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계 분쟁

국제 분쟁 전문가 김재명의 전선 리포트 (최신 개정판)

김재명 지음 | 586쪽 | 22,800원

 

세계는 왜 싸우는가?

국제 분쟁 전문가 김재명이 탐사한 세계 15개 분쟁 지역 

PLO, 하마스 등 혁명가, 반군 지도자들 직접 인터뷰

전쟁, 내전, 테러리즘의 이면을 분석하는 풍부한 이론적 배경

 

[오늘의 세계 분쟁]은 국제 분쟁 전문가로 활동해 온 김재명 박사가 지난 20년 동안 세계 15개 분쟁 지역을 취재한 현장 리포트이다. 이 책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 내전, 테러의 현장을 충실히 소개하며, 분쟁의 원인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분쟁 지역들은 모두 저자가 현장 취재한 곳으로 중동, 발칸반도, 서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으로 지구촌의 거의 모든 주요 분쟁 지역을 망라하고 있다. 책에 수록된 150장의 사진은 저자가 직접 촬영한 것이며 분쟁 현장 사람들의 깊은 고통과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또한 국제 분쟁과 관련된 풍부한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냉엄한 국제 정치 현실에 관한 깊은 통찰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이 책은 저자가 분쟁 지역을 취재하며 본 전쟁의 상처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담은 기록이며, 약자와 소수자, 못 가진 자들이 탐욕스러운 강자들과 벌이는 힘겨운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는 지지와 연대의 표시이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피해 현장(2009년). 어린 아이가 무너진 집터에서 인형을 바라보고 있다. 

 


세계 분쟁 지역 15곳을 취재한 전선 리포트

인류의 역사는 전쟁사, 곧 피의 역사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국가와 집단이 갖가지 이유로 서로를 죽이고 피를 흘려왔다. 미국과 소련이 첨예하게 대치했던 동서 냉전이 막을 내린 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구촌 사람들은 ‘유혈과 전란의 시대’를 겪어왔다. 그리고 잔혹한 전쟁 범죄 행위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인종 청소(보스니아, 르완다, 동티모르, 코소보), 조직적 강간(보스니아, 코소보)과 손목 절단(시에라리온) 등의 전쟁범죄들은 우리 인류 문명사의 수치로 기록될 것이다.

[오늘의 세계 분쟁]은 국제 분쟁 전문가로 활동해 온 김재명이 이러한 분쟁과 내전을 주제로 쓴 분석적인 해설서이자 ‘현장 리포트’이다. 또한 지구촌에서 터지는 전쟁과 테러가 무엇인지, 누가 왜 유혈 투쟁을 벌이는지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전쟁학 교과서’이기도 하다. 지난 2015년 개정판에서 시리아 내전 및 이라크전쟁과 결부된 이슬람국가(IS)에 대한 최신 자료를 반영하였으며, 리비아 카다피 정권의 몰락 당시 국제 사회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보호 책임 의무(R2P)에 관한 내용에 추가하였다. 이번 2021년 개정2판에서는 시리아 내전 이후의 상황과 이란의 최근 동향을 비롯해 그동안 바뀐 내용들을 새로 고치면서, 전체적으로 책의 내용을 최신 자료로 바꾸었다.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하마스의 창립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과의 인터뷰. 야신은 2004년 봄 이스라엘 군 헬기에서 발사된 미사일에 사망했다.


이 책에는 분쟁 지역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만난 전쟁 피해자, 난민, 정치 지도자, 병사, 국제기구 요원들과의 귀중한 인터뷰들이 담겨있다. 특히 팔레스타인의 ‘살아 있는 전설’ 야세르 아라파트와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의 정신적인 지주인 셰이크 아메드 야신, 시에라리온 내전의 손목 절단 테러 전술로 악명이 높은 독재자 포데이 산코, 체 게바라와 함께 남미 5개 국 여행길에 올랐던 알베르토 그라나도 등 외국 기자들도 만나기 힘든 여러 혁명가와 반군 지도자, 정치 지도자를 인터뷰한 내용은 이 책만이 갖고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세계 분쟁지역 15곳에 대한 세밀한 지도와 정보를 담은 점, 저자가 직접 찍은 분쟁 지역의 생생한 전선 사진들을 실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시사 사진 전문학교로 유명한 뉴욕 ICP(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에서 2년간 포토저널리즘을 공부했다). 또한 저자의 풍부한 이론적 배경, 고통 받는 민중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느껴지는 묘사와 호흡이 짧고 긴박감이 넘치는 전개 과정은 국제 정치학을 연구하는 학계와 정치 외교계는 물론, 전쟁과 평화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들에게 현장과 이론이 어우러진 노작을 만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세르비아계 방화로 파괴된 코소보 자코바 시를 순찰하는 국제 평화유지군


인간은 왜 전쟁을 하는가

이 책은 모두 3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와 제3부는 내전 또는 국제전에 관한 일반 이론과 해설, 전망을 다룬 전쟁론과 평화론이고, 제2부는 15곳의 분쟁 지역을 찾아다닌 내용을 정리한 현장 취재기이다. 

제1부 전쟁과 인간 그리고 국가
제1부에서는 우리 인간이 전쟁을 벌이는 원인을 짚어보면서, 특히 동서 냉전이 막을 내린 뒤 지구촌을 덮은 인종 청소와 대량 학살의 참극이 왜 일어났는지를 살펴본다. 미국 국제정치학계의 거목으로 꼽히는 케네스 왈츠는 전쟁이 우리 인간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뜻에서 “전쟁에서 누가 이겼느냐고 묻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지진에서 누가 이겼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인 로버트 리버는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에 관한 설명들은 지금까지 일어난 전쟁 수만큼이나 다양하다.”라고 했다. 저자는 이 같은 학자들의 전쟁 연구 성과들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면서, 역사 이래 우리 인류가 벌여온 전쟁들, 특히 1990년대 이후 벌어진 전쟁들의 특성을 분석한다.

제2부 분쟁 지역을 찾아서
제2부는 저자가 20년 동안 취재해 온 지구촌 분쟁지역 가운데 15개 지역을 골라 오늘의 시점에서 새롭게 쓴 글이다. 중동 지역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남아시아의 이란, 아프가니스탄, 카슈미르, 동티모르, 캄보디아, 유럽의 화약고라 일컬어지는 보스니아와 코소보,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남북아메리카의 볼리비아, 쿠바 관타나모, 미국이 저자가 다루는 지역이다. 저자는 현지 취재 과정에서 때로는 위험에 부딪치면서도, 해당 분쟁지역의 정치인, 지식인, 반군 지도자들과 민초들을 만나 그들의 주의주장, 분노와 좌절감, 앞날의 희망 등을 옮겨 놓았다. 또한 지구촌 여러 분쟁지역을 취재하면서 전쟁이 우리 인간의 의식을 얼마만큼 황폐하게 하는가를 목격했다. 언어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담을 맞대고 살던 이웃을 죽이는 잔혹의 현장, 특히 코소보에서는 곳곳에 널려 있는 대량 학살 현장을 돌아보면서 ‘인간이 과연 선한 동물인가’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밝힌다.

시에라리온 반란군 혁명연합전선(RUF)에 두 팔이 잘린 아기. RUF 지도자 포데이 산코는 "손이 없다면 투표도 못할 것이다(No hands, no more votes)"라며 사람들의 양손을 도끼로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3부 21세기의 전쟁
제3부에서는 9・11테러 뒤 주요 시사용어로 떠오른 ‘테러와의 전쟁’과 ‘정의의 전쟁’을 다루면서, 미국이 벌여온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 성격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또한 자살 폭탄 테러가 지닌 복합적인 성격과 자폭 테러범들의 의식 세계를 깊이 있게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21세기 이후, 국지적인 내전과 자원을 둘러싼 이권 전쟁들, 강대국들의 군비증강과 핵무기의 확산 경향, R2P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하며 지구촌 평화에 대해 전망해본다. 


좌절과 분노의 땅에서 전하는 21세기 희망 읽기

저자는 여러 분쟁지역을 취재하면서 팔다리를 잃은 어린이들을 비롯한 숱한 전쟁 피해자를 만났다. 전쟁의 처참한 모습들을 목격한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저자는 전쟁으로 이익을 챙기는 ‘어둠의 세력'들을 고발한다. 허울 좋은 명분과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워 전쟁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어둠의 세력들은 현실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평화보다는 전쟁을 바란다. 저자는 “영구 평화는 무덤 속에서나 가능하다.”라고 말한 독일 철학자 칸트의 말을 빌려, “그렇다면 차라리 평화를 기원하기보다 아득한 절망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소수자와 못 가진 자, 약자의 정의가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피력한다. 
또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지구촌의 평화를 가로막는 국제 정치의 냉혹한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지구상의 또 하나의 분쟁 지역인 한반도에서도 평화와 화해의 물결이 일기를 기원한다.




2001년 동티모르 현지 취재 때 유엔평화유지군 장갑차 앞에 선 저자

지은이 김재명 

저자 김재명은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경향신문과 중앙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해방 정국(1945~1948년)에서 극좌 극우를 비판하면서 민족 분단을 막으려 했던 중도파를 집중 취재 보도했다. 한반도 분단 극복에 대한 관심은 국제 분쟁 쪽으로 넓혀졌고, 뉴욕시립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과정을 마친 후 국민대학교에서 「정의의 전쟁 이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프레시안』의 기획위원(국제 분쟁 전문 기자)이며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울러 저자는 지난 20년 동안 국제 분쟁 전문가로서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 반도, 중동 지역, 동남아시아, 서아프리카, 중남미 등 세계 15개 분쟁 현장을 취재, 보도해왔다. 
저서로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2003년),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2005년), 『20세기 전쟁 영화가 남긴 메시지』(2006년), 『석유, 욕망의 샘』(2007년),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2016년), 『시리아 전쟁』(2018년),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2019년 개정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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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자 2021.04.08 10:44

    항상 좋은 책들 잘 읽고 있습니다. 저희 집 서재에 미지북스에서 출간된 책들이 다수랍니다. 특히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님의 저서들과 황금 족쇄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양서들 많이 내어주시길 바랍니다.

미 해병대 이야기

가장 먼저 도착해 가장 나중에 떠나는 세계 최강의 전투부대

한종수, 김상순 지음 | 592쪽 | 22,000원

 

 

 

 

왜 미 해병대가 최강의 전투부대인가?

태평양의 정글에서 한반도의 동토, 이라크 사막에 이르기까지

극한의 환경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른 미 해병대의 살아 있는 역사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국가로 부상하는 동안 그 선두에는 늘 미 해병대가 있었다. 미국 독립전쟁 시기에 ‘턴태번’이라는 술집에서 창설된 미 해병대는 해상 육박전을 전문으로 하는 소규모 부대로 출발했다. 19세기에는 중남미와 지중해, 아시아 등지에서 미국의 첨병으로 활약했고(조선을 침략하기도 했다: 신미양요), 1차대전에서는 유럽 전장에서 독일군과 싸웠다. 그러나 ‘진정한’ 해병대로 거듭나는 계기는 2차대전, 정확히는 태평양전쟁이었다. 해병대는 일본군을 상대로 과달카날에서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태평양을 종횡무진하며 맹활약했는데, 이 과정에서 과감한 적전(敵前)상륙작전을 감행하는 정예부대로서 성장했다. 곧이어 벌어진 한국전쟁에서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의 주역이 되었으며, 혹한의 장진호에서 처절한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베트남전쟁과 1, 2차 걸프전쟁에 참전하여 정글과 사막 등의 극한의 환경에서도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세계 최강의 전투부대로 우뚝 섰으며, 20세기 후반부터는 전 세계 어디에나 빠르게 출동할 수 있는 신속 전개 부대로 변신하여 미국 군사전략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 책은 미 해병대의 살아 있는 역사를 통해 그들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끝없이 변신하여 최강의 전투부대가 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본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 제5해병연대가 적전상륙 후 사다리를 이용해 방파제를 넘고 있다. 앞장서 방파제를 넘고 있는 이가 로페즈 중위다.

 


왜 해병대인가?

지구의 표면은 육지와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바다는 육지보다 훨씬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비행기가 발명되어 하늘길이 열리기 전까지, 바다는 육지와 육지 사이를 연결하는 인간의 유일한 통로였다. 그리고 전쟁으로 점철된 인류 문명사에서 95퍼센트 이상의 시간 동안 해군은 인류의 거의 유일한 전략 군종이었다. 대부분의 제국들은 바다로 나아가 패권을 잡았고, 해군은 그들의 무기였다. 오늘날 패권 국가인 미국도 마찬가지로 바다로 나아가 패권을 잡았다. 하지만 미국은 다른 제국들과는 달리 해군과 더불어 ‘해병대’라는 특수한 군종을 패권의 투사와 유지의 강력한 수단으로 삼았다.

‘산전수전山戰水戰’이라는 말은 흔히 경험이 많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이 성어를 한자 뜻 그대로 풀면 산과 물에서 싸웠다는 뜻이다. 세계를 주름잡는 강대국들에게는 수많은 정예부대가 있지만 아마 미 해병대만큼 이 성어에 어울리는 부대도 없을 것이다. 제1해병사단을 위시한 미 해병대는 해군 경찰과 해상 육박전을 전문으로 하는 소규모 부대에서 시작하여, 2차대전을 거치면서 과감한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정예부대로 성장했다. 20세기 후반부터는 전 세계 어디에나 빠르게 출동할 수 있는 신속 전개 부대로 변신하여 미국 군사전략의 최전선에 서 있다.

1차대전에서 독일군과 싸우는 미 해병대. 프랑스 파리로 진격해오는 독일군을 벨로숲에서 격퇴했다.  

미 해병대는 승리와 패배의 역사 속에서 한편으로는 전통을 지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늘 새롭게 혁신해왔다. 이런 계속적인 변신이 가능한 비결을 찾자면 바다와 육지를 통틀어 모든 지역에서 작전이 가능한 해병대의 양서류적 특성을 가장 먼저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물과 육지 모두에서 살 수 있다 해도 자칫 잘못하면 양쪽 어디에서도 발을 붙일 수 없게 된다. 해병대는 바로 이런 양서류적 존재로서 해군도 육군도 아닌 탓에 계속해서 존재를 부정당하는 위기를 맞아왔다. 하지만 특유의 강한 훈련과 독특한 전우애로 이룬 실적으로 해병대는 그 존재 의의를 스스로 지켜왔다. 대검에서 전술핵에 이르기까지 육해공에 걸친 다양한 장비를 보유한 이 정예부대는 ‘미 제국주의의 선봉’이라는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수호자로서 그리고 세계 최강의 전투부대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킬 것이다.

 

미 해병대의 기원

미국 해병대는 미국 독립전쟁 시기에 창설되었다.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턴태번’이라는 술집에서 창설 모임을 갖고 최초의 대원들을 모집했다. 새뮤얼 니컬러스 대위가 초대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는데, 그는 정규 군인이 아니라 턴태번의 주인 혹은 한 대장간의 주인이었다고 한다. 독립전쟁 시기 해병대의 주요 임무는 함내 치안과 함상 백병전이었다. 그 때문에 대원들은 적군과 육박전을 벌이다 목을 뜯기는 경우가 많아 목 보호를 위해 높고 두툼한 가죽 띠를 옷깃처럼 목에 둘렀다. 이는 평상시에 머리를 꼿꼿이 세워주는 효과가 있었고,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이 ‘레더넥leatherneck’은 자연스레 해병대의 상징이 되었다.

해병대는 독립전쟁이 끝나자 해체되었지만 미국은 주변 국가들과 끊임없이 분쟁을 겪으면서 신속대응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결국 1798년 다시 부활한 해병대는 당시 지중해 연안에서 활동하던 이슬람 국가의 해적들이 미국 상선을 약탈하자 근거지인 트리폴리 항구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1804년). 트리폴리 전투는 해병대가 제한된 임무에서 벗어나 국제 분쟁에 대응해 즉각 출격하는 신속대응군의 역할을 맡은 첫 전투였다.

1804년 트리폴리 해전. 신속대응군으로서 미 해병대의 첫번째 역외 작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 해병대는 한국을 ‘침략한’ 역사와 ‘구한’ 역사를 모두 갖고 있다. 먼저 1871년 6월에 군함 5척으로 강화도를 침공한 미군의 선봉에 해병대가 있었다(신미양요). 그들은 후장식 소총과 신형 야포를 활용한 압도적인 화력과 전술로 덕진진을 함락하고 광성보에 육박했다. 조선군은 저항했으나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패배했다. 미군은 조선 조정의 완강한 대화 거부로 통상조약 체결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식수 부족과 기후 악화로 고생하다가 7월에 철수했다. 그리고 정확히 79년 후, 바로 이 바다에서 그들의 후배들은 수백 배 규모의 상륙작전을 펼쳤다. 한때 침략자였던 미 해병대는 훗날 한국전쟁에서는 말 그대로 ‘한국을 구한’ 주역이었으며,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라는 거대한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태평양전쟁과 상륙작전 부대로의 성장

미 해병대는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주로 허약한 중남미 국가들이나 이미 기운 지 오래된 노대국 스페인, 그리고 조선과 중국을 상대로 어린아이 팔 비틀기식의 힘자랑을 했다. 하지만 2차대전을 거치면서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최강의 전투부대로 성장했다.

사실 20세기 초반까지 상륙작전은 그저 보트를 타고 해안으로 이동하는 것이 거의 전부로, 조직화된 상륙작전은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륙전은 지상전과 공통점이 있긴 해도, 기본적으로 병력이 모함에 승선하여 상당한 거리를 항해한다는 점, 상륙 직전에 작은 배로 갈아타야 한다는 점, 경장비만으로 적지에 상륙한다는 점에서 지상전과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이런 인식 아래 해병대는 1922년부터 독자적인 상륙작전 지침을 만들기 시작했고, 해군과의 협동작전이 가능하도록 조직을 개편했으며, 그에 기반해 수륙양용장갑차(LVT)와 각종 상륙함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차대전, 정확하게는 태평양전쟁에서 진짜 해병대로 거듭나는 계기를 맞는다.

과달카날에 상륙하는 미 제1해병사단. 태평양전쟁에서 해병대는 과감한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전투부대로 성장했다.

해병대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과달카날에서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태평양을 종횡무진하며 맹활약했다. 특히 치열했던 과달카날 전투는 태평양전쟁의 승패를 가름한 중요한 싸움이었다. 당시 일본은 진정한 위협은 중국과 소련 등 대륙으로부터 올 것이라고 생각했고 미국이 태평양을 가로질러 일본 본토로 상륙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과달카날 전투는 일본의 많은 병력과 자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고 이때부터 전쟁의 주도권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뒤이은 펠렐리우와 오키나와 등에서 벌어진 지옥 같은 격전을 통해 경험을 축적한 미 해병대는 적전상륙작전이라는 특유의 전법을 완성해갔다. 전쟁 중에 일본을 초토화시킨 B29 폭격기들은 미 해병대가 피로 확보한 이 섬들과 그곳의 비행장에서 날아오른 것이었다.

미 해병대는 태평양의 주요 섬들을 하나하나 함락하며 일본 본토로 육박했다. 사진은 초토화된 오키나와 와나 계곡에서 작전 중인 해병대원

 

한반도 동토에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

역사상 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단대호單隊號(단위부대 부호)가 붙은 부대 하나의 전투가 역사를 바꾼 예는 흔하지 않다. 카이사르의 제10군단, 갈리폴리 전투 당시 케말의 제19사단, 4차 중동전쟁 때 골란고원을 사수한 이스라엘군 제7기갑여단 정도가 그 드문 예에 속한다. 그런데 제1해병사단은 두 번이나 이런 위업을 달성했으니, 바로 과달카날 전투와 장진호 전투였다. 더구나 극단적인 기후 아래서의 전투, 즉 열대의 전투와 혹한의 전투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특별하다.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제1해병사단은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킨 더글라스 맥아더는 상륙작전 중독자였다(해병대원들은 맥아더를 ‘대피호 더그’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맥아더가 필리핀 주둔 미군 사령관일 때 참호 깊숙이 숨어 있다가 대통령의 명령이 오자 기다렸다는 듯 부하들을 버리고 호주로 탈출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면으로 보아도 불필요한 작전명령, 즉 서울 북쪽에 있던 제10군단을 빼내어 바다로 한반도를 한 바퀴 돌아 원산에 상륙시켜 함경도로 진군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해병대가 원산에 상륙했을 때는 이미 한국군에 의해 원산이 함락된 상태였다. 제10군단장 아몬드는 맥아더가 낙하산 격으로 꽂은 인물이었는데, 인천상륙작전 당시 수륙양용장갑차(LVT)를 보며 “바다에서도 뜰 수 있는가”라고 물을 정도로 무능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잘못된 명령을 내림으로써 다른 차원에서 해병대의 생존을 위협했다.

