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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知 - 책 읽기

황순원의 「소나기」를 어떻게 읽으셨나요?

황순원의 「소나기」란 작품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애초에 이런 질문을 감당할 만한 작품조차 거의 없다는 점에서 「소나기」의 인지도는 그만큼 독보적입니다. 앞의 질문은 「소나기」가 그만큼 널리 알려져 있고 또 사랑받는 작품이기에 나올 수 있는 물음일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소나기」의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도시 출신의 한 소녀와 시골 소년이 만나 짧은 시간 동안 애틋한 감정을 나누는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럼 「소나기」와 관련해서 다른 질문을 하나 내볼까 합니다. 「소나기」는 언제 발표된 작품일까요? 난이도가 높은 질문으로 생각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아마 대다수가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시대적 배경 또는 작가가 언제 글을 썼는지 알 필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소나기」에서 시대적 배경은 어떤 이유에선지 생략되어 있습니다. 즉 「소나기」는 시대적 배경을 기억할 이유도 없고 기억하기도 어려운 그런 작품이었고, 따라서 작품이 언제 발표됐는지 관심을 둘 이유도 별로 없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덕분에 「소나기」는 오늘날까지 ‘풋사랑’ 이야기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질문을 던졌으니 답을 말해야겠죠. 「소나기」는 1953년 5월, 한국전쟁이 진행 중인 시기에 발표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전쟁 통에, 전쟁이 끝날 무렵에 쓰였습니다. 황순원은 지난 약 3년간의 전쟁을 뒤로 하고 한가로워 보이는 시골을 배경으로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흔히 「소나기」는 순수문학의 대표작으로 거론됩니다. 혹 황순원은 전쟁에 지친 나머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고, 그런 심정이 「소나기」로 나타난 것일까?

 

그런데 황순원은 같은 해 1953년에 『카인의 후예』도 발표했는데, 겨우 몇 달 간격을 두고 발표된 이 작품을 보면 황순원이 현실을 도피 또는 외면하고 있었다고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카인의 후예』는 「소나기」와 달리 시대적 배경을 뚜렷이 하고 있고 작품 분위기도 사뭇 다릅니다. 이 작품은 이념적 계급 투쟁이 불꽃 튀기 시작하는 시기 북한의 어느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직한 일을 다루고 있고, 인물들은 형제나 이웃으로 존재하던 관계에서 서서히 적대와 투쟁의 관계로 변해갑니다. 결국 인물들은 ‘살의’를 품게 되고, 그 가운데 주인공은 가족 같았던 이웃을 상대로 살인을 시도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카인의 후예』는 「소나기」와 달리 살벌한 분위기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황순원이 세상을 등지고 순수문학에 골몰했다는 전제는 매력을 상실합니다. 혹 「소나기」의 시골 배경이 그의 펜대 끝에서 건설된 인위적인 장막이라면 어떨까요? 만약 「소나기」의 시골 배경이 산 너머 현재진행형의 일을 감추고 있었다면? 작가가 원고지 위에 언뜻 평화로운 공간을 구축하고 있었는지 몰라도 작가의 등 뒤에선 전쟁의 참상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황순원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생깁니다.

 

아무래도 더 본격적인 이야기는  최정운 교수(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가 쓴 『한국인의 발견』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최정운 교수는 「소나기」라는 문학 작품이 ‘역사 현실’과 만나면 어떻게 이해되는지 이야기합니다. 그에 따르면, 1953년에 나온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소녀는 그간 한반도 땅에서 '개화'를 이끌어온 도시 부르주아를 상징하고, 소녀의 죽음은 그들이 그 시점에 이르러 일상의 시련인 '소나기'조차 이기지 못하고 나약해진 모습, 그런 그들이 현실에 맞서 비극을 이루기는커녕 존재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황순원은 왜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이 또한 따져볼 문제겠죠. 최정운 교수의 안내로 다시 한 번 작품을 따라가보겠습니다.




보통 전쟁이 끝난 후의 시대를 낭만적으로 들리는 프랑스어 ‘아프레게르(apres guerre)’라고 불러 독특한 의미를 담는다. 평화가 다시 찾아온 시대지만 사람들이 전화(戰禍)로 가난해진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은 흩어지고 모든 전통적 사회 윤리가 도전받고 사회 질서가 흔들리는 상태를 말한다. 전쟁이란 사회의 근간을 흔들고 세상을 위태롭게 만든다. 대한민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가족이 파괴되어 수많은 고아들이 생기고, 이산가족들은 삶의 희망과 의미를 잃었다. ‘아프레게르’라는 말에 내포된 일반적인 상황은 한국의 전후(戰後)에도 해당이 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한국전쟁이 독특한 전쟁, ‘전쟁이라 부를 수 없는 전쟁’이었기에 ‘아프레게르’ 또한 독특했다. (...)

