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계 분쟁

국제 분쟁 전문가 김재명의 전선 리포트 (최신 개정판)

김재명 지음 | 586쪽 | 22,800원

 

세계는 왜 싸우는가?

국제 분쟁 전문가 김재명이 탐사한 세계 15개 분쟁 지역 

PLO, 하마스 등 혁명가, 반군 지도자들 직접 인터뷰

전쟁, 내전, 테러리즘의 이면을 분석하는 풍부한 이론적 배경

 

[오늘의 세계 분쟁]은 국제 분쟁 전문가로 활동해 온 김재명 박사가 지난 20년 동안 세계 15개 분쟁 지역을 취재한 현장 리포트이다. 이 책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 내전, 테러의 현장을 충실히 소개하며, 분쟁의 원인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분쟁 지역들은 모두 저자가 현장 취재한 곳으로 중동, 발칸반도, 서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으로 지구촌의 거의 모든 주요 분쟁 지역을 망라하고 있다. 책에 수록된 150장의 사진은 저자가 직접 촬영한 것이며 분쟁 현장 사람들의 깊은 고통과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또한 국제 분쟁과 관련된 풍부한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냉엄한 국제 정치 현실에 관한 깊은 통찰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이 책은 저자가 분쟁 지역을 취재하며 본 전쟁의 상처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담은 기록이며, 약자와 소수자, 못 가진 자들이 탐욕스러운 강자들과 벌이는 힘겨운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는 지지와 연대의 표시이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피해 현장(2009년). 어린 아이가 무너진 집터에서 인형을 바라보고 있다. 

 


세계 분쟁 지역 15곳을 취재한 전선 리포트

인류의 역사는 전쟁사, 곧 피의 역사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국가와 집단이 갖가지 이유로 서로를 죽이고 피를 흘려왔다. 미국과 소련이 첨예하게 대치했던 동서 냉전이 막을 내린 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구촌 사람들은 ‘유혈과 전란의 시대’를 겪어왔다. 그리고 잔혹한 전쟁 범죄 행위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인종 청소(보스니아, 르완다, 동티모르, 코소보), 조직적 강간(보스니아, 코소보)과 손목 절단(시에라리온) 등의 전쟁범죄들은 우리 인류 문명사의 수치로 기록될 것이다.

[오늘의 세계 분쟁]은 국제 분쟁 전문가로 활동해 온 김재명이 이러한 분쟁과 내전을 주제로 쓴 분석적인 해설서이자 ‘현장 리포트’이다. 또한 지구촌에서 터지는 전쟁과 테러가 무엇인지, 누가 왜 유혈 투쟁을 벌이는지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전쟁학 교과서’이기도 하다. 지난 2015년 개정판에서 시리아 내전 및 이라크전쟁과 결부된 이슬람국가(IS)에 대한 최신 자료를 반영하였으며, 리비아 카다피 정권의 몰락 당시 국제 사회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보호 책임 의무(R2P)에 관한 내용에 추가하였다. 이번 2021년 개정2판에서는 시리아 내전 이후의 상황과 이란의 최근 동향을 비롯해 그동안 바뀐 내용들을 새로 고치면서, 전체적으로 책의 내용을 최신 자료로 바꾸었다.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하마스의 창립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과의 인터뷰. 야신은 2004년 봄 이스라엘 군 헬기에서 발사된 미사일에 사망했다.


이 책에는 분쟁 지역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만난 전쟁 피해자, 난민, 정치 지도자, 병사, 국제기구 요원들과의 귀중한 인터뷰들이 담겨있다. 특히 팔레스타인의 ‘살아 있는 전설’ 야세르 아라파트와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의 정신적인 지주인 셰이크 아메드 야신, 시에라리온 내전의 손목 절단 테러 전술로 악명이 높은 독재자 포데이 산코, 체 게바라와 함께 남미 5개 국 여행길에 올랐던 알베르토 그라나도 등 외국 기자들도 만나기 힘든 여러 혁명가와 반군 지도자, 정치 지도자를 인터뷰한 내용은 이 책만이 갖고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세계 분쟁지역 15곳에 대한 세밀한 지도와 정보를 담은 점, 저자가 직접 찍은 분쟁 지역의 생생한 전선 사진들을 실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시사 사진 전문학교로 유명한 뉴욕 ICP(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에서 2년간 포토저널리즘을 공부했다). 또한 저자의 풍부한 이론적 배경, 고통 받는 민중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느껴지는 묘사와 호흡이 짧고 긴박감이 넘치는 전개 과정은 국제 정치학을 연구하는 학계와 정치 외교계는 물론, 전쟁과 평화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들에게 현장과 이론이 어우러진 노작을 만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세르비아계 방화로 파괴된 코소보 자코바 시를 순찰하는 국제 평화유지군


인간은 왜 전쟁을 하는가

이 책은 모두 3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와 제3부는 내전 또는 국제전에 관한 일반 이론과 해설, 전망을 다룬 전쟁론과 평화론이고, 제2부는 15곳의 분쟁 지역을 찾아다닌 내용을 정리한 현장 취재기이다. 

제1부 전쟁과 인간 그리고 국가
제1부에서는 우리 인간이 전쟁을 벌이는 원인을 짚어보면서, 특히 동서 냉전이 막을 내린 뒤 지구촌을 덮은 인종 청소와 대량 학살의 참극이 왜 일어났는지를 살펴본다. 미국 국제정치학계의 거목으로 꼽히는 케네스 왈츠는 전쟁이 우리 인간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뜻에서 “전쟁에서 누가 이겼느냐고 묻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지진에서 누가 이겼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인 로버트 리버는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에 관한 설명들은 지금까지 일어난 전쟁 수만큼이나 다양하다.”라고 했다. 저자는 이 같은 학자들의 전쟁 연구 성과들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면서, 역사 이래 우리 인류가 벌여온 전쟁들, 특히 1990년대 이후 벌어진 전쟁들의 특성을 분석한다.

제2부 분쟁 지역을 찾아서
제2부는 저자가 20년 동안 취재해 온 지구촌 분쟁지역 가운데 15개 지역을 골라 오늘의 시점에서 새롭게 쓴 글이다. 중동 지역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남아시아의 이란, 아프가니스탄, 카슈미르, 동티모르, 캄보디아, 유럽의 화약고라 일컬어지는 보스니아와 코소보,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남북아메리카의 볼리비아, 쿠바 관타나모, 미국이 저자가 다루는 지역이다. 저자는 현지 취재 과정에서 때로는 위험에 부딪치면서도, 해당 분쟁지역의 정치인, 지식인, 반군 지도자들과 민초들을 만나 그들의 주의주장, 분노와 좌절감, 앞날의 희망 등을 옮겨 놓았다. 또한 지구촌 여러 분쟁지역을 취재하면서 전쟁이 우리 인간의 의식을 얼마만큼 황폐하게 하는가를 목격했다. 언어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담을 맞대고 살던 이웃을 죽이는 잔혹의 현장, 특히 코소보에서는 곳곳에 널려 있는 대량 학살 현장을 돌아보면서 ‘인간이 과연 선한 동물인가’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밝힌다.

시에라리온 반란군 혁명연합전선(RUF)에 두 팔이 잘린 아기. RUF 지도자 포데이 산코는 "손이 없다면 투표도 못할 것이다(No hands, no more votes)"라며 사람들의 양손을 도끼로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3부 21세기의 전쟁
제3부에서는 9・11테러 뒤 주요 시사용어로 떠오른 ‘테러와의 전쟁’과 ‘정의의 전쟁’을 다루면서, 미국이 벌여온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 성격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또한 자살 폭탄 테러가 지닌 복합적인 성격과 자폭 테러범들의 의식 세계를 깊이 있게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21세기 이후, 국지적인 내전과 자원을 둘러싼 이권 전쟁들, 강대국들의 군비증강과 핵무기의 확산 경향, R2P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하며 지구촌 평화에 대해 전망해본다. 


좌절과 분노의 땅에서 전하는 21세기 희망 읽기

저자는 여러 분쟁지역을 취재하면서 팔다리를 잃은 어린이들을 비롯한 숱한 전쟁 피해자를 만났다. 전쟁의 처참한 모습들을 목격한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저자는 전쟁으로 이익을 챙기는 ‘어둠의 세력'들을 고발한다. 허울 좋은 명분과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워 전쟁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어둠의 세력들은 현실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평화보다는 전쟁을 바란다. 저자는 “영구 평화는 무덤 속에서나 가능하다.”라고 말한 독일 철학자 칸트의 말을 빌려, “그렇다면 차라리 평화를 기원하기보다 아득한 절망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소수자와 못 가진 자, 약자의 정의가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피력한다. 
또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지구촌의 평화를 가로막는 국제 정치의 냉혹한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지구상의 또 하나의 분쟁 지역인 한반도에서도 평화와 화해의 물결이 일기를 기원한다.




2001년 동티모르 현지 취재 때 유엔평화유지군 장갑차 앞에 선 저자

지은이 김재명 

저자 김재명은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경향신문과 중앙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해방 정국(1945~1948년)에서 극좌 극우를 비판하면서 민족 분단을 막으려 했던 중도파를 집중 취재 보도했다. 한반도 분단 극복에 대한 관심은 국제 분쟁 쪽으로 넓혀졌고, 뉴욕시립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과정을 마친 후 국민대학교에서 「정의의 전쟁 이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프레시안』의 기획위원(국제 분쟁 전문 기자)이며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울러 저자는 지난 20년 동안 국제 분쟁 전문가로서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 반도, 중동 지역, 동남아시아, 서아프리카, 중남미 등 세계 15개 분쟁 현장을 취재, 보도해왔다. 
저서로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2003년),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2005년), 『20세기 전쟁 영화가 남긴 메시지』(2006년), 『석유, 욕망의 샘』(2007년),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2016년), 『시리아 전쟁』(2018년),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2019년 개정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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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자 2021.04.08 10:44

    항상 좋은 책들 잘 읽고 있습니다. 저희 집 서재에 미지북스에서 출간된 책들이 다수랍니다. 특히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님의 저서들과 황금 족쇄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양서들 많이 내어주시길 바랍니다.

미 해병대 이야기

가장 먼저 도착해 가장 나중에 떠나는 세계 최강의 전투부대

한종수, 김상순 지음 | 592쪽 | 22,000원

 

 

 

 

왜 미 해병대가 최강의 전투부대인가?

태평양의 정글에서 한반도의 동토, 이라크 사막에 이르기까지

극한의 환경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른 미 해병대의 살아 있는 역사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국가로 부상하는 동안 그 선두에는 늘 미 해병대가 있었다. 미국 독립전쟁 시기에 ‘턴태번’이라는 술집에서 창설된 미 해병대는 해상 육박전을 전문으로 하는 소규모 부대로 출발했다. 19세기에는 중남미와 지중해, 아시아 등지에서 미국의 첨병으로 활약했고(조선을 침략하기도 했다: 신미양요), 1차대전에서는 유럽 전장에서 독일군과 싸웠다. 그러나 ‘진정한’ 해병대로 거듭나는 계기는 2차대전, 정확히는 태평양전쟁이었다. 해병대는 일본군을 상대로 과달카날에서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태평양을 종횡무진하며 맹활약했는데, 이 과정에서 과감한 적전(敵前)상륙작전을 감행하는 정예부대로서 성장했다. 곧이어 벌어진 한국전쟁에서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의 주역이 되었으며, 혹한의 장진호에서 처절한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베트남전쟁과 1, 2차 걸프전쟁에 참전하여 정글과 사막 등의 극한의 환경에서도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세계 최강의 전투부대로 우뚝 섰으며, 20세기 후반부터는 전 세계 어디에나 빠르게 출동할 수 있는 신속 전개 부대로 변신하여 미국 군사전략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 책은 미 해병대의 살아 있는 역사를 통해 그들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끝없이 변신하여 최강의 전투부대가 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본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 제5해병연대가 적전상륙 후 사다리를 이용해 방파제를 넘고 있다. 앞장서 방파제를 넘고 있는 이가 로페즈 중위다.

 


왜 해병대인가?

지구의 표면은 육지와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바다는 육지보다 훨씬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비행기가 발명되어 하늘길이 열리기 전까지, 바다는 육지와 육지 사이를 연결하는 인간의 유일한 통로였다. 그리고 전쟁으로 점철된 인류 문명사에서 95퍼센트 이상의 시간 동안 해군은 인류의 거의 유일한 전략 군종이었다. 대부분의 제국들은 바다로 나아가 패권을 잡았고, 해군은 그들의 무기였다. 오늘날 패권 국가인 미국도 마찬가지로 바다로 나아가 패권을 잡았다. 하지만 미국은 다른 제국들과는 달리 해군과 더불어 ‘해병대’라는 특수한 군종을 패권의 투사와 유지의 강력한 수단으로 삼았다.

‘산전수전山戰水戰’이라는 말은 흔히 경험이 많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이 성어를 한자 뜻 그대로 풀면 산과 물에서 싸웠다는 뜻이다. 세계를 주름잡는 강대국들에게는 수많은 정예부대가 있지만 아마 미 해병대만큼 이 성어에 어울리는 부대도 없을 것이다. 제1해병사단을 위시한 미 해병대는 해군 경찰과 해상 육박전을 전문으로 하는 소규모 부대에서 시작하여, 2차대전을 거치면서 과감한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정예부대로 성장했다. 20세기 후반부터는 전 세계 어디에나 빠르게 출동할 수 있는 신속 전개 부대로 변신하여 미국 군사전략의 최전선에 서 있다.

1차대전에서 독일군과 싸우는 미 해병대. 프랑스 파리로 진격해오는 독일군을 벨로숲에서 격퇴했다.  

미 해병대는 승리와 패배의 역사 속에서 한편으로는 전통을 지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늘 새롭게 혁신해왔다. 이런 계속적인 변신이 가능한 비결을 찾자면 바다와 육지를 통틀어 모든 지역에서 작전이 가능한 해병대의 양서류적 특성을 가장 먼저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물과 육지 모두에서 살 수 있다 해도 자칫 잘못하면 양쪽 어디에서도 발을 붙일 수 없게 된다. 해병대는 바로 이런 양서류적 존재로서 해군도 육군도 아닌 탓에 계속해서 존재를 부정당하는 위기를 맞아왔다. 하지만 특유의 강한 훈련과 독특한 전우애로 이룬 실적으로 해병대는 그 존재 의의를 스스로 지켜왔다. 대검에서 전술핵에 이르기까지 육해공에 걸친 다양한 장비를 보유한 이 정예부대는 ‘미 제국주의의 선봉’이라는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수호자로서 그리고 세계 최강의 전투부대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킬 것이다.

 

미 해병대의 기원

미국 해병대는 미국 독립전쟁 시기에 창설되었다.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턴태번’이라는 술집에서 창설 모임을 갖고 최초의 대원들을 모집했다. 새뮤얼 니컬러스 대위가 초대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는데, 그는 정규 군인이 아니라 턴태번의 주인 혹은 한 대장간의 주인이었다고 한다. 독립전쟁 시기 해병대의 주요 임무는 함내 치안과 함상 백병전이었다. 그 때문에 대원들은 적군과 육박전을 벌이다 목을 뜯기는 경우가 많아 목 보호를 위해 높고 두툼한 가죽 띠를 옷깃처럼 목에 둘렀다. 이는 평상시에 머리를 꼿꼿이 세워주는 효과가 있었고,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이 ‘레더넥leatherneck’은 자연스레 해병대의 상징이 되었다.

해병대는 독립전쟁이 끝나자 해체되었지만 미국은 주변 국가들과 끊임없이 분쟁을 겪으면서 신속대응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결국 1798년 다시 부활한 해병대는 당시 지중해 연안에서 활동하던 이슬람 국가의 해적들이 미국 상선을 약탈하자 근거지인 트리폴리 항구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1804년). 트리폴리 전투는 해병대가 제한된 임무에서 벗어나 국제 분쟁에 대응해 즉각 출격하는 신속대응군의 역할을 맡은 첫 전투였다.

1804년 트리폴리 해전. 신속대응군으로서 미 해병대의 첫번째 역외 작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 해병대는 한국을 ‘침략한’ 역사와 ‘구한’ 역사를 모두 갖고 있다. 먼저 1871년 6월에 군함 5척으로 강화도를 침공한 미군의 선봉에 해병대가 있었다(신미양요). 그들은 후장식 소총과 신형 야포를 활용한 압도적인 화력과 전술로 덕진진을 함락하고 광성보에 육박했다. 조선군은 저항했으나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패배했다. 미군은 조선 조정의 완강한 대화 거부로 통상조약 체결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식수 부족과 기후 악화로 고생하다가 7월에 철수했다. 그리고 정확히 79년 후, 바로 이 바다에서 그들의 후배들은 수백 배 규모의 상륙작전을 펼쳤다. 한때 침략자였던 미 해병대는 훗날 한국전쟁에서는 말 그대로 ‘한국을 구한’ 주역이었으며,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라는 거대한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태평양전쟁과 상륙작전 부대로의 성장

미 해병대는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주로 허약한 중남미 국가들이나 이미 기운 지 오래된 노대국 스페인, 그리고 조선과 중국을 상대로 어린아이 팔 비틀기식의 힘자랑을 했다. 하지만 2차대전을 거치면서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최강의 전투부대로 성장했다.

