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저자 이택선 박사님과 중앙일보 유성운 기자님의 서면 인터뷰 내용입니다. 흥미로운 내용이 많지만 지면의 한계로 기사로는 싣지 못한 원문을 일부 편집하여 게재합니다. 



 

1. ‘취약국가’라는 개념은 기존 브루스 커밍스 등 수정주의 학자들이 제기한 과대성장 국가론이나 파시즘 국가론과 어떻게 다른가요?


- 제가 책에서도 기술했던 것처럼 수정주의 학자들이 제기했던 이론들의 핵심은 국가가 계급성을 지니고 있고 국가의 개입은 전체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을 보호하려는데 있음을 밝히고자 하는 네오마르크시스트 이론을 입증하는데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제가 제기하는 취약국가론은 국가의 객관적인 능력과 건설과정을 중시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 국가들의 국가 건설 과정을 보면 국가가 자본가계급에게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율성을 가지고 발전을 주도하는 특징이 발견됩니다.

기본적으로 수정주의 학자들이 제기한 과대 성장 국가론이나 파시즘 국가론은 이미 근대 국가에 맞는 부르주아와 국가기구들이 만들어져 있고 지배계급이 존재하는 그런 모습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비해서 한국은 부르주아나 근대국가의 틀이 만들어졌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국가 건설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적, 인적, 그리고, 국제정치적 자원이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죠. 그나마 국가 기구는 일제 지배 말기에 전쟁 수행을 위해서 일본식 문명 기준에 맞추어서 구성되었지만 그 상당 부분을 일본의 자원과 인력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썰물처럼 빠져나갔습니다. 게다가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당시 15위로 전략적 중요성이 큰 지역도 아니어서 미국의 지원도 보잘 것 없었습니다.

또 해방 직후에 과대 성장 국가론이나 파시즘 국가론의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강압적인 국가기구에 종사하는 인원의 수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해방 직후 경찰, 군대, 그리고 기타 행정부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중학교 졸업 출신의 학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수가 약 2만5천명 밖에 안됩니다. 과대 성장 국가론이 성립하려면 관리들이 충족 인원수보다 2-3배는 많아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이 사람들이 다 일해도 경찰이나 군대에 필요한 인원수의 1/3에서 1/4정도 밖에 동원이 되지 않습니다. 이 수치는 제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지원한 국가건설 사례를 가지고 랜드연구소에서 작성한 표준 국가 모델에서 작성한 국가기구 인원수와 비교해볼 경우 더욱 더 벌어집니다. 사실 국가기구에서 일하려면 이전에 관리와 준하는 사전 경험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그것조차 무시하고 그냥 학력 정도만 고려해도 이렇습니다.

 

2. 당시 지배적인 계급이 집단으로서 존재하지 않았나요?


- 해방 직후 한국에는 부르주아 계급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나마 경제적으로 잘 살았던 사람들인 지주의 수가 토지개혁을 추진했던 정치인 중 한 명이자 제헌국회 산업위원장이었던 서상일의 증언을 통해 발견되는데 대략 500여명 정도 됩니다. 서상일은 토지개혁을 추진했던 정치인 중 한 명입니다. 여기에 제가 기술한 것처럼 커밍스 교수가 제시한 자료들을 포함하여 면밀히 상호대조하여 보면 이 소수의 사람들이 땅을 독점해서 문제가 발생한 것도 아니고 그냥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농지 자체가 부족한 것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레닌을 직접 만나기도 했었던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출신이며 국회 부의장을 지낸 백봉 라용균은 전라북도에서 본인이 직접 농지를 개간했고 토지개혁에 포함되지 않은 자신의 땅을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토지 자체가 적으니까 본인이 직접 황무지나 갯벌을 농지로 만들고 토지개혁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에는 조건 없이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준 거죠. 그런데, 이를 그 혼자만 한 것이 아니고 역시 독립군 출신의 초대 국회의원 장홍렴 의원(현 주중 대사인 장하성 대사의 친척 할아버지)도 전남에서 했다고 하니 유사한 사례가 더 많을 겁니다. 그러니, 한국에 소위 타도의 대상이 될 유의미한 부르주아나 유산계급이 대규모로 또는 조직적으로 존재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서양 근대국가처럼 근대국가 건설을 주도할 부르주아지가 존재하지 않아서 토지개혁과 적산불하를 통해서 부르주아를 육성하는 것이 제1공화국과 이승만의 정책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에 공권력이 개입하기 때문에 개인의 순수한 노력으로 부르주아가 되는 것이 아니므로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이죠.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고 시민사회를 주도할 계층이나 집단이 한국 사회에 거의 존재하지 않으므로 한국은 지금까지도 취약국가의 상태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 제 취약국가론의 또 다른 핵심 주장 중 하나입니다.

 

3. 남북한 모두 ‘취약국가’일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이 북한보다 더 취약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남, 북한 모두 후발 산업화국가들로 취약국가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이 북한보다 더 취약했던 이유는 후견인 역할을 하는 미국이 소련보다 국가건설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에서의 품위 있는 철수를 지향했던 미국과 달리 소련은 한반도를 중시하여 북한의 국가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소련국적 북한인들을 대거 파견하였고 경제건설 계획안을 작성하여 주었으며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토지개혁 추진, 군대 건설 등 남한보다 빠르게 국가건설을 추진하였습니다.

소련이 미국보다 한반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경찰과 통역원, 영관 급 장교들에게 지급한 봉급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서, 1945년 9월 당시 한국 경찰의 봉급은 3달러에 불과했습니다. 그에 비해 1946년 1월경 소련군을 위해 일했던 번역원의 월급은 200루블 정도였는데, 약 40달러의 월급을 받았던 셈입니다. 또 1950년 2월경 북한의 소위가 약 260달러를 받았습니다. 이는 한반도에 대한 소련과 미국의 관심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일본의 전쟁수행을 위해서 북한지역이 남쪽 지역보다 공업화가 더 잘되어 있었고 기술력과 재력을 가진 사람들도 더 많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여기에 남쪽 지역은 농업이 주가 되었으며 북쪽 지역은 기독교 지역의 중심지였던 데다가 중국, 소련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어서 외부 선진문명을 받아들이기에도 남쪽보다 유리한 처지였음 역시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3.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인색한’ 원조는 해방 이후 38선 이남에서 혼란이 벌어지는 요인 중 하나가 된 것 같습니다. 미국의 38선 이남에 대한 원조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미국의 경우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유럽에 집중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소련과 빨리 협상하여 품위 있는 철수를 하는 것을 지향했습니다. 이에 해방 후 1년 동안 남한 경제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인데도 미군정은 장기적인 경제 건설 계획을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민생과 직결된 문제에만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했고 소극적인 관리와 유지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은 미군정 기간에 도입된 4억 3,400만 달러어치의 원조 물자 가운데 식료품이 전체의 39%를 차지한 반면, 건축자재와 철도 자재는 1.7%와 3%에 불과했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연히 적산기업이나 토지 불하에 소극적이었고 늦게 추진되었습니다.

 

4. 서북청년회 등 우익 청년단체의 발호와 관련해 공권력이 열악한 상황을 틈타 좌익들이 조직적으로 반체제 활동을 벌였고 이를 제어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우익 청년단의 반좌익 활동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설명된 것 같습니다. 좌익의 기승이 없었다면 우파 청년단체가 성장하기 어려웠다고 보시나요?


- 영화 <암살>로 유명해진 김원봉이 소련 문서에서 이승만의 영향력 하에 있는 군중의 수를 10만으로 평가하고 있고, 한국전쟁 직전에 반공을 표방한 청년단체의 규모가 600만 명으로 한국정치에서 가장 유력한 집단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본다면 우익 청년단체 역시 시기는 조금 늦을 수 있어도 상당한 성장 동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북한의 공산화 진행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남쪽보다 부유했고 고학력자가 많았던 북쪽 출신 월남민의 유입과 좌익의 조직적인 반체제 활동이 우익 청년단체의 결속과 성장을 가속화시켰을 것으로 봅니다. 그로 인해 임시정부 계열의 온건파 단체, 그러니까 극우 반공적인 성향보다는 사회민주주의적이고 온건한 성향을 지닌 단체들이 성장할 정치적 공간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5. 1946년 이후 미군정은 김규식, 여운형 등 중도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정부를 꾸리려는 의욕이 있었는데, 이 같은 중도파 중심의 정부 수립 시도가 좌절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저는 외적인 요인과 내적인 요인 모두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외적 요인을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미국의 정책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미군정이 소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므로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김구의 임시정부 세력을 지원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맹우였던 소련과의 관계를 깨지 않고 싶었던 국무부가 이를 무시하고 좌우합작을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김규식, 여운형 등이 중용되고 남조선과도입법정부의 장관으로 안재홍이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1947년 초부터 냉전의 조짐이 보이고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결국 한반도도 이에 휘말려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다음으로 한국 내부의 중도파의 세력이 부족했습니다. 보통 급변의 시기에는 이념이 선명한 정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마련인데, 한국에서는 해방 시절부터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해 좌파 세력이 친소련파로 재결집하였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와 흥업 구락부, 흥사단을 중심으로 구축되기 시작한 우파 세력 역시 한국민주당과 우파 청년단을 중심으로 친미국파로 뭉쳤기 때문에 양쪽 모두에 속하지 않는 중도파는 현실정치에서 크게 세력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가뜩이나 세력이 적었던 중도파는 1947년 여운형의 암살과 김규식의 정계 은퇴 선언, 제헌선거 공식 불참으로 정부 수립 참여 시도 자체가 좌절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6. 이 책에선 기존 통념과 달리 미군정이 민족주의적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은 일본에 협력한 B급 전범 식민지 정도로 취급되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반일민족주의에 대해선 간과했고 이것이 정치적 패착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미군정은 초기에는 한국을 일본에 협력한 B급 전범 식민지 정도로 취급했고 한국의 반일민족주의를 간과한 정치적 패착을 범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런 초기 실수들을 바로 잡고 이후에는 민족주의적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서 많은 공을 들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홍익인간이나 삼균주의의 이념을 의식적으로 강조하거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안재홍을 남조선과도입법정부의 장관으로 임명한 것, 임시정부 부주석 출신 김규식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으로 영입한 것들이 좋은 예일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자신들의 자문기관인 민주의원 총리로 임명하고 이승만에게 물적 지원을 해준 것 역시 이러한 일환이었습니다.

 

7. 한반도 정책에 있어 미국의 목표는 무엇이었다고 보시나요. 시기마다 차이가 있었다면 시기별로 차이에 대해서도 부탁드립니다.


- 일단 해방 직후에는 명확한 목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동원해제령은 시작되었고 주한미군들마저 빨리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아우성치니 가능한 빨리 한국에서 철수하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한국 현지의 미군정은 임시정부의 이승만과 김구에게 권력을 이양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소련과의 협상을 통한 품위 있는 철수에 초점이 맞추어 졌습니다. 이때가 미 국무부가 미군정을 조정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고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 중심의 남조선 과도입법정부를 만들고 여운형을 끌어안으려고 노력한 때입니다. 하지만 그리스, 터키, 유럽에서 소련의 공산화 시도가 활발해지고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야심 역시 분명해지니 미국 정부도 당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게 있어서 한국은 세계전략순위에서 15위에 불과했기 때문에 소련과 협상을 통해 철수하려는 목표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중국의 공산화가 분명해지니 한반도를 일종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완충지대로 설정하여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2차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마자 불과 1년여 동안 대한민국의 국가건설을 진행시켰습니다. 이를 위해서 조선민족 청년단이라는 단체를 공식 후원하여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준을 보급시켰고 미국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한국은 미국에게 7번째로 중요한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인 군사, 경제지원을 할 수 없었고 그저 세력 균형을 유지해주는 완충지대로 기능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투자는 안하면서 가성비가 높은 나라로 존재하기를 바랐던 셈이죠.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이승만 뿐만 아니라 주한미국대사 무초, 대리대사 드럼라이트 등도 이렇게 지원을 하지 않다가는 전쟁이라도 발발하면 훨씬 더 많은 출혈이 불가피하다고 지적을 했고 실제로 한국전쟁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미국은 한국에게 지원을 늘렸지만 이후에도 세력균형 유지 쪽에 초점을 맞추었고 지금도 결국 세력균형 유지 쪽을 고수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8. 미군정을 이끈 하지 중장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하지는 2차 대전 때 자신의 전우와 부하들을 죽인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있었던 인물이었지만 한국의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는 강력한 신념을 바탕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나름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스스로도 충분한 준비 없이 갑자기 부족한 인원을 데리고 낯선 한국에 도착하여 보니 북한에서의 소련의 위협이 굉장히 커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임시정부의 김구 등을 우대하여 미군정을 꾸려나가는 한편, 미국 정부에 한국에 대한 더 많은 지원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하지는 일찌감치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야욕을 경고하고 이에 대응하는 세력을 육성하고 한국군을 창설할 것을 건의합니다

이런 하지의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정용욱 교수는 그를 “조숙한 냉전의 전사”로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소련과의 원만한 협상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철수하기를 바라던 미 국무부가 그의 건의를 묵살하고 좌우합작을 종용합니다. 이에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직업 군인이었던 하지는 이에 충실하기 위해서 김규식과 안재홍을 중용하고 어제의 적이었던 여운형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합니다. 이때 이미 한반도의 운명이 폴란드와 비슷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던 이승만과 사이가 벌어집니다. 이에 하지는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까지 공격하는 이승만 대신 김규식이나 서재필을 이승만 대신 한국의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하지는 한국에 대한 소련과 북한의 위협을 경고하여 인간적으로는 정나미가 떨어진 이승만과 보조를 맞춤으로써 그와 오월동주의 길을 걷습니다. 이후에도 하지는 매우 부족한 지원 속에서 악전고투 했지만 미국정부로부터 변변한 훈장조차 받지 못했고 한국의 역사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지에 대해 제임스 매트레이(James Matray)는 “비자발적인 십자군(The Reluctant Crusade)”로 표현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한국에 대한 소련의 야욕을 예견하고 이를 조기에 막을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한국을 떠나겠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는 한국의 좌, 우파는 물론 모국인 미국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정치력 등 자신의 능력 이상의 일을 해야 했고 실제로 한국의 공산화를 저지하는데 성공한 장군이라는 점에서 그에 대한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도, 일관성과 현실성이 결여된 미국 정부의 정책 역시 충실히 수행했던 군인의 자세를 보여준 하지에 대해서 민족주의를 중시하는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를 최근에 동티모르 등에 파견되어서 그들의 국가건설 사업을 돕는 한국인으로 대치하여 평가한다면 과연 우리가 그를 정치적으로 무능력하고 인종적 편견에만 가득 찬 인종주의자로만 바라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한국 우파 입장에서는 이승만을 방해한 훼방꾼으로, 좌파의 입장에서는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을 저지한 무능력한 인종주의자로 평가되어온 하지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9. 제1공화국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요?


