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와 문명

1300~1700년, 유럽의 시계는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카를로 M. 치폴라 지음 |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3년 | 244쪽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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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혁명과 산업 혁명을 예비한 13세기 기계 시계의 탄생!

유럽과 아시아를 넘나드는 기술 진보의 역사,

“왜 유럽은 성공하고 중국은 실패했는가?”

 

『대포, 범선, 제국』에 이은 카를로 치폴라의 또 하나의 역작!

시계의 역사로 살펴본 근대 서양 기계 문명의 태동

  

13세기 후반, 가장 후진적인 문명인 유럽에서 최초의 기계 시계가 탄생했다. 유럽은 왜 시계를 만들었을까? 비슷한 시기에 출현했던 대포와 시계는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을까? 극소수의 숙련 장인들의 이주가 과연 국가 경제의 흥망을 좌우했을까? 시계는 과학 혁명과 산업 혁명에 어떤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까? 마지막으로 아시아, 특히 중국은 어째서 기계 시계를 만들지 못했는가?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면서, 유럽과 아시아의 극적인 근대사적 분기(分岐)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탈리아 파도바의 천재 학자이자 시계 장인인 조반니 데 돈디가 1350년경 제작한 천문 시계. 중세 측시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위 사진의 시계는 미국 스미스소니언협회가 돈디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현대에 복원한 것이다.

 


 

 

“우주는 신성한 존재와 유사한 것이 아니라 시계와 비슷하다.”   

- 요하네스 케플러 (1571~1630년)


“증기기관이 아니라 시계가 근대 산업 사회의 핵심 기계이다.”    

- 루이스 멈포드 (1895~1990년)

 

 

『시계와 문명』은 이탈리아 저명한 역사학자 카를로 치폴라가 근대 초 유럽 문명의 극적인 부상을 기술 진보의 측면에서 탁월하게 설명한 저작으로 『대포, 범선, 제국』과 함께 유럽 근대사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책입니다.  

 

 

유럽에서 최초로 출현한 기계 시계

 

13세기 유럽에 최초의 기계식 시계가 등장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해시계나 물시계와 같이 시간을 측정하는 정교한 기구가 있었지만, 그 동력을 기계로 대체한 것은 유럽이 처음이었습니다. 시계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근본적인 발전은 13세기 후반 ‘폴리옷이 달린 굴대 탈진기’가 등장하면서 이루어졌는데, 치폴라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기계 시계의 탄생으로 봅니다.

 

당시 유럽은 크고 작은 도시들이 성장하면서, 봉건 세계와는 독립된 자유롭고 실용주의적인 문화적 환경이 조성됩니다. 14세기 유럽에 닥쳐온 흑사병으로 거대한 인구학적 재앙이 일어나 노동력이 급감했고, 유럽 문명은 더욱 기계 지향적으로 변해갑니다. 인간의 힘을 기계의 힘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경제적 유인과 함께, 수공업자들이 자치를 누리는 사회적 분위기는 기계 시계가 탄생할 수 있는 풍부한 토양을 제공했습니다.

 

최초의 기계식 시계는 도시 한가운데 설치된 거대한 공공 시계였습니다. 14세기에 이르면 이러한 공공 시계는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습니다. 성당, 교회, 시 청사 등 도시의 중심 시설에 설치되어 시간마다 자동으로 종을 울리는 대형 시계의 존재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고 합니다. 1309년에 밀라노 산테우스토르조 교회를 시작으로 1324년 보베의 대성당, 1335년 밀라노 산고타르도 교회, 1340년 클뤼니 수도원, 1344년 파도바 광장, 1353년 제노바, 1356 볼로냐, 1359년 샤르트르 대성당, 1362년 페라라, 1370년 파리 궁정에 공공 시계가 설치되었다고 하네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의 공공 시계를 무척 자랑스러워했습니다. 15세기 프랑스의 한 문헌에 따르면 “도시를 빛낼 크고 훌륭한 시계를 갖고 있다는 명성을 두고 다른 도시와 경쟁했다.”고 합니다. 기계식 시계는 매우 비쌌기 때문에 초창기 시계의 확산은 공공 부문에서 활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자부심, 실용성, 기계에 대한 관심이 결합하여 비교적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시계의 확산이 촉진되었다고 합니다.

