 탄생에 대한 북유럽 중심의 서사를 경쾌하게 비판하며 자본주의 기원을 중세로 당겨온다. 그가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은 무대는, 로마제국의 멸망과 바이킹의 침략으로 황폐화되었던 중세 유럽이 기운을 차리고 새롭게 팽창한 두 번째 밀레니엄의 초입이다.

폭력이 난무하고 동방과의 무역은 쇠퇴 일로를 걷던 중세 암흑기, 은자 피에르가 프랑스에 살고 있었다. 후추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마음껏 먹을 수 없다는 좌절감을 견디다 못한 그는 성지를 이슬람교도들의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동시에 동방과의 교통로를 다시 열어 새로이 후추를 유럽에 공급하고자 십자군 운동을 일으킨다.


십자군의 고달픈 원정의 끝에는 다행히(?) 이슬람교도들의 패배가 기다리고 있었고, 서양인들 앞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상업에 특출한 재능을 지닌 이탈리아인들 덕분에 후추 무역은 팽창 일로를 걸었다. 후추 소비 증가로 성적 활력이 늘어난 남성들은 아름다운 여성들과 어울렸으나 십자군 원정을 떠날 때 남편들이 채워놓은 정조대가 문제였다. 그들이 정조대를 풀 열쇠, 그리니까 철 제작에 큰 관심을 가지면서 ‘유럽의 야금업’이 발전했다. 서유럽에서 갑자기 대장장이를 뜻하는 성씨(스미스, 슈미트, 페라리, 페레로, 파브르, 르페브르 등등)가 늘어났고, 야금업에 지속 가능한 팽창 국면이 도래했다. 후추가 이끈 이 기상천외한 역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사 이야기

후추는 그 자체가 화폐처럼 거래되었고 금융업을 발전시켰다. 상인들은 고리대금업으로 돈은 많이 벌었지만 양심에 가책을 느껴 교회와 수도원에 막대한 헌금을 냈다. 이 돈은 즉시 경제적 효과를 가져왔다. 주교와 수도원장들은 엄청난 현금을 대성당과 수도원을 짓는 데 사용함으로써 유럽 경제에 ‘승수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인구가 증가했고 1인당 소득은 더 빨리 증가했다. 후추와 포도주와 정조대의 연쇄 작용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영국의 양모 산업에, 정복왕 윌리엄의 영국 침공에, 흑사병과 백년전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후추’의 동력이 이끌었던 한 시대가 한순간 종언을 고한다. 백년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돈을 피렌체 상인들에게 빌렸던 에드워드 3세가 파산을 선언한 것이다. “피렌체인들에게 이 손실은 엄청난 재앙이었다. 사업 세계에서 영국 신사를 믿을 수 없다면 젠장,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영국 왕의 파산으로 피렌체인들이 상업과 은행업을 포기하고 회화와 시에 관심을 돌려 르네상스가 시작되었고, 중세가 끝났다는 치폴라의 익살스러운 재담에 진지한 독자들은 아연실색할 법하다. 하지만 그 행간에는 막스 베버가 정식화한 “근대 자본주의의 프로테스탄트적 기원”이라는 북유럽 중심의 역사 해석에 대한 치폴라식 태클이 숨어 있다. 프로테스탄트가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중세 이탈리아에서 자본주의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인간 세계를 통찰하다

치폴라의 독창적이고 위트가 번득이는 아이디어는 두 번째 글인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에서 작정한 듯 분출된다. 치폴라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변치 않는 진리, 즉 어리석은 인간들이 세상에 끼치는 해악에 대한 언설로 포문을 연다.

“어리석은 인간”들이란,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면서 자기 자신도 손해를 입는 사람들을 말한다. 치폴라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언제나 어느 사회나 일정한 비율로 존재하며(심지어 엘리트나 교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리석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나 어리석은 인간들의 잠재적 파괴력을 과소평가한다고 일갈한다. 

치폴라는 어리석지 않은 사람도 크게 세 부류로 나눈다. 첫째, 현명한 사람은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다. 둘째, 순진한 사람은 자신은 손해를 보지만 타인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다. 셋째, 영악한 사람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만 자신은 이익을 보는 사람이다. 윤리적인 가치 판단을 떠나서 본다면, 순진한 사람과 영악한 사람은 사회 전체의 이익과 손실의 증감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에게서 타인으로, 타인에게서 자신으로 이익을 이전시킬 뿐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회의 이익을 전체적으로 파괴하는 사람으로, 치폴라식으로 말하자면, “지상에서 가장 위험한 유형의 개인”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특유의 비합리성 때문에 예측이 불가하여 대처가 어려우며, 그들과 거래하거나 관계를 맺는 것은 틀림없이 아주 비싼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고 불쑥 나타나 기습 공격을 감행하며, 프리드리히 실러가 말했듯이 “어리석음 앞에서는 신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다”.

 

어리석은 인간들에 의해 나라가 파멸된다 “농담 아닌 농담”

이런 어리석은 자들은 교육과 사회 환경에 상관없이 어느 집단에서든 일정한 비율로 나타나며, 고대와 중세, 근대 혹은 현대 등 시대를 가리지도 않는다. 여기서 치폴라의 역사학자로서의 드라이브가 결론을 향해 나아간다. 번영하는 사회나 쇠퇴하는 사회 모두 어리석은 자의 비율은 똑같다. 보통 번영하는 나라는 현명한 사람들이 어리석은 무리를 통제하는 동시에, 진보를 보증할 만큼의 충분한 이익을 자신과 타인들에게 창출해낸다. 그러나 어떤 계기에 의해 순진한 사람과 영악한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어리석은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특히 엘리트들이 그렇게 변질되면) 그 사회는 쇠퇴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가진 파괴적 힘이 불가항력적으로 강화되고 나라는 파멸로 치닫는 것이다. 치폴라가 유머라는 형식을 빌려 우리에게 전하는, 농담 같지만 농담이 아닌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뼈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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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카를로 M. 치폴라

런던정경대학(LSE)과 소르본대학교에서 유럽의 경제와 역사를 연구한 대표적인 이탈리아 경제사학자이다. “자신의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경제사가”였고, 1995년에는 “동료 학자들에게 혁신 정신의 귀감이 된 역사학자”로서 발잔상(Balzan Prize)을 받았다.

그는 ‘서구의 발흥’, 특히 고대에서 근대로의 이행 과정으로서 중세에 대해 연구하면서, 유럽 문명의 연속성과 근대 유럽의 경제성장을 인구, 상업, 지식 등 장기적인 역사적 전환의 복합적 메커니즘으로 설명했다. 1959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미국 버클리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1991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이탈리아 피에졸레의 유럽대학교와 피사고등사범학교에서 가르쳤다. 경제사 분야에서 국제적 명성을 얻으면서 영국 왕립역사학회, 이탈리아 린체이아카데미,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 등의 회원이 되었다. 『스페인 은의 세계사』(1996년), 『대포, 범선, 제국』(1965년), 『시계와 문명』(1967년), 『중세 유럽의 상인들』(1994년)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옮긴이 장문석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탈리아 토리노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이탈리아 근현대사를 전공하고 있다. 현재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자본주의 길


들이기』(2016년), 『국부의 조건』(2012년, 공저), 『근대정신은 어떻게 탄생했을까』(2011년), 『민족주의』(2011년), 『파시즘』(2010년), 『피아트와 파시즘』(2009년), 『민족주의 길들이기』(2007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2019년), 『현대 유럽의 역사』(2017년), 『스페인 은의 세계사』(2015년), 『래디컬 스페이스』(2013년), 『제국의 지배』(2012년), 『만들어진 전통』(2004년, 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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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중세의 역사를 바꾼 영국-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이야기

 

데즈먼드 수어드 지음 |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416쪽 | 16,000원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백년전쟁 이야기

21세기에 톺아보는 왕좌의 게임 

"이보다 쉽고, 재밌고, 정확하게 백년전쟁을 풀어쓸 순 없다."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백년전쟁의 서막을 연 에드워드 3세, 몸은 허약했지만 뛰어난 지성과 통찰력으로 전쟁을 슬기롭게 헤쳐나간 샤를 5세, 프랑스 정복을 눈앞에 두었지만 죽음 앞에 결국 무릎 꿇은 헨리 5세, 명실 공히 백년전쟁 최고의 스타 잔 다르크. 유럽 중세사에서 가장 다채로운 빛을 발했던 인물들이 21세기에 되살아나, 중세 유럽의 패권을 두고 벌어진 파란만장한 무용담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백년전쟁』은 수많은 영웅들이 포효하던 시대로 우리를 데려가 깊이 있는 지식과 뛰어난 세부 묘사 그리고 명료한 문체로 백년전쟁을 이해하기 쉽게 조명한다.” _뉴요커

 


 

 

‘백년전쟁’은 19세기 후반이 돼서야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말로 100년 넘게 이어진 일련의 전쟁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1337년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당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던 에드워드 3세에게서 잉글랜드가 보유하고 있던 기옌 공국을 ‘몰수’하면서 시작된 이 일련의 전쟁들은 1453년 잉글랜드가 결국 기옌의 보르도를 상실하면서 끝났다. 일련의 전쟁이란 슬라위스 해전(1340년), 크레시 전투(1346년), 푸아티에 전투(1356년), 아쟁쿠르 전투(1415년), 잔다르크의 등장(1429년), 카스티용 전투(1453년) 등을 말한다.

 

누가 프랑스의 진정한 왕인가?

1328년, 프랑스 국왕 샤를 4세가 죽자 왕위는 발루아의 필리프(필리프 6세)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해협 건너 또 한 명의 왕위 계승 후보가 있었으니 잉글랜드 국왕의 모후 이사벨이었다. 그녀는 샤를 4세의 누이동생이란 점에서 사촌지간인 발루아의 필리프보다 오히려 우선순위에 있었다. 많은 이들은 그녀 또는 그녀의 아들이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파리의 의회는 이사벨을 후보에서 배제했다.
 처음에 이사벨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그의 왕권은 불안했고 그에게는 프랑스 국왕에 맞설 만한 실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화급한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아키텐 공국(기옌)을 계속 보유하는 문제였다. 기옌은 잉글랜드가 소유한 웨일스나 아일랜드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경제적 가치를 가진 영토로서 오로지 프랑스 국왕의 가신 자격으로만 보유할 수 있는 땅이었다. 힘이 미약했던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충성 신서를 하여 기옌을 지켰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 과도기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가 기옌을 통합하려는 의지를 읽었고 프랑스 국왕과 평화를 이룰 방도를 모색했다. 그러나 1334년 숙적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의 품에 안기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관계는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1337년 5월 필리프 국왕은 기옌을 몰수한다고 선언하였고, 에드워드 3세 또한 그에게 정식으로 도전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유럽 최강의 프랑스 VS 작고 가난한 잉글랜드

당시 프랑스 왕은 의심의 여지없이 서유럽의 첫째가는 통치자였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훨씬 능가하는 존재였고, 1309년 이후로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도 다소간 지배했다. 개전 시점에, 플랑드르와 브르타뉴, 기옌과 같은 반(半)자치 지역을 제외하고도 필리프 6세는 왕국의 4분의 3 이상을 직접 지배하고 있었다. 1330년대 프랑스의 인구는 2,100만 명에 달했고 이는 잉글랜드의 다섯 배였다. 반면 중세 잉글랜드는 인구 과소 지역으로, 경작지보다 숲과 황야가 더 많은 나라였다. 이 작고 가난한 나라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재산은 양모였다. 또 프랑스의 국왕과 달리 잉글랜드 국왕은 통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크레시 전투, 장궁이 판금 중기병을 무릎 꿇리다

프랑스 기사 계급은 필리프 6세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 프랑스는 거대한 규모의 기사 계급을 보유하고 있었고, 재위 초기에 필리프 6세가 이끈 중무장 기병 부대는 명실공히 서유럽의 최강 부대였다. 반면 잉글랜드는 개전 직전에야 겨우 약간의 빛을 발견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3세는 오래도록 고전을 면치 못했던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1333년에 처음 승리를 맛보았는데, 승리의 원동력은 장궁에 있었다. 장궁은 분당 10~12발을 쏘아올려 하늘을 까맣게 덮을 수 있었고 가까운 거리에서는 판금 갑옷도 뚫을 수 있는 가공할 무기였지만, 아직 해협 건너에는 그 존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1346년 에드워드 3세는 원정을 떠나 크레시 숲 근처에서 필리프 6세의 3만 병력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크레시 전투는 일종의 군사 혁명을 예고한 전투였다.

