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율의 줌아웃

암울하고 위대했던 2012~2017

 

천관율 지음 | 미지북스 | 372쪽 | 16,000원

 

데이터 저널리즘의 선구자

 <시사IN> 천관율 기자가 목격한

가장 암울하고 가장 경이로운
한국 사회의 결정적 분기점에 관한 이야기

 

 “한국 보수는 왜 권위주의로 미끄러졌나? 이것은 박근혜라는 기괴한 지도자의 일탈인가, 한국 보수 전체의 속성인가? 진보는 한동안 왜 속수무책이었나? 그리고 어떻게 힘을 되찾았나? 2016년 대분기 이후 유권자 지형은 진보 우위로 재편되었나? 이제 냉전적이고 권위적인 전통 보수가 다시 다수파로 돌아올 길은 막혔는가? 만약 그렇다면, 보수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우리 시대를 압축해 보여주는 27편의 기사를 모으고 새로 쓴 글을 덧붙여 책으로 엮었다. 기사는 2009년부터 2018년 사이에 작성되었지만, 책이 집중하는 시기는 2012~2017년 5년, 가장 암울하고 가장 위대했던 그 5년이다. 이 경이로운 시기를 통과한 우리는 이제 민주정의 주권자가 된다는 게 얼마나 두근거리는 경험인지를 알아버렸다. 우리가 이 놀라운 2016년 겨울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가장 최근 우리가 겪은 거대한 분기에 관한 이야기
이 책은, 우리가 지나온 거대한 분기점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 보수는 왜 몰락했을까? 그리고 촛불 이후 한국 사회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이행하게 될 것인가? 데이터 저널리즘의 선구자 <시사IN> 천관율 기자는 이 책에서 지난 10년을 복기하며 우리에게 열린 미래를 조심스레 조망한다.
 『천관율의 줌아웃』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2016년 겨울 광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주권자들이 수행한 고도의 전략과 인내, 위대한 승리의 순간을 확인한다. 국민은 원했던 대로 자격 미달의 통치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그렇다면 통치자는 어떤 의미에서 결격이었던 것일까? 2부는 시간을 거슬러 보수의 몰락 과정을 소개한다. 보수의 거침없는 퇴행은 진보의 지리멸렬과 동전의 앞뒤를 이루고 있었다. 3부는 야권이 김해 봉하에서 그들의 지도자를 떠나보내던 장면에서부터 권토중래하기까지의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4부에서 저자는 촛불이 열어젖힌 이 시대를 ‘촛불체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하며 우리에게 열린 여러 가능성을 타진한다.

 

천관율의 줌아웃

- 최대한 멀리서, 구조와 맥락을 드러내는 글쓰기
보통 좋은 기자란 줌인(zoom-in)을 잘하는 기자를 말한다. 피사체, 즉 취재 대상을 가까이 잡아당겨서 독자에게 상세히 보여줄수록 훌륭한 기자가 된다. 하지만 저자는 그 반대편에서 자신의 재능을 찾았다. 저자가 택한 전략은 줌아웃(zoom-out)이다. 피사체, 즉 취재 대상을 최대한 멀리서 최대한 다른 시야로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접근법이다. 줌아웃이 잘된 기사는 마치 드론으로 찍은 영상 같아서, 피사체의 디테일은 흐릿한 대신 그것이 어떤 구조와 맥락에 있는지 더 잘 보여주는 강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구조와 맥락은 사건과 디테일보다 느리게 변한다. 특히 중요하고 뿌리 깊은 구조일수록 더 느리게 변한다. 느린 문제를 다루려면 느린 저널리즘이 필요하고, 잘 수행된 느린 저널리즘은 그만큼 시간을 견뎌내는 힘이 있다. ‘줌아웃’은 저자가 자신의 느린 저널리즘을 일컫는 특유의 표현이다.

 

2016년 겨울, 광장에 선 주권자들의 선택
1부에서 저자는 독자를 2016년 겨울의 광장으로 데려간다. 암울했던 시기의 끝자락에서 광장의 시민들은 기로에 서 있었다. 가정해보자. 만약 그해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이겼다면? 촛불집회가 격해지면서 중산층이 이탈했다면? 만약 대통령이 새누리당에 대한 장악력을 유지하여 탄핵안이 부결됐다면? 만약 대통령이 2선 후퇴와 거국내각 구성을 받아들였다면? 이러한 가능성은 수없이 존재했고 어느 것이든 일어났다면 결과는 퍽 달라졌을 것이다. 달리 말해, 광장에 선 주권자들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는 길은 선택지가 매우 좁은 길이었다. 시민들은 지도부도 없이 고도의 전략을 마련해야 했고, 인내심 있게 대오를 유지해야 했다. 그때 거기서 그들은 어떤 길을 발견했던 것인가?
 2016년 겨울 광장의 목표는 ‘혁명’이 아니라 ‘체제의 복원’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광장이 선택한 무기는 횃불과 단두대가 아니라 입법부와 헌법이었다. 저항권의 직접적 행사, 폭력을 동반하는 혁명적 수단은 기각되었다. 광장의 목표가 혁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승리는 거의 초현실적인 성취가 되었다. 광장의 시민들은 집요하게 입법부를 움직이고 헌법을 통해 명령을 도출했으며, 결국 체제로 하여금 주권자의 의지에 복무하게 만들고 통치자를 해고하는 데 성공하였다. 언뜻 당연해 보이지만 이는 지구에서 극소수 국가만이 도달한 경지이자, 이전까지 한국 현대사가 증명한 적 없는 명제였다.
 무엇보다 이로써 한국인들은 원했건 아니건 ‘체제의 복원’을 넘어, 1987년 힘으로 체제를 때려눕혔던 경험에서 다시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나아갔다. 익숙했던 광장 대 정치의 대립을 깨고, “광장이 정치를 발견한 것이다.”

 

한국 보수는 왜 몰락했는가?
2부는 한국 보수의 몰락과 파산에 관한 이야기다. 광장의 촛불과 입법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박근혜 정부는 줄곧 그들의 시선에 의지하는 객체로만 등장한다. 말하자면 그다음 ‘줌아웃’의 대상은 박근혜 정부와 보수이다. 도대체 박근혜 정권의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박근혜 정권의 문제는 단순히 리더만의 문제였던 것인가 아니면 보수 일반의 문제였던 것인가?
 남북 정상회의록 공개 파동을 시작으로 세월호 참사를 거쳐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에 이르기까지, 박근혜 정부는 보수의 가치와 정면 대결하는 보수 정부였다. 한국에서 보수의 세계관은 체제 경쟁을 전제했고, 북한을 주적으로 하는 대결주의는 한국 보수의 근본 정서로 자리 잡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수에게 국가란 북한과의 대결을 집행하는 총동원 기구였다. 국가의 적은 휴전선 이북에도 있지만 이남에도 있었다. 국가권력은 ‘국가의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상상되었다. 문제는 박근혜 정부의 이런 모습이 박근혜라는 기묘한 정치인의 일탈로 인한 결과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는 대결주의를 내면화한 한국 보수의 본령에서 곧바로 도출되는 태도였다.

 


 2016년 촛불은 박근혜식 통치를 ‘체제 밖의 어떤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이 맥락에서, 2016년 촛불은 진정으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국가의 적’을 상대하는 총력전 정부와 전시 사령관으로서의 대통령이라는 한국 보수의 통치 원리를 처음으로 전면 기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박근혜 정부와 이를 옹위한 보수는 돌연 오른쪽 끝에서 주변화되었다. 과연 보수는 잃어버린 옛 영토를 회복할 수 있을까?

 

진보가 지나온 긴 터널
보수의 거침없는 퇴행은 분명 진보의 좌충우돌과 갈지자걸음의 도움을 받은 결과였다. 이 책의 3부는 진보가 그들의 지도자 노무현을 떠나보내던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곳에는 노무현 100만 명이 있었다.”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하기까지 진보는 두 번의 대선 패배를 포함하여 긴 터널을 지나야 했다.
 2012년 대선이 끝난 후 저자는 윤여준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인터뷰에서 이 보수주의자는 진보 일각에 존재하는 선악의 세계관을 일축하고, 대선의 패배는 차라리 진보의 ‘자기 정립’ 실패에 있다는 답을 내놓는다. 저자가 왜 박근혜가 아닌 진보 쪽의 문재인을 지지했는가라고 묻자 이 원로는 ‘체제의 지속 가능성’을 생각했을 때 문재인이 더 나은 후보였다는 답을 내놓는다.
 이어지는 글은 이를테면 진보가 왜 ‘자기 정립’을 해내지 못하는가에 관한 보고서이다. 여기서 저자가 내린 중요한 결론은 결국 진보가 집권하기 위해서는 안정된 리더십 창출을 위한 ‘제도화’와, ‘제도에 대한 신뢰’가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지금의 대통령이 이 과업에 성공하고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2014년 8월 당시에는 그것이 가능할 것인지, 누가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어떤 국민도 정치인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2017년 대선은 정초 선거였나?
유권자의 투표 행태는 늘 요동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지속성과 복원력이 강하다. 한번 정착한 기본 구도는 여간해선 바뀌지 않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첫 대선과 1990년 3당 합당을 거치면서, 한국 정치는 지역 구도를 바탕에 깐 진보·호남당과 보수·영남당의 경쟁으로 고착됐다. 이처럼 기본 구도를 짜는 선거를 정치학자들은 ‘정초 선거(founding election)’라고 부른다.
 2017년 대선은 한국 정치의 기본 구도를 다시 재편하는 정초 선거가 될 가능성이 있다. 보수 블록이 구조적으로 쪼개지고, 쪼그라들었다. 보수를 대표하는 두 후보의 득표율 합은 30.8%에 그쳤고, 지지의 보루였던 수도권의 자산 소유 중산층, 영남 보수 연합의 한 축인 부울경(부산·울산·경남), 장·노년 보수 동맹의 한 축인 50대, 이 세 축이 동시에 흔들렸다.
 저자는 묻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루스벨트의 길과 이명박의 길 중 어느 곳을 향하게 될까? 1932년 당선 이후 유권자 지형의 구조 변동을 안착시켜 ‘뉴딜체제’를 완성해낸 루스벨트의 길을 간다면, 2017년 대선의 선거 구도는 지속될 것이고 훗날 이 선거는 정초 선거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반면 무너진 상대 진영을 재건시켜주는 이명박의 길을 간다면, 2017년 대선은 마치 2007년 대선이 그랬듯 단순한 막간극이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촛불 이후 대두한 ‘적폐 청산’과 ‘협치’ 담론을 문재인 정부가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촛불이 열어젖힌 시대의 여러 가능성
4부는 책 전체에서 가장 독특하다. 저자는 2014년에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를 분석한 기사를 쓴 이후로 온라인 공간의 담론 지형을 꾸준히 탐색해왔다. 여성 혐오, 세월호 유가족 혐오,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불공정 논란까지, 한국 사회를 뒤흔든 폭발력 있는 담론들을 추적한 이 부의 이름은 결국 ‘공정의 역습’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의 ‘공정에 대한 감각’이 갈등의 전선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촛불집회는 최순실 국정 농단과 정유라 특혜 논란이라는 희대의 불공정 사태로 폭발했고, 그 흐름에서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를 가장 괴롭힌 주제도 바로 이 ‘공정’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공정인가? 사람들은 어떨 때 공정하다고 느끼고 무엇을 불공정하다고 느끼나? 사람들의 ‘공정에 대한 감각’은 노력에 따른 공정한 보상을 중시하는 ‘비례 원리’와, 보편적으로 평등한 상태를 지향하는 ‘보편 원리’ 두 가지로 나뉜다. 어느 것이 더 강하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사안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다. 의미심장한 부분은 다른 잣대에 의거해 다른 결론을 내린 양자 모두가 스스로를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양자의 차이는 이성의 차원보다 더 깊은 직관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로서, 나아가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비례 원리의 극단에서는 ‘일베’가 스스로를 ‘공정’의 보루로 자임할 수 있게 된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이 ‘공정’ 화두가 ‘체제 복원’ 이후 시대정신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간 사상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신뢰와 공동체 의식과 감시와 처벌이 뒤섞여 연대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4부에서 저자는 기자로서 명성의 중요한 부분인 데이터 저널리즘을 솜씨 있게 펼쳐보이며, 온라인상의 수십만 건 게시글과 댓글들을 직관적인 자료로 정리하여 제시한다. 보수의 재건을 고민하는 지도자와 기획자라면 4부에서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 사회의 진보를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4부를 통해 주어진 과제를 더 분명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      *      *