 

▲ 1350년 무렵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설치된 대형 시계. 움직이는 달력과, 바늘로 태양과 달 그리고 행성들의 움직임을 가리키는 아스트롤라베가 포함되어 있다. 상부는 성모상으로 장식되었는데 정오가 되면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동박박사 세 사람의 조각상이 그 앞에 경배하고 뒤이어 맨 꼭대기의 거대한 수탉이 꼬끼오 울면서 날개를 퍼덕인다.  

 

 

서양은 왜 기계 시계를 만들었나?

 

기계식 시계는 해시계나 물시계의 대체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초창기 기계식 시계는 매우 부정확했기 때문에 해시계나 물시계에 근거하여 시침을 앞뒤로 돌려 시간을 정정해야 했답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유럽인들은 기계식 시계를 만들었을까요? 이 질문에 치폴라는 무엇보다 기계적 세계관이 유럽에서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14세기 철학자 니콜라스 오레스무스의 작품을 보면, 우주를 각각의 부품이 맞물려 돌아가는 조화로운 시계 장치로 비유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는 우주는 신이 창조해 작동시키는 거대한 시계 장치로서 “모든 톱니바퀴들이 아주 조화롭게 움직인다”고 썼다고 합니다.

 

기계 시계의 발명되기 한참 전부터 유럽인들은 기계에 대해 관심이 깊었는데, 치폴라는 유럽 전역을 뒤덮었던 방앗간(mill)과 각종 자동 장치들을 그 의미심장한 증거들이라고 말합니다. 물레방아는 기원전 1세기 소아시아에 알려졌고 수직 형태의 풍차는 7세기 페르시아에 알려져 있었지만, 방앗간 건설이 진정으로 유행한 곳은 중세 유럽이라고 하네요. 수많은 무명의 수공업자들이 일련의 기계 장치들을 고안해 물이나 바람에서 나온 회전력을 망치, 압축기, 드릴, 맷돌 등 여러 종류의 잘 분화된 운동 장치로 전환하려 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주변의 봉건 세계와 독립된 자유민들의 연합체인 도시의 발달, 수공업자들의 사회적 지위, 도시를 휘감고 있던 실용주의적 분위기와 부족한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하려는 경제적 요인 등이 심층적으로 작용했습니다.

 

 

대포를 만드는 사람이 곧 시계를 만든 사람들

 

기계의 힘으로 인력을 대체하려는 유럽인들의 관심은 다른 문명권에서 찾아보기 어려우며 유럽만의 독특한 성격이라고 파악하는 치폴라의 관점은 『대포, 범선, 제국』에서도 드러납니다. 이 책은 대포를 탑재한 원양 범선이 유럽에 결정적인 군사적 우위를 가져오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시계와 문명』에서도 치폴라는 기계 시계가 과학 혁명과 산업 혁명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면서, 언뜻 매우 상이하게 보이는 시계와 대포가 역사적으로 커다란 친연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손목시계와 유도미사일을 동일한 가게에서 구한다면 정말 신기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놀랍게도 최초로 시계를 제작했던 사람들은 바로 대포 장인들이었습니다. 초창기 대부분의 시계가 쇠나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공공 시계였기 때문에, 시계 제작자들이 대장장이나 자물쇠공, 총포공 등 일반적으로 금속을 다루는 노동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치폴라는 13세기 후반 유럽에서 기계식 시계와 대포가 같은 시기에 등장했다는 사실을 두고 유럽식 발전의 특징을 증언하는 것이며 앞으로 전개될 역사의 양상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최초의 시계공은 대포를 다루던 장인들이었다. 그림은 16세기 이탈리아 페라라의 시계 공방 모습.

 

 

시계의 대량 생산이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예비하다

 

초창기 거대한 공공 시계였던 기계식 시계는 15세기에 태엽이 동력으로 등장하여 크기가 작아지면서 가내용 시계, 회중시계로 발전합니다. 16세기에 들어서면 시계는 유럽의 신흥 부유층의 사치품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시계 장인은 대포 장인보다는 보석 세공인에 가까운 형태로 진화하였고, 시장이 확대되면서 시계 제조업 중심지가 생겨나기 시작하죠. 처음에는 독일이 선두주자를 달립니다. 15세기말에 아우크스부르크와 뉘른베르크가 시계 제조업의 중심지로 부상하지만, 30년 전쟁의 참화로 곧 산업의 중심추가 영국(런던)과 스위스(제네바)로 옮겨갑니다. 오늘날 스위스 시계가 유명한 이유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거겠죠? 