 

전쟁이 돈 버는 사업이 되다

잉글랜드인들에게 백년전쟁은 모험적인 비즈니스였다. 돈 놓고 돈 먹기였다. 높은 이익을 기대하고 벌이는 하이리스크의 투기적 사업이었다. 엘리트부터 기층 민중까지 온 나라가 정복 사업과 약탈에 뛰어들었다. 전쟁 초기에 잉글랜드는 주로 본국의 세금과 특별세금, 은행가와 상인들이 빌려준 돈으로 전비를 충당했다. 하지만 그 정도 자금으로는 전쟁을 치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아무리 모아도 한 달 이상의 전쟁 수행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슈보시와 파티스, 몸값 받아내기 등의 관행이 일찌감치 제도화되면서 해결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일종의 중세적 ‘총력전’을 목표로 슈보시(chevauche e), 즉 체계적으로 적의 경제적 기반을 초토화하고 ‘약탈’하는 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전리품은 잉글랜드군이 전쟁을 지속해나가는 중요한 자원이자 동력이 되었다. ‘약탈’ 외에도 돈을 버는 방법은 다양했다. 가장 수익성이 좋은 방법은 포로들의 ‘몸값’을 받아내는 것, 즉 포로에게 자유를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 잉글랜드군은 ‘파티스(patis)’라 불리는 보호비 갈취를 통해서도 많은 돈을 벌었다.

 

엘도라도가 된 프랑스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에서 얻은 어마어마한 부는 본국으로 흘러들어 갔다. 잉글랜드 전체가 프랑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으로 넘쳐났고, 잉글랜드인들에게 프랑스는 일종의 엘도라도였다. “프랑스 부인들이 자신들이 잃은 것을 한탄했다면 잉글랜드 부인들은 자신들이 얻은 것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전쟁은 무거운 세금이 부과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전쟁의 단맛을 본 사람들은 언제든 전쟁이 재개되기를 희망하였다. 백년전쟁 기간은 출세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빈한한 이들도 전쟁에 참여하여 귀족이 될 수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전쟁 와중에, 젠트리 가문들이 쉼없이 죽어서 사라졌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이 부상하여 그들의 자리를 차지할 여지가 있었다. 귀족은 그들대로 전리품 덕을 보았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획득한 부로 성과 교회를 지었고 병사들을 고용했다.

 

흑태자의 기적 같은 승리

1350년부터 1364년 사이의 주역은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와, 프랑스의 새로운 국왕 장 2세였다. 기옌의 국왕 대행으로 임명된 흑태자는 1355년 1,000킬로미터를 행군하며 무수한 마을과 촌락들을 대상으로 슈보시를 전개했는데, 여정의 막바지에 프랑스의 국왕 장 2세의 추격을 받아 퇴로를 차단당하였다. 이에 양군은 전투에 돌입하였다. 이 푸아티에 전투에서 흑태자는 약 2천6백 명의 병력으로 2만 명 이상의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기염을 토했고, 특히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사로잡는 놀라운 위업을 달성했다.
 이에 힘입어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국왕 자리를 무력으로 차지하기 위한 원정길에 올랐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휴전 협상에 임하여 1360년 브레티니조약을 체결했는데, 그에 따르면, 프랑스는 기옌과 더불어 리무쟁, 푸아투, 앙구무아, 생통주, 루에르그, 퐁티외 등 다른 많은 지역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잉글랜드에 내주어야 했다.

 

위대한 프랑스 군주 가운데 한 명인 현명왕 샤를 5세는 이전 시기까지의 열세를 만회하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영토를 회복했다.

 

현명왕 샤를 5세의 프랑스 영토 회복

하지만 잉글랜드만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었다. 위대한 프랑스 군주 가운데 한 명인 현명왕 샤를 5세는 브레티니조약에 대하여 명시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힘을 회복했다. 그는 계승 분쟁으로 어지러웠던 브르타뉴를 프랑스의 품안에 끌어들였고, 왕위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잉글랜드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악인왕 샤를을 중앙 정치 무대에서 몰아냈다. 또 플랑드르를 우호 세력인 부르고뉴 공작에게 넘기는 데 성공하였다. 무엇보다 강성한 프랑스의 국력을 토대로 샤를 5세는 기존의 ‘고용 계약’ 체제를 어느 정도 허물고 상비병력(중기병 3~6천, 석궁병 800명)을 모집할 정도로 국력을 회복하였다.
 샤를 5세에게는 영토 회복 전쟁을 수행할 베르트랑 뒤게슬랭이라는 훌륭한 지휘관이 있었다. 푸아투, 라로셸, 앙구무아와 생통주 전체,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의 잉글랜드 거점들이 차례로 프랑스에 귀순하거나 함락되었다. 샤를 5세의 최전성기에 잉글랜드 세력권인 아키텐 공국(기옌)은 에드워드 3세 때보다도 작게 축소되었고, 북부 또한 오직 칼레와 노르망디의 한 수비대 정도만이 남아 있는 형세가 되었다.

 

프랑스의 내분, 적을 초대하다

프랑스의 내분은 영국보다 더 심각하여 순식간에 샤를 5세의 유산이 증발한 것은 물론 나라를 망국의 지경으로 몰고 갔다. 어린 샤를 6세에게는 강력한 인척이 두 명 있었다.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이었는데 둘 다 프랑스를 지배하려는 야심에 사로잡힌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거의 모든 사안에서 대립했는데 이 대립은 점점 격화되었다. 시끄러운 언쟁과 맞비난으로 샤를 6세를 위한 국왕 자문회의는 엉망진창이 되었고, 거리에서는 두 정파의 추종자들이 난투극을 벌였다. 그러다가 1407년 11월 오를레앙 공작이 부르고뉴 공작 세력에 의해 살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마각을 들킨 부르고뉴 공작은 파리에서 빠져나와 있는 힘을 다해 플랑드르로 도망쳤다. 이후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프랑스, 특히 파리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나뉘어 무장한 채 서로 항쟁하는 지경이 되었다.

 

헨리 5세, 프랑스 왕이 될 근거를 확보하다

프랑스인들 사이의 이 치명적인 분열 덕분에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많은 지역들을 정복하고 종국에는 프랑스 왕에게서 많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프랑스로서는 안타깝게도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는 잉글랜드보다 서로를 더 지독하게 미워했고, 두 정파는 단합하기보다 서로 헨리 5세를 동맹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했다. 그리고 결국 부르고뉴공 필리프가 헨리 5세의 마음을 얻었다. 헨리 5세는 1420년 5월 트루아에 도착하여 샤를 6세와 함께 조약에 서명하였는데,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 왕위의 계승자이자 프랑스의 섭정(Haeres et Regens Franciae)이 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아직 샤를 6세가 죽지 않았지만,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자격을 약속받은 순간이자, 프랑스로서는 역사에 매우 드문 굴욕의 순간이었다.

 

앵글로-프랑스에서의 마지막 전성기

헨리 5세가 죽은 후 7년간은 잉글랜드인들에게 마지막이자 가장 성공적인 시절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의 헨리 6세는, 프랑스 왕 샤를이 곧 사망함으로써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도 겸하게 되었다. ‘앙리(Henri)’ 국왕은 섬처럼 고립된 몇몇 도팽 세력 지역을 제외하고는 루아르강 북쪽의 프랑스 전역에서 국왕으로 인정받았고, 마침내 잉글랜드 국왕이 나머지 프랑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얻을 진짜 기회, 백년전쟁이 시작된 이유가 해소될 시기가 가까이 온 듯했다. 이중 왕국은 순조롭게 굴러갔다. 이중 왕국을 떠받친 것은 섭정 베드퍼드와 그의 위대한 장군 솔즈베리 백작, 20년 넘게 그들과 함께 전장을 헤쳐온 대단히 재능 있는 일단의 팀이었다. 때로는 파리 시민들도 이중 왕국을 위해 충성스럽게 싸웠다.

 

잔 다르크의 등장(1429년)은 잉글랜드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프랑스의 전세를 뒤바꿨다. 잔 다르크가 북돋운 용기에 프랑스군은 스스로 성전을 치른다고 생각했고, 잉글랜드군은 "어느 대장이나 지휘관보다 그 처녀를 두려워했다.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을 구하고 프랑스 왕은 대관식을 올리다

잔 다르크는 도팽을 만나서, 신이 자신한테 잉글랜드인들과 싸우고 국왕이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녀는 오를레앙의 구원에 나서기에 앞서 베드퍼드 측에 서신을 보냈다. “천상의 왕께서는 너희들을 프랑스에서 쫓아내라고 나를 보내셨다. 부디 너희들의 땅으로 떠나라.” 초반에 그녀는 연달아 승전을 거두었고 그녀의 명성은 파테 전투 이후 절정에 달했다. 그녀는 도팽을 설득하여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영토를 통과하여 랭스로 향하였고 거기서 샤를은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잔은 대관식 내내 하얀 깃발을 들고 그의 근처에 서 있었고, 의식이 끝난 뒤 처음으로 그를 프랑스의 국왕이라고 불렀다. 국왕의 대관식은 도팽파의 사기를 경이로울 정도로 진작시켰다. “프랑스인들은 신이 잉글랜드인들에게 등을 돌렸다고 믿었다.”

