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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知 - 세상 읽기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돌아보기: 이스라엘 우파와 이슬람 강경파가 만드는 폭력의 상승 나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돌아보기

  

나를 괴물이나 학살자로 불러도 좋다. 이스라엘을 유대인 나치 국가라 불러도 좋다. 죽은 성자보다는 그게 낫다.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전 총리 (샤브라-사틸라 난민촌 학살에 대해)

 

유럽인 한 명을 살해하는 것은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왜냐하면 이는 억압자 한 명과 피억압자 한 명을 동시에 해방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살해로 인해 한 명의 죽은 자와 한 명의 자유인이 남게 된다.

-장 폴 사르트르 (알제리 민족 해방 전쟁에 대해)

 


 

이스라엘은 인구 720만명, 면적 약 2만㎢ (남한 면적은 약 10만㎢)의 작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은 중동의 군사 최강국이며 유일한 핵보유국입니다. 20세기 전반기에만 해도 (대부분의 중동 국가들이 그러하듯) 이 ‘유대인 국가’는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말 시작된 시오니스트 운동은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는 과업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박해를 받았으며, 특히 ‘홀로코스트’라는 사상 초유의 민족 멸절을 경험한 유대인들은 시오니즘에 고무되어 20세기 전반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대거 이주했습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중동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는 땅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영국은 중동의 아랍인들을 설득해 오스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습니다. ‘아랍 봉기’라고 불리는 변방의 이 작은 전쟁은 영화<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배경이 됩니다. 이 때 영국은 아랍인들에게 전쟁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아랍인들의 독립을 약속합니다. (1915년 맥마흔 선언). 한편으로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미국 내 유대인들의 영향력과 재원을 활용하기로 합니다. 그 조건으로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하는데 (1917년 벨푸어 선언), 이는 결과적으로 일종의 이중 계약이 되고 맙니다.

 

 

4차례의 전쟁과 유대인 국가 건설

 

20세기 전반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한 유대인 민족주의자들은 자체적으로 국가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원주민인 아랍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준군사 집단인 이르군과 하가나를 창설하고 아랍인과 영제국을 상대로 무장 투쟁을 벌입니다. 한 민족 공동체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정치 지도부와 민병대를 구성하고 무력 항쟁을 수행하는 일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독립 선포와 더불어 군사적 승리를 통해 주권을 확보한 뒤에 국제 사회의 승인을 얻는 일련의 과정을 국가 형성(nation-building)의 일반적인 경로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민족이 아니며, 이미 아랍계 선주민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넘깁니다. 유엔은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할하여 2개의 국가, 즉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를 세우는 방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아랍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1948년 건국 초기부터 실제로 ‘군사력을 통해 지도상에서 이스라엘을 지워버리려는’ 아랍 국가들로부터의 도전을 극복해야만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은 이후 4차례에 걸쳐 일어난 중동 전쟁을 통해 공고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동지도 건국 초기부터 이스라엘은 주변의 아랍 강대국들의 위협 속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등 이스라엘 주변의 아랍 국가들은 군사력이나 인구 측면에서 압도적인 상대였고, 20세기 중후반 내내 ‘유대인 국가 파괴’라는 목표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예를 들어 1973년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일으킨 욤키푸르 전쟁(4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재래식 군사력에 의한 국가 사멸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시리아와 이집트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은 48시간 만에 이스라엘군 17개 여단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시리아-이집트 연합군의 기습으로 패전 위기에 몰린 이스라엘 군부는 마지막 카드로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이스라엘 여성 총리였던 골다 메이어는 핵무기 사용에 반대하면서 비밀리에 미국 워싱턴으로 날아가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외교 안보 보좌관에게 매달렸다. 키신저의 회고록 『위기Crisis』에 따르면 외교적 프로토콜을 무시하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워싱턴에 나타난 메이어 총리는 1시간 동안 닉슨 대통령을 붙들고 눈물로 도와달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미국은 신형 무기들을 이스라엘로 긴급 공수하고 첩보위성기로 아랍군의 동태를 알려줘 전쟁의 흐름을 뒤집었다. 막판에 승리하긴 했지만, 이스라엘이 지불한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아 전사자가 2500명, 부상병 7500명에 이르렀다. (김재명,『오늘의 세계 분쟁』, 235쪽)

 

