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저자 강연②  

- "노동자의 본성은 … ?" 비정규직 문제


아래 내용은 지난 2012년 11월 21일 저녁에 진행된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의 저자 이 한 선생님 강연을 녹취, 정리한 것입니다. 세 편으로 나누고 질의응답까지 더해 미지북스 블로그에 게재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1. "네 몸은 네 것이 아니다!" - 신장 매매 문제

2. "노동자의 본성은 … ?" - 비정규직 문제

3. 2009년 교원 시국선언, 샌델식 논리의 결론은?

4. 질의 응답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저자 강연 정리


②  "노동자의 본성은 … ?" 비정규직 문제 



두 번째로 다룰 문제는 비정규직 문제입니다. 샌델이 이 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을까요? 샌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 제도를 지지한 일을 소개합니다. ‘과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노예 제도를 지지할 수밖에 없을까?’라고 물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구출하려 합니다. 어떤 사람도 노예가 천성에 맞는 사람은 없다, 노예는 인간의 본성에 반한다, 왜냐면 노예라는 것은 강제에 의해서 일하는 것이고, 누구나 강제 받고 싶지 않은 본성을 갖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본성론, 본질론입니다. 행위, 활동, 제도, 공동체, 사람 각각에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학의 본질은 학문 탐구와 지식을 후대에게 전하는 것이고, 공무원 제도에 대해서는 (샌델은 직접 언급한 적 없지만) 마이클 왈저는 능력에 따른 임용, 즉 공적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왈저는 채용 시 가산점 제도를 반대합니다. 본질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 첫 번째

- 샌델이 동성애의 자유를 지지하는 방법


본질은 어떻게 파악하느냐? 샌델에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 듯합니다. 하나는 즉각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본질로 드는 방법입니다. 말을 잘 조합해야 설득력이 있겠죠? 예를 들어 구제 금융을 받은 금융 회사가 보너스 파티를 벌이는 행태를 두고 ‘실패에 대한 포상’이라며 말을 만들어 냅니다. 프랜차이즈 가게가 대학에 들어오는 것은 ‘학문 연구의 비상업적 상아탑의 본질에 대한 침해’라고도 말하고요.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카드들을 잘 조합해서, 자유연상 기법에 의해 본질을 규정합니다. 


이 방법은 특정 행위나 활동의 기능을 살펴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어떤 활동이든 여러 가지 기능이 있을 텐데,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모아서 본질로 정리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본질에서 제외됩니다. 본질에 부합하는 것은 덕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덕이 되겠죠. 샌델의 『정의의 한계』라는 책 (원서 제목은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라는 박사 학위 논문입니다. 이 논문에 서문을 달아 낸 책입니다.) 서문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샌델은 성애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은 다음, 스스로 ‘친밀감’이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이성애와 동성애 모두 친밀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애도 보호해야 하고 동성애도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샌델은 자유주의자들이 동성애의 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단지 ‘인간의 권리’, ‘사생활의 자유’ 같은 말만 하면서 성적 자기결정권이나 섹스할 상대를 고를 자유를 외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성애가 좋은 것인지 동성애가 좋은 것인지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채 동성애의 자유를 보호하려는 자유주의자의 태도에 대해 샌델은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동성애의 자유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실제로 뒷받침할 수 있는 공동체의 이해가 계속해서 상실되고 침식되고 있기 때문에, 결국 공화국은 무엇이 우리 공동체를 엮어주고 있는 실질적인 덕인가에 대한 아무런 이해가 없는, 껍데기와 절차, 권리, 의무만 남은 껍데기 공동체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럴듯하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샌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성애자들은 지나치게 문란하지 않느냐고. 통계적으로 남성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나 여성 동성애자들보다 문란합니다. 그 근거는 스티븐 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나와 있는데요. 남성은 유전적으로 문란합니다. 그런데 현실의 남성들이 문란하지 않은 이유는 여성과 친밀감을 나눠야 하기 때문에 그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덜 문란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남자끼리 사랑을 나누게 되면, 욕망이 완전히 대칭적으로 되어 일시적인 성 관계가 자주 일어납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설문조사를 했을 때 응답자 중 남성 동성애자의 50% 이상이 1000명 이상의 섹스 상대를 가졌다고 답했습니다. 여성 동성애자들은 오직 2% 미만이 100명 이상과 섹스를  했다고 답했습니다. 이처럼 남성 동성애자들이 실제로 더 많은 일시적인 성 관계를 갖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친밀감과 일시적인 성 관계는 서로 상충합니다. 따라서 동성애를 금지해야 한다는 논리로 귀결됩니다. 