 

지은이  천관율

<시사IN> 기자.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2008년부터 기자로 일했다.
기자가 글 쓰는 직업이라고 잘못 알고 골랐다. 되고 보니 사람 만나는 직업이었다.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를 받는 타입이 있고 고갈되는 타입이 있다. 전적으로 후자에 속한다. 청중 서른 명이 넘어가면 마이크도 못 잡는다. 방송은 이제 거절하는 멘트도 입에 붙었다. “흥미로운 기획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울렁증이 심해서….” 그런 주제에 11년째 기자를 하다니 스스로 놀랄 때가 많다.
2008년부터 주로 정치 기사를 썼다. 하도 낯을 가리니 정치권 네트워크가 경력 대비 알량하다. 2011년부터 데이터 저널리즘을 비교적 일찍 시도해 이런저런 강연 연사로 불려다녔다. 정작 쓸 줄 아는 프로그램은 워드프로세서 하나다.
의사소통 도구 중에 그나마 멀쩡하게 다루는 도구가 글이다. 영상이 지배하는 시대에도 활자의 매력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다닌다. 할 줄 아는 게 그거 하나라 예측이라기보다는 염원에 가깝다.
기자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디테일에 약하다. 턱밑까지 파고드는 인파이터도 못 된다. 사안의 구조와 맥락을 드러내는 접근법, 드론으로 항공사진을 찍듯 뒤로 쭉 빠져서 보여주는 접근법을 더 좋아한다. 그런 걸 ‘줌아웃’이라고 혼자 부르곤 했다. 그게 첫 책의 제목이 되었다.

 

 

 

 

 

교보문고 바로가기

알라딘 바로가기

예스24 바로가기

인터파크 바로가기

 

백년전쟁 1337~1453』

중세의 역사를 바꾼 영국-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이야기

 

데즈먼드 수어드 지음 |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416쪽 | 16,000원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백년전쟁 이야기

21세기에 톺아보는 왕좌의 게임 

"이보다 쉽고, 재밌고, 정확하게 백년전쟁을 풀어쓸 순 없다."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백년전쟁의 서막을 연 에드워드 3세, 몸은 허약했지만 뛰어난 지성과 통찰력으로 전쟁을 슬기롭게 헤쳐나간 샤를 5세, 프랑스 정복을 눈앞에 두었지만 죽음 앞에 결국 무릎 꿇은 헨리 5세, 명실 공히 백년전쟁 최고의 스타 잔 다르크. 유럽 중세사에서 가장 다채로운 빛을 발했던 인물들이 21세기에 되살아나, 중세 유럽의 패권을 두고 벌어진 파란만장한 무용담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백년전쟁』은 수많은 영웅들이 포효하던 시대로 우리를 데려가 깊이 있는 지식과 뛰어난 세부 묘사 그리고 명료한 문체로 백년전쟁을 이해하기 쉽게 조명한다.” _뉴요커

 


 

 

‘백년전쟁’은 19세기 후반이 돼서야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말로 100년 넘게 이어진 일련의 전쟁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1337년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당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던 에드워드 3세에게서 잉글랜드가 보유하고 있던 기옌 공국을 ‘몰수’하면서 시작된 이 일련의 전쟁들은 1453년 잉글랜드가 결국 기옌의 보르도를 상실하면서 끝났다. 일련의 전쟁이란 슬라위스 해전(1340년), 크레시 전투(1346년), 푸아티에 전투(1356년), 아쟁쿠르 전투(1415년), 잔다르크의 등장(1429년), 카스티용 전투(1453년) 등을 말한다.

 

누가 프랑스의 진정한 왕인가?

1328년, 프랑스 국왕 샤를 4세가 죽자 왕위는 발루아의 필리프(필리프 6세)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해협 건너 또 한 명의 왕위 계승 후보가 있었으니 잉글랜드 국왕의 모후 이사벨이었다. 그녀는 샤를 4세의 누이동생이란 점에서 사촌지간인 발루아의 필리프보다 오히려 우선순위에 있었다. 많은 이들은 그녀 또는 그녀의 아들이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파리의 의회는 이사벨을 후보에서 배제했다.
 처음에 이사벨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그의 왕권은 불안했고 그에게는 프랑스 국왕에 맞설 만한 실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화급한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아키텐 공국(기옌)을 계속 보유하는 문제였다. 기옌은 잉글랜드가 소유한 웨일스나 아일랜드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경제적 가치를 가진 영토로서 오로지 프랑스 국왕의 가신 자격으로만 보유할 수 있는 땅이었다. 힘이 미약했던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충성 신서를 하여 기옌을 지켰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 과도기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가 기옌을 통합하려는 의지를 읽었고 프랑스 국왕과 평화를 이룰 방도를 모색했다. 그러나 1334년 숙적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의 품에 안기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관계는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1337년 5월 필리프 국왕은 기옌을 몰수한다고 선언하였고, 에드워드 3세 또한 그에게 정식으로 도전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유럽 최강의 프랑스 VS 작고 가난한 잉글랜드

당시 프랑스 왕은 의심의 여지없이 서유럽의 첫째가는 통치자였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훨씬 능가하는 존재였고, 1309년 이후로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도 다소간 지배했다. 개전 시점에, 플랑드르와 브르타뉴, 기옌과 같은 반(半)자치 지역을 제외하고도 필리프 6세는 왕국의 4분의 3 이상을 직접 지배하고 있었다. 1330년대 프랑스의 인구는 2,100만 명에 달했고 이는 잉글랜드의 다섯 배였다. 반면 중세 잉글랜드는 인구 과소 지역으로, 경작지보다 숲과 황야가 더 많은 나라였다. 이 작고 가난한 나라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재산은 양모였다. 또 프랑스의 국왕과 달리 잉글랜드 국왕은 통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크레시 전투, 장궁이 판금 중기병을 무릎 꿇리다

프랑스 기사 계급은 필리프 6세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 프랑스는 거대한 규모의 기사 계급을 보유하고 있었고, 재위 초기에 필리프 6세가 이끈 중무장 기병 부대는 명실공히 서유럽의 최강 부대였다. 반면 잉글랜드는 개전 직전에야 겨우 약간의 빛을 발견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3세는 오래도록 고전을 면치 못했던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1333년에 처음 승리를 맛보았는데, 승리의 원동력은 장궁에 있었다. 장궁은 분당 10~12발을 쏘아올려 하늘을 까맣게 덮을 수 있었고 가까운 거리에서는 판금 갑옷도 뚫을 수 있는 가공할 무기였지만, 아직 해협 건너에는 그 존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1346년 에드워드 3세는 원정을 떠나 크레시 숲 근처에서 필리프 6세의 3만 병력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크레시 전투는 일종의 군사 혁명을 예고한 전투였다.

 

전쟁이 돈 버는 사업이 되다

잉글랜드인들에게 백년전쟁은 모험적인 비즈니스였다. 돈 놓고 돈 먹기였다. 높은 이익을 기대하고 벌이는 하이리스크의 투기적 사업이었다. 엘리트부터 기층 민중까지 온 나라가 정복 사업과 약탈에 뛰어들었다. 전쟁 초기에 잉글랜드는 주로 본국의 세금과 특별세금, 은행가와 상인들이 빌려준 돈으로 전비를 충당했다. 하지만 그 정도 자금으로는 전쟁을 치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아무리 모아도 한 달 이상의 전쟁 수행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슈보시와 파티스, 몸값 받아내기 등의 관행이 일찌감치 제도화되면서 해결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일종의 중세적 ‘총력전’을 목표로 슈보시(chevauche e), 즉 체계적으로 적의 경제적 기반을 초토화하고 ‘약탈’하는 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전리품은 잉글랜드군이 전쟁을 지속해나가는 중요한 자원이자 동력이 되었다. ‘약탈’ 외에도 돈을 버는 방법은 다양했다. 가장 수익성이 좋은 방법은 포로들의 ‘몸값’을 받아내는 것, 즉 포로에게 자유를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 잉글랜드군은 ‘파티스(patis)’라 불리는 보호비 갈취를 통해서도 많은 돈을 벌었다.

 

엘도라도가 된 프랑스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에서 얻은 어마어마한 부는 본국으로 흘러들어 갔다. 잉글랜드 전체가 프랑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으로 넘쳐났고, 잉글랜드인들에게 프랑스는 일종의 엘도라도였다. “프랑스 부인들이 자신들이 잃은 것을 한탄했다면 잉글랜드 부인들은 자신들이 얻은 것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전쟁은 무거운 세금이 부과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전쟁의 단맛을 본 사람들은 언제든 전쟁이 재개되기를 희망하였다. 백년전쟁 기간은 출세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빈한한 이들도 전쟁에 참여하여 귀족이 될 수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전쟁 와중에, 젠트리 가문들이 쉼없이 죽어서 사라졌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이 부상하여 그들의 자리를 차지할 여지가 있었다. 귀족은 그들대로 전리품 덕을 보았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획득한 부로 성과 교회를 지었고 병사들을 고용했다.