미 해병대는 장진호를 거쳐 압록강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미 대규모 중국군이 한반도에 진입해 반격을 준비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북쪽으로의 진격이 아니라 중국군의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공격’하여 흥남으로 퇴각해야 했다. 개마고원의 험한 지형과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의 추위에서 중국군의 거센 공세로 미군은 궤멸될 위기에 처했으나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의 노련한 지휘와 해병대원들의 용전으로 철수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제1해병사단은 이 과정에서 비록 병력의 절반을 잃었지만, 중국 쑹스룬의 제9병단이 남하하는 것을 저지하여 전체 전선이 급속도로 붕괴되는 것을 막았다.

장진호 전투에서 해병대는 살인적인 추위와 중국군의 대공세 속에서 궤멸 위기에 처했으나, 스미스 사단장의 지휘 하에 흥남으로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베트남전쟁의 패배와 걸프만에서의 승리

승승장구하던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처음 패전의 쓴맛을 보는데, 이때도 해병대는 전쟁의 난맥상을 온전히 감당한 부대로서 베트남 땅에 첫발을 디딘 부대이자 마지막으로 떠난 부대가 되었다. 베트남전쟁은 눈에 띄는 큰 전투가 적었다뿐이지 엄청나게 치열한 전쟁이었다. 해병대는 연인원 80만 명이 참전했는데 사상자 수가 6만 7,000명이 넘었다. 사상률이 8.4퍼센트로 육군의 2.7배나 되었다. 훈련과 장비가 양호한 북베트남 정규군을 주로 상대해 더 큰 피해를 무릅써야 했기 때문이다. 해병대 전사자는 한국전쟁보다 4배나 더 많았다. 정치인들의 오판으로 시작된 베트남전쟁은 해병대 창설 이후 최악의 전쟁이 되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해병대원들의 희생을 강요하며 막을 내렸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후 미 해병대는 타라와급 강습상륙함과 같은 웬만한 나라의 항공모함보다 큰 상륙함을 보유하게 되었다. 신형 장갑차와 전차, 신형 헬리콥터 등 다양한 장비들을 도입했다.

이오지마급의 2배가 넘는 크기를 자랑하는 타라와급 강습상륙함. 웬만한 나라의 항공모함보다도 크다.

해병대의 명예회복 기회는 걸프전쟁 때 찾아왔다. 제1해병사단은 1차 걸프전쟁의 대승을 이끌었고, 2차 걸프전쟁(이라크전쟁)에서도 주력부대로 활약했다. 해병대는 러시아군이 체첸 그로즈니에서 큰 피해를 입은 것과는 달리 어렵지 않게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이라크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40년 전 베트남에서 그 대가를 치렀던 것처럼 정치인들의 과오로 전후 이라크는 혼란에 빠져들었고, 해병대의 전승도 빛이 바랬다.

이라크에서 전투 중인 미 해병대

 

 

오늘날의 미 해병대

오늘날 미 해병대는 사실상 전 세계를 작전 범위로 하고 있다. 현재 미 해병대 전체 병력의 규모는 17만 5,000명으로,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강습상륙함을 중심으로 강력한 전력을 유지하면서 세계 최강 미군의 선봉이자 명령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신속대응군으로서 그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제1해병사단은 제1해병원정군의 핵심으로 펜들턴 기지(캘리포니아)에 사령부를 두고 태평양 동부를 관할하며, 중동에도 상당한 병력을 파견해놓고 있다. 오키나와에 본부를 둔 제3해병원정군은 제3해병사단을 중심으로 서부 태평양과 아시아를 담당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투입될 부대이자 대중국 포위망의 핵심 부대이기도 하다. 캠프 레준(노스캐롤라이나)에 사령부를 둔 제2해병원정군은 ‘대서양 해병대’라고 불리며 지구의 서반구를 담당하고 있다.

걸프전쟁 이후 주로 중동에서 활동해온 미 해병대가 앞으로 그들의 ‘진정한 무대’인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더욱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최근 미국은 남중국해 도서 영유권을 둘러싼 중국과 주변국의 마찰 확대, 러시아 극동군의 잦은 일본 영공 침범 등 역내 긴장 고조를 고려하여 해병대의 재배치를 결정했다. 그런 가운데 인도, 호주와의 협력 강화도 눈에 띄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미 해병대와 일본 자위대의 협력 강화를 가장 주목할 수밖에 없다. 양국은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상륙 훈련을 해오고 있다. 어찌 됐든 우리는 미 해병대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또 가져야 한다. 싫건 좋건 우리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으니 말이다.

 

 


지은이 한종수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롯데관광과 한국토지공사(현 LH), 세종시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근무했다. 어릴 적부터 거의 모든 분야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중에서도 전쟁사에 가장 매료되었다. 오랫동안 전쟁사 연구에 매진해 2015년 『2차대전의 마이너리그』를 펴냈고, 이 책은 2020년 국방부 진중문고에 선정되었다. 『미 해병대 이야기』는 그 오랜 연구의 두 번째 결과물이다.

지은 책으로 대표작 『강남의 탄생』(2016)을 비롯하여 『라면의 재발견』(2021), 『서서울에 가면 우리는』(2018), 『제갈량과 한니발, 두 남자 이야기』(2013), 『세상을 만든 여행자들』(2010)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영락제』(2017), 『환관 이야기』(2015), 『제국은 어떻게 망가지는가』(2012) 등이 있다.

 

지은이 김상순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를 졸업했다. 2005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여, 지금은 국방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공저자 한종수와 함께 인천과 서울 등에서 한국전쟁 관련 유적들을 탐사하여 이 책에 역사적 정확성과 생생함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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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국가 건설의 시대 1945~1950

이택선 지음 | 352쪽 | 18,000원



국가 건설에 필요한 모든 자원이 부족했던
신생 대한민국이 붕괴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대한민국은 ‘취약국가’로 태어났다. 대한민국 건설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자원들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초창기 한국 정부는 군대와 경찰 같은 안보 자원뿐만 아니라 재정과 인력 측면에서도 심각한 부족에 허덕였다. 국가는 부족한 물적 자원의 대체물로 ‘민족주의’라는 이념 자원을 수시로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분단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북한이라는 실질적인 군사적 위험, 국내에 발생한 광범위한 저항과 반란의 위협 앞에 민족주의 이념은 수축되고 왜곡되는 과정을 겪었다. 생존의 기로에서 국가는 부일 세력과 우익 단체를 국가 건설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킴으로써 안보 위기를 넘겼으나, 이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폭력과 유혈, 국가범죄로 인해 정치적 정통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공화국은 정치적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 토지개혁과 의무교육 등 사회 개혁을 추진했고, 그 결과 국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귀속감이 증대했다. 이를 지켜본 중도파들이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국가 건설에 대거 참여해 정치적인 정당성이 증가하는 가운데, 적어도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신생 대한민국의 정치․사회적 안정성이 상당 부분 확보되었다. 

촉박한 국가 수립 일정, 부족한 예산 및 자원 속에서 초라하게 탄생했지만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대국이자 세계 7위의 군사 강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 신생 대한민국은 어떻게 그토록 부족한 자원과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오늘날에 수없이 볼 수 있는 파탄국가(failed nation)들처럼 붕괴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을까? 





국가 형성의 관점에서 새롭게 본 해방 전후사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은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국가 형성(nation building)의 관점에서 객관적, 실증적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저자인 이택선 박사(서울대 외교학과)는 ‘근대국가는 합법적 폭력의 독점에서 출발한다’는 막스 베버의 관점에 따라 핵심 국가기구인 경찰과 군대, 재정 및 조세 기구의 형성 과정을 기술하면서 신생 대한민국의 탄생과 국제정치적 배경을 살폈다. 

특히 2000년대 초반 아프리카와 중동,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국가 형성 과정을 연구한 랜드 연구소의 표준 국가 모델과 비교 검토한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다. 21세기의 국가 건설 사례들과 비교해보아도 턱없이 부족한 자원을 가졌던 대한민국이 지난한 역사 속에서 성공적인 발전을 이루었는데, 이는 한편으로 모범적이면서도 대단히 이례적인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신생 대한민국은 어떻게 그토록 부족한 자원과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오늘날에 수없이 볼 수 있는 파탄국가(failed nation)들처럼 붕괴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을까? 또한 취약국가에서 출발하여 숱한 위기를 넘기는 과정에서 노출된 취약성이 어떻게 최근까지 우리 사회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을까?


과대 성장 국가가 아니라 취약국가로 태어난 대한민국

한국 현대사를 해석하는 관점 중 하나인 ‘수정주의’는 한국이 처음부터 과대 성장 국가로 출발했다고 말해왔다. 과대 성장 국가론은 브루스 커밍스 등의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이 제시한 것으로, 한국에서는 서구와 달리 시민사회가 형성되기도 전에 근대적인 관료 체계와 경찰력을 가진 국가기관들이 비대하게 성장하여 사회를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이 책의 저자 이택선 박사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한국은 처음부터 물적/인적 자원이 부족하여 국가기구가 허약한 취약국가로 출발했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한국은 과대 성장 국가가 아니라 모든 자원이 부족한 취약국가였다.

 

▲ 이 책은 "근대국가는 합법적 폭력의 독점에서 출발한다"는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 한국의 건국을 재구성하였다.


미국은 처음부터 대한민국 ‘국가 건설’ 계획이 없었다

해방 후 한반도 이남을 점령한 미국은 애당초 한국인들의 국가 건설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국은 물적 자원이 부족해 미국의 원조에 철저히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매우 불충분했다. 미국의 대외 전략에서 한반도가 차지하는 중요도가 유럽에 비해 한참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대외 경제원조 비율은 유럽과 일본의 1/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는 미국이 유럽에서의 공산주의 봉쇄에 더 치중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47년 7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기 전까지만 해도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한반도에서 품위 있게 철수하는 데 집중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미국은 한국의 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 해방 후 1년 동안 남한 경제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인데도 미군정은 예산과 자원 부족을 들어 장기적인 경제 건설 계획을 추진하지 않았다. 민생과 직결된 문제에만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했고 소극적인 관리와 유지에 급급했다. 이러한 사정은 미군정 기간에 도입된 4억 3,400만 달러어치의 원조 물자 가운데 식료품이 전체의 39%를 차지한 반면, 건축자재와 철도자재는 1.7%와 3%에 불과했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미군정은 공무원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봉급마저 지불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공무원들이 상납과 뇌물에 의존하고 원조 물자를 밀거래하는 등 부패 문제가 구조적이고 고질적인 문제가 되는 데 빌미를 제공했다.

반면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원하에 신속하게 국가 건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소련은 해방 직후부터 한반도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공산주의국가를 수립하려는 명확한 목표하에 북한을 점령했고, 소련 국적을 가진 한국인들을 행정․사법 기구와 군대, 경찰, 교육계 등의 요직에 파견했으며, 북한의 산업을 재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소련과의 협상이 결렬되고, 무엇보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는 것이 거의 확실해지고 나서야 그 목표가 한반도에서의 조속한 철수에서 단독정부 수립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그러나 미국의 관점에서 한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7번째로 중요한 국가에 불과했다.

 

자원 부족으로 인해 민족주의 이념 자원에 의존한 미군정

국가란 영토 내에서 폭력을 독점하여 국방과 치안을 확립하고 관료제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베버의 관점에서 볼 때, 미군정 시기와 초창기 대한민국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자원을 확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미군정은 물적 자원의 절대적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이념 자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바로 ‘민족주의’였다. 미군정도 처음에는 경찰과 군대에 친일 부역자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항일 투쟁과 민족주의적 대의명분을 가진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고위 관리직에 임명하여 이념 자원을 활용하고자 했다. 또한 이승만과 같은 우파 정치인을 주로 지원하기보다는 김구, 김규식 등 임시정부 인사들과 중도파들을 포괄하는 연합노선을 시도했다. 청년단체도 극우 반공 단체 대신 임정 출신들을 중심으로 출범해 정통성을 지니고 있던 조선민족청년단 같은 단체를 공식 후원했다. 그러나 인적 자원의 부족 문제를 극복할 수 없었다. 근대국가의 핵심 기능인 합법적 폭력을 독점하고 관료제 행정을 담당할 인력의 부족 문제가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이다.

▲ 왼쪽부터 김규식, 김구, 지청천, 이승만. 

미군정과 초기 대한민국은 자원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활용하고자 했다.

 

부일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가 국가 건설에 참여하다

1946년 4월부터 미군 철수가 본격화되자 치안 분야에서 상당한 공백이 발생했다. 이를 틈타 공산 세력들이 국가 전복을 시도했지만 미군정은 인적 자원의 부족으로 치안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한국은 식량 문제가 심각했는데 해외에서 귀국한 사람들과 월남민의 수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군정은 농민들로부터 시장가격의 20~30%로 식량을 매입하다가 나중에는 강제적으로 곡물을 수집하게 된다. 경찰의 부패와 금품 강요도 일상적인 일이었다. 1945년 9월 기준 한국 경찰의 봉급은 3달러에 불과했는데, 이는 북한 위관급 장교들이 받은 260달러(1,300루블)에 비해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식량 부족과 만연한 부패는 민중의 불만을 야기했다. 결과적으로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1일 대구 항쟁이 발발했다. 대구는 실업률이 32%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역이었고, 당시 “제2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 세력이 강성한 도시였다.

미군정은 국가에 대항하는 폭력 세력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없어 결국 우파 청년단체들의 협력을 용인했다. 우익 청년단체들이 국가 건설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부일 관료들도 국가기구에 계속 존속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일제 치하에서 행정 경험을 쌓은 한국인을 최대한 동원하는 방식으로 경찰력을 증강했다. 그리하여 1948년에 이르면 2~3년 전에 비해 경찰 규모가 2배 이상 증가하게 된다. 한마디로 미군정은 일제 관료제도의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아 엉성한 채로나마 국가기구의 틀을 갖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경찰의 금품 강요, 공무원들의 부패, 우익 청년단원들이 휘두른 폭력 때문에 국민들의 원성이 커지면서 국가와 국민 사이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광복군 중심의 군대에서 부일 세력의 군대로

1947년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자 경찰뿐만 아니라 군대도 규모가 커져 7개월 만에 3배 증가했다.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정부 출범 초기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절대적 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군대에서 최고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임시정부와 광복군 출신 인사들이 국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복군 출신의 군 지도부는 이데올로기적 정통성은 갖췄을지 모르나 현대적 전술과 지식을 구비하지 못했고 무능했다.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 출신의 군인들이 다시 기용되었다. 국가안보 위기가 발생하자 일제강점기의 전력을 이유로 스스로 근신하고 있었던 50~60대의 일본군 출신자들이 1947년 말부터 전격 입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1948년부터 제주도와 여수, 순천, 옹진 지구 등 최전선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이와 함께 20~30대의 젊은 일본군 출신 장교들이 미국이 요구하는 현대전의 기준을 빠르게 수용하면서 군에서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 대한민국 초창기에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광복군 출신들이 군대 내 고위직에 임명되었으나 여수-순천 사건을 전후로 한 안보 공백을 기점으로 일본군 출신들에게 빠르게 밀려났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국가 건설과 안보 위기

1947년 미국과 소련의 협상 결렬로 갑작스럽게 국가 건설이 결정되었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인민의 열망으로 제헌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는 분단 고착화를 염려하여 국가 건설에 참여하지 않았다. 중도파들은 향후 토지개혁이 완료되고 제1공화국이 안정화되는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국가 건설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한편 1948년 4월에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제주도에서 내전을 방불케 하는 폭력 사태가 일어나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뒤이어 10월에 일어난 여수-순천 사건으로 신생 대한민국은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군 내 좌익 세력이 제주도에 대한 진압을 거부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여수-순천 사건은 정부 출범 2개월 만에 발생한 좌익의 본격적인 봉기였으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같은 막대한 국가 폭력이 행해졌고 전체 희생자가 1만여 명에 달했다. 여수-순천 사건 과정에서 한 미군 기자가 여수 교외의 오막살이집에서 한 여성과 나눈 대화는 일대 치안이 붕괴되고 적자생존의 논리가 지배한 당시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기자가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묻자 그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당신들 편이지요. 당신들이 제일 강하니까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국가안보의 문제가 최우선 과제로 등장하고 사회 분위기가 급변했다. 안보적 위험에서 초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극단적 조치들이 계속 시행되었는데,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것이다. 또한 반민특위가 해산하게 되었으며, 경찰과 군대 규모가 급증했고, 국가안보의 명목으로 부일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낯선 제헌헌법의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들

대한민국 초기 국가 건설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부족했던 자원들을 대신하여 이념 자원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즉 임시정부의 유산을 계승하고자 하는 대중들의 열망을 충족시켜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높이려고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제헌헌법의 제정이다. 특히 제헌헌법이 가진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들은 자유시장경제와 현격한 거리가 있어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상당히 낯선 측면이 있다. 이는 임시정부가 표방했던 삼균주의를 계승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토지의 국유화, 정치․경제 및 교육에서의 평등을 강조한 임시정부의 삼균주의는 국유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설정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거리를 두었다. 제헌헌법 역시 중요 자원과 중요 기업에 관해 국유․국영 제도를 원칙으로 했으며 토지개혁과 의무무상교육을 주창했다. 이렇게 자본주의경제 질서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권리들이 헌법상으로 시도될 수 있었던 것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 문제와 함께 임시정부의 헌법을 계승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정치 현실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상당 부분 자리 잡은 현 시점에서는 모순되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물적․경제적 기반이 취약해 국가가 직접 생산과 소비의 주체로 활동하면서 일제가 남기고 간 기업들을 운영 관리해야 했던 당시의 현실에서는 매우 적절한 조항들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궁극적으로 부르주아 양성을 통한 자본주의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므로 1954년경에 이르면 제헌헌법에 채택된 통제경제적 헌법 질서는 사문화되었고, 개정을 통해 자유주의적 경제 질서의 헌법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토지개혁, 국가 건설의 정점

대통령 이승만은 토지개혁을 추진해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정통성을 획득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정부는 국민의 요구를 국가 건설 과정에 반영하고, 부일 관료들을 계속 기용한 탓에 훼손되었던 민족주의적 이념 자원을 어느 정도 보완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토지개혁은 수천 년 동안 농민의 자유를 구속하고 군림하던 지주가 사라지고 국가 구성원 모두가 근대국가의 일원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계기였다. 1949년 6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기초로 한 농지개혁 법안에 따라 농민들이 농지를 분배받았다. 반면 지주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것이 주어졌는데, 이마저도 전쟁으로 인한 물가 폭등과 손실 때문에 거의 사라졌다. 일제강점기의 지주들은 대부분 산업자본가로 전환하지 못하고 지위가 하락했으며, 상대적으로 이들과 관련이 적은 소상인, 소기업가와 같은 신흥 유산계층이 한국 자본가계급의 원형 집단으로 등장했다.

▲ 토지개혁으로 국가에 대한 국민의 귀속감이 증대되었다. 무엇보다 수천 년간 농민 위에 군림하던 지주계급이 해체되고 한국 사회는 '자작농-자유인'의 사회로 바뀌었다. 


토지개혁 성공의 이면에는 조봉암의 공로가 컸다. 물론 공산당 출신인 조봉암을 발탁한 것은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토지개혁으로 한국민주당의 경제 기반 약화, 농민의 지지 확보, 좌파의 공세 차단이라는 1석 3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토지개혁으로 토지 소유의 균등성이 달성되었는데 한국이 소농의 나라로 변신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51년 전체 경작지의 96%가 자작농 소유로 바뀌면서 기존 지주계급은 몰락했다. 봉건적인 “지주-소작인” 사회가 “자작농-자유인”의 사회로 바뀌는 혁명적인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토지개혁으로 자신 소유의 농지를 경작할 수 있게 된 농민들은 한동안 이승만의 주요 지지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북한 공산군의 선동에 현혹되지 않고 대한민국을 굳건하게 지지했다. 