사실 20세기 초반까지 상륙작전은 그저 보트를 타고 해안으로 이동하는 것이 거의 전부로, 조직화된 상륙작전은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륙전은 지상전과 공통점이 있긴 해도, 기본적으로 병력이 모함에 승선하여 상당한 거리를 항해한다는 점, 상륙 직전에 작은 배로 갈아타야 한다는 점, 경장비만으로 적지에 상륙한다는 점에서 지상전과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이런 인식 아래 해병대는 1922년부터 독자적인 상륙작전 지침을 만들기 시작했고, 해군과의 협동작전이 가능하도록 조직을 개편했으며, 그에 기반해 수륙양용장갑차(LVT)와 각종 상륙함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차대전, 정확하게는 태평양전쟁에서 진짜 해병대로 거듭나는 계기를 맞는다.

과달카날에 상륙하는 미 제1해병사단. 태평양전쟁에서 해병대는 과감한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전투부대로 성장했다.

해병대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과달카날에서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태평양을 종횡무진하며 맹활약했다. 특히 치열했던 과달카날 전투는 태평양전쟁의 승패를 가름한 중요한 싸움이었다. 당시 일본은 진정한 위협은 중국과 소련 등 대륙으로부터 올 것이라고 생각했고 미국이 태평양을 가로질러 일본 본토로 상륙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과달카날 전투는 일본의 많은 병력과 자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고 이때부터 전쟁의 주도권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뒤이은 펠렐리우와 오키나와 등에서 벌어진 지옥 같은 격전을 통해 경험을 축적한 미 해병대는 적전상륙작전이라는 특유의 전법을 완성해갔다. 전쟁 중에 일본을 초토화시킨 B29 폭격기들은 미 해병대가 피로 확보한 이 섬들과 그곳의 비행장에서 날아오른 것이었다.

미 해병대는 태평양의 주요 섬들을 하나하나 함락하며 일본 본토로 육박했다. 사진은 초토화된 오키나와 와나 계곡에서 작전 중인 해병대원

 

한반도 동토에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

역사상 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단대호單隊號(단위부대 부호)가 붙은 부대 하나의 전투가 역사를 바꾼 예는 흔하지 않다. 카이사르의 제10군단, 갈리폴리 전투 당시 케말의 제19사단, 4차 중동전쟁 때 골란고원을 사수한 이스라엘군 제7기갑여단 정도가 그 드문 예에 속한다. 그런데 제1해병사단은 두 번이나 이런 위업을 달성했으니, 바로 과달카날 전투와 장진호 전투였다. 더구나 극단적인 기후 아래서의 전투, 즉 열대의 전투와 혹한의 전투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특별하다.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제1해병사단은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킨 더글라스 맥아더는 상륙작전 중독자였다(해병대원들은 맥아더를 ‘대피호 더그’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맥아더가 필리핀 주둔 미군 사령관일 때 참호 깊숙이 숨어 있다가 대통령의 명령이 오자 기다렸다는 듯 부하들을 버리고 호주로 탈출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면으로 보아도 불필요한 작전명령, 즉 서울 북쪽에 있던 제10군단을 빼내어 바다로 한반도를 한 바퀴 돌아 원산에 상륙시켜 함경도로 진군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해병대가 원산에 상륙했을 때는 이미 한국군에 의해 원산이 함락된 상태였다. 제10군단장 아몬드는 맥아더가 낙하산 격으로 꽂은 인물이었는데, 인천상륙작전 당시 수륙양용장갑차(LVT)를 보며 “바다에서도 뜰 수 있는가”라고 물을 정도로 무능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잘못된 명령을 내림으로써 다른 차원에서 해병대의 생존을 위협했다.

미 해병대는 장진호를 거쳐 압록강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미 대규모 중국군이 한반도에 진입해 반격을 준비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북쪽으로의 진격이 아니라 중국군의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공격’하여 흥남으로 퇴각해야 했다. 개마고원의 험한 지형과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의 추위에서 중국군의 거센 공세로 미군은 궤멸될 위기에 처했으나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의 노련한 지휘와 해병대원들의 용전으로 철수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제1해병사단은 이 과정에서 비록 병력의 절반을 잃었지만, 중국 쑹스룬의 제9병단이 남하하는 것을 저지하여 전체 전선이 급속도로 붕괴되는 것을 막았다.

장진호 전투에서 해병대는 살인적인 추위와 중국군의 대공세 속에서 궤멸 위기에 처했으나, 스미스 사단장의 지휘 하에 흥남으로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베트남전쟁의 패배와 걸프만에서의 승리

승승장구하던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처음 패전의 쓴맛을 보는데, 이때도 해병대는 전쟁의 난맥상을 온전히 감당한 부대로서 베트남 땅에 첫발을 디딘 부대이자 마지막으로 떠난 부대가 되었다. 베트남전쟁은 눈에 띄는 큰 전투가 적었다뿐이지 엄청나게 치열한 전쟁이었다. 해병대는 연인원 80만 명이 참전했는데 사상자 수가 6만 7,000명이 넘었다. 사상률이 8.4퍼센트로 육군의 2.7배나 되었다. 훈련과 장비가 양호한 북베트남 정규군을 주로 상대해 더 큰 피해를 무릅써야 했기 때문이다. 해병대 전사자는 한국전쟁보다 4배나 더 많았다. 정치인들의 오판으로 시작된 베트남전쟁은 해병대 창설 이후 최악의 전쟁이 되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해병대원들의 희생을 강요하며 막을 내렸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후 미 해병대는 타라와급 강습상륙함과 같은 웬만한 나라의 항공모함보다 큰 상륙함을 보유하게 되었다. 신형 장갑차와 전차, 신형 헬리콥터 등 다양한 장비들을 도입했다.

이오지마급의 2배가 넘는 크기를 자랑하는 타라와급 강습상륙함. 웬만한 나라의 항공모함보다도 크다.

해병대의 명예회복 기회는 걸프전쟁 때 찾아왔다. 제1해병사단은 1차 걸프전쟁의 대승을 이끌었고, 2차 걸프전쟁(이라크전쟁)에서도 주력부대로 활약했다. 해병대는 러시아군이 체첸 그로즈니에서 큰 피해를 입은 것과는 달리 어렵지 않게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이라크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40년 전 베트남에서 그 대가를 치렀던 것처럼 정치인들의 과오로 전후 이라크는 혼란에 빠져들었고, 해병대의 전승도 빛이 바랬다.

이라크에서 전투 중인 미 해병대

 

 

오늘날의 미 해병대

오늘날 미 해병대는 사실상 전 세계를 작전 범위로 하고 있다. 현재 미 해병대 전체 병력의 규모는 17만 5,000명으로,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강습상륙함을 중심으로 강력한 전력을 유지하면서 세계 최강 미군의 선봉이자 명령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신속대응군으로서 그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제1해병사단은 제1해병원정군의 핵심으로 펜들턴 기지(캘리포니아)에 사령부를 두고 태평양 동부를 관할하며, 중동에도 상당한 병력을 파견해놓고 있다. 오키나와에 본부를 둔 제3해병원정군은 제3해병사단을 중심으로 서부 태평양과 아시아를 담당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투입될 부대이자 대중국 포위망의 핵심 부대이기도 하다. 캠프 레준(노스캐롤라이나)에 사령부를 둔 제2해병원정군은 ‘대서양 해병대’라고 불리며 지구의 서반구를 담당하고 있다.

걸프전쟁 이후 주로 중동에서 활동해온 미 해병대가 앞으로 그들의 ‘진정한 무대’인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더욱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최근 미국은 남중국해 도서 영유권을 둘러싼 중국과 주변국의 마찰 확대, 러시아 극동군의 잦은 일본 영공 침범 등 역내 긴장 고조를 고려하여 해병대의 재배치를 결정했다. 그런 가운데 인도, 호주와의 협력 강화도 눈에 띄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미 해병대와 일본 자위대의 협력 강화를 가장 주목할 수밖에 없다. 양국은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상륙 훈련을 해오고 있다. 어찌 됐든 우리는 미 해병대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또 가져야 한다. 싫건 좋건 우리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으니 말이다.

 

 


지은이 한종수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롯데관광과 한국토지공사(현 LH), 세종시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근무했다. 어릴 적부터 거의 모든 분야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중에서도 전쟁사에 가장 매료되었다. 오랫동안 전쟁사 연구에 매진해 2015년 『2차대전의 마이너리그』를 펴냈고, 이 책은 2020년 국방부 진중문고에 선정되었다. 『미 해병대 이야기』는 그 오랜 연구의 두 번째 결과물이다.

지은 책으로 대표작 『강남의 탄생』(2016)을 비롯하여 『라면의 재발견』(2021), 『서서울에 가면 우리는』(2018), 『제갈량과 한니발, 두 남자 이야기』(2013), 『세상을 만든 여행자들』(2010)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영락제』(2017), 『환관 이야기』(2015), 『제국은 어떻게 망가지는가』(2012) 등이 있다.

 

지은이 김상순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를 졸업했다. 2005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여, 지금은 국방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공저자 한종수와 함께 인천과 서울 등에서 한국전쟁 관련 유적들을 탐사하여 이 책에 역사적 정확성과 생생함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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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국가 건설의 시대 1945~1950

이택선 지음 | 352쪽 | 18,000원



국가 건설에 필요한 모든 자원이 부족했던
신생 대한민국이 붕괴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대한민국은 ‘취약국가’로 태어났다. 대한민국 건설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자원들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초창기 한국 정부는 군대와 경찰 같은 안보 자원뿐만 아니라 재정과 인력 측면에서도 심각한 부족에 허덕였다. 국가는 부족한 물적 자원의 대체물로 ‘민족주의’라는 이념 자원을 수시로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분단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북한이라는 실질적인 군사적 위험, 국내에 발생한 광범위한 저항과 반란의 위협 앞에 민족주의 이념은 수축되고 왜곡되는 과정을 겪었다. 생존의 기로에서 국가는 부일 세력과 우익 단체를 국가 건설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킴으로써 안보 위기를 넘겼으나, 이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폭력과 유혈, 국가범죄로 인해 정치적 정통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공화국은 정치적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 토지개혁과 의무교육 등 사회 개혁을 추진했고, 그 결과 국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귀속감이 증대했다. 이를 지켜본 중도파들이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국가 건설에 대거 참여해 정치적인 정당성이 증가하는 가운데, 적어도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신생 대한민국의 정치․사회적 안정성이 상당 부분 확보되었다. 

촉박한 국가 수립 일정, 부족한 예산 및 자원 속에서 초라하게 탄생했지만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대국이자 세계 7위의 군사 강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 신생 대한민국은 어떻게 그토록 부족한 자원과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오늘날에 수없이 볼 수 있는 파탄국가(failed nation)들처럼 붕괴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을까? 





국가 형성의 관점에서 새롭게 본 해방 전후사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은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국가 형성(nation building)의 관점에서 객관적, 실증적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저자인 이택선 박사(서울대 외교학과)는 ‘근대국가는 합법적 폭력의 독점에서 출발한다’는 막스 베버의 관점에 따라 핵심 국가기구인 경찰과 군대, 재정 및 조세 기구의 형성 과정을 기술하면서 신생 대한민국의 탄생과 국제정치적 배경을 살폈다. 

특히 2000년대 초반 아프리카와 중동,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국가 형성 과정을 연구한 랜드 연구소의 표준 국가 모델과 비교 검토한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다. 21세기의 국가 건설 사례들과 비교해보아도 턱없이 부족한 자원을 가졌던 대한민국이 지난한 역사 속에서 성공적인 발전을 이루었는데, 이는 한편으로 모범적이면서도 대단히 이례적인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신생 대한민국은 어떻게 그토록 부족한 자원과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오늘날에 수없이 볼 수 있는 파탄국가(failed nation)들처럼 붕괴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을까? 또한 취약국가에서 출발하여 숱한 위기를 넘기는 과정에서 노출된 취약성이 어떻게 최근까지 우리 사회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을까?


과대 성장 국가가 아니라 취약국가로 태어난 대한민국

한국 현대사를 해석하는 관점 중 하나인 ‘수정주의’는 한국이 처음부터 과대 성장 국가로 출발했다고 말해왔다. 과대 성장 국가론은 브루스 커밍스 등의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이 제시한 것으로, 한국에서는 서구와 달리 시민사회가 형성되기도 전에 근대적인 관료 체계와 경찰력을 가진 국가기관들이 비대하게 성장하여 사회를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이 책의 저자 이택선 박사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한국은 처음부터 물적/인적 자원이 부족하여 국가기구가 허약한 취약국가로 출발했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한국은 과대 성장 국가가 아니라 모든 자원이 부족한 취약국가였다.

 

▲ 이 책은 "근대국가는 합법적 폭력의 독점에서 출발한다"는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 한국의 건국을 재구성하였다.


미국은 처음부터 대한민국 ‘국가 건설’ 계획이 없었다

해방 후 한반도 이남을 점령한 미국은 애당초 한국인들의 국가 건설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국은 물적 자원이 부족해 미국의 원조에 철저히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매우 불충분했다. 미국의 대외 전략에서 한반도가 차지하는 중요도가 유럽에 비해 한참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대외 경제원조 비율은 유럽과 일본의 1/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는 미국이 유럽에서의 공산주의 봉쇄에 더 치중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47년 7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기 전까지만 해도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한반도에서 품위 있게 철수하는 데 집중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미국은 한국의 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 해방 후 1년 동안 남한 경제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인데도 미군정은 예산과 자원 부족을 들어 장기적인 경제 건설 계획을 추진하지 않았다. 민생과 직결된 문제에만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했고 소극적인 관리와 유지에 급급했다. 이러한 사정은 미군정 기간에 도입된 4억 3,400만 달러어치의 원조 물자 가운데 식료품이 전체의 39%를 차지한 반면, 건축자재와 철도자재는 1.7%와 3%에 불과했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미군정은 공무원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봉급마저 지불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공무원들이 상납과 뇌물에 의존하고 원조 물자를 밀거래하는 등 부패 문제가 구조적이고 고질적인 문제가 되는 데 빌미를 제공했다.

반면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원하에 신속하게 국가 건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소련은 해방 직후부터 한반도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공산주의국가를 수립하려는 명확한 목표하에 북한을 점령했고, 소련 국적을 가진 한국인들을 행정․사법 기구와 군대, 경찰, 교육계 등의 요직에 파견했으며, 북한의 산업을 재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소련과의 협상이 결렬되고, 무엇보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는 것이 거의 확실해지고 나서야 그 목표가 한반도에서의 조속한 철수에서 단독정부 수립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그러나 미국의 관점에서 한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7번째로 중요한 국가에 불과했다.

 

자원 부족으로 인해 민족주의 이념 자원에 의존한 미군정

국가란 영토 내에서 폭력을 독점하여 국방과 치안을 확립하고 관료제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베버의 관점에서 볼 때, 미군정 시기와 초창기 대한민국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자원을 확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미군정은 물적 자원의 절대적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이념 자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바로 ‘민족주의’였다. 미군정도 처음에는 경찰과 군대에 친일 부역자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항일 투쟁과 민족주의적 대의명분을 가진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고위 관리직에 임명하여 이념 자원을 활용하고자 했다. 또한 이승만과 같은 우파 정치인을 주로 지원하기보다는 김구, 김규식 등 임시정부 인사들과 중도파들을 포괄하는 연합노선을 시도했다. 청년단체도 극우 반공 단체 대신 임정 출신들을 중심으로 출범해 정통성을 지니고 있던 조선민족청년단 같은 단체를 공식 후원했다. 그러나 인적 자원의 부족 문제를 극복할 수 없었다. 근대국가의 핵심 기능인 합법적 폭력을 독점하고 관료제 행정을 담당할 인력의 부족 문제가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이다.

▲ 왼쪽부터 김규식, 김구, 지청천, 이승만. 

미군정과 초기 대한민국은 자원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활용하고자 했다.

 

부일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가 국가 건설에 참여하다

1946년 4월부터 미군 철수가 본격화되자 치안 분야에서 상당한 공백이 발생했다. 이를 틈타 공산 세력들이 국가 전복을 시도했지만 미군정은 인적 자원의 부족으로 치안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한국은 식량 문제가 심각했는데 해외에서 귀국한 사람들과 월남민의 수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군정은 농민들로부터 시장가격의 20~30%로 식량을 매입하다가 나중에는 강제적으로 곡물을 수집하게 된다. 경찰의 부패와 금품 강요도 일상적인 일이었다. 1945년 9월 기준 한국 경찰의 봉급은 3달러에 불과했는데, 이는 북한 위관급 장교들이 받은 260달러(1,300루블)에 비해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식량 부족과 만연한 부패는 민중의 불만을 야기했다. 결과적으로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1일 대구 항쟁이 발발했다. 대구는 실업률이 32%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역이었고, 당시 “제2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 세력이 강성한 도시였다.