성애에는 샌델의 말처럼 친밀감의 기능도 있지만, 제가 볼 때는 쾌락의 기능도 있습니다. 그런데 샌델은 이를 본질을 규정할 때 제외해 버렸습니다. 왜 제외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없습니다. 일단 제외하고 나서 본질을 규정하면, 배제적 힘을 갖게 됩니다. 제외된 기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악덕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규정됩니다. 아무런 토대 없이, 자유의 범위 안에 있던 행위가 배척되고 금지되어야 할 행위로 되는 것입니다.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 두 번째


샌델은 동성혼 지지자에다 동성애의 자유를 지지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성애자의 경우에도 문란함은 처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성애도 처벌해서는 안 된다.’ 갑자기 다수 공동체의 이해로 돌아갑니다. ‘이성애자가 다수인데 그들 중 일부도 문란하다, 그런데 처벌하지 않으므로 동성애자도 봐 주자’는 것입니다. 결국 이는 공동체의 다수가 어떻게 행위하고 있는가, 다수의 관행에 소수의 실천이 부합하느냐에 따라서 관용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정리해 보면, 샌델이 본질을 규정하고 비판에 대응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름의 자유연상 기법에 의해 덕을 규정하고, 본질에서 제외된 것은 악덕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당신의 본질 규정 방식은 무엇에 토대를 두고 있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공동체적 이야기를 써 내려 간다’, ‘우리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우리는 서사적 존재다’ 등의 은유적인 말로 피해갑니다. 결국 다수의 의견에 따릅니다. 다수의 의견에 따르자는 것이냐고 재차 물으면, 다시 처음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상당히 편리하죠. 1번이 공격 받으면 2번으로, 2번이 공격 받으면 1번으로 빠집니다. 하지만 1번과 2번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타당한 규범적 논증이 될 수 없습니다. 



노동자의 본성?


비정규직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노동자의 본성은 무엇인가? 노동자의 본성은 비정규직에 적합한가? 이 질문의 첫 번째 문제는 노동자의 본성을 규정하는 방식이 매우 자의적이라는 점입니다. 노동자의 본성에 안정적인 고용을 바라는 욕구가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안정적인 고용에 대한 욕구를 들어 노동이란 일상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자아실현 수단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욕구가 본성을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사용자야 당연히 노동자의 본성은 기간제 노동이라고 말하겠죠. 고용 계약의 본질은 자유로운 해지권이 보장되는 것이라고 하겠고요. 민법이 그렇습니다. 민법에서 고용 계약은 어느 쪽이든 자유롭게 해지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그러나 하위법인 근로기준법에 따라 현실에서는 노동자가 먼저 계약을 해지하려면 한 달 전에 해지 의사를 알려야 합니다.) 어쨌든 본래의 상위법(민법)이 규정한 노동 계약의 본질은 불안정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단어를 골라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본질을 조작할 수 있습니다. 끝이 안 나죠. 


두 번째 문제는 공동체의 이해라는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비정규직은 전체의 50%를 넘는다고 합니다. 간접고용, 특수고용직 노동자까지 포함하면요. 50%가 넘는 노동자들, 즉 공동체의 다수가 불안정 노동을 영위하며 살고 있으므로 노동의 본질은 불안정이다, 라는 추론이 샌델의 두 번째 방식에 의하면 성립합니다. 결국 노동의 본질이 무엇이냐, 노동자의 본성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고비사막을 건너면서 매일매일 열 번씩 던진다 해도 답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공정한 협동의 조건이 무엇인지, 우리가 사회에서 협동해서 생산할 때 그 협동 생산의 결과물들을 누가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를 공정한 조건하에서 협의하는 것입니다. 



공정한 조건과 인센티브


그렇다면 그 공정한 조건이란 무엇일까요? 출발점은 평등 분배겠죠? 그런데 불평등 분배로 옮겨갈 타당할 이유가 있다면? 있습니다. 바로 불평등 분배로 옮겨 감으로써 최하의 지위에 있는 사람의 상황이 오히려 더 나아지는 것입니다. 


