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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북스의 책/경제

『황금 족쇄』- 금본위제와 대공황, 1919~1939년


황금 족쇄 

금본위제와 대공황, 1919~1939년

배리 아이켄그린 지음 | 박복영 옮김 

미지북스 | 803쪽 | 38,000원




전간기 금본위제가 대공황을 초래했다!

국제 금융의 대가 배리 아이켄그린의

학문적 정수이자 가장 정확한 대공황의 역사

 

이 책 『황금 족쇄』는 국제 금융의 대가 배리 아이켄그린(UC 버클리대 경제학과 교수)이 대공황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분석한 역작으로 금본위제 연구의 기초가 되는 저작이다. 저자는 1929년의 불황이 왜 대공황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금본위제라는 세계적 범위의 고정환율제가 정책 당국의 손발을 묶는 족쇄 역할을 함으로써 팽창적 경제 정책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 핵심이었다고 말한다. 금본위제하에서라도 국제적 정책 공조가 이루어졌다면 대공황을 피할 수도 있었는데, 1차 대전이 남긴 국가 간의 반목과 갈등, 그리고 글로벌 경제에서 자신이 가진 지위와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미국의 협소한 시각이 국제적 협력을 불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계속되는 경기 침체로부터 회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금본위제의 역사는 확장적 경제 정책과 국제적 협력 및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역사의 전범(典範)으로서 중대한 경제사적 통찰을 제공한다. 




 

국제적 시각에서 대공황을 분석한 최초의 경제사,

황금 족쇄가 드디어 한국어로 출간되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특히 주목받은, 국제 금융 및 통화체제 전문가 배리 아이켄그린의 역작  황금 족쇄: 금본위제와 대공황, 1919~1939년이 한국어로 출간되었다. 황금 족쇄는 1930년대 대공황을 국제적 시각에서 해석한 최초의 책으로, 미국 중심적 시각에서 대공황을 이해한 밀턴 프리드먼과 안나 슈워츠의 대공황, 1929~1933년』 등의 기존 입장을 뒤집는 ‘가장 정확한 대공황 역사서’이다. 1992년에 미국에서 첫 출간된 이 책은 배리 아이켄그린의 학문적 정수이자 이후 집필한 모든 도서의 바탕이 되는 책이다.

 

과연 금본위제의 붕괴가 금융 위기의 도화선이었는가?

그동안 금본위제가 붕괴되면서 금융 안정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자본 도피가 일어나는 금융 위기가 전 세계로 번졌다고 흔히 생각해왔다.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금본위제를 금융 안정과 동의어로 여기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1920년대 금본위제는 안정의 동의어이기는커녕 전간기 금융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위협하는 일차적 요인이었다.

 

대공황은 1914년 1차 대전 발발 이후 전개된 

일련의 세계적 사건들이 낳은 필연적 결과였다

황금 족쇄는 미국의 주식시장 폭락으로 인한 거대 경제 불황으로 바라보는 기존 대공황론을 뒤집는 세계사적 관점의 ‘대공황의 역사’를 쓰고 있다. 저자 아이켄그린은 대공황을 1차 대전 발발 이후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불안정 요인들이 상호작용한 결과이며 1914년 이후 전개된 일들의 필연적 결과였다고 본다. 특히 1차 대전 이전의 세계 경제를 뒷받침하는 통화체제인 금본위제가 대공황을 일으킨 주요 요인이었음을 보여주고, 금본위제와 다른 요인들이 대공황을 발생, 증폭시킨 과정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1차 대전 이전 사반세기 동안 세계 경제 안정을 이끌던 국제통화시스템, 즉 금본위제가 어떻게 대공황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바뀌게 되었을까? 아이켄그린은 금본위제의 성공적 작동 요인들이 1차 대전 이후 크게 약화되었다고 한다.

 

전전(戰前) 금본위제는 왜 성공적이었는가?

