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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타인의 고통과 사진의 책임

사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의도적인 굴절과 왜곡을 필연적으로 함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도치 않은 결과마저도 가져올 수 있는 강력한 매체일까요? 카메라 렌즈가 향하고 있는 대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떤 관계와 맥락 속에 놓여 있는 걸까요? 여기 사진에 대한 깊은 인문학적 성찰이 담긴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이 글은 사진 비평가이자 출판 편집자인 김현호 선생님이 쓰신 글로 <월간 사진> 3월호에 기고된 글이며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아 전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출처: 김현호 페이스북 )  

  


 


 

사진은 우리를 배신하는가?

- 타인의 고통과 사진의 책임

 

 

 

김현호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사진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베가스튜디오 대표와 계원디자인예술대학 H센터 연구원을 거쳐 지금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의 편집장으로 있다.

 

 

 

오늘은 두 장의 사진과 여섯 명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두 사진은 한 도시에서 불과 보름의 간격을 두고 탄생했습니다. 이 사진들은 기술적으로는 투박하기 그지없었지만, 엄청나게 리트윗되고 공유되며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사뭇 다릅니다. 한 장의 사진은 아름답고 따뜻해 보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반면 다른 한 장은 섬뜩하고 불쾌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두 사진이 작동하는 방식은 굉장히 흡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두 사진은 모두 낡은 윤리적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고통의 이미지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의 문제, 다른 하나는 사진가의 현실 개입 문제입니다. 오래된 것들이지만 아직 종결되지 못한 것들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사진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개념에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사진들을 통해 다큐멘터리 사진의 오래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첫째는 이 사진이 기능하는 방식이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과 맞닿고 있으며, 문제점 역시 계승되거나 심지어 확대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시민들에 의해 생산되고 네트워크와 결합해서 퍼지는 이러한 사진들은, 디지털을 만나게 된 새로운 다큐멘터리 사진의 탄생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는 개인적인 느낌 때문입니다. 이미 페이스북 등의 플랫폼은 기존의 매체들이 하던 역할을 상당 부분 물려받고 있습니다. 아마 매체사진의 성격도 이에 따라 변화할 것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이제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2012년 12월 초,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둔 뉴욕은 따뜻한 초겨울을 맞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온화했고, 가끔 약한 비가 내렸습니다. 게다가 훈훈한 사진 한 장이 뉴욕 시민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볼 첫 번째 사진입니다. 사진에 찍힌 로렌스 드프리모라는 풋내기 경찰관이 바로 사진에 얽힌 미담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미소가 매력적인 젊은이였습니다. 11월 14일 저녁 아홉 시 삼십 분, 언제나처럼 웨스트 빌리지 6구역을 순찰하던 드프리모 경관은 맨발의 노숙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쉰네 살의 노숙자 제프리 힐먼의 발에는 물집이 잡혀 있었습니다. 예년보다 따뜻했다고는 해도 맨발로 버티기에는 가혹한 밤이었습니다. 젊은 경찰관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양말을 두 켤레나 신었는데도 이렇게 추운데, 이 사람은 얼마나 추울까? 과연 그를 이대로 내버려둬도 되는 걸까? 

 

고민하던 드프리모 경관은 노숙자에게 뭔가 신을 것이 없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제프리는 아들뻘인 젊은이에게 "경관님, 저는 괜찮습니다. 사실 신발 한 켤레를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답니다. 하지만 신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기를." 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드프리모 경관은 고민하다가 7번가에 위치한 스케처스 매장에 들어가서 부츠를 사기로 결심합니다. 