미군정은 국가에 대항하는 폭력 세력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없어 결국 우파 청년단체들의 협력을 용인했다. 우익 청년단체들이 국가 건설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부일 관료들도 국가기구에 계속 존속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일제 치하에서 행정 경험을 쌓은 한국인을 최대한 동원하는 방식으로 경찰력을 증강했다. 그리하여 1948년에 이르면 2~3년 전에 비해 경찰 규모가 2배 이상 증가하게 된다. 한마디로 미군정은 일제 관료제도의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아 엉성한 채로나마 국가기구의 틀을 갖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경찰의 금품 강요, 공무원들의 부패, 우익 청년단원들이 휘두른 폭력 때문에 국민들의 원성이 커지면서 국가와 국민 사이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광복군 중심의 군대에서 부일 세력의 군대로

1947년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자 경찰뿐만 아니라 군대도 규모가 커져 7개월 만에 3배 증가했다.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정부 출범 초기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절대적 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군대에서 최고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임시정부와 광복군 출신 인사들이 국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복군 출신의 군 지도부는 이데올로기적 정통성은 갖췄을지 모르나 현대적 전술과 지식을 구비하지 못했고 무능했다.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 출신의 군인들이 다시 기용되었다. 국가안보 위기가 발생하자 일제강점기의 전력을 이유로 스스로 근신하고 있었던 50~60대의 일본군 출신자들이 1947년 말부터 전격 입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1948년부터 제주도와 여수, 순천, 옹진 지구 등 최전선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이와 함께 20~30대의 젊은 일본군 출신 장교들이 미국이 요구하는 현대전의 기준을 빠르게 수용하면서 군에서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 대한민국 초창기에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광복군 출신들이 군대 내 고위직에 임명되었으나 여수-순천 사건을 전후로 한 안보 공백을 기점으로 일본군 출신들에게 빠르게 밀려났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국가 건설과 안보 위기

1947년 미국과 소련의 협상 결렬로 갑작스럽게 국가 건설이 결정되었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인민의 열망으로 제헌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는 분단 고착화를 염려하여 국가 건설에 참여하지 않았다. 중도파들은 향후 토지개혁이 완료되고 제1공화국이 안정화되는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국가 건설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한편 1948년 4월에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제주도에서 내전을 방불케 하는 폭력 사태가 일어나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뒤이어 10월에 일어난 여수-순천 사건으로 신생 대한민국은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군 내 좌익 세력이 제주도에 대한 진압을 거부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여수-순천 사건은 정부 출범 2개월 만에 발생한 좌익의 본격적인 봉기였으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같은 막대한 국가 폭력이 행해졌고 전체 희생자가 1만여 명에 달했다. 여수-순천 사건 과정에서 한 미군 기자가 여수 교외의 오막살이집에서 한 여성과 나눈 대화는 일대 치안이 붕괴되고 적자생존의 논리가 지배한 당시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기자가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묻자 그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당신들 편이지요. 당신들이 제일 강하니까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국가안보의 문제가 최우선 과제로 등장하고 사회 분위기가 급변했다. 안보적 위험에서 초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극단적 조치들이 계속 시행되었는데,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것이다. 또한 반민특위가 해산하게 되었으며, 경찰과 군대 규모가 급증했고, 국가안보의 명목으로 부일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낯선 제헌헌법의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들

대한민국 초기 국가 건설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부족했던 자원들을 대신하여 이념 자원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즉 임시정부의 유산을 계승하고자 하는 대중들의 열망을 충족시켜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높이려고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제헌헌법의 제정이다. 특히 제헌헌법이 가진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들은 자유시장경제와 현격한 거리가 있어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상당히 낯선 측면이 있다. 이는 임시정부가 표방했던 삼균주의를 계승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토지의 국유화, 정치․경제 및 교육에서의 평등을 강조한 임시정부의 삼균주의는 국유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설정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거리를 두었다. 제헌헌법 역시 중요 자원과 중요 기업에 관해 국유․국영 제도를 원칙으로 했으며 토지개혁과 의무무상교육을 주창했다. 이렇게 자본주의경제 질서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권리들이 헌법상으로 시도될 수 있었던 것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 문제와 함께 임시정부의 헌법을 계승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정치 현실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상당 부분 자리 잡은 현 시점에서는 모순되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물적․경제적 기반이 취약해 국가가 직접 생산과 소비의 주체로 활동하면서 일제가 남기고 간 기업들을 운영 관리해야 했던 당시의 현실에서는 매우 적절한 조항들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궁극적으로 부르주아 양성을 통한 자본주의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므로 1954년경에 이르면 제헌헌법에 채택된 통제경제적 헌법 질서는 사문화되었고, 개정을 통해 자유주의적 경제 질서의 헌법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토지개혁, 국가 건설의 정점

대통령 이승만은 토지개혁을 추진해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정통성을 획득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정부는 국민의 요구를 국가 건설 과정에 반영하고, 부일 관료들을 계속 기용한 탓에 훼손되었던 민족주의적 이념 자원을 어느 정도 보완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토지개혁은 수천 년 동안 농민의 자유를 구속하고 군림하던 지주가 사라지고 국가 구성원 모두가 근대국가의 일원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계기였다. 1949년 6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기초로 한 농지개혁 법안에 따라 농민들이 농지를 분배받았다. 반면 지주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것이 주어졌는데, 이마저도 전쟁으로 인한 물가 폭등과 손실 때문에 거의 사라졌다. 일제강점기의 지주들은 대부분 산업자본가로 전환하지 못하고 지위가 하락했으며, 상대적으로 이들과 관련이 적은 소상인, 소기업가와 같은 신흥 유산계층이 한국 자본가계급의 원형 집단으로 등장했다.

▲ 토지개혁으로 국가에 대한 국민의 귀속감이 증대되었다. 무엇보다 수천 년간 농민 위에 군림하던 지주계급이 해체되고 한국 사회는 '자작농-자유인'의 사회로 바뀌었다. 


토지개혁 성공의 이면에는 조봉암의 공로가 컸다. 물론 공산당 출신인 조봉암을 발탁한 것은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토지개혁으로 한국민주당의 경제 기반 약화, 농민의 지지 확보, 좌파의 공세 차단이라는 1석 3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토지개혁으로 토지 소유의 균등성이 달성되었는데 한국이 소농의 나라로 변신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51년 전체 경작지의 96%가 자작농 소유로 바뀌면서 기존 지주계급은 몰락했다. 봉건적인 “지주-소작인” 사회가 “자작농-자유인”의 사회로 바뀌는 혁명적인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토지개혁으로 자신 소유의 농지를 경작할 수 있게 된 농민들은 한동안 이승만의 주요 지지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북한 공산군의 선동에 현혹되지 않고 대한민국을 굳건하게 지지했다. 

▲ 토지개혁 법안과 조봉암


중도파의 참여로 안정화되는 신생 공화국

토지개혁과 의무교육제도의 실시로 국가에 대한 국민의 귀속감이 증대하자, 다수의 임시정부 출신 인사들과 중도파 인사들이 점차 대한민국의 건국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자 했다. 제헌의회 선거를 거부했던 다수의 중도파들도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부분 무소속으로 입후보해 당선되었다. 특히 삼균주의의 아버지인 조소앙은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안재홍, 조소앙, 원세훈, 윤기섭, 오하영 등의 중도파 당선자들이 중도 무소속 세력을 이끌고 새로운 정치를 펼칠 것을 다짐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대중이 현실적인 생존을 위해 국가안보의 과제에 집중하는 대한민국을 지지하면서도 민족주의의 이상인 남북통일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제헌국회 말기부터 민주국민당이 발의한 내각제 개헌안에 시달리고 있던 이승만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최대 정파로 급부상한 중도파 세력과 제휴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중도파와 여당인 대한국민당, 야당인 민주국민당 간의 세력 균등을 이승만이 중재하는 모양새가 연출되었다.

제1공화국이 점차 안정화되어감에 따라 국가 내부의 자생적인 발전 역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기획처장 이순탁과 기획처의 중도파 관료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기획처는 경제기획원의 전신에 해당하는 기구로, 당시의 기획처는 생산과 분배를 계획경제체제로 운영하려는 중간파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순탁은 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는 당면 과제를 해결할 수 없고 종합적인 국가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는 토지의 점진 불하를 주장하며 연평균 수확량의 200%를 매년 20%씩 10년에 걸쳐 상환하는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농지개혁 법안을 마련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는 정부 수립 1년 만에 흑자재정을 기록할 수 있도록 예산을 편성했는데, 이를 높이 평가한 미국은 대규모 원조를 계속 제공했다.

1950년 즈음에는 예산이 균형을 이루고 세입이 증가했으며 인플레이션이 통제되고 환율이 안정되는 가운데 경제 전망이 바람직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리하여 미군이 완전 철수하면 쉽게 무너질 것 같았던 제1공화국은 미국의 지원이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는데도 경제의 부분적 회복과 균형재정을 이루며 한계 속에서도 점차 국가성을 획득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중도파의 국가 건설 참여로 획득한 정치적 정통성과 균형재정 달성, 허약한 신생국가를 살리기 위한 국민들의 헌신 등 대부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피땀눈물로 이룬 국가 건설의 역사

대한민국은 취약국가로 태어났다. 대한민국 건설의 역사는 그 출발선에서부터 안보, 물자, 인력 등 모든 차원에서 자원이 심대하게 부족했다. 따라서 한국의 국가 건설 과정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민족주의라는 이념 자원을 수시로 동원한 역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생 공화국은 금세 절체절명의 안보 위기를 겪음으로 인해 민족을 배신했던 부일 관리들을 기용하고 폭력적인 우익 청년단체를 준국가기구로 활용하여 이념 자원을 훼손하는 질곡의 길을 걸어야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념 자원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민족주의적 대의명분과 정치적 정통성은 높으나 국가 관료로서의 능력은 떨어지던 인물들이 국가 건설 과정 초기에 기용되면서 국정 운영에 차질과 비능률이 발생했고, 전문가들이 이들을 대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모됐다. 그 이후로도 반공과 반일이라는 이념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이용되었고, 건국 초기부터 노정된 취약성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에 깊은 분열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붕괴하지 않고 살아남아 상당한 수준의 번영을 이루었다. 촉박한 국가 수립 일정, 부족한 예산 및 자원 속에서 초라하게 탄생했지만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대국이자 세계 7위의 군사 강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 이 책은 취약국가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을 객관적/실증적으로 재구성한 최초의 시도이자, 그 시대를 산 건설자들에 대한 헌사이다.

 


*      *      *

지은이 이택선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대학원에서 해방 전후의 한국 정치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지타운대학교 외교학대학원 아시아연구소 방문연구원을 거쳐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연구원과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며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 연구위원,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와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문명 전환기 권력의 이동에 따른 한국의 국가 건설과 외교이며, 한국과 동아시아 역사의 보편성을 중시하면서도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한 역사적 설명과 독자적 이론 개발에 힘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문화협력체 추진방안 연구』(공저, 2020), 『한국 근대 공화주의자 6인의 리더십』(공저, 2019), 『북한과 국제정치』(공저, 2018), 『한국의 민주주의와 한미관계』(공저, 2014), 『지식과 국제정치』(공저, 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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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군벌 전쟁

현대 중국을 연 군웅의 천하 쟁탈전 1895~1930

권성욱 지음 | 1396쪽 | 48,000원



현대 중국을 만든 용광로, 

20세기의 "춘추전국시대"를 가다!


청조 멸망 후 중국은 전국에서 할거한 군벌들로 조각나 있었다. 황제가 되고자 한 위안스카이, 동북왕 장쭤린, 중원의 패자 우페이푸, 남방의 혁명가 쑨원 등 전국 각지의 군벌들이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경쟁했다. 쑨원과 장제스가 지도하는 국민당은 혁명을 완수하고 현대적인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노력을 수십 년간 거듭했다. 마오쩌둥의 공산당 역시 한쪽에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중국 군벌 전쟁은 현대 중국이 그 형태를 갖추어가는 ‘용광로’와도 같은 시기였다.

군사력으로 볼 때 가장 약체였던 국민당은 쑨원마저 죽고 사분오열의 위기에 처했지만, 장제스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벌 전쟁을 감행한다. ‘북벌은 망상’이라며 모두가 코웃음 치는 가운데 시작된 장제스의 통일전쟁은 수많은 역경과 난관 속에서도 거대한 성공으로 나아간다. 마침내 장제스는 중국 최대 군벌인 만주의 장쭤린과 천하의 패권을 놓고 최후의 전투를 벌인다.




누가 중국을 통일할 것인가?

『중국 군벌 전쟁』은 청조 말부터 중일전쟁 발발까지 20세기 초반의 중국 역사를 다룬다. 특히 전국 각지에서 할거한 군벌들로 갈기갈기 찢어진 중국을 삼민주의 혁명의 이념 아래 근대적인 국민국가로 통일하려 했던 쑨원과 장제스의 군사적 활약상을 중심으로 개괄한다.

중국 현대사는 우리에게 분실된 블랙박스와도 같다. 특히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망한 뒤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할 때까지의 역사는 거의 공백이나 다름없다. 중국에서조차 근대사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다. 기껏해야 쑨원과 마오쩌둥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신해혁명 과정의 혼란상과 공산혁명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설명할 뿐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허구와 신화가 있다.

▲ 우창봉기에 참여한 혁명군 병사들


마오쩌둥의 투쟁사는 로빈후드 이야기처럼 영웅적으로 채색되었지만 장제스와 대부분의 군벌은 제국주의 열강과 결탁하여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은 매판 세력으로 치부되었다. 마오쩌둥의 오합지졸 농민 군대가 최신 무기를 갖춘 장제스의 군대를 격파한 것은 ‘위대한 신화’로 포장되었지만, 장제스 또한 북벌전쟁에서 그에 못지않게 빈약한 무기와 오합지졸을 이끌고 훨씬 잘 무장하고 막강했던 군벌 세력을 이겼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 『중국 군벌 전쟁』은 1,4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서 그동안 전혀 조명받지 못했던 중국의 군벌들을 저공비행으로 살펴보며, 난세를 살았던 각양각색의 인물 군상을 펼쳐 보인다. 이 책에 수록된 135장의 사진 및 도판 자료와 27개의 전황 지도는 독자들이 이 시대를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현대판 “춘추전국시대”, 군벌 시대의 개막

신해혁명으로 선통제 푸이가 퇴위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었을 때, 그 과실을 차지한 쪽은 혁명파가 아니라 청조 내에서도 수구파였던 위안스카이였다. 그는 탁월한 정치가이자 유능한 관료였지만 공화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다시 황제가 되고자 하는 헛된 꿈을 꿨다. 그의 역량은 중국의 위기를 극복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위안스카이가 죽자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각지의 군사 실력자들이 천하 패권을 놓고 싸움을 시작했다. ‘군벌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1922년 제1차 펑즈전쟁 당시 장쭤린과 우페이푸는 서로를 향해 ‘군벌’이라고 불렀다. 장제스는 북벌전쟁에 나서면서 북방의 군사 지도자들을 ‘군벌’이라고 불렀으며, 공산당은 그 장제스까지 포함해 죄다 군벌로 치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대방을 향해 군벌이라고 부르면서도 자기 자신은 군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위안스카이(앞줄 가운데)가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한 후 각국 공사들과 찍은 사진


중국 근대사에서 ‘군벌’이란 중국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으며 국가와 민족에 큰 해악을 끼친 악당이라는 것이 오랜 통념이다. 실제로 군비 확보에 혈안이 되었던 많은 군벌들은 총칼을 이용해 온갖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특히 폐해가 가장 심했던 쓰촨성의 경우, 심지어 100년 뒤에 낼 세금까지 미리 징수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벌들이 폭정을 일삼았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북왕 장쭤린이다. 그는 제 이름 석 자도 쓰지 못하는 마적 출신이었지만 아편 밀매를 금지하고, 교육을 보급하고, 근대산업의 육성에 힘써 동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광둥 군벌 천중밍은 민중 계몽가였다. 산시성 군벌 옌시산은 낙후한 그곳을 발전시켜 전국에서 손꼽히는 모범 성으로 만들었다. 윈난 군벌 룽윈은 민주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한때 중원을 호령하던 군벌 우페이푸는 대표적인 반일 민족주의자였다.

▲ 앞줄 왼쪽부터 동북왕 장쭤린, 산둥군벌 장쭝창, 중원의 패자 우페이푸


대개 군벌 내전이라고 하면 소말리아나 아프가니스탄, 시리아처럼 무법천지 세상을 연상하게 된다. 이 나라들은 질서가 무너지면서 정치와 경제가 마비되고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군벌 시대의 중국은 로마제국의 멸망처럼 한 국가가 붕괴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새로 태어나는 과정이었다. 청조 몰락 후 각지에서 군벌들이 일어서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중국이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든 것은 아니었다. 군벌들의 통치가 비록 봉건적이고 억압적이었다 해도 중국이 외세의 침략과 식민 지배를 경험하지는 않았다. 군벌들은 흉포한 도적 떼가 아니라 한 지역을 통치하는 정치 지도자들이었다. 마오쩌둥 신화에 가려지긴 했지만 군벌 시대는 『초한지』, 『삼국지』의 재현이었다. 항우와 유방의 싸움을 떠올리게 하는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파란만장한 대결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다. 위안스카이를 몰락시킨 차이어, 문무를 겸비한 수재 장군 우페이푸, 천하통일의 문턱까지 갔던 장쭤린, 장제스와 천하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붉은 장군 펑위샹, 북벌군을 거의 패배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남방의 명장 쑨촨팡 등 군벌 시대는 기라성 같은 군웅의 천하 쟁탈전 시대였던 것이다.

▲ 왼쪽부터 서북왕 펑위샹, 북벌군 총사령관 장제스, 산시군벌 옌시산

 

장제스는 어떻게 중국을 통일했나?