 

17세기 전반기에는 시계 제작의 전문화가 이루어집니다. 시계 장인들이 탈진기, 도르래, 태엽, 외장 등 각각의 부품을 제조하는 수공업자들로 분화되죠. 이러한 전문화는 대단히 의미심장한데, 교환 가능한 부품으로 구성되고 전문화된 직공의 손을 거친 대량 생산 시계는 산업혁명으로 가는 길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용적 목적으로 대량 생산된 시계는 유럽 사회의 심성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케플러는 “우주는 신성한 존재와 유사한 것이 아니라 시계와 비슷하다.”고 말했으며, 로버트 보일은 “우주는 거대한 시계태엽 장치”라고 썼고, 커넬름 딕비 경은 “우주는 거대한 시계에 불과하다”고 썼습니다. 이처럼 기계적 세계관이 만연한 구조 속에서 신은 뛰어난 시계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또한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는 정밀 기구로서 특히 과학 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시계공, 렌즈 제작자, 정밀 도구 제작자 같은 숙련 수공업자와 과학자가 발상과 제안을 주고받은 사례는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17세기 중반 시계의 일일 오차가 10분에서 10초로 급격히 향상된 것은 과학자와 수공업자의 협력 덕택에 가능했으며 그 결과 시계 제작은 물리학과 역학의 이론적 발견이 실용화된 최초의 산업이 되었습니다. 1729년 파리에 설립된 기술 학회의 명단에는 전문 과학자와 시계공들의 이름이 함께 올라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 과학사의 대가인 조지프 니덤은 유럽과 중국의 상황을 대조하면서, 유럽의 기술 진보는 “신사”와 “기술자”가 교류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게 된 유럽의 사회 변화와 틀림없이 관련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 기계 시계는 "우주는 거대한 시계이며 신은 시계공"이라는 서양의 기계적 세계관을 강화했다.  

 

 

산업의 흥망을 결정한 숙련 인적 자본

 

시계 산업을 둘러싼 유럽 각국의 경쟁은 선진국이 가진 기술력의 본질이 무엇이며, 후발국이 기술 경쟁을 따라잡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숙련 인적 자본의 공급입니다. 이 책에서 아주 흥미진진한 대목이죠. 치폴라는 시계 제작 같은 첨단 산업에서 선진국의 기본적인 자산은 인적 자본, 즉 다수의 활동적인 상인과 우수한 수공업자였다고 설명합니다.

 

당시 시계공은 상대적으로 높은 문자 해득 능력을 갖춘 우수한 인적 자본이었으며 종교개혁기에 비교적 많은 수가 개종했다고 합니다. 독일의 30년 전쟁과 프랑스의 낭트 칙령 폐지로 이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영국과 스위스로 대거 이주했습니다. 이들 소수의 피난민이 17세기 말 시계 산업의 균형추의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죠.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의 시계 산업은 몰락했고 영국, 스위스, 스웨덴은 새로운 사상과 기술에 문을 열고 이들 나라의 숙련 인적 자본을 흡수하면서 새로운 산업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당시 시계 산업은 설비보다는 인력이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에 숙련 인력의 대탈주는 국가 경제의 흥망을 좌우할 만큼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하네요.   

 

영국은 가장 낙후한 지역이라는 핸디캡이 기술 혁신을 추동하면서 선도적인 산업 중심지로 부상한 훌륭한 사례입니다.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 동안 영국은 외국 기술자들의 이주를 대폭 허용했습니다. 16세기 후반기 영국 수공업자들의 회중시계는 프랑스와 독일 모델을 철저히 모방한 것으로 창의성은 떨어지지만 꼼꼼한 것으로 정평이 납니다. 17세기를 거치면서 대륙의 수공업자들이 대거 유입되고 여기에 영국 특유의 실용적인 기술 전통이 결합되면서 영국은 스위스와 함께 시계 산업에서 독보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국의 사례는 문화적 개방성이 국가 전체의 경제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웅변합니다.

