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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북스의 책/인문

'민중'이란 무엇인가? - 말의 기원과 의미

최근 ‘민중’이란 말의 의미와 관련하여 오고가는 말들이 많습니다. 대체 ‘민중’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을까요? 그리고 그 정확한 속뜻은 무엇일까요? 『한국인의 탄생』에서 최정운 교수가 이야기하는 민중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 정리해보았습니다.

 


 

 

민중(民衆)이란 무엇인가? - 말의 기원과 의미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을 축하하기 위해 구중앙청 광장에 모인 사람들

 

‘민중’이라는 말은 한국에서는 5.18 광주민중항쟁 이후 1980년대 중반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하여 현재는 강한 어조를 가진 정치 언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민중’은 사회과학적 의미에서 어떤 계급이나 집단을 지칭하는 말도 아니며, 단순히 큰 무리의 사람들이나 백성을 지칭하는 말도 아닙니다. 저항과 생명의 의미를 가진 이 ‘민중’이라는 말이 최초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을까요?

 

최정운 교수에 따르면 ‘민중’이라는 말은 동양 고전에서 합당한 유래를 찾기 어렵고, 그렇다고 근대 서양의 정치 언어를 번역한 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일반에서는 민중을 영어 ‘people’의 번역어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보다는 더욱 날카로운 정치적 의미가 가미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창작어라고 합니다.

 

영어의 ‘피플(people)’이란 말은 일본에서 막부 말에 ‘인민(人民)’으로 번역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어 왔고, ‘네이션(nation)’은 ‘민족(民族)’으로 1870년대에 번역되어 20세기에 들어와서 폭넓게 사용되어 왔다. 그에 반하여 민중은 서양의 어떤 정치 언어의 번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말은 근대 서구 사상과 정치 언어들이 도입되어 널리 사용되는 가운데 한자권인 동북아 삼국 간에 독창적으로 만들어지고 쓰여온 말이었다.

-『한국인의 탄생』, 485쪽

 

‘민중’은 19세기 말에 일본에서 만들어져, 중국을 거쳐 식민지 조선으로 들어온 말이었습니다.

 

‘민중’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888년 일본의 자유 민권 운동을 대표하는 사상가인 나카에 초민의 「국회론」에 처음 나타났다고 한다. 여기에 민중이라는 말은 당시의 자유 민권 운동에서 주로 쓰이던 ‘평민(平民)’이라는 말과 유사하면서도 애매한 뜻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민중’이라는 말이 다시 쓰인 것은 1901년 나카에 초민의 사후 그의 제자 고토쿠 슈즈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였다고 한다. 미국에서 발표된 「사회혁명당선언」에서 ‘백만민중’이라는 말을 세 번 사용했다고 한다. 그 후에 민중이라는 말을 차용하여 자주 사용했던 사람은 중국의 혁명사상가인 리다자오와 마오쩌뚱이었다.

-『한국인의 탄생』, 486쪽

 

조선에서는 1908년 단재 신채호가 민중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는데, 이때만 하더라도 ‘민중’은 ‘국민’이나 ‘민족’과 비슷한 뜻으로 “국가를 희망”하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 많은 사람들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아마도 ‘국민(國民)’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만든 말이라서 기피되었고, 민중이라는 말에 정치적 뜻이 뚜렷하게 새겨지지 않은 때라 큰 의미 없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는 1919년에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서」에 썼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민중’은 길거리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 ‘군중’을 지칭하는 말로 읽힙니다. 즉 만민공동회 때 서울의 큰길에 모인 수많은 군중들의 이미지를 가리키지만 특정한 정치 이념이나 혁명 이론을 갖고 쓴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3.1운동 이후에 ‘민중’이라는 단어는 일간 신문 사설에 가끔 등장했지만 ‘많은 무리’ 이상의 뜻은 아니었고, 특히 당시의 조선 신문들이 ‘국민’ 즉 ‘고꾸민(國民)’이라는 일본에서 만든 말을 쓰기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민중’이 조선에서 강한 정치적 의미를 띠게 된 것은 신채호의 역할이 컸습니다. 1923년 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아나키즘 사상과 결합하여 “민중의 직접혁명”을 주창합니다. 이것은 볼세비키식 혁명에 대한 반대를 뜻하는데요, 인민은 그저 혁명 엘리트의 지도를 따라 혁명에 동원되었다가 다시 노예 상태로 회귀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되며, 그 스스로 떨쳐 일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신채호)는 ‘인민’이라는 말과 ‘민중’이라는 말을 대비시킨다. 인민이란 구시대에 국가의 노예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며, 특수세력의 지도를 받아 혁명에 참여하여 다시 ‘특수세력’에 의해 노예로 전락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반면, 민중이란 직접혁명에 ‘자기(自己)’를 위하여 참가하는, 혁명에 스스로 나서는 사람들을 말한다. 여기에서 인민이란 혁명당, 즉 혁명을 획책하는 특수세력의 지도를 받아 움직이는 사람이며, 민중이란 특정한 사회적, 계급적 정체를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에 직접 자기를 위하여 나서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한국인의 탄생』, 490쪽