 

노숙자가 득시글거리는 뉴욕에서 이런 아름다운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신발가게 매니저 호세 카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카노 씨는 백 달러짜리 부츠를 직원가로 이십오 퍼센트 할인해서 젊은 경관에게 팔았고, 그것 역시 나중에는 작은 미담이 되었습니다. 신발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온 드프리모 경관은 주저앉은 노숙자 옆에 무릎을 대고 앉아 부츠를 건넵니다. 따뜻한 커피도 한 잔 사주고 싶었지만 부츠를 신은 제프리는 일어나서 어디론가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도운 노숙자의 이름도 묻지 않은 경관은 다시 근무지로 돌아가 순찰을 합니다. 퇴근을 한 후에는 언제나처럼 부모와 함께 사는 롱아일랜드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몰랐던 것은, 한 여자가 그 장면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제니퍼 포스터, 남편과 함께 아리조나에서 뉴욕으로 여행을 온 관광객이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제니퍼는 그 사진을 메일로 뉴욕 경찰국(NYPD)에 보냅니다. 뉴욕 경찰국은 이 사진을 자신들의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제니퍼가 찍은 사진은 서툴렀지만, 전문 사진가가 찍은 매끈한 사진이 주지 못하는 투박한 현장감과 신뢰성을 주고 있습니다. 화요일 저녁에 올려진 사진은 드프리모 경관을 하룻밤만에 '영웅'으로 만들어냈습니다. 하루가 채 되지 않아 페이스북에서 그 사진을 본 사람은 16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27만 5천 명이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고, 1만6천 개의 덧글이 달렸습니다. 금요일이 되자 54만 3천 명이 '좋아요'를 눌렀고, 20만 명이 사진을 공유했습니다. 블로그나 트위터 등 다른 플랫폼을 통해 이 사진을 복제한 사람의 수를 집계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사진은 유력 언론사와 통신사를 통해 보도되었고,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에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의심 많은 이들은 조작된 사진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미국의 동쪽과 서쪽 끝에 사는 로렌스와 제니퍼가 일면식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가장 강력한 사진들 몇몇은 가끔 그 사진가와 주인공을 사진 밖의 현실 세계로 소환하기도 합니다. 이 사진이 그랬고, 우리가 다음에 볼 사진 역시 그랬습니다.  제니퍼와 로렌스는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NBC의 '투데이 쇼'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로렌스의 이웃과 친척은 그가 얼마나 친절하고 존경받을 만한 청년인가를 다투어 이야기했습니다. 방송에 출연한 제니퍼는 말했습니다. "그 남자(노숙자)의 얼굴이 마치 크리스마스인 것처럼 빛났습니다. 그는 마치 백만 달러를 받은 사람 같았어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NBC News의 '투데이 쇼'에 출연한 제니퍼 포스터(Jennifer Foster), 래리 드프리모(Larry Deprimo). NBC NEWSWIRE/PETER KRAMER/NBC


이 사진은 아주 조금은 세상을 바꾸어 놓기도 했습니다. '세계의 수도'라고 불리우는 뉴욕의 한복판에 신발조차 신지 못한 노숙자가 있다는 것은 저소득층을 위한 주거 안정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부 정책을 재검토하고 노숙자들의 약물과 알콜 중독, 정신건강 문제에 총체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언론의 주장이 나왔습니다. 시민들은 겨울을 앞둔 노숙자를 위해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사진이 현실에 개입하는 가장 바람직한 형태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구석진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사진이 증언하는 것, 이를 통해서 사람들을 설득해서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것은 루이스 하인 이후 사회적 사진이 작동하는 중요한 방식이자 명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사소한 문제는, 이 사진이 로렌스를 영웅으로 만든 그 방식으로 제프리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제프리의 삶 역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언론은 제프리의 인생을 샅샅히 뒤져서 이야깃거리를 찾아냈습니다. 제프리가 취사병 출신이며, 군 전역 이후에는 뉴저지에서 여러 식당을 전전하며 일했다는 것, 그리고 제프리와 니키타라는 이름의 장성한 두 자식이 있다는 것, 그가 약물 소지를 비롯한 작은 범죄들로 열한 번이나 체포되었다는 것이 여과되지 않고 언론을 통해 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가장 심했던 것은 제프리의 고등학교 때 사진을 찾아서 기사화한 것이었습니다. 제프리는 농구선수였고, 학교에서 가장 드리블을 잘 하는 밝은 친구였다고 합니다. 활짝 웃고 있는 어린 제프리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묘하게 외설적이기도 합니다. 이는 몰락한 타인의 내밀한 삶, 그리고 분명히 그가 보여주기 원치 않는 삶을 쉽게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존 그라프 주니어 목사(JOHN GRAF JR., 윗 사진의 오른쪽 하단)는 부츠를 받은 제프 힐만(JEFF HILLMAN)과 같이 1970년 중반에 사우스플레인필드(SOUTH PLAINFIELD) 고등학교를 다녔다. 두 사람이 졸업하던 1976년에, 힐만에 21번을 달고 농구 팀에서 뛰었고, 그라프는 그 팀의 매니저였다. 졸업 앨범에 있던 사진.