 

흑태자의 기적 같은 승리

1350년부터 1364년 사이의 주역은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와, 프랑스의 새로운 국왕 장 2세였다. 기옌의 국왕 대행으로 임명된 흑태자는 1355년 1,000킬로미터를 행군하며 무수한 마을과 촌락들을 대상으로 슈보시를 전개했는데, 여정의 막바지에 프랑스의 국왕 장 2세의 추격을 받아 퇴로를 차단당하였다. 이에 양군은 전투에 돌입하였다. 이 푸아티에 전투에서 흑태자는 약 2천6백 명의 병력으로 2만 명 이상의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기염을 토했고, 특히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사로잡는 놀라운 위업을 달성했다.
 이에 힘입어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국왕 자리를 무력으로 차지하기 위한 원정길에 올랐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휴전 협상에 임하여 1360년 브레티니조약을 체결했는데, 그에 따르면, 프랑스는 기옌과 더불어 리무쟁, 푸아투, 앙구무아, 생통주, 루에르그, 퐁티외 등 다른 많은 지역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잉글랜드에 내주어야 했다.

 

위대한 프랑스 군주 가운데 한 명인 현명왕 샤를 5세는 이전 시기까지의 열세를 만회하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영토를 회복했다.

 

현명왕 샤를 5세의 프랑스 영토 회복

하지만 잉글랜드만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었다. 위대한 프랑스 군주 가운데 한 명인 현명왕 샤를 5세는 브레티니조약에 대하여 명시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힘을 회복했다. 그는 계승 분쟁으로 어지러웠던 브르타뉴를 프랑스의 품안에 끌어들였고, 왕위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잉글랜드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악인왕 샤를을 중앙 정치 무대에서 몰아냈다. 또 플랑드르를 우호 세력인 부르고뉴 공작에게 넘기는 데 성공하였다. 무엇보다 강성한 프랑스의 국력을 토대로 샤를 5세는 기존의 ‘고용 계약’ 체제를 어느 정도 허물고 상비병력(중기병 3~6천, 석궁병 800명)을 모집할 정도로 국력을 회복하였다.
 샤를 5세에게는 영토 회복 전쟁을 수행할 베르트랑 뒤게슬랭이라는 훌륭한 지휘관이 있었다. 푸아투, 라로셸, 앙구무아와 생통주 전체,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의 잉글랜드 거점들이 차례로 프랑스에 귀순하거나 함락되었다. 샤를 5세의 최전성기에 잉글랜드 세력권인 아키텐 공국(기옌)은 에드워드 3세 때보다도 작게 축소되었고, 북부 또한 오직 칼레와 노르망디의 한 수비대 정도만이 남아 있는 형세가 되었다.

 

프랑스의 내분, 적을 초대하다

프랑스의 내분은 영국보다 더 심각하여 순식간에 샤를 5세의 유산이 증발한 것은 물론 나라를 망국의 지경으로 몰고 갔다. 어린 샤를 6세에게는 강력한 인척이 두 명 있었다.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이었는데 둘 다 프랑스를 지배하려는 야심에 사로잡힌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거의 모든 사안에서 대립했는데 이 대립은 점점 격화되었다. 시끄러운 언쟁과 맞비난으로 샤를 6세를 위한 국왕 자문회의는 엉망진창이 되었고, 거리에서는 두 정파의 추종자들이 난투극을 벌였다. 그러다가 1407년 11월 오를레앙 공작이 부르고뉴 공작 세력에 의해 살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마각을 들킨 부르고뉴 공작은 파리에서 빠져나와 있는 힘을 다해 플랑드르로 도망쳤다. 이후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프랑스, 특히 파리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나뉘어 무장한 채 서로 항쟁하는 지경이 되었다.

 

헨리 5세, 프랑스 왕이 될 근거를 확보하다

프랑스인들 사이의 이 치명적인 분열 덕분에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많은 지역들을 정복하고 종국에는 프랑스 왕에게서 많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프랑스로서는 안타깝게도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는 잉글랜드보다 서로를 더 지독하게 미워했고, 두 정파는 단합하기보다 서로 헨리 5세를 동맹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했다. 그리고 결국 부르고뉴공 필리프가 헨리 5세의 마음을 얻었다. 헨리 5세는 1420년 5월 트루아에 도착하여 샤를 6세와 함께 조약에 서명하였는데,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 왕위의 계승자이자 프랑스의 섭정(Haeres et Regens Franciae)이 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아직 샤를 6세가 죽지 않았지만,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자격을 약속받은 순간이자, 프랑스로서는 역사에 매우 드문 굴욕의 순간이었다.

 

앵글로-프랑스에서의 마지막 전성기

헨리 5세가 죽은 후 7년간은 잉글랜드인들에게 마지막이자 가장 성공적인 시절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의 헨리 6세는, 프랑스 왕 샤를이 곧 사망함으로써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도 겸하게 되었다. ‘앙리(Henri)’ 국왕은 섬처럼 고립된 몇몇 도팽 세력 지역을 제외하고는 루아르강 북쪽의 프랑스 전역에서 국왕으로 인정받았고, 마침내 잉글랜드 국왕이 나머지 프랑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얻을 진짜 기회, 백년전쟁이 시작된 이유가 해소될 시기가 가까이 온 듯했다. 이중 왕국은 순조롭게 굴러갔다. 이중 왕국을 떠받친 것은 섭정 베드퍼드와 그의 위대한 장군 솔즈베리 백작, 20년 넘게 그들과 함께 전장을 헤쳐온 대단히 재능 있는 일단의 팀이었다. 때로는 파리 시민들도 이중 왕국을 위해 충성스럽게 싸웠다.

 

잔 다르크의 등장(1429년)은 잉글랜드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프랑스의 전세를 뒤바꿨다. 잔 다르크가 북돋운 용기에 프랑스군은 스스로 성전을 치른다고 생각했고, 잉글랜드군은 "어느 대장이나 지휘관보다 그 처녀를 두려워했다.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을 구하고 프랑스 왕은 대관식을 올리다

잔 다르크는 도팽을 만나서, 신이 자신한테 잉글랜드인들과 싸우고 국왕이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녀는 오를레앙의 구원에 나서기에 앞서 베드퍼드 측에 서신을 보냈다. “천상의 왕께서는 너희들을 프랑스에서 쫓아내라고 나를 보내셨다. 부디 너희들의 땅으로 떠나라.” 초반에 그녀는 연달아 승전을 거두었고 그녀의 명성은 파테 전투 이후 절정에 달했다. 그녀는 도팽을 설득하여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영토를 통과하여 랭스로 향하였고 거기서 샤를은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잔은 대관식 내내 하얀 깃발을 들고 그의 근처에 서 있었고, 의식이 끝난 뒤 처음으로 그를 프랑스의 국왕이라고 불렀다. 국왕의 대관식은 도팽파의 사기를 경이로울 정도로 진작시켰다. “프랑스인들은 신이 잉글랜드인들에게 등을 돌렸다고 믿었다.”

 

카스티용 전투, 프랑스의 대포가 백년전쟁을 끝내다

전쟁 말기에 잉글랜드의 재정은 거의 파산 직전이었다. 정복지의 수비대는 그 어느 때보다 적은 수의 병력으로 유지되었다. 반면에 프랑스는 특별세를 재도입하여 성공적으로 그 세금들을 거둬들이고 있었고, 유동 현금을 거의 무제한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결국 전쟁 말기에 이르러 국력과 체제의 정비로 프랑스는 잉글랜드를 압도하였다. 특히 백년전쟁의 막을 내린 것은 ‘대포’였다. 백년전쟁의 초창기에 잉글랜드 장궁의 활약과 프랑스 중기병의 몰락은 많이 알려졌으나, 후반기 프랑스 대포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비교적 알려져 있지 않다. 장 뷔로는 15세기 전반기 내내 화약과 주조 기술을 서서히 향상시켰고, 1453년 마지막 전투인 카스티용 전투에 이르러 잉글랜드의 1만 병력을 다수의 대포로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근대 민족국가의 맹아가 싹을 틔우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이 전쟁을 통해 민족 감정을 형성하였다. 이 전쟁을 통해 두 나라는 향후 절대왕정 체제와 국민국가로의 경로를 걷는다. 백년전쟁을 거치는 동안 프랑스인이라면 누구나 백년전쟁의 무정부 상태와 유혈의 책임이 잉글랜드인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루티에들(자유 부대: 계약이 종료된 용병) 가운데 프랑스인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을 죄다 “잉글랜드인들”로 여겨졌다.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민족주의의 성장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인들을 자신들의 자연스러운 먹잇감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면서 증오심과 경멸감을 키워나갔다. 전쟁 초기에 왕실의 제1언어는 프랑스어였으며 국왕들의 정체성 또한 프랑스인과 구별되지 않았으나 나중에 잉글랜드의 주전파들은 “프랑스 국왕은 전하의 주적이자 전하 왕국의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상식을 언급하고 있었다.

 

 

*     *     *

 

지은이 데즈먼드 수어드(Desmond Seward)

데즈먼드 수어드는 오랫동안 보르도에 자리 잡고 살아온 아일랜드 가문 출신으로, 파리에서 태어나 앰플포스와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했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앙리 4세, 헨리 5세, 사보나롤라 등을 다룬 여러 권의 전기를 저술했다. 그 외에도 『프랑스의 부르봉 국왕들』, 『마지막 흰 장미: 튜더 왕조의 비밀 전쟁』, 『나폴레옹과 히틀러』, 『장미전쟁』, 『리처드 3세: 잉글랜드의 검은 전설』, 『춤추는 태양: 기적의 성소들을 찾아서』, 『전쟁의 수도사들』 등 다수의 역사서를 집필했다. 특히 『전쟁의 수도사들』은 서양 군사-종교 단체들의 설립부터 현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 통사를 다룬 저작으로, 18세기 이후로 이 분야에서 나온 최초의 책이다.

 

옮긴이 최파일

서울대학교에서 언론정보학과 서양사학을 전공했다. 역사책 읽기 모임 ‘헤로도토스 클럽’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역사 분야를 중심으로 해외의 좋은 책들을 기획, 번역하고 있다. 축구와 셜록 홈스의 열렬한 팬이며, 1차 대전 문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옮긴 책으로 『바다의 습격』, 『인류의 대항해』, 『시계와 문명』, 『아마존』, 『근대 전쟁의 탄생』, 『대포 범선 제국』, 『십자가 초승달 동맹』,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마오의 대기근』, 『내추럴 히스토리』, 버트런드 러셀의 『자유와 조직』 등이 있다.