▲ 토지개혁 법안과 조봉암


중도파의 참여로 안정화되는 신생 공화국

토지개혁과 의무교육제도의 실시로 국가에 대한 국민의 귀속감이 증대하자, 다수의 임시정부 출신 인사들과 중도파 인사들이 점차 대한민국의 건국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자 했다. 제헌의회 선거를 거부했던 다수의 중도파들도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부분 무소속으로 입후보해 당선되었다. 특히 삼균주의의 아버지인 조소앙은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안재홍, 조소앙, 원세훈, 윤기섭, 오하영 등의 중도파 당선자들이 중도 무소속 세력을 이끌고 새로운 정치를 펼칠 것을 다짐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대중이 현실적인 생존을 위해 국가안보의 과제에 집중하는 대한민국을 지지하면서도 민족주의의 이상인 남북통일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제헌국회 말기부터 민주국민당이 발의한 내각제 개헌안에 시달리고 있던 이승만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최대 정파로 급부상한 중도파 세력과 제휴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중도파와 여당인 대한국민당, 야당인 민주국민당 간의 세력 균등을 이승만이 중재하는 모양새가 연출되었다.

제1공화국이 점차 안정화되어감에 따라 국가 내부의 자생적인 발전 역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기획처장 이순탁과 기획처의 중도파 관료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기획처는 경제기획원의 전신에 해당하는 기구로, 당시의 기획처는 생산과 분배를 계획경제체제로 운영하려는 중간파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순탁은 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는 당면 과제를 해결할 수 없고 종합적인 국가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는 토지의 점진 불하를 주장하며 연평균 수확량의 200%를 매년 20%씩 10년에 걸쳐 상환하는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농지개혁 법안을 마련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는 정부 수립 1년 만에 흑자재정을 기록할 수 있도록 예산을 편성했는데, 이를 높이 평가한 미국은 대규모 원조를 계속 제공했다.

1950년 즈음에는 예산이 균형을 이루고 세입이 증가했으며 인플레이션이 통제되고 환율이 안정되는 가운데 경제 전망이 바람직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리하여 미군이 완전 철수하면 쉽게 무너질 것 같았던 제1공화국은 미국의 지원이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는데도 경제의 부분적 회복과 균형재정을 이루며 한계 속에서도 점차 국가성을 획득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중도파의 국가 건설 참여로 획득한 정치적 정통성과 균형재정 달성, 허약한 신생국가를 살리기 위한 국민들의 헌신 등 대부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피땀눈물로 이룬 국가 건설의 역사

대한민국은 취약국가로 태어났다. 대한민국 건설의 역사는 그 출발선에서부터 안보, 물자, 인력 등 모든 차원에서 자원이 심대하게 부족했다. 따라서 한국의 국가 건설 과정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민족주의라는 이념 자원을 수시로 동원한 역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생 공화국은 금세 절체절명의 안보 위기를 겪음으로 인해 민족을 배신했던 부일 관리들을 기용하고 폭력적인 우익 청년단체를 준국가기구로 활용하여 이념 자원을 훼손하는 질곡의 길을 걸어야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념 자원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민족주의적 대의명분과 정치적 정통성은 높으나 국가 관료로서의 능력은 떨어지던 인물들이 국가 건설 과정 초기에 기용되면서 국정 운영에 차질과 비능률이 발생했고, 전문가들이 이들을 대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모됐다. 그 이후로도 반공과 반일이라는 이념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이용되었고, 건국 초기부터 노정된 취약성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에 깊은 분열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붕괴하지 않고 살아남아 상당한 수준의 번영을 이루었다. 촉박한 국가 수립 일정, 부족한 예산 및 자원 속에서 초라하게 탄생했지만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대국이자 세계 7위의 군사 강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 이 책은 취약국가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을 객관적/실증적으로 재구성한 최초의 시도이자, 그 시대를 산 건설자들에 대한 헌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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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이택선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대학원에서 해방 전후의 한국 정치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지타운대학교 외교학대학원 아시아연구소 방문연구원을 거쳐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연구원과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며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 연구위원,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와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문명 전환기 권력의 이동에 따른 한국의 국가 건설과 외교이며, 한국과 동아시아 역사의 보편성을 중시하면서도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한 역사적 설명과 독자적 이론 개발에 힘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문화협력체 추진방안 연구』(공저, 2020), 『한국 근대 공화주의자 6인의 리더십』(공저, 2019), 『북한과 국제정치』(공저, 2018), 『한국의 민주주의와 한미관계』(공저, 2014), 『지식과 국제정치』(공저, 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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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70여 년 동안 이어진 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왜 끝나지 않는가

김재명 지음 | 미지북스 | 548쪽 | 22,000원


국내 최고의 국제분쟁 전문가가 현장에서 분석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혈분쟁의 진실


1차 대전을 폭발시켰고, 1990년대 내내 내전으로 몸살을 앓았던 발칸반도가 ‘20세기의 화약고’였다면, 중동은 ‘21세기의 화약고’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중동 지역은 물론이고 지구촌의 평화를 흔들어대는 뇌관이나 다름없다. 지금도 그곳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강공책, 그에 맞선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를 비롯한 무장 대원과 일반 시민들의 죽음을 무릅쓴 격렬한 저항으로 폭력의 악순환이 그치지 않고 있다. 이 책『눈물의 땅, 팔레스타인』은 수십 년간 이어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현실을 소개하고, 중동의 역사와 정치를 개괄함으로써 뿌리 깊은 분쟁의 원인을 분석한다.

지은이 김재명 박사는 20년 가까이 세계 각지의 분쟁 현장을 취재한 독보적인 국제분쟁 전문가로, 2000년 이래 지금까지 10여 차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다녀왔다. 지은이는 특히 서방 언론인들도 취재하기 어려웠던 전설적인 팔레스타인 지도자들, 아라파트(PLO)나 야신(하마스)과도 여러 차례 인터뷰했다. 이번 개정 증보판에서는 100여 장의 생생한 현장 사진과 함께, 미국 트럼프 행정부 이후 달라진 중동 정세의 내용이 추가되었다.


눈물과 통곡의 땅, 팔레스타인

포연이 가시지 않은 처참하게 무너진 집과 사원, 이전의 자유조차 박탈해버린 8미터 높이의 분리 장벽, 집도 없이 난민촌을 떠도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앞에 호화롭게 지어진 유대인 정착촌, 이스라엘의 포격으로 부모를 잃고 아이를 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눈물, 가족의 생계를 위한 희망이 잿더미로 변한 올리브 밭 앞에서 무릎 꿇은 농부, 2등 시민으로 온갖 불평등을 감수하며 희망 없이 살아가는 아랍계 청년들…….

이것이 10여 차례 팔레스타인 현장을 찾은 지은이의 눈에 비친 이른바 ‘테러’와 그에 대한 ‘보복’의 현장, 팔레스타인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테러’라고 몰아붙여왔다. 왜 그들은 테러를 일으키는가? 7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일어나는 피의 분쟁은 왜 끝나지 않는가? 지은이는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분석하기 위한 이런 물음에 앞서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잔인한 파괴의 폐허에 흐르는 눈물과 통곡, 이곳 팔레스타인의 대지라고 말한다.

 

분쟁의 뿌리, 시오니즘

2000년 전 로마제국에 의해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유대인들이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이 신생국가는 19세기 말 유대인 민족주의 운동(시오니즘)의 결실이었다. 시온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고대 예루살렘의 한 언덕 이름이다. 시오니즘이란 그 옛날 예루살렘에 있던 그 언덕을 상징적인 목표지로 삼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것이다. 시오니즘 운동의 창시자인 테오도어 헤르츨은 19세기 오스트리아 언론인으로, 그는 유대인 랍비처럼 종교적으로 엄격하기는커녕 매우 세속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헤르츨은 1894년 드레퓌스 사건(유대인 프랑스 장교를 증거도 없이 독일 스파이로 몰아세운 사건)으로 반유대 정서가 퍼지는 것을 보고 유대인 독립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헤르츨이 시작한 국가 건설 운동은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1차 시오니스트 대회로 이어졌고, 거기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한다는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 유럽에서 배를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유대인 이주자들 


팔레스타인은 무인지대가 아니었다

시오니스트들이 가고자 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은 무인지대가 아니었다.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팔레스타인에는 70~80만 명의 아랍인들과 5~6만 명의 토착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만약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해온다면 땅을 두고 필연적으로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1차 대전 당시 영국은 시오니즘 운동을 재정적으로 돕던 금융계 거물인 로스차일드에게 전비 지원을 대가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했다. 이것이 영국 외무부 장관 아서 제임스 벨푸어의 이름을 딴 벨푸어 선언(1917년)이다. 그러나 영국은 또 한편으로 오스만제국과 싸우기 위해 아랍인들의 지원을 필요로 했고, 그들에게도 독립국가를 약속했다. 이것이 영국 고위 관리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칼리프 간에 맺어진 맥마흔-후세인 협정(1915년)이다. 이 두 약속은 서로 충돌했다. 결과적으로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다른 아랍 국가들은 독립했지만, 유대인 국가가 들어선 곳의 아랍인들만은 집과 땅을 잃고 강제로 내쫓겼다.

 

하나의 땅, 두 개의 국가

유대인 이주의 물결이 지속되면서, 1940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수는 45만 명에 이르렀다. 아랍인들은 유대인에 편향적인 영국의 정책에 대항해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 무렵 유대인들은 아랍 원주민들과 총격전을 벌이곤 했는데,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에 나서자 영국은 이를 지원해줬다. 이때 형성된 유대인 민병대 조직들이 ‘하가나’와 ‘이르군’이다. 1944년 무렵 하가나 대원은 거의 10만 명에 이르렀고, 몇 년 뒤 벌어진 이스라엘 독립 전쟁에서 주력군이 된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쫓아내려고 빈집에다 수류탄을 던져넣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영국군을 상대로 테러를 감행하기도 했다. 하나의 땅을 놓고 폭력이 오가는 혼란한 상황에서, 유엔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6 대 4의 비율로 분할해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를 각각 세우기로 결정했다(1947년 유엔 총회 결의안 181호). 예루살렘은 어느 쪽에도 완전히 편입되지 않는 개방된 도시로 남겨두고 신탁통치하기로 했다.

▲ 유대인 무장조직 하가나 대원들 


이스라엘 건국과 4차례의 중동전쟁

그러나 이스라엘 무장 조직인 하가나와 이르군은 그 무렵 팔레스타인 땅의 4분의 3을 이미 점령한 상태였다. 그리고 1948년 5월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무려 87만 명의 아랍인들이 그 땅에서 쫓겨났다. 이에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1차 중동전쟁이 벌어졌지만, 이스라엘이 승리하여 유엔에서 결정되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된다. 뒤이은 3번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더 많은 점령지를 갖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로 국한된 왜소화된 영토에서 반자치 상태로 남겨졌다. 그리하여 오늘날 식민 통치나 다를 바 없는 이스라엘의 압제하에서 양측이 폭력을 상호 교환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20세기 전반기만 해도 세계 지도에 없었던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중동에 생겨남으로써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고, 지금껏 눈물 속에서 지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 팔레스타인(짙은색)과 이스라엘(흰색)의 영토변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 인티파다

이스라엘의 압제 아래 슬픔과 좌절의 세월을 보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해묵은 분노가 터져나온 것이 두 번에 걸친 ‘인티파다’다. 인티파다는 번역하면 봉기 또는 저항이라는 뜻이다. 1987년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지프차에 치여 팔레스타인인 4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1차 항쟁은 6년 넘게 이어졌고, 그 결과 1,0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고, 90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고, 미국과 유럽의 적극적인 중재하에 제한적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세우는 것을 뼈대로 하는 오슬로 평화협정(1993년)이 맺어지면서 유혈 사태는 일시적으로 진정되었다.

그러나 2000년에 이스라엘 극우파 정치인 아리엘 샤론이 이슬람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사원에 난입하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이스라엘 군대가 유혈 진압하면서 2차 인티파다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7년 동안 팔레스타인인 5,000여 명이 사망했고, 이스라엘인도 1,000여 명 사망했다. 2차 인티파다에서 사상자가 더 많이 발생한 것은 팔레스타인 측이 본격적으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2000~2018년의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 희생자는 1만 명이 넘고 이스라엘 희생자는 1,000명을 약간 웃돈다. 사망자 비율로 따지면 유대인 1명당 아랍인 10명꼴이다. 이러한 극심한 비대칭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단순히 분쟁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반인간적인 전쟁범죄와 학살을 하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이 끊이지 않는다.

 

가자 침공과 이스라엘의 전쟁범죄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번갈아가며 일시적 점령, 퇴각을 되풀이하고 있다. 오슬로 협정 이후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온건화되면서, 팔레스타인 정치에서 가자지구를 근거지로 하는 이슬람주의 세력인 하마스가 부상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벌이는 테러를 빌미로 2009년, 2012년, 2014년 3번에 걸쳐 가자지구를 침공했다. 2009년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침공 당시 11세 팔레스타인 소년을 인간 방패로 활용했고, 여성과 어린이가 있는 집을 불도저로 밀어버렸으며, 민간인을 몰아넣은 주택에 포격을 가했다. 이스라엘군은 탁 트인 시계를 확보한답시고 그곳 농민들의 생업인 올리브 밭을 불도저로 갈아엎고, 이집트로 통하는 무기 밀수 지하 터널을 찾는다는 구실로 수많은 민가에 폭격을 가했다.

지은이가 방문한 가자지구의 한 가정에서는 집 옥상에서 빨래를 널던 15세 소녀 아스마, 바로 곁에서 비둘기 모이를 주던 11세 동생 아흐메드가 대낮에 이스라엘 저격수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 저격수는 무슨 까닭에 이들 자매를 죽였을까? 팔레스타인 어린이 3명 중 1명은 나중에 자라서 순교자가 되겠다고 말한다. 저항이 과격해지는 것은 그들의 좌절과 분노가 그만큼 깊어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시위 현장의 소년  

거대한 분리 장벽

2002년부터 이스라엘은 총 길이 710킬로미터의 분리 장벽 건설을 밀어붙였다. 2014년 말까지 500킬로미터쯤 완성된 상태이다. 장벽을 세우는 명목상의 이유는 ‘보안’이지만, 실제로는 1967년 6일전쟁(3차 중동전쟁) 이후 불법 점령해온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촌을 이스라엘 영토에 합치고, 언젠가 세워질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영토를 더욱 비좁게 만들겠다는 목적이다. 분리 장벽은 6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19년 동안 국경선으로 삼았던 그린 라인보다 더 팔레스타인 영토까지 나아가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갇힌 팔레스타인 주민 24만 명은 오도 가도 못한 신세가 된다.

방벽 안에 갇혀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인간이라면 최소한 누려야 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고, 가족이나 친지를 방문할 자유 또한 없다. 일자리나 생필품을 구할 수도 없고, 수로가 막혀 농사도 지을 수 없으며, 먹을 물조차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실정이다. 설상가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대인 정착민이나 이스라엘 군인들로부터 날마다 크고 작은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이렇게 장벽 안에 사는 갇힌 팔레스타인들은 과거 나치 히틀러 시절의 유대인들처럼 거주 제한을 받는 21세기 게토에서 지내고 있다. 이스라엘의 목적은 팔레스타인을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로 분리하고 다시 장벽 건설로 도시와 마을을 고립시키려는 것이다.

▲ 8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분리장벽

분리 장벽에 더해 이스라엘이 펼치는 가혹한 경제봉쇄 정책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극심한 가난에 고통받고 있다. 이스라엘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3만 5,000달러 정도이나 팔레스타인의 1인당 소득은 겨우 3,000달러에 불과하다. 팔레스타인 사람 2명 중 1명이 절대 빈곤 상태이다.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은 팔레스타인 경제를 마비시켜 항복을 받아내려는 경제 전쟁이다. 이스라엘이 국제사회의 비난 때문에 군사적으로 팔레스타인을 파괴하지는 못하더라도 경제적으로 말려죽이는 것은 가능하다는 셈법이다. 19세기 미국의 백인들이 인디언들에게 자행했던 잔혹한 강제 이주와 학살, 20세기 남아공 백인 정권의 악명 높았던 흑백 인종차별(아파르트헤이트)은 이제 아득한 전설이 되었지만, 중동 땅에서는 21세기 이스라엘판 인종 청소와 차별이 벌어지는 중이다.

 

식민화의 첨병, 유대인 정착촌

60만 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영토 내 정착촌에 살고 있다. 정착촌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하려는 우파들의 정치적 기획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건설사와 입주자들에 대한 금융 지원으로 점령지의 정착촌 건설과 이주를 독려했다. 정착촌이 세워진 곳은 국제법상 팔레스타인 영토이기 때문에, 정착촌 아파트들은 마치 전쟁터의 요새와 같은 모습으로 건설된다.

또 정착촌 주변에서는 자동소총을 멘 가장이 가족과 함께 산책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유대인 정착민들은 합법적으로 총을 지니고 다닌다. 팔레스타인 테러분자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킨다는 명분에서다. 6일전쟁 뒤 정착촌이 세워지면서 현지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마찰이 잦아지자 1973년 이스라엘 국방부는 정착민들의 무장을 허용했다. 1981년에는 유대인 정착민들에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검문하고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다(이스라엘 군사명령 898호). 2000년 인티파다가 일어나자 유대인 정착민들의 권한은 더욱 커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쏠 수 있게 했다!

▲ 베들레헴에서 바라본 유대인 정착촌(사진 왼쪽 위). 이스라엘의 제한 급수 탓에 팔레스타인 마을엔 집집마다 저수 탱크들이 있지만, 물이 넉넉한 유대인 정착촌엔 그런 탱크가 필요 없다. 

▲ 바깥 나들이에 나선 유대인 정착민 가족. 이들은 합법적으로 총을 들고 다닌다. 

이스라엘 강경파 정치인들의 중동 지배 전략은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하는 현상 유지로 요약된다. 팔레스타인을 군사적으로 강제 점령한 기존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능한 한 시일을 끌며 팔레스타인 지역에 더 많은 유대인 정착촌을 세워 이스라엘 영토를 넓혀간다는 것이다. 지금도 유대인 정착민들은 주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일상적으로 괴롭히고 위협하는 방식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원주민들이 떠나도록 종용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누구의 땅인가?

2018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간 국제사회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지 않아왔다. 1947년 유엔 총회 결의안 181호를 통해 예루살렘을 유엔 신탁통치 아래 두는 국제도시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라들도 예루살렘이 아닌 텔아비브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강경파 정치인들은 “예루살렘은 결코 분할되거나 공유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라고 주장한다(반면 팔레스타인은 동예루살렘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도라고 주장한다).

예루살렘의 인구는 90만 명이다. 서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동예루살렘은 아랍인 6, 유대인 4의 비율로 살고 있다. 문제는 이스라엘 정부가 동예루살렘의 아랍인 비율을 줄이기 위해 아랍인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여러 정책, 이를테면 강제 철거, 주택 신축 금지 등을 시행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해를 거듭할수록 아랍인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 동예루살렘 주변을 둘러싸고 세워지는 대규모 유대인 정착촌은 사실상 팔레스타인 영토 안에 파고든 이스라엘의 식민지나 다름없다. 서안지구의 지도를 보면, 유대인 정착촌이 무수한 점처럼 곳곳에 터를 잡은 모습이다. 예루살렘 전체를 이스라엘 영토로 삼겠다는 것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대사관 이전 결정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정식 수도로 인정하고, 나아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군사적으로 점령 지배하는 지금의 상황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두 개의 국가 해법 카드를 내팽개쳤다는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두 개의 독립국가를 중동 땅에 세우는 대신 한 개의 국가 해법, 다시 말해 이스라엘만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 예루살렘의 이슬람 사원과 그에 잇닿은 유대교 성지인 '통곡의 벽'은 오랜 갈등과 폭력의 역사를 지녔다. 