 

카스티용 전투, 프랑스의 대포가 백년전쟁을 끝내다

전쟁 말기에 잉글랜드의 재정은 거의 파산 직전이었다. 정복지의 수비대는 그 어느 때보다 적은 수의 병력으로 유지되었다. 반면에 프랑스는 특별세를 재도입하여 성공적으로 그 세금들을 거둬들이고 있었고, 유동 현금을 거의 무제한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결국 전쟁 말기에 이르러 국력과 체제의 정비로 프랑스는 잉글랜드를 압도하였다. 특히 백년전쟁의 막을 내린 것은 ‘대포’였다. 백년전쟁의 초창기에 잉글랜드 장궁의 활약과 프랑스 중기병의 몰락은 많이 알려졌으나, 후반기 프랑스 대포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비교적 알려져 있지 않다. 장 뷔로는 15세기 전반기 내내 화약과 주조 기술을 서서히 향상시켰고, 1453년 마지막 전투인 카스티용 전투에 이르러 잉글랜드의 1만 병력을 다수의 대포로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근대 민족국가의 맹아가 싹을 틔우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이 전쟁을 통해 민족 감정을 형성하였다. 이 전쟁을 통해 두 나라는 향후 절대왕정 체제와 국민국가로의 경로를 걷는다. 백년전쟁을 거치는 동안 프랑스인이라면 누구나 백년전쟁의 무정부 상태와 유혈의 책임이 잉글랜드인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루티에들(자유 부대: 계약이 종료된 용병) 가운데 프랑스인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을 죄다 “잉글랜드인들”로 여겨졌다.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민족주의의 성장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인들을 자신들의 자연스러운 먹잇감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면서 증오심과 경멸감을 키워나갔다. 전쟁 초기에 왕실의 제1언어는 프랑스어였으며 국왕들의 정체성 또한 프랑스인과 구별되지 않았으나 나중에 잉글랜드의 주전파들은 “프랑스 국왕은 전하의 주적이자 전하 왕국의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상식을 언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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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데즈먼드 수어드(Desmond Seward)

데즈먼드 수어드는 오랫동안 보르도에 자리 잡고 살아온 아일랜드 가문 출신으로, 파리에서 태어나 앰플포스와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했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앙리 4세, 헨리 5세, 사보나롤라 등을 다룬 여러 권의 전기를 저술했다. 그 외에도 『프랑스의 부르봉 국왕들』, 『마지막 흰 장미: 튜더 왕조의 비밀 전쟁』, 『나폴레옹과 히틀러』, 『장미전쟁』, 『리처드 3세: 잉글랜드의 검은 전설』, 『춤추는 태양: 기적의 성소들을 찾아서』, 『전쟁의 수도사들』 등 다수의 역사서를 집필했다. 특히 『전쟁의 수도사들』은 서양 군사-종교 단체들의 설립부터 현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 통사를 다룬 저작으로, 18세기 이후로 이 분야에서 나온 최초의 책이다.

 

옮긴이 최파일

서울대학교에서 언론정보학과 서양사학을 전공했다. 역사책 읽기 모임 ‘헤로도토스 클럽’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역사 분야를 중심으로 해외의 좋은 책들을 기획, 번역하고 있다. 축구와 셜록 홈스의 열렬한 팬이며, 1차 대전 문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옮긴 책으로 『바다의 습격』, 『인류의 대항해』, 『시계와 문명』, 『아마존』, 『근대 전쟁의 탄생』, 『대포 범선 제국』, 『십자가 초승달 동맹』,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마오의 대기근』, 『내추럴 히스토리』, 버트런드 러셀의 『자유와 조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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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습격』

인류의 터전을 침식하는 해수면 상승의 역사와 미래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360쪽 | 15,000원 

 

 

이번 세기에 바다는 더 강력한 모습으로 공격해올 것이다.

몇몇 국가와 도시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

 

세계적인 고고학자 브라이언 페이건 신작

바다의 습격에 맞선 인류의 새로운 응전을 준비하라! 

 

 

이 책은 마지막 빙하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바다와 인류의 관계를 ‘도전과 응전’의 서사로 풀어낸 책이다.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해수면 상승의 역사를 소개하고,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위험한 미래에 대해 경고한다. 1만 5천 년 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거침없이 상승하던 바다는 약 6천 년 전에 상승을 멈추었고, 그동안 인류는 거대한 문명을 쌓아올렸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바다가 꿈틀대며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고, 이제 인류는 ‘새로운 해수면 상승’의 시대에 이주냐 방벽 건설이냐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저자는 지난 역사 속에서 바다가 야기한 파괴의 긴 목록을 소개하며 말한다. 바다는 언제나 문명의 발치에 있어 왔고 본질적으로 변한 게 없다. 변한 것은 해안과 저지대에 거대한 삶의 터전을 쌓아올린 인류이다.

 


 

 

122미터 아래로부터 바다가 차오르다

지금으로부터 2만 1천 년 전 해수면은 정확히 122미터 아래에 있었다. 인류가 겪은 마지막 빙하기는 1만 5천 년 전에 막을 내렸다. 그와 함께 대해빙이 시작되었고 막대한 양의 융해수가 북반구 바다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 후 바다는 9천 년 동안 거침없이, 때로는 속도가 정체되었지만, 오늘날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속도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 급격한 상승(펄스)은 1만 9천 년 전에 있었다. 해수면은 단 5세기 만에 10~15미터 상승했다. 두 번째 펄스는 1만 4,600년~1만 3,600년 전에 있었는데 해수면이 16~24미터 상승했다. 마지막 펄스는 기원전 6200~기원전 5600년 사이에 있었고 약 1미터 안팎의 소규모 상승이었다.

기원전 4000~기원전 3000년 무렵부터 지구의 해수면 상승은 사실상 멈추었다. 로마 제국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대의 바다나, 1천 년 전 노르드인들이 북대서양을 탐험하던 시기의 바다는 오늘날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유럽의 대항해 시대 뱃사람들이 누비던 바다도 마찬가지였다. 지구의 해수면 상승 속도는 19세기 중반 인류가 산업혁명의 절정기에 진입하기 전까지 매우 느리게 유지되었다.

 

바다의 도전과 인류의 응전

인류의 터전 바로 곁에는 언제나 바다가 있었다. 바다는 언제나 육지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옛날에는 바다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빙하기 말 해수면이 상승하는 동안에는 지구에 인간이 매우 적었고, 그들의 공동체는 새로운 해안선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식량원을 찾아서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지만 그들 주변에는 얼마든지 이주할 공간이 있었다.

해수면 상승이 멈춘 동안 인류는 문명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터전’을 지키기 위한 바다와의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초기 문명이 ‘대홍수’를 겪었음은 틀림없다. 그 기억은 후손에게 전해져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같은 ‘신화’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았고 아직 소규모였다. 그들은 ‘대홍수’의 기억을 뒤로 하고 자연의 변덕에 적응하는 길을 택했다. 그들은 풍요로운 강 하류 삼각주와 해안 저지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천천히 인구와 도시 규모를 늘려나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역사에는 ‘바다가 야기한 파괴’의 목록이 길게 나열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바다의 습격’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게 된 것은 불과 수백 년밖에 되지 않았다. 바뀐 것은 바다가 아니라 인류였다. 늘어난 인류의 숫자와 커진 도시의 규모가 곧 ‘재앙’의 인질이었다. 유사 이래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문명과 도시를 건설했지만, 어느덧 고정불변의 상수였던 ‘바다’ 또한 이제 변수가 되어 문명에 도전할 채비를 마쳤다. 우린 새로운 해수면 상승의 시대를 맞이했고, 바다가 제기하는 매우 어려운 딜레마 앞에 서 있다. 우리 문명의 일부를 지킬 것인가, 버릴 것인가? 우린 선택해야 한다. 

 

 

선사 시대 대홍수의 기억

기원전 5500년 무렵, 영국 뭍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도거랜드’는 바다에 잠겨 완전히 사라졌다. 마지막 빙하기의 절정기에 북해는 육지였다. 그리고 거의 최후에 잠긴 ‘도거랜드’는 대륙의 일부로 한때 사람이 살던 땅이었다. 하지만 해수면이 상승함에 따라 도거랜드는 점차 바닷물에 포위당해 도거 힐스(Dogger Hills)가 되었고, 결국 섬이 되었다가 물결 아래로 사라졌다. 이때 인간들은 워낙 소규모 공동체였고 수렵 생활 위주였기 때문에 해수면 상승에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새로 이주하거나 고지대로 야영지를 옮기는 일은 큰 희생이 필요 없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일이었다.

▲ 지금보다 해수면이 122미터나 낮았던 선사시대에 인간은 해안가 저지대에서 풍요롭게 살았다. 해수면이 상승해도 인구가 희박했기 때문에 더 높은 지대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에욱시네 호수’(오늘날 흑해) 근처에 살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에욱시네 호수는 민물 호수로 초기 농경 인구의 터전이었다. 그런데 해수면 상승의 여파로 지중해의 바닷물이 건너편 방벽을 넘어 급격히 쏟아져 들어오면서 호수는 순식간에 짠물이 되었다. 독한 바닷물 때문에 농경은 불가능해졌다. 물고기가 떼죽음을 맞았고 식물들은 죽어갔다. 에욱시네 호수는 바다가 된 것이다. 새로운 해수면 상승의 시대의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거의 최초의 사례였다. (노아의 방주 신화의 역사적 근거이기도 하다).

 

 

해수면 상승이 멈춘 동안 인류가 문명을 건설하다

공교롭게도 해수면이 상승을 멈춘 시기에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남아시아에서 도시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해안선이 차올라 점점 터전을 잠식하면서 여러 공동체들이 합쳐지는 경우가 생겨났고, 공동체의 바깥 세계 또한 점점 다른 인구로 채워졌다. 육지의 인구는 점점 조밀해졌고, 인류는 문명을 본격적으로 건설하며 공동체의 몸집을 급속도로 불려나갔다. 바다 수위가 높아졌기 때문에 나일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의 유속이 느려지고 엄청난 양의 퇴적물이 강어귀에 쌓이면서 광활한 삼각주가 발달했다. 농경 문화의 보급과 함께 삼각주는 대규모 인구를 부양하는 토대가 되었다. 저지대에 인류가 매혹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농경을 위해 주기적인 홍수와 범람은 축복일 수 있었다. 상류로부터의 퇴적물은 하류의 지반을 느리게 상승시키고 바다에 대한 완충지대를 두텁게 형성했다. 습지와 늪지, 맹그로브의 식생이 다시 한번 바다로부터의 충격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도시화, 산업화와 함께 자연의 마법이 깨지면서, 바다는 예전과 달리 살벌한 투쟁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곳곳의 댐 건설과 수로 및 제방 축조 때문에 상류로부터의 토사 퇴적이 멈추고, 오히려 바다에 의한 침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간은 바다의 편이 되었다. 거대한 규모였던 습지와 늪지, 맹그로브는 꾸준히 줄어들었고, 기상이변을 동반한 바다의 공격은 점점 더 강해졌다.