- 제가 책에서 기술한 것처럼 토지개혁, 국민의무교육 실시 등을 통해서 한국전쟁 전에 국가에 대한 귀속감을 높이고 재정 균형 달성을 통해서 근대국가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대규모 원조 획득에 성공하여 한국전쟁의 재발을 막고 재건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그 점만 본다면 이승만과 제1공화국은 매우 성공적인 정부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전쟁 중 벌어진 국민방위군 사건이나 무자비한 반공주의로 인해서 국민들 사이에 불만과 원한이 생겨났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사오입 개헌안으로 이승만에게 협력하였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돌아섰습니다.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한국민주당이나 흥사단 계열 등과 공유했던 권력의 진정한 주인이 자신임을 확인 받고 자신의 소신대로 통치하겠다는 입장이었을지도 모르나 그의 수족이 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부일관료들이다보니 민족주의적 정통성이라는 이념 자원이 훼손되는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물론 제1공화국은 불과 12년 내에 부르주아지를 만들어냈고 자신들이 시행한 의무교육이 만들어낸 젊은 세대에 의해 정권까지 붕괴되는 “토크빌 효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어찌 보면 그걸 해냈던 것도 퇴진을 수용한 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승만과 제1공화국이 재평가 받으려면 일부 이승만 예찬론자들이 하는 것처럼 찬양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그냥 자신들이 존경하는 이승만을 다시 한번 더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의 통합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집약된 희생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서로가 부둥켜 안아주는 일종의 “해원 상생”일 것입니다.

 

10. 이범석과 족청계가 한국 건국과 제1공화국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 이범석과 족청계는 국가 수립 일정이 촉박한 가운데 극우 청년단체를 대신하여 미군정에 의해 선택되어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준을 한국사회 전체로 전파한 한국정치사에서 주요한 행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공산주의자들이나 좌파의 피난처가 되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굉장히 넓었습니다. 이승만에 의해 이들이 제거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유는 이들이 국가 공식 조직 기구의 권한과 능력을 뛰어넘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보수 성향 집단은 군과 경찰로 넘어가서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세력으로 성장했고 진보 성향 집단은 한국의 민주화를 담당하는 유력자들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성공 비결의 이면에는 이들의 수준 높은 선진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한 사람들 중 81%가 지금의 대학졸업자에 해당하는 중학교 졸업 수준의 고학력자들이었고 이들이 각지로 펴져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준을 보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5.10 총선거 참여를 결정하는 순간부터 대한민국 수립에 기여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이들의 단장인 이범석이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이들은 이승만의 공식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남아 자유당 창당에 참여하는 한편 이승만의 부산 정치 파동을 지원함으로써 그 건재를 과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는 이승만에게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고 결국 이승만은 이들을 제거합니다. 처음에는 이범석을 후원하였던 미국 역시 중국 대륙에서 오래 생활하여 자신들이 싫어하던 중국 국민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성향도 유사한 면이 많았던 이범석을 차츰 제거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기 때문에 이범석과 족청의 몰락은 가속화 되었습니다. 사실 민족주의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던 이범석과 족청이 제거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을 대신하여 기용된 사람들이 다름 아닌 부일 경력이 있는 관료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민족주의적 흠결 뿐 만이 아니라 이들 중 일부가 부정선거를 조직적으로 자행하여 민주주의를 훼손시켰으므로 그 아쉬움은 더 커집니다.

 

11. 취약국가에서 국가를 존립-발전하기 위해 많은 이념적 자원을 소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 미국이 지원한 국가건설 사례들을 집약하여 만들어낸 일종의 표준 국가 모델(랜드연구소)에서 제시하고 있는 국가 건설 비용과 국가기구에 종사하는 인원들과 비교하여 보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매우 저렴하게 만들어진 국가입니다.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한국은 미국의 통상적인 국가건설 자금의 1/26에 불과한 지원으로 만들어진 국가입니다. 즉, 미국이 유럽에 집중하느라 충분한 예산을 제공하지 않다 보니 이제 막 일본에게서 해방되고 일본의 전쟁수행을 위해서 착취당할 대로 당한 한국인들에게 그 부담과 비용이 전가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인들도 너무 가난했기에 정부는 한국인들이 가진 애국심, 민족주의란 이념 자원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애국기 헌납 운동”이 대표적인 사례이고 이 외에도 각종 기부금이 부과되었습니다. 미군정기 3년 동안의 재정적자가 230억원이었는데 정확하게 1948년 1년 동안 각 정부 기관과 준 정부조직이 충당한 기부금이 225억원이었습니다. 물론 세금을 내야할 부르주아 계층이 부재했기 때문이었지만 이러한 문제는 이후 정부에도 이어졌습니다. 40~50세대만 해도 학교에서 반 강제적으로 징수하다시피 내게 한 각종 기부금과 성금의 행렬을 기억할 겁니다. 1970~80년대 반공 단체와 평화의 댐 모금 그리고, 김대중 정부만 해도 IMF 위기를 금모으기 운동 등으로 극복했습니다.

우리 국민은 위기 때마다 이를 헤쳐 온 위대한 국민이었고 그 중심에는 민족주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남발되는 민족주의와 반공 이념 자원의 동원으로 인해 국민들은 지쳐갔습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민족주의는 반공 이념에 비해 아직까지 그 위력을 덜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가난해서 절대 이익(Absolute Gain)의 창출이 중요했던 냉전 시대와 달리 상대 이익(Relative Gain)이 더 중요해진 지금, 다시 말해서 국가가 잘 사는 것보다 나의 삶의 질이 더 중요해진 탈냉전시대에 들어서 그 양상이 조금씩 변화해가고 있습니다. 반일민족주의 열풍이 휩쓸었던 작년과 올해만 해도 확실히 그 위력이 예전만큼은 못해졌고 반발의 움직임까지 나타났으니까요.

 

12. 한국은 현재 국력을 감안할 때 시장경제-민주주의 국가치고는 대단히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 “항상 모습을 달리해 삼아 남아왔고 지금도 가장 강력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념, 그것이 바로 민족주의다” 앤서니 스미스(Anthony Smith)의 뒤를 이은 세계 민족주의 연구의 1인자이자 정통 후계자로 인정되는 존 브륄리(John Breuily)교수의 결론입니다. 사실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는 세계 각지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합니다. 한, 중, 일 3국이 협력을 다짐하면서도 정작 공통의 역사교과서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이렇게, 민족주의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채택한 다른 국가들에서도 활발하기 때문에 우리가 유별나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시민적 민족주의도 성장해서 종족적 민족주의와 균형을 맞추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종족적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가 두드러진 경향이 있습니다. 198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 필자들의 생각은 다르셨겠지만 종족적 민족주의가 부각되었죠. 사실, 종족적 민족주의는 일제 시절부터 우리를 지탱시켜 온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이 부분이 종족적 민족주의가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강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종족적 민족주의는 강하지만 상대적으로 시민적 민족주의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구 부족과 결혼 문제 등으로 인해 우리 정부 역시 다문화 공동체를 정책적으로도 지원했던 상황에서는 우리와 핏줄은 다르지만 한국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고 일원이 된 이들을 한국인으로 품어줄 수 있는 시민적 민족주의의 양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서로 다른 인종들로 이루어졌지만 미국인이나 영국인이라는 자부심도 강하고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혈통적으로 동일한 미국민족이나 영국민족은 없지만 같은 미국인이나 영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그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종족적 민족주의보다는 시민적 민족주의로 결속되어 있는 것인데 오랜 기간 동안 이를 형성하기 위해 국가와 사회가 공을 들였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시민적 민족주의를 성장시켜서 종족적 민족주의와 균형을 맞추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동산 시장, 현재 어디쯤 와 있을까


 

존경받는 가치투자자인 하워드 막스는 <투자에 대한 생각>이라는 책에서 중요한 투자 원칙으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라’고 조언합니다. 그는 투자에서 시장 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2013년 주택시장이 바닥을 치고 상승한 지난 5년간의 호황은 평균적인 주택 사이클에 비해 길었습니다. 주택 가격의 상승폭 역시 연2~3%의 경제성장률에 비해 꽤 매력적인 편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나긴 호황의 추억이 여전히 부동산에 대한 굳건한 신앙을 만들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주택시장이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2018년, 44만호의 역대 최고 입주 물량이 기다리고 있으며, 금리 인상도 시작되었습니다. 지방은 이미 2016년부터 하락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은 현재 어디에 와 있는 걸까요? <빅데이터로 예측하는 대한민국 부동산의 미래>의 저자는 거두절미하고 데이터로 확인해보자고 말합니다.

 

건설사에서 수주 정보를 접수하고 사업을 검토하면, 당장 사업을 수주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6개월 후에나 분양을 한다. 따라서 시장 예측을 위해 시장의 ‘선행지표’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현재 상황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 시점이 고점이라면 상당히 위험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역시도 ‘최근 00지역이 몇 퍼센트 올랐다’고 하는 매매가 변동률은 어느 시점부터는 참고만 했다. (오히려 최근 몇 분기 연속 상승률이 높았다면 반대로 이것이 고점 시그널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


동행 혹은 후행지표에 가까운 매매가 변동률을 대체할 선행 시그널을 찾기 위해 몇십 개의 논문과 보고서를 뒤져본 뒤, 우연히 ‘매매가 순환변동치’라는 개념을 발견했다. 이것은 어느 지역 매매가의 장기 추세를 구해 현재 매매가가 장기 추세 가격을 상회하는지 판단하는 것이다. 주택시장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데이터는 거래량, 구매 심리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국에는 매매가가 그 지역의 주택 경기를 최종적으로 반영한다. 따라서 주택 매매가의 순환 변동치를 연결하면 그 지역의 중장기 주택 경기를 설명해주는 ‘매매가 순환주기’ 그래프를 그릴 수 있다.

- <빅데이터로 예측하는 대한민국 부동산의 미래> 39~40쪽

 

보통 뉴스나 부동산 투자 커뮤니티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매매가 변동률입니다. “지난주 서울 부동산 가격 상승률은 00%로 지난달에 비해 소폭 상승했다/둔화되었다”그러죠. 그러나 미래의 분양 성공 가능성을 점쳐야하는 (건설사에서 근무하는) 저자 입장에서는 매매가 변동률이 선행지표가 아닌 후행지표에 가까워 사용하기가 곤란하다고 느낍니다. 따라서 매매가 변동률보다 더 나은 대안을 찾게 된 것이죠.


 

위 그림은 저자가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한 끝에 가장 핵심적인 선행지표로 삼은 데이터로 구성한 그래프입니다. 자세히 보면 ‘매매가 순환변동치’와 ‘입주 물량’ 두 가지 데이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매매가 순환변동치는 말하자면, 현재의 매매가와 매매가의 장기추세를 비교한 것입니다.

 

매매가 순환변동치 = 현재의 매매가 - 매매가의 장기추세

 

매매가 순환변동치는 0을 기준으로 위 아래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곡선으로 표현됩니다.

이 선이 0보다 위에 있으면서 우상향하면 현재의 집값이 장기추세선보다 높은 상승 국면에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 0보다 위에 있지만 우하향하면 집값이 장기추체선보다는 높지만 시장이 둔화되고 있다는 뜻이고요. 어째든 0 위에 있으면 부동산 시장은 호경기입니다.

 

반대로 순환변동치가 0보다 아래에 있으면서 우하향하면 현재 집값이 장기추세선보다 낮은 하락 국면에 있다는 뜻입니다. 0보다 아래 있으면서 우상향하면 시장이 장기추세선보다 낮은 위치에 있지만 회복 국면에 있다는 뜻이고요. 어째든 0 아래에 있으면 이 지역의 부동산 시장은 불경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식 차트에서 장기 이동평균선과 주가의 관계를 보고 상승 추세/하락 추세로 구분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거래량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장기추세선 대비 현재의 시장 가격이라고 말합니다.

 

위 그래프에서 보듯이 2018년 현재 한국 주택시장은 상승 국면에 있습니다. 하지만 순환주기 상으로 2017년 1분기 현재 진폭이 거의 전고점(2008년 1분기) 수준까지 확장되어 있습니다. 어느 정도 호황기 말미에 와 있다는 뜻이죠.