 

 

교보문고 바로가기

알라딘 바로가기

예스24 바로가기

인터파크 바로가기

[저자의 책 소개]

『한국인의 발견 :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힘의 정체를 찾아서』(2016년)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최정운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본인이 2016년 말에 출간한 『한국인의 발견』(이하 『발견』)은 2013년에 출간한 『한국인의 탄생』(이하 『탄생』)의 속편이라 할 수 있다. 『탄생』은 우리 역사에서 근대의 출발인 구한말부터 해방 전, 즉 일제 강점기까지를 다루었고, 『발견』은 해방 후부터 1990년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우리 민족의 근현대 사상사를 논의하는 이 두 책은, 2001년경부터 집필 준비가 시작되었으니 출간에 이르기까지는 15년이 걸렸다. 본인의 문제의식은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현대적 정체성을 찾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우리의 근·현대 사상사를 구축하는 데 있었다. 구체적으로 본인은 우리가 그간 ‘무엇을 겪었고’, ‘무엇을 느꼈고’, ‘겪은 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왔고’,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바랐는가’의 질문들에 답하고자 하였다. 그간 우리 지성계에서 사상사의 구축이 여러 차례 시도되어 왔지만 대부분은 이념사를 논하는 데 그쳤다. 말하자면 보는 시각을 미리 정해놓고 그 시각을 확인하는 작업에 그쳤으며, 작가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 강화하고 상대편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사상사를 만드는 일이 시급했다.

    그러나 우리 사상사를 연구하는 데는 여러 난제들이 존재한다. 우리 역사에서는 ‘사상가(思想家)’라고 부를 수 있는 저자들을 찾기 힘들며, 따라서 사상사의 전범(典範)이라 할 수 있는 서양 정치사상사처럼 우리의 사상사를 쓸 수는 없다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근대의 시작에서부터 서구 문물을 수입하여 새로운 한국인, 사회와 국가를 만들어 왔으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상사의 주요 텍스트는 서구에 있다. 근현대 한국 지식인들의 고민 또한 서구 사상의 도입과 적용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독특한 문제였다. 사상사 연구는 객관적 현실과 텍스트에 철저히 근거해야 함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텍스트에 정확히 근거하지 않은 사상 논의는 자칫 그것이 상상의 날개를 펴고 어디로 날아갈지 알 수가 없다. 통상적인 사상사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텍스트가 거의 없는 우리 근현대 역사에서 그나마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텍스트는 구한말 서구에서 도입되어 발달해온 근대 소설문학밖에 없다. 서구에서 17세기에 나타난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 소설문학은 ‘현실적이라고 수긍할 수 있는 현실’을 ‘픽션(fiction)’으로 만들었다. 이는 ‘작가의 사상과 이상(理想)을 담아내는 지성적이며 대중적인 포괄적 현실’의 기술 형태이며, 이런 기법으로 만들어진 텍스트들을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사상과 이상을 포함하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탄생』과 『발견』은 근현대의 각 시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소설문학 작품들을 해석하여 구축한 한국 근현대 사상사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상은 흔히 말하는 ‘정치사상’, ‘경제사상’, ‘사회사상’ 등의 전문화된 학문 분야에 대한 사상이 아니라 삶의 가장 밑바닥 층위에서 기본이 되는 문제들에 대한 생각들을 구별짓지 않고 포괄적으로 논의한 사상이다.

 

 

    『발견』은 해방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른바 ‘해방공간’은 구한말의 ‘홉스적 자연상태’가 되돌아온 대혼란 상태였다. 이 ‘해방공간’에서는 본격적인 문학 작품들이 쓰이지 못하였다. 다만 몇몇 단편 소설들에 나타나는 한국인들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의 위력에 미리 겁을 먹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국가 건설에 참여할 용기도 없고 관심도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국가 건설은 미군정에 의해 시작되고 우리 지식인들의 참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핵심 문제는 당시 한국에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적 자원, 물적 자원들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부족한 자원들을 차분히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미리 공산국가 건설을 위한 청사진을 갖고 있었고, 토지 개혁, 국가 건설, 군비 확장을 신속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에 맞서는 자유민주주의적 국가 건설을 서둘러야 했다. 다시 말해 이때 우리에게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자원들뿐만 아니라 시간이 모자랐고, 따라서 대한민국의 건설은 ‘날림 공사’를 모면할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 인력의 부족은 일제 잔재를 받아들이는 결정으로 이어졌고, ‘친일파’의 대거 영입, 일제 권위주의, 군국주의 문화의 용인으로 이어졌다. 나아가서 물적 자원의 부족은 우리를 미국의 원조에 철저히 의존적이게 만들었다. 문제는 국가를 부족한 자원으로 성급하게 만들었다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건국 과정에서 일제 잔재와 미국에 의존한 존재 양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크게 훼손하였고, 따라서 이 나라에는 정치적 위기가 상존하였다. 이 국가는 국가로서의 능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능력 부족과 정통성의 위기 상황을 강하게 의식하는 국가로서 생존을 위해 무리하게 폭력을 행사했으며, 그 결과 대한민국은 초기에 변태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은 ‘취약 국가’로 태어났다.

    1950년의 6.25 또는 한국전쟁은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은 여러 층위의 전쟁들이 응축된 특수한 전쟁이었다. 우선 미국, 소련, 중국 등 세계의 초강대국들이 엄청난 병력과 최신 무기를 총동원한 전쟁이었고, 남한과 북한은 민족통일을 목표로 전쟁을 치르면서 각각 국가 말살의 위기에 직면하여 총력전, ‘절대전’을 치렀다. 그런가 하면 계급투쟁이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되어 민간인들 간에도 모든 개인적 원한들이 동원되는 내전이 전개되었다. 나아가 초강대국들은 그들 간의 ‘3차 대전’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전투 행위를 한반도 안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전쟁을 ‘제한전(Limited War)’으로 관리하였는데, 그 결과 한반도는 그야말로 ‘아궁이’, ‘용광로’, 지옥의 전쟁터가 되었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미국의 참전을 독려하고 그들의 적극적 개입을 보장받기 위해―당시는 미국의 도움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전쟁의 모든 의사결정, 나아가 주체성마저 미국에 양여했고, 국민들은 ‘남의 전쟁’에서 죽어야 하는 상황, 자포자기 상태에 처하였다. 결국 1953년 휴전이 성립되었을 때 대한민국은 휴전조약의 당사자가 되지 못하였고, 그런 가운데 민족 분단을 영구화할 휴전에 반대하는 데모를 벌이자고 선동하면서 미국이 지켜주는 가운데 또 다른 절박한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휴전으로 전쟁이 멈추었을 때 한반도 남쪽은 죽음의 그림자뿐이었다. 국민들은 극빈 상태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지만, 그들의 의식에서 한국인들은 모두 죽은 시체, 죽어가는 병자 또는 언제 어디서라도 죽음에 붙들리고 그리하여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는 존재들이었다. 안 그래도 작은 우리 민족은 이제 영구히 분단되어 생존할 길이 없다는 비관 속에서, 게다가 전쟁 통에 죽고, 불구가 되고, 더구나 살인자가 된 이들은 살려달라고 하늘에 애원할 면목도 없는 존재였다. 편재(遍在)한 죽음은 우리의 ‘아프레게르(après guerre)’의 풍경이었다.

    1950년대는 한국인들에게는 비참한 시기였고 동시에 위대한 시대였다. 먹고살기 위해 모든 고통과 고난과 모독(冒瀆)을 감수해야 했지만, 어떤 이유와, 원인과 과정에서건 죽었던 한국인이 부활한 시대였다. 국가권력이나 어떤 정치 집단이나 지식인 집단이 이끈 것도 아니었지만, 한국인 시체들은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하고, 생명을 되찾고, 욕망을 되찾고, 자신의 모습에 분노하고, 좌절하였다. 이런 새로운 모습들은 대표적으로 손창섭의 단편 소설들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1950년대를 통해 쓰인 그의 많은 단편 소설들은 어둡고 음침하고 처참한 전후 한국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었기에 비관적이고 허무주의적 작품들로 평가받아 왔지만, 그런 오해들을 뒤로 하고 그의 소설들을 면밀히 살피면, 독립된 각각의 작품들은 마치 연속된 작품처럼 이어지며 그 속에서 죽은 한국인이 부활하는 모습이 뚜렷이 나타난다. 1950년대는 전쟁을 겪은 한국인들이 죽고 죽어가는 비참한 상태에서 시작하여 다시 살아나고, 살아난 후에는 욕망과 분노를 회복해가던 기적(奇蹟)의 시대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대는 두 개의 다른 형태의 혁명이 동시에 잉태(孕胎)된 시대였다.

    1960년 2월 말 학원의 자유를 외치는 고등학생들의 ‘데모’가 시작되었고, 데모는 곧 전국에 파급되었다. 무엇보다 3월 15일, 너무나 뻔뻔스런 자유당의 부정 선거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가전을 벌였고, 눈에 최루탄이 박혀 죽은 고등학생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에 온 국민은 분노에 떨었다. 이러한 국민들, 특히 도시 빈민들의 저항이 공산주의 혁명으로 발전할 것을 우려한 지식인들은 대학생들을 동원하여 당시 데모 사태를 민주주의 회복만을 요구하는 데모로 대체하려 했고, 이러한 노력이 성공하여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등장하여 시위를 벌였다. 그날 저녁 그들은 자유당의 하수인 ‘정치깡패’들에게 테러를 당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이에 다음 날 4월 19일에는 분노한 대학생들이 광화문에 모여 역사적인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날 오후 경찰은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여 수많은 희생자들을 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었고 4월 말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자유당 정권이 붕괴함으로써 ‘4.19혁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후 언론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은 대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겼다. 결국 자유당이 붕괴되어 공백이 된 권력은 민주당 정치인들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이들이 세운 정권은 의원내각제라는 민주 정치를 실험했을 뿐 4.19혁명의 직접적 원인들, 국민들의 좌절과 분노를 야기했던 문제들은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드러냈다.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쌓여갔고 이는 결국 다음 해 5.16군사정변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5.16군사정변은 이미 1956년경부터 계획되어온 것이었고, 그 목적은 부패한 권력과 사회를 일소하고 혁명적 변혁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고 반공에 기반해 안보를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5.16 세력은 애초에 1960년에 정변을 시도하려 했다가 4.19 때문에 이를 연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제 역사의 흐름은 5.16 세력으로서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4.19가 먼저 발발하여 국민들에게 깊은 좌절을 안겨주었기에 5.16은 성공적으로 우리 역사에 흔적을 깊이 남길 수 있었다.