제프리는 <뉴욕 타임즈>에 로렌스에게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만 자신은 원래 그 부츠를 거절했다고 말합니다. "나는 유투브에 올려졌습니다. 아무도 내 허락 없이 모든 곳에 '나를' 올렸어요. 그걸로 나는 뭘 얻었죠? 이것들은 전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어요." 물론 제프리는 사실 자신의 이미지가 유통되는 대가로 돈을 좀 받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불평은 이 사진의 이면을 거침없이 드러냅니다. 즉 '주인공'인 로렌스와 이 사진을 만들어낸 제니퍼, 그리고 이 사진을 소비하는 시민들에게 이것은 아름다운 미담입니다. 하지만 제프리에게 이 사진은 폭력적입니다. 제프리는 신발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맨발로 길에 주저앉은 자신의 사진이 전세계로 퍼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고, 사람들의 동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미 제프리가 이 사진의 유통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견디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더 떨어질 곳이 없어 보이는 노숙자의 자존심이나 상처, 고통에 공감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제프리의 항의가 사실 사진이 관습적으로 눈감아 온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런 것입니다. 사진가는 세계의 비참함을 찍습니다. 때로 그들은 목숨을 걸고 부조리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증언합니다. (서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매체들은 이런 사진을 유통시킵니다. 그것을 보는 우리들은 어딘가에서 이런 참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이런 환경에서도 해맑은 아이들과 강인한 어머니를 봅니다. 우리는 고통을 느끼고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과 감동은 주로 작은 기부나 항의 같은 것으로 이어지지요. 사진은 그런 식으로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나갑니다. 

 

타인이 겪는 일에 공감하고 분노하는 것, 그리고 고된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돈 일부를 기꺼이 지불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아마 이렇게 모아진 돈은 많은 생명을 살릴 것이고 죽어가는 이들에게 희망을 줄 겁니다. 물론 절박하게 도움을 기다리는 이들 중 제프리처럼 한가하게 자존심 같은 걸 이야기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도움을 받기 위해 고통의 이미지를 제공해야 한다는 상황은 과연 윤리적일까요? 감동을 느끼고 전화기 버튼을 누르는 우리는 과연 착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진을 통해 그들의 삶을 '보고 있다'는 믿음은, 어쩌면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성찰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고통의 이미지가 서로 경쟁하면서 결국 우리는 그것에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두 번째 사진은 보름 후에 태어났습니다. 이 사진은 훨씬 탐욕스럽습니다. 12월 3일 낮 열두 시 삼십 분,  뉴욕 맨해튼 49번가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두 남자의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결국 젊고 건장한 흑인 남자가 나이든 동양인을 밀어서 떨어뜨립니다. 선로에 굴러떨어진 동양인 남자는 곧 일어나서 밖으로 기어나오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습니다. 플랫폼의 높이는 고작 4피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손을 잡아 끌어올려주지 않았고, 그는 들어오는 지하철에 치어서 "넝마로 만든 인형처럼"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이 사진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망연하게 지하철을 쳐다보는 그의 뒷모습을 찍은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사진에 들어가서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끌어올리고 싶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속절없이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한국계 이민자였고, 이름은 한기석이었습니다. 몸이 아픈 아내와 스무 살의 딸이 있는 가장인 그는, 아침에 술을 마시고 아내와 말다툼을 한 뒤 퀸즈 엘름허스트에 있는 집에서 뛰쳐나왔고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흑인 남자는 시에라리온 난민 자격으로 미국에 입국한 서른 살의 나임 데이비스였습니다. 일곱 살에 미국에 입국한 그는 필라델피아의 한 가정에 입양되었지만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노숙자가 된 데이비스는 록펠러 센터 근처의 잡상인들을 도와주면서 푼돈을 벌곤 했습니다. 티셔츠를 팔던 상인은 데이비스가 착한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데이비스는 종종 배고픈 이들에게 핫도그를 사주곤 했었는데, 주머니에 달랑 핫도그 값밖에 없었을 때도 기꺼이 돈을 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플랫폼에 있었던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나임 데이비스는 한기석 씨를 밀어 떨어뜨린 후, 그가 숨을 거두는 모습까지 묵묵히 지켜보고는 욕설을 지껄이며 자리를 뜹니다. 