 

점선은 입주 물량입니다. (숫자의 단위는 천입니다. 2018년 448은 44만8천호를 뜻합니다). 입주 물량은 매매가 순환주기의 변동 원인입니다. 입주 물량이 많아지면 공급이 늘어 가격이 하락합니다. 입주 물량이 적으면 공급이 줄어 매매가가 상승합니다. 입주 물량과 매매가 순환주기를 함께 보면 현재의 시장을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그래프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2008년 금융위기 전에는 무려 7년 연속 30만호 이상의 입주 물량 공급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양이죠. ‘물량 앞에 장사 없다’고 당연히 가격이 하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8년의 경우에도 44만호의 역대급 입주 물량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저자는 공급이 제한된 서울을 제외하면 2018년 이후에는 이전과 같은 주택 가격의 상승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2018년 이후에 부동산 시장은 폭락하게 될까요? 2008년 이후의 불경기처럼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오’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과거 3년간의 입주 물량 공백기(2011~2013년) 때문입니다. 이때 역대 최저 수준의 공급이 이루어졌고, 근래의 입주 물량을 누적해서 봐도 둔화 가능성은 있지만 급격한 충격 가능성은 낮다고 합니다. 또한 금융위기 이전의 전세가율과 금리 수준과 비교해볼 때도 지금의 제반 여건이 훨씬 양호한 편이며, 무엇보다 과거의 물량 공백기가 주택시장의 급진적 하락을 막아주는 완충장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네요.


 ★ 대형 건설사의 부동산 데이터 분석가가 전하는 2만 시간의 노하우 

<빅데이터로 예측하는 대한민국 부동산의 미래>(조영광 지음)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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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온 2018.11.29 07:56

    전자책 출간 계획이 있나요??

    • 미지biz 2018.11.30 22:30

      독자님 안녕하세요? 당분간은 전자책 제작 계획이 없습니다. 전자책으로 제작해도 그래프가 워낙 많아서 전자책으로 보시기에 많이 불편하실 것으로 판단됩니다. 나중에 제작하게 되면 알려 드릴께요. 감사합니다.

향후 5년간, 주택 고령화에 따른 젊은주택의 희소가치는 주택 가격 상승의 강력한 모멘텀이 될 것이다!

 



한국은 급속도로 고령화되고 있는 사회입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인구 고령화에 따라 주택 수요가 감소하여 앞으로 주택시장이 하락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주택시장에서 벌어진 일은 그와는 정반대였죠. 왜 그럴까요?


바로 비밀은 주택 고령화에 있습니다. 인구 고령화에 따른 주택 수요 감소는 비록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수면 위로 드러날 시점은 향후 몇십 년 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주택 고령화는 지금 우리 주택시장이 당장 당면한 문제입니다.

 


주택시장은 크게 신규주택과 재고주택으로 나뉩니다. 신규주택은 새로 분양하는 아파트이고, 재고주택은 이미 지어져 있는 아파트죠. 재고주택 중에서도 입주한 지 10년이 넘은 주택을 고령주택이라고 하는데요, 고령주택 비중은 2006년에는 50%였지만, 이후 계속 증가하여 2017년 현재 전체 주택의 76%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입주 5년 이하의 젊은주택 비중은 2017년 현재 13%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말그대로 아파트 10채 가운데 1채 정도만이 새 아파트인 것이죠. 게다가 우리나라 주택 재고의 48%가 수도권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수도권 대부분의 주택이 노후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택 고령화가 심화되면, 젊은주택이 희소해져 가격이 뛰게 됩니다. 그리하여 젊은주택의 가격이 전체 주택의 가격 상승을 견인하는 흐름을 만들어내었습니다. 2001년 평당 30만 원의 차이를 보이던 젊은주택과 고령주택의 가격은 주택 고령화의 심화로 2017년에는 평당 360만 원까지 차이가 났습니다. 34평 아파트 기준으로 환산하면 젊은주택이 1억 2,000만 원 정도 더 비싼 것이죠.

 

주택이라는 상품은 비가역성이 강합니다. 한 번 지으면 30년 정도는 그 자리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규 주택을 짓고 싶어도 노후 주택이 들어선 자리는 적어도 수십 년 이상 기다려야 합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지 지형이라 주택의 원재료가 되는 토지가 부족합니다. 이러한 토지의 제약이 주택 공급을 제한하고 주택 고령화를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향후 5년간 주택 고령화에 따른 젊은주택의 희소가치는 주택 가격 상승의 강력한 모멘텀이 될 것입니다.

 

★ 대형 건설사의 부동산 데이터 분석가가 전하는 2만 시간의 노하우 

<빅데이터로 예측하는 대한민국 부동산의 미래>(조영광 지음)에서 발췌했습니다.

 

 

[저자의 책 소개]

『한국인의 발견 :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힘의 정체를 찾아서』(2016년)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최정운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본인이 2016년 말에 출간한 『한국인의 발견』(이하 『발견』)은 2013년에 출간한 『한국인의 탄생』(이하 『탄생』)의 속편이라 할 수 있다. 『탄생』은 우리 역사에서 근대의 출발인 구한말부터 해방 전, 즉 일제 강점기까지를 다루었고, 『발견』은 해방 후부터 1990년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우리 민족의 근현대 사상사를 논의하는 이 두 책은, 2001년경부터 집필 준비가 시작되었으니 출간에 이르기까지는 15년이 걸렸다. 본인의 문제의식은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현대적 정체성을 찾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우리의 근·현대 사상사를 구축하는 데 있었다. 구체적으로 본인은 우리가 그간 ‘무엇을 겪었고’, ‘무엇을 느꼈고’, ‘겪은 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왔고’,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바랐는가’의 질문들에 답하고자 하였다. 그간 우리 지성계에서 사상사의 구축이 여러 차례 시도되어 왔지만 대부분은 이념사를 논하는 데 그쳤다. 말하자면 보는 시각을 미리 정해놓고 그 시각을 확인하는 작업에 그쳤으며, 작가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 강화하고 상대편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사상사를 만드는 일이 시급했다.

    그러나 우리 사상사를 연구하는 데는 여러 난제들이 존재한다. 우리 역사에서는 ‘사상가(思想家)’라고 부를 수 있는 저자들을 찾기 힘들며, 따라서 사상사의 전범(典範)이라 할 수 있는 서양 정치사상사처럼 우리의 사상사를 쓸 수는 없다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근대의 시작에서부터 서구 문물을 수입하여 새로운 한국인, 사회와 국가를 만들어 왔으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상사의 주요 텍스트는 서구에 있다. 근현대 한국 지식인들의 고민 또한 서구 사상의 도입과 적용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독특한 문제였다. 사상사 연구는 객관적 현실과 텍스트에 철저히 근거해야 함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텍스트에 정확히 근거하지 않은 사상 논의는 자칫 그것이 상상의 날개를 펴고 어디로 날아갈지 알 수가 없다. 통상적인 사상사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텍스트가 거의 없는 우리 근현대 역사에서 그나마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텍스트는 구한말 서구에서 도입되어 발달해온 근대 소설문학밖에 없다. 서구에서 17세기에 나타난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 소설문학은 ‘현실적이라고 수긍할 수 있는 현실’을 ‘픽션(fiction)’으로 만들었다. 이는 ‘작가의 사상과 이상(理想)을 담아내는 지성적이며 대중적인 포괄적 현실’의 기술 형태이며, 이런 기법으로 만들어진 텍스트들을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사상과 이상을 포함하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탄생』과 『발견』은 근현대의 각 시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소설문학 작품들을 해석하여 구축한 한국 근현대 사상사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상은 흔히 말하는 ‘정치사상’, ‘경제사상’, ‘사회사상’ 등의 전문화된 학문 분야에 대한 사상이 아니라 삶의 가장 밑바닥 층위에서 기본이 되는 문제들에 대한 생각들을 구별짓지 않고 포괄적으로 논의한 사상이다.

 

 

    『발견』은 해방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른바 ‘해방공간’은 구한말의 ‘홉스적 자연상태’가 되돌아온 대혼란 상태였다. 이 ‘해방공간’에서는 본격적인 문학 작품들이 쓰이지 못하였다. 다만 몇몇 단편 소설들에 나타나는 한국인들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의 위력에 미리 겁을 먹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국가 건설에 참여할 용기도 없고 관심도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국가 건설은 미군정에 의해 시작되고 우리 지식인들의 참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핵심 문제는 당시 한국에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적 자원, 물적 자원들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부족한 자원들을 차분히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미리 공산국가 건설을 위한 청사진을 갖고 있었고, 토지 개혁, 국가 건설, 군비 확장을 신속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에 맞서는 자유민주주의적 국가 건설을 서둘러야 했다. 다시 말해 이때 우리에게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자원들뿐만 아니라 시간이 모자랐고, 따라서 대한민국의 건설은 ‘날림 공사’를 모면할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 인력의 부족은 일제 잔재를 받아들이는 결정으로 이어졌고, ‘친일파’의 대거 영입, 일제 권위주의, 군국주의 문화의 용인으로 이어졌다. 나아가서 물적 자원의 부족은 우리를 미국의 원조에 철저히 의존적이게 만들었다. 문제는 국가를 부족한 자원으로 성급하게 만들었다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건국 과정에서 일제 잔재와 미국에 의존한 존재 양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크게 훼손하였고, 따라서 이 나라에는 정치적 위기가 상존하였다. 이 국가는 국가로서의 능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능력 부족과 정통성의 위기 상황을 강하게 의식하는 국가로서 생존을 위해 무리하게 폭력을 행사했으며, 그 결과 대한민국은 초기에 변태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은 ‘취약 국가’로 태어났다.

    1950년의 6.25 또는 한국전쟁은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은 여러 층위의 전쟁들이 응축된 특수한 전쟁이었다. 우선 미국, 소련, 중국 등 세계의 초강대국들이 엄청난 병력과 최신 무기를 총동원한 전쟁이었고, 남한과 북한은 민족통일을 목표로 전쟁을 치르면서 각각 국가 말살의 위기에 직면하여 총력전, ‘절대전’을 치렀다. 그런가 하면 계급투쟁이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되어 민간인들 간에도 모든 개인적 원한들이 동원되는 내전이 전개되었다. 나아가 초강대국들은 그들 간의 ‘3차 대전’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전투 행위를 한반도 안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전쟁을 ‘제한전(Limited War)’으로 관리하였는데, 그 결과 한반도는 그야말로 ‘아궁이’, ‘용광로’, 지옥의 전쟁터가 되었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미국의 참전을 독려하고 그들의 적극적 개입을 보장받기 위해―당시는 미국의 도움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전쟁의 모든 의사결정, 나아가 주체성마저 미국에 양여했고, 국민들은 ‘남의 전쟁’에서 죽어야 하는 상황, 자포자기 상태에 처하였다. 결국 1953년 휴전이 성립되었을 때 대한민국은 휴전조약의 당사자가 되지 못하였고, 그런 가운데 민족 분단을 영구화할 휴전에 반대하는 데모를 벌이자고 선동하면서 미국이 지켜주는 가운데 또 다른 절박한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휴전으로 전쟁이 멈추었을 때 한반도 남쪽은 죽음의 그림자뿐이었다. 국민들은 극빈 상태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지만, 그들의 의식에서 한국인들은 모두 죽은 시체, 죽어가는 병자 또는 언제 어디서라도 죽음에 붙들리고 그리하여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는 존재들이었다. 안 그래도 작은 우리 민족은 이제 영구히 분단되어 생존할 길이 없다는 비관 속에서, 게다가 전쟁 통에 죽고, 불구가 되고, 더구나 살인자가 된 이들은 살려달라고 하늘에 애원할 면목도 없는 존재였다. 편재(遍在)한 죽음은 우리의 ‘아프레게르(après guerre)’의 풍경이었다.

    1950년대는 한국인들에게는 비참한 시기였고 동시에 위대한 시대였다. 먹고살기 위해 모든 고통과 고난과 모독(冒瀆)을 감수해야 했지만, 어떤 이유와, 원인과 과정에서건 죽었던 한국인이 부활한 시대였다. 국가권력이나 어떤 정치 집단이나 지식인 집단이 이끈 것도 아니었지만, 한국인 시체들은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하고, 생명을 되찾고, 욕망을 되찾고, 자신의 모습에 분노하고, 좌절하였다. 이런 새로운 모습들은 대표적으로 손창섭의 단편 소설들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1950년대를 통해 쓰인 그의 많은 단편 소설들은 어둡고 음침하고 처참한 전후 한국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었기에 비관적이고 허무주의적 작품들로 평가받아 왔지만, 그런 오해들을 뒤로 하고 그의 소설들을 면밀히 살피면, 독립된 각각의 작품들은 마치 연속된 작품처럼 이어지며 그 속에서 죽은 한국인이 부활하는 모습이 뚜렷이 나타난다. 1950년대는 전쟁을 겪은 한국인들이 죽고 죽어가는 비참한 상태에서 시작하여 다시 살아나고, 살아난 후에는 욕망과 분노를 회복해가던 기적(奇蹟)의 시대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대는 두 개의 다른 형태의 혁명이 동시에 잉태(孕胎)된 시대였다.

