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를 비난하는 대심문관. 러시아 현대화가의 그림

 


 

 

 

사형수 도스토예프스키 

 

영하 20도의 날씨, 총살대로 사내들이 끌려왔다. 그들은 정부가 금한 불온한 모임에서 불온한 편지를 낭독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집행관이 판결문을 낭독했다. 마지막 5분이 주어지고, 28세의 한 사형수는 그 시간을 어떻게 쓸지 생각했다. 그는 2분은 동료와의 작별에 쓰고 2분으로 자기의 삶을 돌아보고 마지막 1분은 지상의 풍경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때 형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교회의 금빛 지붕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그 광경에 완전히 매혹된 그는, 지금 자신이 죽지 않는다면 1분 1초를 100년처럼 여겨 단 한 순간도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1초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집행관이 손수건을 흔들었다. 

 

"황제의 명으로 형을 중단한다!" 

 

이 사형수의 이름은 도스토예프스키였다. 그는 지식인 급진주의자 그룹의 멤버였고,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이 풋내기 지식인들을 유형에 처하기로 했으나 '황제의 자비심을 보여주고자' 총살 연극을 꾸몄다. 황제는 북 소리부터 형장으로의 행진 등 세부사항까지 관여썼다. 덕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죽음의 문턱까지 가서 생의 어느 순간보다도 강렬한 체험을 했다. 이 체험은 작가로서 그의 의식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사형 대신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또 4년간 몽골 국경에서 강제 군 복무 생활을 해야 했다. 감옥, 유형, 군대에서 그는 러시아의 사상범, 범죄자, 가난한 민중들을 만났다. 평생 그를 따라다닌 간질 발작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또 다른 체험이었다. 소설 속 생생한 간질 묘사에는 자신의 경험이 반영되었다. 게다가 그는 평생 경제적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방대하지만 조금 장황해진 것도 원고를 길게 써야 돈을 더 받는 그의 처지와 무관하지 않다. 톨스토이처럼 귀족 지주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돌봐야 할 친척이 많았다는 점 또 도박으로 자주 돈을 날린 것도 그가 가난한 이유였다. 

 

그의 이 도박광(狂)은 참 별나서, 스물다섯 살이나 어린 아내가 혼수로 가져온 귀금속까지 가져가 하룻밤에 탕진하고는, 돌아와 아내의 무릎에 쓰러져 "이런 남자를 당신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지"하며 꺼이꺼이 울었다고 한다. (착한 아내는 이런 그를 언제나 용서하고 달래주었으며, 나중엔 직접 출판사를 차려 남편이 돈 걱정을 덜고 집필에 전념하게 해 주었다) 

 

이처럼 삶의 극단을 두루 경험한 그였기에, 정신분석학이란 말조차 없던 시대에 탁월하게 인간의 복잡성을 이해했고 그려냈던 게 아닐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영혼의 바닥을 들여다본 사람'이라는 찬사를 듣는다. 사형수로서의 체험을 포함한 인생의 골짜기들이 그의 이러한 시각에 영향을 미쳤다. 니체, 프로이드, 사르트르 같은 20세기 사상가들은 그를 기꺼이 정신적 지주라 부른다. 

 

 

 

대심문관의 왕국을 넘어서 

 

이 소설은 '카라마조프적'이라는 형용사를 만들었다.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한 합리주의로부터 육욕과 쾌락에 삶을 쏟아 붓는 동물성, 고귀한 종교적 열정과 인류에 대한 사랑까지 이 모든 극단을 포괄하는 정신세계, 그것을 카라마조프적이라고 부른다. 한 인간은 결코 하나의 정신 원소로 결정되지 않으며 복잡한 충동의 결합체다. 카라마조프가의 세 형제는 그 각각의 면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첫째 드미트리는 분출하는 육욕의 사내다. 그는 명예를 위해 결투를 마다않고 여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인물이다. 둘째 이반은 무신론자이며 합리주의자다. 그는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주장한다. 신도 불멸도 믿지 않기에 따라서 도덕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셋째 알료샤는 작가가 가장 아름답게 그려내려 한 인물이다. 그는 수도원에서 방금 세상으로 돌아왔고, 신과 아이들과 인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이 각각의 인물들은 또 그 속에 상반되는 충동을 지닌다.

 

소설의 큰 줄기는 살인 범죄이며, 추리소설 같은 형식 덕에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읽힌다. 세 명의 전혀 다른 형제를 낳은, 그 자신도 탐욕과 속물성과 순수를 동시에 지닌 아버지 표도르가 집에서 살해당한다. 용의자는 아버지와 연적 관계인 큰아들 드미트리로, 그는 체포되어 결국 20년간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진범은 따로 있었으니, 표도르의 사생아이자 셋의 숨겨진 형제이며 진정한 악인인 스메르자코프가 살인자였다. 

