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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북스의 책/인문

『한국인의 탄생』 - 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

 

 



한국인의 탄생

 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2013년 | 580쪽 | 20,000원


망국 조선,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우리 한국인은 태어났다.

해방 한국, 한국인은 그 무엇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근대 문학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한국인 정체성을 심층적으로 재구성하다.

 


 

우리의 근현대 역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그런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구한말, 즉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물론 우리 대부분은 이 시기의 역사를 어떤 식으로든 배웠고 알고 있다. 그 내용은, 1904년 러일 전쟁 후에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공식적으로 침탈당하고 이후 일본이 완전히 강제 ‘병탄’하기까지 점차 우리나라를 집어삼켜 가던 과정,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에 저항하는 과정으로 점철된 역사이다.

 

또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 조선 조정의 갑오개혁,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등 시대에 대응해 나름대로 변화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내부로는 매국노에 의해 국가권력이 잠식되고, 외부의 도전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에는 국권을 강탈당하는 역사로 설명하기도 한다.

 

무엇이 진실일까? 직접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저자 최정운 교수는 '한국인의 탄생'을 논하기 위해 가장 먼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 조선의 풍경을 소환한다. 그 시기 한국인의 눈과 귀, 머리와 심장을 빌리기 위해 저자는 당시의 문학에 눈을 돌렸다. 우선 근대 소설이어야 했고, 가장 앞선 시기의 그것은 바로 ‘신소설’이었다. 그렇게 시대의 단초가 모이고 엮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의 공식적인 국문학사에서 신소설은 흔히 문학적 수준이 결여된, 근대 문학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작품들로 이해된다. 쉽게 전근대 소설과 근대 소설도 아닌, 묘한 역사적 단계로 이해되고 있다. 저자는 구한말 조선인의 시야를 소환하기 전에 먼저 신소설에 대한 국학계의 부당한 평가부터 깨야 했다. 단적으로, 저자는 신소설은 근대 문학의 지위를 가질 만큼 충분히 '사실주의'적인 문학이었다고 말한다. 신소설의 현실은 당대 조선 현실을 투영한 것이었고, 신소설의 인물들은 당대 조선인들의 인물 군상, 바로 그것이었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신소설은 일본의 근대 소설보다 약 20년 후인 1906년에 등장했다. 고종 즉위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무려 40여 년이나 지난 후였다. 근대의 온갖 것에 주목한 지 수십 년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다가 구한말을 거쳐 대한제국의 국망기에야 등장한 문학 장르, 그것이 신소설이었다. 이에 대해, 저자는 구한말이 되어서야 이전의 문학 형식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대두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근대 서구의 문학 형식에 담아야 할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들, 구한말 특유의 문제적인 이야깃거리들이 나타났을 때에야 비로소 최초의 근대 소설, 신소설이 쓰였다고 말한다.


나라는 양반님네가 다 망하여 놓셨지요. 상놈들은 양반이 죽이면 죽었고, 때리면 맞았고, 재물이 있으면 양반에게 빼앗겼고, 계집이 어여쁘면 양반에게 빼앗겼으니, 소인 같은 상놈들은 제 재물 제 계집 제 목숨 하나를 위할 수가 없이 양반에게 매었으니, 사람 위할 힘이 있읍니까. 

_혈의 누 중


지금 세상은 인문이 결딴나서 도덕도 없어지고, 의리도 없어지고, 염치도 없어지고, 절개도 없어져서, 사람마다 더럽고 흐린 풍랑에 빶고 헤어나올 줄 몰라서 온 세상이 다 악한 고로, 그름 옮음을 분별치 못하여 ... 슬프다!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거꾸로 되고 충신과 역신이 바뀌었도다. 이같이 천리에 어기어지고 덕의가 없어서 더럽고, 어둡고, 어리석고, 악독하여 금수만도 못한 이 세상을 장차 어찌 하면 좋을꼬?  

_『금수회의록』 중


최정운 교수는 신소설 작품들에 묘사된 인물들과 시대상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신소설이 묘사한 현실은 황당무계한 허구라든가 친일파 성향의 작가들에 의해 날조된 조국에 대한 음해가 아니라 철저하게 ‘사실주의’적인 현실이었음을 드러낸다. 그 시대는 “양반님네가 다 망하여 놓은” 시대였고, “살려고 해도 살 수 없으며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는” 시대였다.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 시대는 이른바 “홉스적 자연상태”였다고 논증한다. 