    1960년 2월 말 학원의 자유를 외치는 고등학생들의 ‘데모’가 시작되었고, 데모는 곧 전국에 파급되었다. 무엇보다 3월 15일, 너무나 뻔뻔스런 자유당의 부정 선거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가전을 벌였고, 눈에 최루탄이 박혀 죽은 고등학생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에 온 국민은 분노에 떨었다. 이러한 국민들, 특히 도시 빈민들의 저항이 공산주의 혁명으로 발전할 것을 우려한 지식인들은 대학생들을 동원하여 당시 데모 사태를 민주주의 회복만을 요구하는 데모로 대체하려 했고, 이러한 노력이 성공하여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등장하여 시위를 벌였다. 그날 저녁 그들은 자유당의 하수인 ‘정치깡패’들에게 테러를 당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이에 다음 날 4월 19일에는 분노한 대학생들이 광화문에 모여 역사적인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날 오후 경찰은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여 수많은 희생자들을 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었고 4월 말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자유당 정권이 붕괴함으로써 ‘4.19혁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후 언론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은 대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겼다. 결국 자유당이 붕괴되어 공백이 된 권력은 민주당 정치인들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이들이 세운 정권은 의원내각제라는 민주 정치를 실험했을 뿐 4.19혁명의 직접적 원인들, 국민들의 좌절과 분노를 야기했던 문제들은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드러냈다.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쌓여갔고 이는 결국 다음 해 5.16군사정변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5.16군사정변은 이미 1956년경부터 계획되어온 것이었고, 그 목적은 부패한 권력과 사회를 일소하고 혁명적 변혁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고 반공에 기반해 안보를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5.16 세력은 애초에 1960년에 정변을 시도하려 했다가 4.19 때문에 이를 연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제 역사의 흐름은 5.16 세력으로서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4.19가 먼저 발발하여 국민들에게 깊은 좌절을 안겨주었기에 5.16은 성공적으로 우리 역사에 흔적을 깊이 남길 수 있었다.

    4.19 이후의 한국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준 작품은 단연 최인훈의 『광장』이었다. 4.19를 겪은 시대의 한국의 대학생, 서울 문리대 철학과 3학년 이명준은 자신의 특별한 운명을 믿고 있었고, 그 운명을 이루기 위해 광장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남한에서 그리고 북한에서,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이명준은 광장을 찾지 못해 좌절한다. 그런 가운데 그는 그래도 무언가를 챙기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 악마의 탈을 쓰고, 옛 친구를 고문하고, 옛 애인을 강간한다. 결국 포로수용소에서 운명에 좌절하고 정체성 배반의 수치 속에서 이명준은 남과 북 어느 쪽도 택하지 못하고 제3국행 배에 올라 인도로 가는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명준은 배 위에서 시종 자신을 추적하고 수치를 문초하는, 양심을 일깨우는 갈매기의 매서운 눈초리에서 애정을 느끼고 바다로 뛰어들고 만다. 욕망의 방출의 시대에, 혁명의 문턱에서 거부당한 한국의 엘리트 대학생이 겪을 비극을, 최인훈의『광장』은 예견하고 있었다.

    5.16 이후, 쿠데타가 성공하고 급속도로 서슬 퍼런 혁명 정부가 들어선 가운데 이 시대를 대표한 작품은 최인훈의 『구운몽』이었다. 주인공 독고민의 욕망은 하나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여러 욕망들이며 또 정체성을 분열시키고 의식을 뒤섞어버리는 욕망들이었다. 옛 애인을 다시 만나는 꿈을 꾸고, 회사의 사장이 되고, 시회(詩會)의 지도자로서의 멋진 예술가가 되고,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애인이 되는 등 다양한 욕망들이 지나간다. 그러나 결국 그의 이 모든 욕망들이 부정되고 밑바닥에서 피어오르는 궁극적인 꿈, 욕망은 광장 가운데 서 있을 동상 같은 멋진 지도자가 되거나 권력에 도전하는 반군(叛軍)의 지도자, 불멸(不滅)의 스타가 되는 것이었다. 5.16 이후에 아직 경제 발전이 시작되기 전, ‘혁명’, ‘쿠데타’가 성공하고 새로운 가공할 권력이 나타났을 때 이미 한국인들은―너무나 오랫동안 혁명을 꿈꾸어왔지만 좌절만을 겪어온 그들은―다른 세상, 모든 욕망들이 난무하고 꽃피는 세상을 보고 있었다.

    1960년대는 최인훈과 김승옥의 시대였다. 그들의 소설들은 새로운 시대를 일깨우는 작품들이었다. 1963년에 최인훈이 출간한 『회색인』의 주인공 독고준은 1958년으로 돌아가 5년 전 그때는 지금과 얼마나 다른 시대였는지를 보여준다.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이 지금과 얼마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친구들과의 이야기들 또한 얼마나 달랐는지를 일깨워주었고, 다시 말해 1963년이라는 현재, 모든 게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그 시대가 얼마나 독특한 시대인지를, 다시 말해 역사와 현재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1966년에 출간된 『서유기』에서 최인훈은 독고준을―1958년으로 보내졌던 그를―1966년으로 데려오는 ‘시간여행(time travel)’을 감행한다. 주인공은 고전 『서유기』를 방불케 하는 희한한 모험을 겪으면서 일찍이 막스 베버(Max Weber)가 보여주었던, 그리고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소개했던, 자신의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합리적 근대인’으로 변모하며, 나아가 그러한 자신을 의식하고, 그러한 삶을 살기로 결의하는 모습, 새로운 한국인으로 재탄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승옥의 단편 소설들은 서울대 문리대 주변의 세속화하고 타락한 이명준 같은 인물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의 외모를 위협적으로 꾸며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강한 존재인 양 스스로를 드러내지만 사실 그 내면이 비밀스런 좌절과 죄의식으로 가득 찬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공동체를 떠나온, 잊어버린 외로운 개인들이었고, 그들 각각은 누구로부터도 이해를 구하지 못하는 존재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기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다니며 정체성 위기가 상존하는 아슬아슬한 존재들이었다. 1960년대 후반이 되면 그들은 현실주의의 지혜를 배우고, 자기의 주제를 찾아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와 함께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1960년대 이 소설들에서 한국인들은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로서의 민족공동체로 귀결되고 말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한국 사회는 여러 부분들이 따로 움직이며 부각된다. ‘청년’ 문화가 등장하고, 강한 여성상이 부각되는 반면 남성들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급기야 1970년대 초에는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계급이 살아가는 ‘상스러운’ 모습들, 그리고 그들이 고용주들과 권력과 맞서 싸우는 모습들이 부각되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당시 새롭게 출현한 도시 중산층 ‘부르주아’들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났다. 한마디로 1970년대에 들어서면 한국 사회는 여러 집단들, 계급들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들의 관계는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이제 계급들의 전쟁터였다.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1970년대에는 새로운 사랑의 이야기들이 출현했다.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의 오경아는 살벌한 계급 사회를 가로질러 추락하는 인물로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을 베푸는 비련의 천사였다. 경아나 그녀의 애인 김문오는 장래를 생각하고 준비할 능력이 없는 새로운 세대의 바보들이었다. 영악한 계급투쟁의 사회에서 이들 계급들을 소통하고 엮어내기 위해서는 장래와 이해(利害)를 따질 능력이 없이, 사랑에 빠져드는 바보들이 필요했다. 이들은 대중 소설의 인기몰이를 위해 창조된 주인공들이었지만 나아가 우리 역사를 다시 움직이도록 하는 역사적 임무를 떠맡기기 위해 창조된 인물들이기도 했다. 이들의 존재 위에서 1970년대 후반에 새로운 ‘운동권’이 출현하였다.

    1980년대는 5.18과 ‘신군부’, ‘5공’과 함께 시작된 투쟁의 시대였다. 학생 운동권이 주동이 되어 투쟁에 나섰지만, 온갖 사회·정치적 모순들이 중첩된 세상에서의 투쟁은 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었다. 한편으로 5공 정부는 경제 발전과 물질적 생활 향상을 위해 진력했으며 따라서 사회는 투쟁과 물질주의와 쾌락의 문화가 뒤섞인 대혼란이었다. 1980년대 후반 사회 여러 분야에서의 문제는 정체성의 혼란이었고 이는 사람들을 살인적인 위기로 몰아갔다.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은 1990년대에 들어 새로운 주제로 이어졌다. 즉 우리의 정체성이란 ‘멋지게’ 보이는 모습을 선택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습을 생각하며 스스로 창조하고, 가꾸고, 지켜나가야 하는 것임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이 시대에 쏟아져 나온 이른바 ‘회상 소설’들은 운동권 투쟁의 과정에서 선택했던 가면(假面)을 벗고 진정한 자신에게 다가가는 삶의 길을 보여주었다. 나아가서 일각에서는 개인주의적 삶을 서서히 극복해나가고 공동체적 관계를 회복하는 지혜를 이미 우리 한국인들이 실천해온 모습도 새로이 확인하고 있었다.

    본인은 『발견』에서 우리 한국인들이 해방 이후 겪은 수많은 시련들과 그 과정에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어떻게 그 괴로움을 겪고, 좌절하고, 참고,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 한국인들의 사상을 문학 작품들을 통해 해석해가며, 궁극적으로는 현대 사상사를 일구어 보려고 했다. 이러한 작업의 기저에 깔려 있는 질문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가,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들이었다. 이 질문들에는 결코 ‘해답’이 없으리라는 판단에 자위하지만, 답하기 위해 물어나가는 과정은 보람 있는 고통이었다.

 

 

 

 

 

* 이 글은 아래 출처의 글을 좀 더 읽기 쉽게 윤문한 것임을 밝힙니다.

 

출처:  최정운, "(신작 소개: 『한국인의 발견 :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힘의 정체를 찾아서』)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현대사광장』, 제10호(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7), 130~137쪽.

 

* 출판사 리뷰 - http://mizibooks.tistory.com/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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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최정운의 『한국인의 발견』을 읽고

 

한국인들과 그들의 민족국가 대한민국을

거울 앞에 세우다

 

이택선

(성균관대학교 학부대학 초빙교수, 동아시아 국제관계학 전공)

 

『한국인의 발견』은 『지식국가론』, 『오월의 사회과학』, 『한국인의 탄생』에 이은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최정운 교수의 네 번째 단독저서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저자는 1980년 5월 광주를 다룬 『오월의 사회과학』(1999년)에서 ‘절대공동체’ 개념을 제시하며, 그간에 보수와 진보의 갈등 속에서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학문의 언어로 재기술하였다. 이후 저자의 담론은 광주에 관한 거의 모든 평론에서 언급되었고 올해 개봉되어 12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택시운전사』에 관한 기사에도 등장할 만큼 그 반향이 컸다. 저자는 이러한 공로로 전남대학교가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후광학술상의 일곱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이후 2013년, 저자는 ‘우리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는 노작 『한국인의 탄생』을 출간하여, 19세기 구한말부터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시기를 대상으로 한국 근현대 사상사의 복원에 나섰다. 그리고 2016년 12월 말, 저자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를 다룬 『한국인의 발견』과 함께 돌아왔다.

 

 

    비평자는 『한국인의 발견』이 강조하고 있는 바를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하여 소개보려고 한다. 그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부제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힘의 정체를 찾아간다. ‘힘의 정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는데, 먼저 20세기 역사의 주인공인 한국인, 그리고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건을 만드는 근본적 힘으로 작용하는 한국인의 시대정신, 그리고 시대정신을 담고 이를 끊임없이 갱신해온 한국인의 내면이 그것이다. 저자는 이를 규명하기 위해 한국 소설들을 다시 읽고 그 안에 담긴 한국인들의 생각과 시대정신을 캐내어 시간 순으로 기술하며, 이를 해방에서부터 1990년대까지의 한국 현대사에 대응시켜, 해방과 건국 → 전쟁 → 한국인의 부활 → 두 개의 혁명(4.19와 5.16) → 역사와 개성의 시대(1960년대) → 분열과 연합의 시대(1970년대) → 투쟁의 시대(1980년대) → 근대로의 진입(1990년대)이란 말로 정리한다.

    전반부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한국전쟁 이후 부활한 한국인이 1950년대 말부터 욕망과 분노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1950년대를 거치며 비참함을 자각한 한국인들은 좌절된 욕망과 분노를 독특한 형태의 ‘두 개의 혁명’을 통해 표출하게 되는데, 이 두 혁명 즉 4.19와 5.16은 공히 1956년 시점에서 연원한 이란성 쌍둥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저자는 4.19에 대한 ‘공식 정론’, 즉 ‘대학생들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하여 일으킨 사건이자 혁명’이라는 모든 교과서의 기술과 담론을 일축하고, 그게 아니라 4.19는 오랫동안 쌓여온 가난과 좌절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의 표현이었다고 말한다(222쪽). 하지만 당시 민중의 폭발을 두려워한 지식인들은 사태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하고 혁명을 거세하여 민주주의를 위한 놀이로 전락시켰고, 이로써 4.19는 혁명으로서 역사적으로 부과된 목표를 이루지 못하였다(261쪽). 그리고 이 대목에서 중요하게는, 혁명을 목전에 두고 무대에서 끌어내려진 4.19세대(대학생)가 출현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4.19세대는 ‘붉은 심장의 설레임’을 가지고 광장으로 진출하였다.