    4.19 이후의 한국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준 작품은 단연 최인훈의 『광장』이었다. 4.19를 겪은 시대의 한국의 대학생, 서울 문리대 철학과 3학년 이명준은 자신의 특별한 운명을 믿고 있었고, 그 운명을 이루기 위해 광장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남한에서 그리고 북한에서,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이명준은 광장을 찾지 못해 좌절한다. 그런 가운데 그는 그래도 무언가를 챙기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 악마의 탈을 쓰고, 옛 친구를 고문하고, 옛 애인을 강간한다. 결국 포로수용소에서 운명에 좌절하고 정체성 배반의 수치 속에서 이명준은 남과 북 어느 쪽도 택하지 못하고 제3국행 배에 올라 인도로 가는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명준은 배 위에서 시종 자신을 추적하고 수치를 문초하는, 양심을 일깨우는 갈매기의 매서운 눈초리에서 애정을 느끼고 바다로 뛰어들고 만다. 욕망의 방출의 시대에, 혁명의 문턱에서 거부당한 한국의 엘리트 대학생이 겪을 비극을, 최인훈의『광장』은 예견하고 있었다.

    5.16 이후, 쿠데타가 성공하고 급속도로 서슬 퍼런 혁명 정부가 들어선 가운데 이 시대를 대표한 작품은 최인훈의 『구운몽』이었다. 주인공 독고민의 욕망은 하나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여러 욕망들이며 또 정체성을 분열시키고 의식을 뒤섞어버리는 욕망들이었다. 옛 애인을 다시 만나는 꿈을 꾸고, 회사의 사장이 되고, 시회(詩會)의 지도자로서의 멋진 예술가가 되고,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애인이 되는 등 다양한 욕망들이 지나간다. 그러나 결국 그의 이 모든 욕망들이 부정되고 밑바닥에서 피어오르는 궁극적인 꿈, 욕망은 광장 가운데 서 있을 동상 같은 멋진 지도자가 되거나 권력에 도전하는 반군(叛軍)의 지도자, 불멸(不滅)의 스타가 되는 것이었다. 5.16 이후에 아직 경제 발전이 시작되기 전, ‘혁명’, ‘쿠데타’가 성공하고 새로운 가공할 권력이 나타났을 때 이미 한국인들은―너무나 오랫동안 혁명을 꿈꾸어왔지만 좌절만을 겪어온 그들은―다른 세상, 모든 욕망들이 난무하고 꽃피는 세상을 보고 있었다.

    1960년대는 최인훈과 김승옥의 시대였다. 그들의 소설들은 새로운 시대를 일깨우는 작품들이었다. 1963년에 최인훈이 출간한 『회색인』의 주인공 독고준은 1958년으로 돌아가 5년 전 그때는 지금과 얼마나 다른 시대였는지를 보여준다.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이 지금과 얼마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친구들과의 이야기들 또한 얼마나 달랐는지를 일깨워주었고, 다시 말해 1963년이라는 현재, 모든 게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그 시대가 얼마나 독특한 시대인지를, 다시 말해 역사와 현재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1966년에 출간된 『서유기』에서 최인훈은 독고준을―1958년으로 보내졌던 그를―1966년으로 데려오는 ‘시간여행(time travel)’을 감행한다. 주인공은 고전 『서유기』를 방불케 하는 희한한 모험을 겪으면서 일찍이 막스 베버(Max Weber)가 보여주었던, 그리고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소개했던, 자신의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합리적 근대인’으로 변모하며, 나아가 그러한 자신을 의식하고, 그러한 삶을 살기로 결의하는 모습, 새로운 한국인으로 재탄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승옥의 단편 소설들은 서울대 문리대 주변의 세속화하고 타락한 이명준 같은 인물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의 외모를 위협적으로 꾸며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강한 존재인 양 스스로를 드러내지만 사실 그 내면이 비밀스런 좌절과 죄의식으로 가득 찬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공동체를 떠나온, 잊어버린 외로운 개인들이었고, 그들 각각은 누구로부터도 이해를 구하지 못하는 존재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기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다니며 정체성 위기가 상존하는 아슬아슬한 존재들이었다. 1960년대 후반이 되면 그들은 현실주의의 지혜를 배우고, 자기의 주제를 찾아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와 함께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1960년대 이 소설들에서 한국인들은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로서의 민족공동체로 귀결되고 말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한국 사회는 여러 부분들이 따로 움직이며 부각된다. ‘청년’ 문화가 등장하고, 강한 여성상이 부각되는 반면 남성들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급기야 1970년대 초에는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계급이 살아가는 ‘상스러운’ 모습들, 그리고 그들이 고용주들과 권력과 맞서 싸우는 모습들이 부각되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당시 새롭게 출현한 도시 중산층 ‘부르주아’들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났다. 한마디로 1970년대에 들어서면 한국 사회는 여러 집단들, 계급들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들의 관계는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이제 계급들의 전쟁터였다.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1970년대에는 새로운 사랑의 이야기들이 출현했다.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의 오경아는 살벌한 계급 사회를 가로질러 추락하는 인물로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을 베푸는 비련의 천사였다. 경아나 그녀의 애인 김문오는 장래를 생각하고 준비할 능력이 없는 새로운 세대의 바보들이었다. 영악한 계급투쟁의 사회에서 이들 계급들을 소통하고 엮어내기 위해서는 장래와 이해(利害)를 따질 능력이 없이, 사랑에 빠져드는 바보들이 필요했다. 이들은 대중 소설의 인기몰이를 위해 창조된 주인공들이었지만 나아가 우리 역사를 다시 움직이도록 하는 역사적 임무를 떠맡기기 위해 창조된 인물들이기도 했다. 이들의 존재 위에서 1970년대 후반에 새로운 ‘운동권’이 출현하였다.

    1980년대는 5.18과 ‘신군부’, ‘5공’과 함께 시작된 투쟁의 시대였다. 학생 운동권이 주동이 되어 투쟁에 나섰지만, 온갖 사회·정치적 모순들이 중첩된 세상에서의 투쟁은 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었다. 한편으로 5공 정부는 경제 발전과 물질적 생활 향상을 위해 진력했으며 따라서 사회는 투쟁과 물질주의와 쾌락의 문화가 뒤섞인 대혼란이었다. 1980년대 후반 사회 여러 분야에서의 문제는 정체성의 혼란이었고 이는 사람들을 살인적인 위기로 몰아갔다.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은 1990년대에 들어 새로운 주제로 이어졌다. 즉 우리의 정체성이란 ‘멋지게’ 보이는 모습을 선택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습을 생각하며 스스로 창조하고, 가꾸고, 지켜나가야 하는 것임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이 시대에 쏟아져 나온 이른바 ‘회상 소설’들은 운동권 투쟁의 과정에서 선택했던 가면(假面)을 벗고 진정한 자신에게 다가가는 삶의 길을 보여주었다. 나아가서 일각에서는 개인주의적 삶을 서서히 극복해나가고 공동체적 관계를 회복하는 지혜를 이미 우리 한국인들이 실천해온 모습도 새로이 확인하고 있었다.

    본인은 『발견』에서 우리 한국인들이 해방 이후 겪은 수많은 시련들과 그 과정에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어떻게 그 괴로움을 겪고, 좌절하고, 참고,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 한국인들의 사상을 문학 작품들을 통해 해석해가며, 궁극적으로는 현대 사상사를 일구어 보려고 했다. 이러한 작업의 기저에 깔려 있는 질문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가,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들이었다. 이 질문들에는 결코 ‘해답’이 없으리라는 판단에 자위하지만, 답하기 위해 물어나가는 과정은 보람 있는 고통이었다.

 

 

 

 

 

* 이 글은 아래 출처의 글을 좀 더 읽기 쉽게 윤문한 것임을 밝힙니다.

 

출처:  최정운, "(신작 소개: 『한국인의 발견 :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힘의 정체를 찾아서』)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현대사광장』, 제10호(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7), 130~137쪽.

 

* 출판사 리뷰 - http://mizibooks.tistory.com/126

 

 

*      *      *

  

 

알라딘 바로가기

교보문고 바로가기

예스24 바로가기

인터파크 바로가기

 

[서평] 최정운의 『한국인의 발견』을 읽고

 

한국인들과 그들의 민족국가 대한민국을

거울 앞에 세우다

 

이택선

(성균관대학교 학부대학 초빙교수, 동아시아 국제관계학 전공)

 

『한국인의 발견』은 『지식국가론』, 『오월의 사회과학』, 『한국인의 탄생』에 이은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최정운 교수의 네 번째 단독저서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저자는 1980년 5월 광주를 다룬 『오월의 사회과학』(1999년)에서 ‘절대공동체’ 개념을 제시하며, 그간에 보수와 진보의 갈등 속에서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학문의 언어로 재기술하였다. 이후 저자의 담론은 광주에 관한 거의 모든 평론에서 언급되었고 올해 개봉되어 12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택시운전사』에 관한 기사에도 등장할 만큼 그 반향이 컸다. 저자는 이러한 공로로 전남대학교가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후광학술상의 일곱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이후 2013년, 저자는 ‘우리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는 노작 『한국인의 탄생』을 출간하여, 19세기 구한말부터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시기를 대상으로 한국 근현대 사상사의 복원에 나섰다. 그리고 2016년 12월 말, 저자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를 다룬 『한국인의 발견』과 함께 돌아왔다.

 

 

    비평자는 『한국인의 발견』이 강조하고 있는 바를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하여 소개보려고 한다. 그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부제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힘의 정체를 찾아간다. ‘힘의 정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는데, 먼저 20세기 역사의 주인공인 한국인, 그리고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건을 만드는 근본적 힘으로 작용하는 한국인의 시대정신, 그리고 시대정신을 담고 이를 끊임없이 갱신해온 한국인의 내면이 그것이다. 저자는 이를 규명하기 위해 한국 소설들을 다시 읽고 그 안에 담긴 한국인들의 생각과 시대정신을 캐내어 시간 순으로 기술하며, 이를 해방에서부터 1990년대까지의 한국 현대사에 대응시켜, 해방과 건국 → 전쟁 → 한국인의 부활 → 두 개의 혁명(4.19와 5.16) → 역사와 개성의 시대(1960년대) → 분열과 연합의 시대(1970년대) → 투쟁의 시대(1980년대) → 근대로의 진입(1990년대)이란 말로 정리한다.