4차 중동 전쟁을 끝으로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협정이 맺어지면서 대이스라엘 전쟁 동맹은 해체되고 유대인 국가 존립의 문제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집트는 평화조약을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받게 되었습니다. 소련과 긴밀히 연계하던 이집트가 미국의 대외 원조 2위 국가가 된 것이죠. 물론 미국의 대외 원조 1위는 이스라엘입니다. (미국 전체 대외 원조액의 20%인 30억 달러). 중동에 모두가 바라는 평화가 찾아온 대신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의 문제는 아랍 형제들로부터도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점령지: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의 영토적 기초

 

4차례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예상과 달리 성공적으로 생존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1967년에 벌어진 3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전쟁준비를 하던 아랍 국가들을 선제공격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는데, 전쟁이 6일 만에 끝났다고 하여 ‘6일 전쟁’이라고도 합니다.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새로 획득한 영토는 요르단 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 시리아의 골란 고원,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로 본래 영토의 7배가 넘는 크기였습니다. (이중 시나이 반도는 1973년 평화협정으로 이집트에 반환). 바로 이때 획득한 영토가 바로 ‘점령지’로 불리는, 오늘날 팔레스타인 분쟁의 핵심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움켜쥐고 있는 점령지야말로 팔레스타인인들이 건설해야할 국가의 기초적 영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점령지에서의 이스라엘군 주둔이 장기화되고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한 가혹한 억압이 지속되자 1987년에 대규모 민중 봉기인 1차 인티파다가 일어났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항쟁은 전 세계 여론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이스라엘의 무단 통치에 대한 비판을 이끌어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20년간 살인, 납치, 폭탄 테러 등으로 악명을 떨쳤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도 이스라엘의 완전한 제거라는 원래의 노선을 포기하고 ‘2국가 공존’으로 방향을 틀게 됩니다. 이러한 전환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의 역사적인 분수령인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로 야세르 아라파트 PLO 총재와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팔레스타인 자치에 관한 협약을 맺음). 


 

 ▶ 이스라엘 점령지 연두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6일 전쟁 후 이스라엘이 획득한 영토이다. (왼쪽부터 가자지구, 서안지구, 골란고원) 


전쟁 윤리학의 대가이자 미국 정치철학자인 마이클 왈저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국가를 필요로 하듯이 팔레스타인인들도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국가를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 왈저는 6일 전쟁 이전의 국경선(현재의 점령지를 포함하지 않은 원래의 국경선)으로 규정된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한 전쟁이 정당한 것처럼,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점령을 끝내고 독립 국가를 창설하려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전쟁도 정당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6일 전쟁 이전의 국경선 회복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화해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인 것입니다.

 

반대로 왈저는 ‘유대인을 지중해로 쓸어버리려는’ 아랍 국가들의 전쟁이나 점령지에 대한 지배 또는 병합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의 전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를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분쟁과 중동의 평화가 위협받을 때는 언제나 이런 과격하고 공격적인 입장을 지닌 세력이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우파의 전략

 

우선 이스라엘 내 우파들을 들 수 있습니다. 리쿠드당으로 대표되는 우파들은 기본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2국가 공존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점령지에 대한 군사적 통제를 지속하여 팔레스타인 국가가 영원히 불구의 상태로 남아있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1967년 방어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결과로 이스라엘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된 지역들은 미래의 평화를 위해 사용될 협상용으로 여겨졌다. 이 시기에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인들 모두 이스라엘의 점령이 단지 일시적인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10년 후 메나헴 베긴 총리(리쿠드당)는 “점령 지역” 같은 것은 없다고 못 박아 말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통제력 행사하고 있는 모든 지역은 이스라엘의 영토라는 주장이다.

(마이클 왈저, 『전쟁과 정의』, 166쪽)

 

우파는 평화협정보다는 이스라엘이 현재 누리고 있는 힘의 우위를 통해 현 상태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또한 유대인 국가의 존속이라는 안보 논리를 내세워 점령지에 대한 가혹한 정책을 추구하며, 아랍인들과의 대결적 국면을 조성합니다. 우발적인 폭력 사태나 의도된 테러가 발생하게 되면 이스라엘 국민들이 가지게 되는 불안과 공포를 이용해 이스라엘 국내 정치에서 주도권을 쥡니다. 팔레스타인인의 테러 행위는 이스라엘 내부에서 자유주의 진영이나 좌파 진영에게는 재앙으로 작동하며, 그들을 주변화시키는 효과를 가집니다. 

 

▲ (좌) 요새와도 같은 이스라엘 정착촌 전경 (우) 서안지구 내 점점이 흩어져 있는 정착촌 위치를 표기한 지도

 

특히 서안 지구 내의 유대인 정착촌 문제는 한편으로는 점령지에 대한 노골적인 식민화 정책이기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파가 성공적으로 기획한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번 건설된 정착촌은 철수가 어렵기 때문에 이것은 이스라엘 국내 정치에서 일종의 ‘쐐기’ 역할을 합니다. 정착촌 주민들은 점령지 정책을 역으로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우파 운동의 보루가 되는 것이죠.

