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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북스의 책/인문

[중국 군벌 전쟁] - 현대 중국을 연 군웅의 천하 쟁탈전 1895~1930

중국 군벌 전쟁

현대 중국을 연 군웅의 천하 쟁탈전 1895~1930

권성욱 지음 | 1396쪽 | 48,000원



현대 중국을 만든 용광로, 

20세기의 "춘추전국시대"를 가다!


청조 멸망 후 중국은 전국에서 할거한 군벌들로 조각나 있었다. 황제가 되고자 한 위안스카이, 동북왕 장쭤린, 중원의 패자 우페이푸, 남방의 혁명가 쑨원 등 전국 각지의 군벌들이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경쟁했다. 쑨원과 장제스가 지도하는 국민당은 혁명을 완수하고 현대적인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노력을 수십 년간 거듭했다. 마오쩌둥의 공산당 역시 한쪽에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중국 군벌 전쟁은 현대 중국이 그 형태를 갖추어가는 ‘용광로’와도 같은 시기였다.

군사력으로 볼 때 가장 약체였던 국민당은 쑨원마저 죽고 사분오열의 위기에 처했지만, 장제스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벌 전쟁을 감행한다. ‘북벌은 망상’이라며 모두가 코웃음 치는 가운데 시작된 장제스의 통일전쟁은 수많은 역경과 난관 속에서도 거대한 성공으로 나아간다. 마침내 장제스는 중국 최대 군벌인 만주의 장쭤린과 천하의 패권을 놓고 최후의 전투를 벌인다.




누가 중국을 통일할 것인가?

『중국 군벌 전쟁』은 청조 말부터 중일전쟁 발발까지 20세기 초반의 중국 역사를 다룬다. 특히 전국 각지에서 할거한 군벌들로 갈기갈기 찢어진 중국을 삼민주의 혁명의 이념 아래 근대적인 국민국가로 통일하려 했던 쑨원과 장제스의 군사적 활약상을 중심으로 개괄한다.

중국 현대사는 우리에게 분실된 블랙박스와도 같다. 특히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망한 뒤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할 때까지의 역사는 거의 공백이나 다름없다. 중국에서조차 근대사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다. 기껏해야 쑨원과 마오쩌둥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신해혁명 과정의 혼란상과 공산혁명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설명할 뿐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허구와 신화가 있다.

▲ 우창봉기에 참여한 혁명군 병사들


마오쩌둥의 투쟁사는 로빈후드 이야기처럼 영웅적으로 채색되었지만 장제스와 대부분의 군벌은 제국주의 열강과 결탁하여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은 매판 세력으로 치부되었다. 마오쩌둥의 오합지졸 농민 군대가 최신 무기를 갖춘 장제스의 군대를 격파한 것은 ‘위대한 신화’로 포장되었지만, 장제스 또한 북벌전쟁에서 그에 못지않게 빈약한 무기와 오합지졸을 이끌고 훨씬 잘 무장하고 막강했던 군벌 세력을 이겼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 『중국 군벌 전쟁』은 1,4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서 그동안 전혀 조명받지 못했던 중국의 군벌들을 저공비행으로 살펴보며, 난세를 살았던 각양각색의 인물 군상을 펼쳐 보인다. 이 책에 수록된 135장의 사진 및 도판 자료와 27개의 전황 지도는 독자들이 이 시대를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현대판 “춘추전국시대”, 군벌 시대의 개막

신해혁명으로 선통제 푸이가 퇴위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었을 때, 그 과실을 차지한 쪽은 혁명파가 아니라 청조 내에서도 수구파였던 위안스카이였다. 그는 탁월한 정치가이자 유능한 관료였지만 공화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다시 황제가 되고자 하는 헛된 꿈을 꿨다. 그의 역량은 중국의 위기를 극복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위안스카이가 죽자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각지의 군사 실력자들이 천하 패권을 놓고 싸움을 시작했다. ‘군벌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1922년 제1차 펑즈전쟁 당시 장쭤린과 우페이푸는 서로를 향해 ‘군벌’이라고 불렀다. 장제스는 북벌전쟁에 나서면서 북방의 군사 지도자들을 ‘군벌’이라고 불렀으며, 공산당은 그 장제스까지 포함해 죄다 군벌로 치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대방을 향해 군벌이라고 부르면서도 자기 자신은 군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위안스카이(앞줄 가운데)가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한 후 각국 공사들과 찍은 사진