쑨원은 중국을 통일하고 근대적인 공화국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에 일평생 헌신했다. 쑨원은 혁명의 상징이자 구심점이었지만,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군벌들이 지배하는 중국의 현실은 그의 이상과 너무나 멀었다. 쑨원은 무수히 많은 봉기를 일으키고 북벌전쟁을 선포했지만 대부분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는 군사적 역량도, 자원도 부족했다. 심지어 천중밍 같은 군벌에 의해 그의 근거지인 광둥성에서조차 쫓겨날 정도였다. 국공합작을 통한 소련의 원조가 아니었다면 쑨원은 그의 뒤를 이어 장제스가 북벌을 완수할 물적 기초를 닦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쑨원은 장제스를 쓸 만한 인재로 여겼을 뿐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 쑨원과 그 뒤에 서 있는 젊은 장제스


반면 무명의 군인이었던 장제스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남방을 무력으로 평정해 국민당의 근거지를 확고히 했고, 북방 군벌들 간의 분열을 이용해 단기간에 북벌을 성공시켰다. 1926년 북벌이 개시될 때 국민군은 병력이 8만 명에 불과했으나 북방의 군벌들은 100만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경제력, 군비, 장비, 무기 생산 측면에서 북양군벌들은 압도적이었다. 장제스는 1년 안에 북벌 승리를 장담했으나 남들 눈에는 터무니없는 허세로 보였을 뿐이다. 당시 북벌군을 지원하던 소련 고문단의 평가에 따르면, 북벌군은 3분의 1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나폴레옹 시절과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껏해야 광둥성과 후난성 접경에서 몇 차례 국지전으로 끝날 것으로 예상했고, 변경의 성 한두 개로 중국 전체를 상대해 싸우겠다는 발상이라며 비웃었다.

▲ 북벌군 병사들. 낡고 해진 군복을 걸치고 발에는 짚신을 신었다. 등에는 비를 막기 위한 삿갓.


그러나 북벌은 단순한 통일전쟁이 아니라 혁명전쟁이었고,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이 북벌군을 지지하고 협조했다. 무엇보다 북벌군은 강한 군대였다. 장제스는 여러 차례의 군사적 패배, 정지적 하야, 배신과 음모 등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북방의 군벌들을 차례차례 꺾어갔다. 장제스는 마침내 동북왕 장쭤린을 베이징에서 몰아내고 1928년 6월 북벌 종료와 국가 통일을 선포했다. 북벌에 나선 지 1년 11개월 만이었다. 나중에 다시 벌어진 신군벌 내전에서 장제스에게 반기를 든 리쭝런의 말에 따르면, 북벌을 완수한 직후 장제스는 베이징에 있던 쑨원의 묘를 찾아가 한없이 울었다.

장제스는 수많은 군사적, 정치적 시련을 겪으면서 일개 장교에서 국민군 총사령관으로, 노련한 정치가로 성장했다. 쑨원 사후에 국민당 내부에는 장제스의 수많은 정적들이 있었으며, 특히 공산당은 장제스를 제거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밖으로는 장쭤린, 우페이푸, 펑위샹 같은 대군벌들과 싸워야 했고, 안에서도 탕성즈, 왕징웨이, 공산주의자들 같은 경쟁자들과 싸워야 했다. 그는 북벌 개시 전(중산함 사건), 북벌 도중(상하이 쿠데타), 북벌 종료 후(중원대전) 등 거의 모든 국면에서 적들로부터 고립무원 상태에 처하기도 했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특유의 방식으로 모두 돌파했다. 장제스는 이러한 우여곡절의 북벌 과정 속에서 처음에는 공산주의에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은 군인이었으나 점차 강경한 반공주의로 선회하게 된다.

장제스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군사적 역량, 정치가로서의 성장, 그리고 혁명의 대의와 통일에 대한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제스의 강점들이 훗날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마오쩌둥에 의해 발휘되어, 장제스가 대륙의 패권을 잃게 된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 1926년 광저우에서 북벌군 출정을 선언하는 장제스

▲ 1차 북벌전쟁의 전황도. 남쪽 광저우에서 출발한 국민정부의 북벌은 우창과 난징을 거쳐 북쪽의 베이징 점령까지 1년 11개월만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전쟁사와 국제적 시각에서 본 중국 군벌 전쟁

20세 전반기의 중국 현대사는 전쟁사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 군벌 전쟁->중일전쟁->국공내전’이라는 세 개의 퍼즐이 모여 완성된다. 중국 군벌 전쟁은 장군과 혁명가들, 여러 뛰어난 인물들의 경연장이자, 새로운 무기와 전략의 시험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 소련, 기타 열강이 외교력과 군사력을 투사하는 국제적 무대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군벌 전쟁사는 20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이라 할 수 있는 중일전쟁의 전사(前史)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전쟁사의 관점에서 중국 군벌 전쟁을 서술할 뿐만 아니라 국제적 시각에서 중국 현대사를 일별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      *      *

 

  

지은이 권성욱

전쟁사 연구가. 개인 블로그인 ‘팬더 아빠의 전쟁사’에 전쟁사 관련 글을 쓰고 있으며, 특히 중국 근현대사와 2차대전이 전문 분야이다. 국내 최초로 중일전쟁을 다룬 역사서 『중일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를 썼으며,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컨텐츠(2014년)에 선정되었다. 래너 미터의 『중일전쟁: 역사가 망각한 그들 1837~1945』를 공동 번역했고, 『덩케르크: 세계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 『일본 제국 패망사: 태평양 전쟁 1936~1945』, 『미드웨이: 어느 조종사가 겪은 태평양 함대항공전』을 감수했다. 현재 울산에서 공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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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민 2020.07.20 09:32

    혹시 이 책 전자책 출간 예정인가요? 해외에 거주하고 있어서 전자책을 선호하는 편이라 문의합니다.

    • Favicon of https://mizibooks.tistory.com BlogIcon 미지북스 2020.07.20 17:54 신고

      전자책도 제작 중에 있습니다. 1~2주 안에 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 2020.07.20 11:50

    저도 문의 하나 드립니다. 꼭 소장해서 읽고 싶은데 2권이나 3권으로 분권해서 나올 계획은 없으신가요? 1400쪽은 읽을 때나 보관할 때 너무 불편할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한 번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 Favicon of https://mizibooks.tistory.com BlogIcon 미지북스 2020.07.20 17:56 신고

      처음에 저희도 분권을 고려하긴 했습니다.하지만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합본 출간으로 결정했습니다. 아쉽게도 당분간은 분권 출간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3. Favicon of https://bookwormkr.tistory.com BlogIcon 소셜홀릭 2020.07.23 16:08 신고

    페이스북 책벌레 페이지 운영자입니다. 저희 페이지에도 소개하고 싶은 책이네요. 혹시 카드뉴스나 그외에 소개할만한 자료가 있으면 kcjun65@gmail.com 으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4. 콧물이 2020.12.21 18:22

    혹시 구글북스에는 전자책 등록하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권성욱 님의 다른 저서인 중일전쟁도 포함해서요.
    그냥 개인적으로 구글북스를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문의드립니다

    • Favicon of https://mizibooks.tistory.com BlogIcon 미지북스 2021.03.09 16:44 신고

      독자님, 안녕하세요. 아직은 구글북스에 등록계획은 없습니다만 향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생을 바꾸는

탐구 습관

이민열 지음 | 224쪽 | 12,800원



책읽기, 글쓰기, 공부도 전략이다
탐구를 위한 삶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지식의 늪에 빠지지 않고 지식의 바다를 항해하는 법


바쁜 일상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탐구할 수는 없을까? 때때로 책을 펼쳤다가도 금세 휴대폰을 들고 있는 모습이 더 익숙한 현대인들. 이제는 책을 잡는 것조차 어색하다면, ‘탐구 습관’부터 길러야 한다. 법학자 이민열 교수가 쓴 <인생을 바꾸는 탐구 습관>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배움에 목마른 성인들을 위한 체계적인 공부법을 제시한다. 무조건 ‘열심히’ 읽고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책 읽기, 글쓰기, 공부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탐구’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탐구란, 살면서 맞닥뜨리는 중요한 문제들을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우리의 이해와 행위가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뜯어보는 체계적인 활동이다. 이 책은 좋은 탐구 습관을 만들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전략과 연장통을 제공한다.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꼭 필요한 책. 




반성 없는 확신 vs 정당화되는 앎

인생에서 중요하거나 복잡한 문제를 다룰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성 없는 확신’이 아니라 ‘비판적 숙고’다. 숙고란 문제의 해결책이나 선택지로 무엇이 있는지 뜯어보고, 그것들이 타당한 이유들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되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또한 비판적 숙고는 혹시 잘못된 자료나 추론을 옳은 것이라고 그릇되게 믿지는 않았는지 한층 더 깊이 조망하여 검토하는 사고다.

비판적 숙고는 그저 ‘열심히’ 생각해보는 것과는 다르다. 잘못된 자료와 추론으로 열심히 숙고해봤자 잘못된 확신만 강화된다. 만약 비판적으로 숙고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생을 우연에 맡기는 것과 같다. 지금 내가 우연히 확신하는 믿음이 반드시 참이라는 보증은 없기 때문이다.


반성 없는 확신은 어리석음으로 가는 길이다. 어리석음은 단순한 무지와는 다르다. 플라톤에 따르면, 단순한 무지는 그저 알지 못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 실존의 한 부분이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면,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시간을 들여 지식을 이해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탐구 공동체의 견해를 참조하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리석음은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여기는 것이다. 앎 없는 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받아들인 개념에 우겨넣는 방식으로 사유를 외주화하고, 자신은 게을러진다. 이미 자신이 갖고 있는 신념에 합치되는 말만 듣기 좋아하며 따르는 사람은 끝없이 자신의 인식적 입지를 훼손하다가 종국에는 어리석음에 닿을 수밖에 없다. 

 

탐구하는 삶

반성 없는 확신이 아니라 정당화되는 앎을 지향하는 활동을 ‘탐구’라 부를 수 있다. 탐구란 기존의 믿음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고 논증하며 답을 얻는 지성적 활동이다. 물론 인간이 탐구에 진력한다고 해도 진리는 인간의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탐구하는 사람은 적어도 타인의 속임수와 우연의 장난에 휘둘리지는 않는다. 거짓 신념들에 무력하게 당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리하여 삶과 세계의 문제를 그 무게에 맞게 받아들이며 경박하게 다루지 않는다.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매일매일 습관으로 벼려내는 지성의 날이 있다. 



모든 고차적이고 복합적인 일들이 그렇듯이, 탐구 역시 전략이다. 문제에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구조화하고, 풀고, 공유하는 데 효과적인 습관을 생활 속에 뿌리내리는 방법을 고민해봐야 한다. 이 책은 탐구의 습관화를 시도할 때 쓸 수 있는 연장통을 제공한다. 탐구자가 필요에 따라 쓸 만한 연장들, 즉 책읽기, 글쓰기, 습관 만들기에 대한 조언이 담겨 있다.


작은 몰입에 성공하기

공부를 시작할 때, 또는 중단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지루함과 난해함은 공부나 과업에서 도피하고 싶게 만드는 대표적인 원인이다. 끝없이 휴대폰을 들어 만지작거리고 인터넷 창을 띄우게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저자는 탐구에 적합한 새로운 습관을 들일 것을 제안한다. 나쁜 습관에는 다른 습관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공부나 일을 시작하려는데 마음이 분산될 때 가장 손쉬운 대처법 중 하나는 눈감기다. 눈감기는 휴대폰, SNS, 게임 같은 즉각적인 도피처로 바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마음을 이완시켜준다. 공책 쓰기도 추천한다. 자유롭게 쓰고 그릴 수 있는 공책은 과업을 분석하고 구조화하고 단순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 주된 일(주건) 외에 하나의 일(부건)을 더 정해 병행하면서 하는 방법도 있다. 기분 전환을 통해서 주건에 몰입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이다. 이것은 실시간으로 두 개 이상의 일을 하는 멀티태스킹과는 다르다. 작은 몰입에 성공하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점차적으로 몰입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생활 방식을 만들어가야 한다.   

 

장기, 중기, 단기 계획 세우기

일기를 쓰면 장기, 중기, 단기 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준다.

장기 계획은 몇 가지 기획의 성취가 합해져 하나의 커다란 성취가 발생하는 1년 이상의 기간을 필요로 하는 계획이다. 중기 계획은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몇 주 또는 몇 개월의 기간이 요구되는 계획을 가리킨다. 단기 계획은 일주일 이하의 기간과 매일매일의 계획이다.

장기 계획은 쏘아 맞혀야 하는 목표라기보다는 잠정적 궤도를 알려주는 대체적인 방향이다. 중기 계획은 정한 일을 꾸준히 실행하다보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다. 계획은 자신의 실행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세워야 한다. 시험 합격이나 승진과 같은 외적인 사건들을 포함하는 것은 중기 계획이 될 수 없다. 또한 단기 계획을 짤 때는 기계적으로 양을 할당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계획이 아니라 구속복에 불과하다. 단순하고 기계적인 계획은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 사람은 의무로 주어진 것, 고정되어 융통성이 없는 것, 기계적인 것을 하기 싫어한다. 



단기 계획이 실패해서 무너지면 무계획 상태가 된다. 그날그날 외부의 사정에 몰려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만 눈앞에 놓고 그것들을 해내기에 급급한 삶이 된다. 그러면 그 순간 가장 주의를 끄는 것들에 휘둘리기 쉽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이 모자라게 된다. 이러한 삶은 ‘분주한 무기력에 빠진 삶’이다. 세네카에 따르면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은 “반쯤만 살아 있는 것이며”, “자기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한다고 할 수 없다”.
 

지식을 모듈화하기

탐구 전략에서 중요한 것은 지식을 ‘모듈화’하는 것이다. 모듈화란 지식을 하나의 덩어리처럼 뭉쳐서 그것을 자신의 창조적인 작업에 사용할 수 있도록 부품화하는 것이다. 모듈화는 선학자의 탐구가 타당한지를 검토한 후, 타당한 한도에서 자신이 풀려고 하는 문제의 해결에 적합한 형태의 장비로 만들어놓고 연습하는 것이다.

모듈화의 대표적인 예로는 논증적 요약을 들 수 있다. 선학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논거들을 그 논리적 결합 관계를 고려하여 요약한다. 또한 선학자의 논의에 대한 여러 비판들을 점검한다. 이런 방식은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피하게 해준다.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는 이러한 점검 과정이 포함된 모듈화를 거치지 않고 선학자의 결론만을 떼어내 추종할 때 생긴다.

지식을 부지런히 모듈화해서 새겨두면, 나중에 행운이 찾아온다. 어떤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모듈로 풀 수 있는지 아닌지 알아챌 수 있고 체계적으로 풀 수도 있다. 모듈화를 하다보면 훨씬 더 혁신적인 자기만의 모듈을 만드는 능력 역시 발전한다. 



이런 모듈화를 부지런히 하는 것이 탐구의 왕도다. 절도 있는 탐구 생활이란, 보고 나면 산산이 흩어질 자료들을 ‘열심히’라는 강박 아래 들입다 먹어치운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강박에 쫓기다보면 모래로 집을 지으려는 사람과 비슷해진다. 모듈화 작업은 탐구자에게 일상이 되어야 한다. 탐구자는 지식의 늪에 빠져 망각 속에 허우적거리지 않고 모듈로 명쾌하게 매듭을 지으며 더 큰 문제 해결을 예비하며 지식의 바다를 항해한다.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기

이 세상의 지식은 거대한 규모의 천체를 둘러싸고 있는 액체와도 같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빠른 속도로 그 표면만을 훑는다고 해도, 그것의 극히 일부의 일부조차도 접하지 못하고 우리는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다. 유한한 시간과 정력의 한계 때문이다.

엄청난 양의 지식은 늪이 될 수도, 바다가 될 수도 있다. 늪에 들어서면 다리가 푹푹 빠지기만 한다. 이것저것 주워섬기듯 지식을 접하는 사람은 어느 지점에서 깊이 빠져 실질적인 것을 아무것도 더하지 못한다. 반면 늪이 아닌 대양에서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수 있다. 그 항로를 탐험함으로써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 수 있고 유용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으며 종국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대륙에 도착할 수 있다. 



누군가는 늪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자신이 쥐고 있는 모래알 더미를 세상을 향해 던지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짐짓 위장한다. 문제 설정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탐구의 핵심은 진정으로 흥미로운 문제를 포착하고 그것을 제대로 풀 수 있는가이다. 변죽을 울리는 정보들을 곁들여서 늘어놓는 것은 탐구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탐구의 결과물들은 어떤 문제를 풀려는 노력의 결정체다. 지식의 늪에 빠지는 사람들은 나침반에 되는 자신의 질문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숲을 보지 않고 수많은 나뭇잎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모듈을 만들지 않고 막연한 인상들만 켜켜이 쌓는다.

일본의 문인 나쓰메 소세키는 “우선 전반적으로 정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동서고금 수천 년의 서적을 독파하려고 계획하는” 청년들에게 조언한다. “그렇게 하면 백발이 돼도 끝내 전반적으로 정통할 시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부지런히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자력으로 문제를 설정하고 스스로 문제를 푸는 활동을 중심에 놓고, 선학자의 글은 이 활동에 도움을 주는 자료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삶을 단순화하기

탐구자는 삶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진리의 영역에 큰 기여를 했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인생을 단순화했던 사람들이다. 칸트, 뉴튼, 다윈, 디렉, 에어디쉬, 롤스와 같은 거인들은 모두 단순화된 일상에 따라 생활했다. 그들의 생활상을 보면 거의 한결같이 매일매일이 고도로 단순화되어 있다. 탐구하는 삶을 위해서는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것은 제거하고 마음의 평정 상태를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 단순화의 기예는 선택과 집중, 포기를 동반한다.

단순한 삶의 정신은 자신이 중심으로 삼은 가치와 결부된 ‘수행’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수행에 속하는 것은 자신이 주도하는 영역에 있는 것이오, 수행에 속하지 않는 것은 나와 관련은 있지만 내가 주도하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오늘 내가 무엇을 할지는 수행에 속한다. 그러나 그 일의 결과가 기대에 미치는지 여부는 수행에 속하지 않는다. 내가 주도할 수 없는 것을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오직 나의 수행만을 생각하고 몰입하는 것이 최선이다.