1차 대전 이전의 금본위제(전전 금본위제 또는 고전적 금본위제라고도 한다)를 설명하는 일반적 설명은 ‘헤게모니 안정론’에 기초한 찰스 킨들버거의 설명이었다. 경제 안정을 제공할 자세와 능력을 가진 압도적 경제 강대국, 즉 헤게모니 국가인 영국이 있었기에 금본위제가 잘 작동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전간기에는 영국이 너무 약해져서 안정시킬 능력이 없었고, 새로 부상한 미국은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아이켄그린은 전전 금본위제의 역사적 과정을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안정의 결정적 요인은 신뢰와 국제 협력이었음을 밝혀냈다. 즉 전전 금본위제의 안정은 영국과 잉글랜드은행의 헤게모니 때문이 아니라 신뢰와 국제 협력 덕분이었다.

 

전전 금본위제의 신뢰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금본위제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정부가 국제수지 균형을 우선적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중심부 국가에서 정책 당국이 중앙은행의 금 준비금을 방어하고 통화의 금 태환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금본위제 방어와 실업률 감소 사이에 정책 갈등이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실업은 개인의 실패 문제라고 생각했고 경기 변동이 고용 전망에 영향을 미친다거나 경기 변동을 이자율이나 통화 조건과 연관 짓는 인식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금본위제 방어를 위한 긴축적 통화정책으로 실업이 야기되는 것을 반대할 수 있는 사람들(노동자 계급)이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러다 1910년대 무렵부터 노조 설립과 선거권의 확대로 일자리 상실에 취약한 사람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향상되었고, 높은 이자율이 투자 위축과 경기 둔화를 가져온다는 인식이 퍼졌다. 그럼에도 국내 목표보다 국제수지 균형을 우선하는 중앙은행가들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고용과 경제 안정 등 국내 목표에 대한 요구가 반영되지 않는 특정한 정치권력 지형과 국제수지 균형을 우선시하고 경기 변동, 통화 조건과 고용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한 인식 틀의 결합이 금본위제에 대한 신뢰의 기초가 되었다.

 

전전 금본위제의 위태로운 시기마다 국제 협력이 위기를 막았다

1차 대전 이전의 국제통화체제는 런던의 헤게모니적 지배 체제가 아니라 선도적 국제 금융 중심지인 런던과 라이벌인 파리, 베를린이 함께 이끄는 ‘분산된 다극 체제’였다. 평온한 시기에는 잉글랜드은행이 국제적 최종 대부자 기능을 하면서 국제 통화 체제를 이끌었지만, 1890년과 1907년처럼 세계 신용 상황이 심하게 위축된 시기에는, 각국 중앙은행과 정부들이 명시적이고 의식적인 협력을 함으로써 위기를 막았다. 어음을 할인하거나 금을 빌려주는 식으로 다른 금본위제 국가의 자원까지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는 잉글랜드은행이 국제적 최종 대부자가 아니라 국제적 최종 차입자가 되어 프랑스, 독일 등의 지원에 의존했다.

 

전쟁 후 정치적 경제적 변화가 전간기 금본위제의 불안정을 불러왔다

1차 대전으로 일련의 정치적 경제적 변화가 발생했다. 전시 정부의 조합주의 전략, 선거권의 확대와 노동자 정당의 성장으로 ‘고용을 목표로 하는 정책’ 채택 압박이 강해졌다. 이제는 국제수지 목표가 우선시될지가 명확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신뢰성이 의심받았다. 중앙은행은 과거와 같은 독립성을 갖지 못했고, 몇몇 나라에서는 인플레이션의 대혼란과 경제적 혼돈이 1926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자 프랑스와 독일 등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위해 중앙은행의 손을 과도하게 묶는 법률을 도입했고, 이는 국제 협력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재정 부담의 합의가 깨졌다. 수입 관세에 의존하던 세금이 수준과 구성 모두에서 급격히 변했고, 소득이 대대적으로 재분배되었다. 1차 대전 이후 재정 부담의 분담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없었기 때문에, 금본위제 방어를 위해 세금 인상이나 정부 지출 삭감을 한다는 보증이 없어졌고, 그에 따라 금본위제에 대한 신뢰성이 약해졌다.