 

 

산업화로 새로운 해수면 상승의 시대가 시작되다

산업 혁명의 절정기인 1860년경부터 새로운 해수면 상승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후로 세계는 현저히 따뜻해졌고, 대양은 다시금 거침없이 상승하고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 인류는 최근 수십 년간 가속화된 온난화에 일조해왔다. 해수면의 변화는 누적적이고 점진적이다. 상승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 상승이 우리 생전에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최근까지 해수면 상승에 대한 빙하의 기여도(남극과 그린란드의 빙하)는 극히 일부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빙하의 기여도가 과거의 두 배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린란드 빙하가 완전히 녹는다면 지구 해수면은 7미터 상승할 것이다. 남극의 동남극 빙상이 이번 세기에 다 녹을 일은 없겠지만 만약 전부 녹는다면, 해수면 높이는 50미터가량 상승할 것이다. 반면 해저에 잠긴 형태의 서남극 빙상은 보다 빠르게 녹을 텐데, 이것이 전부 녹는다면 해수면은 대략 5미터 상승할 것이다. 만약 서남극 빙상이 1,200년 이내에 사라진다고 가정하면, 대양은 1세기에 대략 30~50센티미터씩 상승할 것이다. 그 기간이 500년이면 1세기에 1미터 정도 상승할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2100년까지 2미터 상승을 전제로 미래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오늘날 수십억 명의 인구와 거대한 부가 해안가 저지대에 집적되어 있다. 뉴욕, 상하이, 홍콩 같은 글로벌 메가시티 뿐만 아니라 광활한 거주지와 농경지가 새로운 해수면 상승 시대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주냐 방벽 건설이냐

바다가 따뜻해지면서 북극에 면한 알래스카 땅은 얼음이 녹아 바다가 찰랑거리는 기간이 길어졌다. 해수면 상승과 급속하게 진행되는 침식 때문에 북극해 근처의 여러 마을은 시간문제일 뿐 곧 바다에 함락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 속한 이 공동체들은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다. 부유한 조국이 이들을 지원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평양과 인도양의 섬나라들은 사정이 다르다. 여러 섬들이 불확실한 미래와 대면하고 있다. 금세기에 물에 잠길 것이 거의 확실한 투발루와 키리바티는 그럭저럭 ‘이주’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구 1만 명의 투발루는 뉴질랜드의 확약을 받았고, 인구 11만 명의 키리바티는 “품위 있는 이주”를 꿈꾸며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움을 구하고 있다. 반면 인구 30만 명 규모의 몰디브는 사정이 좋지 않다. 고도가 2.4미터에 불과한 이 섬나라는 국토의 상실을 피할 수 없지만 아직 뚜렷한 이주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뭍의 도시도 안전하지 않다. 지중해의 베네치아와 양쯔 강 하류의 상하이는 현재 가라앉고 있다. 두 도시의 고민은 거의 같다. 지반이 꾸준히 침하하고 있고, 여기에 해수면 상승이 결합한다. 두 도시의 대책도 거의 같다. 두 도시는 ‘방벽’을 선택했다. 베네치아는 ‘모세 프로젝트’를 마련해 바다와의 긴 싸움에 임하고 있지만, 2012년에 도시의 70퍼센트가 다시 물에 잠겼다. 전문가들은 베네치아가 퇴적 능력을 강화하지 않으면 40년에 걸쳐 15~20센티미터 가라앉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만약 수문과 배리어로 바다를 막을 수 없을 때 베네치아에는 어떤 선택이 남아 있을까? 해수면은 계속 상승하고 있고, 여기에 밀물과 기상이변이 어우러진 ‘도전’은 더 강해질 것이다. 상하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도시 주변의 해안선 절반이 ‘침식’ 상태에 있고, 전문가들은 해수면이 1미터 상승하면 상하이 전체가 물밑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가 단위의 파멸적 경고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는 방글라데시이다. 방글라데시는 다음 세기에 예상되는 1미터 이상의 해수면 상승을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방벽을 건설할 재원도 없는 이곳에서는 몇십 년 내에 1천만 명 이상의 난민이 생길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이 나라는 비우호적인 인도와 미얀마 사이에 있다.

 

 

터전을 지키기 위한 인류의 무기

해수면 상승은 해저 지진과 쓰나미가 불러일으키는 위험을 증대시킨다. 지반 침하, 만조, 계절 기후, 기상이변 등 여러 조건이 맞물려 해수면 상승의 위협은 증폭된다. 서구의 여러 도시들은 1백 년에 한 번, 1천 년에 한 번 찾아올 ‘재앙’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심지어 1천 년에 걸친 바다와의 싸움 끝에 ‘조수를 다스리게 된’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12만 5천 년에 한 번 찾아올 ‘재앙’에 대한 고려도 시작했다.

바다의 습격은 우리에게 이주냐 방벽이냐 선택을 강요한다. 문제는 우리가 쉽게 ‘터전’을 버릴 수 없다는 데 있다. 2005년 지형을 바꿔놓을 정도로 강력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겪으면서, 미국 뉴올리언스의 주민 수십만 명은 이주를 택했다. 하지만 현재 그들 중 절반 이상은 다시 되돌아왔다고 한다. 돌아온 이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제방’, 즉 방벽 건설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바다의 도전에 맞서 우리는 어떤 방어 수단을 갖고 있을까? 늪지와 습지, 맹그로브는 언제나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늪지와 습지는 퇴적물의 자연적인 누적을 통해 지반이 상승하는 토대가 되어주고, 침식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에도 인류가 준비할 시간을 벌어준다. 맹그로브 숲은 쓰나미가 일어난 여러 곳에서 그 효과를 가시적으로 입증했다. 맹그로브와 늪지, 습지대 등 자연 방벽들은 바다의 맹습에 맞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들이다.

베네치아나 상하이, 미국 루이지애나 주는 값비싼 비용을 들여 방벽을 만들었고 계속 보강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방비 수단들은 ‘충격의 완화’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아가 ‘확률 게임’에 모든 것을 건 도박과 비슷한 데가 있다. 네덜란드인들이 수행한 거의 1천 년에 걸친 ‘바다와의 싸움’의 핵심은 거대한 재앙과 희생에 대한 기억을 ‘지속적인 집단의 기억’으로, 나아가 문화의 일부로 만든 데 있다. 값비싼 비용의 투입과 사회적 차원의 지속적인 노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집단의 동의와 정치가 필요하다.  

▲ 우리 문명의 일부를 지킬 것인가, 버릴 것인가? 부유한 국가들은 엄청난 돈을 들여 방벽을 건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방비 수단들은 충격 완화에 관한 것이 아니다. 확률 게임에 모든 것을 건 도박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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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브라이언 페이건(Brian Fagan)

고고학과 인류학계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펨브로크 칼리지에서 고고학과 인류학을 전공했다. 1967년부터 2003년까지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바버라 캠퍼스에서 인류학 교수로 있었고, 현재 명예 교수로 있다. 학생과 일반인을 상대로 수많은 고고학 개론서와 교양서를 집필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중세 온난기를 다룬 『뜨거운 지구, 역사를 뒤흔들다』(2008년)가 『뉴욕타임스』 논픽션 부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인류의 대항해』 『위대한 공존』 『고대 문명의 이해』 『세계 선사 문화의 이해』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크로마뇽』 등의 책을 썼다. 고고학자인 지은이가 바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이다. 여덟 살 때 어부였던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항해술을 배웠고, 이후 바다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혼자 GPS 없이 영국에서 미국까지 대서양을 횡단하기도 했다. 『바다의 습격』에서 지은이는 견고한 자료에 의지해 논지를 전개하며, 전 세계 도시와 정부들에 경고한다. ‘지금 당장 행동하라. 방비 태세 구축에 나서라. 그렇지 않으면 피할 수 없는 대재앙의 홍수에 직면할 것이다.’

 

옮긴이 최파일

서울대학교에서 언론정보학과 서양사학을 전공했다. ‘바른번역’에서 번역을 공부했고, 역사 분야를 중심으로 해외의 좋은 책들을 소개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 축구와 셜록 홈스의 열렬한 팬이며, 1차 대전 문학에도 관심이 많다. 옮긴 책으로 『인류의 대항해』 『시계와 문명』 『아마존』 『근대 전쟁의 탄생』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십자가 초승달 동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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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발견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힘의 정체를 찾아서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688쪽 | 25,000원

 

 

 

만약 우리가 역사를 다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삶일까?


해방과 전쟁 후 혼돈과 죽음이 편재하던 세상에서

오늘날 우리가 있기까지

문학으로 본 한국인 굴기의 대서사 

 

 

이 책은 우리 한국인이 해방 이후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새롭게 발견한 시대정신을 소개하며, 나아가 한국인들이 20세기를 통해 형성한 ‘힘’, 즉 ‘사상’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역사를 이야기한다. 한국인들의 사상과 정체성에 접근하기 위해 저자 최정운 교수가 찾아낸 중요한 경로는 한국 현대 소설이었다. 현대 소설에 담긴 ‘픽션’은 소설가들이 당대 현실과 조응하며 기록한 가장 온전한 ‘사상’의 모습이고, ‘픽션’의 밑바닥에는 늘 시대적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은 이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새롭게 일주하며 그 과정에서 발견된 우리 역사는 ‘예술 작품’의 연속이다. 이리하여 저자 최정운 교수는 전작 『한국인의 탄생』과 이 책 『한국인의 발견』을 통해 20세기 한국인들이 걸어온 근대로의 여정을 하나의 대서사로 완성했고, 이로써 한국 근현대 사상사의 발굴과 정립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열었다.  

 

 


 

 

20세기 한국인들의 근대로의 여정

우리의 비틀거린 반세기 현대사는 원치 않았던 거칠고 넓은 세상을 두루 여행한 역사였다. 우리 민족은, 좌우의 이데올로기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아와 죽음의 공포에서부터, 전쟁도, 어두운 죽음의 세계도, 부활도, 혁명도, 쿠데타도, 희망의 세상도, 내전도, 계급 갈등도,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죽음을 넘어선 투쟁도, 군사독재도, 민주주의도 경험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시련을 두루 겪었다. 그렇다고 모든 시련을 섭렵했다고 안도할 수도, 자만할 수도 없다. 자랑스러운 역사라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피와 눈물이 흘렀고, 부끄러운 역사라 하기에는 너무나 영웅적인 투쟁의 연속이었다.

이 책의 부제에서 ‘힘의 정체’란 일차적으로 20세기 역사의 주인공 한국인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힘의 정체’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현실에 균열을 내고 사건을 만든 근본적인 힘으로서 한국인의 시대정신을 뜻하며, 나아가 시대정신을 담고 그것을 끊임없이 갱신해온 한국인의 내면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힘의 정체’는 ‘사상’이라는 범주로 합류한다. 그런데 그 ‘힘’이란 당대 현실에 반응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 책을 통해서도 확인하게 되지만 사실 ‘사상’의 변화가 가장 심대하게 일어나는 때는 세상을 뒤바꾸는 역사적 정치적 사건의 전후 시기였다. 결국 이 책은 사상의 탐사 과정에서 발견된 역사적 현실, 주요 정치적 사건에 대해서도 그 어느 역사서보다 근본적인 이해를 독자들에게 선사할 것이다.