 

결국 이인직과 이해조의 신소설에 나타난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은 이른바 ‘홉스적 자연상태(the Hobbesian State of Nature)’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머스 홉스가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제시하는 국가 이전의 상황 즉 국가를 필히 만들어야 할 ‘자연상태(the State of Nature)’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인직과 이해조의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당시의 현실, 즉 사회는 붕괴되고 개인으로 흩어져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신소설이라는 새로운 이야기의 형태가 우리 역사에서 나타난 원인이었다. 루카치에 따르면 근대 소설은 “세계가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관념에서 출발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신소설도 죄악으로 가득 찬 사회, 망한 나라, 타락한 세상이라는 판단에서 출발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무후무한 ‘신소설’이라는 문학의 장르가 나타난 것이었다 

_한국인의 탄생 중


 

국가의 권력이 조정 바깥에 거의 미치지 못했고, 백성들은 숨죽이고 제 한 몸 건사를 도모하는 시대가 있었다. 국가가 없는 세상, 국가가 구실을 못하는 세상, 모두가 국가를 원망하는 시대가 있었다. 그것이 우리 20세기의 시작, 구한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신소설의 세계와 인물 군상은 바로 그런 세상에서 태어난 한국인이었다.


홉스적 자연상태의 시대 속에 주인공들은 진화하기 시작한다. 서서히 텅 빈 인물에서 주체로서 모습을 갖기 시작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화세계>의 김수정, <은세계>의 최병도 등이 그런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연상태의 해소를 열망하던 사람들 가운데에서, 문명 국가로 여겨지던 일본에 의한 정복을 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일진회가 그들이었다. 한때 14만 명에 달하는 회원명부와 1백만 명의 지지를 받았던 일진회, 그들은 반역 집단이었다.


한편 1904년 등장하기 시작한 일진회를 마주보며, 일본을 등에 업은 그들의 행위를 반역으로 인식하며 분노하는 사람들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일진회는 조선인들의 심장에 존재하는 성리학적 전통의 ‘의(義)’를 자극했고, 조선인들은 조선에 대한 애증에 더해 ‘의’에 기반하여 일진회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기폭제가 되어 소위 오적신, 매국노들의 반역자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대중 사이에 널리 확산되었고, 의병이 일어나 일진회를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일병합을 기점으로, 한때 일본의 비호를 받고 또 다수의 지지 세력을 가졌던 일진회란 이름은 역사의 그늘 아래 매장되었다. 해방 후에는 매국노와 친일파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설명이 가능한 시대가 도래했고, 그들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대한제국은 망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민족’이 태어났다. 우리의 민족, 민족주의는 20세기 초반 홉스적 자연상태의 대혼란 속에 주체로서의 자각, 기존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부정(반역)과 다시 그에 대한 부정, 그리고 일본의 침략 와중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단적으로, 국가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민족’이 탄생했다. 그러나 아직 ‘민족’이란 말은 틀에 불과할 뿐, 그 내용은 이제부터 채워가야 했다.


국망기의 홉스적 자연상태를 살아내며, 또 국가를 반역하는 동포를 목도하며, 한편으로는 국가가 이제는 없는 현실을 마주하며, 우리의 지식인, 지도자들은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미 민족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를 살아가기 시작했고, 전근대 조선인이 아니라는 것 외에는 어떤 모습으로 그들이 나타나게 될 것인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20세기 초에 최초로 근대 한국인의 모습이 나타난 이래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제 시대는 일부에서 말하듯 우리 민족과 수많은 지식인이 일제에 협력하고 굴욕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던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일제 시대 내내 한시도 쉬지 않고 우리를 찾아 헤매고, 우리의 새로운 모습을 모색하며 그려가고 있었다. 특히 3.1운동 이후는 우리 민족의 본질을 찾아서 강한 조선인을 찾는 과업이 제시되었다. 1920년대에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1930년대에 이르면 우리의 지식인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정의하며 새로운 전선에서 창조적 예술이 지적 투쟁을 전개시켜 갔고 드디어 1930년대에는 강한 한국인의 모델을 발명하였다. 춘원은 우파의 입장에서, 벽초는 좌파의 입장에서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두 인물을 창시하였고 이 두 전사, 영웅의 모델은 현대 한국인에게도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_『한국인의 탄생』 중


 

아직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와 예술가가 덜 분화된 시대가 있었다. 그들에게 소설문학은 미래를 준비하는 하나의 유력한 방편이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시대와 갈등하고 대결하며 시대를 극복할 새로운 한국인상을 모색했다. 그 가운데 소설문학은 시대가 우리에게 허락한 최고의 실험실이었다. 현실의 축소판인 작중 세계에서 인물들은 진화를 거듭했다. 우리의 문학가이자 사상가들, 즉 이인직, 이해조, 신채호, 이광수, 김동인, 나도향, 박태원, 이상, 홍명희 등은 세상을 마주보며 그에 맞서 인물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초상이 되었다. 


『한국인의 탄생』에서 더 많은 우리의 초상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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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최정운 교수의 15년 만의 노작! 


한국인의 탄생

 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2013년 | 580쪽 |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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