 

그러나 숙련 인력들이 이주한다고 해서 그 나라의 산업이 무조건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이탈리아 시계공이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오스만 제국으로 갔지만 오스만 경제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숙련 이주민들이 가져온 자극이 경제에 지속적인 효과를 낳으려면 수혜국은 새로운 사상과 기술에 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죠. 16세기 이후에 경제적 쇠락을 겪은 이탈리아도 13세기 비잔티움인들과 18세기 중국인들의 태도와 비슷한 자문화 중심주의를 고수하며 시대를 따라가기 위한 개방과 변화를 거부한 사례입니다. "필요한 것은 모두 이탈리아에 다 있고 외국보다 우월하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네요.

 

 

시계를 장난감으로 여긴 중국인들

 

15세기 중반부터 18세기가 끝날 때까지 유럽이 대포로 무장한 원양 범선으로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동안에도 놀랍게도 유럽인들에게는 아시아에 내놓을 상품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산업혁명 이후 기술과 과학에서 유럽의 우위를 당연하게 여긴 나머지 아시아의 매혹적인 상품이 유럽인들의 눈길을 끄는 반면, 유럽의 상품은 냉대를 받았던 상황을 쉽게 상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확히 3백 년에 걸쳐 세계 무역의 지배적인 양상이었습니다. 이 시기 세계 무역은 본질적으로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다시 동쪽의 아시아로 다량의 은이 유출되고 그 반대 방향으로 다량의 상품이 이동하는 형태였습니다. 그것도 유럽으로서는 아메리카에서 은을 풍부하게 구할 수 있었던 덕택에 가능했죠. 

 

여기에 극소수의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기계식 시계였습니다. 시계는 유럽의 거의 유일한 수출품이었습니다. 18세기 후반에도 중국인들은 “우리는 (서양의) 이상한 물건들을 귀히 여기지 않으며 뽐내는 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으나 그대들이 먼 길을 달려온 것을 생각하여 백배로 되돌려주겠노라”고 큰소리쳤지만, 실제로 황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중국인들이 자명종(스스로 울리는 종) 즉 시계에 열광했습니다. 중국의 고관대작들은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시계를 얻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고 합니다. 중국인들의 시계 애호에 힘입어 18세기 초반이 되면 대량 생산된 유럽산 저가 시계가 중국으로 대거 수출됩니다. 그리하여 1805년 무렵에는 기계식 시계들이 중국에서도 매우 낮은 가격으로 팔렸다고 하네요.

 

그러나 중국인들은 시계를 시간을 측정하는 기기가 아니라 오로지 장난감으로만 보았습니다. 분과 시가 아니라 날과 달로 시간을 헤아리는 다수의 농민으로 구성된 중국 사회에서는 시계는 유용하고 실용적인 장치가 아니었습니다. 중국인들은 관개 사업과 관련된 기계의 유용성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다른 서양 발명품의 목적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중국에서 시계가 유용하고 실용적인 장치로 활약하려면 사회의 전면적 변화가 일어나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의 구조와 필요가 바뀌어야 했습니다.

 

반면 일본은 서양의 시계를 단지 모방하는 것을 넘어 17세기말부터 자신들만의 양식을 개발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시간 체계에 적합한 독창적인 시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중국의 상황과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었습니다.

▲ 송나라 과학자 소송이 1090년에 건설한 물시계. 새 황제가 즉위하면서 폐기된 이후 완전히 잊혀져, 500년후 예수회 선교사들이 기계식 시계(자명종)을 가져왔을때 명나라 황제와 관리들은 크게 놀랐다고 한다.

 

 

왜 중국은 기계 시계를 만들지 못했나?

 

그렇다면 왜 중국은 기계 시계를 만들지 못했을까요? 사실 중국 장인들의 기술력은 일본과 별 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관료주의적 문화와 체제는 수공업자들의 잠재력이 꽃필 여지를 만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가치 체계는 수공업자와 기술을 천대하고 억압했고 응용과학과 기술 진보를 방해했습니다. 교양 있는 중국인들은 수공업자의 작품을 감상할 때 마치 비버의 영리한 작품을 보듯 놀랍다는 투로 이야기했다고 하죠.