    이미 4.19를 통해 욕망과 양심이 현실과 부딪히게 된 1960년대 초의 상황은 4.19의 이란성 쌍둥이와도 같은 5.16을 출현케 하였다. 5.16은 불법 쿠데타임에 틀림없지만 만약 ‘산업 혁명’이 혁명이라면 5.16도 혁명임에 분명했다(259쪽). 5.16을 통해 한국인들에게는 욕망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그런 가운데 지식인들은 한국의 후진성을 의식하며 서둘러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을 만들어냈고, 1960년대에 한국인들은 ‘한국주식회사’ 속에서 일체의 가족, 공동체, 윤리, 도덕, 민족을 벗어던지고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랬던 만큼 한국인들은 더더욱 고독했고,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 사회는 ‘세대’, ‘성별’, ‘지방’, ‘계급’ 등과 같은 다양한 이름의 정체성과 계급으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의 시대’는 한편으로 사회적 정치적 모순이 심각해져 한국 사회 내부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 운동이 나타나 계급들 사이에 침투하여 연합 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죽음을 넘어선 투쟁은 극단의 폭력과 금력 만능주의와 극한의 대립을 이루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1970년대의 현실은 폭력과 금력으로 무장한 괴물인 ‘오공(제5공화국)’을 낳았고 그와 함께 시작된 1980년대, 극단의 ‘투쟁의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은 민주화를 쟁취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한국인들은 심각한 정체성 위기를 겪어야 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한국인들은 비로소 롤러코스터 같았던 여정을 되돌아보며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639쪽, 643~645쪽).

    1990년대는 거칠었던 과거를 돌아보며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본격적인 해결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시기였다(649쪽). 그러나 저자가 기술을 멈춘 1990년대 말의 IMF 경제 위기를 고비로 한국인들은 다시금 각자의 생존을 도모하며 서로를 불신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분해되고 신뢰와 신용이 바닥으로 떨어진 공동체의 복원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는 OECD 국가들 가운에 노사 관계와 금융 부문에서 거의 꼴찌 수준의 국가경쟁력을 보였고 ‘갈등지수’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사회의 핵심 문제가 구성원 모두가 가담하고 있는 사회적 불신, 의혹, 질투, 적대에 있음을 보여준다(641쪽). 이 지점에서 저자는 붕괴되고 있는 우리 사회와 공동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미 1960년대 이후부터 제기되어온 ‘나’와 ‘우리’의 정체성 위기의 해결 방안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저자는 우리의 모습을 일종의 ‘시간여행’을 통해 지속적으로 거울로 비추어보는 일이야말로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제시하며, 이 책 『한국인의 발견』 또한 그러한 구체적 작업의 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 근현대 사상사를 연구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수립하고 있다. 전술한 ‘힘의 정체’에서 ‘힘’은 당대 현실에 반응하여 만들어지고 ‘현실’은 ‘사상’의 변화가 가장 심하게 일어나 세상을 뒤바꾸는 역사, 정치적 사건의 전후 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힘의 정체’는 사상이라는 범주로 합류되기 마련이다. 결국 이 책은 ‘힘의 정체’를 역사 속에서 규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사상사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음을, 사상사를 재구성하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에 관해 저자는 모든 역사와 사회 연구에 있어서 그 출발점은 사물과 집단 또는 어떤 사건 등에 대하여 그 정체를 묻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지적하며, 우리나라 역사와 사회에 관한 연구들 역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가장 평이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덧붙여 저자는 지금까지의 연구들 대부분이 이 ‘평이한 질문’을 회피한 채 철저하게 사료에 근거하여 객관적 사실만을 연구한다는 실증주의 사학 위주로 진행되어 왔다고 비판한다(17~18쪽). 저자는 역사 연구에 있어서 사실에만 국한해야 한다는 실증주의 사학의 방법론의 경우 이미 유럽에서는 19세기부터 문제점을 드러내었으며(27쪽), 애초에 실증주의가 말하는 ‘사실’이라는 것조차도 이미 사람들의 생각, 판단, 해석, 사상이 포함된 주관적인 것, 해석의 대상이라고 말한다(24쪽). 아울러 대부분의 정치적 사건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뚜렷한 의미와 목적을 가치고 계획해서 실행한, 이를테면 작품이자 해석 대상이며, 따라서 역사 연구를 겉으로 드러난 사건 진행의 층위에서만 머물러 수행한다는 것은 땅을 파지 않고 농사를 짓겠다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다(29쪽).

    그리고 저자는 한국 근현대사에는 서양 사상사의 연구자료에 해당하는 텍스트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대체할 자료로서 예술 작품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언어적 진술이 포함된 문학 작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29~33쪽). 하지만 여기에도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특히 소설 해석의 목적은 작가를 시대정신의 지배를 받는 지식인 집단의 일원으로 생각하여 그가 복무한 시대의 사상을 재구성하려는 데 있는 것이지, 역사에 구애받지 않는 어떤 보편적인 진리, 이를테면 ‘권력이란 무엇인가’, ‘전쟁이란 무엇인가’ 등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이런 것들을 역사적으로 검증하기 위한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35~41쪽).

    다음으로 지금까지 소개한 최정운 교수의 『한국인의 발견』이 국내외 학계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측면과 방향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첫째, 이 저서는 국내외 한국학계가 요구하고 있는 상호 통합의 텍스트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책이다. 한국학의 모태인 한국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과 함께 불어닥친 한류 현상 등으로 인하여 해외 한국학계 역시 양적으로 크나큰 팽창을 이루어왔다. 하지만 양적 팽창의 이면에는 국내 한국학계와 해외 한국학계의 소통 부재와 불통 현상이 심각한 지경에 도달해 있다. 동아시아학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학제 간 연구를 추구하고 있는 흐름에서 그 일부인 한국학 역시 해외 연구자들과의 소통과 대화를 위해서는 안과 밖의 이론적 논의를 모두 소화하고 학문 간 통섭이 가능한 저서를 제시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해졌다. 국내 학계가 해외 한국학의 흐름을 포섭하고 장기적 학문 발전 방향까지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구축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한국학은, 예를 들면 태권도가 국제화되면서 그 세계 챔피언이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니게 되었듯이, 무관의 제왕으로 전락하지 말란 법이 없다.[각주:1]

    실제로 조지타운대학교의 외교학대학원 아시아연구소에서 5년간 연구를 수행한 비평자는 올해 3월 중순경 토론토에서 개최된 아시아학회(Association for Asian Studies)의 연례 학술회의, 그리고 한국국제교류재단과 동북아역사재단 후원의 코리안 나이트(Korean Night) 행사에 참석하여 많은 해외 한국학 교수들을 만나 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은 한국학 태동의 기본이 되는 한국어와 역사, 문학, 철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가장 수요가 높은 한국전쟁이나 민주화 그리고 북한 핵문제 연구의 기본이 되는 정치, 외교에 관한 지식까지 아우르는 저서의 필요성을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충족하는 저서는 매우 부족하며, 그에 앞서 국내 한국학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학자들 자체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해외의 이론적 논의를 바탕으로 국내 학계의 담론들을 포괄하면서도 한국인의 현실에 맞는 논의를 구축하기 위해 독자적 방법론을 제시한 최정운 교수의 이 책은 이러한 학계의 요구에 가장 부합하는 저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현재의 추세는 해외 한국학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점차 언어, 역사를 담당하는 인문학자들에서 민주화나 북한 이슈를 주 전공으로 하는 사회과학자들로 바뀌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감안할 때, 정치외교학자이면서도 인문학에서 주로 다루어온 문학 작품과 역사를 재해석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나아가 “분야란 교육을 목적으로 한 작위적 설정일 뿐 인간의 생각 자체에 분야의 구별은 무의미하다”(38쪽)고 말하는 저자야말로 현재 안과 밖의 한국학계가 가장 필요로 하는 연구자임에 틀림없다. 저자는 한국의 뭇 학자들이 역사적으로 서양 학문의 도입이라는 일차적 의무에 평생을 바치는 동안 정작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기여해야 할 학자로서의 중임을 소홀히 함으로써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된 현실을 아쉬워하며, 한편으로는 1870년대부터 벌인 대학 개혁운동을 통해 순수 학문들의 수준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급기야 세계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된 미국을 예로 들어, 우리 학자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한다(651~652쪽). 어떤 의미에서 저자가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나라로서 스스로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야 할 우리의 한국학과 조우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둘째, 최근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사회 갈등에 대해 이 저서는 진단과 처방의 텍스트로서 구체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686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통해 저자가 제시한 논의 중에서 비평자의 눈을 사로잡은 키워드는 단연 ‘취약국가론’과 ‘반지성주의’였다. 최정운 교수는 민족국가 대한민국은 취약국가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민족국가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이 부족하여 이를 외국에서 빌려와 만들어진 초라한 국가였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친일파들이 국가의 공권력을 담당하는 경찰과 군대, 공무원 조직에 대규모로 영입되고, 미국에 대한 물적·정신적 의존이 심화되어 정통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채 첫걸음을 뗀 국가였다(72~73쪽).

    이러한 설명을 바탕으로 저자는 대한민국이 국가로서의 능력이 형편없는 수준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하며(74쪽), 한국의 초기 국가가 일제 시기의 과잉 발전과 국가기구를 그대로 계승했다는 ‘과대성장 국가론’을 반박한다. 아울러 취약국가의 병폐로 인해 대한민국은 파시즘 국가론이 제기될 여지가 없지 않지만 이 나라는 차라리 민족주의가 부족한 나라였지 민족주의 감정을 이용하는 나라가 아니었다고 기술하여(77쪽) 이 역시 비판하고 있다. 즉 ‘민족국가’, ‘민주공화국’을 만들었지만 대한민국은 언제 망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시달렸고 좌파와 북한의 공작에 맞서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과도한 민족주의 ‘오버액션’을 남발하는 나라였다(642쪽).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성급하고 충동적으로 폭력을 사용하여 국민의 반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고, 국가가 민족주의를 충분히 흡수하지 못한 나머지 국가 밖에 ‘민족’이 존재하는 상황이 초래되었으며, 이러한 취약성은 지금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설명은‘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나 ‘세월호 사건’ 그리고 ‘광우병 사태’와 ‘촛불혁명’의 과정과 이후 벌어진 극심한 국론 분열 현상을 설명하는 데도 충분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한편 이는 ‘반지성주의’로 이어지는데, 우리 사회가 정부 수립 시기부터 시작된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격렬한 역사를 써오는 동안 ‘반지성주의’가 은밀하고 잘 무장된 제도화 상태로 전개되어 개인과 사회 전체, 학계를 포위하는 현 상태로까지 발전해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반지성주의’를 학문의 소비자주의와도 연관시킨다. 대부분의 제도, 사상, 학문, 철학을 서구에서 배워와 우리나라에 도입하는 것을 역사적 의무로 삼아온 지식인들은 부지불식간에 ‘반지성주의’에 기여해왔다(23쪽). 우리 지식인들에 의한 서구의 정치 제도와 사상의 도입은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현실적 조건과 문제 등을 고려한 것이라거나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상당수의 학자들은 자신의 학문적 입장에 발 딛기보다 보수와 진보의 진영 논리에 따른 투쟁에 복무하고, 그 과정에서 합리적 토론의 자리는 맹목적 믿음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예컨대 이 과정에서 철학을 억압하고 기피하는 문화가 발전되어, 혹 누군가 다른 생각을 하면 골치 아픈 문제들을 들추는 존재로 분류되어 억압받고 기피되어 한국 근현대 정치사상사가 발전할 수 없는 풍토가 조성되어 왔으며(22~23쪽), 중요한 정치 사건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사건을 규정하고 찬양가를 부르면 역사가 바로 선다고 믿는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해 우리 역사의 수많은 심연이 묻히고 우리의 기억과 존재가 지워지고 있다는 것이다(25쪽).

    학문의 소비자주의는 앞서 다른 논자들에 의해서도 지적된 바 있지만[각주:2] 이를 ‘반지성주의’와 연관시키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은 저자가 유일하다. 특히 보수와 진보의 역사 논쟁이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한 지금, 저자의 기술은 그에 관한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우리가 지향할 바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마지막으로 비평자는 이제 독자의 입장으로 돌아가 이번 저서에서는 상세하게 기술되지 못한 ‘반지성주의’와 ‘오공(제5공화국)’에 관한 최정운 교수의 후속작들을 기대하며 본고를 마친다.

 

 

 

 

* 이 글은 아래 출처의 글을 좀 더 읽기 쉽게 윤문한 것임을 밝힙니다.

 

출처:  이택선, "(서평: 최정운의 한국인의 발견을 읽고)한국인들과 그들의 민족국가 대한민국을 거울 앞에 세우다", 『현대사광장』, 제10호(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7), 138~145쪽.

 

* 출판사 리뷰 - http://mizibooks.tistory.com/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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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브루스 커밍스, 도널드 베이커 교수 등이 주축이 된 해외 한국학 연구자들은 2020년 출간을 목표로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부를 통해 한국사전집을 저술하고 있다. 이는 일본학이나 중국학에 비해서는 30~40년 이상 늦은 것이지만 역사뿐만 아니라 문학과 철학 그리고 정치, 국제관계까지를 망라한 이들의 연구가 전 세계의 동아시아 강의나 한국 관련 강의에서 교과서 또는 참고자료로 쓰인다면 향후 한국학의 주도권은 해외 한국학계가 쥐게 될 것이다. 특히 한국 대학들의 영어강의 개설 열풍과 A&HCI급 등재저널 게재가 점차 정년보장 교수 채용의 필수요건이 되고 있는 현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우려는 결코 기우가 아닐 것이다. [본문으로]
  2. 김경만(2015),『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문학동네. 김종영(2015),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돌베개. 홍성민(2008), 『지식과 국제정치』, 한울아카데미. [본문으로]

"김주열 군의 죽음 사진을 시작으로 하여 이기붕 일가의 자살 현장 사진이 대단원을 장식한 사건으로, 국민들은 '4.19'를 기억했다. 한 편의 드라마였다."

