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왕은 없다

심의민주주의로 가는 길 

이한 지음 | 미지북스 | 252쪽 | 13,800원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니다
권한이 위임된 엘리트의 통치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숙고된

공적 토론을 통해 의사결정을 내리는 과정이다

 

『철인왕은 없다』는 변호사이자 정치철학을 연구해온 이한 박사가 심의민주주의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물이다. 정치란,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당면한 고통을 해결하고 번영을 추구할 것인가에 관한 의사 결정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의제 민주주의로 표상되는 우리의 정치 현실은 그러한 고통을 해결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의제가 가진 엘리트주의적 속성을 비판하며 직접민주주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주장하는 관점이 있다. 그러나 엘리트주의냐 직접민주주의냐 하는 질문은 인적 속성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으로서, 더 나은 민주주의를 성취기 위한 올바른 접근 방식이 아니다.

저자는 대의제의 한계와 직접민주주의의 본질적 취약성을 모두 검토하면서, 우리가 인적 속성이 아닌 의사소통의 문제로 접근할 때 보다 나은 정치 시스템, 즉 심의민주주의를 설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심의민주주의에서는 시민들이 의제에 관해 충분한 정보와 근거를 갖고 검토하고 숙고한 결정이 공동체의 정치에 반영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기준인 ‘계몽된 이해(理解)’와 ‘온전한 대의(代議)’를 확보할 수 있으며, 대의제를 보완하여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목적을 온전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촛불 시위 이후 한국 사회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라는 두 방향으로의 뚜렷한 분화를 아우르고, 조화시키려 시도했다는 점에서 중요하고도 큰 문제를 제기한다.

- 최장집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엘리트주의 vs 대중민주주의, 어느 쪽이 맞을까?

엘리트주의는 소수의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배타적으로 또는 거의 대부분의 의사 결정권을 주자는 이념이다. 그에 반해 대중민주주의는 대중의 여론에 그러한 권한을 주자는 이념이다. 두 이념은 나름의 호소력이 있고, 상대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논박할 수 있는 논거들이 있다.

엘리트주의자들은 일군의 매우 능력 있는 사람들만이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결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이들이 대중에게 종속되지 않고 통치해야만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그 사회를 수호하는 수호자들이 있고, 이들이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플라톤은 <국가>에서 철인왕(哲人王)이 지배하는 사회상을 제안한 바 있다.

엘리트주의자들은, 대중은 먹고사는 데 바빠 정치에서 다룰 의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할 수도 없고, 전문성을 가질 수도 없으며, 대중의 피상적인 견해들은 비일관적인 결과에 이르기 일쑤라고 말한다. 엘리트주의에 따르면,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는 분명한 능력 차이가 있으며, 이 때문에 통치의 권한을 엘리트에 위임하는 것이 정당하다. 민주주의에서는 “계몽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엘리트주의가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가장 날카로운 지점이다.

또한 엘리트주의는 독재로 귀결되며 실패하기 마련이라는 민주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8세기나 존속하고 번영한 베네치아공화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엘리트의 지배가 시민들에게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반박한다.

 

반면 민주주의자들은 사람들 사이에는 분명한 능력 차이가 있지만, 통치에서 대중을 배제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엘리트 지배하에서는 각 사회의 집단이 가진 이해와 요구가 온전히 드러나고 고려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엘리트의 편향되고 자의적인 결정에 의해 일부 집단의 요구가 무시될 수도 있고, 대부분의 엘리트들은 특권을 지닌 지위를 강화하고 지속하고자 하는 욕망에 취약하다. 다시 말해, 엘리트 지배하에서는 “온전한 대의”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 엘리트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자들의 가장 강력한 공박이 된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베네치아나 피렌체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엘리트주의 체제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다. 게다가 그 성공 사례라는 것도 더 척박한 환경의 작은 나라임에도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안정뿐만 아니라 개별 시민의 권리 보장도 더 체계적으로 이뤄냈던 네덜란드나 덴마크의 사례에 비하면 그 빛이 바래진다고 반박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절충안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이러한 엘리트주의와 대중민주주의의 어중간한 타협이다. 즉 공식적인 제도적 권한은 대중의 선거를 통해 대표자로 선출된 공직자들이 갖고, 대중은 공직자에게 결정 권한을 위임한다. 대신 대중은 투표를 통해 간접적으로 결정권을 행사한다. 이런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틀에 깔린 생각은 대중은 의제를 직접 다룰 수 없지만 누가 적합한 엘리트인지 알아볼 능력은 있으며, 그들의 역할은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가끔 여론조사를 통해 대중의 의견을 알아보기도 하지만, 여론조사는 제도적 지위를 얻지 못한다.