자, 모델을 아주 단순화해서 생각해 봅시다. 건기와 우기가 있는 어떤 사회가 있습니다. 우기에는 나막신이 많이 팔리고 건기에는 짚신이 많이 팔립니다. 그런데 건기라고 해서 비가 계속 오는 것은 아니고, 우기라고 해서 내내 비가 오는 것도 아닙니다. 짚신 회사와 나막신 회사에 각각 50명이 상시 고용되어 있습니다. 이 이상을 상시 고용하면 회사에 부담이 됩니다. 팔리지 않는 물건을 계속 생산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다른 50명의 사람들은 건기에는 짚신 회사에 고용되고, 우기에는 나막신 회사에 고용됩니다. 이렇게 되면 노동력이 필요한 곳에 분배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생산성이 높아집니다. 우리가 평등 분배에서 불평등 분배로 가는 강력한 이유 중 하나가,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인센티브를 통해서요. 


다른 예를 들어 봅시다. 의사들이 복잡한 수술을 하면 돈을 많이 받잖아요? 의사 자격을 따기 위해 투여한 노력이 그만큼의 보상을 가져야 할 응분을 본질적으로 보장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인센티브를 통해, 전문지식을 습득하고 육체적·정신적으로 부담이 되는 고도의 훈련을 하게끔 하는 유인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그와 같은 불평등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만약 유인 구조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불평등은 근거가 없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지금의 대학, 학벌입니다. 만약 a 대학이 명문 대학이어서 강의가 아주 좋다고 해봅시다. b 대학은 명문 대학이 아니어서 강의 질이 낮습니다. 시험을 쳐서 점수가 높은 사람은 a 대학으로, 낮은 사람은 b 대학으로 갑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이처럼 차등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동등하게 들을 수 있는 강의에 대한 접근을 이렇게 차등하는 데에 점수가 낮은 사람도 수긍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강의를 동영상으로 만들어서 같이 듣게 하면 되거든요. 그러니까 a 대학의 학생들만 수준 높은 수업을 듣게 하고 이들에게 수업을 들었다는 보증서를 졸업장으로 발행해 주는 식으로 차별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인센티브가 성립되지 못한다면 차별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제게 변호사 자격증이 있지만, 벤처 회사에 가서 프로그래머로 고용해 달라고 하면서, 변호사 자격증 따느라 고생했으니 임금을 더 달라고 요구한다면 어떨까요? 아무런 근거가 없죠. 왜냐하면 그 회사의 협동 조건에서, 적은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이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는 것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산성을 높이는 인센티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업은 실업자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보다 그 사회의 생산성을 높입니다. 



 비정규직 철폐는 공정한 대안인가?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최소한 비정규직이 1.3배는 더 받아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보상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 많은 부담을 진 사람이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동종 유사한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부정의한 제도입니다. 최소한 비정규직이 1.3배는 더 받아야 합니다. 또한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는 비정규직 제도는 없어져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사내하청, 현대자동차와 같은 사내하청을 들 수 있습니다. 현대자동차의 사내하청 기업들은 생산성을 높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 기업의 관리자들은 단지 중간착취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모든 지시 및 설비 제공은 현대자동차에서 수행합니다. 사내하청 기업에는 아무런 기술과 자본이 없습니다.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분야의 기간제 노동 종사자들은 동종의 정규직보다 더 많이, 적어도 1.3배는 더 받아야 합니다. 학교의 경우, 기간제 교사와 정규직 교사가 있습니다. 정규직 교사가 출산이나 개인 사정으로 휴가를 떠났을 때 기간제 교사가 서너 달 동안 그 자리를 채웁니다. 정규직 교사는 열두 달 내내 꼬박 급여를 받지만 비정규직 교사는 띄엄띄엄 일할 뿐만 아니라 일하지 않는 기간에는 수입도 없습니다. 경력도 올라가지 않고요. 따라서 이들에게 훨씬 더 많은 보상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틀렸습니다. 


