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저자 강연③ 

- 2009년 교원 시국선언, 샌델식 논리의 결론은?


아래 내용은 지난 2012년 11월 21일 저녁에 진행된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의 저자 이 한 선생님 강연을 녹취, 정리한 것입니다. 세 편으로 나누고 질의응답까지 더해 미지북스 블로그에 게재할 예정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2009년 교원 시국선언 사건을 통해 살펴보는 샌델식 논리의 결론을 소개합니다. 


1. "네 몸은 네 것이 아니다!" - 신장 매매 문제

2. "노동자의 본성은 … ?" - 비정규직 문제

3. 2009년 교원 시국선언, 샌델식 논리의 결론은?

4. 질의 응답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저자 강연 정리


2009년 교원 시국선언, 샌델식 논리의 결론은?



교원 시국선언 사건, 2012년 대법원 판결

 

세 번째 사례는 교원의 시국선언에 관한 것입니다. 2012년 4월 19일 대법원 선고가 있었습니다. 먼저 판결의 내용부터 간략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현 정부 들어서 검찰의 무리한 수사로 전 대통령이 자살하는 등 무리한 국정운영에 대해 각계의 비판 성명이 있었습니다. 변호사, 영화계, 문화인들의 성명에 이어 교원들의 시국선언도 나왔습니다. 그 내용인즉슨, 현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비롯해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일제고사 등 교육정책에도 무리가 많음을 비판하면서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변호사들의 성명에 대해서는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교원, 공립학교 교사들의 시국선언에 대해서 검사들이 기소를 했습니다. 유무죄를 다투며 결국 대법원까지 갔고, 대법원은 교원들이 유죄라고 판결을 했습니다. 공무원법 66조 1항, “공무원의 집단행동을 금한다.”는 조항을 근거로 들었죠.

 


 시국선언 준비 당시 교과부의 자체 검토 의견. 교과부의 의견과 달리 검찰은 국가공무원법 66조를 적용해 기소했고, 대법원은 결국 유죄로 판결했다. 


실제로 시국선언이 집단행동이기는 합니다. 공무원이 집단행동을 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죠. 장례식장에 집단으로 참여하거나, 예배(검찰청에서도 기독교인 검사들끼리 모여 예배도 보고 그럽니다), 마라톤 대회, 학술 대회 등등. 세상을 넓고 집단적으로 할 일은 많습니다. 이것들을 모두 처벌하게 되면 문제가 있으니 대법원 판례는 “직무 전념 의무를 해태하게 할 경우”, 즉 직무를 잘못하게끔 영향을 미치는 집단 행위만 처벌하는 것으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수업 시간 외에 진행한 시국선언이 여기에 해당이 되는가 하는 법 해석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내 마음 속의 저울 기법 - 자유 vs 공익

 

공무원인 교원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저울의 한 쪽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대 주장의 근거로 ‘공익’이 등장합니다. ‘공익’에 무엇이 포함되는가에 따라 (변호사·교수와는 달리) 특별히 교원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처벌할 수 있는 위력의 발휘 여부가 결정되는,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이 지점에서 정치철학적인 발상, 헌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생깁니다. 헌법은 표현의 자유와 정치 활동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되어 있으니까요. 한편 공무원법에는 정치 활동 금지의 조항도 있습니다. 다만 이 조항은 선거운동 금지 조항으로, 이 법은 검사가 근거로 들지 않았습니다. 검사는 시국선언 사건과 관계된 공익으로 ‘공무원과 교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들었습니다.

 

이 문제에서 우리는 제가 ‘내 마음 속의 저울 기법’이라고 부르는 사고방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 속의 저울’ 기법이란, 이런 종류의 문제를 두고 규범적인 학문을 공부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태도를 말하는데요. 저울의 한 축에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놓고, 정치적 중립성을 다른 한 축에 두고, 자유 연상으로 무게를 재보는 거죠. 몇 킬로그램이 나가느냐 하는, 결국 무게 재기의 문제입니다. 판사든, 국민 다수든, 이런 식으로 판단하는 게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태도입니다.

 

저는 규범적 판단이 이렇게 내 마음 속의 저울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치들을 추상적인 차원에서 마음 속 저울에 올려놓는 방식으로는 서로 우기는 수밖에 없습니다.(『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에서는 대학생 이외의 과외를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제도를 두고 위헌 여부를 논의하는 사례를 들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만 말하는 상황에서는 논증 대화는 종료됩니다. 만약 그것이 전부라면, 우리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궁금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이를 많이 낳아서 세뇌시켜야 합니다. 자신의 저울에서 더 무게 있는 가치로 세뇌해서 다수결로 이기면 됩니다.