정당정치는 원래 ‘계몽된 이해’와 ‘온전한 대의’를 촉진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유권자의 의사가 정당을 매개로 표현되면 의제에 대한 이해가 더욱 계몽될 수 있고, 여러 정당이 각기 유권자를 얻기 위해 애를 쓰면 보다 온전한 대의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래 취지는 정보의 불완전성 문제로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되고 있지 못하다. 정치 성향의 차별화 경향으로 인해 정보가 단순화되거나 왜곡되는 오류가 발생하고, 심지어 정치적 위장과 조작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 정당정치는 의원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 중심부와, 선거에 대응하고 매체를 상대하는 전문가들로 형해화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리하여 현대 정치는 피상적으로 형성된 대중의 의견과 엘리트가 밀고 나가고자 하는 정책 사이를 불안정하게 오가며, 서로 상호작용하는 주체도 목적도 없는 여정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시민들은 공민성을 발휘해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들을 의제에 올리고, 그것을 타당하게 다룰 수 있는 통로를 잃어버렸다.

저자에 따르면 정치란,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고통을 해결하고 어떻게 번영을 추구할 것인가에 관한 의사 결정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의제 민주주의로 표상되는 우리의 정치 현실은 그러한 고통을 해결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사람들은 법과 정책이 이성적 토론과는 상관없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거대한 사물처럼 느낀다. 그 결과 정치 혐오와 무기력증이 만연해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정치적 효능감을 상실한 대한민국 사회 구성원들이 느끼는 절망과 좌절의 본질이다.

 

정책 전환 - 무엇이 진정한 ‘인민의 의사’인가?

대의제의 딜레마와 결함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정책 전환(Policy Switch)이다. 정책 전환이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약속했던 정책들을 공직자가 당선 후에 180도로 뒤집어서 추진하는 것이다. 이는 정치 엘리트가 선거와 정책을 전혀 별개의 사안으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선거는 유권자들이 좋아하는 말로 치러서 일단 당선된다. 그리고 당선된 엘리트는 자신이 내세운 공약과 정반대 정책을 실행한다. 그 정책 효과가 잘 나타나면 유권자들도 결국 그 엘리트가 옳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 선거에서도 뽑아줄 것이다.

정책 전환의 예는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된다. 아르헨티나의 메넴, 페루의 후지모리, 볼리비아의 모랄레스는 대통령 선거 때 대단히 좌파적인 복지 중심 공약을 내걸었지만 당선된 뒤에는 곧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한마디로 극에서 극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경제 정책의 결과가 성공적이냐 아니냐에 따라 재선되거나 정권을 잃었다.

정책 전환은 ‘인민의 의사’를 인민의 ‘즉각적인 선호’가 아니라 ‘추정적 선호’라고 보는 관점이다. 추정적 선호는 여론조사로 대표되는 즉각적인 ‘예’, ‘아니요’보다 ‘인민이 숙고했더라면 자신들을 위해서 원했을 것에 대한 의사’라고 보는 태도가 깔려 있다. 정치 엘리트는 인민의 추정적 선호를 잘 파악해서 현명하게 정치를 펼치는 지도자로 그려진다.

