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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知 - 책 읽기

정치적 책임을 이행하는 일이 즐거울 수 있을까?

 


 

 

정치적 책임을 이행하는 일이 즐거울 수 있을까?

 

정치적 책임을 다함으로써 사회의 질서를 개선하는 일은 가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는 일을 저어하곤 한다. 우리가 주저하고 저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타당한 것일까?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책임을 수행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반대와 비난에 부닥친다는 것이다. 타인의 반대와 비난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세계의 불의를 교정하는 일이 아무런 장애 없이 매끄럽게 이루어지는 세계는 정말 멋진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러한 세계가 아니다. 현실의 장애를 이유로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지 않는 것은 실존을 부정하는 자기 탐닉이다. 세계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므로 세계의 불의와 부당함, 고통을 줄이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사고방식이다. 애초에 이 전제는 증명된 적 없다. 세계가 한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갈 리는 만무하다. 설사 그 사람이 명석하고 훌륭한 대안을 가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의 바람은 운동을 하지 않고 복부 비만이 해결되리라고 기대하는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정치적 반대와 장애는 우리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도전할 대상일 뿐, 도전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두 번째 이유는 냉소와 절망이다. 지성으로 사회를 관찰하는 사람은 큰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좌절스러운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진다.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의 토대가 허물어지고, 그 중요성이 경시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은 투표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 다수결로 승자가 나왔다는 사실로 환원되어 버린다. 투표 과정에서 사회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책이 무엇인지 투명하고 진지하게 토론하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국가 기관이 선거에서 여론을 조작하고 선동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사람들이 직접 투표한 이상,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민주주의의 의미가 이미 많이 사라졌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란 경제 성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권위주의적인 지배자를 뽑는 일로 흔히 여겨지고 있다. 사회의 정당성 또한 경제 성장에 좌우된다. 그 결과 사람들의 부당한 고통을 줄이고 각자가 더 풍요로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 즉 자유의 조건을 형성한다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대한 목표가 소흘히 다루어진다.

 

그 결과 ‘정치’와 ‘민생’을 전혀 별개로 파악하는 용법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 정치는 정치인들의 파벌 싸움이나 여야 간의 무익한 대립 같은 의미로 축소 왜곡되고, 민생이란 민주적인 정치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곧바로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전에서 ‘민생’은 구성원들의 삶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구성원들은 각자 다른 신념과 선에 대한 관점, 사회적 위치를 갖고 있으며, 구성원들의 삶과 관련하여 국가가 추구해야 하는 목적이나 동원하는 정책 수단의 규범적 타당성과 효과에 관해서도 상이한 생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주장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조건은 서로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실은 민생이란 민주적 정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러나 민생과 정치를 서로 별개의, 오히려 충돌하는 개념으로 대립시킬 때 민생이란 경제 성장의 극대화를 주도할 권위주의적 지배자가 지정하는 정책적 해결책으로 환원된다. 그러므로, ‘민생 문제’ 자체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일은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이 배제를 통해 광범위한 영역에서 참정권, 자유권, 사회권으로 구성된 시민의 지위가 반복적으로 침해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양심적인 시민에게 냉소와 절망을 안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그 일로 이룰 수 있는 결과의 간극이 심각한 무력감을 낳는 것이다. 스스로의 삶이 점차 노예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노예에게나 어울릴 법한 삶을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여기게 된다. 민주주의 같은 집단의 문제를 다루는 일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치부하고, 자신은 사회를 품평하고 비평하는 소비자의 자세에 만족한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안위를 살피기에도 바쁘지 않은가. 아이리스 영은 이런 생각이 잘못임을 지적한다.

 

잘못이 일어나는 대부분의 사회적 상황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만한 이유들이 있었다. 고립되어 있는 개인이 기관들, 강력한 관료들, 국가 간의 상호작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정치적 책임은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집단 행동을 함께 할 것을 권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비교적 드물게 일어나지만 일단 일어나기만 하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국면 전환의 힘에 종종 크게 놀라곤 한다. (아이리스 영,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구조는 인간 행위의 집합적 결과이며, 우리 모두는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상호작용으로 인한 변화는 국면 전환의 불꽃 같은 순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꾸준히 진행되는 것이다. 기저의 변화가 축적될 때만 겉으로 보이는 뚜렷한 변화도 발생할 수 있다.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에 의해서도 변화가 축적된다. 이 변화는 토대를 침식하고 퇴락시키는 변화이다. 이 변화가 토대에서 발생하면, 국면 전환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즉 당연하게 여겼던 공식적 질서 아래 보장되었던 시민의 지위가 한순간에 붕괴하는 것이다. 냉소와 절망은 토대를 변화시키는 상호작용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확산할 잠재력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의 몫을 수행할 이유를 제공한다.

 

- 이한, 『삶은 왜 의미 있는가』, 241~2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