자신이 삶을 주도한다는 감각은, 큰 그림을 확고하게 그려두고 현재의 성취가 어디까지 왔는지 강박적으로 자주 돌아보는 것에서 오지 않는다. 큰 그림은 방향을 설정할 때만 고려하고 평소에는 작은 그림들을 차례로 완성해나가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주도적인 느낌은 오히려 더 확고해진다. 이런 감각이 일단 자리를 잡으면, 탐구를 비롯해 인생의 가치 있는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 순전한 괴로움이 아니게 되며, 그 일이 언제 완수될까 노심초사하는 일도 없게 된다. 자신의 사정과 기질에 맞는 도구를 가지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탐구의 기쁨이 충만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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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이민열 (이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 교수이자 변호사이며 시민교육센터 대표이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기본권 제한 심사에서 공익의 식별」, 「가치와 규범의 구별과 기본권 문제의 해결」, 「기본권 보호 의무의 구조와 보호권」, 「국가 완전주의 쟁점과 법해석」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저서로 『철인왕은 없다』, 『중간착취자의 나라』, 『법학방법론』(공저), 『삶은 왜 의미 있는가』,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이것이 공부다』, 『너의 의무를 묻는다』, 『철학이 있는 콜버그의 호프집』, 『탈학교의 상상력』, 『학교를 넘어서』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자유의 법』, 『법복 입은 정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사치 열병』, 『이반 일리히의 유언』(공역), 『포스트민주주의』, 『계급론』, 『성장을 멈춰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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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래,
누가 주도할 것인가

인호, 오준호 지음 | 276쪽 | 15,000원



누구나 건물주가 될 수 있는 세상
전 세계 자산시장의 유동화 혁명이 온다.

다가오는 디지털 자산혁명,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


국내 최고의 블록체인 권위자 중 한 사람인 고려대 컴퓨터공학과 인호 교수는 블록체인으로 인해 자산시장에서 일대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부동산과 같은 실물 자산이 디지털 토큰으로 변환되고 국경을 뛰어넘어 24시간 거래되는 진정한 글로벌 자산시장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인류가 자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방식과 소유의 주체마저 바꿀 것이다. ‘미래의 부’는 비싼 자산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디지털 자산을 투명하고 안전하게 관리하는 기술, 글로벌 자산 거래에 필요한 여러 서비스를 먼저 제공할 수 있는 이들이 부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부의 미래, 누가 주도할 것인가>는 블록체인과 토큰경제의 원리,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경제적 충격에 관해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쓴 책이다. 공저자인 인호 교수(고려대 블록체인연구소장)와 오준호(논픽션 작가)는 핵심 아이디어를 오랫동안 논의하고 고민을 거듭하여 쉬운 글로 다듬었다. 저자들은 이 책을 통해 격변하는 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과 국가가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해 전망과 통찰을 나누고자 한다. 




디지털 자산혁명이 온다

2018년 10월, 미국 크라우드 펀딩 회사 인디고고는 콜로라도주 애스펀에 있는 유명한 스키 리조트 세인트 리지스 애스펀을 토큰으로 유동화했다. 토큰화한 대상은 애스펀 리조트 객실 가운데 5분의 1로, 그 가치는 1,800만 달러에 달했다. 인디고고는 이를 1,800만 개의 애스펀 코인으로 토큰화했으며, 애스펀 코인 한 개의 가치는 1달러였다. 이 코인들은 22개의 전자지갑으로 판매, 전송되었다.

인디고고가 자신이 소유한 리조트를 토큰으로 유동화한 사건은 다가올 디지털 자산혁명의 상징적인 예다. ‘디지털 자산혁명’이란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진 모든 자산과 새롭게 출현한 자산 모두를, 블록체인 플랫폼을 통해 글로벌 차원에서 자유롭게 거래하고 유통하는 것을 말한다. 블록체인 기술은 가치 있는 재산을 미들맨(중개인 또는 중앙 관리자)에 의존하지 않고도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전송하고 보관할 수 있게 만들고, 중개자 없는 글로벌 시장을 열 것이다.

 

아날로그 머니 시스템에서 디지털 머니 시스템으로

2016~2017년 암호화폐에 대한 폭발적 관심은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한 디지털 자산혁명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암호화폐의 출현은 각국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법정화폐를 넘어서는 진정한 글로벌 화폐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단순히 아날로그 머니가 디지털 머니로 바뀌는 것을 넘어서 시스템 전체의 대격변이 예고되고 있다. 아날로그 머니 시스템 위에 세워진 금융 및 경제 시스템은 대변동을 겪을 것이다. 과거 아날로그 시대의 시장 지배자들이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몰락한 것처럼 지금의 금융기관, 기업, 정부가 디지털 자산혁명을 외면한다면 쇠퇴의 길을 가게 될 수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블록체인 기술을 디지털 머니 시스템의 핵심 인프라로 인식하고, 디지털 자산혁명을 새롭고 광대한 금융 영토의 확장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과거 세계 최대의 필름 생산업체 코닥은 디지털카메라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파산했다. 아날로그 TV 최강자 소니는 디지털 TV 시장에서 삼성에게 밀려났고, 휴대폰 시장을 장악하던 모토롤라도 아이폰의 애플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말았다. 반대로 기술 격변은 새로운 시장의 지배자들을 탄생시켰다. 메인 프레임이 개인용컴퓨터로 바뀌는 시기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운영체제 윈도우로 세계 컴퓨터 시장을 장악했고, 모바일 시대로 바뀌면서 구글은 안드로이드라는 운영체제로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장악했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도 마찬가지다. 부가 디지털 공간에서 창출되고, 거래되고, 보관되는 디지털 자산시장이 크게 확대된다. 그리고 이 시장을 떠받치는 핵심 기술이 바로 블록체인이다. 이를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세계 경제의 판도가 바뀔 것이다.

 

디지털 토큰화: 누구나 건물주가 될 수 있다

초고층 빌딩과 같은 고가 부동산은 그동안 대다수의 일반인들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자산이었다. 그러나 실물 자산이 블록체인을 통해 토큰으로 잘게 유동화되고 스마트 계약으로 상시 거래된다면, 높은 수수료의 부담 없이 일반인들도 작은 지분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사회활동과 경제활동의 전제는 신뢰다. 상대를 믿을 수 있어야 협력과 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뢰를 위해 대개는 서로가 믿을 수 있는 중개자를 둔다. 중개자(미들맨)는 금융거래에서는 은행이, 부동산 거래에서는 공인중개사와 국가가 그 역할을 담당했고, 신뢰를 제공하는 대신 높은 수수료를 요구했다. 블록체인 기술은 중개자가 없어도 상호 신뢰를 보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고, 모든 자산이 디지털 토큰이 되어 블록체인 플랫폼에서 자동으로 거래될 수 있게 했다.

가령 100억 원짜리 빌딩이 100억 개의 토큰으로 전환되면, 평범한 서민 A씨도 200만 원으로 토큰 200만 개를 살 수 있다. 지금까지는 200만 원으로 100억 호가 빌딩이 거래되는 자산시장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빌딩에서 관리비 등을 제외하고 한 달에 순수한 임대 수익으로 1억 원씩 연 12억 원이 발생한다면, A씨는 자신이 가진 토큰량(총 발행된 토큰의 0.02퍼센트)에 따라 연 24만 원의 배당을 받는다(이대로만 된다면 수익률이 12퍼센트이니 결코 낮지 않다). 이처럼 서민들도 고액 부동산의 일부를 가지는 세상은 이제 공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블록체인 시대에 자산은 무엇이든 디지털 토큰으로 변환되고 글로벌 차원에서 유통될 수 있다. 암호화폐가 돈을 토큰으로 만든 것이라면 부동산, 슈퍼카, 호화 크루즈선, 기업, 광산도 그 가치를 토큰으로 만들 수 있다. 이를 디지털 토큰화라고 한다. 토큰화의 대상은 예술품, 개인 정보, 지적재산권, 탄소배출권 등으로 넓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자산을 탈중앙화된 거래 플랫폼에서 매매할 수 있다. 중앙 관리자의 통제와 플랫폼 독점을 넘기 위한 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디지털 자산혁명은 디지털 경제를 중앙 관리자의 통제로부터 해방시켜 진정한 글로벌 경제로 발전시킬 것이다. 또한 부의 주체도 부동산 소유자, 금융기관, 대기업, 독점 플랫폼에서 다수 대중으로 바뀔 것이다. 


누가 주도할 것인가: 페이스북, 골드만삭스, IBM의 행보

2019년 암호화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페이스북이 야심차게 준비하는 암호화폐 리브라(libra)의 출현 예고가 그것이다. 페이스북 계정만 있으면 리브라로 세계 어디로든 돈을 보낼 수 있고, 어디서든 지불할 수 있으며, P2P 대출도 받을 수 있다. 2019년 말 페이스북 월 이용자는 24억 명으로, 리브라는 세계 최대의 소셜 플랫폼이 금융거래 플랫폼으로 도약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리브라가 법정화폐에 기반해 가치 안정성을 확보한다면, ‘디지털 골드’로 축장되고만 있는 비트코인을 밀어내고 새로운 글로벌 디지털 화폐로 등극할지도 모른다.



블록체인이 조성하는 새로운 가치사슬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골드만삭스나 IBM 같은 주요 플레이어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의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금융산업의 오랜 선두주자 경험을 바탕으로 가치사슬의 각 연결고리인 자산 토큰 발행, 자산 신탁업, 토큰 거래소 분야에서 사업을 개척하고 있다. 전통적인 컴퓨터 기업인 IBM도 자체 보유한 블록체인 기술력을 활용하여 디지털 자산 신탁 분야로 진출하려고 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2015년 당시 전체 직원 3만 3,000명 가운데 정규직 컴퓨터 엔지니어가 9,000명에 달했다. 페이스북 전체 직원 수 9,200명(비전산직 포함)과 비교하면, 은행이 디지털 기업보다도 많은 전산직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것이다. 2018년에도 골드만삭스는 전산직 비중을 25퍼센트로 채웠다. 전통적인 은행이 사실상 핀테크 기업으로 변모하는 셈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2018년 말 기준으로 금융 투자업의 전산직 직원이 4.7퍼센트에 불과하며, 은행은 그보다도 적은 3.8퍼센트이다.

 

데이터 거래 플랫폼

통상 블록체인을 4차 산업혁명의 뿌리라고 한다. 자율주행차나 지능형 로봇 산업이 나무의 열매라면,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기술은 나무줄기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양질의 데이터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관건인데,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면 내 데이터를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고, 데이터 제공에 대한 보상도 받을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 산업이 양질의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 따라서 블록체인은 인공지능, 빅데이터라는 나무줄기에 좋은 양분을 제공하여 신성장 산업이라는 열매를 맺도록 하는 뿌리인 것이다.


블록체인 기반 스마트 계약 플랫폼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데 바로 상시적 데이터 거래 시장이 그것이다. 현재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디지털 플랫폼 기업들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신 데이터를 무료로 사용하고 있다. 만약 이 데이터 소득의 일부가 제공자인 시민들에게 이전된다면 불평등이 크게 완화될 것이다. 데이터에서 발생한 이익을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데이터 소유권자임을 명확히 확정해야 하는데 블록체인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데이터 소유자는 자신의 데이터가 안전하게 보호된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자발적으로 제공한 데이터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기업이나 기관은 필요한 데이터를 최소한의 비용으로 원활하게 공급받을 수 있어야 한다. 데이터 소유자는 블록체인 기반 스마트 계약으로 “어떤 데이터를, 어떤 목적으로, 얼마의 가격에, 언제부터 언제까지 사용하고 폐기할 것인지” 정할 수 있다.

법제도가 정비되면 가장 빠르게 등장할 것으로 보이는 데이터 거래 시장은 의료 건강 데이터 플랫폼이 될 것이다. 환자에게는 데이터를 제공한 데 대한 보상으로 헬스 코인이 지불되고, 환자는 헬스 코인을 병원 진료비로 사용할 수 있다. 남는 코인을 되팔 수도 있다. 환자는 자신의 건강 데이터를 헬스 코인을 매개로 더 나은 진료 서비스와 교환하는 것이다.

 

미래의 부, 주도할 것인가 뒤처질 것인가?

미래의 부는 비싼 자산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디지털 자산을 투명하고 안전하게 관리하는 기술, 글로벌 자산 거래에 필요한 여러 서비스를 먼저 제공할 수 있는 이들이 부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인프라인 블록체인을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세계 경제 판도가 바뀔 것이다. 우리가 블록체인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이유다. 이마저도 외국 기업에게 넘어가면 우리 국민의 금융 자산이나 건강 데이터가 외국 기업이 주도하는 블록체인 시스템 안에서 저장, 관리, 거래될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 혁신은 우리나라 정보 주권을 지키는 길이다. 한국이 과거에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초고속 인터넷망을 만든 것은 그것들을 국가 핵심 인프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블록체인을 미래 핵심 인프라로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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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인호

고려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블록체인 연구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한 명이다. 고려대학교 전산과학과를 졸업하고,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에서 컴퓨터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텍사스 A&M 대학교에서 조교수로 5년간 지냈으며, 2003년부터는 고려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한국블록체인학회 설립자이자 초대 학회장, 금융위원회 금융발전심의회 위원, 금융감독원 자문위원, 한국핀테크협회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시 블록체인 자문위원, 블록체인 국제표준화기구(ISO TC307) 국가대표위원, 금융보안원․한국예탁결제원․전국은행연합회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고려대학교 블록체인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20여 명의 교수와 함께 블록체인 기반 기술, 관련한 법과 제도, 의료 정보, 비즈니스 모델 등을 연구하고 있다.

 

지은이 오준호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논픽션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인문사회적 주제에서 과학기술 주제까지 다양한 관심을 가지고 책을 쓴다.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 《기본소득 쫌 아는 10대》, 《세월호를 기록하다》, 《노동자의 변호사들》, 《소크라테스처럼 읽어라》, 《퇴근길 인문학》(공저) 등을 썼다. 성공회대학교에서 ‘영화로 보는 세계사’를 강의했고, 4·16 세월호 참사 작가기록단으로 활동한 바 있다. 기본소득 한국네트워크 운영위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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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이 한창 세인의 관심이던 2018년 초, 인호 교수와 몇 차례 학술적 논쟁을 벌였다. 그때 경험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미래를 꿰뚫는 통찰력, 특히 향후 벌어질 디지털 금융과 자산혁명에 대한 예견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 책은 그런 인호 교수가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혜를 쏟아부은 결과이다.

_진대제(한국블록체인협회 초대 회장, 전 정보통신부 장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부가 디지털 토큰으로 변화하는 메가 체인지 속에서 이 책은 대한민국 산업 전반에 깊은 통찰과 울림을 제시한다.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부의 주체가 되기를 희망하는 모든 혁신가들에게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

_조용병(신한금융그룹 회장)

 

이 책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인 자산의 디지털화 현상에 대해 쉽게 설명하면서 이러한 변화 속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전략을 제시한다. 미래를 준비하는 개인과 기업에 꼭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만큼 꼭 한번 읽어보기를 적극 추천한다.

_박수용(한국블록체인학회 학회장, 전 정보통신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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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법

로널드 드워킨 지음 | 이민열 옮김 | 612쪽 | 22,000원


법철학의 대가 로널드 드워킨이 말하는 헌법과 자유

법이 자유를 보호할 때 사회는 더욱 민주적일 수 있다.  


국가가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왜 위헌일까? 언론은 반드시 모든 사실을 확인한 후 보도해야만 하는 것일까? 국기를 불태우는 행위는 허용될 수 있을까? 포르노그래피는 금지되어야 할까? 왜 대학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연구를 한다는 이유로 학자를 해고할 수 없는 것일까? 시민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호되어야 하는 것일까?

『자유의 법』은 ‘법철학의 거두’ 로널드 드워킨이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자유’의 관점에서 일관되고 성실하게 답한 책이다. 로널드 드워킨은 ‘평등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사상’을 주창한 미국 법철학계의 최고 석학으로, 존 롤스의 뒤를 이어 영미권을 대표하는 자유주의 법철학자로 꼽힌다. 드워킨은 추상적 헌법 원리와 구체적인 소송 사건을 연결 지어 탁월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정평이 높다. 이 책 『자유의 법』에서 드워킨은 20세기 후반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이루어졌던 중요한 판결을 다루면서, 법이 자유를 보호할 때 민주주의가 더욱 강건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로 보는 자유의 역사

미국 헌법과 대법원 판결의 역사는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확대되어가는 역사였다. 특히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은 낙태, 안락사, 포르노그래피, 인종 평등, 언론의 자유 등 치열한 철학적 쟁점과 인간 현실이 법을 매개로 만나는 영역이다.

연방대법원이 헌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수많은 미국인들의 권리와 삶이 결정된다는 측면에서, 일부 정치인과 학자들은 이를 비선출직인 ‘판사들에 의한 민주주의 권력의 찬탈’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법원의 사법 심사권을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낙태와 안락사, 인종 문제에 관해 대법원이 내린 자유주의적 판결을 뒤집으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또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포르노에 대한 금지를 열정적으로 추진하며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에 나섰다.

그러나 드워킨은 연방대법원에서 중요한 판결이 있을 때마다 이를 논평하는 글을 쓰면서, 일각에서 요구하는 ‘자유의 제한’에 대해 반대했다. 그는 생명, 프라이버시, 표현의 자유 등 여러 쟁점들이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논의될 때 항상 정공법으로 논변을 펼쳐 자유를 옹호한 자유의 수호자였다.