 

모호하기만 한 공익

 

교원 측 변호인들은 국가공무원법 66조 1항과 교원노조의 정치활동을 ‘일절’ 금지한 교원노조법 제3조를 가지고 헌법재판소에도 갔습니다.(하지만 헌재는 수년 전 국가공무원법 66조에 대해서는 “합헌”이라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 교원노조법 제3조는 위헌법률 심판으로 제청되어 헌재에 계류 중입니다.) 국가공무원법 66조에 대한 판결에서 헌재는 “근무 시간 내외를 근무하고 일률적으로 정치활동을 금지해도 감수성과 모방성, 수용성이 왕성한 초중등학교 학생들에게 교원이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큰 점과 교원의 활동은 근무 시간 내외를 불문하고 학생들의 인권 및 기본 생활습관 형성 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잠재적 교육과정의 일부분인 점을 고려할 때” 정치적 활동을 제한하는 것은 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은 교원 시국선언을 유죄로 판단한 이번 판결에서 ‘공익’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정치적 편향성, 당파성을 명백히 드러내는 행위와 같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침해할 만한 직접적인 위험을 초래했다고 할 때 공익에 반한다."

 

여기서 헌재가 말한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자, 교원이 있고 학생이 있습니다. 교원이 퇴근 후 정치적인 발언을 한다고 해봅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하고 있는 발언들, 현 정부는 잘못되었다, 4대강은 잘못되었다 등일 수 있습니다. 입헌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공동의 의사 결정에 대한 의견이면 무엇이든 여기에 해당됩니다. 자신이 교사임을 밝히며 인터넷에도 올렸습니다. 학생은 감수성과 모방성이 왕성하기 때문에 교원의 발언을 접함으로써 가치관에 혼란이 온다는 것이죠. 학생들에게 미치는 위와 같은 영향이, 이것을 억제해야 하는 이익이 공익에 속하고 따라서 기본권인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일률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샌델식으로 생각한다면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요? 샌델은 정치 공동체에서 권리와 의무를 규정할 때 ‘구성원들의 미덕을 어떻게 증진하느냐’, ‘공동체의 탁월성을 어떻게 높이느냐’가 주된 관심사입니다. 교사의 행동이 공동체의 미덕을 증진한다면 처벌하면 안 될 것이고, 발언하지 않는 것이 공동체의 미덕을 증진하거나 혹은 발언함으로써 공동체의 미덕이 저하된다면 금지해야 합니다. 샌델 본인이 이 사건을 어떤 말을 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미국 사회에서는 교원의 정당 가입부터 허용이 되기 때문에, 샌델  이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샌델의 결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샌델의 이런 사고방식, 즉 ‘정의 또는 국가 공동체의 규범에 관한 질문들은 근본적으로 미덕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고방식은 결국 흐리멍덩한 분석에 불과합니다. 해당 사건에서 변호인 측은 외국의 사례를 들었습니다. 한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선거 운동의 자유와 정당 가입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시국선언의 경우는 정책이나 정책 방향에 대한 의사 표시에 불과한데, 이마저 금지하는 나라는 OECD 국가 중에는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교원들의 발언은 민주주의의 능동적 시민의 모습이고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논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검사와 판사는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어떤 영향을 주는지 연구 결과는 없습니다. 그냥 자기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이죠. 미덕을 증진하는지 저하하는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설사 미덕을 저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권리의 행사를 금지할 이유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의 몇몇 언론이 한국 사회의 미덕을 저하한다고 생각합니다. 표현이란 것은,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 공동체 전체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를 두고 의견이 상충하는 사람은 항상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해 샌델은 끝까지 가보자고 말합니다. 미덕을 증진하는지 저하하는지 결론을 내지 않고서는 권리의 문제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샌델의 주장은 한국 사회에서 규범을 다루는 사람들 및 일반 시민들의 생각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실제로 이 판례에서도 ‘부정적’이라는 판단에 근거해 처벌했고요. ‘표현이 미치는 영향이 부정적이라서 처벌한다.’라는 말은 단순한 논리에 불과합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학생들이 받은 영향이 대체 무엇일까요? 세뇌나 강제는 당연히 아닙니다. 영향이란 한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한 필연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유명 연예인의 정치인 지지 선언에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영향을 받겠습니까. 지식인, 대학 교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향의 순위로만 생각하면, 교원의 직무 밖에서의 발언이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크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영향에 정도의 차이가 있더라도 모두 같은 종류의 영향이므로 어떤 것은 괜찮고 어떤 것은 나쁘다고 말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원이 미치는 영향만 특별히 처벌하려면 특정 원리에 근거해 ‘이것이 부패된 것이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작은 자유를 부여 받는 당사자조차도 납득할 수 있는 이익인가

 