물론 인민은 즉각적 선호와 관련해 모순된 요구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재정이 소요되는 정책을 실시하길 바라면서 동시에 세금 감면을 원할 수 있다. 또는 어떤 법안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고 나서는 그 법률이 실제로 실행되자 크나큰 후회를 하며 저주를 퍼부을 수 있다. 그래서 현대의 대의정치는 인민의 즉각적 의사와 추정적 의사 사이에서 비논리적인 타협을 하려고 한다. 정책 결정 권한을 위임받은 대표가 우선 정책을 시행하고, 그다음 선거에서 인민이 정책 시행 결과를 회고적으로 평가하여 드러난 투표 결과가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인민의 의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국민은 의제 제기와 정책 형성, 시행과 평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못하고, 오로지 엘리트가 관철하는 모든 일을 겪고 나서 회고적으로 짧은 반응만을 보이는 존재로 전락해도 되는가? 그렇게 되면 시민은 통치에 참여하는 민주적 존재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권위주의적 통치를 겪고 나서 다음 권위주의적 통치를 예비하는 의례를 수행하는 수동적 신민이 되어버리고 만다.

궁극적으로 이런 식의 정책 전환을 국민적 합의 없이 허용하는 것은 선거 캠페인 자체를 사기극으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후 평가 시스템은 지배 정치집단이 사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전략적 공간을 크게 확대시킨다. 정책 전환 현상은 현대 정치 체제가 인민의 계몽된 의사에 의한 통치도, 인민의 의사의 온전한 대변도, 인민에 의한 최종적인 통제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보통선거권과 경쟁적인 정당 시스템, 비례대표제가 도입된 후 대의제에서 진정한 혁신은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선거 때마다 한 표를 던지고 나면 다음 선거까지 모든 것을 지켜만 봐야 한다. 대의제의 고질적인 딜레마인 본인-대리인의 문제도 해결되지 못했다. 이러한 대의제의 한계는 지금의 정치 체계로는 이 사회가 처한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이 대단히 힘들며, 새로운 정치적 의사 결정 제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대의제의 대안이 직접민주주의?

한편 대의제의 한계 때문에 직접민주주의가 최종적인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그들은 직접민주주의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시공간의 제약, 즉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의 약점은 시공간의 한계에 있지 않다. 고대 아테네에서도 결코 적지 않은 수라 할 수 있는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광장에 모였다. 참석한 사람들이 한마디씩만 말을 해도 하루가 다 갈 것이다. 누구나 알듯이 최근 인터넷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한마디씩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아테네 민주주의가 현대 국가에서 실현될 수 없는 이유는 직접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취약성 때문이다.

실제로 고대 아테네에서 이루어진 직접민주주의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이상형과는 많이 달랐다. 정치학자 데이비드 헬드에 따르면, 아네테에서 대중은 무사심하게 개인으로 참석하여 토론하고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지도자들이 이끄는 무리가 있었으며, 이들은 종종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이들 집단은 민회에서 어떻게 발언하고 어떻게 선동할지 음모를 짜고 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현란한 변론 기술을 동원한 이들의 선동에 민회는 순간적인 격정에 빠져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 일쑤였다. 군대의 지휘관을 억울하게 처형시키고, 그 뒤 선동에 넘어간 것을 크게 후회하며, 이번에는 선동한 사람들을 잡아 처형시킨다. 이것은 공동의 목적을 가진 시민들이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합의를 통해 바람직한 결론을 도출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아테네의 사례에서 보듯 숙고되지 않은 직접민주주의는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협의의 메커니즘이라기보다는 무분별한 대중의 열정이 분출되고 여론 조작이 횡행하는 무대가 될 수 있다.