외국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우리 현대사에도 '신화'들이 존재한『한국인의 발견』은 우리 역사에서 '신화'들이 만들어지고, 왜곡되고, 감추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물론 '신화'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해방 직후의 분위기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의 분위기는 오늘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환희와 축제의 시간만은 아니었다. 해방 후 남한은 아수라장이었다. 그리고 해방 공간에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마음대로 편안하게 자기 생각을 펴지 못하고, 일제가 물러가는데도 서로 눈치를 보며 자유를 느끼는 게 아니라 더욱 무시무시한 시대를 예감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그들은 당시 정치 문제, 즉 건국의 문제에 대해서는 말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당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주변의 조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믿을 수 없었다. 한편 해방 공간의 한국인들은 ‘국가’나 ‘나라’, ‘관(官)’에 대해 전혀 신용하지 않았고, 그런 그들에게서 ‘우리가 대한민국을 만든다’라는 뚜렷한 의식을 찾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오늘날 현실 인식에 기대어 우리는 종종 한국인들이 ‘강한 국가’를 원하는 ‘국가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때 한국인들은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로크적 자연상태와 유사했던 해방 공간

일제가 물러간 해방 공간에는 권력 공백이 생겼고 ‘자연상태’가 돌아왔다. 그러나 해방 공간의 자연상태는 구한말의 ‘홉스적 자연상태’는 아니었고 ‘로크적 자연상태’에 가까웠다. 그 속에서 한국인들은 앞다퉈 수많은 정치 단체와 정당들을 만들어냈다. 해방 공간의 자연상태와 그로 인한 혼란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홉스적 사회 계약’이 필요했고 이는 자연스레 미국에 대한 의존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미군정은 홉스적 사회계약에 의거한 전제군주로서 남한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법치주의로 남한을 다스렸고 따라서 한국인들끼리 정치가 가능한 하위 정치 공간이 열렸다. 한국인 정치 집단들은 한편으로는 미군정의 지배를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하위 정치 공간에서 자기 보호를 위한 단체 결성과 테러 등 권력 투쟁을 벌였다. 해방 공간은 이러한 이중적인 정치 행위가 구조화된 공간이었다.


로크적 자연상태는 홉스적 자연상태와 달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아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보호연합'을 만들어, 한편으로는 협상하고 한편으로는 투쟁한다.

 

취약국가로 태어난 민족국가 대한민국

신생 대한민국은 분명 민족국가로 만들어진 나라였다. 하지만 건국 과정에서 자원의 부족을 급박하게 보충하기 위해 취한 초기 조치들은 장기적으로 대한민국 국가 전체에 광범위한 결과를 야기했다. 결국 대한민국은 ‘취약국가’로 태어났다. 우선 대한민국은 ‘친일파’를 대거 재등용했고 이 때문에 정통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채 역사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국가로서의 능력도 형편없었다. 재정이 없어서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눈감아줄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정부 사업은 싸구려로 부실하게 집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모든 부분은 ‘부실과 부패의 온상’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또 폭력 수단의 보유라는 측면에서도 대한민국의 상황은 너무나 열악했다. 대한민국이 폭력적 행위를 저지르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무력, 폭력적 능력이 많고 넘쳐서가 아니라 폭력 수단과 국가로서의 능력이 모자란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전쟁의 주체가 되지 못한 한국인들

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국에서 꾸어 오는 식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바로 민족적 주체 의식이었다. 대한민국은 시작에서 민족주의가 부족한 나라였지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오히려 민족, 대중을 두려워했다. 민족적 주체 의식의 결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주체 의식의 부족은 국민의 생명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졌고, 거창 양민 학살, 보도연맹원 학살, 국방경비군 아사 사건 등은 모두 이로 인해 저질러진 역사였다. 대한민국은 모든 젊은이들의 생명과 자원을 총동원하여 휴전선을 다시 긋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존재는 생존자들의 경우에도 긍정되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에게 여러 층위의 온갖 악몽을 심어놓았다. 우리는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가해자였고, 형제를 학살한 살인자들이었다. 열심히 싸워 나라를 지켰지만 영웅도 없었다. 한국전쟁은 흡사 패전이었다.


1950년 9월 서울 수복 당시 서울 시가와 사람들

 

아프레게르와 한국인의 부활

전후 한국은 공동묘지 같은 을씨년스런 폐허였다. ‘재건’의 구호도 들리지 않았다. 한국이 겪은 아프레게르(après guerre)는 한 점의 빛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죽음만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1950년대 전반 손창섭, 황순원, 김동리 등이 그린 우리의 모습은 죽음이었고 한국은 죽음이 편재하는 세상이었다. 이 시기 손창섭과 장용학 등이 수행한 문학적 실천의 핵심은 괴롭고 암울한 현실을 더욱 괴롭고 무겁게, 도망갈 곳 없이 끝없이 반복될 현실로 만들어 한국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현실을 대안이 없는 무게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문학적 실천은 죽은 시체 같은 한국인들을 되살리는 부활의 마법이 되었다. 한 문학가는 1950년대를 단순히 서양 문학을 모방하는 데 그쳤을 뿐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 한심한 시대였다고 회고했지만 손창섭을 위시한 이 시대의 작가들이야말로 우리 현대사 최고의 영웅들이었다.

 

부활을 넘어서―욕망하고 분노하는 한국인

1950년대 후반부터 출간된 대부분의 소설들에서 한국인은 욕망의 주체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1950년대 말이 되면 한국 사회는 여전히 가난했지만 그야말로 욕망의 도가니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욕망하는 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욕망은 좌절의 계기였고 계속된 좌절은 분노로 이어졌다.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여 선우휘의 「불꽃」, 장용학의 「역성서설」 같은 작품이 발표되었고 1958년 9월에는 드디어 손창섭의 「잉여인간」이 나왔다. 「잉여인간」의 채익준은 한국 문학에서 최초로 등장한 ‘분노하는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낼 인물이었다. ‘영겁회귀’의 사상적 결과로 한국인은 부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절대 빈곤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영겁회귀’가 가능했던 사상적 조건과 본질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었다. 한국인은 부활을 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했다.


화폭을 찢고 뛰쳐나올 것 같은 이중섭의 황소. 이 그림들이 그려지던 시기에 '한국인의 부활'이 이루어졌다.

 

먼저 당도한 혁명 4·19

1950년대의 비참함을 자각한 우리 민족은, 한편에서는 민중의 분노가 무르익어감을 통해, 또 한편에서는 민족을 이끌고 나갈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혁명에 다가갔다. 먼저 당도한 혁명은 4·19였다. 그런데 4·19는 민중의 폭발을 두려워한 언론계 지식인들(특히 『사상계』)에 의해 ‘대학생들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하여 일으킨 의거이자 혁명’이라는 해석을 부여받았고, 이 해석이 요지부동으로 모든 교과서와 담론에서 공식 정론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 정론은 4·19의 힘을 두 단계에 걸쳐 거세한 것이었다. 첫 단계에서 언론계 지식인들은 대학생들을 긴급하게 무대에 투입하여 그동안 시위의 주된 참가자였던 고등학생과 도시 빈민들의 존재를 지우는 한편, 대학생들로 하여금 ‘민주주의’ 구호를 외치게 함으로써 시위의 성격을 바꾸었다. 다음 단계에서 그들은 권력을 기성 정치인들의 손에 넘겼고, 그렇게 사태는 종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개입은 의도치 않은 정치적, 역사적 왜곡을 가져왔다. 권력을 넘겨받은 민주당과 제2공화국은 4.19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고 지식인들의 각본에 따라 외쳐진 ‘민주주의’를 위한 ‘놀이’를 벌였다. 그들은 고등학생과 민중들의 좌절과 분노가 폭발한 원인, 이승만 시대를 통해 쌓이고 쌓인 사회 구조적 문제들을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제2공화국은 역사를 4·19 이전, 원점으로 되돌리고 있었고, 혁명은 다시 시작되어야 했다.

 

‘붉은 심장의 설레임’을 가진 세대의 등장

4·19의 가장 의미심장한 결과는 바로 4·19세대의 출현이었다. 4·19와 5·16 사이의 일 년 남짓한 기간에 최인훈은 「가면고」와 『광장』을 발표했는데 두 작품은 최근 민족적 영웅에서, 스타로, 그리고 한낱 배우로, 꼭두각시로 전락한 ‘4·19세대’ 젊은이들의 고뇌를 다루고 있었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4·19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4·19에서 그의 세대는 혁명을 목전에 앞두고 무대에서 끌어내려졌다. ‘혁명’ 후에 발표된 『광장』에서 이명준은 미리 포기하지 않고 직접 제 발로 계시 받은 특별한 운명을 찾아 ‘광장’을 찾아가봐야 했다. 그러나 4·19세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위기를 극복할 힘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붉은 심장의 설레임’을 느낀 세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꿈과 희망에 찬 젊은 세대’였다. ‘붉은 심장의 설레임’은 그 자체로 혁명이었고, 4·19는 혁명임에 틀림없었다.


위 사진은 4.19 당시 사태의 중심이 '대학생'이 아니었고 누군가는 '수습'을 고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혁명 5·16

5·16 주체 세력은 제2공화국의 무능과 실패를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5·16 쿠데타는 제2공화국의 실패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 5·16의 음모는 이미 1950년대 중반, 거의 1956년쯤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4·19와 5·16은 프랑스 혁명기의 혁명들처럼 반동으로 이어진 사건들이 아니었다. 즉 4·19의 실패가 5·16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었다. 4·19와 5·16은 이미 1956년경에 따로, 다른 방식으로, 서로 중간에서 엮이지 않고 준비되고 이뤄진 이란성 쌍둥이였다. 5·16은 물론 불법 쿠데타였다. 하지만 5·16은 분명히 ‘혁명’이었다. ‘산업 혁명’이 혁명이었다면 5·16은 분명히 혁명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대한민국은 ‘혁명을 못 겪은’ 나라가 아니었다. 독특한 방법으로, ‘두 개의 혁명’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겪었다. 프랑스 혁명, 중국 혁명, 러시아 혁명처럼 많은 사람이 죽지도 않았고 역사적으로 떠들썩하지도 않았지만 ‘두 개의 혁명’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혁의 정도는 전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할 규모였다. 5·16의 성공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시대를 열었다. 5·16은 구경꾼이었던 한국인들에게 ‘붉은 심장의 설레임’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노란 욕망’의 시대를 열었다.