예를 들어 동사무소 공무원이 특정 단체를 지지한다고 해봅시다. 등본을 발급 받으러 갔더니 그 직원이 이렇게 말합니다. “발급 전에 제가 나누어 드리는 이 정책 자료집을 읽어보시고, 다 읽었다는 것을 쪽지 시험을 쳐서 80점 이상을 받으면 등본을 발급해 주겠습니다.” 하버마스는 이를 ‘불투명한 전환’이라고 부릅니다. 논거의 질 혹은 논거의 질과 관련해서 획득하고 있는 신뢰가 영향력으로 전환할 경우에는 투명한 전환입니다. 반대로 논거의 질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경우, 예를 들어 돈, 협박, 무력, 다른 일을 하라고 주어진 권력이나 권한을 남용한 것이 영향력으로 전환하는 경우 이를 불투명한 전환이라고 부릅니다. 스스로 수용할 의사가 있어서 찾아보는 것 이외의 것을 강제로 듣거나 봐야 하지 않는다는 공정한 권리를 침해한 것입니다. 만약 교사가 교실에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나 소속 정당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면? 지금 여러분들은 저의 이야기를 듣다가 언제든지 떠날 수 있습니다. 교사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학생은 떠날 수가 없습니다. ‘갇힌 청중’이 되는 것이죠. 교사가 학생들에게 말할 수 있는 권한은 보편적인 교육을 하라고 주어진 권한이지, 자신의 특수한 정강이나 종교적 신념을 설파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종교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자신이 교원임을 밝히고 공개적으로 신앙 고백을 할 경우 간접적인 영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생님의 고백을 듣고 선생님을 평소 존경하던 학생이 자신도 교회에 가고 싶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투명한 전환입니다. 영향은 받았지만요. 종교 활동의 경우 그런 영향이 미친다 하더라도 금지할 수 없고, 또한 교원이 아닌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금지할 수 없다면, 교원의 경우에만 이를 금지하는 것은 어떤 원리에도 어긋나며 특히 공정성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이 분석은 공정성을 핵심으로 합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으로서 정책에 대해서 비판적 의견을 밝힐 자유가 있는데, 만약 이 자유를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축소하려면 그 근거가 모든 시민들에게 납득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그 자유를 줄일 수밖에 없는, 가장 작은 자유를 부여받는 당사자조차도 납득할 수 있는 이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이익이 다른 경우와 아무 일관성이 없고 단지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이익이라면,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공동체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치철학적인 규범 분석의 필요성

 

이렇게 분석했을 때, (미덕 이론을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한국 사회 시민들이 일반적으로 좌변에는 자유나 어떤 권리를 놓고, 우변에는 그와 대립한다고 생각되는 가치를 놓고, 끌림에 의해서 판단하고 그 결과 자유를 제한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토대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법상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또는 국민에 대한 봉사의 의무라고 했을 때, 발톱 깎는 것부터 변기의 물을 내리는 것까지 국민 모두에게 봉사한다는 것, 혹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정치적 중립을 모든 경우에 지키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투표를 하지 않아야 되겠죠. 언어 자체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정치철학적인 규범 분석이 현실의 법 해석에 도입될 수밖에 없고, 또한 입법의 고려사항으로 도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사건에 대한 판단을 피할 수는 없지만, 뭉뚱그려 한쪽에 공동체의 이익을 놓고 다른 쪽에 사익(교원의 정치적 표현에 관련된 사익)을 놓고 저울질하는 방법이 우리 사회의 시민의 지위를 끊임없이 왜소화하는 심각한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저자
이한 지음
출판사
미지북스 | 2012-10-22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이성적인 시민이 되기 위한 ‘진짜 정의론’을 만나다!『정의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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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저자 강연②  

- "노동자의 본성은 … ?" 비정규직 문제


아래 내용은 지난 2012년 11월 21일 저녁에 진행된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의 저자 이 한 선생님 강연을 녹취, 정리한 것입니다. 세 편으로 나누고 질의응답까지 더해 미지북스 블로그에 게재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1. "네 몸은 네 것이 아니다!" - 신장 매매 문제

2. "노동자의 본성은 … ?" - 비정규직 문제

3. 2009년 교원 시국선언, 샌델식 논리의 결론은?