 

2011년 기준으로 뉴욕 지하철의 선로에는 150명 정도의 사람이 뛰어내리거나 밀려 떨어졌고, 그들 중 마흔일곱 명이 죽었습니다. 한기석 씨의 죽음은 사흘에 한 번 정도, 혹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일어나는 흔한 일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 사진가인 우마르 압바시가 개입되면서 사건은 좀더 복잡해지고, 또 확대됩니다. 우마르 압바시는 웨딩이나 풍경, 누드, 베이비 등 닥치는 대로 사진을 찍는 생계형 사진가였습니다. 우연찮게도 그는 '노숙자에게 신발을 사준 경찰관의 미담'을 취재하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마침 플랫폼에 있었던 압바시는 플랫폼에 매달려 전철을 바라보는 한기석 씨의 마지막 뒷모습을 찍었습니다. 이 사진으로 인해 한기석 씨의 죽음은 다른 죽음들보다 좀더 특별한 죽음이 되었습니다. 


이 사진은 <뉴욕 포스트>에 실렸습니다. 삼류 타블로이드 신문인 <뉴욕 포스트>가 그 사진, 혹은 한기석 씨의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비열하고 천박했습니다. "운명: 선로에 밀려 떨어진, 이 남자는 곧 죽을 것이다" 하는 식의 카피는 명백하게 상업적이고 자극적인 의도를 지니고 있어 보입니다.  

 

그에 따른 반박까지 그들이 노린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수많은 이들이 <뉴욕 포스트>를 비판했습니다. <뉴욕 타임즈>나 <더 타임즈> 등의 비교적 점잖은 언론에서부터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는 개인들까지 이러한 비판과 분노를 공유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사진가 우마르 압바시에게 돌아왔습니다. 흥미롭게도 비판의 지점은 사진가가 만들어낸 '사진'이라기보다 오히려 사진가의 '행위'에 있었습니다. 즉, 당신은 왜 사람을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불공평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플랫폼에는 압바시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참혹한 장면을 보지 않기 위해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한기석 씨가 전철에 치어서 질질 끌려간 이후, 몰려든 사람들은 한기석 씨에게 인공호흡을 시도하는 의사를 둘러싸고 스마트폰 카메라로 연신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압바시는 그들에게 뒤로 물러나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주장합니다. 