중국 근대사에서 ‘군벌’이란 중국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으며 국가와 민족에 큰 해악을 끼친 악당이라는 것이 오랜 통념이다. 실제로 군비 확보에 혈안이 되었던 많은 군벌들은 총칼을 이용해 온갖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특히 폐해가 가장 심했던 쓰촨성의 경우, 심지어 100년 뒤에 낼 세금까지 미리 징수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벌들이 폭정을 일삼았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북왕 장쭤린이다. 그는 제 이름 석 자도 쓰지 못하는 마적 출신이었지만 아편 밀매를 금지하고, 교육을 보급하고, 근대산업의 육성에 힘써 동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광둥 군벌 천중밍은 민중 계몽가였다. 산시성 군벌 옌시산은 낙후한 그곳을 발전시켜 전국에서 손꼽히는 모범 성으로 만들었다. 윈난 군벌 룽윈은 민주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한때 중원을 호령하던 군벌 우페이푸는 대표적인 반일 민족주의자였다.

▲ 앞줄 왼쪽부터 동북왕 장쭤린, 산둥군벌 장쭝창, 중원의 패자 우페이푸


대개 군벌 내전이라고 하면 소말리아나 아프가니스탄, 시리아처럼 무법천지 세상을 연상하게 된다. 이 나라들은 질서가 무너지면서 정치와 경제가 마비되고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군벌 시대의 중국은 로마제국의 멸망처럼 한 국가가 붕괴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새로 태어나는 과정이었다. 청조 몰락 후 각지에서 군벌들이 일어서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중국이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든 것은 아니었다. 군벌들의 통치가 비록 봉건적이고 억압적이었다 해도 중국이 외세의 침략과 식민 지배를 경험하지는 않았다. 군벌들은 흉포한 도적 떼가 아니라 한 지역을 통치하는 정치 지도자들이었다. 마오쩌둥 신화에 가려지긴 했지만 군벌 시대는 『초한지』, 『삼국지』의 재현이었다. 항우와 유방의 싸움을 떠올리게 하는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파란만장한 대결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다. 위안스카이를 몰락시킨 차이어, 문무를 겸비한 수재 장군 우페이푸, 천하통일의 문턱까지 갔던 장쭤린, 장제스와 천하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붉은 장군 펑위샹, 북벌군을 거의 패배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남방의 명장 쑨촨팡 등 군벌 시대는 기라성 같은 군웅의 천하 쟁탈전 시대였던 것이다.

▲ 왼쪽부터 서북왕 펑위샹, 북벌군 총사령관 장제스, 산시군벌 옌시산

 

장제스는 어떻게 중국을 통일했나?

쑨원은 중국을 통일하고 근대적인 공화국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에 일평생 헌신했다. 쑨원은 혁명의 상징이자 구심점이었지만,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군벌들이 지배하는 중국의 현실은 그의 이상과 너무나 멀었다. 쑨원은 무수히 많은 봉기를 일으키고 북벌전쟁을 선포했지만 대부분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는 군사적 역량도, 자원도 부족했다. 심지어 천중밍 같은 군벌에 의해 그의 근거지인 광둥성에서조차 쫓겨날 정도였다. 국공합작을 통한 소련의 원조가 아니었다면 쑨원은 그의 뒤를 이어 장제스가 북벌을 완수할 물적 기초를 닦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쑨원은 장제스를 쓸 만한 인재로 여겼을 뿐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 쑨원과 그 뒤에 서 있는 젊은 장제스


반면 무명의 군인이었던 장제스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남방을 무력으로 평정해 국민당의 근거지를 확고히 했고, 북방 군벌들 간의 분열을 이용해 단기간에 북벌을 성공시켰다. 1926년 북벌이 개시될 때 국민군은 병력이 8만 명에 불과했으나 북방의 군벌들은 100만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경제력, 군비, 장비, 무기 생산 측면에서 북양군벌들은 압도적이었다. 장제스는 1년 안에 북벌 승리를 장담했으나 남들 눈에는 터무니없는 허세로 보였을 뿐이다. 당시 북벌군을 지원하던 소련 고문단의 평가에 따르면, 북벌군은 3분의 1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나폴레옹 시절과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껏해야 광둥성과 후난성 접경에서 몇 차례 국지전으로 끝날 것으로 예상했고, 변경의 성 한두 개로 중국 전체를 상대해 싸우겠다는 발상이라며 비웃었다.