4. 질의 응답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저자 강연 정리


②  "노동자의 본성은 … ?" 비정규직 문제 



두 번째로 다룰 문제는 비정규직 문제입니다. 샌델이 이 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을까요? 샌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 제도를 지지한 일을 소개합니다. ‘과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노예 제도를 지지할 수밖에 없을까?’라고 물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구출하려 합니다. 어떤 사람도 노예가 천성에 맞는 사람은 없다, 노예는 인간의 본성에 반한다, 왜냐면 노예라는 것은 강제에 의해서 일하는 것이고, 누구나 강제 받고 싶지 않은 본성을 갖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본성론, 본질론입니다. 행위, 활동, 제도, 공동체, 사람 각각에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학의 본질은 학문 탐구와 지식을 후대에게 전하는 것이고, 공무원 제도에 대해서는 (샌델은 직접 언급한 적 없지만) 마이클 왈저는 능력에 따른 임용, 즉 공적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왈저는 채용 시 가산점 제도를 반대합니다. 본질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 첫 번째

- 샌델이 동성애의 자유를 지지하는 방법


본질은 어떻게 파악하느냐? 샌델에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 듯합니다. 하나는 즉각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본질로 드는 방법입니다. 말을 잘 조합해야 설득력이 있겠죠? 예를 들어 구제 금융을 받은 금융 회사가 보너스 파티를 벌이는 행태를 두고 ‘실패에 대한 포상’이라며 말을 만들어 냅니다. 프랜차이즈 가게가 대학에 들어오는 것은 ‘학문 연구의 비상업적 상아탑의 본질에 대한 침해’라고도 말하고요.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카드들을 잘 조합해서, 자유연상 기법에 의해 본질을 규정합니다. 


이 방법은 특정 행위나 활동의 기능을 살펴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어떤 활동이든 여러 가지 기능이 있을 텐데,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모아서 본질로 정리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본질에서 제외됩니다. 본질에 부합하는 것은 덕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덕이 되겠죠. 샌델의 『정의의 한계』라는 책 (원서 제목은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라는 박사 학위 논문입니다. 이 논문에 서문을 달아 낸 책입니다.) 서문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샌델은 성애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은 다음, 스스로 ‘친밀감’이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이성애와 동성애 모두 친밀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애도 보호해야 하고 동성애도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샌델은 자유주의자들이 동성애의 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단지 ‘인간의 권리’, ‘사생활의 자유’ 같은 말만 하면서 성적 자기결정권이나 섹스할 상대를 고를 자유를 외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성애가 좋은 것인지 동성애가 좋은 것인지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채 동성애의 자유를 보호하려는 자유주의자의 태도에 대해 샌델은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동성애의 자유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실제로 뒷받침할 수 있는 공동체의 이해가 계속해서 상실되고 침식되고 있기 때문에, 결국 공화국은 무엇이 우리 공동체를 엮어주고 있는 실질적인 덕인가에 대한 아무런 이해가 없는, 껍데기와 절차, 권리, 의무만 남은 껍데기 공동체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럴듯하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샌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성애자들은 지나치게 문란하지 않느냐고. 통계적으로 남성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나 여성 동성애자들보다 문란합니다. 그 근거는 스티븐 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나와 있는데요. 남성은 유전적으로 문란합니다. 그런데 현실의 남성들이 문란하지 않은 이유는 여성과 친밀감을 나눠야 하기 때문에 그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덜 문란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남자끼리 사랑을 나누게 되면, 욕망이 완전히 대칭적으로 되어 일시적인 성 관계가 자주 일어납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설문조사를 했을 때 응답자 중 남성 동성애자의 50% 이상이 1000명 이상의 섹스 상대를 가졌다고 답했습니다. 여성 동성애자들은 오직 2% 미만이 100명 이상과 섹스를  했다고 답했습니다. 이처럼 남성 동성애자들이 실제로 더 많은 일시적인 성 관계를 갖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친밀감과 일시적인 성 관계는 서로 상충합니다. 따라서 동성애를 금지해야 한다는 논리로 귀결됩니다. 


성애에는 샌델의 말처럼 친밀감의 기능도 있지만, 제가 볼 때는 쾌락의 기능도 있습니다. 그런데 샌델은 이를 본질을 규정할 때 제외해 버렸습니다. 왜 제외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없습니다. 일단 제외하고 나서 본질을 규정하면, 배제적 힘을 갖게 됩니다. 제외된 기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악덕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규정됩니다. 아무런 토대 없이, 자유의 범위 안에 있던 행위가 배척되고 금지되어야 할 행위로 되는 것입니다.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 두 번째


샌델은 동성혼 지지자에다 동성애의 자유를 지지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성애자의 경우에도 문란함은 처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성애도 처벌해서는 안 된다.’ 갑자기 다수 공동체의 이해로 돌아갑니다. ‘이성애자가 다수인데 그들 중 일부도 문란하다, 그런데 처벌하지 않으므로 동성애자도 봐 주자’는 것입니다. 결국 이는 공동체의 다수가 어떻게 행위하고 있는가, 다수의 관행에 소수의 실천이 부합하느냐에 따라서 관용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정리해 보면, 샌델이 본질을 규정하고 비판에 대응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름의 자유연상 기법에 의해 덕을 규정하고, 본질에서 제외된 것은 악덕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당신의 본질 규정 방식은 무엇에 토대를 두고 있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공동체적 이야기를 써 내려 간다’, ‘우리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우리는 서사적 존재다’ 등의 은유적인 말로 피해갑니다. 결국 다수의 의견에 따릅니다. 다수의 의견에 따르자는 것이냐고 재차 물으면, 다시 처음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상당히 편리하죠. 1번이 공격 받으면 2번으로, 2번이 공격 받으면 1번으로 빠집니다. 하지만 1번과 2번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타당한 규범적 논증이 될 수 없습니다. 