    전반부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한국전쟁 이후 부활한 한국인이 1950년대 말부터 욕망과 분노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1950년대를 거치며 비참함을 자각한 한국인들은 좌절된 욕망과 분노를 독특한 형태의 ‘두 개의 혁명’을 통해 표출하게 되는데, 이 두 혁명 즉 4.19와 5.16은 공히 1956년 시점에서 연원한 이란성 쌍둥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저자는 4.19에 대한 ‘공식 정론’, 즉 ‘대학생들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하여 일으킨 사건이자 혁명’이라는 모든 교과서의 기술과 담론을 일축하고, 그게 아니라 4.19는 오랫동안 쌓여온 가난과 좌절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의 표현이었다고 말한다(222쪽). 하지만 당시 민중의 폭발을 두려워한 지식인들은 사태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하고 혁명을 거세하여 민주주의를 위한 놀이로 전락시켰고, 이로써 4.19는 혁명으로서 역사적으로 부과된 목표를 이루지 못하였다(261쪽). 그리고 이 대목에서 중요하게는, 혁명을 목전에 두고 무대에서 끌어내려진 4.19세대(대학생)가 출현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4.19세대는 ‘붉은 심장의 설레임’을 가지고 광장으로 진출하였다.

    이미 4.19를 통해 욕망과 양심이 현실과 부딪히게 된 1960년대 초의 상황은 4.19의 이란성 쌍둥이와도 같은 5.16을 출현케 하였다. 5.16은 불법 쿠데타임에 틀림없지만 만약 ‘산업 혁명’이 혁명이라면 5.16도 혁명임에 분명했다(259쪽). 5.16을 통해 한국인들에게는 욕망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그런 가운데 지식인들은 한국의 후진성을 의식하며 서둘러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을 만들어냈고, 1960년대에 한국인들은 ‘한국주식회사’ 속에서 일체의 가족, 공동체, 윤리, 도덕, 민족을 벗어던지고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랬던 만큼 한국인들은 더더욱 고독했고,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 사회는 ‘세대’, ‘성별’, ‘지방’, ‘계급’ 등과 같은 다양한 이름의 정체성과 계급으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의 시대’는 한편으로 사회적 정치적 모순이 심각해져 한국 사회 내부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 운동이 나타나 계급들 사이에 침투하여 연합 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죽음을 넘어선 투쟁은 극단의 폭력과 금력 만능주의와 극한의 대립을 이루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1970년대의 현실은 폭력과 금력으로 무장한 괴물인 ‘오공(제5공화국)’을 낳았고 그와 함께 시작된 1980년대, 극단의 ‘투쟁의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은 민주화를 쟁취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한국인들은 심각한 정체성 위기를 겪어야 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한국인들은 비로소 롤러코스터 같았던 여정을 되돌아보며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639쪽, 643~645쪽).

    1990년대는 거칠었던 과거를 돌아보며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본격적인 해결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시기였다(649쪽). 그러나 저자가 기술을 멈춘 1990년대 말의 IMF 경제 위기를 고비로 한국인들은 다시금 각자의 생존을 도모하며 서로를 불신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분해되고 신뢰와 신용이 바닥으로 떨어진 공동체의 복원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는 OECD 국가들 가운에 노사 관계와 금융 부문에서 거의 꼴찌 수준의 국가경쟁력을 보였고 ‘갈등지수’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사회의 핵심 문제가 구성원 모두가 가담하고 있는 사회적 불신, 의혹, 질투, 적대에 있음을 보여준다(641쪽). 이 지점에서 저자는 붕괴되고 있는 우리 사회와 공동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미 1960년대 이후부터 제기되어온 ‘나’와 ‘우리’의 정체성 위기의 해결 방안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저자는 우리의 모습을 일종의 ‘시간여행’을 통해 지속적으로 거울로 비추어보는 일이야말로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제시하며, 이 책 『한국인의 발견』 또한 그러한 구체적 작업의 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 근현대 사상사를 연구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수립하고 있다. 전술한 ‘힘의 정체’에서 ‘힘’은 당대 현실에 반응하여 만들어지고 ‘현실’은 ‘사상’의 변화가 가장 심하게 일어나 세상을 뒤바꾸는 역사, 정치적 사건의 전후 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힘의 정체’는 사상이라는 범주로 합류되기 마련이다. 결국 이 책은 ‘힘의 정체’를 역사 속에서 규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사상사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음을, 사상사를 재구성하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에 관해 저자는 모든 역사와 사회 연구에 있어서 그 출발점은 사물과 집단 또는 어떤 사건 등에 대하여 그 정체를 묻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지적하며, 우리나라 역사와 사회에 관한 연구들 역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가장 평이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덧붙여 저자는 지금까지의 연구들 대부분이 이 ‘평이한 질문’을 회피한 채 철저하게 사료에 근거하여 객관적 사실만을 연구한다는 실증주의 사학 위주로 진행되어 왔다고 비판한다(17~18쪽). 저자는 역사 연구에 있어서 사실에만 국한해야 한다는 실증주의 사학의 방법론의 경우 이미 유럽에서는 19세기부터 문제점을 드러내었으며(27쪽), 애초에 실증주의가 말하는 ‘사실’이라는 것조차도 이미 사람들의 생각, 판단, 해석, 사상이 포함된 주관적인 것, 해석의 대상이라고 말한다(24쪽). 아울러 대부분의 정치적 사건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뚜렷한 의미와 목적을 가치고 계획해서 실행한, 이를테면 작품이자 해석 대상이며, 따라서 역사 연구를 겉으로 드러난 사건 진행의 층위에서만 머물러 수행한다는 것은 땅을 파지 않고 농사를 짓겠다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다(29쪽).

    그리고 저자는 한국 근현대사에는 서양 사상사의 연구자료에 해당하는 텍스트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대체할 자료로서 예술 작품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언어적 진술이 포함된 문학 작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29~33쪽). 하지만 여기에도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특히 소설 해석의 목적은 작가를 시대정신의 지배를 받는 지식인 집단의 일원으로 생각하여 그가 복무한 시대의 사상을 재구성하려는 데 있는 것이지, 역사에 구애받지 않는 어떤 보편적인 진리, 이를테면 ‘권력이란 무엇인가’, ‘전쟁이란 무엇인가’ 등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이런 것들을 역사적으로 검증하기 위한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35~41쪽).

    다음으로 지금까지 소개한 최정운 교수의 『한국인의 발견』이 국내외 학계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측면과 방향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첫째, 이 저서는 국내외 한국학계가 요구하고 있는 상호 통합의 텍스트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책이다. 한국학의 모태인 한국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과 함께 불어닥친 한류 현상 등으로 인하여 해외 한국학계 역시 양적으로 크나큰 팽창을 이루어왔다. 하지만 양적 팽창의 이면에는 국내 한국학계와 해외 한국학계의 소통 부재와 불통 현상이 심각한 지경에 도달해 있다. 동아시아학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학제 간 연구를 추구하고 있는 흐름에서 그 일부인 한국학 역시 해외 연구자들과의 소통과 대화를 위해서는 안과 밖의 이론적 논의를 모두 소화하고 학문 간 통섭이 가능한 저서를 제시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해졌다. 국내 학계가 해외 한국학의 흐름을 포섭하고 장기적 학문 발전 방향까지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구축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한국학은, 예를 들면 태권도가 국제화되면서 그 세계 챔피언이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니게 되었듯이, 무관의 제왕으로 전락하지 말란 법이 없다.[각주:1]

    실제로 조지타운대학교의 외교학대학원 아시아연구소에서 5년간 연구를 수행한 비평자는 올해 3월 중순경 토론토에서 개최된 아시아학회(Association for Asian Studies)의 연례 학술회의, 그리고 한국국제교류재단과 동북아역사재단 후원의 코리안 나이트(Korean Night) 행사에 참석하여 많은 해외 한국학 교수들을 만나 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은 한국학 태동의 기본이 되는 한국어와 역사, 문학, 철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가장 수요가 높은 한국전쟁이나 민주화 그리고 북한 핵문제 연구의 기본이 되는 정치, 외교에 관한 지식까지 아우르는 저서의 필요성을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충족하는 저서는 매우 부족하며, 그에 앞서 국내 한국학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학자들 자체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해외의 이론적 논의를 바탕으로 국내 학계의 담론들을 포괄하면서도 한국인의 현실에 맞는 논의를 구축하기 위해 독자적 방법론을 제시한 최정운 교수의 이 책은 이러한 학계의 요구에 가장 부합하는 저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현재의 추세는 해외 한국학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점차 언어, 역사를 담당하는 인문학자들에서 민주화나 북한 이슈를 주 전공으로 하는 사회과학자들로 바뀌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감안할 때, 정치외교학자이면서도 인문학에서 주로 다루어온 문학 작품과 역사를 재해석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나아가 “분야란 교육을 목적으로 한 작위적 설정일 뿐 인간의 생각 자체에 분야의 구별은 무의미하다”(38쪽)고 말하는 저자야말로 현재 안과 밖의 한국학계가 가장 필요로 하는 연구자임에 틀림없다. 저자는 한국의 뭇 학자들이 역사적으로 서양 학문의 도입이라는 일차적 의무에 평생을 바치는 동안 정작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기여해야 할 학자로서의 중임을 소홀히 함으로써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된 현실을 아쉬워하며, 한편으로는 1870년대부터 벌인 대학 개혁운동을 통해 순수 학문들의 수준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급기야 세계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된 미국을 예로 들어, 우리 학자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한다(651~652쪽). 어떤 의미에서 저자가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나라로서 스스로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야 할 우리의 한국학과 조우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둘째, 최근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사회 갈등에 대해 이 저서는 진단과 처방의 텍스트로서 구체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686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통해 저자가 제시한 논의 중에서 비평자의 눈을 사로잡은 키워드는 단연 ‘취약국가론’과 ‘반지성주의’였다. 최정운 교수는 민족국가 대한민국은 취약국가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민족국가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이 부족하여 이를 외국에서 빌려와 만들어진 초라한 국가였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친일파들이 국가의 공권력을 담당하는 경찰과 군대, 공무원 조직에 대규모로 영입되고, 미국에 대한 물적·정신적 의존이 심화되어 정통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채 첫걸음을 뗀 국가였다(72~73쪽).