 

직접민주주의가 더 나은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 참여에 필요한 정보의 불평등 때문이다. 정보가 평등하게 주어진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정보를 가려내고 해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은 평등하지 않다. 만약 우리 사회가 완전 정보사회에 매우 가깝다면 유권자는 모든 것을 직접 알아보고 결정할 수 있으므로, 직접민주주의 방식에 따라 투표하면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반대다. 특히 인터넷은 고도로 불평등한 공간이다. 아무리 좋은 근거로 뒷받침되는 주장을 담고 있어도 소외된 공간은 더욱 소외되고 그릇된 주장을 해도 인기가 높은 곳은 관심이 더욱 집중된다. 이러한 양극화는 되먹임 고리를 통해 강화되는 경향을 갖는다.

둘째, 심의 과정이 부족하다. 적어도 대의제에서는 의원들에게 제도적으로 독회와 토론의 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는 의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도 투표에 참여한다. 그러다보니 대의제에서는 정책 실패에 정당 교체라는 결과가 따르는 반면, 직접민주주의에서는 어떤 제도적 반성 메커니즘도 없다. 이는 정책 방향이 잘못될 때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대중매체를 소유하거나 매체 영향력이 큰 세력이 의사 결정 과정을 지배할 가능성도 크다.

셋째, 직접민주주의에서는 의사 결정에 참여한 소수가 모든 시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역설이 발생하며 이는 심각한 정당성 문제를 야기한다. 인터넷 여론조사 수준으로 대표성이 붕괴하고 계속되는 대중 동원의 힘겨루기가 사회를 지배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조직되지 않았거나 자원이 부족해 조직력이 낮은 사람들은 대의제 사회보다 의제에 대한 통제력을 훨씬 더 잃게 된다. 적어도 대의제에서는 그들의 목소리가 정당을 통해 대표될 수 있다.

넷째, 직접민주주의는 정치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심어준다. 정치는 갈등하고 상충하는 이익과 의견을 합당하고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문제 상황을 슬기롭게 해결하는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에서는 다수가 원하는 목적을 그저 다수가 원하는 방법으로 실행하는 문제로 정치가 환원된다. 이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이상과 배치된다.

다섯째, 본인-대리인의 문제가 대의제보다 더 악화된다. 얼핏 보면 직접민주주의에서는 대리인이 없는 것 같지만, 특정 시기에 실질적인 운영에 참여하는 소수가 일종의 대리인이다. 그러나 이 대리인들은 전혀 명시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만약 실패가 발생하면 그 실패에 대한 책임이 사회 전체 구성원에 분산되어 부담될 뿐이다. 책임지는 주체가 없는 것이다. 대의제에서는 적어도 정당이 대리인으로서 책임을 진다.

 

관건은 심의와 토론 과정!

이렇게 심의와 토론 과정이 없는 직접민주주의는 만병통치약이기는커녕, 오히려 대의제가 가진 약점이 극대화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과거 미국 헌법의 제정자들(Founding Fathers)은 직접민주주의가 가진 이러한 약점에 대해 올바르게 파악했다. 그들은 온전한 대의를 어떤 식으로 구현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들은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이 공정한 심의를 거칠 수 있도록 몇 가지 제도적 장치를 고안했다. 우선 직접민주주의보다 대의제를 옹호했다.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들보다 그 대표들이 격정이 아닌 이성에 기반해 토론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짧은 임기에 비해 긴 임기가 더 낫다고 보았다. 매 정책 결정 때마다 유권자가 즉각 지지를 철회할 수 없을 때 대표들이 당파의 이익이 아닌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더 잘 살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하원은 다수의 이익을, 행정부와 상원, 사법부는 소수의 이익을 보호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권력을 분할했다. 이는 그들이 심의를 강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결과적으로 엘리트주의적 수단을 택했음을 보여준다.

https://www.flickr.com/photos/donkeyhotey/

 

 