다시 말해서, 전전 금본위제의 안정이 특수한 경제적 정치적 세력 배치 덕분이었듯이, 전간기 금본위제의 불안정 역시 정치적 경제적 변화 때문에 생겨났다. 국내의 정치적 압력이 정부의 국제경제정책 선택에 영향을 미쳤고, 정부 정책 의지의 신뢰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로 정책의 효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공황에 맞선 국제 협력을 가로막은 세 요인

국내의 정치적 압박, 전쟁 채무와 배상금 문제, 모순된 인식 틀

변화된 정치 환경에서, 잃을 게 많은 국내 이익집단들은 국제 협력에 필요한 경제정책 조정을 지연시켰고, 전쟁 채무와 배상금 문제는 늘 국제 협상을 가로막았다. 또한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각국의 서로 다른 인플레이션 경험은 금융과 경제의 관계, 통화 관리를 위한 역할에 대해 서로 다른 인식을 하게 했다. 인플레이션을 지속적으로 겪은 프랑스는 국제 협력 때문에 금본위제의 제약이 무력화되었다고 판단한 반면, 지속적 인플레이션 없이 전전 평가를 회복한 영국은 금본위제에 대한 맹목적 집착 때문에 필요한 유동성이 공급되지 못한다고 봤다. 게다가 미국 연준의 국제무대 등장 또한 이전의 협력적 분위기가 유지되지 못하게 했다.

한편, 1920년 브뤼셀 국제회의와 1922년 제노아 국제회의 등 국제 협력을 위해 제도를 마련하려는 회의가 있었지만, 서로 다른 인식 틀과 전쟁 채무/배상금 논란 때문에 이 회의들은 좌초되었다. 유일한 협력 제도가 1930년 국제결제은행(BIS) 설립이었으나, 이 또한 마찬가지 이유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국제 정치적 논란은 개별 국가 간 협력조차 무산시켰는데, 1931년에 프랑스, 영국, 미국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협조 융자를 하려던 시도가 좌절된 것이 그 예이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관세 동맹을 포기해야 한다는 프랑스의 주장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융자는 이뤄지지 않았고, 독일의 배상금 문제가 독일에 대한 융자를 막았다.

 

1929~1930년 경기 침체는 미국의 긴축정책 전환 결과가 아니라 

세계적 긴축정책 전환의 결과였다

1차 대전 이후 국제수지 결제 패턴의 변화가 있었다. 1차 대전으로 제조품과 농업 분야의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전쟁 배상금이 전쟁 채무의 상환 형태로 미국으로 유입되면서 미국의 포지션은 크게 강화되었다. 전후 초기에는 미국의 대부가 이어졌고, 그 덕분에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 재건과 1차 산품 생산국인 남미 국가들의 가격 대응이 가능해졌다. 즉 1924~1927년 미국은 저금리와 확장적 통화정책으로 세계 경제의 회복을 도왔다. 그러다가 1928년 연준의 관리들은 1920년대 월가의 대활황에서 보이는 변덕스런 금융 투기를 문제 삼으면서 돈줄을 죄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대량 금 유입까지 겹치면서, 여타 나라들은 금과 외환 준비금을 잃고 통화의 금 태환성이 위태로워졌다. 금본위제가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자 일부 유럽 국가들과 많은 남미 국가들 또한 긴축적 재정정책을 도입했다. 이 같은 전 세계적 정책 전환이 긴축의 충격을 가져왔고, 1929년 경기 후퇴의 서막을 열었다.

따라서 1929~1930년 경기 침체는 단순히 미국이 통화정책을 긴축으로 전환한 결과가 아니라 세계적 긴축정책 전환이 낳은 결과였다. 1929년 늦여름 혹은 초가을에 미국에서 시작된 경기 하락은 세계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12개월 동안이나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정책이 국제금본위제를 매개로 미국 정책과 연계되어 있음으로써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연준이 월가 붐이 가라앉을 때까지 이자율을 계속 인상하자 유럽과 남미의 충격은 증폭된 것이다. 흑자 국가가 조정의 부담을 적자 국가에 전가하여 긴축을 강요하는 금본위제의 비대칭성이 1928~1929년에 발생한 것이다.