노동자의 본성?


비정규직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노동자의 본성은 무엇인가? 노동자의 본성은 비정규직에 적합한가? 이 질문의 첫 번째 문제는 노동자의 본성을 규정하는 방식이 매우 자의적이라는 점입니다. 노동자의 본성에 안정적인 고용을 바라는 욕구가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안정적인 고용에 대한 욕구를 들어 노동이란 일상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자아실현 수단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욕구가 본성을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사용자야 당연히 노동자의 본성은 기간제 노동이라고 말하겠죠. 고용 계약의 본질은 자유로운 해지권이 보장되는 것이라고 하겠고요. 민법이 그렇습니다. 민법에서 고용 계약은 어느 쪽이든 자유롭게 해지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그러나 하위법인 근로기준법에 따라 현실에서는 노동자가 먼저 계약을 해지하려면 한 달 전에 해지 의사를 알려야 합니다.) 어쨌든 본래의 상위법(민법)이 규정한 노동 계약의 본질은 불안정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단어를 골라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본질을 조작할 수 있습니다. 끝이 안 나죠. 


두 번째 문제는 공동체의 이해라는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비정규직은 전체의 50%를 넘는다고 합니다. 간접고용, 특수고용직 노동자까지 포함하면요. 50%가 넘는 노동자들, 즉 공동체의 다수가 불안정 노동을 영위하며 살고 있으므로 노동의 본질은 불안정이다, 라는 추론이 샌델의 두 번째 방식에 의하면 성립합니다. 결국 노동의 본질이 무엇이냐, 노동자의 본성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고비사막을 건너면서 매일매일 열 번씩 던진다 해도 답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공정한 협동의 조건이 무엇인지, 우리가 사회에서 협동해서 생산할 때 그 협동 생산의 결과물들을 누가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를 공정한 조건하에서 협의하는 것입니다. 



공정한 조건과 인센티브


그렇다면 그 공정한 조건이란 무엇일까요? 출발점은 평등 분배겠죠? 그런데 불평등 분배로 옮겨갈 타당할 이유가 있다면? 있습니다. 바로 불평등 분배로 옮겨 감으로써 최하의 지위에 있는 사람의 상황이 오히려 더 나아지는 것입니다. 


자, 모델을 아주 단순화해서 생각해 봅시다. 건기와 우기가 있는 어떤 사회가 있습니다. 우기에는 나막신이 많이 팔리고 건기에는 짚신이 많이 팔립니다. 그런데 건기라고 해서 비가 계속 오는 것은 아니고, 우기라고 해서 내내 비가 오는 것도 아닙니다. 짚신 회사와 나막신 회사에 각각 50명이 상시 고용되어 있습니다. 이 이상을 상시 고용하면 회사에 부담이 됩니다. 팔리지 않는 물건을 계속 생산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다른 50명의 사람들은 건기에는 짚신 회사에 고용되고, 우기에는 나막신 회사에 고용됩니다. 이렇게 되면 노동력이 필요한 곳에 분배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생산성이 높아집니다. 우리가 평등 분배에서 불평등 분배로 가는 강력한 이유 중 하나가,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인센티브를 통해서요. 


다른 예를 들어 봅시다. 의사들이 복잡한 수술을 하면 돈을 많이 받잖아요? 의사 자격을 따기 위해 투여한 노력이 그만큼의 보상을 가져야 할 응분을 본질적으로 보장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인센티브를 통해, 전문지식을 습득하고 육체적·정신적으로 부담이 되는 고도의 훈련을 하게끔 하는 유인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그와 같은 불평등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만약 유인 구조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불평등은 근거가 없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지금의 대학, 학벌입니다. 만약 a 대학이 명문 대학이어서 강의가 아주 좋다고 해봅시다. b 대학은 명문 대학이 아니어서 강의 질이 낮습니다. 시험을 쳐서 점수가 높은 사람은 a 대학으로, 낮은 사람은 b 대학으로 갑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이처럼 차등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동등하게 들을 수 있는 강의에 대한 접근을 이렇게 차등하는 데에 점수가 낮은 사람도 수긍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강의를 동영상으로 만들어서 같이 듣게 하면 되거든요. 그러니까 a 대학의 학생들만 수준 높은 수업을 듣게 하고 이들에게 수업을 들었다는 보증서를 졸업장으로 발행해 주는 식으로 차별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인센티브가 성립되지 못한다면 차별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제게 변호사 자격증이 있지만, 벤처 회사에 가서 프로그래머로 고용해 달라고 하면서, 변호사 자격증 따느라 고생했으니 임금을 더 달라고 요구한다면 어떨까요? 아무런 근거가 없죠. 왜냐하면 그 회사의 협동 조건에서, 적은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이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는 것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산성을 높이는 인센티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업은 실업자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보다 그 사회의 생산성을 높입니다. 