    이러한 설명을 바탕으로 저자는 대한민국이 국가로서의 능력이 형편없는 수준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하며(74쪽), 한국의 초기 국가가 일제 시기의 과잉 발전과 국가기구를 그대로 계승했다는 ‘과대성장 국가론’을 반박한다. 아울러 취약국가의 병폐로 인해 대한민국은 파시즘 국가론이 제기될 여지가 없지 않지만 이 나라는 차라리 민족주의가 부족한 나라였지 민족주의 감정을 이용하는 나라가 아니었다고 기술하여(77쪽) 이 역시 비판하고 있다. 즉 ‘민족국가’, ‘민주공화국’을 만들었지만 대한민국은 언제 망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시달렸고 좌파와 북한의 공작에 맞서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과도한 민족주의 ‘오버액션’을 남발하는 나라였다(642쪽).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성급하고 충동적으로 폭력을 사용하여 국민의 반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고, 국가가 민족주의를 충분히 흡수하지 못한 나머지 국가 밖에 ‘민족’이 존재하는 상황이 초래되었으며, 이러한 취약성은 지금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설명은‘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나 ‘세월호 사건’ 그리고 ‘광우병 사태’와 ‘촛불혁명’의 과정과 이후 벌어진 극심한 국론 분열 현상을 설명하는 데도 충분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한편 이는 ‘반지성주의’로 이어지는데, 우리 사회가 정부 수립 시기부터 시작된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격렬한 역사를 써오는 동안 ‘반지성주의’가 은밀하고 잘 무장된 제도화 상태로 전개되어 개인과 사회 전체, 학계를 포위하는 현 상태로까지 발전해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반지성주의’를 학문의 소비자주의와도 연관시킨다. 대부분의 제도, 사상, 학문, 철학을 서구에서 배워와 우리나라에 도입하는 것을 역사적 의무로 삼아온 지식인들은 부지불식간에 ‘반지성주의’에 기여해왔다(23쪽). 우리 지식인들에 의한 서구의 정치 제도와 사상의 도입은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현실적 조건과 문제 등을 고려한 것이라거나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상당수의 학자들은 자신의 학문적 입장에 발 딛기보다 보수와 진보의 진영 논리에 따른 투쟁에 복무하고, 그 과정에서 합리적 토론의 자리는 맹목적 믿음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예컨대 이 과정에서 철학을 억압하고 기피하는 문화가 발전되어, 혹 누군가 다른 생각을 하면 골치 아픈 문제들을 들추는 존재로 분류되어 억압받고 기피되어 한국 근현대 정치사상사가 발전할 수 없는 풍토가 조성되어 왔으며(22~23쪽), 중요한 정치 사건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사건을 규정하고 찬양가를 부르면 역사가 바로 선다고 믿는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해 우리 역사의 수많은 심연이 묻히고 우리의 기억과 존재가 지워지고 있다는 것이다(25쪽).

    학문의 소비자주의는 앞서 다른 논자들에 의해서도 지적된 바 있지만[각주:2] 이를 ‘반지성주의’와 연관시키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은 저자가 유일하다. 특히 보수와 진보의 역사 논쟁이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한 지금, 저자의 기술은 그에 관한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우리가 지향할 바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마지막으로 비평자는 이제 독자의 입장으로 돌아가 이번 저서에서는 상세하게 기술되지 못한 ‘반지성주의’와 ‘오공(제5공화국)’에 관한 최정운 교수의 후속작들을 기대하며 본고를 마친다.

 

 

 

 

* 이 글은 아래 출처의 글을 좀 더 읽기 쉽게 윤문한 것임을 밝힙니다.

 

출처:  이택선, "(서평: 최정운의 한국인의 발견을 읽고)한국인들과 그들의 민족국가 대한민국을 거울 앞에 세우다", 『현대사광장』, 제10호(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7), 138~145쪽.

 

* 출판사 리뷰 - http://mizibooks.tistory.com/126

 

 

*      *      *

 

 

알라딘 바로가기

교보문고 바로가기

예스24 바로가기

인터파크 바로가기

 

 

 

  1. 브루스 커밍스, 도널드 베이커 교수 등이 주축이 된 해외 한국학 연구자들은 2020년 출간을 목표로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부를 통해 한국사전집을 저술하고 있다. 이는 일본학이나 중국학에 비해서는 30~40년 이상 늦은 것이지만 역사뿐만 아니라 문학과 철학 그리고 정치, 국제관계까지를 망라한 이들의 연구가 전 세계의 동아시아 강의나 한국 관련 강의에서 교과서 또는 참고자료로 쓰인다면 향후 한국학의 주도권은 해외 한국학계가 쥐게 될 것이다. 특히 한국 대학들의 영어강의 개설 열풍과 A&HCI급 등재저널 게재가 점차 정년보장 교수 채용의 필수요건이 되고 있는 현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우려는 결코 기우가 아닐 것이다. [본문으로]
  2. 김경만(2015),『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문학동네. 김종영(2015),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돌베개. 홍성민(2008), 『지식과 국제정치』, 한울아카데미. [본문으로]

 

『지리의 복수』

지리는 세계 각국에 어떤 운명을 부여하는가?

 

로버트 D. 카플란 지음 | 이순호 옮김 | 미지북스 | 548쪽 | 20,000원

 

 

세계적인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의 21세기 권력 판도 분석

트럼프 시대, 미국의 전략은 무엇인가?

 

모든 역사는 지리 위에서 완성되었다.

21세기 역사는 그 역사의 반복일 뿐이다.

 

유럽, 러시아, 터키, 이란, 인도, 중국 등 유라시아 주요 세력들의 한가운데에는 유라시아 심장지대가 있다. 20세기 초엽에 지리학의 거두 핼퍼드 J. 매킨더는 이런 말을 남겼다. “유라시아 심장지대를 차지하는 자가 유라시아 전체를 지배하고 나아가 세계를 지배한다.” 일찍부터 ‘지리’의 중요성을 간파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되살려 도구로 삼은 이 책의 지적 여정 끝에, 로버트 카플란이 도달한 결론은 매킨더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가까운 미래에 유라시아의 모든 곳은 하나로 연결되어 점점 좁아질 것이고, 세력들은 공식처럼 유라시아 심장지대로 쇄도할 것이다. 세계 육지의 3분의 2는 아프리카를 포함한 유라시아이고, 나머지 3분의 1은 아메리카이다. 유라시아가 특정 패권국의 손에 넘어갈 경우, 유라시아 바깥 세력인 미국에게는 묘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국이 생각하는 전략은 무엇인가? 또 우리는 국제정치의 큰 흐름을 어떻게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할까?

 

★★★ 헨리 키신저 추천도서 ★★★

 

"이 책은 지리야말로 국가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지배적 요소였다는, 오랜 진실을 일깨워준다."

 


  

모든 역사의 무대, 지리
영원한 것은 지도상에 나타난 인간의 입지뿐이다. 야심찬 지도자는 죽어 없어지고, 찬란한 문명은 닳아 쇠락하기 마련이지만, 산맥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인구가 희박하던 시기부터 인류는 그들의 입지에 적응하며 공동체를 이루었고, 이런 의미에서 지리는 모든 문명과 역사의 주요 기원이기도 하다. 세계 각지의 인류는 지리와 강고하게 결합하여 고유한 정체성을 일구었고 이것이 오늘날 민족들인 것이다. 한편으로 지리는 수십 년 안에 업적을 이루는 ‘영웅’이나 ‘인류 집단’과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이루는 맨 아래쪽에 자리한 채 감지하기 어려울 만큼 서서히 작용하는 역사의 ‘장기 지속’ 요소이기도 하다.
지도자들은 역사적 경험과 사상을 동원해 통치 철학을 고민하겠지만, 엄밀히는 ‘지리’가 그보다 먼저 그들의 나라를 규정하는 첫 번째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어떤 포악한 독재자나 제국의 황제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자연 장벽’을 만나는 법이고, 모든 인류에게는 기본적으로 비슷한 잠재력이 있지만 때로 그들을 각기 다른 역사적 경로로 이끄는 명백한 지리적 현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리라는 무대 위의 주체, 인간

하지만 지리가 역사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주체는 결국 인간이다. 일을 꾸며나가는 것은 인간이고 그 배경에 지리가 있을 뿐인 것이다. 로버트 카플란은 지리의 중요성에 방점을 찍은 이 저작에서, 지리결정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걸출한 자유주의자(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들을 소환하여 그들 사상의 공통분모를 확인한다. 예를 들어, 냉전 시대에 활약한 이사야 벌린은 ‘인간의 동기’를 강조하며 지리, 환경, 인종적 특성과 같은 거대한 비인간적 힘이 우리의 삶과 세계 정치의 방향을 결정짓는다는 믿음은 그 자체로 부도덕하다고 말했는데, 하지만 이는 ‘인간의 동기’가 비인간적 힘을 넘어설 수 있다는 의미이지 비인간적 힘 자체를 경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른 한편에는 ‘인간의 의지’를 경시하고 ‘지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핼퍼드 J. 매킨더 같은 이도 있다. ‘지정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매킨더는 ‘결정론자’의 대부라는 공격을 받았으나, 카플란에 의하면, 그는 “지리적 요소는 인간적 요소로 극복될 수 있다”는 명제를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힘’에 신뢰를 보낸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카플란이 향해가는 목적지는 꽤 뚜렷하다. “결국에는 환경적 힘과 조화를 이룬 인간이 환경적 힘에 맞서 싸운 인간을 이기게 될 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힌두쿠시 산맥은 여전히 난공불락으로 남아 있다."

 

세계화와 지리의 복수

오늘날 기술의 발전은 ‘거리’를 소멸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화의 첫 단계가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경제로 연결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세계화는 질적 차원에서 세계를 더 좁게, 더 빠르게 연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세계화는 확실히 ‘지리’나 ‘국경’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지리는 잊힐 수는 있어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카플란은 이를 역사적 사례로 확인시켜 준다. 
아직 세계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양분된 냉전 시기, 1980년대에 서구 지식인들은 ‘중부 유럽’이라는 말을 새롭게 부활시켰다. ‘중부 유럽’은 실제 존재하는 지리적 현실이라기보다, 여러 민족이 공존하며 제국을 이루고 문화를 꽃피웠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제국 시절의 추억에 의존한 이상주의의 산물이었다. 말하자면 ‘개념’으로서의 지리였다. 그리고 이 개념에는 ‘동유럽’이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중부 유럽’의 나라들이 소련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담겨 있었다. 그러다가 1989년,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고 ‘중부 유럽’ 국가들이 속속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나 서구의 품에 안기는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인위적 장벽인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제 넘지 못할 벽은 없는 것같이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서구의 이상주의는 폭발했다.
하지만 환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2년 뒤인 1991년 발칸 반도에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 ‘중부 유럽’ 국가들이 연루되어 수십만 명이 인종 청소를 당한, 끔찍한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서구인들은 순식간에 ‘발칸’을 ‘중부 유럽’에서 분리하여 다른 지역, 즉 새로운 근동 혹은 옛 근동의 일부로 규정하는 자신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은 틀린 게 아니었다.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서구인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발칸과 유럽 중심부 사이에는 오래도록 두 공간을 분할해온 카르파티아산맥이 존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발칸’은 유럽보다는 오히려 옛 오스만제국이나 비잔티움제국에 더 가까웠다. 이것이 탈냉전 이후 서구가 목격한 첫 번째 ‘지리의 복수’였다.
이후 서구는 자신들이 2차 대전 당시 ‘뮌헨’의 실수를 반복하여 나치독일 이후 최악의 학살 사태를 방치했다는 반성 아래 인도주의적 개입에 나섰다. 1995년에 보스니아, 1999년에는 코소보에 군사 개입을 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인도주의적 개입’은 이후 소말리아, 아이티, 르완다로 이어졌고 모두 성공적이었다. 그러자 서구는 계속된 성공에 도취되어 이번에는 ‘지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인간의 도덕성은 구김 없이 실현될 수 있다는 판단에 경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감은 미국이 실행한 2000년대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쟁에서 여지없이 박살났다. 그와 함께 1990년대의 착시도 드러났다. 1990년대의 개입은 진보한 공군력에 힘입은 이차원 평면에 진입하는 문제였다면, 2000년대의 산악지대투성이의 아프가니스탄과 위험한 샛길이 즐비한 이라크에서는 전쟁이 이내 삼차원의 모습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미국과 서구는 이러한 ‘지리의 복수’에 의기소침해졌고 이후 군사 개입에 대한 열정은 빠른 속도로 식었다. ‘지리의 복수’의 진짜 위험은 바로 이것, 이상의 후퇴일 수 있음을 카플란은 거듭 확인한다.
‘지리의 복수’에 관한 보다 최근의 예로는 ‘아랍의 봄’ 당시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꼽을 수 있다. 튀니지를 기점으로 민주주의 열풍이 주변 국가들을 휩쓴 이 격변의 첫 단계에서 지리는 새로운 통신 기술의 힘에 밀려 패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혁명의 열기는 곧 분절되어 나라별로 특유의 내러티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 내러티브는 다분히 지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유럽과 러시아가 만들어지다