즉, 본성 분석이 아니라 공정한 여건과 공정한 협동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따질 때 우리는 훨씬 풍부한 대안의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결코 안락의자 위에 앉은 철학자들의 탁상공론이어서는 안 됩니다. 진보 정당계에서는 모든 비정규직을 금지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비정규직을 금지하는 것이 생산성을 줄이는 것이라면, 그래서 실업을 늘리는 것이라면, 그 또한 타당한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외과수술을 한 의사가 감기를 처방한 의사와 동일한 임금을 받는 것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응분에 대한 잘못된 신념


어떤 제도의 변화는 생산성을 증가시키는지,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데 불평등한 보상의 부담이 부담에 걸맞게 이루어지는지, 그것이 인센티브 제도로 잘 운영되는지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본성이나 응분 같은 개념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정규직은 시험 쳐서 들어오고 비정규직은 시험을 치지 않고 들어 왔는데 같은 일을 한다고 해보죠. 그런데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동일한 업무를 하며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서 저항이 있습니다. 사용자도 정규직도 마뜩찮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시험 봐서 들어왔다. 당신들은 시험도 안 보고 들어오지 않았냐.” 정식으로 시험을 치고 들어오지 않았으니 당연히 임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런 태도에 통속적인 ‘본질적 응분’에 대한 신념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우리가 무시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던, 응분에 대한 신념입니다.


아까 변호사가 벤처 회사에 들어가려 할 때를 예로 들었듯이, 실제 업무에서 그런 자격이 숙련 등에 인센티브로 영향을 미치는지가 중요하지, 시험 여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험을 보았든 보지 않았든, 동일한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해 왔기 때문입니다. 시험 자체는 업무 성과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그 자체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쳐서 어렵게 들어왔기 때문에 신분이 같지 않다는 주장인 셈입니다. 노력을 했으면 당연히 차등적인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과 다르지 않습니다. 진화적으로는 우리가 이런 발상에 친화적일지는 몰라도, 규범적으로 분석해보면 토대 없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에 찌들어 있는 거죠. 샌델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샌델식의 사고방식에 찌들어 있는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저자
이한 지음
출판사
미지북스 | 2012-10-22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이성적인 시민이 되기 위한 ‘진짜 정의론’을 만나다!『정의란 무...
가격비교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의 저자 이 한 선생님과 독자와의 만남 자리가 열립니다! 저자 강연 후 질의응답, 사인회 등의 시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출간 기념 저자 이 한 과 독자와의 만남


참여방법  

알라딘 바로 가기

예스24 바로 가기

교보문고 바로 가기

셋 중 한 곳에, 참석하고 싶은 이유와 참석 인원을 댓글로 남겨 주세요.(동반 1인 가능) 

(위 이미지의 초대 인원 20명은 각 서점별 모집 인원입니다. 해당 서점 인원이 찼다면 다른 서점에서 신청해 주시면 되어요.)


일시  11월 21일 수요일 저녁 7시 30분

장소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4층 소회의실 (그림 속 오시는 길 참고)

신청기간  11월 6일(화)~11월 15일(목)

발표  2012년 11월 16일(금)

문의사항  미지북스 070-7533-1848

 

저자 이 한

변호사 이한의 글은 꼼꼼하고 치밀하다. 모호한 딜레마로 독자를 현혹하지 않는다. 이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는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마이클 샌델의 정치철학을 깊이 해부한다.

그는 샌델의 저서 전부와 여러 학자들의 논의를 직접 검토한 다음, 샌델의 철학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진단한다. 그 결과 철학적 연구 방법뿐만 아니라 흥미진진한 사례 뒤에 숨은 주장이 매우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존 스튜어트 밀, 로버트 노직, 존 롤즈 등 샌델이 왜곡한 정치철학의 거장을 본격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샌델의 철학이 가진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이를 통해 현대 정치철학의 모습을 복원하고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여, 개인의 존엄성을 보장할 수 있는 바람직한 정의론을 제시하려 한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시민교육센터(www.civiledu.org)의 공동 대표로 있으면서 대안 민주주의와 정치철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 및 집필을 하고 있다.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란 어떤 사회인지, 어떻게 하면 그런 사회를 이룰 수 있는지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는 중이다.

지은 책으로 『이것이 공부다』(2012년), 『너의 의무를 묻는다』(2010년), 『철학이 있는 콜버그의 호프집』(2005년), 『탈학교의 상상력』(2000년), 『학교를 넘어서』(1998년)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사치열병』(2011년), 『포스트민주주의』(2008년), 『이반 일리히의 유언』(2010년), 『계급론』(2005년), 『성장을 멈춰라』(2004년)가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