5.16 쿠데타의 성공, 그리고 '선글라스'를 낀 주모자의 등장은 한국인들에게 너무도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욕망의 시대가 열리다

1960년대에 지식인들은 한국의 후진성을 의식했고 서둘러 근대화시킬 수 있는 성마른 인물들을 만들어 나갔다. 1960년대의 한국인들은 분명 전과는 전혀 다른 활기찬 모습이었다. 혁명 과정에서 욕망을 발산하기 시작했고 역사와 현재의 발견을 통해 희망을 얻었으며, 이 희망을 지키기 위한 한국인들의 결의는 진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독했고, 그들의 정서를 품어줄 공동체는 거부되었다. 한국인들은 모두 가족도, 공동체도, 윤리도, 도덕도, 심지어는 민족도 벗어버린 가벼운 군장으로 욕망을 향해 잠시의 휴식도 거부하고 달려 나갔다. 이것이 1960년대 ‘한국주식회사’라 불렸던 ‘민족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가벼운 군장으로 너무나 빠르게 달려 나갔기에 ‘타임머신’에서 빨리 늙어버렸다.


한국 사회의 분열

1970년대에 한국 사회는 ‘세대’, ‘성(性)’, ‘지방’, ‘계급’ 등 다양한 이름의 정체성과 계급으로 분열되었다. 무엇보다 1970년대에는 노동자, 빈민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이 독자적인 문화, 생활양식을 드러내며 등장했다. 노동자, 빈민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은 분명히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 빈민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에는 수많은 계급들, 수많은 종류의 ‘쁘띠부르주아’들이 서로 직접 충돌하며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계급의 등장은 사회의 분열을 보여줌과 동시에 한국인들의 고통과 고뇌가 깊어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한편으로 1970년대는 순수와 참회의 시대였다.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에서는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랑’이 분열되어 가는 사회를 통합하는 기제로서 부각되었다. 그간 강하고 거칠어져만 가던 한국인들은 이때부터 순수하고 부드럽고, 서로를 돌보고 사랑하는 사람들로 되어 갔다. 한편 전상국의 「아베의 가족들」 같은 작품은 한 가족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과거에 내다버린 ‘아베’를 찾아나서는 이야기였다. 1970년대에 한국인들은 순수하고 싶어 했고 ‘참회’하고 죄악을 씻고 싶어 했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에는 예외 없이 중요한 시대적 함의가 담겨 있다. 


인간을 위한 싸움의 다른 시작들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이 가시화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1970년대 황석영의 『장길산』과 최인훈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훠이」 같은 작품들은 유신 이후에도 한국인들이 당분간 정치적, 조직적 저항 운동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가운데 분열된 계급들을 연합하고 저항을 조직하는 움직임이 느리지만 뚜렷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977년에 발표된 윤흥길의 연작 소설 네 편은 당시 계급 분화의 모습과 계급들 간의 연합과 동맹이 형성되는 모습, 노동자들의 정체성 형성과 투쟁의 연원을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에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970년대 말 ‘운동권’의 등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이었다.

1970년대 한국인들의 고통과 고뇌에 찬 여정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귀결되었다. 이 시점에서 한국인들은 그들이 대적해야 할 권력의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깊고 넓은 속성을 이해하는 인식 수준에 다다랐다. 그리고 중요하게는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서 좀처럼 형용하기 어려웠던 인간 존재와 존엄성의 가치를 발견했다. 그들이 발견한 인간이란 자신의 존재 가치와 존엄을 위해 생명까지 내던질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폭력적 죽음의 공포로 스스로를 유지하던 권력은 이제 목숨을 건, 경악할 만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1979년 YH사건은 노조뿐만 아니라 종교계, 보수 야당을 아우르는 투쟁으로 발전했다.

 

투쟁의 시대

'오공'(제5공화국)은 폭력과 금력에 매료된 괴물이었다. 1980년 5월 광주 시에서는 현대 민족국가의 군대가 군복을 입고 상관의 명령에 따라 시내 번화가의 대로에서 시민들을 닥치는 대로 패고 찌르는 엽기적인 폭력 극장을 만들고, ‘우리는 너희들 씨를 말리러 왔다!’고 외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5·18은 열흘 후 5월 27일에 끝났지만 그 경험은 끝날 수 없는 것이었고, 잊을 수도 없었다. 5·18의 힘은 광주 시민들의 죽음을 뛰어넘은 투쟁에 있었고, 그들의 ‘피의 값’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였다. 그 후 출범한 오공은 5·18에 대해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도록 온갖 폭력을 동원하여 정적을 강요했다. 그러나 5·18이 초자연적 경험이었던 만큼 5·18의 진실은 장벽을 뚫고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공은 결국 5·18의 진실과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한국인들, 대학생들의 목숨을 건 투쟁과 시민들의 저항에 의해 붕괴되었다.

 

한국인들의 정체성 위기

1980년대 투쟁의 시대는 한편으로 한국인들이 극도의 의식 혼란 속에 정체성 위기를 겪은 시대였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는 작가의 의도와 별개로 1980년대 한국 사회가 모든 이념과 가치가 붕괴되고 말과 사물이 따로 놀며 세상이 의미를 잃는 이른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임을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이 시대에 한국 지식인들은 헤테로토피아를 극복하고자 수많은 최신의 이론들과 이념들을 전 세계에서 게걸스레 수입하는 마구잡이 ‘르네상스’를 열었고 한국 사회는 더욱 심각한 이념의 혼란을 겪었다. 영화 《고래사냥》은 1980년대 중반 운동권 대학생들의 충동이 세속화되는 흐름의 중요한 계기를 포착하고 있었다. ‘대체물’을 대량으로 제공하는 일은 오공이 줄기차게 시도한 전략이었고 이는 1980년대 학생 운동권의 저항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결국 1980년대를 통한 한국인들의 정체성 위기는 이문열의 『변경』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식했지만 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한국인들이 스스로를 증오하고 정체성을 잃어가는 가운데 물질적 풍요, 쾌락은 마약일 뿐이었다.


1980년대는 승리의 시대이자 온갖 극단의 물질주의와 정신주의가 한국인들을 휩쓴 시대였다.

 

근대로의 진입―정체성 만들기와 민족 공동체의 복원

1990년대는 우리에게 근대화(modernization)의 결정적 단계였다. 서구의 근대성을 흉내 낸 짝퉁 근대화를 넘어서 근대성의 근본 문제의식이 내화되어 ‘근대’라는 시대의 문턱을 넘어 진입하는 시대였다. ‘근대’로의 완전한 진입을 위해서는 정체성 만들기를 위한 수단이 마련되어야 했고 한편으로 민족 공동체가 복원되어야 했다. 우리 문학에서는 이를 위한 사상적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 저자는 그동안 한국 사회가 문학가들의 실천에 기대어 사상적 전진을 이루어왔다면 1990년대부터는 지성과 학문이 필요한 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 앞서 ‘반지성주의’가 우리의 거친 역사를 통해 형성되어 우리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박힌 현실을 깨우쳐주며 이를 극복한 후에야 본격적으로 지성을 세울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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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최정운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거쳐 시카고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랫동안 서양 정치사상을 연구하면서 정작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한국 근현대 사상사의 부재를 깨닫고 이를 발굴, 정립하는 연구에 매진해왔다. 전작 『한국인의 탄생』과 이 책 『한국인의 발견』은 그러한 지적 여정의 결과물이다.

지은 책으로 『한국인의 탄생』(2013년) 『오월의 사회과학』(1999년), 『지식국가론』(1992년)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푸코의 눈: 현상학 비판과 고고학의 출발」, 「새로운 부르주아의 탄생: 로빈슨 크루소의 고독의 근대사상적 의미」, 「개념사: 서구 권력의 도입」, 「국제정치에 있어서 문화의 의미」, 「권력의 반지: 권력담론으로서의 바그너의 반지 오페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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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워하고 나중에 고마워해

내면이 강한 아이로 키우는 사랑과 책임의 육아

로빈 버먼 지음 | 하윤숙 옮김 미지북스 | 328쪽 | 13,800원

 

상처받은 내 아이, 지금 개입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부모의 권한'이 독립적인 아이를 만든다.

UCLA 정신과 교수 로빈 버먼이 말하는 진정한 사랑의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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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자녀 교육이 지닌 커다란 문제는 부모가 아이 곁을 맴돌면서 과도하게 개입한 결과 아이가 완전하게 부화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미 닭이 병아리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도록 내버려두듯이 부모는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대신 혼자 걸어다니도록 놔두어야 한다. 과잉보호는 심리적으로 취약한 아이를 만든다. 아이를 취약한 존재로 대하면 이후 아이는 살아가는 동안 계속 취약한 존재로 남는다. 아이는 스스로 뭔가를 배울 때 많은 것을 얻으며, 역경을 통해 배움이야말로 아이를 어른으로 성장시킨다. 정신과 의사이자 UCLA 교수 로빈 버먼은 미국의 자녀 교육 전문가 집단, 부모와의 상담을 통해 얻은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며 ‘부모의 권위’가 자녀 교육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현명한 육아란 무엇인지 소개한다.

 




내 아이에게 필요한 건 '램프의 지니'가 아니라 부모다

자녀 교육에 대해 배우고 싶다면 엄마들이 아이 손을 잡고 모이는 곳으로 가면 된다. 조금만 기다리면 한 아이가 떼를 쓰기 시작하고 그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엄마가 보인다. “난 둘 다 먹고 싶어. 엄마가 뭔데 나한테 하나만 고르라고 하는 거야. 나쁜 엄마야!” 어느 누구도 나쁜 엄마가 되고 싶진 않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아이가 상처받지 않을지, 엄마의 사랑을 이해해줄지 당황스러운 시간이 흘러가고 많은 엄마들은 아이를 위해 져주는 선택을 하고 만다. 

『지금은 미워하고 나중에 고마워해』 저자 로빈 버먼 교수는 이런 결정이 인생이란 긴 여행을 떠나야 할 아이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누군가 자신을 책임지는 사람이 있다는 느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원한다. 부모가 자녀와 논쟁하거나 협상하지 않고 자녀의 행동에 명확한 한계선을 그을 때, 아이들은 매우 안전하다고 느낀다. 반면 권한이 없는 부모를 둔 아이는 불안을 느낀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만능 해결사 ‘램프의 지니’가 아니라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부모’라는 존재인 것이다. 



부모의 권한을 행사해도 좋습니다

오늘날 부모는 권위를 내세우는 데 겁을 먹은 것 같다. 자녀 주변을 맴돌면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고, 안 된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은 채 행여 내 아이가 자존감을 다치지나 않을까 염려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우리는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로 아이를 내몰고 있다. 부모를 흔드는 데는 능숙하지만 정작 인생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부서지기 쉬운 아이들로 성장하고 마는 것이다. 