                                                                            _최정운,『한국인의 발견』, 214쪽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은 '학원의 자유'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학생들의 시위는 곧 경북 지역과 서울 지역, 3월 중순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다 3월 중순에 마산 사태가 터지고 4월 11일 김주열 군이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되어 그 사진이 전국 일간지에 실리면서, 드디어 사태는 우리가 4.19라 부르는 '사건'의 완결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힘으로, 마치 고삐 풀린 것처럼 치닫게 됩니다. 


2.28 당시 대구의 고등학생들


정치적 사건은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그 사건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합의'를 이루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건을 '날짜'로 호명하는 식으로 타협을 합니다. 3.1(만세운동), 6.25(사변), 5.16(군사쿠데타) 5.18(광주민중항쟁) 등이 그러하고 4.19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4.19의 경우 다른 사건들과 달리 선정된 날짜가 특이합니다. 보통은 사건이 시작된 날이나 끝난 날이 선택되는 데 비해 4.19의 경우 4월 19일은 사건이 시작된 날도 끝난 날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가장 격렬한 싸움이 있었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은 날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4.19라 부르는 이 사건은 2.28 또는 3.15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지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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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서의 4.19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는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의 선거연설이 있었는데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런데 이날 대구의 고등학생들은 일요일임에도 등교 지시를 받았다. 경북고등학교는 학기말 시험, 대구고등학교는 토끼 사냥, 경북사대부고는 임시 수업, 대구상고는 졸업생 송별회, 대구여고는 무용 발표 등의 일정을 마련했고 전교생을 등교시켰다.[각주:1] 이에 항의하며 고등학생들은 오후 1시 20분경 열을 지어 학교 교문을 나와 도청으로 몰려들었고 "신성한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데모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그들을 막기 위해 출동한 경찰관 약 200명과 충돌했고, 경찰관들의 구타로 약 20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학생들의 데모는 곧 경상북도와 서울 지역으로 퍼졌고, 3월 중순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여기까지는 4.19 사건 진행의 첫 단계에 해당한다. 이 시기까지 시위 양상을 보면, 경찰의 폭력 때문에 다친 사람은 있었지만 죽은 사람은 없었다. 고등학생들의 폭력도 돌을 던지거나 구타를 가하는 정도였다. 또 시위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고등학생들이었고 그들의 구호는 "민주주의 살리자" 같은 내용이 없진 않았으나 주로 '학업'을 방해하는 "학원 내 정치적 간섭을 배격한다", "신성한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2월 28일부터 4월 내내 고등학생들은 사건의 중심에서 싸웠다.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3월 14일 서울 곳곳에서는 "대학생들은 썩었다"고 질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또 연세대학교 입구에는 "학도들이여 일어나자"는 제목의 호소문이 붙었다. 하지만 대학생들은 조용했다. 


사태는 정부통령 선거일인 3월 15일을 기점으로 '일반 시민'들이 시위에 대거 합류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자유당은 시민들을 3인조, 5인조 등으로 짝을 만들어 투표장에 투입시켜 이승만과 이기붕을 찍으라고 강요하고, 또 사전에 투표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을 찍은 투표를 넣었다가 총유권자 수보다 투표자 수가 더 많이 나오는 사태가 벌어지자 투표함을 불태워 이를 은폐하려 하는 등 노골적으로 부정선거를 진행했다. 이에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들은 오전에 일찌감치 더 이상의 투표가 의미없다고 판단하고 선거를 포기했다. 그리고 '부정선거 정지'를 요구하는 데모를 시작했다. 학생과 시민 약 1천 명으로 시작한 참여인원은 저녁쯤에는 약 1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승만 대통령 사선 확정" "부통령엔 이기붕 씨". 동아일보 1960년 3월 17일자이다.



시위 주체만 달라진 게 아니라 시위 양상도 변했다. 군중은 "부정선거를 즉시 정지하라"는 구호 등과 함께 전날 3월 14일까지와는 다르게 경찰서를 파괴하고 불태우는 등 폭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분노해 있었고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었다. 이날 경찰에 의한 발포가 있었고 사망자가 발생했다. 밤이 깊어가며 폭력이 고조되었고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마산총국 등이 시위대에 의해 파괴되었다(제1차 마산 사건).


3월 15일 북마산 파출소는 시위대의 손에 불에 타 전소되었다.



4월 초에 이르러 마산 사태는 진정되는 것 같았다. 여전히 곳곳에서 시위가 있었으나 폭발력은 가라앉는 듯했다. 그런데 4월 11일 밤 행방불명이던 김주열 군이 시체로 발견되고 전국 일간신문에 크게 실리면서 사람들의 분노가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살인범을 잡아내라" "선거 다시 하라" "희생자를 살려내라" "악독한 고문경찰관을 잡아 죽이자" "경찰은 잘못을 알고 사과하라"고 외쳤고, 폭력 행위를 불사하며 경찰서나 자유당과 유관한 건물들을 파괴했다. 경찰 또한 다시 발포를 시작했다(제2차 마산 사건). 


제2차 마산 사건 이후 며칠 동안 대대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4월 14일쯤부터 17일까지는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4월 18일에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고려대 학생들이 데모를 일으킨 것이다. 그때까지 대학생들은 쥐 죽은 듯 침묵을 지켜왔는데 이때 처음으로 거리로 나선 것이었다. 특히 사달은 이들이 데모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생겼다. 종로4가쯤에서 대학생들은 유지광이 이끄는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았고 많은 학생이 죽고 다쳤다. 이 소식에 격분한 대학생들은 4월 19일 드디어 데모대를 조직하여 대규모로 서울 시내로 몰려나왔고, 그 외에 도시 빈민, 청소년들이 가담한 가운데 진압 경찰들과 격전을 벌였다. 오후에는 경찰이 발포를 개시하였고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이날 대학생을 포함하여 1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그리고 이날 처음으로 '민주주의'가 구호로 등장했고, 바로 이날이 이 사건을 대표하는 날이 되었다. 


시위는 4월 20일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4월 25일에는 <사상계> 동인들이 주동이 된 대학교수단의 모임에 이어 '시국선언' 발표와 데모가 있었고 이때 처음으로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가라"를 외쳤다. 다음 날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틀 후 4월 28일 이기붕 일가가 자살하고 그 처참한 광경이 일간신문에 실림으로써 사태는 종결되었다. 



상식의 점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4.19에 대해 나누는 이런저런 얘기들은 결국 '학생들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로 요약된다. 그런데 2월 28일부터 4월 28일까지 이 사건의 전모를 음미해보면 "그게 과연 그런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1. 우선 '대학생'은 이 4.19라는 사건에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시위의 주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4월 18일에야 사건에 모습을 드러내고 19일에 비로소 사건의 중심에 선다. 


2. 4.19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4월 12일 마산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 이전까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최소한 중심적인 구호가 아니었다. '민주주의'가 사건의 중심 구호로 등장한 것은 '대학생'이 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이다.


3. 물론 고등학생들도 '학생'이고 그들은 가장 일찍부터 사건에 참여한 주체였다. 하지만 그들의 구호는 '학원의 자유화' 범주에서 맴돌았으며 '민주주의를 요구한 학생'은 아니었다. 고등학생들이 '민주주의'를 구호로 내걸기 시작한 것은 4월 12일 이후부터로 판단된다. 


4. 즉 4.19에서 시위 주체로 '학생'을 거론할 때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구분되며, 고등학생의 경우 '민주주의'에 집착한 주체가 아니었다. 이 말은 '우리의 상식'이 사실상 '대학생'을 4.19의 주역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5.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발생한 마산 사태의 경우 '부정선거'가 기폭제가 되어 일어났다는 점에서 참여자들의 의식 저변에 '민주주의'에 관한 판단 기준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후 그들이 보여준 '폭력'이 과연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적 폭력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확실한 건 시위대는 분노해 있었고 따라서 주체하지 못하고 폭력이 터져나왔으며 중간중간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가도 새로 '연료'가 주입되면 다시 활활 타오르며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그 '분노'와 '힘'만은 진짜였다.


아래 인용문을 보자.


“폭력은 안 된다. 부셔서는 안 된다”고 목이 터지도록 외쳤지만 (…) 이미 우체국 앞에는 한 대의 차가 불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불을 본 시위대는 흥분하여 경찰서 마당에 주차해 있는 차들을 마구 부셔대기 시작했고 일부 시위대는 현관문을 열고 경찰서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서 쏘는 총소린지 모르겠습니다만 ‘땅, 땅, 땅’ 하고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_1960년 4월 11일, 마산, 당시 21세, 1994년 인터뷰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일까? 다시 정리하면, 2월 28일부터 3월 14일까지 벌어진 전국적인 시위의 주체는 고등학생들이었고, 3월 15일 마산 사태부터는 일반 시민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4월 18일부터야 대학생이 등장한다. 평이하게 쓴 이 문장에서 '일반 시민'은 누구일까? 여기서 '시민'은 결코 지식인 부르주아들은 아니었다. 최초에는 정당에서 앞장섰지만 그들도 주체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신문팔이, 구두닦이, 넝마주이, 껌팔이 등이 포함된 '도시 빈민'이었다. 


‘양아치’란 (…) 정처 없이 부랑하는 소년, 구두닦이, 신문 파는 아이들의 불량성에 치중한 호칭이다. 3.15 마산 데모, 4.19 이래의 서울 부산 등지의 데모에 이 소년들이 단단하게 한 역할을 한 것은 우리들이 본 그대로다. 남루한 옷을 입은 소년들이 스크럼을 짜고 거리를 행진하고 트럭이며 지프차며를 징발해선 타이아가 터지도록 가득 타고 질주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리고 이들이 시위에 나선 목적이 과연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였을까? 이에 대해 그들의 구호도, 행동도 만족할 만한 답이 되지 못한다. 나아가 이들이 어떤 '결말'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어떤 '목표' 아래 단일한 '대오'를 이루었는지도 의문이다. 아마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거리를 메우고 있었으나 학생들같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산발적으로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별로 말도 없이 그저 침울한 표정으로 흘러가는 대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면 옆에서 따라서 박수도 쳐주고 하는 정도였다.

_4월 19일 서울 광화문 방면, 경찰 발포 전, 당시 명성여고 2학년 학생 일기


이들은 4월 19일에도 시위의 주된 참가자였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들은 '학생'들과 섞인 존재도 아니었다. 



정론이 만들어지다 : 우리가 아는 4.19


한편 북한은 남한에서 '인민 봉기'가 일어났다고 보도하고 있었고 일부 해외 언론도 한국의 상황이 '공산당'의 조종에 의한 게 아닌지 의심하는 보도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은 '질서'를 회복할 명분을 찾고 있었다. 이승만은 제2차 마산 사건 이후 시점에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가 있으며 어떤 난동이든 그것은 '이적 행위'라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앞서 보았듯이 정부 측의 이러한 규정이 '진실'과 다르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일단의 지식인들이 있었다. <사상계>를 중심으로 한 이들 언론계 지식인은 1950년대를 통해 쌓여온 한국인들의 좌절과 분노를 알고 있는 사람들로 이들 또한 정부와는 다른 차원에서 사태를 통제하고 '질서'를 회복할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들은 결코 '정부'와 같은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이승만 정권의 사건 규정에 반박하며 "마산 사람들의 행동은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기본적 자유권을 회복하려는 타당한 행동"이라는 전혀 다른 규정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틀대로 4.19는 완성되어 갔다. 시위 참여자들이 뚜렷한 '목표'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동안 누군가는 이를 '자유민주주의' 운동으로 조정하고 있었다. 우선 4월 18일을 기점으로 대학생이 등장한다. 대학생들은 어느 집단보다 <사상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집단이었다. 사실 앞선 시기까지 대학생에 대한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평가는 결코 좋지는 않았다. 한때 정치권을 풍미하며 역사의 적자를 자처한 4.19세대를 우리는 4.19의 주역이자 영웅으로 기억한다. 또 1960년대 한일협정 반대나 1969년 삼선 개헌 반대 등에서 보았던 것처럼 1950년대에도 그들이 사회를 '선도하고 행동하는 지식인' 역할을 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50년대에 그리고 4.19 와중에, 대학생이라 하면 '무기력' '무실력' '무가치'의 집단으로 항상 비판의 대상이었고, 고등학생들도 대학생들의 '침묵'을 비판했다. 


그러나 대학생들이 아무런 사회적 의식이 없는 존재는 아니었다. 


혁명. 피. 역사. 정치. 자유. 그런 낱말들이 그들의 자리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었으나, 그것들이 장미꽃, 저녁노을, 사랑, 모험, 등산 같은 말과 얼마나 다른지는 의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 무거운 낱말들-혁명, 피, 역사, 정치, 자유와 같은 사실의 책임을 질 만한 실제의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언어뿐이었다. '사실'에 영향을 주고, '밖'을 움직이는 정치의 언어가 아니라 제 그림자를 쫓고 제 목소리가 되돌아온 메아리를 되씹는 수인(囚人)의 언어 속에 살고 있었다. 그 속에서 그들이 몸부림치면 칠수록 현실은 더욱 멀어 보였다. 언어와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골짜기를 뛰어넘는 길은 막혀 있었다. 그 골짜기를 이을 수 있는 다리를 놓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초라한 '아이들'이었다. 