 


다행히 압바시는 독수리가 노리고 있는 수단 소녀를 찍은 후 자살했던 케빈 카터와는 달리 꽤나 뻔뻔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태연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습니다. 너무 멀었고, 자신은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들고 있었다. 자신은 한기석 씨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사진을 찍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며 자신은 단지 기관사에게 플래쉬로 경고하려 했을 뿐이었다는 것이 그의 변명이었습니다. 압바시는 단지 메모리 카드를 편집자에게 건냈을 뿐, 사진을 싣겠다고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눈을 감을 때마다, 나는 죽음을 떠올린다" 그는 말했습니다. "사진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사진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광각 렌즈로 인해 원근감이 강조되었을 뿐 사실 이 사진이 한기석 씨의 바로 뒤에서 찍은 것이라는 점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iMediaEthics라는 한 인터넷 매체에서 검증한 결과 마지막 사진을 찍은 압바시는 한기석 씨와 삼 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압바시가 찍은 첫 사진에는 플래쉬가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는 곧 플래쉬를 장착하거나, 혹은 켰습니다. 압바시는 기관사에게 경고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글쎄요, 좀더 드라마틱한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고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뛰어가지 않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마흔아홉 장의 사진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진이 특별한 것은 비판의 초점이 현실이나 가해자가 아닌 사진가를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참혹한 장면을 찍은 수많은 사진 이미지를 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잔혹한 사진'을 보고 있다고 느낄 뿐, 그 광경에 있었던 사진가를 불러내어 해명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관습적으로 '참혹함을 찍는 사진가'의 존재를 인식하는 대신 그냥 그 참혹한 장면에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처럼 사진가에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사진가는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침입해 들어가지만, 한편으로는 기록자를 자처하며 윤리적 판단을 유보하고 카메라 뒤에 숨을 수 있습니다. 사진가에게 있어 카메라는 양가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진의 경우 사람들은 가해자인 데이비스나 일말의 책임이 있는 뉴욕 지하철 당국에게 분노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게 압바시에게 분노하고, 그를 끌어내어 해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보기 힘든 일입니다. 

 

사진의 역사에서 이런 경우는 드뭅니다. 위에서 말한 케빈 카터의 경우와 이번의 우마르 압바시의 경우 정도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그들은 비판받고 있을까요? 우마르 압바시가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그가 현장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보다, 혹은 그것을 사진을 통해 구경할 수밖에 없는 우리보다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죽음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지닌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들은 사진을 찍었을 뿐입니다. 더욱 참혹한 사진을 찍었던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사진가들이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낼 수 있는 힘을 지닌 것도 아닙니다. 우마르 압바시가 한기석 씨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아직 전적으로 증명된 것도 아닙니다. 


저는 이 분노의 이유가 사진에 대한 일종의 오해에서 나오는 배신감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우리는 보도사진이 언제나 현실을 바꾸고 개선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어 왔습니다. 하지만 케빈 카터와 우마르 압바시의 경우, 우리는 처음으로 '사진을 위해 현실을 희생시킨' 혐의를 받는 사진을 만납니다. 사진이 인간을 배신한 셈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분노는 그 배신의 징후를 포착한 데 있다는 것이 저의 짐작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사진을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목숨을 거는 사진가의 이미지는 로버트 카파를 비롯한 전쟁사진가들에게 그 원형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매체를 통해 강화되었고, 그들은 일종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식의 상업적인 영웅 이미지가 백해무익하다고 믿는 편인데, 이는 이런 이미지가 사진의 생산 구조와 유통되는 맥락, 자본의 개입 등을 은폐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영웅 이미지는 사진을 보는 이들 뿐 아니라 사진가들에게도 상당한 강박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윤리적 문제는 결국 어떤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하는가의 문제로 귀결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은 사진가 몇몇의 고민만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한기석 씨의 시신을 향해 수많은 이들이 스마트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댄 것처럼, 우리는 최초로 모든 인류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시대를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현실은 우리를 삼켜 답이 없는 고민의 구덩이에 토해냅니다. 아마도 디지털 시대 사진비평의 책무는 우리 모두에게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것일 터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뾰족한, 그리고 구체적인 대답을 해주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과연 사진가들은, 즉 카메라를 쥔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 현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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