 

범인은 아니지만 세 형제 모두 범인의 행동을 조장했거나 방조했고, 그들에게는 고통스런 책임이 따른다. 드미트리는 감옥으로, 이반은 정신분열증으로, 알료샤는 양심의 가책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의 젊은 세대가 러시아의 낡은 권위를 해체하며 일으키는 혼란과 격정을 ‘아버지 살해’에 빗대어 그려냈다. 그는 서로 극단으로 치닫는 힘과 의식들을 정직하게 대면시켰고, 그 힘들을 미래의 희망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그는 이 사명감으로 폐결핵과 싸우며 하루 10시간 이상 글을 쓰다가 책을 완성한 이듬해 61세로 눈을 감는다. 

 

소설의 백미가 어디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내게 말해보라면 단연 이반이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서사시 '대심문관'편이다. 무신론자인 이반은 과연 신의 조화가 인간이 실제로 겪는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지 묻는다. 이반은 한 장군이 자신의 개에게 돌을 던진 소년을 그의 엄마가 보는 앞에서 그 개로 물어 죽여버린 예를 든다(실제 러시아에서 있었던 일이라 한다). 이런 사회에 조화라니, 그런 조화는 죽어버려라! 이반은 대심문관의 입을 빌려 신을 거부한 인류의 왕국을 만들려는 의지를 표출한다.

 

이단자를 화형에 처하던 15세기 스페인, 갑자기 예수가 나타난다. 민중들은 그를 알아보고 구원을 청한다. 그러나 늙은 대심문관 추기경은 병사를 풀어 예수를 지하 감옥에 가둔다. 그리고 예수에게 “내일 너를 화형에 처하겠다”라고 선고한다. 

 

"너는 기적을 베풀어 민중에게 빵을 줄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빵으로 그들의 자유를 사지 않으려 한 것인가. 하지만 인간은 나약하다. 우선 배고픈 걸 해결해야 영혼의 자유도 누릴 수 있다. 너는 빵을 거부할 정도로 의지가 높은 극소수만 중시한 것인가. 민중에게 빵을 약속한 것은 우리, 이 지상의 권력이다. 민중은 빵을 위해 우리에게 그들의 자유를 바쳤다. 너는 우리가 인류에게 만들어준 지상의 왕국을 방해할 권리가 없다." 대심문관의 질타는 카랑카랑하고, 쉽게 반박할 수 없다.  

 

"천상의 빵의 이름으로 수천, 수만 명의 인간들이 너의 뒤를 따른다고 해도, 천상의 빵을 위해 지상의 빵을 멸시할 만한 힘이 없는 수백만 명, 수억 명의 인간들은 어떻게 될까? 너에게는 고작해야 수만 명에 불과한 위대하고 강한 자들이 더 소중하고, 나머지 수백만 명, 약하지만 너를 사랑하는, 바다의 모래알 같은 수많은 인간들은 그저 위대하고 강한 사람들을 위한 재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냐?"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권 

 

대심문관의 논리는 인류가 소위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걸어온 역사 그 자체이다. 우리는 부와 질서와 편안함을 구하기 위해 제도와 산업, 우리를 대신할 권력을 만들었고, 거기에 우리의 자유를 넘겨주고 우리를 통제해달라고 청했다. 이 삶에 익숙해지고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하지 못한 채 우리는 이것이 유일한 방식이고 '자유'라고 믿는다. 가령 오늘날 저 후쿠시마의 재앙과 밀양 송전탑을 둘러싼 싸움을 보면서도 '원전은 불가피하다'라고 믿는 우리는, 대심문관의 발밑에 자유를 바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예수는 대심문관에게 논리로 반박하거나 증오로 화답하지 않는다. 대심문관의 말이 끝나자 예수는 조용히 그에게 입을 맞춘다. 당황한 대심문관은 ‘어서 가라, 다시는 오지 마라, 절대로!’하고 예수를 풀어준다. 

 

대심문관은 왜 예수를 풀어줬을까. 예수는 왜 한 마디 말 없이 입맞춤으로 대답을 대신했을까. 그 입맞춤은 무얼 의미할까. 나는 예수가 대심문관이 잊고 있는 것을 상기시켰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을 진정 자유롭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천상의 빵이나 지상의 빵 이전에, 사랑이요 몸과 몸의 만남이요 타인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라는 것을. 

 

 

▲ 영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958년작). 율 브린너가 첫째 아들 드미트리로 열연한다. 

 


 

 

글쓴이 오준호

 

노동자의 변호사들』, 반란의 세계사』, 소크라테스처럼 읽어라』, 『진짜 민주주의』 등을 쓰고, 『보이지 않는 주인』,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등을 번역했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역사, 민주주의 등 여러 주제에 대해 책을 쓰고 번역하고 있으며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저항과 혁명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했다.

* 이 글은 환경정의 소식지 『우리와 다음』에 기고한 서평입니다. 원 출처 바로 가기 (오준호 블로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