끊임없는 회유와 협상에 지친 부모들에게 버먼 교수는 수많은 상담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부모의 권한을 행사해도 좋습니다.” 실제로 상담 의사들은 부모들에게 이와 비슷한 처방전을 내주고 있다. 부모는 자녀의 불만감을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아이에게 ‘한계’를 제시할 때 생기는 불편한 마음을 부모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부모-자녀 간 유대는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자녀는 정신적으로 더 건강한 발달 단계를 거칠 수 있다. 아이에게 부모의 권한을 행사할 때는 “지금은 내가 미워도 나중에는 고마울 거야”라고 생각해야 한다. 부모로서 당신의 임무는 자녀가 스스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회복하는 법을 배우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의 분노, 상처받은 감정, 실망감을 감내할 줄 아는 사랑의 여유를 지녀야 한다. 아이의 감정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와중에도 방침을 고수해야 한다. 계속 밀고 나가야 하며, 나쁜 부모가 되는 건 아닐까 염려하는 두려움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져야 한다. 인기 없는 부모가 되어도 좋다. 당신의 자녀는 어른 친구가 필요한 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당신보다 훨씬 멋진 친구들이 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다.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날 줄 아는 아이로 키우기

온갖 노력을 쏟았으니 아이들이 고마워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부모들은 시간이 지나 자녀의 버릇없는 행동에 자주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정직한 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을 더욱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었는데 왜 아이들이 고마워하겠는가? 과잉보호는 아이를 취약하게 만들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아이는 자신이 의존하는 부모에게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실패하지 않게 막아주는 것은 부모가 할 일이 아니다. 실패가 성공으로 향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아이를 취약한 존재로 대하면 아이는 살아가는 동안 계속 취약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 어미 닭이 병아리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도록 내버려두듯이 부모는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대신 혼자 걸어다니도록 놔두어야 한다. 모서리를 잘 피해가는 것도 삶의 한 부분이다. 부모가 나서서 모서리를 제거하면 아이는 위험을 판단하고 관리하는 훈련을 해볼 기회를 빼앗긴다. 아픔은 교훈을 준다. 아이는 신체의 아픔을 느낄 때 위험을 피해가는 법을 배운다. 무릎이 멍들고 타박상으로 아파보면 아이는 삶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 역경을 통한 배움이야말로 아이를 어른으로 성장시킨다. 아이는 스스로를 믿고 세상의 길을 찾아나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실패는 아이들이 끈기를 배우는 방법이다. 실패와 실망을 딛고 다시 벌떡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알면 내적 회복 능력을 배울 수 있고, 이를 통해 진정한 자존감을 구축할 수 있다. 진정한 자존감은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상태에서 사회적, 육체적, 정서적으로 능숙해질 때 생긴다. 아이들은 좌절할 때 성장하며 그 과정을 통해 심리적 보호재가 두터워진다. 


책임지고 규율하고 사랑하라

우리는 자녀가 평생토록 머리와 가슴속에 내면화해 품고 다니는 다정한 부모의 모습이 되고자 한다. 이처럼 든든한 사랑의 느낌을 심어주는 것이 훌륭한 자녀 교육의 핵심이다. 사랑은 자녀가 성장할 수 있는 강한 토대를 만들어낸다. 아이들은 항상 당신이 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며 잔소리는 더더욱 원하지 않고 그저 귀 기울여 들어주기를 원한다. 자녀를 진심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 그로 말미암은 사랑이 사랑의 최고 형태다. 자기 말을 진심을 다해 들어주고 이해해주면 자녀는 부모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속에 위안을 받는다. 이처럼 따뜻하고 다정한 유대감은 당신의 자녀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는가에 영향을 미치며 이는 심리의 시멘트 같은 것이다. 그리고 자녀는 이 유대감을 주재료로 평생토록 충격을 보호해주고 정서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감정의 집을 짓는다. 부모의 할 일은 자녀가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게 책임지고 사랑으로 규율하고 추억을 만들어주는 데 있는 것이다. 


내 아이가 고귀한 자아를 가진 아이가 되길 원한다면

당신은 아이의 영혼에 무엇을 새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 스스로 고귀한 자아를 갖춰라.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할 때 내 아이가 정말 좋은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면 부모 스스로 좋은 사람, 그리고 아이에게 좋은 품성을 익히게 도와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녀 교육은 아이를 기르는 문제이기 이전에 부모 당신의 성장에 관한 문제이다. 당신이 가장 고귀한 자아를 바탕으로 자녀 교육을 할 때, 가장 소중한 임무 즉 영혼을 돌봐달라고 임무를 맡겨준 아이들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아이가 아이답게 살 수 있도록 부모는 성숙한 감정을 지닌 어른이 되어야 하고 그런 다음에야 아이가 비에 젖지 않도록 우산을 씌워 줄 수 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거래 관계가 아니며 오로지 사랑을 베푸는 노력으로 가득 찬 여정이다. 우리가 좋은 부모가 되면 아이들은 우리 곁에 계속 머물 만큼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을 떠날 만큼 강해지는 것이다.





지은이 로빈 버먼 (Robin Berman)

정신과 의사이자 UCLA 데이비드게펜 의과대학 부교수이다. 미국 시카고의 러시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학부와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으며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의과대학에서 아동 정신의학을 연구하면서 아이들이 건강한 내면을 가지고 자라도록 돕는 최선의 방법은 아이가 아니라 부모를 코치하는 데 달려 있음을 깨닫고 올바른 훈육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연구와 상담을 평생의 소명으로 삼았다. 버먼 교수는 종종 부모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양극단의 양육 방식, 즉 자녀 곁을 맴돌며 자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고 싶어 하는 ‘헬리콥터맘’ 유형과 자녀를 부모의 잣대에 따라오게 만드는 ‘타이거맘’ 유형의 양육법 사이에 보다 균형 잡힌 길이 있다고 말한다. 아이에게 ‘한계’를 제시할 때 생기는 불편한 마음을 부모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부모-자녀 간 유대는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자녀의 건강한 정신 발달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그는 UCLA에서 아동과 산모의 정신 건강을 위한 상담 진료를 하고 있으며 로스앤젤레스에서 남편 및 세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옮긴이 하윤숙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불평등의 창조』, 『밤, 호랑이가 온다』, 『깃털』, 『진화의 종말』, 『선의 탄생』,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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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탄생

대한민국의 심장 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한종수, 강희용 지음 

미지북스 | 332쪽 | 15,000원





강남은 달린다!


 ‘강남’이란 말조차 없던 시절의 미개발 불모지에서

수도 서울의 ‘특별구’가 되기까지

강남 개발의 역사


원래 ‘강남’이란 말조차 없던 시절이 있었다. 이 책은 한강 이남의 미개발 불모지였던 강남이 우리나라와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역사를 소개한다. 아직 ‘영동’이라 불리던 시절, 장차 경제 성장을 견인할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장벽 같던 한강을 건널 수 있게 해준 제3한강교가 완공되면서 강남은 본격적인 개발 시대를 맞는다. 대대적인 수방 사업과 공유수면 매립, 택지 조성 사업을 통해 강남은 거대한 개발 부지로 재탄생하고 변변한 건물 하나 없던 허허벌판에는 격자형으로 도로가 깔렸다. 그리고 오늘날 강남을 있게 한 주인공들―유명 아파트와 거리들, 빌딩들, 그리고 수많은 사건들―이 공간을 채우기 시작한다. 




현대사를 증언하는 강남 개발의 역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형제 중 공부 잘하는 아들이 있으면 온 집안이 그를 위해 희생을 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지역으로 치면 아마 강남이 그런 ‘잘난 아들’에 해당할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명문 학교와 국가기관이 옮겨 갔고 각종 특혜가 퍼부어졌기에 지금의 강남이 존재할 수 있었다. 강남에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했던 꿈틀대는 힘과 욕망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책은 새로운 화해의 시대를 예감하며 여유로운 시선으로, 질시와 지탄의 강박을 벗고서 숨 가쁘게 달려 온 강남 개발의 역사를 돌아본다. 강남은 한국 현대사의 얼굴이다. 강남을 안다는 것은 한국 현대사를 안다는 것과 같다.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서울, 어디를 개발할 것인가?

1960년대에 서울은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포화 상태였다. 인구 급증은 주택난 등 각종 도시 문제를 낳았는데, 특히 수도 방위 차원에서 심각한 안보 문제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휴전선에서 불과 4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강북에 지나치게 많은 인구와 중요 시설이 집중되는 형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은 서울의 도심 기능을 분산시켜 안보상의 부담을 줄이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어디를 개발할 것인가? 만약 우리나라가 분단국가가 아니었다면 국토의 전통적인 중심축인 서울-개성-평양 축에 있는 은평, 고양, 파주 쪽이 서울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먼저 개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한강을 건너지 못한 1백만 명가량의 시민이 공산 치하에 남겨져 고초를 당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때였고 1960년대 후반은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던 시기였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한강 남쪽, 강남으로 눈을 돌렸다.


1965년 당시 '서울은 만원'이었다. 윤치영 서울시장은 인구가 늘어나지 않도록 전입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 '강남'이란 말조차 없던 시절

1963년 이전까지 오늘날 우리가 ‘강남’이라 부르는 곳은 경기도 광주군과 시흥군에 속한, 논밭이 대부분이고 달구지나 지나다니는 소로(小路)들로 마을과 마을이 이어진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지금은 이곳을 ‘강남’이라 부르지만 예전에는 ‘영등포 동쪽’ 또는 ‘영등포와 성동(城東) 중간’이라는 뜻의 ‘영동(永東)’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실제로 1970년대에 시작된 개발 계획의 정식 명칭도 ‘강남 개발’이 아닌 ‘영동 개발’이었다. 다시 말해 ‘강북’이 곧 서울이었고, 한강 이남의 사람들은 강 건너를 ‘서울’이라고 불렀다.

 

커지는 개발 규모

1963년 1월 1일 서울시 행정구역이 변경되면서 드디어 오늘날 강남에 해당하는 지역들이 대거 서울에 편입되었다. 1966년 9월 서울시는 반포에서 삼성동에 이르는 800만 평을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정해 달라고 건설부에 요청해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강남 개발이 시작되리라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강남 개발을 밀어붙일 힘과 속도가 제대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이 열린 다음 날, 영동구획정리지구 시행 공고가 났다. 맨 처음 영동구획정리지구는 313만 평 규모였다. 하지만 정부가 지시한 고속도로용 부지 9만 평과 공공용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구획정리지구는 520만 평으로 늘어났고 1970년 후반에는 무려 937만 평에 이르게 되었다. 사대문 안 면적이 500만 평에 불과함을 떠올리면 강남의 면적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할 수 있다. 이렇게 되자 서울시는 적당한 면적 단위로 점진적으로 개발한다는 당초 계획을 바꿔 이 엄청난 공간을 시가지화할 필요가 생겼다. 정부와 서울시는 강남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많은 정책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그리고 불과 10여 년 만에 강남은 완벽하게 현대 도시로 탈바꿈한다.


1960년 당시 강남

 

강남과 강북을 이어준 제3한강교

강남은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이었고 그것만으로도 개발 잠재력이 엄청났다. 하지만 한강이 큰 장벽이었다. 오늘날에야 한강 다리가 흔하지만 이 당시만 해도 한강에 다리를 놓는 일은 국가적 대역사였다. 1917년 건설된 최초의 한강 다리인 제1한강교(한강대교) 이후 두 번째 다리인 제2한강교(양화대교)가 건설되기까지는 거의 반세기가 걸렸다. 그렇지만 한강에 다리를 놓을 수만 있다면 강남은 기존 도심에서 지척이었다. 1969년 12월 25일 마침내 제3한강교가 준공되었다. 이 다리는 한강을 넘어 진정한 의미에서 ‘강북’과 ‘강남’을 이어준 첫 번째 다리였다. 훗날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는 땅값 폭등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그보다 먼저 착공한 경부고속도로와도 이어져 그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제3한강교는 ‘강북’으로부터 ‘강남’이라는 지역을 잉태하는 탯줄이 되었다.