 

중동 현지를 취재하면서 인상적이었던 점 하나는 팔레스타인 곳곳에 세워진 유대인 정착촌들이 대부분 외부의 공격에 대항할 수 있도록 요새화됐다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마을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연붉은색의 지붕을 한 현대식 주택들이 반듯반듯하게 지어져 있다면 틀림없이 정착촌이다. 현재 서안 지구에는 40만 명의 정착민들이 살고 있다. 유대인 정착민들은 이스라엘군의 보호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자체적으로도 무장을 한, 말하자면 준군사 집단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김재명,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375~376쪽)

 

마이클 왈저는 정착촌 이주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던 이스라엘 노동당 정부(라빈, 바라크 총리)가 정치적으로 큰 실수를 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정착촌 문제를 방기함으로써 이스라엘 정치에서 우파에게 유리한 지형이 형성되도록 허용했다는 것입니다. 정착민들도 ‘이스라엘 국민’이므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주둔해야 한다는 우파의 입장이 강화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우익 세력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만일 이스라엘인들이 요르단 강 서안 지구 내에 위치한 유대인 마을인 아리엘과 키리앗 아르바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인들은 머지않아 텔아비브와 하이파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하게 되리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아리엘과 키리앗 아르바를 위해 싸우면 진정한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마이클 왈저, 『전쟁과 정의』, 170~171쪽)

 

1993년 미국의 중재로 이루어진 오슬로 평화협정의 침몰 역시 같은 시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슬로 평화협정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이 2국가의 공존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지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총리는 노동당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였고 팔레스타인 측 지도자는 야세르 아라파트였습니다. 그러나 2국가 체제는 강경파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극우파에 의해 라빈 총리가 암살되고, 팔레스타인에서는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자살 폭탄 테러를 자행해 화해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이어 우파 리쿠드당의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가 되자 이스라엘은 강경 모드로 전환되었습니다.

 

▲ 1993년 오슬로 협정 왼쪽에서부터 라빈 이스라엘 총리, 클린턴 미국 대통령, 아라파트 PLO총재  

 

노동당이 다시 정권을 잡았을 때 평화협상(2000년 캠프 데이비드에서 클린턴 대통령이 중재)이 재개되었으나 협상을 반대하는 리쿠드 당수인 아리엘 샤론이 예루살렘의 이슬람 사원에 무장 호위병을 대동하여 의도적으로 난입함으로써 유혈 충돌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충돌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자극해 2차 인티파다로 불리는 민중 봉기로 발전하였고, 이번에는 1차 인티파다와는 달리 팔레스타인 무장 집단들이 동원된 준전쟁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7천 명의 사망자를 낸 2차 인티파다는 이스라엘에서 우파 정권이 들어서고 팔레스타인에서도 온건파보다 과격파들이 득세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후 이스라엘 우파 정권은 미국의 조지 부시가 이끄는 네오콘 정부와 깊은 유대를 맺고, ‘힘의 우위에 기반한 현상 유지’를 팔레스타인 정책의 기조로 삼았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들의 군사적 위협으로 국가 존립을 걱정하는 처지에서 중동의 최강자로 등극하였기 때문입니다. 군사력에 의한 일방주의가 협상에 의한 평화를 대체한 것입니다.

 

 

유대인 국가의 지속과 이스라엘판 아파르트헤이트

 

이스라엘 국내 정치에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인구 지형 문제로 이스라엘을 유대인 국가로서 지속하는 문제입니다. 이는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의 문제나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유로운 이주에 관한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우파들은 이스라엘 내 아랍인 인구가 증가하는 것이 유대인 국가에 심대한 위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이스라엘 전체 인구 720만 명 가운데 유대인이 550만 명, 아랍인이 170만 명입니다. 즉 4명 가운데 1명꼴이 아랍인인 셈이며 현재 이 수치는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 유대인에 비해 팔레스타인인들이 출산율이 비교도 안될 만큼 높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이런 인구 균형은 머지않아 무너질 전망이다. 아랍계 가정에는 산아제한이라는 개념이 없다. 나는 중동 취재를 갈 때마다 10명 넘는 아들딸을 두고 있는 집이 흔한 것을 보며 새삼 놀라곤 했다. 반면 유대인 가정은 종교적으로 아주 보수적인 사람들 빼고는 한두 명의 자녀를 두는 가정이 대부분이다. 이스라엘 하이파 대학의 아논 소퍼 교수는 이미 2003년에 “2040년이 되면 이스라엘과 점령지에서의 아랍계 인구가 거의 60%에 이를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PLO총재인 아라파트도 “시오니스트들에 대항하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아랍 여성의 자궁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김재명,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314~315쪽)