이스라엘의 군사적 우위와 이란의 핵무기

4차례에 걸친 전쟁 이후 중동의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군사적 균형추는 점점 이스라엘 쪽으로 넘어갔다. 이스라엘은 현재 중동에서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독립국가 건설을 막고 이를 고사시키는 전략을 갖고 있다. 군사적 불균형이 초래된 이유는, 우선 1979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 아래 이집트와 맺은 평화협정으로 이스라엘 남서부 전선의 방어 부담이 줄었기 때문이다. 1994년 요르단 후세인 국왕과 맺은 평화협정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특히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이미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인 바 있는 아랍 최대의 국가이므로 이집트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큰 이익이다. 평화협정을 대가로 이집트와 요르단은 해마다 엄청난 경제·군사 원조를 미국으로부터 받았다.

이와 더불어 1980년대에 8년 동안 치러졌던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아랍권이 분열된 것도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뒤이어 1990년대 걸프전으로 이라크 군사력이 약해지고, 아랍권에 군사원조를 하던 소련이 붕괴하자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사이의 군사적 균형은 깨졌다.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몰락하자 40만 이라크군이 해체되었고, 그 후 이스라엘의 군사적 우위는 공고해졌다.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이제 양적인 측면에서 주변 국가들과 균형을 이루고 질적으로는 우세를 지키고 있다. 이제 이스라엘이 신경 써야 하는 국가는 핵을 개발하고 있는 이란뿐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란 핵 시설을 불시에 공격한다면 전쟁의 불길이 중동 전체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끝까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곳

지난 2000년 이후 10여 차례 중동 취재를 다녀온 지은이는 지금이야말로, ‘우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절규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라고 말한다. 그는 중동에서 총소리가 들릴 때 단순히 일부 극단적인 테리리스트들의 일이라고 치부해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는 국제 유가를 걱정해서도, 미국의 요구에 따라 평화유지군이란 명목의 군대를 파병해야 하는 국제 외교의 복잡한 문제들이 뒤엉켜 있어서도 아니다. 오히려 팔레스타인 문제가 우리에게 평화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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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재명 

지구촌 분쟁 현장을 두루 취재 보도해온 국제분쟁 전문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경향신문>과 <중앙일보>에서 기자로 일했다. 미국 뉴욕시립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과정을 마친 후 국민대학교에서 <정의의 전쟁 이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 20여 년 동안 국제분쟁 전문가로 지구촌의 여러 분쟁 지역을 찾아다녔다.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반도(보스니아, 코소보), 중동 지역(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카슈미르, 동티모르, 캄보디아, 베트남,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쿠바, 볼리비아, 페루 등지의 유혈 분쟁을 취재 보도해왔다. 특히 지난 2000년부터 거듭된 중동 현지 취재를 통해 유혈 분쟁으로 몸과 마음을 다친 어린이와 여성, 집과 농토를 잃은 난민, 중동 평화의 암초로 꼽히는 유대인 정착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정치 군사 지도자와 지식인 등 분쟁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생각을 글로 담아내는 데 집중해왔다. 현재 <프레시안>의 기획위원, 성공회대학 겸임 교수이다. 지은 책으로 『오늘의 세계 분쟁』(2015년, 개정판), 『시리아 전쟁』(2018년),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2016년), 『석유, 욕망의 샘』(2007년), 『20세기 전쟁영화가 남긴 메시지』(2006년), 『한국 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2003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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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왕은 없다

심의민주주의로 가는 길 

이한 지음 | 미지북스 | 252쪽 | 13,800원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니다
권한이 위임된 엘리트의 통치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숙고된

공적 토론을 통해 의사결정을 내리는 과정이다

 

『철인왕은 없다』는 변호사이자 정치철학을 연구해온 이한 박사가 심의민주주의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물이다. 정치란,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당면한 고통을 해결하고 번영을 추구할 것인가에 관한 의사 결정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의제 민주주의로 표상되는 우리의 정치 현실은 그러한 고통을 해결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의제가 가진 엘리트주의적 속성을 비판하며 직접민주주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주장하는 관점이 있다. 그러나 엘리트주의냐 직접민주주의냐 하는 질문은 인적 속성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으로서, 더 나은 민주주의를 성취기 위한 올바른 접근 방식이 아니다.

저자는 대의제의 한계와 직접민주주의의 본질적 취약성을 모두 검토하면서, 우리가 인적 속성이 아닌 의사소통의 문제로 접근할 때 보다 나은 정치 시스템, 즉 심의민주주의를 설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심의민주주의에서는 시민들이 의제에 관해 충분한 정보와 근거를 갖고 검토하고 숙고한 결정이 공동체의 정치에 반영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기준인 ‘계몽된 이해(理解)’와 ‘온전한 대의(代議)’를 확보할 수 있으며, 대의제를 보완하여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목적을 온전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촛불 시위 이후 한국 사회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라는 두 방향으로의 뚜렷한 분화를 아우르고, 조화시키려 시도했다는 점에서 중요하고도 큰 문제를 제기한다.

- 최장집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엘리트주의 vs 대중민주주의, 어느 쪽이 맞을까?

엘리트주의는 소수의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배타적으로 또는 거의 대부분의 의사 결정권을 주자는 이념이다. 그에 반해 대중민주주의는 대중의 여론에 그러한 권한을 주자는 이념이다. 두 이념은 나름의 호소력이 있고, 상대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논박할 수 있는 논거들이 있다.

엘리트주의자들은 일군의 매우 능력 있는 사람들만이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결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이들이 대중에게 종속되지 않고 통치해야만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그 사회를 수호하는 수호자들이 있고, 이들이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플라톤은 <국가>에서 철인왕(哲人王)이 지배하는 사회상을 제안한 바 있다.

엘리트주의자들은, 대중은 먹고사는 데 바빠 정치에서 다룰 의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할 수도 없고, 전문성을 가질 수도 없으며, 대중의 피상적인 견해들은 비일관적인 결과에 이르기 일쑤라고 말한다. 엘리트주의에 따르면,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는 분명한 능력 차이가 있으며, 이 때문에 통치의 권한을 엘리트에 위임하는 것이 정당하다. 민주주의에서는 “계몽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엘리트주의가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가장 날카로운 지점이다.

또한 엘리트주의는 독재로 귀결되며 실패하기 마련이라는 민주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8세기나 존속하고 번영한 베네치아공화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엘리트의 지배가 시민들에게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반박한다.

 

반면 민주주의자들은 사람들 사이에는 분명한 능력 차이가 있지만, 통치에서 대중을 배제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엘리트 지배하에서는 각 사회의 집단이 가진 이해와 요구가 온전히 드러나고 고려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엘리트의 편향되고 자의적인 결정에 의해 일부 집단의 요구가 무시될 수도 있고, 대부분의 엘리트들은 특권을 지닌 지위를 강화하고 지속하고자 하는 욕망에 취약하다. 다시 말해, 엘리트 지배하에서는 “온전한 대의”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 엘리트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자들의 가장 강력한 공박이 된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베네치아나 피렌체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엘리트주의 체제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다. 게다가 그 성공 사례라는 것도 더 척박한 환경의 작은 나라임에도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안정뿐만 아니라 개별 시민의 권리 보장도 더 체계적으로 이뤄냈던 네덜란드나 덴마크의 사례에 비하면 그 빛이 바래진다고 반박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절충안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이러한 엘리트주의와 대중민주주의의 어중간한 타협이다. 즉 공식적인 제도적 권한은 대중의 선거를 통해 대표자로 선출된 공직자들이 갖고, 대중은 공직자에게 결정 권한을 위임한다. 대신 대중은 투표를 통해 간접적으로 결정권을 행사한다. 이런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틀에 깔린 생각은 대중은 의제를 직접 다룰 수 없지만 누가 적합한 엘리트인지 알아볼 능력은 있으며, 그들의 역할은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가끔 여론조사를 통해 대중의 의견을 알아보기도 하지만, 여론조사는 제도적 지위를 얻지 못한다.

정당정치는 원래 ‘계몽된 이해’와 ‘온전한 대의’를 촉진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유권자의 의사가 정당을 매개로 표현되면 의제에 대한 이해가 더욱 계몽될 수 있고, 여러 정당이 각기 유권자를 얻기 위해 애를 쓰면 보다 온전한 대의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래 취지는 정보의 불완전성 문제로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되고 있지 못하다. 정치 성향의 차별화 경향으로 인해 정보가 단순화되거나 왜곡되는 오류가 발생하고, 심지어 정치적 위장과 조작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 정당정치는 의원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 중심부와, 선거에 대응하고 매체를 상대하는 전문가들로 형해화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리하여 현대 정치는 피상적으로 형성된 대중의 의견과 엘리트가 밀고 나가고자 하는 정책 사이를 불안정하게 오가며, 서로 상호작용하는 주체도 목적도 없는 여정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시민들은 공민성을 발휘해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들을 의제에 올리고, 그것을 타당하게 다룰 수 있는 통로를 잃어버렸다.

저자에 따르면 정치란,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고통을 해결하고 어떻게 번영을 추구할 것인가에 관한 의사 결정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의제 민주주의로 표상되는 우리의 정치 현실은 그러한 고통을 해결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사람들은 법과 정책이 이성적 토론과는 상관없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거대한 사물처럼 느낀다. 그 결과 정치 혐오와 무기력증이 만연해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정치적 효능감을 상실한 대한민국 사회 구성원들이 느끼는 절망과 좌절의 본질이다.

 

정책 전환 - 무엇이 진정한 ‘인민의 의사’인가?

대의제의 딜레마와 결함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정책 전환(Policy Switch)이다. 정책 전환이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약속했던 정책들을 공직자가 당선 후에 180도로 뒤집어서 추진하는 것이다. 이는 정치 엘리트가 선거와 정책을 전혀 별개의 사안으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선거는 유권자들이 좋아하는 말로 치러서 일단 당선된다. 그리고 당선된 엘리트는 자신이 내세운 공약과 정반대 정책을 실행한다. 그 정책 효과가 잘 나타나면 유권자들도 결국 그 엘리트가 옳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 선거에서도 뽑아줄 것이다.

정책 전환의 예는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된다. 아르헨티나의 메넴, 페루의 후지모리, 볼리비아의 모랄레스는 대통령 선거 때 대단히 좌파적인 복지 중심 공약을 내걸었지만 당선된 뒤에는 곧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한마디로 극에서 극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경제 정책의 결과가 성공적이냐 아니냐에 따라 재선되거나 정권을 잃었다.

정책 전환은 ‘인민의 의사’를 인민의 ‘즉각적인 선호’가 아니라 ‘추정적 선호’라고 보는 관점이다. 추정적 선호는 여론조사로 대표되는 즉각적인 ‘예’, ‘아니요’보다 ‘인민이 숙고했더라면 자신들을 위해서 원했을 것에 대한 의사’라고 보는 태도가 깔려 있다. 정치 엘리트는 인민의 추정적 선호를 잘 파악해서 현명하게 정치를 펼치는 지도자로 그려진다.

물론 인민은 즉각적 선호와 관련해 모순된 요구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재정이 소요되는 정책을 실시하길 바라면서 동시에 세금 감면을 원할 수 있다. 또는 어떤 법안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고 나서는 그 법률이 실제로 실행되자 크나큰 후회를 하며 저주를 퍼부을 수 있다. 그래서 현대의 대의정치는 인민의 즉각적 의사와 추정적 의사 사이에서 비논리적인 타협을 하려고 한다. 정책 결정 권한을 위임받은 대표가 우선 정책을 시행하고, 그다음 선거에서 인민이 정책 시행 결과를 회고적으로 평가하여 드러난 투표 결과가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인민의 의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국민은 의제 제기와 정책 형성, 시행과 평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못하고, 오로지 엘리트가 관철하는 모든 일을 겪고 나서 회고적으로 짧은 반응만을 보이는 존재로 전락해도 되는가? 그렇게 되면 시민은 통치에 참여하는 민주적 존재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권위주의적 통치를 겪고 나서 다음 권위주의적 통치를 예비하는 의례를 수행하는 수동적 신민이 되어버리고 만다.

궁극적으로 이런 식의 정책 전환을 국민적 합의 없이 허용하는 것은 선거 캠페인 자체를 사기극으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후 평가 시스템은 지배 정치집단이 사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전략적 공간을 크게 확대시킨다. 정책 전환 현상은 현대 정치 체제가 인민의 계몽된 의사에 의한 통치도, 인민의 의사의 온전한 대변도, 인민에 의한 최종적인 통제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보통선거권과 경쟁적인 정당 시스템, 비례대표제가 도입된 후 대의제에서 진정한 혁신은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선거 때마다 한 표를 던지고 나면 다음 선거까지 모든 것을 지켜만 봐야 한다. 대의제의 고질적인 딜레마인 본인-대리인의 문제도 해결되지 못했다. 이러한 대의제의 한계는 지금의 정치 체계로는 이 사회가 처한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이 대단히 힘들며, 새로운 정치적 의사 결정 제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대의제의 대안이 직접민주주의?

한편 대의제의 한계 때문에 직접민주주의가 최종적인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그들은 직접민주주의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시공간의 제약, 즉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의 약점은 시공간의 한계에 있지 않다. 고대 아테네에서도 결코 적지 않은 수라 할 수 있는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광장에 모였다. 참석한 사람들이 한마디씩만 말을 해도 하루가 다 갈 것이다. 누구나 알듯이 최근 인터넷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한마디씩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아테네 민주주의가 현대 국가에서 실현될 수 없는 이유는 직접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취약성 때문이다.

실제로 고대 아테네에서 이루어진 직접민주주의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이상형과는 많이 달랐다. 정치학자 데이비드 헬드에 따르면, 아네테에서 대중은 무사심하게 개인으로 참석하여 토론하고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지도자들이 이끄는 무리가 있었으며, 이들은 종종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이들 집단은 민회에서 어떻게 발언하고 어떻게 선동할지 음모를 짜고 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현란한 변론 기술을 동원한 이들의 선동에 민회는 순간적인 격정에 빠져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 일쑤였다. 군대의 지휘관을 억울하게 처형시키고, 그 뒤 선동에 넘어간 것을 크게 후회하며, 이번에는 선동한 사람들을 잡아 처형시킨다. 이것은 공동의 목적을 가진 시민들이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합의를 통해 바람직한 결론을 도출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아테네의 사례에서 보듯 숙고되지 않은 직접민주주의는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협의의 메커니즘이라기보다는 무분별한 대중의 열정이 분출되고 여론 조작이 횡행하는 무대가 될 수 있다.

 

직접민주주의가 더 나은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 참여에 필요한 정보의 불평등 때문이다. 정보가 평등하게 주어진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정보를 가려내고 해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은 평등하지 않다. 만약 우리 사회가 완전 정보사회에 매우 가깝다면 유권자는 모든 것을 직접 알아보고 결정할 수 있으므로, 직접민주주의 방식에 따라 투표하면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반대다. 특히 인터넷은 고도로 불평등한 공간이다. 아무리 좋은 근거로 뒷받침되는 주장을 담고 있어도 소외된 공간은 더욱 소외되고 그릇된 주장을 해도 인기가 높은 곳은 관심이 더욱 집중된다. 이러한 양극화는 되먹임 고리를 통해 강화되는 경향을 갖는다.

둘째, 심의 과정이 부족하다. 적어도 대의제에서는 의원들에게 제도적으로 독회와 토론의 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는 의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도 투표에 참여한다. 그러다보니 대의제에서는 정책 실패에 정당 교체라는 결과가 따르는 반면, 직접민주주의에서는 어떤 제도적 반성 메커니즘도 없다. 이는 정책 방향이 잘못될 때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대중매체를 소유하거나 매체 영향력이 큰 세력이 의사 결정 과정을 지배할 가능성도 크다.

셋째, 직접민주주의에서는 의사 결정에 참여한 소수가 모든 시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역설이 발생하며 이는 심각한 정당성 문제를 야기한다. 인터넷 여론조사 수준으로 대표성이 붕괴하고 계속되는 대중 동원의 힘겨루기가 사회를 지배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조직되지 않았거나 자원이 부족해 조직력이 낮은 사람들은 대의제 사회보다 의제에 대한 통제력을 훨씬 더 잃게 된다. 적어도 대의제에서는 그들의 목소리가 정당을 통해 대표될 수 있다.

넷째, 직접민주주의는 정치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심어준다. 정치는 갈등하고 상충하는 이익과 의견을 합당하고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문제 상황을 슬기롭게 해결하는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에서는 다수가 원하는 목적을 그저 다수가 원하는 방법으로 실행하는 문제로 정치가 환원된다. 이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이상과 배치된다.

다섯째, 본인-대리인의 문제가 대의제보다 더 악화된다. 얼핏 보면 직접민주주의에서는 대리인이 없는 것 같지만, 특정 시기에 실질적인 운영에 참여하는 소수가 일종의 대리인이다. 그러나 이 대리인들은 전혀 명시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만약 실패가 발생하면 그 실패에 대한 책임이 사회 전체 구성원에 분산되어 부담될 뿐이다. 책임지는 주체가 없는 것이다. 대의제에서는 적어도 정당이 대리인으로서 책임을 진다.

 

관건은 심의와 토론 과정!

이렇게 심의와 토론 과정이 없는 직접민주주의는 만병통치약이기는커녕, 오히려 대의제가 가진 약점이 극대화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과거 미국 헌법의 제정자들(Founding Fathers)은 직접민주주의가 가진 이러한 약점에 대해 올바르게 파악했다. 그들은 온전한 대의를 어떤 식으로 구현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들은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이 공정한 심의를 거칠 수 있도록 몇 가지 제도적 장치를 고안했다. 우선 직접민주주의보다 대의제를 옹호했다.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들보다 그 대표들이 격정이 아닌 이성에 기반해 토론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짧은 임기에 비해 긴 임기가 더 낫다고 보았다. 매 정책 결정 때마다 유권자가 즉각 지지를 철회할 수 없을 때 대표들이 당파의 이익이 아닌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더 잘 살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하원은 다수의 이익을, 행정부와 상원, 사법부는 소수의 이익을 보호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권력을 분할했다. 이는 그들이 심의를 강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결과적으로 엘리트주의적 수단을 택했음을 보여준다.

https://www.flickr.com/photos/donkeyhotey/

 

 

그렇다면 직접민주주의는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상향일 뿐일까? 그렇지는 않다. 직접민주주의의 성공적인 사례들도 현실에서 꽤 발견할 수 있다. 미국 각 도시의 타운미팅, 시카고 지역통치위원회, 미국 거주 동물 보호 계획,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리의 참여예산제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부분적 성공 사례들에서 우리는 토론을 필수 절차로 하는 직접민주주의의 기제를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들이 투명하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숙고된 의견을 창출하는 과정 말이다. 이런 심의 과정이 있을 경우 직접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가 목표로 했지만 홀로 온전히 달성하지 못했던 이상, 민주적 정당성, 책임성, 반응성, 광범위하고 사려 깊은 토론, 온전한 대표성을 더 잘 달성하게 해주는 보완제가 될 수 있다.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를 검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길은 누가 통치하느냐, 즉 인적 속성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계몽된 이해’와 ‘온전한 대의’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의사소통적 과정이 있느냐의 문제, 즉 심의 과정의 존재 여부이다. 그리고 공중의 숙고된 의견으로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라는 아이디어가 바로 심의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심의민주주의 - 민주주의의 고도화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계몽된 이해’를 지닌 시민이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참여할 통로가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또한 이 통로를 통해 형성되는 숙고된 의사는 그 자체로 법적 지위를 가져 ‘온전한 대의’를 구현해야 한다. 학계에서는 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춘 민주주의를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라고 칭하며 오랜 기간 논의를 해왔다.

‘심의’란 함께 토론하고 숙고하여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활동을 말한다. 정의상 심의민주주의는 이미 주어진 선호를 집계하는 민주주의와 대비된다. 심의민주주의에서는 다수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숙고하지 않고 개개인이 표출한 선호를 단순 집계한 것을 민주적인 결정에 따른 결과로 인정하지 않는다. 국가의 이런저런 결정들은 공적 심의라는 수문을 거쳐야만 민주적 결정이라고 불릴 수 있다. 따라서 심의민주주의에서는 공적 심의 기구인 ‘심의회’에 공식적인 입법 권한을 부여한다. 그렇게 될 때 심의회는 한편으로 의회의 보완 기구로서, 또 견제 기구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심의민주주의는 대의제의 대체제가 아니라 보완제인 것이다.