 

판사들은 민주주의의 수호자인가 찬탈자인가?

이 책에서 저자가 진지하게 대결하는 한 가지 주제는, 헌법을 해석하는 판사들의 권한(사법 심사권)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다. (인민이 선출한)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을 비선출직 판사들이 위헌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사법 심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사실상 찬탈 행위나 다름없다는 비판이다. 레이건과 부시 같은 보수주의 대통령들은 낙태와 같은 사안에서 사법부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고 자유주의적인 판결들을 내린다고 불만을 표했다. 보수주의자들은 미국의 사법 시스템이 판사 자신의 도덕적 확신을 다수 공중에게 부과할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을 주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판사들로부터 권력을 회수해 인민에게 되찾아줄 것을 약속했다.



드워킨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적극 반박하면서, 다수가 원하는 것을 관철하는 다수결민주주의의 관점이 아니라, 시민의 평등한 지위를 전제로 하는 입헌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자고 제안한다. 입헌적 관점에서는 개인의 헌법적 권리를 지켜내는 법원의 권한이 전혀 민주주의와 배치되지 않는다. 판사들은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며, 법원은 사법 독재 기구가 아니다. 오히려 법이 자유를 수호할 때 사회는 더 민주적일 수 있고, 시민은 공동체의 진정한 구성원이 될 수 있다. 


도덕적 독법: 헌법 해석의 원리와 통합성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헌법을 해석하는 문제에 있어서 헌법을 입안한 사람들의 ‘본래 의도’에 맞게 해석해야지 도덕적 원리에 근거해서 판사들이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드워킨은 법은 도덕과 분리되지 않고 합체되어 있으며, 판사가 헌법을 해석할 때 도덕적 원리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도덕적 독법(moral reading)”을 주창했다. 도덕적 독법은 정치적 도덕을 헌법 해석의 심장부로 끌어들인다.

예를 들어 미국 공립학교에서 인종 분리를 위헌으로 규정한 브라운 판결(1954년)은, 흑인의 평등한 권리 보호를 위해 제정된 수정헌법 14조를 도덕적 독법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헌법 입안자들의 원래 의도는 인종 분리 학교를 금지하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판사들은 이 헌법이 갖고 있는 도덕적 원리를 적용하여 해석했으므로 인종 분리 학교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 독법이 판사 자신의 도덕적 견해를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도덕적 독법은 판사들에게 그들 자신의 양심의 속삭임이나 자신의 계급이나 분파의 전통을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드워킨에 따르면, 원리에 따른 헌법 해석은 어디까지나 헌법의 ‘통합성’에 맞게 규율되어야 한다. 헌법은 그것이 설계된 전체적인 구조와 과거 헌법 해석의 지배적인 방향과 일관되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도덕적 독법은 도덕 원리에 따라 헌법을 해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법 전통의 역사와 통합성이라는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드워킨은 강조한다.

 

생명 윤리, 표현의 자유, 적극적 조치

이 책은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제기된 거의 모든 헌법상의 큰 쟁점들을 논한다. 1부 <삶, 죽음, 인종>에서는 낙태를 중심으로 생명과 죽음에 관한 헌법적 권리와 쟁점을 다룬다. 여기에는 안락사와 프라이버시,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권리 등이 포함된다. 2부 <표현, 양심, 성>에서는 주로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쟁점들이 다루어진다. 언론의 자유와 검열, 포르노그래피를 둘러싼 논쟁, 그리고 학문의 자유가 왜 표현의 자유로 포괄되지 않는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지를 논한다. 3부는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들―위대한 판사들과 자질이 부족한 판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며 도덕적 독법에 반대하는 논변들이 얼마나 근거가 없으며 조야한지 설명한다. 이 책 『자유의 법』은 거장의 통찰을 통해 자유에 관한 심층적이면서도 통합적인 사유의 길로 독자들을 안내할 것이다.  



*      *      *


지은이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

‘평등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사상’을 주창한 미국 법철학계의 최고 석학으로, 존 롤스의 뒤를 이어 영미권을 대표하는 자유주의 법철학자로 꼽힌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옥스퍼드대학교 법학과와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했다. 뉴욕 소재 유명 로펌인 설리번앤드크롬웰에서 근무하다가 예일대학교 로스쿨에서 강의한 것을 계기로 학계로 진출했다. 1969년 스승이었던 허버트 하트 교수의 후임으로 옥스퍼드대학교 법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이후 런던대학교와 뉴욕대학교에서 가르쳤다. 자신의 스승이자 법실증주의 거두 하트에 반대하면서 ‘통합성으로서의 법’을 주장하는 일련의 논문과 책을 발표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후 다른 법철학자들과 평생의 논쟁을 마다하지 않고 치러냈으며, 20세기 후반 법철학의 거두 중 하나가 되었다. 2013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이 책『자유의 법』은 드워킨이 자신의 법철학 이론을 헌법 해석에 적용한 ‘도덕적 독법’으로 구체적인 헌법적 쟁점을 생생하게 풀어내고 있다. 주요 저서로 대표작인 『법의 제국』을 비롯해 『법복 입은 정의』, 『법과 권리』, 『자유주의적 평등』, 『생명의 지배 영역』,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정의론』, 『신이 사라진 세상』 등이 있다.

 

옮긴이 이민열(이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 교수이자 변호사이며 시민교육센터 대표이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기본권 제한 심사에서 공익의 식별」, 「가치와 규범의 구별과 기본권 문제의 해결」, 「기본권 보호 의무의 구조와 보호권」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저서로 『철인왕은 없다』, 『중간착취자의 나라』, 『법학방법론』(공저), 『삶은 왜 의미 있는가』,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이것이 공부다』, 『너의 의무를 묻는다』, 『철학이 있는 콜버그의 호프집』, 『탈학교의 상상력』, 『학교를 넘어서』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법복 입은 정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사치 열병』, 『이반 일리히의 유언』, 『포스트민주주의』, 『계급론』, 『성장을 멈춰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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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현대사

1871년 독일제국 수립부터 현재까지

디트릭 올로 지음 | 문수현 옮김 | 852쪽 | 38,000원


두 번의 통일, 제국과 공화국 사이를 오간
근현대 독일에 관한 거의 모든 역사


이 책은 지금껏 국내에 소개된 다양한 독일 역사서와 비교할 때 가장 정통적인 서술 방식을 따라, 전통적인 의미의 이야기식 역사 대신 독일의 국내 정치, 외교관계, 사회경제적 상황, 문화를 네 축으로 삼아 각 시대의 독일사를 풀어내고 있다. 

독일 근현대사는 각각 두 번에 걸친 통일과 세계대전 등 세계를 뒤흔든 주요한 사건들과 비스마르크, 힌덴부르크, 히틀러, 토마스 만, 마를레네 디트리히, 아데나워, 호네커, 귄터 그라스, 메르켈 등 다채로운 빛을 발했던 인물들이 펼쳐 보이는 파노라마다.

국내외 정치, 경제, 문화에 근거한 서술 방식이 일견 진부한 느낌을 줄 수 있는데도, 오히려 지루함 대신 차곡차곡 잘 정리된 서가에서 지적 향연을 누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은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충분히 부각되고, 매우 복잡한 사회적 갈등 구도와 다양한 사회 세력들이 등장하는 독일 근현대사가 응집력 있는 역사 드라마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역사적인 디테일에 대한 지은이의 해박한 지식은 때로 유머와 위트를, 때로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읽는 재미를 더하게 한다. 




잘 정리된 서가를 연상시키는 근현대 독일 이야기

이 책은 독일의 국내 정치, 외교관계, 사회경제적 상황, 문화를 축으로 근현대 독일사를 정밀하게 풀어내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정치사 부문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독일제국과 바이마르 시기의 국내 정치에서 자유주의 세력과 보수주의 세력, 중앙당과 사회주의 세력 등 네 정치 세력 간의 복잡한 관계가 어떻게 변주되었는지, 기민련/기사련, 사민당, 자민당, 녹색당 등 다양한 정당들이 서독의 의회민주주의를 공고히 만들어가는 과정과 사통당이 동독 사회 전반을 장악해가는 동시에 사회 내부의 지지를 잃어가는 과정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처럼 복잡다단한 정당 정치 구조를 중심으로 하는 설명은 통상 지루함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책이 그런 위험에서 벗어나 한 편의 대하 역사 드라마를 보듯 몰입도를 높일 수 있던 이유는 비스마르크부터 앙겔라 메르켈에 이르기까지, 1871년 독일 통일 이후 재임한 거의 모든 총리들과 그들의 정책이 정교하면서도 입체적으로 서술되기 때문이다. 디트릭 올로는 그들의 개인적 면모뿐만 아니라 정책 결정 및 권력투쟁 과정에 대한 상세한 서술로 과거의 역사를 현실로 되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비스마르크, 빌헬름 황제, 히틀러, 힌덴부르크, 콘라트 아데나워, 헬무트 콜, 앙겔라 메르켈 등 우리에게도 낯익은 이름들은 이 책이 친숙하고 생생한 느낌을 주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실제로, 바이마르공화국 후기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상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장의 대립’을 연상하게 하고, 동서 냉전으로 인한 분단 경험과 통일에 이르는 과정 또한 아직도 분단 상태에 있는 우리 사회에 역사적 교훈 내지 반면교사로서의 깨달음을 안겨준다.

독일의 전 총리 게하르트 슈뢰더는 독일인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자랑스러워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1945년 이후 민주적 성취에 대해 자랑스러워해야만 한다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역사적으로 옳고 정치적으로도 빈틈없지만 독일 역사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인 셈이었다. 하지만 슈뢰더가 자랑스러워한 1945년 이후의 역사뿐 아니라 언급하기를 회피했던 1945년 이전의 역사도 심도 깊게 다루어질 때 독일의 근현대사는 온전히 파악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독일의 국내외 정치, 경제, 문화를 중심으로 1871년 이후의 독일 역사를 차곡차곡 서가를 정리하듯 정교하게 서술한 이 책이야말로 그간 국내에선 볼 수 없었던 독일 근현대사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지금 독일 역사인가?

2019년 대한민국에서는 가히 ‘광장의 정치’라고 불릴 만한 현상이 벌어졌다. 정치적 이해에 따라 갈린 대규모 군중이 세 대결을 벌이는, 의회민주주의 역사가 깊은 나라들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견 국론 분열의 모습으로까지 보이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실 이를 두고도 극명한 대립만큼이나 정리되지 않은 의견이 무수히 도출되었다. 가늠하기 쉽지 않은 문제가 아전인수격의 해석과 해법으로 대립하는 경우 좀 더 현명하게 문제를 풀어내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비교해볼 만한 사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보다 먼저 이런 경험을 한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특히 1차대전의 폐허 속에서 탄생한 바이마르공화국의 경험을 살피는 것은 극한 내부 대립을 딛고 일어나 ‘황금기’를 구가했던 사회에서 어떻게 나치가 발흥했으며, 2차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주역이 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우리가 지금 독일의 역사를 읽어볼 만한 이유이다.

1차대전의 패망과 더불어 해체된 독일제국을 대신해 탄생한 바이마르공화국은 권위주의 전통이 강했던 독일 사회에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다원주의를 이식하려고 했지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 기간이 10여 년에 불과했던 탓도 컸고, 구엘리트층을 포함한 많은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축소된 지위와 영향력, 전쟁에서의 패배, 강대국으로서의 지위 상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만성적인 경제적, 재정적 문제를 정치적 근대화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일부 지도자들의 진지한 노력과 경제적, 사회적 진보, 문화생활의 의심할 나위 없는 광휘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바이마르 시기가 신보수주의로 대표되는 권위주의 체제의 복원과 나치의 발흥에 빌미가 되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사실 나치즘은 반유대주의와 원민족적 통합에 대한 갈망 등 몇몇 오래된 독일 전통에 뿌리를 두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대공황이 이미 마모된 사회의 가치 합의 구조를 붕괴시켰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기 5년 전인 1928년 선거에서 나치당의 지지율은 단 2.6퍼센트에 불과했지만 대공황으로 대표되는 경기 불황을 거치며 독일의 주요 정치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히틀러와 그의 심복들이 권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수백만 독일인들에게 구제를 약속했기 때문이 아니다. 의회민주주의를 거부했던 하인리히 브뤼닝,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등의 신보수주의 총리들이 그릇되게도 자신들의 통제하에서 나치가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황제 시기의 영광을 회복시킬 것이며, 당연하게도 구 엘리트층에게는 익숙한 권력과 명망의 자리를 되돌려줄 수 있다고 오판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가 익히 아는 세계적 비극이 벌어졌다.

독자들은 독일 근현대사를 돌아봄으로써, 한국을 비롯한 오늘날 많은 민주주의 국가가 직면한 새로운 정치적 도전들에 대한 역사의 교훈과 심오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지리적 이름에 불과했던 독일을 비스마르크가 통일했다면, 히틀러는 반대로 독일의 통일을 파괴했다. 그러나 전쟁 후 서독은 안정적인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정립하고 재통일을 이루었으며, 오늘날 유럽연합을 이끌어가고 있다.   


다가오는 통일 시대, 한국인이 꼭 읽어야 할 책

2차대전 후 거의 40년간 독일의 두 절반은 남북한의 경우처럼 매우 다른 방식의 독자적인 사회였다. 하지만 1989년 말 소비에트 블록의 해체와 더불어 동독에서 벌어진 극적인 사건들은 사통당 일당독재 체제의 내적인 불안정성과 취약성을 갑작스레 드러냈다. 연로한 사통당 지도자들이 즉자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개혁을 약속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평화로운 혁명이 진행되면서 동독인들은 이들을 권좌에서 쓸어버렸다. 갑작스럽게 통일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몇 달을 보낸 뒤 미국의 지지를 얻어 독일은 다시금 통일된 국가가 되었다. 불가능해 보였던 동서독의 통일은 현실이 되었다.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우리에게 독일의 통일 과정과 그 후에 발생한 문제들은 역사적 교훈 내지 반면교사로서 생각할 거리를 준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회담으로 시작된 평화의 기운이 강해질수록 다시금 부각될 ‘퍼주기’ 논란을 서독 사회는 어떻게 해소했는지, 공산 독재 체제하의 인권 문제 등의 쟁점들을 동서독은 어떻게 넘어섰는지, 독일 통일에 우호적이지 않은 이웃 강대국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풀어갔는지, 통일된 독일 사회가 통일 비용, 과거 청산, 극우 정당, 이민자 통합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은 한국 사회의 미래를 그리는 데 매우 유용할 것이다.

▲ 통일로 가는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통일 이후에 맞닥뜨리게 될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      *      *


지은이 디트릭 올로 

미국 보스턴대학 역사학과 명예교수. 1937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미시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윌리엄앤드메리대학, 시라쿠스대학, 보스턴대학 등에서 재직했다. 1968년 출간된 《발칸반도의 나치들The Nazis in the Balkans》부터 2015년 출간된 《사회주의 개혁가들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붕괴Socialist Reformers and the Collapse of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에 이르기까지 10여 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을 출간했다.


옮긴이 문수현 

서울대학 서양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빌레펠트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 역사연구소, 경희대학 인문학연구원, 유니스트 기초과정부를 거쳐 현재 한양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Wie viel Geld für wie viel Leistung?: Weichenstellungen in der Frauenlohnfrage in Westdeutschland nach 1945》, 《서양 여성 근대를 달리다》(공저)가 있으며, 독일 근현대사, 한독 관계사 분야에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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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70여 년 동안 이어진 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왜 끝나지 않는가

김재명 지음 | 미지북스 | 548쪽 | 22,000원


국내 최고의 국제분쟁 전문가가 현장에서 분석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혈분쟁의 진실


1차 대전을 폭발시켰고, 1990년대 내내 내전으로 몸살을 앓았던 발칸반도가 ‘20세기의 화약고’였다면, 중동은 ‘21세기의 화약고’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중동 지역은 물론이고 지구촌의 평화를 흔들어대는 뇌관이나 다름없다. 지금도 그곳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강공책, 그에 맞선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를 비롯한 무장 대원과 일반 시민들의 죽음을 무릅쓴 격렬한 저항으로 폭력의 악순환이 그치지 않고 있다. 이 책『눈물의 땅, 팔레스타인』은 수십 년간 이어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현실을 소개하고, 중동의 역사와 정치를 개괄함으로써 뿌리 깊은 분쟁의 원인을 분석한다.

지은이 김재명 박사는 20년 가까이 세계 각지의 분쟁 현장을 취재한 독보적인 국제분쟁 전문가로, 2000년 이래 지금까지 10여 차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다녀왔다. 지은이는 특히 서방 언론인들도 취재하기 어려웠던 전설적인 팔레스타인 지도자들, 아라파트(PLO)나 야신(하마스)과도 여러 차례 인터뷰했다. 이번 개정 증보판에서는 100여 장의 생생한 현장 사진과 함께, 미국 트럼프 행정부 이후 달라진 중동 정세의 내용이 추가되었다.


눈물과 통곡의 땅, 팔레스타인

포연이 가시지 않은 처참하게 무너진 집과 사원, 이전의 자유조차 박탈해버린 8미터 높이의 분리 장벽, 집도 없이 난민촌을 떠도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앞에 호화롭게 지어진 유대인 정착촌, 이스라엘의 포격으로 부모를 잃고 아이를 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눈물, 가족의 생계를 위한 희망이 잿더미로 변한 올리브 밭 앞에서 무릎 꿇은 농부, 2등 시민으로 온갖 불평등을 감수하며 희망 없이 살아가는 아랍계 청년들…….