 

대공황기 정부의 늑장대응은 금본위제 때문이었다

대공황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미국, 프랑스, 영국의 통화정책은 소극적이었다. 반면에 세금 인상과 지출 축소를 하면서 재정정책은 긴축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결국 정책은 수요의 위축을 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했다. 그런데 이런 대응은 금본위제를 유지하면서 벌어진 것이었다. 즉 한 나라의 일방적인 통화량 확대나 공공 지출 증가는 국제수지를 적자로 만들어 금본위제를 위태롭게 할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방향의 통화정책/재정정책은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기 부양을 위해 금본위제를 희생하느냐 아니면 금본위제 방어를 위해 경제 안정 조치를 포기하느냐의 딜레마가 있었고, 이 딜레마를 피하는 길은 국제 협력에 있었지만 그 유일한 기회였던 1933년 런던 경제 회의는 전쟁 채무 문제와 서로 모순된 인식 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전간기 금본위제의 특수한 구조인 금환본위제가 국내 금융시스템의 취약성을 가중시켰다. 주로 미국 달러, 프랑스 프랑, 영국 파운드를 태환성 있는 외환으로 보유할 수 있게 되면서, 어느 한 나라가 어려움에 직면하면 약세가 된 그 통화를 팔아치우는 일이 벌어졌고, 그래서 대외 포지션의 사소한 악화라도 외국 중앙은행들이 외환 준비금의 구성을 바꾸기로 마음먹으면 심각한 문제로 변할 수 있었다. 즉 로버트 트리핀이 강조한 대로, 금 태환에 입각하지만 유동성 증가를 위해 외환에 의존하는 독특한 구조가 동태적 불안정 문제를 드러냈던 것이다.

 

금본위제의 소멸이 대공황에서 회복하는 전제조건이었다

1930년대에 금본위제 포기로 가능해진 환율 절하가 금본위제 이탈 국가들의 상황을 개선시키지도 못한 채 남은 국가들의 불황만 악화시켰다는 일반적 인식은 실제 증거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금본위제에서 이탈한 나라들에서 물가는 안정되었고 산출, 고용, 투자, 수출은 금 평가를 고수한 나라들보다 더 신속히 회복했다. 이는 통화 절하 덕분에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확정적 조치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금 태환을 방어하기 위해 국내 신용을 축소할 필요가 더 이상 없었고, 더 이상 공공 지출을 줄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경기 회복은 느리게 진행됐는데, 이는 통화 절하 자체가 아니라 더 확장적인 정책을 추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중과 정책 결정자들 모두에게 금본위제의 포기가 인플레이션의 위협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은이

배리 아이켄그린(Barry Eichengreen)

국제 금융과 통화 체제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는 미국 경제학자이며, UC버클리대 경제학과 교수이자 경제사학회 회장이다. 광범위한 역사 분석을 통해 현재의 금융시스템을 살피는 연구를 해왔다. 1997~1999년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수석정책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전미경제연구소(NBER) 연구위원이다. 2010년에 국제슘페터학회로부터 슘페터상을 수상했고, 포린폴리시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 100명’에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은행의 자문 교수이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는  글로벌라이징 캐피털 달러 제국의 몰락 글로벌 불균형 등이 있으며,  파이낸셜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포린어페어스 신디케이트프로젝트 등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옮긴이

박복영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대공황기 유럽의 금본위제 붕괴 과정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는 이 책의 저자인 배리 아이켄그린의 초청으로 UC버클리대에서 방문학자로 1년간 체류하면서 공동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서 10여 년간 재직했으며, 특히 글로벌 금융 위기와 유럽 재정 위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국제경제실장을 맡아 세계 경제 동향을 면밀히 분석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이며,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의 관계, 국제 통화 질서, 세계적 빈곤 문제 등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국제경제 환경의 변화와 한국의 대외경제정책 방향』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글로벌 불균형 대공황 전후 세계경제(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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