 

엘리트주의의 사상적 원천인 플라톤의 철인왕 국가에 대해 칼 포퍼는 “영리하지만 무정한 목동이 양을 다루는 것처럼, 말하자면 지나치게 잔인하지는 않지만 적당히 경멸하면서 인간 가축을 다루는 국가에 대한 이론의 개요”라고 갈파했다. 특출한 사람만이 다른 모든 사람의 공동선을 발견하고 실현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가정은 틀렸다. 또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의사 결정에 참여해야만 정치적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직접민주주의의 단순한 주장도 틀렸다. 문제의 핵심은 참여자의 수가 아니라 심의와 토론의 과정이다. 단순 집계된 인민의 즉각적인 선호가 아니라 숙고된 인민의 의사이다.

심의민주주의는 적은 수라도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이 충분한 정보를 검토하며, 서로 투명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더 나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 숙고하는 과정을 중시한다. 그러한 심의 과정을 통해 도달한 결과를 공동체의 정치적 결정에 반영할 때 우리의 민주주의는 대의제의 한계를 넘어서 더욱 고도화되고 심원한 방식으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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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이한

변호사이자 시민교육센터 대표이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민주주의와 정치철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중간착취자의 나라』(2017년), 『삶은 왜 의미 있는가』(2016년),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2012년), 『이것이 공부다』(2012년), 『너의 의무를 묻는다』(2010년), 『철학이 있는 콜버그의 호프집』(2005년), 『탈학교의 상상력』(2000년), 『학교를 넘어서』(1998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사치 열병』(2011년), 『포스트민주주의』(2008년), 『이반 일리히의 유언』(2010년), 『계급론』(200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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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군대

미군은 어떻게 세계 최강의 군대가 되었나

 

토머스 G. 맨켄 지음 | 김수빈 옮김 | 미지북스 | 400쪽 | 16,800원

 

 

미국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기술 혁명에 적응해온 미군의 전략과 조직의 역사

 

“한국이 ‘포니’를 제작하던 1970년대 후반,
미국은 F-117 스텔스 전투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미국의 전쟁 방식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20세기 후반기의 시작과 끝에 일어난 두 개의 기술 혁명은 군사 분야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재래식 전쟁의 종말을 알린 ‘핵 혁명(Nuclear Revolution)’과, 전장에 컴퓨터와 원격조종을 도입한 ‘정보혁명(IT Revolution)’이 그것이다. 기술 낙관론자들은 기술이 전쟁의 양상을 혁명적으로 변혁하고 있으며, 기술이야말로 미군의 압도적 우위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회의론자들은 기술의 효과는 과장되어 있으며, 군대의 전통적 역할과 사명을 약화시키므로 기술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큰 위험이라고 말한다. 1945년 이래 미군의 조직과 전략은 이렇듯 기술 혁명이라는 큰 도전에 직면하여 때로 반발하고, 때로 적응하며 변화해왔다. 이 책은 핵무기가 출현한 1945년부터 유도미사일과 무인 항공기, 스텔스 기술의 전시장이던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최강의 군대인 미군의 기술과 전략, 조직의 변천사를 냉철히 톺아본다.

 

 


 

 

격변하는 현대전 양상에 발맞춰 진화해온 미군의 모든 것
냉전 이후 걸프전쟁과 코소보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군은 늘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고 세계 최강의 군대임을 증명해왔다. 그리고 미군의 승리에는 언제나 최첨단 군사기술이 함께했다. 무엇이 미군을 최강으로 만들어준 것일까? 우주에는 쉼 없이 정찰 중인 첩보위성들이 있고, 상공에는 유유히 지상을 촬영하는 고고도 정찰기가 있으며, 적진 방공망 위로는 F-35 스텔스 전투기와 B-2 스텔스 전폭기가 있다. 그런가 하면 바다에는 1백 개 이상의 목표물을 동시에 추적, 요격하는 이지스함을 위시한 항모 전단과 핵잠수함이 있고, 육지에는 최강 기갑전력의 핵심인 M1 에이브럼스 전차와 M2/M3 브래들리 보병전차가 있다. 냉전이 끝난 뒤에도 미군은 기술상의 우위를 놓치는 일 없이 고급 기술에 정통하고 나아가 정보혁명의 기술적 진보를 흡수하였으며, 다른 나라와의 군사적 격차를 더욱 벌리고 있다. 전선의 병사를 필두로 한 지상과 공중의 화력 지원 체계의 구축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공상과학소설 속의 군대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미군은 어떤 경로로 ‘궁극의 군대’가 된 것일까? 미군이 자랑하는 최강의 무기는 어떤 맥락에서 탄생했으며 오늘날 미군은 이 무기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미군은 어떻게 조직을 혁신하고 전략을 개발해왔을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며, 특히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전략폭격기와 전투기, 미사일방어시스템, 스텔스 기술, 정밀유도기술, 무인항공기 등 최첨단 무기들의 등장 순간을 소개한다.

 

핵 혁명이 초래한 미군의 변화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가장 먼저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가 되었으나 핵 독점은 오래가지 못했다. 소련이 1949년 핵실험과 1957년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한 뒤 미국은 오히려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의 등장에 대응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핵무기가 등장하자마자 미군에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한 것은 아니었다. 1947~1952년 핵무기 제조 기술의 혁신이 일어나는 가운데, 미국 정치인과 군인들은 서서히 ‘핵 전쟁’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3년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미군은 본격적인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 아이젠하워는 핵무기를 통해 미국의 안보와 군축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고 적극적으로 핵무장을 추진했다. 그의 국방 정책의 중요한 축은 유사시 적국에 압도적인 핵 보복을 가한다는 내용의 ‘대량 보복’ 전략이었다. 그는 각 군에 핵무장에 나서도록 요구했다. 그의 재임기에 미국은 소련에 대한 정찰 기술의 확보, 조기 경보 체제와 본토 방공 체제 구축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의 도입은 각 군에 혁명적인 변화를 전제했다. 각 군은 처음부터 새로 자신들의 역할을 모색해야 했다. 공군은 유인폭격기 중심의 부대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미사일 중심의 부대가 될 것인가? 해군의 주력은 여전히 항공모함일 것인가 아니면 탄도미사일을 탑재한 잠수함일 것인가? 육군과 해병대의 경우에는 조직의 존립 자체가 의문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핵 혁명은 위기이자 기회였다. 각 군은 예외 없이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발맞춰 변화를 모색했으며 새로운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얻었다. 핵 혁명 시대의 가장 큰 수혜자는 공군이었다. 핵 투발의 주체로서 미군의 중심으로 부상한 공군은 전략공군사령부를 창설해 B-52 전폭기를 구비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 아틀라스를 개발하였으며, 최초의 방공 시스템인 SAGE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해군은 핵잠수함을 얻었으며, 육군은 핵무기의 포병 전력화 개념에 천착하여 280밀리 원자포를 개발하였고 여러 중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얻었다. 이 시기는 각 군이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은 시기였으나 동시에 냉전과 그 후에 등장할 무기들을 위한 기술적 지향이 대거 모습을 드러낸 시기이기도 했다.

 

아틀라스 미사일은 미국이 처음으로 실전 배치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다. © NASA

 

케네디, 다시 재래식 전력의 건설에 집중하다
아이젠하워에 이어 대통령이 된 케네디는 합동참모단의 존재와 군의 관료제 때문에 국방예산이 비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믿었다. 이에 그는 군을 문민통제 아래 두기 위해 포드자동차 사장 출신의 맥나마라를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맥나마라의 취임은 군 관련 조직에 민간인들이 대거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전까지 각 군은 제약 없이 할당받은 예산을 쓰면서 각개약진 하듯이 서로 경쟁하며 비슷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곤 했으나 맥나마라 시기에 이르러 그런 폐단은 줄어들었다.
 케네디는 재래식 전쟁과 핵전쟁을 공히 억제할 수 있다는 ‘대량 보복(상호 확증 파괴)’의 논리에도 동의하지 않았고, ‘신축적 대응’이라는 전략 기조를 새로 마련하였다. 이것은 유사시 자동으로 핵무기를 사용하는 ‘확증 파괴’를 거부하고 그보다는 위협의 수준에 맞게 대칭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당연하게도 이 새로운 전략 기조는 미국이 바르샤바조약 국가들의 전력에 대응하는 ‘재래식 전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명제로 이어졌고, 군은 다시 고강도 재래식 전쟁을 강조하게 되었다. 1961~1975년은 여러모로 미군에서 과거로의 회귀 경향이 나타난 시기였다.
 
베트남전쟁에서 일어난 혁신
베트남전쟁은 미국 패권의 한계를 보여준 전쟁이자 특히 기술에 대한 의존만으로는 승리를 쟁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전쟁이었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미군이 원래 소련과 싸우기 위해 준비되고 무장한 군대였음을 지적하며 패배보다는 예기치 않은 전장에서 미군이 어떤 혁신을 이루었는지에 주목한다.
 비록 패배했지만 ‘기술’은 베트남전쟁에서도 중요했다. 공군은 해를 거듭하며 북베트남군의 레이더망과 지대공미사일을 무력화하는 기술을 손에 넣었고, 향후 중요한 항공 지원 전력이 될 기관포 무장항공기(gunship)를 개발하였다. 육군은 기존의 공수부대 개념과 다른 공중기동부대를 만들었는데 이들을 위한 헬리콥터의 광범위한 사용은 베트남전쟁에서 육군이 이룬 가장 중요한 혁신이었다. 또한 미군은 지휘통제소에 연결된 레이더와 공격기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는데, 이는 나중에 아프가니스탄전쟁에 이르러 위력을 발휘하는 ‘정찰-타격 복합체’의 효시가 되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베트남전쟁은 무인항공기와 정밀유도무기가 최초로 등장한 전쟁이기도 했다.
  
기술 전쟁으로서의 냉전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했지만 미국은 냉전에서는 승리하였다. 미국의 승리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우선 베트남전쟁에서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단련된 장교단의 존재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강력한 적인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기구 국가들을 상대로 한 ‘능동적 방어’와 ‘공지전’ 교리를 고안하였고 이로부터 신세대 무기들의 개발이 촉진되었다. 한편으로 미국 정부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카터와 레이건 행정부는 기술 부문을 냉전의 주요한 격전지로 여겼고, 특히 레이건은 과감한 기술 전쟁을 시도했다. 실제로 미국은 소련을 상대로 다방면에서 기술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과정에서 오늘날 미 육군 재래식 전력의 근간을 이루는 ‘빅 파이브’, 즉 M1 에이브럼스 전차와 M2/M3 브래들리 보병 전차, 고등 공격 헬리콥터, 병력 수송 헬리콥터 그리고 방공 체계가 탄생했다. 해군 또한 소련 해군에 맞서는 과정에서 해군 전력을 보존하는 정점의 기술인 이지스 체제를 탄생시켰다.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SDI) 발표는 냉전 후반기에 일어난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다. 우주에서 고에너지빔 무기로 소련의 탄도미사일을 요격한다는 내용 등이 담긴 이 구상은 미국이 기술력으로 소련의 산업 능력을 옥죈 가장 훌륭한 사례가 되었다. 기술이 냉전 종식에 직접적인 기여를 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은 기술적 우위를 활용하여 소련으로 하여금 강박을 자아냈으며 그들의 산업 역량을 뒤틀었다.

 

이지스 체계의 주요 구성품인 AN/SPY-1 레이더를 장착한 순양함 USS 레이크 에리. © U.S. Navy photo by Photographer's Mate 2nd Class Bradley J. Sapp

 

걸프전쟁, 첨단 무기의 시연장이 되다
냉전 말에 기획되고 개발된 무기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계속 미군의 근간이 되었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전쟁 방식이 한계를 드러냈다면 걸프전쟁에서는 그 정당성을 입증하였다. 걸프전쟁은 그야말로 차세대 정밀유도무기들과 스텔스 같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기술들의 화려한 시연장이 되었다. 전쟁의 양상을 목도한 많은 사람들은 ‘군사 혁명’을 운위했고 혹자는 ‘새로운 미국의 전쟁 방식’이 출현했다고 평가하였다. 걸프전쟁 후 이어진 일련의 전쟁에서 미국이 보여준 모습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채질했다. 말하자면, 이제 미국은 적을 전복시키기 위해 압도적인 전력을 퍼붓기보다는 부차적인 이익을 추구하면서 점차 강화하는 방식으로 무력을 사용하며, 야만적 무력 충돌의 위험에 뛰어드는 섬멸전과 소모전 개념이 아닌 새로운 개념의 전쟁 방식을 구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이는 너무 섣부른 전망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선보인 미국의 새로운 전쟁 방식
2001년 9·11 테러 이후 다급하게 실행된 아프가니스탄전쟁을 두고 많은 논자들, 특히 기술회의론자들은 이 전쟁이 미국의 수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전쟁은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는 동안 미군과 연합군 측은 단 39명의 사망자(전투 중 사망자는 16명)를 냈을 뿐이었다. 이에 아프가니스탄전쟁은, 1990년대 미국의 전쟁과는 다른 맥락에서, 기술낙관론자들이 열광하는 또 하나의 전쟁이 되었다. 이 전쟁은 산개된 소규모 특전대 전력과 아프간 토착 세력, 그리고 정밀한 항공 지원 전력의 긴밀한 네트워킹으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가볍고 민첩한 지상 전력이 미군의 모든 지원 화력을 등에 업은 일종의 센서 역할을 수행하며, 적 탐지 시 정보망을 통해 즉각적이고도 막강한 화력 지원을 유도하는 것이 압권이었다. 전통적으로 험한 지형과 야간은 전력이 약한 쪽이 선호하는 전장이었으나 이 전쟁에서 미군은 기술력에 힘입어 오히려 자신들이 밤의 전장을 지배하였다.
 아프가니스탄전쟁은 무인 항공기가 처음으로 대대적으로 사용된 전쟁이었다. 특히 무인 공격 항공기가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되어 RQ-1 프레데터와 RQ-4 글로벌호크 등은 기존의 정보위성이나 고고도 정찰기가 할 수 없는 독보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공군은 프레데터 무인기와 AC-130 무장항공기 사이에 실시간 통신망을 구축하여 무인기만으로 정찰과 화력 집중이 가능한 시대 또한 열었다.
 하지만 언뜻 환상적이기까지 한 이 ‘아프가니스탄 방식’은 낙관론자들이 희망했던 것만큼 미군 내에서 높은 지지를 받지는 못하였다. 뒤이은 이라크전쟁에서 미국은 전력을 보다 일반적인 목적에 충실하게 운용했다.

 

최종공격통제사팀이 A-10 기의 근접 항공 지원을 요청하는 훈련을 실시하는 모습. © U.S. Air Force photo by Tech. Sgt. Michael R. Holzworth

 

이라크전쟁 - 완벽한 승리와 예기치 못한 비정규전
미국은 이라크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일거에 동원하는 전통적인 미국의 전쟁 방식과 기술이 조화를 이룬 전쟁이었다. 개전 후 43일 동안 미군과 영국군이 기록한 169명의 사망자 수는 일간 사상자 수로 따졌을 때 미국 역사상 독립전쟁 이래 가장 낮은 수치였다. 미국의 이러한 승리는 전쟁의 성격이 변했음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되었다.
 이라크전쟁에서 미국은 지속적으로 공중 우세를 보여주었다. 1991년의 걸프전쟁에서 다수 사용된 레이저 유도 폭탄은 구름이나 먼지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 전쟁에서 널리 사용된 GPS 유도 폭탄들은 그런 제약을 전혀 받지 않았다. 미군의 항공기는 GPS 유도 폭탄을 사용하여 은폐한 이라크 부대들을 섬멸할 수 있었다. GPS 정보는 여러 방식으로 응용되어 아군 부대의 위치 정보를 추적할 수 있는 ‘우군전력추적체계(BFT)’의 기술적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이라크전쟁은 그 어느 전쟁보다 첨단 정보 기술이 많이 활용된 전쟁이었다. 하지만 기술낙관론자들의 성급한 예언과 달리, 이 전쟁에서 미군이 전장 상황을 완벽하게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3개 여단 규모의 이라크군의 기동을 탐지하지 못하여 소수의 미군이 다수의 적을 맞는 위험한 상황에 빠지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전쟁의 후반부, 전쟁의 성격이 정규전 단계를 지나 치안 유지와 반란 진압으로 바뀌면서 미군의 기술적 우위는 빛을 바랬다. 초기의 무혈 승리와 대조적이게도 2003년 3월 19일부터 2006년 4월 16일까지 미국은 3,773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정보혁명 시대의 미군
정보혁명은 핵 혁명의 충격에 비견할 만한 것일까? 아니면 기술 진보의 평범한 연장선일 뿐일까? 저자는 정보혁명이 핵 혁명처럼 가시적인 변화를 동반하지는 않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선 가시적인 변화가 없지는 않다. 대표적인 예로 정밀유도무기와 무인항공기는 정보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새로 등장한 무기들이다. 이 무기들은 미국의 전쟁 방식에 흡수되어 미군에 중요한 기술적 우위를 안겼다. 물론 정보 기술은 기존의 재래식 전력도 바꾸어놓았다. 무기들은 더 넓은 시야와 타격 정밀도, 통신 능력을 갖춤으로써 다른 차원의 무기들로 거듭날 수 있었다. 여기에 GPS 기술은 전장 상황의 정보화를 통해 전술 기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네트워크 기술은 부대들로 하여금 일사불란하게 산개하면서도 화력을 집중하는 능력을 부여하기도 했다.
 정보 기술은 보다 심원한 부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첨단 무기는 각 군의 전통적인 정체성을 시험하고 있고 군 조직에 전례 없는 변화의 압력을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정보 기술은, 최근 군사전문가들의 실망스러웠던 수많은 예측이 증명하듯이, 미국의 전쟁 방식을―그리고 현대전의 양상 자체를―바꾸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0세기에 수많은 혁명적인 기술들이 현대전과 미군 조직에 거대한 변화를 추동했다. 그러나 기술이 전장의 승패나 군대 조직을 전부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대 미군의 역사는 기술 혁명이라는 도전에 대한 미군 조직의 응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MQ-1B 프레데터 무인 항공기. © U.S. Air Force photo by Tech. Sgt. Sabrina Joh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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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토머스 G. 맨켄(Thomas G. Mahnken)

토머스 맨켄은 현재 미국의 싱크탱크인 전략예산평가센터(CSBA)의 회장이다. 존스홉킨스대학교 폴 H. 니츠 고등국제학대학원 필립 머릴 전략연구센터의 수석 연구교수이며, 미 해군전쟁대학 전략학 교수로 20년 가까이 일했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미 국방부 정책기획실 부차관보로 근무했다.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역사와 국제정치를 공부했고, 존스홉킨스대학교 고등국제학대학원에서 국제 문제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 및 편저로 『국제정치의 군비경쟁: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Arms Races in International Politics: From the Nineteenth to the Twenty-First Century)』, 『아시아에서의 전략: 지역 안보의 과거, 현재, 미래(Strategy in Asia: The Past, Present, and Future of Regional Security)』, 『비밀과 책략: 중국의 전략 문화 이해(Secrecy and Stratagem: Understanding Chinese Strategic Culture)』 등이 있다.