▲ 북벌군 병사들. 낡고 해진 군복을 걸치고 발에는 짚신을 신었다. 등에는 비를 막기 위한 삿갓.


그러나 북벌은 단순한 통일전쟁이 아니라 혁명전쟁이었고,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이 북벌군을 지지하고 협조했다. 무엇보다 북벌군은 강한 군대였다. 장제스는 여러 차례의 군사적 패배, 정지적 하야, 배신과 음모 등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북방의 군벌들을 차례차례 꺾어갔다. 장제스는 마침내 동북왕 장쭤린을 베이징에서 몰아내고 1928년 6월 북벌 종료와 국가 통일을 선포했다. 북벌에 나선 지 1년 11개월 만이었다. 나중에 다시 벌어진 신군벌 내전에서 장제스에게 반기를 든 리쭝런의 말에 따르면, 북벌을 완수한 직후 장제스는 베이징에 있던 쑨원의 묘를 찾아가 한없이 울었다.

장제스는 수많은 군사적, 정치적 시련을 겪으면서 일개 장교에서 국민군 총사령관으로, 노련한 정치가로 성장했다. 쑨원 사후에 국민당 내부에는 장제스의 수많은 정적들이 있었으며, 특히 공산당은 장제스를 제거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밖으로는 장쭤린, 우페이푸, 펑위샹 같은 대군벌들과 싸워야 했고, 안에서도 탕성즈, 왕징웨이, 공산주의자들 같은 경쟁자들과 싸워야 했다. 그는 북벌 개시 전(중산함 사건), 북벌 도중(상하이 쿠데타), 북벌 종료 후(중원대전) 등 거의 모든 국면에서 적들로부터 고립무원 상태에 처하기도 했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특유의 방식으로 모두 돌파했다. 장제스는 이러한 우여곡절의 북벌 과정 속에서 처음에는 공산주의에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은 군인이었으나 점차 강경한 반공주의로 선회하게 된다.

장제스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군사적 역량, 정치가로서의 성장, 그리고 혁명의 대의와 통일에 대한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제스의 강점들이 훗날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마오쩌둥에 의해 발휘되어, 장제스가 대륙의 패권을 잃게 된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 1926년 광저우에서 북벌군 출정을 선언하는 장제스

▲ 1차 북벌전쟁의 전황도. 남쪽 광저우에서 출발한 국민정부의 북벌은 우창과 난징을 거쳐 북쪽의 베이징 점령까지 1년 11개월만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전쟁사와 국제적 시각에서 본 중국 군벌 전쟁

20세 전반기의 중국 현대사는 전쟁사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 군벌 전쟁->중일전쟁->국공내전’이라는 세 개의 퍼즐이 모여 완성된다. 중국 군벌 전쟁은 장군과 혁명가들, 여러 뛰어난 인물들의 경연장이자, 새로운 무기와 전략의 시험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 소련, 기타 열강이 외교력과 군사력을 투사하는 국제적 무대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군벌 전쟁사는 20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이라 할 수 있는 중일전쟁의 전사(前史)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전쟁사의 관점에서 중국 군벌 전쟁을 서술할 뿐만 아니라 국제적 시각에서 중국 현대사를 일별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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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권성욱

전쟁사 연구가. 개인 블로그인 ‘팬더 아빠의 전쟁사’에 전쟁사 관련 글을 쓰고 있으며, 특히 중국 근현대사와 2차대전이 전문 분야이다. 국내 최초로 중일전쟁을 다룬 역사서 『중일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를 썼으며,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컨텐츠(2014년)에 선정되었다. 래너 미터의 『중일전쟁: 역사가 망각한 그들 1837~1945』를 공동 번역했고, 『덩케르크: 세계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 『일본 제국 패망사: 태평양 전쟁 1936~1945』, 『미드웨이: 어느 조종사가 겪은 태평양 함대항공전』을 감수했다. 현재 울산에서 공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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