 

 

신채호에 따르면, 인민과 민중은 실체로는 같은 사람들일 수 있지만, ‘그들 외부의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계몽되거나 동원되는 존재이냐’ 아니면 ‘그 스스로 떨쳐 일어서 직접혁명에 나서는 존재냐’ 하는 측면에서 의미상의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덧붙여 신채호는 민중의 각성은 민중들의 고유한 자산인 ‘폭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20세기에 동북아 지역에서 만들어져 쓰이기 시작하여 애매한 정치적 의미만을 갖고 있던 민중이라는 말은 이렇게 신채호에 의해서 급진적인 정치 언어의 위상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공통적으로 ‘민중’이라는 말은 ‘백성 민(民)’에 ‘무리 중(衆)’을 합하여 ‘국가에 속하는 수많은 군중들, 큰 무리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쓰였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지혜라기보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밀어붙이는 힘, 엄청난 규모의 물리적 완력에 초점이 맞추어진 말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백만민중(百萬民衆)’이라는 쓰임새는 단적으로 많은 사람이라는 군중의 규모에 착안한 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중’이란 ‘정치적 의미를 갖는 육체적 힘으로 구성된 수많은 군중들’ 정도의 뜻으로 만들어진 말이며 그렇게 쓰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 전까지는 ‘민중’이라는 말은 서서히 정치적 혁명적 의미의 작은 조각들이 그 안에 모여들고 쌓여가는 과정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점점 시간이 갈수록 민중이라는 말은 혁명을 생각하던 사람들, 나아가서 혁명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탄생』, 486~487쪽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중국과 일본에서는 ‘민중’이라는 말이 잘 쓰이지 않으며 거의 잊혀졌다는 것입니다. 현대 중국에서는 민중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인민대중(人民大衆)’의 준말이라고 알려져 있을 뿐, 한국에서 쓰이는 것과 같은 독자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표준 사전인 『광사원(廣辭苑)』에 ‘민중’이라는 항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민중예술(民衆藝術)’이라는 말은 나와 있으나 ‘민중’은 없습니다. 동북아 삼국 지식인들이 창안한 이 말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최정운 교수는 다음과 같이 추정합니다.

 

‘민중’이라는 말은 1920년대를 지나면서 좌파적 의미가 충만한 말이었으며 나아가서 지식인 혁명당을 거부하는 아나키스트적인 말이었기에 좌우(左右)의 정치권력에 의해서 말살되어 버렸을 것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에 민중은 1920년대까지 마오쩌둥도 즐겨 쓰던 말이었지만 1930년대 혁명이 진행되며 사라져버렸다. 이것은 민중이라는 말이 지식인 등 다른 계급의 지도를 거부하며 끝없이 저항하고 봉기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만큼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위험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탄생』, 494쪽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왜 ‘민중’이라는 말이 이토록 끈질기게 살아남아 5천만 민중의 가슴속에 펄떡이고 있을까요? 심지어 권력의 지배 기구인 경찰마저도 스스로를 ‘민중의 지팡이’라고 표현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한국에서도 한국전쟁 기간에 민중이라는 말이 사라졌지만 1970년대 말 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부활했고 급기야 1980년대 강력한 저항 운동 속에서 5.18민중항쟁의 해석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최정운 교수는 이것이 가능한 이유를 우리 문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벽초 홍명희의 소설『임꺽정』에서 찾고 있습니다. 홍명희는 『임꺽정』에서 ‘민중’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소설에서 “뜨거운 피와 살을 가진 살아있는 민중”을 형상화함으로써 우리의 역사적 문화적 무의식 속에 민중의 코드를 깊숙이 심어놓았고, 그를 통해 중국과 일본과는 다른 경로로 ‘민중’이 한국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한국인의 탄생

 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2013년 | 580쪽 | 20,000원

 

망국 조선,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우리 한국인은 태어났다.

해방 한국, 한국인은 그 무엇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근대 문학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한국인 정체성을 심층적으로 재구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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