 

옮긴이  김수빈

BBC 코리아 기자이다. 허핑턴포스트 한국어판, 국방 전문지 디펜스21+ 등에서 주로 외교 안보 문제를 다뤘다. 국제투명성기구(TI) 2015년 국방 분야 반부패지수 보고서의 한국 국방 분야 평가를 맡았다. 옮긴 책으로 『리얼 노스 코리아』,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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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율의 줌아웃

암울하고 위대했던 2012~2017

 

천관율 지음 | 미지북스 | 372쪽 | 16,000원

 

데이터 저널리즘의 선구자

 <시사IN> 천관율 기자가 목격한

가장 암울하고 가장 경이로운
한국 사회의 결정적 분기점에 관한 이야기

 

 “한국 보수는 왜 권위주의로 미끄러졌나? 이것은 박근혜라는 기괴한 지도자의 일탈인가, 한국 보수 전체의 속성인가? 진보는 한동안 왜 속수무책이었나? 그리고 어떻게 힘을 되찾았나? 2016년 대분기 이후 유권자 지형은 진보 우위로 재편되었나? 이제 냉전적이고 권위적인 전통 보수가 다시 다수파로 돌아올 길은 막혔는가? 만약 그렇다면, 보수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우리 시대를 압축해 보여주는 27편의 기사를 모으고 새로 쓴 글을 덧붙여 책으로 엮었다. 기사는 2009년부터 2018년 사이에 작성되었지만, 책이 집중하는 시기는 2012~2017년 5년, 가장 암울하고 가장 위대했던 그 5년이다. 이 경이로운 시기를 통과한 우리는 이제 민주정의 주권자가 된다는 게 얼마나 두근거리는 경험인지를 알아버렸다. 우리가 이 놀라운 2016년 겨울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가장 최근 우리가 겪은 거대한 분기에 관한 이야기
이 책은, 우리가 지나온 거대한 분기점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 보수는 왜 몰락했을까? 그리고 촛불 이후 한국 사회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이행하게 될 것인가? 데이터 저널리즘의 선구자 <시사IN> 천관율 기자는 이 책에서 지난 10년을 복기하며 우리에게 열린 미래를 조심스레 조망한다.
 『천관율의 줌아웃』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2016년 겨울 광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주권자들이 수행한 고도의 전략과 인내, 위대한 승리의 순간을 확인한다. 국민은 원했던 대로 자격 미달의 통치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그렇다면 통치자는 어떤 의미에서 결격이었던 것일까? 2부는 시간을 거슬러 보수의 몰락 과정을 소개한다. 보수의 거침없는 퇴행은 진보의 지리멸렬과 동전의 앞뒤를 이루고 있었다. 3부는 야권이 김해 봉하에서 그들의 지도자를 떠나보내던 장면에서부터 권토중래하기까지의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4부에서 저자는 촛불이 열어젖힌 이 시대를 ‘촛불체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하며 우리에게 열린 여러 가능성을 타진한다.

 

천관율의 줌아웃

- 최대한 멀리서, 구조와 맥락을 드러내는 글쓰기
보통 좋은 기자란 줌인(zoom-in)을 잘하는 기자를 말한다. 피사체, 즉 취재 대상을 가까이 잡아당겨서 독자에게 상세히 보여줄수록 훌륭한 기자가 된다. 하지만 저자는 그 반대편에서 자신의 재능을 찾았다. 저자가 택한 전략은 줌아웃(zoom-out)이다. 피사체, 즉 취재 대상을 최대한 멀리서 최대한 다른 시야로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접근법이다. 줌아웃이 잘된 기사는 마치 드론으로 찍은 영상 같아서, 피사체의 디테일은 흐릿한 대신 그것이 어떤 구조와 맥락에 있는지 더 잘 보여주는 강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구조와 맥락은 사건과 디테일보다 느리게 변한다. 특히 중요하고 뿌리 깊은 구조일수록 더 느리게 변한다. 느린 문제를 다루려면 느린 저널리즘이 필요하고, 잘 수행된 느린 저널리즘은 그만큼 시간을 견뎌내는 힘이 있다. ‘줌아웃’은 저자가 자신의 느린 저널리즘을 일컫는 특유의 표현이다.

 

2016년 겨울, 광장에 선 주권자들의 선택
1부에서 저자는 독자를 2016년 겨울의 광장으로 데려간다. 암울했던 시기의 끝자락에서 광장의 시민들은 기로에 서 있었다. 가정해보자. 만약 그해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이겼다면? 촛불집회가 격해지면서 중산층이 이탈했다면? 만약 대통령이 새누리당에 대한 장악력을 유지하여 탄핵안이 부결됐다면? 만약 대통령이 2선 후퇴와 거국내각 구성을 받아들였다면? 이러한 가능성은 수없이 존재했고 어느 것이든 일어났다면 결과는 퍽 달라졌을 것이다. 달리 말해, 광장에 선 주권자들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는 길은 선택지가 매우 좁은 길이었다. 시민들은 지도부도 없이 고도의 전략을 마련해야 했고, 인내심 있게 대오를 유지해야 했다. 그때 거기서 그들은 어떤 길을 발견했던 것인가?
 2016년 겨울 광장의 목표는 ‘혁명’이 아니라 ‘체제의 복원’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광장이 선택한 무기는 횃불과 단두대가 아니라 입법부와 헌법이었다. 저항권의 직접적 행사, 폭력을 동반하는 혁명적 수단은 기각되었다. 광장의 목표가 혁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승리는 거의 초현실적인 성취가 되었다. 광장의 시민들은 집요하게 입법부를 움직이고 헌법을 통해 명령을 도출했으며, 결국 체제로 하여금 주권자의 의지에 복무하게 만들고 통치자를 해고하는 데 성공하였다. 언뜻 당연해 보이지만 이는 지구에서 극소수 국가만이 도달한 경지이자, 이전까지 한국 현대사가 증명한 적 없는 명제였다.
 무엇보다 이로써 한국인들은 원했건 아니건 ‘체제의 복원’을 넘어, 1987년 힘으로 체제를 때려눕혔던 경험에서 다시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나아갔다. 익숙했던 광장 대 정치의 대립을 깨고, “광장이 정치를 발견한 것이다.”

 

한국 보수는 왜 몰락했는가?
2부는 한국 보수의 몰락과 파산에 관한 이야기다. 광장의 촛불과 입법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박근혜 정부는 줄곧 그들의 시선에 의지하는 객체로만 등장한다. 말하자면 그다음 ‘줌아웃’의 대상은 박근혜 정부와 보수이다. 도대체 박근혜 정권의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박근혜 정권의 문제는 단순히 리더만의 문제였던 것인가 아니면 보수 일반의 문제였던 것인가?
 남북 정상회의록 공개 파동을 시작으로 세월호 참사를 거쳐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에 이르기까지, 박근혜 정부는 보수의 가치와 정면 대결하는 보수 정부였다. 한국에서 보수의 세계관은 체제 경쟁을 전제했고, 북한을 주적으로 하는 대결주의는 한국 보수의 근본 정서로 자리 잡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수에게 국가란 북한과의 대결을 집행하는 총동원 기구였다. 국가의 적은 휴전선 이북에도 있지만 이남에도 있었다. 국가권력은 ‘국가의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상상되었다. 문제는 박근혜 정부의 이런 모습이 박근혜라는 기묘한 정치인의 일탈로 인한 결과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는 대결주의를 내면화한 한국 보수의 본령에서 곧바로 도출되는 태도였다.

 


 2016년 촛불은 박근혜식 통치를 ‘체제 밖의 어떤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이 맥락에서, 2016년 촛불은 진정으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국가의 적’을 상대하는 총력전 정부와 전시 사령관으로서의 대통령이라는 한국 보수의 통치 원리를 처음으로 전면 기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박근혜 정부와 이를 옹위한 보수는 돌연 오른쪽 끝에서 주변화되었다. 과연 보수는 잃어버린 옛 영토를 회복할 수 있을까?

 

진보가 지나온 긴 터널
보수의 거침없는 퇴행은 분명 진보의 좌충우돌과 갈지자걸음의 도움을 받은 결과였다. 이 책의 3부는 진보가 그들의 지도자 노무현을 떠나보내던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곳에는 노무현 100만 명이 있었다.”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하기까지 진보는 두 번의 대선 패배를 포함하여 긴 터널을 지나야 했다.
 2012년 대선이 끝난 후 저자는 윤여준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인터뷰에서 이 보수주의자는 진보 일각에 존재하는 선악의 세계관을 일축하고, 대선의 패배는 차라리 진보의 ‘자기 정립’ 실패에 있다는 답을 내놓는다. 저자가 왜 박근혜가 아닌 진보 쪽의 문재인을 지지했는가라고 묻자 이 원로는 ‘체제의 지속 가능성’을 생각했을 때 문재인이 더 나은 후보였다는 답을 내놓는다.
 이어지는 글은 이를테면 진보가 왜 ‘자기 정립’을 해내지 못하는가에 관한 보고서이다. 여기서 저자가 내린 중요한 결론은 결국 진보가 집권하기 위해서는 안정된 리더십 창출을 위한 ‘제도화’와, ‘제도에 대한 신뢰’가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지금의 대통령이 이 과업에 성공하고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2014년 8월 당시에는 그것이 가능할 것인지, 누가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어떤 국민도 정치인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2017년 대선은 정초 선거였나?
유권자의 투표 행태는 늘 요동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지속성과 복원력이 강하다. 한번 정착한 기본 구도는 여간해선 바뀌지 않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첫 대선과 1990년 3당 합당을 거치면서, 한국 정치는 지역 구도를 바탕에 깐 진보·호남당과 보수·영남당의 경쟁으로 고착됐다. 이처럼 기본 구도를 짜는 선거를 정치학자들은 ‘정초 선거(founding election)’라고 부른다.
 2017년 대선은 한국 정치의 기본 구도를 다시 재편하는 정초 선거가 될 가능성이 있다. 보수 블록이 구조적으로 쪼개지고, 쪼그라들었다. 보수를 대표하는 두 후보의 득표율 합은 30.8%에 그쳤고, 지지의 보루였던 수도권의 자산 소유 중산층, 영남 보수 연합의 한 축인 부울경(부산·울산·경남), 장·노년 보수 동맹의 한 축인 50대, 이 세 축이 동시에 흔들렸다.
 저자는 묻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루스벨트의 길과 이명박의 길 중 어느 곳을 향하게 될까? 1932년 당선 이후 유권자 지형의 구조 변동을 안착시켜 ‘뉴딜체제’를 완성해낸 루스벨트의 길을 간다면, 2017년 대선의 선거 구도는 지속될 것이고 훗날 이 선거는 정초 선거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반면 무너진 상대 진영을 재건시켜주는 이명박의 길을 간다면, 2017년 대선은 마치 2007년 대선이 그랬듯 단순한 막간극이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촛불 이후 대두한 ‘적폐 청산’과 ‘협치’ 담론을 문재인 정부가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촛불이 열어젖힌 시대의 여러 가능성
4부는 책 전체에서 가장 독특하다. 저자는 2014년에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를 분석한 기사를 쓴 이후로 온라인 공간의 담론 지형을 꾸준히 탐색해왔다. 여성 혐오, 세월호 유가족 혐오,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불공정 논란까지, 한국 사회를 뒤흔든 폭발력 있는 담론들을 추적한 이 부의 이름은 결국 ‘공정의 역습’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의 ‘공정에 대한 감각’이 갈등의 전선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촛불집회는 최순실 국정 농단과 정유라 특혜 논란이라는 희대의 불공정 사태로 폭발했고, 그 흐름에서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를 가장 괴롭힌 주제도 바로 이 ‘공정’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공정인가? 사람들은 어떨 때 공정하다고 느끼고 무엇을 불공정하다고 느끼나? 사람들의 ‘공정에 대한 감각’은 노력에 따른 공정한 보상을 중시하는 ‘비례 원리’와, 보편적으로 평등한 상태를 지향하는 ‘보편 원리’ 두 가지로 나뉜다. 어느 것이 더 강하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사안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다. 의미심장한 부분은 다른 잣대에 의거해 다른 결론을 내린 양자 모두가 스스로를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양자의 차이는 이성의 차원보다 더 깊은 직관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로서, 나아가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비례 원리의 극단에서는 ‘일베’가 스스로를 ‘공정’의 보루로 자임할 수 있게 된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이 ‘공정’ 화두가 ‘체제 복원’ 이후 시대정신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간 사상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신뢰와 공동체 의식과 감시와 처벌이 뒤섞여 연대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4부에서 저자는 기자로서 명성의 중요한 부분인 데이터 저널리즘을 솜씨 있게 펼쳐보이며, 온라인상의 수십만 건 게시글과 댓글들을 직관적인 자료로 정리하여 제시한다. 보수의 재건을 고민하는 지도자와 기획자라면 4부에서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 사회의 진보를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4부를 통해 주어진 과제를 더 분명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      *      *

 

지은이  천관율

<시사IN> 기자.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2008년부터 기자로 일했다.
기자가 글 쓰는 직업이라고 잘못 알고 골랐다. 되고 보니 사람 만나는 직업이었다.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를 받는 타입이 있고 고갈되는 타입이 있다. 전적으로 후자에 속한다. 청중 서른 명이 넘어가면 마이크도 못 잡는다. 방송은 이제 거절하는 멘트도 입에 붙었다. “흥미로운 기획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울렁증이 심해서….” 그런 주제에 11년째 기자를 하다니 스스로 놀랄 때가 많다.
2008년부터 주로 정치 기사를 썼다. 하도 낯을 가리니 정치권 네트워크가 경력 대비 알량하다. 2011년부터 데이터 저널리즘을 비교적 일찍 시도해 이런저런 강연 연사로 불려다녔다. 정작 쓸 줄 아는 프로그램은 워드프로세서 하나다.
의사소통 도구 중에 그나마 멀쩡하게 다루는 도구가 글이다. 영상이 지배하는 시대에도 활자의 매력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다닌다. 할 줄 아는 게 그거 하나라 예측이라기보다는 염원에 가깝다.
기자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디테일에 약하다. 턱밑까지 파고드는 인파이터도 못 된다. 사안의 구조와 맥락을 드러내는 접근법, 드론으로 항공사진을 찍듯 뒤로 쭉 빠져서 보여주는 접근법을 더 좋아한다. 그런 걸 ‘줌아웃’이라고 혼자 부르곤 했다. 그게 첫 책의 제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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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복수』

지리는 세계 각국에 어떤 운명을 부여하는가?

 

로버트 D. 카플란 지음 | 이순호 옮김 | 미지북스 | 548쪽 | 20,000원

 

 

세계적인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의 21세기 권력 판도 분석

트럼프 시대, 미국의 전략은 무엇인가?

 

모든 역사는 지리 위에서 완성되었다.

21세기 역사는 그 역사의 반복일 뿐이다.

 

유럽, 러시아, 터키, 이란, 인도, 중국 등 유라시아 주요 세력들의 한가운데에는 유라시아 심장지대가 있다. 20세기 초엽에 지리학의 거두 핼퍼드 J. 매킨더는 이런 말을 남겼다. “유라시아 심장지대를 차지하는 자가 유라시아 전체를 지배하고 나아가 세계를 지배한다.” 일찍부터 ‘지리’의 중요성을 간파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되살려 도구로 삼은 이 책의 지적 여정 끝에, 로버트 카플란이 도달한 결론은 매킨더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가까운 미래에 유라시아의 모든 곳은 하나로 연결되어 점점 좁아질 것이고, 세력들은 공식처럼 유라시아 심장지대로 쇄도할 것이다. 세계 육지의 3분의 2는 아프리카를 포함한 유라시아이고, 나머지 3분의 1은 아메리카이다. 유라시아가 특정 패권국의 손에 넘어갈 경우, 유라시아 바깥 세력인 미국에게는 묘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국이 생각하는 전략은 무엇인가? 또 우리는 국제정치의 큰 흐름을 어떻게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할까?

 

★★★ 헨리 키신저 추천도서 ★★★

 

"이 책은 지리야말로 국가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지배적 요소였다는, 오랜 진실을 일깨워준다."

 


  

모든 역사의 무대, 지리
영원한 것은 지도상에 나타난 인간의 입지뿐이다. 야심찬 지도자는 죽어 없어지고, 찬란한 문명은 닳아 쇠락하기 마련이지만, 산맥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인구가 희박하던 시기부터 인류는 그들의 입지에 적응하며 공동체를 이루었고, 이런 의미에서 지리는 모든 문명과 역사의 주요 기원이기도 하다. 세계 각지의 인류는 지리와 강고하게 결합하여 고유한 정체성을 일구었고 이것이 오늘날 민족들인 것이다. 한편으로 지리는 수십 년 안에 업적을 이루는 ‘영웅’이나 ‘인류 집단’과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이루는 맨 아래쪽에 자리한 채 감지하기 어려울 만큼 서서히 작용하는 역사의 ‘장기 지속’ 요소이기도 하다.
지도자들은 역사적 경험과 사상을 동원해 통치 철학을 고민하겠지만, 엄밀히는 ‘지리’가 그보다 먼저 그들의 나라를 규정하는 첫 번째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어떤 포악한 독재자나 제국의 황제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자연 장벽’을 만나는 법이고, 모든 인류에게는 기본적으로 비슷한 잠재력이 있지만 때로 그들을 각기 다른 역사적 경로로 이끄는 명백한 지리적 현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리라는 무대 위의 주체, 인간

하지만 지리가 역사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주체는 결국 인간이다. 일을 꾸며나가는 것은 인간이고 그 배경에 지리가 있을 뿐인 것이다. 로버트 카플란은 지리의 중요성에 방점을 찍은 이 저작에서, 지리결정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걸출한 자유주의자(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들을 소환하여 그들 사상의 공통분모를 확인한다. 예를 들어, 냉전 시대에 활약한 이사야 벌린은 ‘인간의 동기’를 강조하며 지리, 환경, 인종적 특성과 같은 거대한 비인간적 힘이 우리의 삶과 세계 정치의 방향을 결정짓는다는 믿음은 그 자체로 부도덕하다고 말했는데, 하지만 이는 ‘인간의 동기’가 비인간적 힘을 넘어설 수 있다는 의미이지 비인간적 힘 자체를 경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른 한편에는 ‘인간의 의지’를 경시하고 ‘지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핼퍼드 J. 매킨더 같은 이도 있다. ‘지정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매킨더는 ‘결정론자’의 대부라는 공격을 받았으나, 카플란에 의하면, 그는 “지리적 요소는 인간적 요소로 극복될 수 있다”는 명제를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힘’에 신뢰를 보낸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카플란이 향해가는 목적지는 꽤 뚜렷하다. “결국에는 환경적 힘과 조화를 이룬 인간이 환경적 힘에 맞서 싸운 인간을 이기게 될 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힌두쿠시 산맥은 여전히 난공불락으로 남아 있다."

 

세계화와 지리의 복수

오늘날 기술의 발전은 ‘거리’를 소멸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화의 첫 단계가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경제로 연결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세계화는 질적 차원에서 세계를 더 좁게, 더 빠르게 연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세계화는 확실히 ‘지리’나 ‘국경’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지리는 잊힐 수는 있어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카플란은 이를 역사적 사례로 확인시켜 준다. 
아직 세계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양분된 냉전 시기, 1980년대에 서구 지식인들은 ‘중부 유럽’이라는 말을 새롭게 부활시켰다. ‘중부 유럽’은 실제 존재하는 지리적 현실이라기보다, 여러 민족이 공존하며 제국을 이루고 문화를 꽃피웠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제국 시절의 추억에 의존한 이상주의의 산물이었다. 말하자면 ‘개념’으로서의 지리였다. 그리고 이 개념에는 ‘동유럽’이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중부 유럽’의 나라들이 소련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담겨 있었다. 그러다가 1989년,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고 ‘중부 유럽’ 국가들이 속속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나 서구의 품에 안기는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인위적 장벽인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제 넘지 못할 벽은 없는 것같이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서구의 이상주의는 폭발했다.
하지만 환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2년 뒤인 1991년 발칸 반도에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 ‘중부 유럽’ 국가들이 연루되어 수십만 명이 인종 청소를 당한, 끔찍한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서구인들은 순식간에 ‘발칸’을 ‘중부 유럽’에서 분리하여 다른 지역, 즉 새로운 근동 혹은 옛 근동의 일부로 규정하는 자신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은 틀린 게 아니었다.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서구인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발칸과 유럽 중심부 사이에는 오래도록 두 공간을 분할해온 카르파티아산맥이 존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발칸’은 유럽보다는 오히려 옛 오스만제국이나 비잔티움제국에 더 가까웠다. 이것이 탈냉전 이후 서구가 목격한 첫 번째 ‘지리의 복수’였다.
이후 서구는 자신들이 2차 대전 당시 ‘뮌헨’의 실수를 반복하여 나치독일 이후 최악의 학살 사태를 방치했다는 반성 아래 인도주의적 개입에 나섰다. 1995년에 보스니아, 1999년에는 코소보에 군사 개입을 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인도주의적 개입’은 이후 소말리아, 아이티, 르완다로 이어졌고 모두 성공적이었다. 그러자 서구는 계속된 성공에 도취되어 이번에는 ‘지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인간의 도덕성은 구김 없이 실현될 수 있다는 판단에 경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감은 미국이 실행한 2000년대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쟁에서 여지없이 박살났다. 그와 함께 1990년대의 착시도 드러났다. 1990년대의 개입은 진보한 공군력에 힘입은 이차원 평면에 진입하는 문제였다면, 2000년대의 산악지대투성이의 아프가니스탄과 위험한 샛길이 즐비한 이라크에서는 전쟁이 이내 삼차원의 모습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미국과 서구는 이러한 ‘지리의 복수’에 의기소침해졌고 이후 군사 개입에 대한 열정은 빠른 속도로 식었다. ‘지리의 복수’의 진짜 위험은 바로 이것, 이상의 후퇴일 수 있음을 카플란은 거듭 확인한다.
‘지리의 복수’에 관한 보다 최근의 예로는 ‘아랍의 봄’ 당시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꼽을 수 있다. 튀니지를 기점으로 민주주의 열풍이 주변 국가들을 휩쓴 이 격변의 첫 단계에서 지리는 새로운 통신 기술의 힘에 밀려 패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혁명의 열기는 곧 분절되어 나라별로 특유의 내러티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 내러티브는 다분히 지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유럽과 러시아가 만들어지다

지리는 세계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20세기 초의 학자 핼퍼드 J. 매킨더는 일찌감치 지리적 관점에서 ‘유럽의 형성’을 설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유럽은 아시아로부터 절구질을 당하면서 형성되었다. 유럽은 동쪽을 제외하고는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을 갖고 있고, 오로지 동쪽으로만 육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로마 제국이 수립한 질서 속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아온 제국과 변방은 중앙아시아 스텝 유목민들의 서진에 짓눌려 다른 대륙보다 일찌감치 압착되는 형세가 되었고, 이는 오늘날 복잡한 민족 구성의 토대가 되었다. 중세의 암흑기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노르드인들(바이킹)과 사라센(이슬람교도), 무어인들에 의해 바다를 차단당한 가운데, 아시아의 투르크족이 들이닥친 것이다. 이렇듯 유럽은 절구질 속에서 탄생했고, 절구의 공이는 바로 유라시아 심장지대의 육지세력이었다.
그런 와중에 16세기가 되면 스텝 민족을 피해 북부 삼림 지대에 숨어 있던 러시아가 바깥으로 나와 유럽의 동쪽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때는 서유럽이 대항해 시대를 연 시대이기도 했다. 이후 서유럽이 바다를 덮고 희망봉을 도는 동안 러시아는 육지로 맹렬하게 세력을 팽창하여 동쪽으로는 시베리아, 남쪽으로는 캅카스산맥에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유럽의 해양세력과 러시아 육지세력의 대결 구도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두 세력의 정체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해양세력은 머나먼 항구들로의 접근이 가능하여 코즈모폴리턴적 힘을 가지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필수 요건인 국경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반면, 러시아는 육지 너머 보이지 않는 적을 의식하며 상시적인 안보 불안에 시달렸고, 끝없는 팽창으로 이를 만회하는 역사를 써나갔던 것이다.