 

치폴라는 중국이 일본에 비해 너무나 큰 나라였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대다수 중국인의 삶이 고립적이었다는 거죠. 중국은 마카오와 광둥을 통해 서양의 영향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그 외 지역은 외부와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도 도쿠가와 막부에서 강력한 쇄국 정책을 시행했지만 나가사키에 네덜란드 무역소를 유지했죠. 이곳을 통해 서양 문물이 일본으로 유입되었습니다. 중국의 인구는 1억5천만 명이었지만 일본은 2천5백만 명이었으며, 도로망과 통신망은 일본이 상대적으로 좋았다고 합니다. 치폴라는 유럽 문명이 중국보다는 일본 내부로 더 쉽게 침투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치폴라는 궁극적으로 “왜 중국은 시계와 대포를 만드는데 성공하지 못했는가?”는 질문에 대해 이는 암암리에 비중국적인 조건에서 중국을 평가하는 것이라는 것이라며 비판합니다. 즉 두 가지 다른 삶의 방식을 두고 두 방식 모두 같은 것을 이루려 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죠. 

 

“바흐는 베토벤처럼 곡을 쓰려다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테네는 로마가 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던 시도가 아니다.” 

- 로빈 콜링우드

 

 

무더운 올 여름, 치폴라 선생의 종횡무진 흥미진진 시계 이야기에 빠져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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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Carlo Maria Cipolla, 1922~2000년)

런던정경대학(LSE)과 소르본대학교에서 유럽 경제와 역사를 연구한 대표적인 이탈리아 경제사학자. “자신의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경제사가”였고 1995년에는“동료 학자들에게 혁신 정신의 귀감이 된 역사학자”로서 경제사학 분야에서 발잔상(Balzan Prize)을 받았다. 그는 ‘서구의 발흥’, 특히 고대에서 근대로의 이행 과정으로서 중세에 대해 연구하면서, 유럽 문명의 연속성과 근대 유럽의 경제 성장을 인구, 상업, 지식 등 장기적인 역사적 전환의 복합적 메커니즘으로 설명하였다. 1959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미국 버클리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1991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이탈리아 피에졸레의 유럽대학교와 피사 고등사범학교에서 가르쳤다. 경제사 분야에서 국제적 명성을 얻으면서 영국 왕립역사학회, 이탈리아 린체이아카데미,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 등의 회원이 되었다. 『대포, 범선, 제국』(1965년), 『중세 유럽의 상인들』(1994년), Storia economica dell’Europa pre-industriale(1974년) 등 수많은 저서를 썼다. 전통적인 유럽풍의 대학자인 치폴라는 기술이 세계사의 흐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대다수의 다른 역사가들보다 훨씬 일찍 이해한 역사가였다. 그는 문서고의 오래된 사료들을 발굴하고 해석하는 미시적 연구부터 1천 년의 이탈리아 역사를 아우르는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앙리 피렌과 페르낭 브로델조차 경제학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비판했던 그는 『시계와 문명』에서 개별적인 사료와 문명적 전환 사이를 오가는 대가의 솜씨를 풍성하게 보여준다.

 

옮긴이 최파일

서울대학교에서 언론정보학과 서양사학을 전공했다. ‘바른번역’에서 번역을 공부했고, 역사 분야를 중심으로 해외의 좋은 책들을 소개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 축구와 셜록 홈스의 열렬한 팬이며, 제1차 세계대전 문학에도 관심이 많다. 옮긴 책으로는 『대포, 범선, 제국』, 『아마존』, 『근대 전쟁의 탄생』, 『십자가 초승달 동맹』,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스파르타쿠스 전쟁』, 『트로이 전쟁』이 있다.

 

『시계와 문명』추천사

 

치폴라는 문서고의 기초 작업에서 나온 미시적 연구부터 1천 년의 이탈리아 역사를 아우르는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에서 뛰어난 연구를 보여준다.

- 프린스턴대학교 역사 교수, 앤서니 그래프턴Anthony Grafton


무미건조한 기계를 가지고 역사의 핵심 주제로 통하는 길을 열어젖힌다. 상상력이 풍부하며 시야는 광범위하다.

-『이코노미스트Economist


카를로 치폴라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근대사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The Times Literary Suppl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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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지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