 

황순원의 「소나기」—1953년

 

전쟁이 끝나갈 무렵 중견작가 황순원(1915~2000년)은 두 편의 명작을 써냈다. 단편 「소나기」와 장편 『카인의 후예』이다. 우선 「소나기」는 한국 청소년들이 교육과정에서 꼭 읽어야 할 필독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으로, 이름 없는 한 소녀와 소년이 한적한 농촌 마을에서 처음 만나 친밀한 관계를 엮어가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소녀는 ‘윤 초시의 증손녀’로 흰 얼굴의 예쁜 소녀였다. 그들은 처음 대하는 사이였는데 소녀가 먼저 “이 바보!”라고 놀리며 장난을 걸어 서서히 얼굴이 검은 농촌 소년과 가까워진다. 수줍은 소년은 검은 얼굴이 부끄러워 달아나다 넘어져 코피가 흐르기도 하고, 소녀가 넘어져 무릎에 피를 흘리자 소년이 입술로 빨아주기도 했다. 소년은 송아지를 타는 모습을 소녀에게 자랑스레 보여주어 자존심을 세우고 인정받기도 했다. 



그리고 소년과 소녀가 다정스레 들판을 걷는데 소나기가 온다. 소나기를 맞자 소녀는 입술이 파래지며 몸을 떨었고 그 모습을 본 소년은 쇠락한 원두막으로 소녀를 데려가 비를 피하게 했다. 소년은 소녀의 어깨를 저고리로 싸주었다. 비가 더 세어지자 소년은 소녀를 수수밭으로 데려가서 수숫단을 쌓아 비를 가려주었다. 소녀는 소년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좁은 곳에 둘이 쪼그려 앉자, “비에 젖은 소년의 몸 내음새가 확 코에 끼얹어졌다. 그러나 소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도리어 소년의 몸 기운으로 해서 떨리던 몸이 저이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비가 그치자 그들은 각자 돌아갔다. 그 후로 소녀는 며칠 보이지 않는다. 다시 본 소녀는 아픈 기색이 뚜렷했다. 소녀와 소년의 대화 사이로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년은 소녀네가 이사해 오기 전에 벌써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윤초시 손자가 사업에 실패해가지고 고향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이번에는 고향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게 된 모양이었다.

_황순원, 「소나기」, 18쪽


그리고 소년은 윤 초시네가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집이 ‘악상’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어서 소년의 귀에 다음과 같은 말이 들린다.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두 변변히 못 써 봤다더군. 지금 같애서는 윤초시네두 대가 끊긴 셈이지. ……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입던 옷을 꼭 그대루 입혀서 묻어달라구…….”

_황순원, 「소나기」, 20쪽


소녀는 ‘죽었다’고 알려졌을 뿐이다.


문제는 그간 이 소설이 천편일률적으로 학생들의 교과서에서나 참고서에서나, 대학에서나 한국문학사 책에서나 한결같이 고집스럽게 소년과 소녀의 풋사랑을 묘사한 한국 최고의 순수문학 작품으로 평가받아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문학 작품의 의미를 해석해낼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우리 국문학계의 부끄러운 지적 수준을 드러낸다. 그저 아름다운 문장으로 쓴 어린 남녀 간의 민망스런 이야기라는 해석을 반복해온 것이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쓰인 이 이야기의 중요한 의미는 그 얼굴 흰 소녀의 죽음, 소나기라는 일상의 시련도 견디지 못하고 스러져간 죽음에 있고 그래서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이 소녀는 이 시대를 견디지 못하고 쇠락하여 멸망해간 도시 부르주아의 마지막 자손이었다. 소녀는 처음부터 자신이 먼저 소년에게 다가갔고, 죽을 때도 ‘잔망스러움’으로 동네 어른들을 당혹케 함으로써 자신의 진취적 계급의 정체를 드러내고 지켰다. 그 소녀에게 작가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것은 그 소녀의 계급적 정체만으로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소녀의 죽음은 아무런 ‘소리’도 ‘분노’도 없는 너무나 조용한 사그라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약도 ‘변변히 써보지 못한’ 조용하고 쓸쓸한 소녀의 죽음과 그 죽음이 상징하는 윤 초시네 집안 전체의 쇠락과 몰락과 단손(斷孫), 그들의 사라짐을 조용히 애도한다. 결국 소녀의 죽음은 이 땅을 그간 ‘개화’로, ‘계몽’으로 이끌어온 도시 부르주아가 일상적 소나기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나약해지고 비극도 이루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이야기였다.




위 부분은 『한국인의 발견』, 96쪽, 99-102쪽을 인용한 것입니다. 최정운 교수는 『한국인의 발견』에서 1945년 해방 직후 이태준의  「해방 전후: 한 작가의 수기」 부터 1999년 공지영의 「고등어」에 이르기까지 주요 현대 소설을 순례하며, 각 작품에 새로 해석과 역사적 좌표를 부여합니다. 황순원의 「소나기」는 그 가운데 아주 특정한 1953년 시기를 다루기 위해 찾은 작품입니다. 황순원과 그의 작품들은 물론 한국 문학사의 중요한 작품들에는 예외 없이 역사와 사상으로의 길이 나 있고, 최정운 교수는 『한국인의 발견』에서 차근차근 그 길로 독자들을 안내합니다. 


책에 관한 좀 더 큰 소개는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mizibooks.tistory.com/126


한국인의 발견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힘의 정체를 찾아서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688쪽 | 25,000원

 

 

만약 우리가 역사를 다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삶일까?


해방과 전쟁 후 혼돈과 죽음이 편재하던 세상에서

오늘날 우리가 있기까지

문학으로 본 한국인 굴기의 대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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