 

매킨더의 유라시아 중심 이론

19세기에 육지세력은 해양세력에 비해 세계적 차원의 영향력이 현저히 낮았다. 하지만 19세기를 끝으로 유라시아가 더 이상 정복 가능한 곳이 남지 않은 ‘폐쇄적 지형’으로 변모하면서, 해양세력과 육지세력의 관계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유럽이 고대에 기마 유목민에게 노출되어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면, 철도망으로 뒤덮인 20세기 또한 그와 비슷한 지정학적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매킨더의 유라시아 중심 이론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일단 ‘폐쇄적 지형’이 된 다음부터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는 10년, 20년 시간이 감에 따라 더욱 응집력 있는 단위가 되어 결국 ‘세계 섬’을 형성하게 될 것이며, 그중 철도망으로 뒤덮인 거대한 유럽-아시아 지역이 세계 정치의 중추지대가 된다는 것이 매킨더의 생각이었다. 매킨더의 이 이론은 최대한 ‘지리’에 천착하여 도출된 것으로, 당시 러시아의 철도망은 아직 부실했고,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격파하는 등 해양세력이 곳곳에서 육지세력인 러시아를 좌초시키던 시점에 나왔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었다. 매킨더의 유라시아 중심 이론은 단 몇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의 대양(하나로 연결된 바다)이 지구의 12분의 9를 차지하고, 하나의 대륙(세계 섬, 즉 유라시아-아프리카)이 12분의 2를 차지하며, 그보다 작은 다수의 섬들이 있는 가운데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가 나머지 12분의 1을 차지한다. 그리고 동유럽을 통치하는 자가 심장지대를 지배하고, 심장지대를 통치하는 자가 세계 섬을 지배하며, 세계 섬을 통치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미국은 아메리카의 나라이지 유라시아의 나라가 아니다.

 

유라시아의 주변지대(림랜드)

유라시아의 심장지대를 모든 정치학자나 역사학자들 사이에 합의된 용어로 보기는 어렵다. 학자들에 따라 작게는 중앙아시아에서, 조금 넓게는 동유럽과 메소포타미아, 북아프리카 지역 등이 포함된다. 유라시아 심장지대는 지리적으로 유라시아의 가운데에 있으면서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을 낳고, 연쇄적으로 주변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곳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장지대의 외곽, 즉 유라시아의 주변지대에 속하는 나라들은 비교적 분명하게 지목할 수 있다. 바로 유럽, 러시아, 중국, 인도, 이란, 터키이다. 유라시아는 이들 나라들이 심장지대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싼 형세를 이루고 있다. 카플란은 이들 ‘주변지대’를 설명하기 위해, 육지세력에 의한 패권의 등장을 호언한 매킨더에게 의존하기보다 1943년에 타계한 니컬러스 스파이크먼을 더 자세히 소개한다. 스파이크먼은 ‘바다’를 중시함으로써 ‘미국’의 지정학적 운명을 드러내는 한편, 바다와 인접한 유라시아 주변지대에 높은 가중치를 부여해 국제정치의 요체는 심장지대가 아니라 ‘주변지대’에 있다고 파악하였다. 그는 주변지대들이 ‘지리’를 배경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서 심장지대와 다른 주변지대들과 끊임없이 분쟁을 벌이게 될 것으로 보았다. 즉, 해양세력에 의한 유라시아의 세력균형이라는 아이디어가 스파이크먼(덧붙여 해군의 중요성을 역설한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을 통해 구체화된 것이다.

 

오늘날 지리는 세계 각국에 어떤 운명을 부여하는가?

카플란은 세계 주요 국가들의 역사를 ‘지리’의 관점에서 새롭게 요약해서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유럽은 지리에 분열과 통합의 요소가 배태되어 있어 쉽게 어느 한쪽으로의 귀결을 논하기 어렵다. 분열의 배경에는 산맥과 강, 계곡들로 자잘하게 분절된 유럽의 지리가 있다. 역사적으로 독일은 해양세력의 성향과 육지세력의 성향을 함께 가진 국가로서 유럽 통합의 미래는 독일이 유럽연합의 무게중심을 자국 쪽으로 끌어올 수 있느냐 그리고 ‘중부 유럽’을 건설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때 ‘중부 유럽’은 그리스를 포함한 유라시아 심장지대를 제어하기 위한 중요한 전략 요충지가 된다.
러시아 표트르 대제(1682~1725년) 시기에 ‘지리적 부적합함을 무릅쓰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의 수도로 건설하였다. 유럽을 지향하기 위해서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단기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유럽에 치우쳤음에도 광활한 제국을 통치하는 수도로 기능했으나, 결국 볼셰비키가 집권하면서 내륙 도시인 모스크바에 수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볼셰비키는 앞선 시대 차르들의 딜레마를 보았던 것이다. 이후 소련은 다시 완고한 육지세력으로 환원되었고,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는 유럽과 섞이지 못한 채 남고 말았다. 러시아는 한때 심장지대를 품었던 나라의 후신으로 여전히 그 지역에 대한 높은 근접성을 갖고 있다. 구소련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심장지대에 중요한 압력을 형성할 것은 분명하다. 한편으로 러시아는 언제나 그랬듯 바다로의 출로를 찾고 있고, 우크라이나 사태가 극명하게 보여주었듯, 그 유력한 경로는 심장지대에 존재하고 있다.

 

 

기복 지도를 보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

 

중국 황허 강과 웨이허 강을 중심으로 중원 통일의 도정에 오른 이래, 진시황이 최초의 통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중국은 러시아나 유럽과 마찬가지로 스텝 유목민에 의한 절구질을 당했기 때문에, 폐쇄된 지리를 구축하기 위한 긴 여정에 오른다. 그리하여 청나라 시기에 오면 오늘날과 거의 일치하는 확대된 국경선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20세기의 중국은 육지로는 유라시아의 심장지대로 향하고 있고, 바다로는 대만과 남중국해, 인도양으로 물길을 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일대일로).
인도는 통일의 역사가 극단적으로 짧은 나라로 이는 지리 때문이었다. 인도의 수도인 델리는 역사적으로 인도아대륙에서 기원한 도시가 아니라, 중앙아시아를 통해 들어온 침략자들의 도시였다. 인도아대륙은 중앙의 고원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분단된 형세이고, 인구 분포를 결정하는 강줄기 또한 동서로 공간을 갈라놓아서, 지리적 차원의 구심점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인도의 영토는 해양세력(영국)에 의한 결과임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는 오늘날 인도가 겪고 있는 지정학적 어려움도 상당 부분 설명해준다. 인도의 지난날 역사의 단층선은 오늘날 인도의 국경선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란은 중동의 이란 고원을 온전히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다. 게다가 북쪽으로 카스피해와 남쪽으로 페르시아해, 아라비아해와 면해 있어 육지와 해양 어느 쪽으로도 경로가 자유롭다. 인구가 많은 데다 자원 강국으로서 앞으로 유라시아의 교통과 자원은 이란에서 출발하고 이란을 거치게 될 것이다. 이란은 시아파 종교국가로서 중동의 여러 테러 단체의 배후국가이지만, 국민들은 그런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지는 않는다. 카플란은 이란이 앞으로 서구적 가치에 포섭될 가능성이 있다고 점친다.
터키는 오스만제국의 붕괴 후 태어난 나라지만 서구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케말 아타튀르크의 영도 아래, 다문화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나라로 새 역사를 시작했다. 아타튀르크는 수도를 유럽 지향적인 이스탄불에서 소아시아(아나톨리아)의 중심지인 앙카라로 옮겼는데, 이 때문에 터키는 서서히 소아시아에 깊숙이 뿌리박힌 이슬람 문명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정기적으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와중에 민주주의가 들쭉날쭉 발전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오히려 반미, 반이스라엘 정서를 강화하고 터키를 이슬람 문화권에 결속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오늘날 터키가 에르도안 대통령을 중심으로 이슬람 종교국가로 회귀하는 듯한 모습은 지리에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미래에 관하여 이 책은 어떤 힌트를 줄까? 그는 엄청난 군사력과 증오가 밀집한 한반도의 군사분계선 역시 지리의 힘을 무시하고 인간적 힘으로 형성된 장벽이므로, 결국은 20세기의 베를린 장벽처럼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지리는 이미 통일 한국(Greater Korea)을 예고하고 있다. 분단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든 통일의 힘은 결국 예기치 않게, 또 때로는 폭력적이고 매우 빠른 속도로 개가를 올릴 것이므로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트럼프 시대, 미국은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21세기 초 9.11 사태 이후 사람들은 향후 세계가 미국에 의한 단극 질서로 나아가는 것인지, 미국은 ‘제국’인지 아닌지 궁금해했다. 미국이 제국의 전범인 로마와 비교되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십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나온 이 책에서, 카플란은 미국의 운명에 관한 두 가지 치명적인 선고를 내린다.
카플란이 미국의 상대적 쇠퇴를 인정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의 관심사는 미국 국력의 구체적인 쇠퇴의 증거를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미국의 외교적 자원이나 군사력, 보편적 가치에는 여전한 신뢰를 보낸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미국의 ‘지리’ 자체다. 미국이 축복받은 입지에서 일찌감치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팽창을 마치고 대양에서 우월적 지위를 누렸다면, 이제 유라시아가 긴 시간에 걸친 ‘세계섬’으로서의 대두를 앞두고 있다는 것이다. 카플란은 유라시아가 단독 패권 세력의 손에 넘어가는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철도, 도로, 파이프라인들이 중앙아시아와 특히 아프가니스탄 허브를 통해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모든 곳을 연결할 것이고, 통합에는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만약 유라시아가 유기적으로 통합된다면, 미국은 그에 발맞추어 일종의 균형추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제 미국 단독으로 그것이 가능한 시대는 끝났다. 카플란은 미국이 이 위협을 상쇄하려면, 무엇보다 아메리카에서 ‘통합세력’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멕시코와 중남미 등의 주변국을 조화롭게 포섭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장벽은 자연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다

 

카플란의 다른 한 가지 치명적인 선고는 트럼프 대통령의 공약과 관련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왜 멕시코와의 국경지대에 ‘장벽’을 세우려는 것일까? 세계 전역에서 경찰 역할을 자임하던 미국이 왜 갑자기 멕시코 문제에 그렇게 집착하게 된 것일까? 이 또한 지리가 미국에 부여한 ‘운명’과 유관하다. 답은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은 인간이 얼마든지 넘을 수 있는 ‘인위적 국경’이라는 것이다. 일부 미국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멕시코인들의 이주는, 과거 미국에 빼앗긴 지역들에 대한 일종의 레콩키스타(영토 회복 운동) 성격마저 띠면서 미국-멕시코 국경을 더욱 흐릿하게 만들고 있다. 한편으로 멕시코인들의 이주는 멕시코 정부가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만약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에서 갱단이 이긴다면 “미국은 초국가적 마약 카르텔의 통제를 받는 마약 국가와 3,200킬로미터 길이의 국경을 공유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것 같은 일이 미국의 뒷마당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국경 장벽 건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카플란은 미국이 자신의 힘을 과신하여 미국의 이상을 전 세계를 상대로 투사하는 일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에서 인식을 공유한다. 그러나 트럼프의 국경 장벽 건설은 아메리카의 통합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단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카플란이 제안하는 방향과는 반대된다고 할 수 있다.
카플란은 미국이 유라시아에서는 균형화 세력, 아메리카에서는 통합 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유라시아 지리가 야기하는 연쇄적인 효과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의 유력한 결론이 될 것이다. 덧붙여 카플란은 말한다. 미국은 역내 세력 통합이 달성된 후에는 해양세력으로서, ‘중부 유럽’의 자유주의적, 지적 대의 못지않은 대의를 지구 전역에 투사해야 한다고. 결국 ‘지리의 복수’를 피하거나, 피하지 못하더라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중요한 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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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로버트 D. 카플란(Robert D. Kaplan)

외교 문제와 여행 관련 저작 14권을 저술한 미국의 저명한 작가 겸 저널리스트. 2011년 <포린폴리시>에 의해 ‘세계 100대 사상가’에 선정되었으며, 시사 월간지 <애틀랜틱>의 해외 특파원으로 25년 이상 활동한 제3세계 전문가이기도 하다. 2006~2008년에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의 특임 객원교수로 국가 안보를 강의했고, 2009년에는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에 의해 국방정책위원회 위원으로 발탁되어 2011년까지 활동했다. 2008년 이래 워싱턴에 본부를 둔 신미국안보센터의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한 그는 현재 전략정보전문 분석업체 스트랫포의 지정학 담당 수석 애널리스트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발칸의 유령들』, 『로버트 카플란의 타타르로 가는 길』, 『무정부 시대는 오는가』, 『제국의 최전선』, 『승자학』, 『몬순』 등 다수가 있고, 이 중 많은 책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옮긴이  이순호

전문 번역가. 홍익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였으며 미국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서양사를 공부하고 석사 학위를 받았다. 『로버트 카플란의 타타르로 가는 길』, 『제국의 최전선』, 『살라미스 해전: 세계의 역사를 바꾼 전쟁』, 『살라딘』, 『위대한 바다: 지중해 2만 년의 문명사』, 『발칸의 역사』, 『완전한 승리, 바다의 지배자: 최초의 해상 제국과 민주주의의 탄생』, 『로마 제국과 유럽의 탄생』, 『비잔티움』, 『현대 중동의 탄생』, 『이슬람 제국의 탄생』, 『다이너스티: 카이사르 가문의 영광과 몰락』 등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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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착취자의 나라』

비정규 노동으로 본 민주공화국의 두 미래

이한 지음 | 미지북스 | 228쪽 | 13,800원 

 

 

비정규직 문제의 레드라인은 어디인가?

격화되는 비정규직 갈등, 하지만 해법은 있다!

 

'노동생산성 증가'냐 '노동 압착'이냐, 기로에선 한국 경제

경제적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을 모두 만족시키는 비정규직 해법!  

 

한국 경제는 오래전부터 성장 둔화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의 동력인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려는 노력보다는 노동 압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왔다. 오늘날 첨예한 사회 갈등의 원인이 되는 비정규직 문제나 양극화 같은 사회적 불평등은 그러한 시도의 역사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절반의 고용과 삶의 안정성이 극도로 낮은 처지로 떨어졌고, 고용 시장에서는 비숙련 노동력을 주로 공급하는 부문이 급격하게 성장했다. 이들은 실제 국민경제에 아무런 생산적 기여를 하지 않으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기생하는 존재이며, 우리 사회의 ‘중간착취자’들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정치 문화는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이분법적 사고와 폐쇄적인 진영 논리로 갈라졌지만, 정작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올바른 답을 내놓고 있지는 못하다. 한편에서는 경제적 효율성을 이유로 비정규직 제도의 확대를 이야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적 충격을 이유로 비정규직 제도의 폐지를 주장한다. 『중간착취자의 나라』의 저자 이한 변호사는 비정규직 제도의 사회적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부정적 충격과 고통을 최소화하는 새로운 해법, 즉 경제적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을 모두 만족시키는 비정규직 해법을 제시한다.

풍부한 실증 자료를 바탕으로 저자가 제안하는 해법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중간착취자’로 상징되는 현재의 경제구조, 즉 생산성 증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간접 고용 부문을 제거해야 한다. 둘째, 생산성 증가를 위해 가장 많은 부담을 지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 저자는 우리의 미래가 ‘특권층이 나머지 구성원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나라가 될지, 아니면 공정한 조건에서 협동하는 사회가 될지’는 우리가 이 중대한 문제의 고통을 제대로 포착하고, 고통을 완화하는 대안을 경제적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에 따라 수립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고 말한다.

 


 

▲ 흑사병으로 중세 유럽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자 봉건 영주들은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일부 영주는 현금으로 일정한 지대를 내게 하고 나머지 수확물을 농노가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방식은 농업 기술 혁신과 생산성 증가를 가져왔다. 그러나 많은 영주들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대응했다. 예전만큼 수확물을 얻기 위해 농노들에게 더 많은 영지에서 일하게 했다. 농노들의 예속은 강화되고 노동은 핍진적으로 착취되었다. 당연히 수많은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역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이 사회는 생산성 증가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노동 압착의 길로 갈 것인가?   

 

왜 ‘중간착취자의 나라’인가?

‘중간착취자’란 스스로는 생산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가 생산한 몫에서 일부를 가져가는 존재를 말한다. 한마디로 기생충 같은 존재다. 『중간착취자의 나라』에서는 노동시장에서 도급계약을 맺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원청 업체에 제공하는 ‘인력 공급 업체’를 중간착취자로 보고, 그와 관련된 이슈에 집중했다.

중간착취자는 농경사회에도 있었다. 바로 마름이란 존재가 그것이다. 마름은 소작인과 지주를 연결시켜주고 ‘계속해서’ 대가를 받았다. 그래서 소작인이 지주에게 바치는 지료에는 늘 지주가 마름에게 주는 중간착취의 대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땅이 없는 소작인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지주에게 착취당하고, 생산수단과의 연결 고리에 들어앉아 중간착취를 하는 마름에게 다시 한 번 착취당했다. 더 큰 문제는 마름의 존재가 개별 지주와 소작인과의 관계에서만 끝나지 않고 농업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생산의 주체인 소작인에게 농업기술의 혁신을 통해 생산성에 기여할 유인誘因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중간착취자가 존재했던 농경사회는 생산성의 발전이 없거나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다.