이것이 10여 차례 팔레스타인 현장을 찾은 지은이의 눈에 비친 이른바 ‘테러’와 그에 대한 ‘보복’의 현장, 팔레스타인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테러’라고 몰아붙여왔다. 왜 그들은 테러를 일으키는가? 7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일어나는 피의 분쟁은 왜 끝나지 않는가? 지은이는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분석하기 위한 이런 물음에 앞서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잔인한 파괴의 폐허에 흐르는 눈물과 통곡, 이곳 팔레스타인의 대지라고 말한다.

 

분쟁의 뿌리, 시오니즘

2000년 전 로마제국에 의해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유대인들이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이 신생국가는 19세기 말 유대인 민족주의 운동(시오니즘)의 결실이었다. 시온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고대 예루살렘의 한 언덕 이름이다. 시오니즘이란 그 옛날 예루살렘에 있던 그 언덕을 상징적인 목표지로 삼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것이다. 시오니즘 운동의 창시자인 테오도어 헤르츨은 19세기 오스트리아 언론인으로, 그는 유대인 랍비처럼 종교적으로 엄격하기는커녕 매우 세속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헤르츨은 1894년 드레퓌스 사건(유대인 프랑스 장교를 증거도 없이 독일 스파이로 몰아세운 사건)으로 반유대 정서가 퍼지는 것을 보고 유대인 독립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헤르츨이 시작한 국가 건설 운동은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1차 시오니스트 대회로 이어졌고, 거기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한다는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 유럽에서 배를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유대인 이주자들 


팔레스타인은 무인지대가 아니었다

시오니스트들이 가고자 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은 무인지대가 아니었다.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팔레스타인에는 70~80만 명의 아랍인들과 5~6만 명의 토착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만약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해온다면 땅을 두고 필연적으로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1차 대전 당시 영국은 시오니즘 운동을 재정적으로 돕던 금융계 거물인 로스차일드에게 전비 지원을 대가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했다. 이것이 영국 외무부 장관 아서 제임스 벨푸어의 이름을 딴 벨푸어 선언(1917년)이다. 그러나 영국은 또 한편으로 오스만제국과 싸우기 위해 아랍인들의 지원을 필요로 했고, 그들에게도 독립국가를 약속했다. 이것이 영국 고위 관리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칼리프 간에 맺어진 맥마흔-후세인 협정(1915년)이다. 이 두 약속은 서로 충돌했다. 결과적으로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다른 아랍 국가들은 독립했지만, 유대인 국가가 들어선 곳의 아랍인들만은 집과 땅을 잃고 강제로 내쫓겼다.

 

하나의 땅, 두 개의 국가

유대인 이주의 물결이 지속되면서, 1940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수는 45만 명에 이르렀다. 아랍인들은 유대인에 편향적인 영국의 정책에 대항해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 무렵 유대인들은 아랍 원주민들과 총격전을 벌이곤 했는데,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에 나서자 영국은 이를 지원해줬다. 이때 형성된 유대인 민병대 조직들이 ‘하가나’와 ‘이르군’이다. 1944년 무렵 하가나 대원은 거의 10만 명에 이르렀고, 몇 년 뒤 벌어진 이스라엘 독립 전쟁에서 주력군이 된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쫓아내려고 빈집에다 수류탄을 던져넣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영국군을 상대로 테러를 감행하기도 했다. 하나의 땅을 놓고 폭력이 오가는 혼란한 상황에서, 유엔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6 대 4의 비율로 분할해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를 각각 세우기로 결정했다(1947년 유엔 총회 결의안 181호). 예루살렘은 어느 쪽에도 완전히 편입되지 않는 개방된 도시로 남겨두고 신탁통치하기로 했다.

▲ 유대인 무장조직 하가나 대원들 


이스라엘 건국과 4차례의 중동전쟁

그러나 이스라엘 무장 조직인 하가나와 이르군은 그 무렵 팔레스타인 땅의 4분의 3을 이미 점령한 상태였다. 그리고 1948년 5월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무려 87만 명의 아랍인들이 그 땅에서 쫓겨났다. 이에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1차 중동전쟁이 벌어졌지만, 이스라엘이 승리하여 유엔에서 결정되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된다. 뒤이은 3번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더 많은 점령지를 갖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로 국한된 왜소화된 영토에서 반자치 상태로 남겨졌다. 그리하여 오늘날 식민 통치나 다를 바 없는 이스라엘의 압제하에서 양측이 폭력을 상호 교환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20세기 전반기만 해도 세계 지도에 없었던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중동에 생겨남으로써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고, 지금껏 눈물 속에서 지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 팔레스타인(짙은색)과 이스라엘(흰색)의 영토변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 인티파다

이스라엘의 압제 아래 슬픔과 좌절의 세월을 보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해묵은 분노가 터져나온 것이 두 번에 걸친 ‘인티파다’다. 인티파다는 번역하면 봉기 또는 저항이라는 뜻이다. 1987년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지프차에 치여 팔레스타인인 4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1차 항쟁은 6년 넘게 이어졌고, 그 결과 1,0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고, 90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고, 미국과 유럽의 적극적인 중재하에 제한적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세우는 것을 뼈대로 하는 오슬로 평화협정(1993년)이 맺어지면서 유혈 사태는 일시적으로 진정되었다.

그러나 2000년에 이스라엘 극우파 정치인 아리엘 샤론이 이슬람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사원에 난입하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이스라엘 군대가 유혈 진압하면서 2차 인티파다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7년 동안 팔레스타인인 5,000여 명이 사망했고, 이스라엘인도 1,000여 명 사망했다. 2차 인티파다에서 사상자가 더 많이 발생한 것은 팔레스타인 측이 본격적으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2000~2018년의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 희생자는 1만 명이 넘고 이스라엘 희생자는 1,000명을 약간 웃돈다. 사망자 비율로 따지면 유대인 1명당 아랍인 10명꼴이다. 이러한 극심한 비대칭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단순히 분쟁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반인간적인 전쟁범죄와 학살을 하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이 끊이지 않는다.

 

가자 침공과 이스라엘의 전쟁범죄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번갈아가며 일시적 점령, 퇴각을 되풀이하고 있다. 오슬로 협정 이후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온건화되면서, 팔레스타인 정치에서 가자지구를 근거지로 하는 이슬람주의 세력인 하마스가 부상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벌이는 테러를 빌미로 2009년, 2012년, 2014년 3번에 걸쳐 가자지구를 침공했다. 2009년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침공 당시 11세 팔레스타인 소년을 인간 방패로 활용했고, 여성과 어린이가 있는 집을 불도저로 밀어버렸으며, 민간인을 몰아넣은 주택에 포격을 가했다. 이스라엘군은 탁 트인 시계를 확보한답시고 그곳 농민들의 생업인 올리브 밭을 불도저로 갈아엎고, 이집트로 통하는 무기 밀수 지하 터널을 찾는다는 구실로 수많은 민가에 폭격을 가했다.

지은이가 방문한 가자지구의 한 가정에서는 집 옥상에서 빨래를 널던 15세 소녀 아스마, 바로 곁에서 비둘기 모이를 주던 11세 동생 아흐메드가 대낮에 이스라엘 저격수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 저격수는 무슨 까닭에 이들 자매를 죽였을까? 팔레스타인 어린이 3명 중 1명은 나중에 자라서 순교자가 되겠다고 말한다. 저항이 과격해지는 것은 그들의 좌절과 분노가 그만큼 깊어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시위 현장의 소년  

거대한 분리 장벽

2002년부터 이스라엘은 총 길이 710킬로미터의 분리 장벽 건설을 밀어붙였다. 2014년 말까지 500킬로미터쯤 완성된 상태이다. 장벽을 세우는 명목상의 이유는 ‘보안’이지만, 실제로는 1967년 6일전쟁(3차 중동전쟁) 이후 불법 점령해온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촌을 이스라엘 영토에 합치고, 언젠가 세워질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영토를 더욱 비좁게 만들겠다는 목적이다. 분리 장벽은 6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19년 동안 국경선으로 삼았던 그린 라인보다 더 팔레스타인 영토까지 나아가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갇힌 팔레스타인 주민 24만 명은 오도 가도 못한 신세가 된다.

방벽 안에 갇혀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인간이라면 최소한 누려야 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고, 가족이나 친지를 방문할 자유 또한 없다. 일자리나 생필품을 구할 수도 없고, 수로가 막혀 농사도 지을 수 없으며, 먹을 물조차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실정이다. 설상가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대인 정착민이나 이스라엘 군인들로부터 날마다 크고 작은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이렇게 장벽 안에 사는 갇힌 팔레스타인들은 과거 나치 히틀러 시절의 유대인들처럼 거주 제한을 받는 21세기 게토에서 지내고 있다. 이스라엘의 목적은 팔레스타인을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로 분리하고 다시 장벽 건설로 도시와 마을을 고립시키려는 것이다.

▲ 8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분리장벽

분리 장벽에 더해 이스라엘이 펼치는 가혹한 경제봉쇄 정책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극심한 가난에 고통받고 있다. 이스라엘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3만 5,000달러 정도이나 팔레스타인의 1인당 소득은 겨우 3,000달러에 불과하다. 팔레스타인 사람 2명 중 1명이 절대 빈곤 상태이다.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은 팔레스타인 경제를 마비시켜 항복을 받아내려는 경제 전쟁이다. 이스라엘이 국제사회의 비난 때문에 군사적으로 팔레스타인을 파괴하지는 못하더라도 경제적으로 말려죽이는 것은 가능하다는 셈법이다. 19세기 미국의 백인들이 인디언들에게 자행했던 잔혹한 강제 이주와 학살, 20세기 남아공 백인 정권의 악명 높았던 흑백 인종차별(아파르트헤이트)은 이제 아득한 전설이 되었지만, 중동 땅에서는 21세기 이스라엘판 인종 청소와 차별이 벌어지는 중이다.

 

식민화의 첨병, 유대인 정착촌

60만 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영토 내 정착촌에 살고 있다. 정착촌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하려는 우파들의 정치적 기획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건설사와 입주자들에 대한 금융 지원으로 점령지의 정착촌 건설과 이주를 독려했다. 정착촌이 세워진 곳은 국제법상 팔레스타인 영토이기 때문에, 정착촌 아파트들은 마치 전쟁터의 요새와 같은 모습으로 건설된다.

또 정착촌 주변에서는 자동소총을 멘 가장이 가족과 함께 산책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유대인 정착민들은 합법적으로 총을 지니고 다닌다. 팔레스타인 테러분자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킨다는 명분에서다. 6일전쟁 뒤 정착촌이 세워지면서 현지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마찰이 잦아지자 1973년 이스라엘 국방부는 정착민들의 무장을 허용했다. 1981년에는 유대인 정착민들에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검문하고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다(이스라엘 군사명령 898호). 2000년 인티파다가 일어나자 유대인 정착민들의 권한은 더욱 커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쏠 수 있게 했다!

▲ 베들레헴에서 바라본 유대인 정착촌(사진 왼쪽 위). 이스라엘의 제한 급수 탓에 팔레스타인 마을엔 집집마다 저수 탱크들이 있지만, 물이 넉넉한 유대인 정착촌엔 그런 탱크가 필요 없다. 

▲ 바깥 나들이에 나선 유대인 정착민 가족. 이들은 합법적으로 총을 들고 다닌다. 

이스라엘 강경파 정치인들의 중동 지배 전략은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하는 현상 유지로 요약된다. 팔레스타인을 군사적으로 강제 점령한 기존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능한 한 시일을 끌며 팔레스타인 지역에 더 많은 유대인 정착촌을 세워 이스라엘 영토를 넓혀간다는 것이다. 지금도 유대인 정착민들은 주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일상적으로 괴롭히고 위협하는 방식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원주민들이 떠나도록 종용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누구의 땅인가?

2018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간 국제사회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지 않아왔다. 1947년 유엔 총회 결의안 181호를 통해 예루살렘을 유엔 신탁통치 아래 두는 국제도시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라들도 예루살렘이 아닌 텔아비브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강경파 정치인들은 “예루살렘은 결코 분할되거나 공유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라고 주장한다(반면 팔레스타인은 동예루살렘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도라고 주장한다).

예루살렘의 인구는 90만 명이다. 서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동예루살렘은 아랍인 6, 유대인 4의 비율로 살고 있다. 문제는 이스라엘 정부가 동예루살렘의 아랍인 비율을 줄이기 위해 아랍인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여러 정책, 이를테면 강제 철거, 주택 신축 금지 등을 시행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해를 거듭할수록 아랍인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 동예루살렘 주변을 둘러싸고 세워지는 대규모 유대인 정착촌은 사실상 팔레스타인 영토 안에 파고든 이스라엘의 식민지나 다름없다. 서안지구의 지도를 보면, 유대인 정착촌이 무수한 점처럼 곳곳에 터를 잡은 모습이다. 예루살렘 전체를 이스라엘 영토로 삼겠다는 것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대사관 이전 결정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정식 수도로 인정하고, 나아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군사적으로 점령 지배하는 지금의 상황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두 개의 국가 해법 카드를 내팽개쳤다는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두 개의 독립국가를 중동 땅에 세우는 대신 한 개의 국가 해법, 다시 말해 이스라엘만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 예루살렘의 이슬람 사원과 그에 잇닿은 유대교 성지인 '통곡의 벽'은 오랜 갈등과 폭력의 역사를 지녔다. 

이스라엘의 군사적 우위와 이란의 핵무기

4차례에 걸친 전쟁 이후 중동의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군사적 균형추는 점점 이스라엘 쪽으로 넘어갔다. 이스라엘은 현재 중동에서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독립국가 건설을 막고 이를 고사시키는 전략을 갖고 있다. 군사적 불균형이 초래된 이유는, 우선 1979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 아래 이집트와 맺은 평화협정으로 이스라엘 남서부 전선의 방어 부담이 줄었기 때문이다. 1994년 요르단 후세인 국왕과 맺은 평화협정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특히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이미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인 바 있는 아랍 최대의 국가이므로 이집트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큰 이익이다. 평화협정을 대가로 이집트와 요르단은 해마다 엄청난 경제·군사 원조를 미국으로부터 받았다.

이와 더불어 1980년대에 8년 동안 치러졌던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아랍권이 분열된 것도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뒤이어 1990년대 걸프전으로 이라크 군사력이 약해지고, 아랍권에 군사원조를 하던 소련이 붕괴하자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사이의 군사적 균형은 깨졌다.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몰락하자 40만 이라크군이 해체되었고, 그 후 이스라엘의 군사적 우위는 공고해졌다.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이제 양적인 측면에서 주변 국가들과 균형을 이루고 질적으로는 우세를 지키고 있다. 이제 이스라엘이 신경 써야 하는 국가는 핵을 개발하고 있는 이란뿐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란 핵 시설을 불시에 공격한다면 전쟁의 불길이 중동 전체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끝까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곳

지난 2000년 이후 10여 차례 중동 취재를 다녀온 지은이는 지금이야말로, ‘우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절규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라고 말한다. 그는 중동에서 총소리가 들릴 때 단순히 일부 극단적인 테리리스트들의 일이라고 치부해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는 국제 유가를 걱정해서도, 미국의 요구에 따라 평화유지군이란 명목의 군대를 파병해야 하는 국제 외교의 복잡한 문제들이 뒤엉켜 있어서도 아니다. 오히려 팔레스타인 문제가 우리에게 평화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      *      *

 

지은이 김재명 

지구촌 분쟁 현장을 두루 취재 보도해온 국제분쟁 전문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경향신문>과 <중앙일보>에서 기자로 일했다. 미국 뉴욕시립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과정을 마친 후 국민대학교에서 <정의의 전쟁 이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 20여 년 동안 국제분쟁 전문가로 지구촌의 여러 분쟁 지역을 찾아다녔다.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반도(보스니아, 코소보), 중동 지역(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카슈미르, 동티모르, 캄보디아, 베트남,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쿠바, 볼리비아, 페루 등지의 유혈 분쟁을 취재 보도해왔다. 특히 지난 2000년부터 거듭된 중동 현지 취재를 통해 유혈 분쟁으로 몸과 마음을 다친 어린이와 여성, 집과 농토를 잃은 난민, 중동 평화의 암초로 꼽히는 유대인 정착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정치 군사 지도자와 지식인 등 분쟁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생각을 글로 담아내는 데 집중해왔다. 현재 <프레시안>의 기획위원, 성공회대학 겸임 교수이다. 지은 책으로 『오늘의 세계 분쟁』(2015년, 개정판), 『시리아 전쟁』(2018년),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2016년), 『석유, 욕망의 샘』(2007년), 『20세기 전쟁영화가 남긴 메시지』(2006년), 『한국 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2003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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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설계자

생체공학이 열어젖힌 매혹적인 비밀의 문

애덤 피오리 지음 | 유강은 옮김 | 미지북스 | 444쪽 | 18,000원


로봇 다리를 단 과학자, 귀로 보는 여자,

다시 자라는 팔다리, 한계를 모르는 기억력

 

연구실과 병원에서 벌어지는 조용한 혁명

한계를 넘어서는 생체공학의 도전 


오늘날 인간 잠재력과 회복력의 승리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이고 흥미로운 사례들이 의학과 과학에서 쏟아져나오고 있다. 애덤 피오리는 ‘생체공학’이라고 불리는 분야를 다룬 이 책에서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절망적인 장애를 딛고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준 사람들을 소개한다. 로봇 다리를 단 과학자, 눈을 잃었지만 귀로 보는 여자, 허벅지가 다시 자라는 퇴역 군인, 가족과 다시 대화할 수 있게 된 루게릭병 환자……. 마치 SF영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신체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기술은 더 이상 먼 미래의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고장 난 신체와 정신을 고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을 증강하려는 유혹에 빠지지는 않을까? 우리는 생체공학 기술이 가져올지도 모를 디스토피아를 막연히 두려워해야만 할까? 애덤 피오리는 첨단 기술이 우리의 인간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는 낙관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애덤 피오리의 유튜브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어 자막 지원).