 

서안 지구에 건설되고 있는 높이 8m, 길이 720km의 거대한 분리 장벽도 인구 지형 변화를 최대한 막기 위한 이스라엘 우파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점령지의 아랍계 인구가 이스라엘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수차례의 전쟁으로 주변 국가로 뿔뿔이 흩어진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엔에 따르면 현재 43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서안지구, 가자지구,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에 존재하며, 그중 130만 명이 난민촌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아랍 세계에서 이스라엘로 탈출한 유대인 난민도 70만 명 정도 되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하층을 이루고 있으며 이슬람에 적대적인 극우 성향을 띱니다. 이처럼 인구 지형의 변화는 장기적으로 이스라엘의 진보 진영에 유리할 수 있으나 단기적으로는 ‘유대인 국가’라는 정체성을 둘러싸고 우파의 인종차별주의적 정책을 강화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 분리 장벽 이스라엘이 서안 지구에 건설하고 있는 높이 8m, 길이 720km의 분리 장벽.

 

 

팔레스타인: 파타당과 하마스의 대립

 

그럼 이제 팔레스타인 쪽을 알아보겠습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에는 각기 다른 이념을 가진 여러 가지 정파가 존재하지만 주류는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끌던 파타당(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이었습니다. 파타당은 세속주의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으로 오랜 동안 팔레스타인 독립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초창기에는 이스라엘 국가 파괴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여 무수한 테러를 자행했으나 현재는 유대인 국가와 공존하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로 노선을 바꾸었습니다. 파타당은 서안 지구에 근거지를 두고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데 부패로 악명이 높아 민심을 잃고 2006년 총선에서 하마스에 참패를 당했습니다.

 

또 다른 주요 정당으로 하마스(이슬람 저항운동)가 있습니다. 하마스는 아흐메드 야신이 1987년 1차 인티파다 직후에 창설한 단체로 수니파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해 이스라엘을 상대로 지하드를 수행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하고 있습니다.

 

하마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팔레스타인에 이슬람 신성국가를 뜻하는 ‘움마’를 세우는 것이다. 하마스의 방향과 운동의 대의를 밝힌 것이 하마스 헌장이다. 이 가운데 제11조는 “어떤 당파도 팔레스타인 땅을 포기할 권리가 없다”고 되어 있고, 제13조는 “지하드야말로 대이스라엘 투쟁의 유일한 해결책”이며 중동 평화를 위한 국제회의 따위는 “시간 낭비이며 어린애 장난”이라고 비판했다. (김재명,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275쪽)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테러 공격을 수행해왔습니다. 하마스 창립자의 아흐메드 야신은 한 인터뷰에서 테러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야신은 2004년 이스라엘군 헬기의 미사일 공격으로 사망).

 

“유대인은 나치 학살의 희생자들이지만 지금 이곳에서 그들이 나치에게 배운 짓을 그대로 저지르는 모습이다. 대대로 살던 사람들을 난민으로 쫓아내고, 다시 총으로, 대포로, F-16으로 죽이는 것은 국가 테러나 다름없다. 그들이 우리의 저항 운동을 테러라 부른다면 일종의 ‘테러 균형’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김재명, 『오늘의 세계 분쟁』, 85쪽)

 

하마스는 현재 가자 지구를 통치하고 있으며 세속주의적인 파타당과 경쟁,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범이슬람 국가 공동체를 추구하기 때문에 세속적인 근대 민족국가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마스 헌장에서 알 수 있듯이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들에게 내어주는” 오슬로 협정을 하마스가 지지할리 없습니다. 아라파트는 1993년 오슬로 협정 이후 하마스 요인 수백 명을 체포하는 등 경쟁 세력인 하마스를 탄압했습니다. 이것은 이집트의 세속적 민족주의 정권이 무슬림 형제단을 탄압해왔던 것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스라엘이 초창기에 파타당을 약화시키기 위해 하마스를 지원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프가니스탄 내전에서 미국이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탈레반을 지원한 것과 유사합니다.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토니 코데스먼에 따르면 “당시 이스라엘은 아라파트의 PLO를 견제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야신의 무슬림 형제주의 조직을 밀어주었다. (김재명,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269쪽)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대한 한결같은 무장 투쟁과 함께 학교와 병원을 짓는 등 사회사업으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였고, 2006년 총선에서는 의석의 5분의 3을 석권하여 제1당이 됩니다. 그러나 미국과 이스라엘은 파타당의 마무드 압바스를 지원하고 하마스를 테러단체로 규정, 배제하는 정책을 취합니다. 하마스와 파타당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고, 2007년에 하마스는 가자 지구에서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이 일대를 장악합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에서 파타당과 하마스에 의한 권력의 지리적 분할이 완료됩니다. 즉 파타는 서안 지구, 하마스는 가자 지구를 각각 통치하게 된 것이죠.  