오늘날의 인력 공급 업체 역시 농경사회의 마름과 다를 바 없다. 마름이 그랬듯 인력 공급 업체 역시 원청 업체와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력 공급만을 담당하며 중간착취를 통해 노동생산성을 낮추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미 여러 실증 자료들에서 이러한 ‘근로자 공급’이 노동생산성을 낮춘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데도, 왜곡된 신화(비정규 노동의 확대가 노동생산성을 높여줄 것)에 의해 오히려 그 범위가 더욱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낮은 소득 때문에 부채를 지고, 자살하고, 범죄를 일으키고, 내수는 침체되고, 혁신이 감소되고, 출산율이 계속해서 하락하고, 부패가 증가할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은 경찰의 권력 범위를 확대하고, 사적 경비원을 고용하고, 외국에서 노동력을 들여와 노동 압착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흑사병 이후 중세 봉건 영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른 길은? 이 사회가 동등하고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이라는 원리 위에 정초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길이다. 이득과 부담이 공정하게 할당되고, 존엄을 유지할 수 있고, 숙련과 지식을 형성할 만한 여유를 가지며, 합당하고 충분한 소득을 받고, 자신이 제대로 대우받고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에 혁신에 기여하려고 근면을 끌어내며, 내수가 활성화되고, 혁신이 증가하고, 출산율을 하락시키는 경제적 장애들이 완화되고, 부패는 감소하고, 이는 다시 생산성의 향상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두 미래 중 하나는 우리의 현실이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중간착취자의 나라’가 그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비정규직 제도의 순기능과 사회적 충격

지금의 비정규직 문제는 비정규직 제도 자체에 있지 않다. 비정규직 제도에는 역기능뿐 아니라 분명 순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비정규직은 노동력의 유연한 공급을 가능케함으로써 전체 국민경제에서 경제적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노동시장이 산업구조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자본이 노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고용하게끔 한다. 또한 수요가 쉽게 변하는 부문의 산업 활동이 증가하도록 돕는다. 이는 비정규직을 수용함으로써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길 수 있으며,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직업 경험을 쌓아감으로써 정규직으로 이전할 수 있는 기회가 창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지금의 비정규직 제도가 한 사회의 경제성장 동력인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방식 대신 오히려 떨어드리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데 있다. 비정규직 제도는 숙련 형성과 지식 축적을 저해함으로써 사회 전체적으로는 인적 자본의 감소를 불러온다. 여러 실증 연구들은 비정규직이 대폭 증가할수록 그 사회의 생산성이 낮아진다는 유력한 근거들을 보여준다. 또한 비정규직은 고용 안정이 필요한 경기 하강기에 공격적인 해고를 초래하고 이는 총수요의 감소와 결부된 경기위축을 심화시킨다. 개별 기업 입장에서 합리적인 것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다(이른바 ‘구성의 오류error of composition’이다). 더 나아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노동소득 분배율을 하락시키고 이는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제도는 노동자의 건강과 삶의 안정성을 크게 해침으로써 비정규직 노동자 자신에게 가장 큰 고통과 위험을 가져온다. 이러한 비정규직 제도의 부정적 효과와 악순환은 인력 공급 업체가 ‘중간착취자’로서 기능하는 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고 미래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경제 성장, 양립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해법은 단순하다. 비정규직 제도의 순기능을 제대로 활용하면서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비정규직 제도를 재설계하는 것이다. 새로 설계 되는 비정규직 제도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이득이 되는 제도라면, 설사 불평등한 제도일지라도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해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이익이 증진되는 경우에만 불평등이 정당화된다는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의 원칙’을 준용한다. 비정규직 제도의 문제 해결은 경제적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 둘 다를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충분히 고안될 수 있다.

그렇다면 생산성을 높이는 비정규직 제도는 어떻게 설계되어야 하는가? 『중간착취자의 나라』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 생산성 증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간접 고용은 금지한다. 둘째, 생산성 증가를 위해 정규직보다 더 큰 부담을 지는 만큼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동일 노동에 대해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한다. 그에 대한 적정한 임금은 정규직의 130퍼센트이다. 셋째, 특수 고용직 등 그 실질이 노동자인 사람들의 법적 근로자로서의 보호가 이뤄져야 한다.

이 모든 개혁을 관통하는 핵심은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공정한 협동 조건’의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질문을 통해 모든 비정규직 제도를 검토하고,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 첫째, 그 고용 형태는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통해 생산을 증가시키는가? 둘째, 증가된 생산물은 가장 많은 부담을 지는 이들을 더 열악하게 만들지 않고, 적정한 보상과 기회를 줌으로써 그들에게도 이득이 되는가?

이 두 질문 중 하나라도 ‘아니오’라는 답이 나온다면, 그 비정규직 제도는 정당화될 수 없다. 모두 ‘예’라는 답이 나올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일부 사회 구성원들이 나머지 사회 구성원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말대신 모든 구성원들이 협동적 과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이 어떤 보상도 없이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불평등과 부담을 강요하는 비정규직 제도가 아니라, 그들이 지는 위험과 부담에 걸맞은 합당한 보상을 주는 방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비정규직 제도는 부당하게 축소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자유를 복구시킬 방안을 담고 있어야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숙련 과정을 쌓고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공정한 기회 균등을 도모해야 한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노동조건 차이가 그러한 불평등 체계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비정규직에게도 이익이 되는 원칙으로 규율되어야 한다.

 

왜 비정규직은 정규직 임금의 130퍼센트를 받아야 하는가

비정규직 제도는 노동 유연성을 통해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달성하는 데 이바지한다. 즉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고용 안정을 대가로 전체 노동생산성 증가를 위해 가장 크게 부담을 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가장 크게 부담을 지는 만큼 가장 큰 보상을 받아야 한다. 부담을 더 진다는 이유로 삶의 기회가 축소되거나 굴곡되지 않는 것에 더하여, 더 많은 보상을 합당하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종류의 유사한 업무를 하는 비정규직은 정규직보다 임금을 얼마나 많이 받아야 하는 걸까? 1배로 받는 것, 똑같이 받는 것은 부정의하다. 그러면 부담을 더 많이 지는 사람이 부담을 덜 지는 사람과 동일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1.5배 이상을 받는다면 비정규직의 고용 유발 효과가 사라진다. 이렇게 되면 정규직에게 1.5배의 임금을 주고 초과 노동을 시키는 것이 사용자에게 더 이익이 된다. 이는 사람들을 과로에 시달리게 하고, 일부 사람들에게는 취업할 기회를 주지 못할 가능성을 증대시킨다. 그러므로 1배와 1.5배의 중간 정도인 1.3배가 적정한 비정규직 임금이 될 수 있다.

 

노동생산성이냐 노동압착이냐, 우리에게 펼쳐진 두 미래

흑사병은 중세 유럽 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불러왔다. 그런데 이러한 인구 감소는 두 가지 대응과 연결되었다. 하나는 자유와 생산성을 높이는 대응, 다른 하나는 자유와 생산성을 낮추는 대응이었다. 일부 영주는 현금으로 일정한 지대를 내게 하고, 나머지 수확물을 농노가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이런 경우 농노는 농업 기술을 혁신하여 더 많은 수확을 하려는 유인을 갖는다. 이러한 변화는 영주의 땅에 예속되어 강제로 일하던 과거보다 훨씬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많은 영주들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대응했다. 즉 농노의 자유와 농업 생산성을 낮추는 방식으로 대응한 것이다. 인구가 줄어드니 같은 시간을 영지에서 일해도 수확이 예전보다 못하게 되었다. 영주들은 예전만큼 수확물을 얻기 위해 농노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영지에서 일하게 했다. 그 결과 노동은 핍진적으로 착취되었다. 당연히 수많은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성장의 둔화를 맞이하고 있다. 성장의 둔화는 이 사회에 두 가지 갈림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성장의 근원적인 동력인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생산성’은 그대로 두고, 동일한 노동비용으로 더 많은 산출을 강요하는 ‘노동 압착’을 실시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 사회의 권력층은 흑사병 이후 많은 중세 봉건 영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후자의 방향을 취하고 있다. 이는 이 사회의 장기적인 미래를 조망하고 기획하는 능력이 이들에게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들은 추상적인 용어로 구체적인 현실을 호도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던져야 할 최종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특권층이 나머지 구성원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나라인가, 아니면 공정한 조건에서 협동하는 나라인가?’ 이 두 미래는 열려 있다. 이 중 어느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는 우리가 이 중대한 문제의 고통을 제대로 포착하고, 고통을 완화하는 대안을 경제적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에 따라 수립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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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이한

변호사이자 시민교육센터 대표이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민주주의와 정치철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을 하고 있으며,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 어떻게 하면 그런 사회를 이룰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삶은 왜 의미 있는가』(2016년),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2016년),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2012년), 『이것이 공부다』(2012년), 『너의 의무를 묻는다』(2010년), 『철학이 있는 콜버그의 호프집』(2005년), 『탈학교의 상상력』(2000년), 『학교를 넘어서』(1998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사치 열병』(2011년), 『포스트민주주의』(2008년), 『이반 일리히의 유언』(2010년), 『계급론』(2005년) 등이 있다. 시민교육센터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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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게 해줘!』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

아마미야 가린 지음 | 김미정 옮김 | 미지북스 | 344쪽 | 15,000원 

 

 

우리 세대는 어쩌다 이 지경이 돼 버린 걸까?

평범하게 일하는 것의 의미가 무너진 사회

 

프레카리아트 운동의 상징 아마미야 가린의

21세기 청년 불안정 노동자 르포르타주

 

21세기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의 절망적인 현실을 집요하게 파헤친 충격의 르포르타주. 우리 세대는 왜 이 지경가지 추락한 걸까?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려지는 청년들은 노예가 아니다. 일본 프레카리아트 운동의 상징 아마미야 가린이 생생하고 속도감 있는 인터뷰를 통해 "제발 좀 살게 해달라"는 붕괴된 세대의 실상을 폭로한다. 

 

 

문재인 대통령 추천 도서

문재인 대통령은 2011년 <시사인>에서 이 책을 추천했고,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출간한 『문재인의 서재』에서 다시 한번 첫번째 추천 책으로 소개했습니다. (이 책은 2011년에 출간된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의 개정판입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우울한 노동의 디스토피아

주위를 둘러보자. 저임금 비정규직 생활에 찌들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20대와 30대 청년들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제는 40대와, 노동 시장에 대거 들어온 노년층까지 여기에 포함된다. 계약직, 파견, 하청, 아르바이트…… 이들 앞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우울한 노동의 디스토피아가 펼쳐져 있다. 일 년 일 년 시간이 지나도, 직장을 옮겨봐도 달라지는 건 없다.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고 건강은 점점 나빠져 간다. 꿈은 시들어가고 마음의 병이 깊어간다. 당일 해고와 임금 체불 같은 일들이 버젓이 횡행하고, 노동 조건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도시에는 불안정 노동자들을 위한 고시원과 원룸촌이 요처마다 들어서고, 한편에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홈리스들이 모습을 드러내 서성이고 있다.

정규직 사원이라고 해서 사정이 좋은 것은 아니다. 한번 정규직에서 밀려나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능력을 증명하고 경력을 만들기 위해 과로사 직전까지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혹 그런 가혹한 노동 조건이 싫어서 그렇게는 일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니트족’으로 분류되어 이내 ‘쓸모없는 사람’으로 매도당한다. 무엇보다, 몇 안 되는 정규직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젊은이들이 있다. 모두가 적 아니면 경쟁자가 되는 와중에 고독이 깊어간다.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자기 책임’이라고 스스로를 탓하며 마음이 병들어간다.

 

평범하게 일하는 것의 의미가 무너진 사회

한때 일본에서는 ‘프리터’가 자유롭게 일하는 새로운 노동 방식으로 널리 환영받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도 ‘프리랜서’ 등의 노동 방식이 주목받은 적이 있었다. 원할 때 일하고 남는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다는 환상적인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었다.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프리터의 수입은 겨우 생존을 보장할 정도에 불과하고,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언제 잘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프리터는 직장에 애착을 가질 수 없고 숙련도도 좀처럼 늘지 않는다. 고용도 수입도 불안정하기 때문에, 생활도 주거도 싸구려로 채워지고, 삶은 불안정해진다. 내일에 대한 희망도 가질 수 없다.

여기에다 사람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이상한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항간에서 ‘자기 책임’, ‘노력’이라는 말을 자주 마주친다. 문제는, 사회 구성원 중 일부는 무조건 비정규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기 책임’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런 현실을 잊는다. 무의미한 노력을 강요당하는 것만큼 심한 고문도 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가 자기 잘못인지 다른 누구의 잘못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분노를 쌓아간다. 때로 그 분노는 자기를 향한다. 때론 자살을 결심하고 동반자를 찾는다. 때론 타인을 향해 무차별적 비방과 폭력을 휘두르고, 때론 가까운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식으로 폭발한다. 산발적으로, 자기만의 방에서, 집 안에서, 인터넷에서, 거리에서. 개개인 삶의 ‘불안정’이 다른 사회적 단위의 ‘불안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프레카리아트, 만들어진 불안정 노동자층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돼버린 걸까? 예전에는 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이 취직할 수 있었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다르지 않았다. 기업들은 갓 졸업한 사람을 대거 채용했고 처음부터 일을 가르쳐주었다. 지금같이 ‘현장에 투입되어 즉시 일할 수 있는 능력’만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취직하면 사실상의 종신 고용제 아래 연차가 쌓이면서 급여가 올랐고, 장래 설계도 가능했다. 그런데 이게 언젠가부터 엉망진창이 되었다.

사람들은 종종 자유로운 삶의 방식으로 ‘프리터’를 택했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처지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 ‘불안정 노동자층’은 일본 기업과 정부의 장기적인 기획의 결과로 등장했다. 지난 세기에 일본 기업들은 불황의 타개책으로 ‘고용 유연형’ 노동자층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정부와 정치권은 기업의 요구에 부응해 오랜 기간에 걸쳐 노동 관련 법규를 손질했다. 즉, 프리터 등 일본 사회에 출현한 수많은 비정규직은 그들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만들어진 불안정층’이었다. 그러나 비정규직은 그들의 기여와 희생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인정받지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정규직과 구분되어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죽거나 죽도록 일하거나 : 과로사와 과로 자살

경제 구조가 재편되면서 ‘고용 유연형’ 노동자층을 관리하는 새로운 기업들이 등장했다. 바로 중간 도급 업체(파견·청부 기업)들이다. 『살게 해줘!』에서는 우엔단 유지의 사례를 소개한다. 니콘에서 일하는 파견직 노동자였던 그는 제대로 된 노무관리를 전혀 받지 못하고 죽도록 일했다. 그는 주야 교대근무와 철야 근무를 강요당하고, 반도체 제조공장의 ‘클리닝룸’에서 일하면서 서서히 몸의 감각을 상실해갔다. 나중에 유지는 자신이 기본적인 인지 기능조차 손상을 입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살을 택했다. 니콘은 그를 사용할 뿐 관리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었고, 파견업체 쪽은 그가 어디서 일하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그는 죽어갔던 것이다. 유지의 마지막 말은 “헛되이 시간만 보냈다”였다. 정규직의 경우도 얼마든지 사정이 나빠질 수 있다. 승승장구하던 스와 다쓰노리 씨는 ‘재량 노동제’하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과로를 거듭했다. 성과를 내는 데 실패한 후 그가 찾은 유일한 해결책은 ‘자살’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죽을 것 같으면 직장을 그만두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과로 자살의 경우 사안이 단순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피해자 대부분이 심신이 망가진 채로 극심한 우울증을 겪기 때문이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

문재인 대통령은 『문재인의 서재』(2017년)에서 이 책 『살게 해줘!』를 추천하며 이렇게 썼다. “취업하지 못한 젊은 사람들이 자기 탓을 너무 많이 한다. 그것이 그들을 더 괴롭히고 있다. 문제는 그들 탓이 아니다.” 그렇다! 잘못한 것은 결코 청년 불안정 노동자들이 아니다.

이 책에서 당사자들이 증언하는 ‘살기 힘듦’의 문제, 즉 불안정한 일자리, 불안정한 삶, 빈곤, 우울, 연애와 결혼, 출산의 포기, 과로와 과로 자살 등은 어느 사이엔가 한국에서도 일상적 상황이 되어버렸다.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의 긴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사람들은 ‘살기 힘듦’의 문제를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단순히 노동 양태나 계급 규정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삶이나 존재 양식 자체의 ‘불안정함’이 바로 핵심이라는 것, 즉 ‘프레카리아트’란 말과 문제의식이 비교적 널리 공유되고 있다. 젊은 프리터(비정규직)의 문제가 나이 든 빈곤층의 문제로 이행, 접속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 사회는 지켜보고 있다. 우리가 신자유주의의 터널 어디쯤에 와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회 구조가 대대적으로 재편된 결과 살기 힘들어졌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다.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 밥은 먹을 수 있게 해줘라!

누군가는 왜 지금 젊은이들은 거리에 나서서 싸우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폭동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산발적이고 또 폭발적인 모습으로. 히키코모리라 불리면서 집 안에 틀어박혀서. 니트족이란 이름으로 조용히 파업을 일으키면서. 지도자 하나 없이, 누구의 지침도 없이, 사람들은 그냥 이렇게 이 사회를 포기하고 있다. 젊은이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런 상황은 지금 ‘평범하게 일한다’는 것의 의미가 붕괴된 것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책은 구체적인 현장의 당사자들 목소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깨닫게 해준다. ‘을 대 을’ 또는 ‘을 대 병’ 구도에 갇혀 서로 갈등하고 남에게 억압을 떠넘기는 게임을 반복할 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위계를 세분화하고 공고하게 만드는 세력을 향해 항의해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의 목소리들은 일깨운다. 이 시대 우리가 겪는 살기 힘듦의 문제는 결코 개인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고, 구조적, 공동체적 모색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고 이 책은 강력히 주장한다. 저자 아마미야 가린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이제껏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막연하게 느껴졌던 것이 지금은 분명하게 구조의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싸움의 테마는 단지 ‘생존’이다. 살 수 있게 좀 해달라는 것이다.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내놔라. 밥은 먹을 수 있게 해줘라.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일은 시키지 마라. 나는 인간이다. 슬로건은 단지 이것뿐이다. 이 책의 목적은 단 하나, 마땅히 해야 할 반격을 시작하는 것이다.”

 

▲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가 날로 커져가고 있으며, 비정규직의 규모도 증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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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아마미야 가린(雨宮処凛)

1975년 일본 홋카이도 출생. 작가이자 반빈곤 운동 활동가. 스무 살 무렵 ‘살기 힘듦’의 문제에 눈을 뜬 후 처음에는 우익 단체 활동을 통해 사회와 접속했다. 우익 펑크밴드 보컬로 활동하는 등 남다른 이미지 때문에 ‘미니스커트 우익’이라 불리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 헌법 전문을 우연히 읽은 것을 계기로 생각의 방향이 바뀌었다. 26세에 출간한 자전적 에세이 『생지옥 천국』(2000년)이 주목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때부터 일본 사회가 외면하는 격차 및 빈곤 문제에 적극 이의를 제기하며, 끈질기게 취재하고 저항하고 책을 썼다. 2011년 3월 11일 대지진 이후로는 탈원전 운동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2007년에 출간한 이 책 『살게 해줘!: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은 일본저널리스트회의(JCJ)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 『1억 총빈곤 시대』(2017년), 『98%의 미래, 중년파산』(2016년), 『성난 서울』(2009년) 등 40여 권의 책을 썼다.

현재 반빈곤네트워크 간사, 『주간금요일』 편집위원, 프리터전반노조 조합원, ‘부서진 사람들의 제전’ 명예회장, ‘공정한 세금 제도를 요구하는 시민연락회’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이 김미정

성균관대 및 동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도쿄대 총합문화연구과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문학평론을 하고 있고, 플랫폼 〈문학3〉을 만들고 있으며, 대학에서 학생들과 배움을 주고받고 있다. 문학을 매개로 활동하고 있지만 정체성주의적 문학을 넘어선 ‘문학’에 대해 늘 상상, 고민하고 있다. 사람들과 그 감수성의 ‘조건’에 관심이 많다. 최근 쓴 글로는 「‘기억-정동’ 전쟁 시대와 문학적 항쟁」, 「운동(movement)과 문학」, 「‘나-우리’라는 주어와 만들어갈 공통성들」, 「여성교양소설의 불/가능성」(이상 2017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군도의 역사사회학』(2017년), 『정동의 힘』(2016년), 『전후라는 이데올로기』(2013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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