 비정규직 철폐는 공정한 대안인가?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최소한 비정규직이 1.3배는 더 받아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보상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 많은 부담을 진 사람이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동종 유사한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부정의한 제도입니다. 최소한 비정규직이 1.3배는 더 받아야 합니다. 또한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는 비정규직 제도는 없어져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사내하청, 현대자동차와 같은 사내하청을 들 수 있습니다. 현대자동차의 사내하청 기업들은 생산성을 높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 기업의 관리자들은 단지 중간착취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모든 지시 및 설비 제공은 현대자동차에서 수행합니다. 사내하청 기업에는 아무런 기술과 자본이 없습니다.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분야의 기간제 노동 종사자들은 동종의 정규직보다 더 많이, 적어도 1.3배는 더 받아야 합니다. 학교의 경우, 기간제 교사와 정규직 교사가 있습니다. 정규직 교사가 출산이나 개인 사정으로 휴가를 떠났을 때 기간제 교사가 서너 달 동안 그 자리를 채웁니다. 정규직 교사는 열두 달 내내 꼬박 급여를 받지만 비정규직 교사는 띄엄띄엄 일할 뿐만 아니라 일하지 않는 기간에는 수입도 없습니다. 경력도 올라가지 않고요. 따라서 이들에게 훨씬 더 많은 보상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틀렸습니다. 


즉, 본성 분석이 아니라 공정한 여건과 공정한 협동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따질 때 우리는 훨씬 풍부한 대안의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결코 안락의자 위에 앉은 철학자들의 탁상공론이어서는 안 됩니다. 진보 정당계에서는 모든 비정규직을 금지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비정규직을 금지하는 것이 생산성을 줄이는 것이라면, 그래서 실업을 늘리는 것이라면, 그 또한 타당한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외과수술을 한 의사가 감기를 처방한 의사와 동일한 임금을 받는 것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응분에 대한 잘못된 신념


어떤 제도의 변화는 생산성을 증가시키는지,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데 불평등한 보상의 부담이 부담에 걸맞게 이루어지는지, 그것이 인센티브 제도로 잘 운영되는지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본성이나 응분 같은 개념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정규직은 시험 쳐서 들어오고 비정규직은 시험을 치지 않고 들어 왔는데 같은 일을 한다고 해보죠. 그런데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동일한 업무를 하며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서 저항이 있습니다. 사용자도 정규직도 마뜩찮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시험 봐서 들어왔다. 당신들은 시험도 안 보고 들어오지 않았냐.” 정식으로 시험을 치고 들어오지 않았으니 당연히 임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런 태도에 통속적인 ‘본질적 응분’에 대한 신념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우리가 무시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던, 응분에 대한 신념입니다.


아까 변호사가 벤처 회사에 들어가려 할 때를 예로 들었듯이, 실제 업무에서 그런 자격이 숙련 등에 인센티브로 영향을 미치는지가 중요하지, 시험 여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험을 보았든 보지 않았든, 동일한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해 왔기 때문입니다. 시험 자체는 업무 성과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그 자체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쳐서 어렵게 들어왔기 때문에 신분이 같지 않다는 주장인 셈입니다. 노력을 했으면 당연히 차등적인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과 다르지 않습니다. 진화적으로는 우리가 이런 발상에 친화적일지는 몰라도, 규범적으로 분석해보면 토대 없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에 찌들어 있는 거죠. 샌델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샌델식의 사고방식에 찌들어 있는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저자
이한 지음
출판사
미지북스 | 2012-10-22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이성적인 시민이 되기 위한 ‘진짜 정의론’을 만나다!『정의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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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신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있습니다. 샌델 교수가 현대 사회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볼까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샌델은『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도『정의란 무엇인가』5장의 논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15년간의 연구로 완성한 화제작”이라는 광고 문구가 화려하지만, 정작 읽어보면 15년의 연구는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사례만 긁어모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논증은『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다. “X를 돈으로 거래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원래 돈으로 거래해서는 안 되는 관행과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 거래는 타락과 부패, 비하에 해당한다.” 이 논증은 결국 “본래 돈으로 거래해서 안 되는 것을 거래해서는 안 된다. 거래한다면 타락, 부패, 비하이다.”라는 노골적인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샌델은 “왜 돈으로 거래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결론을 동어반복하지 않고 실질적인 도덕적 이유를 제시해서 진지하게 답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경우 결론을 그대로 논거로 사용하며, 이를 숨기기 위해 ‘부패’니 ‘비하’니 ‘타락’이니 하는 수사로 포장한다. 오죽하면 추천사를 쓴 최재천 교수가 “마이클 샌델 교수는 답은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우리로 하여금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각별한 재주를 갖고 있다.”고 했겠는가. 샌델 교수의 논증이 만족스러웠다면 “깊이 공감하고 납득하게 되는 훌륭한 답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써야 하지 않겠는가.