                                                                            _최인훈, <회색인> 중


최인훈의 회색인은 1963년에 쓰인 작품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대학생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다면 바로 '1958년 가을'이다. 1963년과 1958년 사이에는 4.19와 5.16이 있었다. 즉, 최인훈은 '혁명'과 '쿠데타' 이후 시기에 그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절의 기억을 회색인에 담았는데, 그 속에서 대학생들은 현실을 개탄하지만 그저 '말잔치'일 뿐이었고 무엇보다 그들 자신이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비참하고 그렇기에 "그들은 너무나 초라한 '아이들'이었다." 1958년의 그들에게는 존재감을 채울 계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4월 18일의 일을 계기로 그들은 '계기'를 확보했다. 반공청년단 정치깡패들은 데모에 참가한 고려대 학생들을 쇠파이프, 쇠갈고리, 몽동이, 벽돌 등으로 공격했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습격 사건으로 대학생들은 드디어 직접적인 '분노의 당사자'가 될 자격을 얻었다. 다음 날 419일에는 약 10만 명 규모의 대학생 데모가 서울에서 일어났고 그들은 시가행진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들은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라2월부터 고등학생들이 사용했던 구호와 함께 ' 민주주의'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구호로 사용했다.


이리하여 2월 28일부터 4월 말까지, 장차 한국 현대사에서 최초의 '혁명'으로 기록될 사건이 하나의 '규정'을 얻었다. '대학생들이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일으킨 의거이자 혁명'이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것은 이미 4월 19일부터,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4.19를 정의하는 '정론'이 되었다.


그렇다면 일단의 지식인이 급조한 '민주주의'라는 대의와 '대학생'들이 주체로 자리매김하면서 어떤 다른 '이유'와 '주체'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4.19는 왜 일어난 것일까? '일반 시민', 아니 '빈민'들의 분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은 어디서 왔고 4.19 이후 어디로 갔을까? 또 하나 생기는 질문은, 그렇다면 우리가 현대사를 통해 존경심을 아끼지 않던 '대학생 영웅전'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     *     *


이상의 이야기는 최정운 교수의 『한국인의 발견』과 그 제자인 시모카와 아야나의 석사학위 논문 「4.19 해석의 재해석: 『사상계』지식인이 만들어낸 4·19 민주혁명」에 의존한 글입니다. 결국 위 이야기를 제대로 마무리하려면 '한국인의 시대정신'을 건드려야 하고 실로 적잖은 지면이 필요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한국인의 발견』을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책에 관한 좀 더 큰 소개는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mizibooks.tistory.com/126


한국인의 발견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힘의 정체를 찾아서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688쪽 | 25,000원

 

 

만약 우리가 역사를 다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삶일까?


해방과 전쟁 후 혼돈과 죽음이 편재하던 세상에서

오늘날 우리가 있기까지

문학으로 본 한국인 굴기의 대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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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재오 <한국학생운동사 1945~1979년> (파라북스, 2011), 147쪽. [본문으로]


 

만약 우리가 역사를 다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삶일까?

 


 

주요 국가들의 근현대 역사에는 신화들이 존재한다. 구체제를 무너뜨린 프랑스에도

 

사회주의 국가를 창건한 러시아에도

 

자유 세계를 승리로 이끈 미국에도 신화가 존재한다.

 

 

우리 현대사에도 이와 같은 신화들이 존재한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화'들은 만들어지고, 왜곡되고, 감추어지는 과정이 있었다.  

 

독일 철학자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경험을 통해 정신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해방 후 한국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만들어왔고, 한국인만의 시대정신을 구축해왔을까?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1950년대의 한국인들은 죽음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1950년대 예술가들은 소설 문학과 예술을 통해 좀비 상태에 있던 한국인들을 부활시키려 노력했다.

 

문학인들은 극도의 리얼리즘 충격 요법을 통해 한국인들을 깨우고 생명을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부활한 한국인들은 욕망했고, 욕망의 좌절을 겪으면서 분노했고, 분노는 혁명을 예비했다.

 

4.19는 좌절한 한국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대학생들을 앞세워 혁명의 테마를 '민주주의'로 치환시켜 버렸다.

 

 

 5.16 군사 쿠데타는 4.19가 실패하여 나타난 반동이 아니었다. 4.19와 5.16은 1950년대가 각기 다르게 배태한 쌍생아, 즉 2개의 혁명이었다.

 

혁명을 경험한 한국인들은 1960년대에 시간과 역사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개성과 욕망이 분출했다. 한국인들은 가벼운 군장으로 욕망을 향해 잠시의 휴식도 거부하고 달려나갔다.

 

1970년대는 분열과 연합의 시대였다. 한국인들은 세대, 성(性), 지방, 계급 등 다양한 이름의 정체성으로 분화되었다.

 

"우리는 너희들 씨를 말리러 왔다!" 1980년 5월 광주는 '오공'이라는 악마의 폭력에 파괴된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

 

가공할 폭력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절대공동체를 경험한 현대사의 분수령이었다.

 

1980년대를 통치한 '오공'은 폭력과 금력에 매료된 괴물이었다.

 

'오공'은 물질주의와 쾌락이라는 대체물을 대량으로 쏟아냈다.

 

한편으로, 1980년대는 투쟁의 시대였다.

 

해외에서 마구잡이로 수입한 이념의 르네상스로 한국인들은 극도의 의식의 혼란 속에서 정체성 위기를 겪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인들은 고유한 정체성 만들기와 민족 공동체의 복원 작업에 착수한다. 이 시대에 한국인, 한국 사회는 진정한 근대로 진입하게 된다.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한국인의 발견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힘의 정체를 찾아서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688쪽 | 25,000원

  

 

만약 우리가 역사를 다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삶일까?


해방과 전쟁 후 혼돈과 죽음이 편재하던 세상에서

오늘날 우리가 있기까지

문학으로 본 한국인 굴기의 대서사 

 

 

지은이 최정운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거쳐 시카고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랫동안 서양 정치사상을 연구하면서 정작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한국 근현대 사상사의 부재를 깨닫고 이를 발굴, 정립하는 연구에 매진해왔다. 전작 『한국인의 탄생』과 이 책 『한국인의 발견』은 그러한 지적 여정의 결과물이다.

지은 책으로 『한국인의 탄생』(2013년) 『오월의 사회과학』(1999년), 『지식국가론』(1992년)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푸코의 눈: 현상학 비판과 고고학의 출발」, 「새로운 부르주아의 탄생: 로빈슨 크루소의 고독의 근대사상적 의미」, 「개념사: 서구 권력의 도입」, 「국제정치에 있어서 문화의 의미」, 「권력의 반지: 권력담론으로서의 바그너의 반지 오페라」 등이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란 작품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애초에 이런 질문을 감당할 만한 작품조차 거의 없다는 점에서 「소나기」의 인지도는 그만큼 독보적입니다. 앞의 질문은 「소나기」가 그만큼 널리 알려져 있고 또 사랑받는 작품이기에 나올 수 있는 물음일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소나기」의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도시 출신의 한 소녀와 시골 소년이 만나 짧은 시간 동안 애틋한 감정을 나누는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럼 「소나기」와 관련해서 다른 질문을 하나 내볼까 합니다. 「소나기」는 언제 발표된 작품일까요? 난이도가 높은 질문으로 생각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아마 대다수가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시대적 배경 또는 작가가 언제 글을 썼는지 알 필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소나기」에서 시대적 배경은 어떤 이유에선지 생략되어 있습니다. 즉 「소나기」는 시대적 배경을 기억할 이유도 없고 기억하기도 어려운 그런 작품이었고, 따라서 작품이 언제 발표됐는지 관심을 둘 이유도 별로 없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덕분에 「소나기」는 오늘날까지 ‘풋사랑’ 이야기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질문을 던졌으니 답을 말해야겠죠. 「소나기」는 1953년 5월, 한국전쟁이 진행 중인 시기에 발표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전쟁 통에, 전쟁이 끝날 무렵에 쓰였습니다. 황순원은 지난 약 3년간의 전쟁을 뒤로 하고 한가로워 보이는 시골을 배경으로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흔히 「소나기」는 순수문학의 대표작으로 거론됩니다. 혹 황순원은 전쟁에 지친 나머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고, 그런 심정이 「소나기」로 나타난 것일까?

 

그런데 황순원은 같은 해 1953년에 『카인의 후예』도 발표했는데, 겨우 몇 달 간격을 두고 발표된 이 작품을 보면 황순원이 현실을 도피 또는 외면하고 있었다고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카인의 후예』는 「소나기」와 달리 시대적 배경을 뚜렷이 하고 있고 작품 분위기도 사뭇 다릅니다. 이 작품은 이념적 계급 투쟁이 불꽃 튀기 시작하는 시기 북한의 어느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직한 일을 다루고 있고, 인물들은 형제나 이웃으로 존재하던 관계에서 서서히 적대와 투쟁의 관계로 변해갑니다. 결국 인물들은 ‘살의’를 품게 되고, 그 가운데 주인공은 가족 같았던 이웃을 상대로 살인을 시도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카인의 후예』는 「소나기」와 달리 살벌한 분위기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황순원이 세상을 등지고 순수문학에 골몰했다는 전제는 매력을 상실합니다. 혹 「소나기」의 시골 배경이 그의 펜대 끝에서 건설된 인위적인 장막이라면 어떨까요? 만약 「소나기」의 시골 배경이 산 너머 현재진행형의 일을 감추고 있었다면? 작가가 원고지 위에 언뜻 평화로운 공간을 구축하고 있었는지 몰라도 작가의 등 뒤에선 전쟁의 참상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황순원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생깁니다.

 

아무래도 더 본격적인 이야기는  최정운 교수(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가 쓴 『한국인의 발견』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최정운 교수는 「소나기」라는 문학 작품이 ‘역사 현실’과 만나면 어떻게 이해되는지 이야기합니다. 그에 따르면, 1953년에 나온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소녀는 그간 한반도 땅에서 '개화'를 이끌어온 도시 부르주아를 상징하고, 소녀의 죽음은 그들이 그 시점에 이르러 일상의 시련인 '소나기'조차 이기지 못하고 나약해진 모습, 그런 그들이 현실에 맞서 비극을 이루기는커녕 존재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황순원은 왜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이 또한 따져볼 문제겠죠. 최정운 교수의 안내로 다시 한 번 작품을 따라가보겠습니다.




보통 전쟁이 끝난 후의 시대를 낭만적으로 들리는 프랑스어 ‘아프레게르(apres guerre)’라고 불러 독특한 의미를 담는다. 평화가 다시 찾아온 시대지만 사람들이 전화(戰禍)로 가난해진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은 흩어지고 모든 전통적 사회 윤리가 도전받고 사회 질서가 흔들리는 상태를 말한다. 전쟁이란 사회의 근간을 흔들고 세상을 위태롭게 만든다. 대한민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가족이 파괴되어 수많은 고아들이 생기고, 이산가족들은 삶의 희망과 의미를 잃었다. ‘아프레게르’라는 말에 내포된 일반적인 상황은 한국의 전후(戰後)에도 해당이 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한국전쟁이 독특한 전쟁, ‘전쟁이라 부를 수 없는 전쟁’이었기에 ‘아프레게르’ 또한 독특했다. (...)

 

황순원의 「소나기」—1953년

 

전쟁이 끝나갈 무렵 중견작가 황순원(1915~2000년)은 두 편의 명작을 써냈다. 단편 「소나기」와 장편 『카인의 후예』이다. 우선 「소나기」는 한국 청소년들이 교육과정에서 꼭 읽어야 할 필독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으로, 이름 없는 한 소녀와 소년이 한적한 농촌 마을에서 처음 만나 친밀한 관계를 엮어가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소녀는 ‘윤 초시의 증손녀’로 흰 얼굴의 예쁜 소녀였다. 그들은 처음 대하는 사이였는데 소녀가 먼저 “이 바보!”라고 놀리며 장난을 걸어 서서히 얼굴이 검은 농촌 소년과 가까워진다. 수줍은 소년은 검은 얼굴이 부끄러워 달아나다 넘어져 코피가 흐르기도 하고, 소녀가 넘어져 무릎에 피를 흘리자 소년이 입술로 빨아주기도 했다. 소년은 송아지를 타는 모습을 소녀에게 자랑스레 보여주어 자존심을 세우고 인정받기도 했다. 



그리고 소년과 소녀가 다정스레 들판을 걷는데 소나기가 온다. 소나기를 맞자 소녀는 입술이 파래지며 몸을 떨었고 그 모습을 본 소년은 쇠락한 원두막으로 소녀를 데려가 비를 피하게 했다. 소년은 소녀의 어깨를 저고리로 싸주었다. 비가 더 세어지자 소년은 소녀를 수수밭으로 데려가서 수숫단을 쌓아 비를 가려주었다. 소녀는 소년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좁은 곳에 둘이 쪼그려 앉자, “비에 젖은 소년의 몸 내음새가 확 코에 끼얹어졌다. 그러나 소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도리어 소년의 몸 기운으로 해서 떨리던 몸이 저이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비가 그치자 그들은 각자 돌아갔다. 그 후로 소녀는 며칠 보이지 않는다. 다시 본 소녀는 아픈 기색이 뚜렷했다. 소녀와 소년의 대화 사이로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년은 소녀네가 이사해 오기 전에 벌써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윤초시 손자가 사업에 실패해가지고 고향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이번에는 고향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게 된 모양이었다.