그렇다면 직접민주주의는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상향일 뿐일까? 그렇지는 않다. 직접민주주의의 성공적인 사례들도 현실에서 꽤 발견할 수 있다. 미국 각 도시의 타운미팅, 시카고 지역통치위원회, 미국 거주 동물 보호 계획,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리의 참여예산제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부분적 성공 사례들에서 우리는 토론을 필수 절차로 하는 직접민주주의의 기제를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들이 투명하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숙고된 의견을 창출하는 과정 말이다. 이런 심의 과정이 있을 경우 직접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가 목표로 했지만 홀로 온전히 달성하지 못했던 이상, 민주적 정당성, 책임성, 반응성, 광범위하고 사려 깊은 토론, 온전한 대표성을 더 잘 달성하게 해주는 보완제가 될 수 있다.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를 검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길은 누가 통치하느냐, 즉 인적 속성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계몽된 이해’와 ‘온전한 대의’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의사소통적 과정이 있느냐의 문제, 즉 심의 과정의 존재 여부이다. 그리고 공중의 숙고된 의견으로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라는 아이디어가 바로 심의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심의민주주의 - 민주주의의 고도화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계몽된 이해’를 지닌 시민이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참여할 통로가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또한 이 통로를 통해 형성되는 숙고된 의사는 그 자체로 법적 지위를 가져 ‘온전한 대의’를 구현해야 한다. 학계에서는 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춘 민주주의를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라고 칭하며 오랜 기간 논의를 해왔다.

‘심의’란 함께 토론하고 숙고하여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활동을 말한다. 정의상 심의민주주의는 이미 주어진 선호를 집계하는 민주주의와 대비된다. 심의민주주의에서는 다수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숙고하지 않고 개개인이 표출한 선호를 단순 집계한 것을 민주적인 결정에 따른 결과로 인정하지 않는다. 국가의 이런저런 결정들은 공적 심의라는 수문을 거쳐야만 민주적 결정이라고 불릴 수 있다. 따라서 심의민주주의에서는 공적 심의 기구인 ‘심의회’에 공식적인 입법 권한을 부여한다. 그렇게 될 때 심의회는 한편으로 의회의 보완 기구로서, 또 견제 기구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심의민주주의는 대의제의 대체제가 아니라 보완제인 것이다.

 

엘리트주의의 사상적 원천인 플라톤의 철인왕 국가에 대해 칼 포퍼는 “영리하지만 무정한 목동이 양을 다루는 것처럼, 말하자면 지나치게 잔인하지는 않지만 적당히 경멸하면서 인간 가축을 다루는 국가에 대한 이론의 개요”라고 갈파했다. 특출한 사람만이 다른 모든 사람의 공동선을 발견하고 실현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가정은 틀렸다. 또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의사 결정에 참여해야만 정치적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직접민주주의의 단순한 주장도 틀렸다. 문제의 핵심은 참여자의 수가 아니라 심의와 토론의 과정이다. 단순 집계된 인민의 즉각적인 선호가 아니라 숙고된 인민의 의사이다.

심의민주주의는 적은 수라도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이 충분한 정보를 검토하며, 서로 투명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더 나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 숙고하는 과정을 중시한다. 그러한 심의 과정을 통해 도달한 결과를 공동체의 정치적 결정에 반영할 때 우리의 민주주의는 대의제의 한계를 넘어서 더욱 고도화되고 심원한 방식으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      *      *

 

지은이 이한

변호사이자 시민교육센터 대표이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민주주의와 정치철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중간착취자의 나라』(2017년), 『삶은 왜 의미 있는가』(2016년),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2012년), 『이것이 공부다』(2012년), 『너의 의무를 묻는다』(2010년), 『철학이 있는 콜버그의 호프집』(2005년), 『탈학교의 상상력』(2000년), 『학교를 넘어서』(1998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사치 열병』(2011년), 『포스트민주주의』(2008년), 『이반 일리히의 유언』(2010년), 『계급론』(2005년) 등이 있다.

 

 

교보문고 바로가기

알라딘 바로가기

예스24 바로가기

인터파크 바로가기

 

Posted by 미지북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