 

샌델의 이론적 방식은 어떤 관행이나 관계, 사태가 미덕의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 평가한 후 모든 사태에 적용할 수 있는 규범을 도출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성애의 본질은 ‘친밀감’이다. 동성애는 친밀감을 포함하므로 허용된다. 만약 동성애가 친밀감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금지해도 될 것이다. 만난 지 5분 만에 성행위를 하고 헤어진다면 그 관계는 샌델이 정한 본질적 형태로부터 이탈한 것이므로 악덕에 해당하며 따라서 공동체에 의해 금지되어야 한다.

 

 성행위는 친밀감과 사랑의 발로여야 하므로 돈으로 거래하는 대상이 아니다. (결론의 제시)

그것을 거래하는 행위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도 비하이고 타락이다. (결론을 고정, 거기서 이탈하면 비하이자 타락이라고 포장)

따라서 매춘은 금지되어야 한다. (동어반복)

 

개인은 바람직한 사태를 유지하고 증진하기 위한 도구이자 미덕을 담는 그릇이 된다. 샌델은 시장에서 무언가를 돈으로 거래하면서 생길 수 있는 문제점들을 모두 이 도식에 끼워 맞춘다. 그래서 개인의 윤리적 고려 사항과, 정치 공동체가 법으로 규제해야 할 사항을 전혀 구별하지 않는다. 샌델이 비판하고 있는 새로운 관행의 목록에는 “상품권”을 선물로 주는 행위도 포함되어 있다. “선물에 대하여 감사의 마음이 흐려지고 선물이 나타내는 가치는 사라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각주:1] 

 

사실 상품권은 포장된 물건보다 돈에 가까운 선물이다. 그리고 친구에게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하려면 상품권보다 친구가 좋아하는 선물을 주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다. 그러나 상품권을 주는 행위를 공동체가 법으로 금지할 수는 없다. 선물은 정성을 다해서 골라야 한다는 통념이 법적 지위를 가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이탈했다고 해서 누군가의 권리가 침해되지는 않는다.


물론 샌델은 그와 정반대로 생각한다.





위 내용은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이한 지음, 미지북스, 2012) 176~178쪽을 발췌한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저자
이한 지음
출판사
미지북스 | 2012-10-22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이성적인 시민이 되기 위한 ‘진짜 정의론’을 만나다!『정의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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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이클 샌델 지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안기순 옮김, 와이즈베리, 2012년, 152쪽. [본문으로]

이번에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샌델이 해결했다고 자신있게 선보인 문제, "구제 금융을 받은 금융 회사의 보너스 파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과연 이번에도 샌델의 해답은 아무런 문제도 없을까요? 




“구제 금융을 받은 금융 회사의 보너스 파티가 잘못인 이유는 뭘까?”
“실패에 포상했기 때문이지. 사람들은 성공에 포상하길 원해!" 

샌델은 포상의 본질은 성공에 대한 것인데, 구제 금융을 받은 금융 회사는 “실패를 포상했기” 때문에 (본질에서 벗어났으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샌델 식으로 말하자면, 파산 위기에 처한 회사에 대한 구제 금융 자체도 악덕이 될 수 있습니다. “실패한” 회사에 돈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파산 도미노로 경제가 붕괴할 위험이 생기고, 궁극적으로 모든 납세자들의 삶이 훨씬 힘들어지더라도 구제 금융을 하지 않아야 할까요? 반대로, 금융 투기를 일삼아 성공 가도를 달리는 금융 회사의 보너스 파티는 문제가 없을까요? “실패를 포상하면 안된다”는 미덕이 보편적인 원칙이 될 수 있다면, 실업자에게 수당을 지원하는 것 역시 정당화될 수 없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실업자는 노동시장에서 “실패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샌델의 해법은 건실한 정치철학적 논증이라기보다는 대중의 분노에 ‘미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샌델이 도덕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떤 사안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사안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악한다. 
2. 본질을 만족시키면 미덕, 본질을 벗어나면 악덕이고 타락이다. 