_황순원, 「소나기」, 18쪽


그리고 소년은 윤 초시네가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집이 ‘악상’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어서 소년의 귀에 다음과 같은 말이 들린다.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두 변변히 못 써 봤다더군. 지금 같애서는 윤초시네두 대가 끊긴 셈이지. ……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입던 옷을 꼭 그대루 입혀서 묻어달라구…….”

_황순원, 「소나기」, 20쪽


소녀는 ‘죽었다’고 알려졌을 뿐이다.


문제는 그간 이 소설이 천편일률적으로 학생들의 교과서에서나 참고서에서나, 대학에서나 한국문학사 책에서나 한결같이 고집스럽게 소년과 소녀의 풋사랑을 묘사한 한국 최고의 순수문학 작품으로 평가받아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문학 작품의 의미를 해석해낼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우리 국문학계의 부끄러운 지적 수준을 드러낸다. 그저 아름다운 문장으로 쓴 어린 남녀 간의 민망스런 이야기라는 해석을 반복해온 것이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쓰인 이 이야기의 중요한 의미는 그 얼굴 흰 소녀의 죽음, 소나기라는 일상의 시련도 견디지 못하고 스러져간 죽음에 있고 그래서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이 소녀는 이 시대를 견디지 못하고 쇠락하여 멸망해간 도시 부르주아의 마지막 자손이었다. 소녀는 처음부터 자신이 먼저 소년에게 다가갔고, 죽을 때도 ‘잔망스러움’으로 동네 어른들을 당혹케 함으로써 자신의 진취적 계급의 정체를 드러내고 지켰다. 그 소녀에게 작가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것은 그 소녀의 계급적 정체만으로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소녀의 죽음은 아무런 ‘소리’도 ‘분노’도 없는 너무나 조용한 사그라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약도 ‘변변히 써보지 못한’ 조용하고 쓸쓸한 소녀의 죽음과 그 죽음이 상징하는 윤 초시네 집안 전체의 쇠락과 몰락과 단손(斷孫), 그들의 사라짐을 조용히 애도한다. 결국 소녀의 죽음은 이 땅을 그간 ‘개화’로, ‘계몽’으로 이끌어온 도시 부르주아가 일상적 소나기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나약해지고 비극도 이루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이야기였다.




위 부분은 『한국인의 발견』, 96쪽, 99-102쪽을 인용한 것입니다. 최정운 교수는 『한국인의 발견』에서 1945년 해방 직후 이태준의  「해방 전후: 한 작가의 수기」 부터 1999년 공지영의 「고등어」에 이르기까지 주요 현대 소설을 순례하며, 각 작품에 새로 해석과 역사적 좌표를 부여합니다. 황순원의 「소나기」는 그 가운데 아주 특정한 1953년 시기를 다루기 위해 찾은 작품입니다. 황순원과 그의 작품들은 물론 한국 문학사의 중요한 작품들에는 예외 없이 역사와 사상으로의 길이 나 있고, 최정운 교수는 『한국인의 발견』에서 차근차근 그 길로 독자들을 안내합니다. 


책에 관한 좀 더 큰 소개는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mizibooks.tistory.com/126


한국인의 발견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힘의 정체를 찾아서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688쪽 | 25,000원

 

 

만약 우리가 역사를 다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삶일까?


해방과 전쟁 후 혼돈과 죽음이 편재하던 세상에서

오늘날 우리가 있기까지

문학으로 본 한국인 굴기의 대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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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강석훈 2021.01.15 22:29

    광고성 글이라는 것이 아쉽네요.

    모든열매가 딸기랑 같은 철에 열린다고 알고있는 사람은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 겁니다.

 


 

반지성주의에 대하여

 

반지성주의는 민중의 언어가 될 수 없다. 민중은 이성을 거부해서 얻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민중이 이성을 거부하게끔 함으로써 권력자들이 모든 것을 얻는다. 민중이 반지성주의를 자신들의 언어로 받아들이면 다음과 같은 일이 생긴다.

 

첫째, 중요한 문제와 사소한 문제를 구분하지 못한다.

둘째, 세속적인 문제의 근거로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느낌을 제시한다.

셋째, 합의된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 전혀 엉뚱하고 부적절한 수단을 채택하는데도 그것이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넷째, 갈등의 당사자 중 약자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다섯째, 고통과 곤경을 낳는 구조적인 부정의가 자연의 질서처럼 불변의 것으로 여긴다.

여섯째, 무비판적인 복종과 무조건적인 근본주의 중 어느 하나에 가까워진다.

 

결국 이성의 거부는 언제나 민중이 자신들의 삶의 가치를 훼손하는 결과로 귀착된다.

 

민중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는 삼척동자도 다 알 만큼 분명하고 손쉬운 것이 아니다. 고통은 그것을 겪는 사람에게 자명하게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개인이 느끼는 고통은 자명하지만 의사소통되고 공론화된 고통은 자명하지 않다. 언제나 고통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부당하고 부정확할 수도 있고, 정당하고 정확할 수도 있다. 고통을 해석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그것을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만들어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전혀 다른 원인에서 발생한 것으로 왜곡하고 엉뚱한 해결책을 끌어들이려는 이데올로기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작동한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의 빈곤과 차별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 생긴 인과응보로 사소화한다. 양육비를 부모들이 사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사회 구조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여성이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왜곡한다.

 

어떤 중요한 문제도, 지성(intelligence)의 틀을 통해 해석하고 해결책의 규범적 정당성과 사실적 효과성을 공적으로 논증하며 합리적인 수단을 궁리하지 않고서는 다루어질 수 없다. 이런 단계와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관으로 바로 해답이 도출된다는 생각은, 전제들이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곧바로 답에 도달했다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즐겨 착각하는 사람들이 민중의 친구임을 자처하면서 반지성주의를 퍼뜨린다.

 

반지성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요지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탐구 활동은 반지성주의자 자신이 탐구 없이 갖게 된 확신을 뒷받침하고 추종하며 확산하는 일에 종속되어야 한다. 반지성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우연히 지니게 된 앎 없는 확신( doxa)에 결론이 부합하면 그 탐구 과정을 칭찬하고, 일부분이라도 자신들의 확신에 어긋나면 비난한다. 그들에게 탐구는 탐구가 아니다. 탐구는 공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리를 알아내는 체계적인 활동이다. 반지성주의자들에게 탐구란, 그들이 사적으로 갖게 된 확신을 강조하는 탄창, 우리 편에 또 한 명이 붙었다고 선전할 수 있는 전단지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검토되지 않은 신념과 가정이 주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둘째, 반지성주의자들은 본인이 즉시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개념과 논증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지식인들이 ‘음모’를 가지고 인위적으로 만든 쓰레기 같은 것이라고 여긴다. 그들이 수학이나 자연과학에 대해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법학, 철학, 사회학, 경제학에 대해서는 이런 주장을 줄기차게 한다. 그들은 자신이 배운 것이 아니면 일단 거부 반응을 보인다. 이런 모습은 그들이 사회경제적 질서와 관련된 문제들을 인간의 탐구 영역에서 분리하여 비지성적인 문제로 다루고 싶어 함을 보여준다. 또한 반지성주의자들은 논의에 쓰이는 개념을 설명해달라고 요구하는 대신 아예 그 개념을 쓰지 말라고 하고, 논증의 도구를 모조리 배척한다. 그들은 개념과 논증의 도구들은 효율과 간명함을 위해 기호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쓸모없는 것을 쓸모있게 보이도록 하는 음모가 존재한다고 시나리오를 쓴다.

 

만약 <반지성주의 철학 논고>라는 책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명제로 요약될 것이다.

 

1. 세계는 내가 아는 것들의 총체다.

   1.1 세계는 내가 아는 것들의 총체이지, 다른 이들이 아는 것들과는 관계없다.

2. 사실이란 내가 있다고 믿는 사태들의 존립이다.

3. 내가 확신하는 것들을 지지해 주는 것이 사고이다.

4. 내 확신을 지지해 주는 것이 참인 명제이다.

5. 명제는 내 확신에 부합하는가를 요건으로 하는 진리함수이다.

6. 사람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의 주요 명제들을 패러디한 것이다)

 

(...중략...)

 

거듭 강조하지만 무지와 어리석음은 같지 않다.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각자 여러 분야에 무지하지만, 우리 모두가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때로는 깨닫지 못한 채 부분적으로는 어리석을 수도 있지만, 우리 모두가 총체적으로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부분적인 쟁점에 대하여 일시적으로 어리석음에 빠지더라도, 어리석음 자체를 기본적인 태도로 삼고, 어리석음을 근거로 들며, 어리석음을 오히려 찬양하지 않는다면 반지성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다른 부분에서 얻은 이해를 근거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교정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반지성주의자들은 단순히 무지하거나 부분적으로 어리석은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반지성주의는 어리석음을 자랑스러운 것, 찬양해야 하는 것, 지적 힘을 가진 것으로 내세운다. 반지성주의자들에게는 어리석음이 거짓 신념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며 오히려 진리를 보증하는 기반이다.

 

- 이한, 『삶은 왜 의미 있는가』, 282~289쪽

 

 


 

 

정치적 책임을 이행하는 일이 즐거울 수 있을까?

 

정치적 책임을 다함으로써 사회의 질서를 개선하는 일은 가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는 일을 저어하곤 한다. 우리가 주저하고 저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타당한 것일까?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책임을 수행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반대와 비난에 부닥친다는 것이다. 타인의 반대와 비난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세계의 불의를 교정하는 일이 아무런 장애 없이 매끄럽게 이루어지는 세계는 정말 멋진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러한 세계가 아니다. 현실의 장애를 이유로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지 않는 것은 실존을 부정하는 자기 탐닉이다. 세계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므로 세계의 불의와 부당함, 고통을 줄이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사고방식이다. 애초에 이 전제는 증명된 적 없다. 세계가 한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갈 리는 만무하다. 설사 그 사람이 명석하고 훌륭한 대안을 가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의 바람은 운동을 하지 않고 복부 비만이 해결되리라고 기대하는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정치적 반대와 장애는 우리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도전할 대상일 뿐, 도전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두 번째 이유는 냉소와 절망이다. 지성으로 사회를 관찰하는 사람은 큰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좌절스러운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진다.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의 토대가 허물어지고, 그 중요성이 경시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은 투표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 다수결로 승자가 나왔다는 사실로 환원되어 버린다. 투표 과정에서 사회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책이 무엇인지 투명하고 진지하게 토론하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국가 기관이 선거에서 여론을 조작하고 선동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사람들이 직접 투표한 이상,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민주주의의 의미가 이미 많이 사라졌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란 경제 성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권위주의적인 지배자를 뽑는 일로 흔히 여겨지고 있다. 사회의 정당성 또한 경제 성장에 좌우된다. 그 결과 사람들의 부당한 고통을 줄이고 각자가 더 풍요로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 즉 자유의 조건을 형성한다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대한 목표가 소흘히 다루어진다.

 

그 결과 ‘정치’와 ‘민생’을 전혀 별개로 파악하는 용법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 정치는 정치인들의 파벌 싸움이나 여야 간의 무익한 대립 같은 의미로 축소 왜곡되고, 민생이란 민주적인 정치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곧바로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전에서 ‘민생’은 구성원들의 삶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구성원들은 각자 다른 신념과 선에 대한 관점, 사회적 위치를 갖고 있으며, 구성원들의 삶과 관련하여 국가가 추구해야 하는 목적이나 동원하는 정책 수단의 규범적 타당성과 효과에 관해서도 상이한 생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주장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조건은 서로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실은 민생이란 민주적 정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러나 민생과 정치를 서로 별개의, 오히려 충돌하는 개념으로 대립시킬 때 민생이란 경제 성장의 극대화를 주도할 권위주의적 지배자가 지정하는 정책적 해결책으로 환원된다. 그러므로, ‘민생 문제’ 자체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일은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이 배제를 통해 광범위한 영역에서 참정권, 자유권, 사회권으로 구성된 시민의 지위가 반복적으로 침해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양심적인 시민에게 냉소와 절망을 안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그 일로 이룰 수 있는 결과의 간극이 심각한 무력감을 낳는 것이다. 스스로의 삶이 점차 노예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노예에게나 어울릴 법한 삶을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여기게 된다. 민주주의 같은 집단의 문제를 다루는 일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치부하고, 자신은 사회를 품평하고 비평하는 소비자의 자세에 만족한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안위를 살피기에도 바쁘지 않은가. 아이리스 영은 이런 생각이 잘못임을 지적한다.

 

잘못이 일어나는 대부분의 사회적 상황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만한 이유들이 있었다. 고립되어 있는 개인이 기관들, 강력한 관료들, 국가 간의 상호작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정치적 책임은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집단 행동을 함께 할 것을 권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비교적 드물게 일어나지만 일단 일어나기만 하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국면 전환의 힘에 종종 크게 놀라곤 한다. (아이리스 영,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구조는 인간 행위의 집합적 결과이며, 우리 모두는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상호작용으로 인한 변화는 국면 전환의 불꽃 같은 순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꾸준히 진행되는 것이다. 기저의 변화가 축적될 때만 겉으로 보이는 뚜렷한 변화도 발생할 수 있다.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에 의해서도 변화가 축적된다. 이 변화는 토대를 침식하고 퇴락시키는 변화이다. 이 변화가 토대에서 발생하면, 국면 전환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즉 당연하게 여겼던 공식적 질서 아래 보장되었던 시민의 지위가 한순간에 붕괴하는 것이다. 냉소와 절망은 토대를 변화시키는 상호작용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확산할 잠재력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의 몫을 수행할 이유를 제공한다.

 

- 이한, 『삶은 왜 의미 있는가』, 241~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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