 

 

▲ (좌)가자지구 지도  (우) 하마스 창립자 아흐메드 야신과 가자 시내 자택에서 인터뷰하는 김재명 성공회대 겸임교수

 

하마스의 근거지인 가자 지구는 길이 40km, 폭 4~10km로 면적은 360㎢인 좁다랗고 작은 땅입니다. 자동차로 1시간이면 종단할 수 있는 이 좁은 땅에 15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높은 인구 밀도도 문제지만 북쪽으로 이스라엘, 남쪽으로는 이집트로 가는 길이 봉쇄되어 있고 이스라엘이 해상 루트도 봉쇄하고 있어 주민 전체가 “거대한 감옥에 갇혀” 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를 두고 영국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정치범 수용소”와 같다며 가자 지구 봉쇄 해제를 촉구할 정도였습니다. 가자 지구는 1차 중동 전쟁 때 발생한 난민이 주민의 절반이며, 경제적으로도 매우 침체되어 인구 60%가 하루 2달러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의 침입을 막겠다는 이유로 가자 지구를 봉쇄하고 있지만, 같은 아랍 국가인 이집트는 왜 가자 지구를 봉쇄해왔던 것일까요? 이것은 세속적인 독재 정권이었던 역대 이집트 정부가 하마스의 이슬람 근본주의가 이집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단적인 예로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는 무슬림 형제단에 대해 대대적으로 탄압했으며, 후임인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무슬림 형제단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2011년 무바라크 정권 몰락 이후 이집트에서는 무슬림 형제단이 집권했으나 여전히 가자 지구에 대한 봉쇄는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후 이집트의 이슬람주의 정권은 2013년 군부의 쿠데타로 전복되었습니다).

 

파타당은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해 전쟁을 유도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킨다고 비난하며, 하마스는 파타당이 이스라엘, 미국, 서유럽의 하마스 압살 음모에 가담하여 팔레스타인을 분열시킨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파타당과 하마스의 대립 양상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측도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갈등을 겪고 있으며,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을 때마다 분쟁이 고조되고 평화 협상이 요원해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강경파들은 국외에서 대결적 국면을 조장하고 그것을 다시 국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자양분으로 삼는데, 이 과정에서 폭력의 악순환이 발생합니다. 반면 평화를 바라는 온건파는 쌍방 간의 충돌이 치열해질수록 국내 정치에서 입지가 좁아지고 주변화됩니다.

 

 

평화로 가는 길

 

평화로 가는 길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이 상대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 20세기에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했듯이 아랍인들의 국가 건설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양측 강경파들이 그려놓은 국가의 이미지에서 탈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평화라고 하는 것은 대이스라엘주의와 종교적 구원에 대한 희망의 포기를 의미한다. 이 두 가지는 종교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광신자들 중 소수이지만 매우 열성적인 분파가 영토적 ‘광대함’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의 평화는 매우 작은 국가라고 하는 정신적 제한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매우 작은 국가라는 물리적 제약에 대해 적응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평화는 작은 크기의 이스라엘보다도 더욱 작은 ‘팔레스타인’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이클 왈저, 『전쟁과 정의』, 158쪽)

 

마이클 왈저는 2차 인티파다(2002년) 직후에 쓴 글에서 이스라엘인들은 점령정책을 포기해야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은 테러리즘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먼저 정착지에서 철수하고 포용의 손길을 내밀 때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도 온건파가 힘을 얻고 더 개방된 형태의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절충적 평화에 대한 지지가 표출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가 스스로 겪어야할 내부적 진통의 시작을 의미하며 공존과 평화에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역사는 그와는 정반대의 길, 즉 강경파들의 드라이브와 두 번에 걸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은 사상자 수의 극적인 불균형과 무고한 다수의 민간인 사망자로 인해 학살이나 마찬가지라는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대결적 국면은 앞으로도 당분간 강경파들의 국내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킬 것으로 예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