이제 새로운 프런티어는 인간 신체다

지난 세기에 인류는 대규모 공학의 전환점에 도달했다. 발명 재능이 폭발적으로 발휘되면서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기술적 쾌거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건설, 비행기 발명, 달 착륙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오늘날 공학자들은 신체 내부를 탐구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프런티어는 인간 신체다. 부상당한 사람의 잃어버린 신체 기능을 복원하고, 우리 모두의 잠재력을 해방시키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4차 산업혁명의 또다른 종착지는 인체의 개량과 증강이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애덤 피오리가 오늘날 생체공학의 첨단 분야들을 취재하여 쓴 <신체 설계자>는 우리에게 곧 다가올 미래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 ‘동작’ 파트는 인간의 팔다리를 대체할 로봇공학, 신체 증강과 재생의학을 다룬다. 전도유망했던 등반가가 두 다리를 잃고 스스로 과학자가 되어 로봇 다리를 개발해 걷고 달린다. 포탄에 오른쪽 허벅지 근육의 90%를 잃은 이라크 참전 군인이 재생의학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선다. 잘린 손가락이 도마뱀 꼬리처럼 다시 자라난 베트남 참전 용사의 스토리도 소개한다.

2부 ‘감각’ 파트는 사고나 질병으로 감각기관을 잃은 사람들이 다시 듣고 보게 되는 사례를 다룬다. 폭발 사고로 눈을 잃은 여성이 이미지를 음파로 변환하는 장치를 통해 시각을 되찾는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신체에 감금된 상태가 된 루게릭병 환자가 뇌와 연결된 컴퓨터로 말을 한다. 또한 금지된 뇌의학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자신의 뇌에 전극을 삽입한 의사의 이야기도 만나게 될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해답을 찾는 인간 뇌의 경이로운 회복력에 관한 수많은 사례들이 소개되는데, 감각 활동은 필연적으로 ‘뇌의 가소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3부 ‘사고’ 파트는 인간의 뇌가 가진 잠재력을 더욱 끌어올리고자 하는 연구들을 다룬다. 뉴런의 활동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을 직접 지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울증 환자가 생체공학을 통해 다시 삶을 되찾고, 파킨슨병이 정복된다. 기억을 통제하는 메커니즘을 파헤쳐 기억력을 극대화하는 약을 개발한다. 어쩌면 우리 속의 창의력을 폭발적으로 해방하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바이오닉 팔다리

1982년 전도유망한 등반가 휴 허는 뉴햄프셔주 워싱턴산의 빙벽을 등반하다가 조난당했다. 그는 극적으로 구조되었으나 동상으로 두 다리의 무릎 아래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 후 그가 착용한 의족은 19세기 남북전쟁 당시 부상병들이 하던 나무 의족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허는 불편함을 참다못해 스스로 의족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 다리 모양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식으로 의족을 만들어 암벽등반을 하기도 했다. 계속해서 의족을 개량시키려고 시도하다보니, MIT에서 로봇공학까지 배우게 된다. 공학박사가 된 허는 동물과 인간의 동작을 연구하면서, 발목이 다리의 제1 모터라는 것을 밝혀냈다. 발목이 반발력을 만들어내면서 인간의 걸음걸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는 현재 알루미늄, 실리콘, 카본으로 이루어진 다리를 착용하며 걷고 뛴다. 자신이 만든 로봇 다리로 말이다. 그의 다리에는 각종 모터와 모션 캡쳐 시스템, 유도 미사일에 들어가는 관성 측정 기술, 마이크로프로세서 등 첨단 기술이 집약되어 있다.

  

휴 허의 테드 강연 영상 (한국어 자막 지원) 

 

아이언맨 슈트

로봇공학은 아이언맨 슈트와 같은 외골격 시스템 개발로 나아가고 있다. 일본의 공학자 고바야시 히로시는 노인을 돌보는 사람들이 허리에 부담을 받지 않고 노인을 일으켜 세우도록 도와주는 상반신용 근력 증강 기구를 개발했다. 이 머슬 슈트를 착용하면 40킬로그램의 쌀 포대도 종이 한 장처럼 가볍게 들어올릴 수 있다. 인체의 힘을 증강하는 외골격 기구들은 현재 경량화와 효율화의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인간의 근육보다 큰 힘을 출력하는 바이오닉 팔을 만드는 것은 쉽지만, 인간의 팔만큼 작고 가볍게 만드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불도저 같은 힘을 가진 팔을 쓰려면 불도저 모터 크기의 동력원이 필요하다. 인간의 팔은 제 질량의 20배에 달하는 힘을 발생시킬 수 있지만, 기계 팔이 그만한 동력을 끌어오려면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하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는 머지않은 미래에 친구를 만나러 자동차를 타는 것이 아니라 외골격 슈트를 입고 달려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잘린 팔다리를 재생시키다

2004년 이라크에서 돌아온 에르난데스 병장은 포격 부상자였다. 그는 오른쪽 허벅지 근육의 90퍼센트가 찢어졌고 다리 근력의 절반을 잃었다.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고 재생의학의 도움을 받았다. 허벅지를 절개하고 돼지 방광 조직을 삽입한 것이다. 고통스러운 재활 과정을 거친 후 그의 근력은 수술 전 수준의 100퍼센트 이상으로 회복했다. 이제는 자전거를 탈 수도 있고 계단을 오를 수도 있다.

이 수술 기법은 1980년대에 스티븐 배딜락이 창안했다. 배딜락은 개의 대동맥을 다른 신체 조직으로 대체하는 실험을 했다. 처음에는 동일한 개의 소장 조직을 떼어 대동맥에 붙였다. 개는 하루를 못 버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6개월이 지나도록 살아남았다. 6개월 후 개를 다시 절개했을 때 소장 조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곳에 대동맥이 자라나 있었다. 배딜락은 다른 개, 고양이, 돼지 등의 소장으로도 실험했는데, 그때마다 개는 성공적으로 생존했다.

이러한 조직 재생의 비밀에는 줄기세포의 존재가 있다. 줄기세포는 어떤 조직으로도 자랄 수 있는 미분화된 단세포이다. 2005년 컬럼비아대학의 분야크-노바코비치는 줄기세포로 심장 조직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예일대학의 로라 니클러슨은 인공 폐를 배양하려고 하고 있다. 이제 과학자들은 단순히 뼈와 근육을 재생하는 것을 넘어서 복잡한 구조를 모두 갖춘 장기 전체를 공학적으로 만드는 것에 도전하고 있다. 인체의 장기를 외부에서 배양해서 환자에게 이식하는 원대한 계획이다. 터프츠대학의 데이비드 캐플런은 바이오돔을 연구한다. 절단된 팔 부위에 끼우면 팔이 완전히 재생되는 장치이다. 그는 이미 개구리의 잘린 다리에서 뼈와 기타 조직이 다시 자라게 했다. 지금은 쥐와 같은 온혈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하고 있다.

 

눈이 아니라 뇌로 본다

팻 플래처는 화학 공장 폭발로 눈을 잃은 여성이다. 25년이 지난 후 그녀는 우연히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음성 변환 장치로 인터넷을 했다), 네덜란드 엔지니어가 만든 시각 장애인용 프로그램을 다운받았다. 그것은 이미지를 음성 신호로 바꾸어서 시각 장애인이 볼 수 있게 해준다는 프로그램이었다. 플래처는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놀랍게도 프로그램이 내는 소리를 통해 보는 경험을 했다. 그녀는 이 프로그램과 카메라를 연결해 이제 세상을 볼 수 있다. 각 음의 고저가 화소의 밝기를 나타내고 음들이 연합해서 풍경을 교향곡처럼 연주하면, 그녀의 시각 담당 영역이 활성화되어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신경과학자 폴 바크-이-리타가 한 유명한 말의 증거다. “우리는 눈이 아니라 뇌로 본다. 우리가 망막을 잃어도 뇌가 손상되지 않는 한, 보는 능력을 잃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감각기관을 잃더라도 망가진 기관을 반드시 고치거나 대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시각이나 청각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감각 정보를 일관된 신호로 변환하여 뇌에 전달해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뇌가 온전한 이상 우리는 귀가 없어도 들을 수 있고, 눈이 없어도 볼 수 있다. 인간의 뇌는 놀라운 가소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뇌의 가소성을 이용하다

캘리포니아대학의 마이클 머제닉과 로빈 미켈슨은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인공달팽이관을 만들었다. 인공달팽이관은 전통적인 보청기처럼 소리를 증폭시키지 않고, 청각 신경에 직접 자극을 가했다. 그러나 그 장치는 인간의 귀를 조잡하게 모사하는 수준이었고 팔뚝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엉망으로 뒤섞여서 하나도 알아들 수 없다며, 인공달팽이관을 ‘형편없는 쓰레기’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엄청난 돈과 노력이 들었기 때문에 장치를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몇 달 후 기적이 일어났다. 환자들이 소리가 전부 다 들리기 시작했다며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장치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환자들의 뇌였다. 환자들의 뇌가 가소성을 발휘하며 인공달팽이관에 적응했고, 이 장치가 전달하는 조잡한 소리에서 진정한 소리를 해석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성인이 되면 “뇌의 가소성이 사라진다”(어린 시절에는 뉴런들이 자유롭게 연결되고 끊어지지만 어른이 되면 뉴런들의 연결이 굳어진다)는 통념을 깨는 사례이다. 만약 신경세포의 가소성이 발휘된다면 뇌졸중 환자나 척추가 끊어진 환자도 치료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하버드대학의 타카오 헨쉬와 이탈리아의 생물학자 람베르토 마페이는 뇌의 가소성을 막는 뉴런 연결 억제 인자(브레이크)를 발견했다. CSPG라고 알려진 단백질은 뉴런의 연결망을 코팅해서 새로운 연결이 형성되는 것을 막는다. 마페이는 쥐 실험에서 이러한 억제 인자를 파괴하는 물질을 시각피질에 주입하여 쥐의 손상된 시력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조만간 과학자들은 인위적으로 뉴런의 연결을 가속화하는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생각 헬멧

데이비드 제인은 장신의 운동선수였으나 20대 중반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뇌에서 사지로 신호를 전달하는 운동 뉴런들이 죽으면서 전신이 마비되는 병이다. 루게릭병 환자들은 의식과 지각은 온전하지만 몸을 움직이거나 말을 할 수 없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를 ‘감금’이라고 말한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고 산 채로 땅에 묻히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다.

조지아공대의 신경학자 필 케네디는 이 감금된 환자들의 뇌에 외부 장치와 연결된 전극을 삽입해서 그들을 세상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한다. 케네디는 환자들의 두개골을 열고 운동피질에 전극을 삽입하여 생각만으로 컴퓨터 화면의 커서를 움직이거나 컴퓨터의 인공 목소리로 발성할 수 있게 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뇌로 보듯, 뇌의 운동영역이 살아 있다면 운동신경이 죽어도 뇌의 신호를 받아 외부 장치를 통해 운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경학자인 거윈 샤크는 누워서만 지내는 10대 뇌전증 환자들에게 생각만으로 비디오게임 <둠>을 하는 법이나 이메일을 보내는 법을 가르친다. 2012년 피츠버그대학의 연구자들은 환자의 뇌와 바로 연결된 로봇 팔을 이용해 환자가 생각만으로 초코바를 집어 한 입 베어물게 했다. 샤크는 환자들이 특정 음악을 들으면서 반응하는 뇌의 신호를 포착해 그 음악이 무엇인지 알 정도로 다시 음파로 재현해냈다. 우리가 말을 하기 위해서는 청각 부위가 먼저 활성화된다. 그 말이 어떻게 들릴지 뇌가 미리 예상하는 것이다. 뇌의 신호를 포착할 수 있다면 그것을 말로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연구가 성과를 거둔다면 감금된 환자들은 생각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필 케네디는 환자들에게 전극을 삽입하는 것이 금지되자 2014년 자신의 뇌에 전극을 삽입하고 실험하기에 이른다. 몇 주만에 감염이 발생하여 전극을 제거해야 했지만 그의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뇌에 전극을 삽입하는 방식을 ‘침투형’이라고 하는데 거윈 샤크와 군사과학자 엘머 슈마이서 대령은 뇌에 전극을 삽입하지 않고도 생각을 파악하고 이를 외부 장치와 연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완전한 비침투형 생각 헬멧’이라는 궁극의 아이디어다. 현재 이 텔레파시 장비는 일차적으로 전장에서 빠른 통신을 위한 군사적 용도로 연구되고 있다.

 

인간 정신의 증강: 무제한의 기억력과 창의력

노벨상 수상자인 신경생물학자 에릭 캔델은 해양 생물인 군소 연구를 통해 장기 기억을 형성하는 특정 단백질인 CREB를 발견했다. CREB가 활성화될수록 기억력이 증강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하기보다 생존에 중요한 것(정서적으로 강력한 의미를 지닌 것)을 더 오래 기억하도록 진화해왔다. 그러나 CREB를 의도적으로 활성화하는 약이 개발된다면 무제한의 기억 능력도 현실이 될 수 있다.

현대 과학이 뇌의 구조를 점점 파악하게 되면서 뉴런들의 교향곡을 직접 지휘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고 있다. 그렇게 되면 우울증, 파킨슨병, 강박장애 등을 치료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뇌의 창의성과 혁신, 상상력의 증강도 가능해진다. 외상으로 인한 후천적 서번트 증후군에 대한 연구는 그러한 가능성에 주목한다. 서번트 증후군이란 정신장애를 갖고 있지만 특정 분야에서 천재성을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39세의 비즈니스맨이었던 데릭 아마토는 뇌진탕 사고 이후 청력 손실과 기억상실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음악적 재능이 폭발했다. 측두엽의 뇌출혈로 언어 능력의 장애를 겪은 40대 회계사는 갑자기 안 그리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언어 능력이 회복되자 미술 능력도 사라졌다.

과학자들은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 능력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시드니대학의 신경과학자 앨런 스나이더는 우리가 세상을 파악할 때 사용하는 사고틀이 예술적 창조 능력을 제한한다고 본다. 평소 뇌의 특정 영역이 잠재적 예술 능력을 억제하는데, 후천적 서번트 증후군 환자들의 경우에는, 억제 역할을 하는 뇌의 영역이 병이나 사고에 유린되면서 서번트 기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영역은 측두엽과 전두엽의 일부로 논리, 언어, 이해, 사회적 판단을 수행하는 뇌 부위이다. 이 부위의 역할은 생존에서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는 뇌 속의 유연한 정보 흐름을 차단하고 효율을 추구하기 때문에 창조성을 제약한다. 만약 우리가 뇌 구조를 더욱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의 창조성을 해방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기술은 인간성을 향상시킬 것이다

바야흐로 생명공학 혁명 덕분에 놀라운 일이 가능해졌지만, 어떤 면에서 이 신기술들은 아직 원시적이다. 과학소설 같은 진보를 이루긴 했어도 여러 면에서 우리는 아직 초창기에 머물러 있다. 마치 포드자동차의 첫 번째 T모델이 조립라인에서 처음 나오거나 플로피디스크가 처음 출시되었을 때와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제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연구실과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이 조용한 혁명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기술은 신체와 정신 면에서 완전히 초월적인 인간을 탄생시키고, 세상은 근원적인 불평등으로 한발 더 나아가게 될까? 증강의 욕망이 집단적인 칩 이식을 부추기고 대규모 해킹이라는 재난으로 가게 될까?

이 책은 기술을 지나치게 두려운 눈길로 바라보지 말자고 조언한다. 우리는 기술을 통해 우리가 인간임을 표현하고 삶을 끌어안을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오늘날 기술 발전의 이면에는 움직이고, 느끼고, 생각하는 일을 회복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포

기하지 않는 의지가 살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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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애덤 피오리 Adam Piore

뉴욕에서 활동하는 프리랜서 언론인. 『뉴스위크』,『보스턴글로브』, 『리더스다이제스트』에서 오랫동안 편집자 및 특파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디스커버』와 『포퓰러사이언스』 객원 편집자로 일하면서 과학 전문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맹활약 중이다. 9/11 사태 당시 그라운드제로 현장 보도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이라크, 쿠웨이트, 독일, 터키 등에서 보도한 기사로 여러 차례 ‘내셔널매거진어워드’를 수상했다. 『GQ』, 『노틸러스』, 『마더존스』, 『사이언티픽아메리칸』, 『콘데나스트트래블러』 등 유수의 잡지에 특집 기사를 기고했다. 1994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이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옮긴이 유강은

국제 문제 전문 번역가. 옮긴 책으로 『빚의 만리장성』, 『도덕의 기원』, 『신이 된 시장』, 『자기 땅의 이방인들』, 『기지 국가』, 『서양의 부활』, 『데드핸드』, 『의혹을 팝니다』 등이 있으며, 『미국의 반지성주의』 번역으로 58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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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revodixpump.tistory.com BlogIcon Revodix marketing 2020.06.02 14:36 신고

    공감가는 글 잘 보았습니다^^
    연구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도움이 되고싶네요
    구독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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