 

거대한 개발 부지로 재탄생하다

강남의 또 다른 약점은 지대가 낮아서 자주 물에 잠긴다는 것이었다. “남편이나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할 정도로 강남은 대대적인 수방(水防) 대책 없이는 도시로서 기능할 수 없는 땅이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겪고 나서 일제가 쌓은 제방이 있었지만 그것은 원효로와 영등포, 노량진 일대만 겨우 지킬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마포, 뚝섬, 광진, 강남, 여의도, 잠실 일대는 홍수가 나면 모두 물에 잠겼다. 한강을 서울의 중심 생활권으로 만들기 위한 한강 개발이 1967년부터 시작되었다. 강변1로를 제방도로 형태로 건설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제방도 제방이지만 한강의 수량과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거대한 댐이 필요했는데 마침 소양강댐이 1973년에 완공되었다. 이러한 수방 사업을 거쳐 서울 시민들은 홍수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가장 큰 혜택을 본 지역은 물론 강남이었다. 이어서 ‘공유수면’ 매립을 통한 택지 조성이 뒤따랐고 강남은 진정한 의미에서 거대한 개발 부지로 거듭났다. 동시에 강남에는 폭 40~90미터의 광로(廣路)와 대로 등 무려 37개의 간선도로가 격자형으로 깔렸다. 이런 식의 도로망은 한국에서는 처음이었는데, 특히 제대로 된 건물과 시설들이 들어서기도 전, 허허벌판에 시원스레 뚫린 도로는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도대체 이렇게 넓은 도로가 왜 필요한 걸까?”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가졌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강남의 도로들은 자동차들로 가득 찼고 휑하던 거대 블록마다에는 근사한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며 고층 빌딩들이 들어섰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인물과 기업들이 이야기를 남겼고 랜드마크가 될 건물들이 속속 등장했다.



아파트 지구가 만들어지다

수방 사업과 공유수면 매립을 마쳤지만 한강변에서 좀 안쪽의 반포, 서초동 일대는 여전히 강변도로보다 지대가 낮았다. 원칙대로라면 제대로 매립을 해서 지대를 높여야 했지만 서울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심한 홍수가 나거나 벼락이 쳐서 배수펌프장에 전기 공급이 중단되면 저지대는 꼼짝없이 물이 찰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 서울시장 양택식은 저지대 지역은 모두 3층 이상으로 집을 짓게 하는 고육지책을 내놓았다. 최악의 경우 주민들이 3층 이상으로 대피하면 인명 피해는 없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이리 하여 침수되는 지역까지 전부 아우르는 엄청난 규모의 ‘아파트 지구’가 강남에서 공식 탄생하게 된다.

한편 순조로운 개발을 위해선 아주 많은 주민들이 필요했다. 초기에 강남 최초의 아파트 단지인 논현동 공무원아파트가 지어졌고 영동 주택단지가 조성되어 성공리에 분양을 마쳤지만 이것들은 규모가 너무 작았다. 그 정도로는 강남의 넓은 공간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6년 8월 공식적으로 ‘아파트 지구’가 고시된다. 반포 지구 167만 평, 압구정 지구 36만 평, 청담 지구 11만 평, 도곡 지구 22만 평, 잠실 지구 74만 5천 평 등 강남에 설정된 아파트 지구는 다른 지역과 비교를 불허하는 단연 압도적인 규모였다. 이곳에 오늘날 강남을 대표하는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위) 1978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건설 당시 (아래) 오늘날의 모습


사대문 안 구도심과 영등포를 따라잡다

원래 정부는 영동 개발을 시작하면서 서울시청을 비롯한 112개 국가기관을 모조리 옮기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많은 국가기관이 강남으로 이전했다. 대법원, 서울고등법원, 검찰청, 국정원, 한국은행 전산본부 등이 강남에 자리 잡았다. 한편, 1974년에 서울시장에 부임한 구자춘은 ‘3핵 도시론’에 미쳐 있었다. ‘3핵 도시론’이란 사대문 안 기존 도심을 첫 번째 핵으로, 여의도와 영등포 산업 지대를 두 번째 핵으로 삼고, 세 번째 핵으로 강남을 건설한다는 도시계획안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지하철 2호선의 노선을 강남을 관통하는 순환선으로 바꿔 버리는 한편, 적극적으로 명문고의 강남 이전을 추진했다. 그에 따라 경기고, 서울고, 숙명여고 등 이른바 강북의 명문고들이 옮겨간 강남구와 서초구는 유명한 ‘강남 8학군’과 ‘강남 교육특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 강남은 점점 대형 병원의 메카로 변해갔다. 건설회사들에 이어 백화점 기업들이 굴지의 대기업으로 커가는 곳이 되었으며, 고급 음식점과 카페가 생기고 외국 외식 문화가 도입되며 한국 소비문화를 선도하는 공간이 되어 갔다. 강남에 자리 잡은 대형 교회와 성당 또한 신자들이 급격히 늘어나며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또 강북에서 신설 및 이전이 금지된 유흥업소들이 몰려들어 신사, 압구정, 논현동 일대는 화려한 유흥가로 변해 갔다.

 

더 커지는 강남: 잠실, 수서, 분당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던 영동 개발은 놀랍게도 10여 년 만에 완료되었다. 하지만 개발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고 강남은 계속 확장되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잠실을 개발했다. 이때 지어진 아시안선수촌아파트와 올림픽선수촌아파트는 아파트 문화를 진일보시켰고 무엇보다 잠실이 강남권에 묶이는 데 있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 외에도 잠실종합운동장을 비롯해 예술의전당과 코엑스 등 오래도록 강남의 간판이 될 랜드마크들이 전두환 정권 시기에 자리를 잡았다. 노태우 정권 시기에 들어서도 강남 개발은 수서와 일원, 분당 등으로 확대되어 갔다.


1980년대에 강남은 잠실 개발 및 지하철 2호선 개통을 계기로 더 성장했다.

 

개발의 그늘: 사라져버린 것들과 어두운 기억들

이 책은 강남 개발 시기를 거치며 사라져버린 옛 기억의 장소들을 차근차근 돌아본다. 수방 사업의 일환이었지만 한강변에 제방을 쌓고 강변도로를 만들면서 사라져버린 옛 한강변의 풍경에 대한 아쉬움이라든지, 1970년대 초 압구정동과 옥수동 사이에 있던 저자도(楮子島)가 아파트 대단지 건설을 위해 골재로 채취되어 사라져버린 이야기, 여의도 개발 당시 저자도와 비슷한 운명을 맞았던 밤섬 이야기, 잠실 물막이 공사의 결과로 잠실섬 아래를 흐르던 송파강이 사라지고 석촌호수로만 남게 된 이야기 등을 빠짐없이 소개한다. 그 외에도 강남 개발 장면마다 수많은 뒷이야기들이 독자들을 기다린다. 정부 유력 인사가 주도한 부동산 투기,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일으킨 수서 사건, 끊어진 성수대교와 무너진 삼풍백화점에 얽힌 사연 등 강남 곳곳에 남겨진, 이제는 역사가 된 에피소드들 또한 강남 개발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기록에 남겼다.


가장 서울다운 서울은 강남이다

조선 시대 이래 서울은 조금씩 영역이 확장되어 왔다. 조선의 수도가 ‘사대문 안’ 한양이었다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명동을 중심으로 한 신시가 형성을 주도했다. 그리고 현대에 강남이 새로이 편입되어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보면 가장 서울다운 서울은 어쩌면 조선 시대의 한양도 아니고, 일본이 만든 경성도 아니며, 강남이다. 하지만 강남의 성공은 우리나라 도시사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한때 서울을 강타한 뉴타운 광풍은 강남에 역전당한 강북 사람들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였다. 언젠가부터 부산과 대구 등 광역시는 물론이고 소도시들조차 모두 마치 비법이라도 배운 것처럼 강남 개발 과정을 본 따 신도심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지방 도시들은 구도심이 죽어 버리고 특징이 없는 그저 그런 붕어빵 도시들이 되어 갔다. 최근에 와서는 어떤 개발론자도 63빌딩과 올림픽도로, 잠실 주경기장을 서울의 자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책은 강남의 역사를 말하는 데서 조금 더 나아가 강남에 끌려가는 우리 사회를 성찰하며 우리 도시들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으로 변모한 강남



★★★★ 박원순 서울시장 추천의 말


"이 책에는 우리가 잘 몰랐던 강남의 살아 있는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합니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강남의 공간을 새롭게 마주하게 됩니다. 경부고속도로와 제3한강교, 유명 아파트와 거리들, 빌딩들, 그리고 수많은 사건들이 과거로부터 말을 걸어 옵니다. 따듯한 봄날, 이 책을 들고 천천히 강남의 거리를 걸어보면 어떨까요? 잊고 있던, 모르고 있던 강남의 과거가 여러분의 현재로 펼쳐질 것입니다." 









지은이

한종수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롯데관광과 한국토지공사(현 LH)에서 일했으며, 현재 세종시 도시재생센터 사업지원 팀장으로 재직 중이다. 대중 역사책을 쓰는 작가로서 거창한 역사 담론보다는 그 사이에 파묻힌 사람들의 흔적과 일화를 발굴해 새로 생명력을 부여하는 작업을 해왔다. 한국토지공사 재직 중에 도시사(都市史)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특히 서울 토박이이자 세종시 건설의 참여자로서 서울과 세종의 주요 공간과 그에 관한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2차대전의 마이너리그』(2015년), 『제갈량과 한니발, 두 남자 이야기』(2013년), 『세상을 만든 여행자들』(2010년)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환관 이야기』(2015년), 『제국은 어떻게 망가지는가』(2012년)가 있다.

 

강희용

한양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한양대학교 도시공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강남과 인접한 동작구에서 제8대 서울시의원을 지냈고, 서울시 재개발 및 균형발전위원회 위원, 서울시도시계획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서울시 도시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관여해 왔다. 2013년 미국 국무부에 의해 세계 차세대 지도자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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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egirl1003/220735869071?60509 BlogIcon 1466262483 2016.06.19 00:08

    좋은글 감사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aa105965/220736072299?110078 BlogIcon 1467022285 2016.06.27 19:11

    알찬 정보 좋네요~

  3. 일산 2021.03.26 08:01

    아니 강남이 심장의도시 라고 하는 글이나 책만든 사람이 생각을 하시고 만드는건지 참 어이가 없네요 서울에선 심장의 도시는 종로 인데 잘알고선 애기 하는건가요 강남은 개발도시로 되서 성공을 한건데 어떻해 강남이 심장의도시 라고 글을 쓴건지 참어이가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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