즉, 샌델의 이야기는 본질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론이 이미 정해져있는 노골적인 순환 논증의 형태를 띱니다. 그 근거로는 미리 정해진 결론이 미덕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됩니다. 그렇다면 샌델은 본질을 어떻게 파악할까요? 샌델의 철학에서 본질이란 대개 (샌델 자신의) 머릿속에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특성들일 뿐입니다. 그것이 너무 독단적이라고 생각되면, 샌델은 공동체 구성원의 다수가 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본질이라고 말합니다(“우리는 이야기를 써나가는 존재이다”). 만약 두 번째 방식이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뿐이라는 비판을 받으면 다시 첫 번째 방식, 미덕과 본질을 분석하는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으로 연구한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샌델이 철학하는 방법입니다. 샌델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봉합해 버립니다. 봉합이란 문제의 심층적인 전제를 정합성 있게 해명하지 않고, 떠오르는 답을 그럴듯하게 덧붙이는 태도를 뜻합니다. 봉합은 문제를 결론과 수사로 꿰매어서 핵심을 보이지 않게 만들고, 다양한 문제 사이에서 일관성 있게 사고할 수 있는 원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샌델은 중요한 정치철학적 문제를 두고 직관과 감성을 근거로 들어 결론을 내리면서 미덕, 타락, 비하 같은 문학적 수사를 붙여 정당화합니다. 
시민들이 정치철학에 기대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문제 해결의 지침을 제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철학은 숨겨진 심층적인 전제를 밝히고, 시민들이 문제를 둘러싼 원칙과 근거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마이클 샌델의 철학은 오히려 문제를 흐릿하게 만들고 이성적 탐구를 방해합니다. 


* 위 글은 미지북스의 신간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이 한 지음) 책 소개에서 발췌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저자
이한 지음
출판사
미지북스 | 2012-10-22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이성적인 시민이 되기 위한 ‘진짜 정의론’을 만나다!『정의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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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에도 소개된 적 있는 “철로를 이탈한 전차”는 정치철학의 대표적인 딜레마입니다. 마이클 샌델은 이 사례를 통해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정치철학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과연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이 딜레마를 해결했을까요?




샌델은 “전차의 딜레마”를 해결했을까?


자, 당신은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전차의 기관사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차의 브레이크가 고장나 버렸습니다! 이대로는 철로 위에서 일하고 있는 인부 다섯 명을 덮치고 맙니다. 

첫 번째 상황. 전차의 경로를 비상 철로로 바꾸면 철로 위에 있는 행인 한 명이 죽습니다. 선로를 변경해야 할까요? 
두 번째 상황. 당신은 다리 위에서 전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당신 옆에는 덩치 큰 행인이 서 있습니다. 행인을 밀어서 기차에 부딪히게 만들면 인부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행인을 밀어 인부 다섯 명을 구해야 할까요?

사람들에게 두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졌을 때, (거의 모든 문명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황에서는 선로를 변경하겠다고 답하고, 두 번째 상황에서는 행인을 밀어 넘어뜨리지 않겠다고 답했습니다. 샌델은 여기서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질문을 던지기만 할 뿐 직접적인 해답은 제시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이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이 한 지음)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바로 행인이 그 자체로 목적인 존재,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행인을 밀어 넘어뜨리기를 망설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행인을 밀거나 밀지 않을 권리가 없습니다. 자신의 몸을 던져 전차를 멈추고 다섯 명의 인부를 구할 것인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행인 자신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전차의 딜레마는 단순히 흥미로운 도덕적 딜레마를 제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가 각자의 주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웅변하는 사례입니다. 즉 스스로가 목적인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개인의 자기 결정권, 이것이 바로 마이클 샌델의 정치철학이 외면하는 것이며 현대 자유주의가 옹호하는 핵심 가치입니다. 

이것에 반해, 전차의 딜레마에 대한 샌델의 숨겨진 해답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타인을 위한 희생은 공동체가 규정한 훌륭한 미덕이며, 개인은 공동체적 자아의 일부분이므로 그 행인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행인은 악덕을 저지른 것이고, 공동체에 의해 비난받아야 한다."

샌델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본질 분석에서 최고로 치는 미덕은 단연 “공화국 시민들의 미덕을 고양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공화국 시민으로서 가져야 하는 미덕을 타락시키면 잘못된 것, 고양하면 옳은 것입니다. 특정한 근거가 다른 근거들과 충돌할 때는 별다른 논증 과정 없이 거의 언제나 시민적 덕성을 강화하는 일이 우선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정치철학자 피터 스타인버거는 “샌델은 자신의 견해를 논증하기보다는 주장하고 있다”고 갈파하기도 했습니다. 


위 글은 미지북스의 신간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이 한 지음) 책 소개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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