지리는 세계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20세기 초의 학자 핼퍼드 J. 매킨더는 일찌감치 지리적 관점에서 ‘유럽의 형성’을 설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유럽은 아시아로부터 절구질을 당하면서 형성되었다. 유럽은 동쪽을 제외하고는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을 갖고 있고, 오로지 동쪽으로만 육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로마 제국이 수립한 질서 속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아온 제국과 변방은 중앙아시아 스텝 유목민들의 서진에 짓눌려 다른 대륙보다 일찌감치 압착되는 형세가 되었고, 이는 오늘날 복잡한 민족 구성의 토대가 되었다. 중세의 암흑기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노르드인들(바이킹)과 사라센(이슬람교도), 무어인들에 의해 바다를 차단당한 가운데, 아시아의 투르크족이 들이닥친 것이다. 이렇듯 유럽은 절구질 속에서 탄생했고, 절구의 공이는 바로 유라시아 심장지대의 육지세력이었다.
그런 와중에 16세기가 되면 스텝 민족을 피해 북부 삼림 지대에 숨어 있던 러시아가 바깥으로 나와 유럽의 동쪽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때는 서유럽이 대항해 시대를 연 시대이기도 했다. 이후 서유럽이 바다를 덮고 희망봉을 도는 동안 러시아는 육지로 맹렬하게 세력을 팽창하여 동쪽으로는 시베리아, 남쪽으로는 캅카스산맥에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유럽의 해양세력과 러시아 육지세력의 대결 구도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두 세력의 정체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해양세력은 머나먼 항구들로의 접근이 가능하여 코즈모폴리턴적 힘을 가지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필수 요건인 국경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반면, 러시아는 육지 너머 보이지 않는 적을 의식하며 상시적인 안보 불안에 시달렸고, 끝없는 팽창으로 이를 만회하는 역사를 써나갔던 것이다.

 

매킨더의 유라시아 중심 이론

19세기에 육지세력은 해양세력에 비해 세계적 차원의 영향력이 현저히 낮았다. 하지만 19세기를 끝으로 유라시아가 더 이상 정복 가능한 곳이 남지 않은 ‘폐쇄적 지형’으로 변모하면서, 해양세력과 육지세력의 관계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유럽이 고대에 기마 유목민에게 노출되어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면, 철도망으로 뒤덮인 20세기 또한 그와 비슷한 지정학적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매킨더의 유라시아 중심 이론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일단 ‘폐쇄적 지형’이 된 다음부터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는 10년, 20년 시간이 감에 따라 더욱 응집력 있는 단위가 되어 결국 ‘세계 섬’을 형성하게 될 것이며, 그중 철도망으로 뒤덮인 거대한 유럽-아시아 지역이 세계 정치의 중추지대가 된다는 것이 매킨더의 생각이었다. 매킨더의 이 이론은 최대한 ‘지리’에 천착하여 도출된 것으로, 당시 러시아의 철도망은 아직 부실했고,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격파하는 등 해양세력이 곳곳에서 육지세력인 러시아를 좌초시키던 시점에 나왔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었다. 매킨더의 유라시아 중심 이론은 단 몇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의 대양(하나로 연결된 바다)이 지구의 12분의 9를 차지하고, 하나의 대륙(세계 섬, 즉 유라시아-아프리카)이 12분의 2를 차지하며, 그보다 작은 다수의 섬들이 있는 가운데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가 나머지 12분의 1을 차지한다. 그리고 동유럽을 통치하는 자가 심장지대를 지배하고, 심장지대를 통치하는 자가 세계 섬을 지배하며, 세계 섬을 통치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미국은 아메리카의 나라이지 유라시아의 나라가 아니다.

 

유라시아의 주변지대(림랜드)

유라시아의 심장지대를 모든 정치학자나 역사학자들 사이에 합의된 용어로 보기는 어렵다. 학자들에 따라 작게는 중앙아시아에서, 조금 넓게는 동유럽과 메소포타미아, 북아프리카 지역 등이 포함된다. 유라시아 심장지대는 지리적으로 유라시아의 가운데에 있으면서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을 낳고, 연쇄적으로 주변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곳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장지대의 외곽, 즉 유라시아의 주변지대에 속하는 나라들은 비교적 분명하게 지목할 수 있다. 바로 유럽, 러시아, 중국, 인도, 이란, 터키이다. 유라시아는 이들 나라들이 심장지대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싼 형세를 이루고 있다. 카플란은 이들 ‘주변지대’를 설명하기 위해, 육지세력에 의한 패권의 등장을 호언한 매킨더에게 의존하기보다 1943년에 타계한 니컬러스 스파이크먼을 더 자세히 소개한다. 스파이크먼은 ‘바다’를 중시함으로써 ‘미국’의 지정학적 운명을 드러내는 한편, 바다와 인접한 유라시아 주변지대에 높은 가중치를 부여해 국제정치의 요체는 심장지대가 아니라 ‘주변지대’에 있다고 파악하였다. 그는 주변지대들이 ‘지리’를 배경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서 심장지대와 다른 주변지대들과 끊임없이 분쟁을 벌이게 될 것으로 보았다. 즉, 해양세력에 의한 유라시아의 세력균형이라는 아이디어가 스파이크먼(덧붙여 해군의 중요성을 역설한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을 통해 구체화된 것이다.

 

오늘날 지리는 세계 각국에 어떤 운명을 부여하는가?

카플란은 세계 주요 국가들의 역사를 ‘지리’의 관점에서 새롭게 요약해서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유럽은 지리에 분열과 통합의 요소가 배태되어 있어 쉽게 어느 한쪽으로의 귀결을 논하기 어렵다. 분열의 배경에는 산맥과 강, 계곡들로 자잘하게 분절된 유럽의 지리가 있다. 역사적으로 독일은 해양세력의 성향과 육지세력의 성향을 함께 가진 국가로서 유럽 통합의 미래는 독일이 유럽연합의 무게중심을 자국 쪽으로 끌어올 수 있느냐 그리고 ‘중부 유럽’을 건설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때 ‘중부 유럽’은 그리스를 포함한 유라시아 심장지대를 제어하기 위한 중요한 전략 요충지가 된다.
러시아 표트르 대제(1682~1725년) 시기에 ‘지리적 부적합함을 무릅쓰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의 수도로 건설하였다. 유럽을 지향하기 위해서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단기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유럽에 치우쳤음에도 광활한 제국을 통치하는 수도로 기능했으나, 결국 볼셰비키가 집권하면서 내륙 도시인 모스크바에 수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볼셰비키는 앞선 시대 차르들의 딜레마를 보았던 것이다. 이후 소련은 다시 완고한 육지세력으로 환원되었고,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는 유럽과 섞이지 못한 채 남고 말았다. 러시아는 한때 심장지대를 품었던 나라의 후신으로 여전히 그 지역에 대한 높은 근접성을 갖고 있다. 구소련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심장지대에 중요한 압력을 형성할 것은 분명하다. 한편으로 러시아는 언제나 그랬듯 바다로의 출로를 찾고 있고, 우크라이나 사태가 극명하게 보여주었듯, 그 유력한 경로는 심장지대에 존재하고 있다.

 

 

기복 지도를 보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

 

중국 황허 강과 웨이허 강을 중심으로 중원 통일의 도정에 오른 이래, 진시황이 최초의 통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중국은 러시아나 유럽과 마찬가지로 스텝 유목민에 의한 절구질을 당했기 때문에, 폐쇄된 지리를 구축하기 위한 긴 여정에 오른다. 그리하여 청나라 시기에 오면 오늘날과 거의 일치하는 확대된 국경선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20세기의 중국은 육지로는 유라시아의 심장지대로 향하고 있고, 바다로는 대만과 남중국해, 인도양으로 물길을 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일대일로).
인도는 통일의 역사가 극단적으로 짧은 나라로 이는 지리 때문이었다. 인도의 수도인 델리는 역사적으로 인도아대륙에서 기원한 도시가 아니라, 중앙아시아를 통해 들어온 침략자들의 도시였다. 인도아대륙은 중앙의 고원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분단된 형세이고, 인구 분포를 결정하는 강줄기 또한 동서로 공간을 갈라놓아서, 지리적 차원의 구심점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인도의 영토는 해양세력(영국)에 의한 결과임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는 오늘날 인도가 겪고 있는 지정학적 어려움도 상당 부분 설명해준다. 인도의 지난날 역사의 단층선은 오늘날 인도의 국경선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란은 중동의 이란 고원을 온전히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다. 게다가 북쪽으로 카스피해와 남쪽으로 페르시아해, 아라비아해와 면해 있어 육지와 해양 어느 쪽으로도 경로가 자유롭다. 인구가 많은 데다 자원 강국으로서 앞으로 유라시아의 교통과 자원은 이란에서 출발하고 이란을 거치게 될 것이다. 이란은 시아파 종교국가로서 중동의 여러 테러 단체의 배후국가이지만, 국민들은 그런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지는 않는다. 카플란은 이란이 앞으로 서구적 가치에 포섭될 가능성이 있다고 점친다.
터키는 오스만제국의 붕괴 후 태어난 나라지만 서구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케말 아타튀르크의 영도 아래, 다문화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나라로 새 역사를 시작했다. 아타튀르크는 수도를 유럽 지향적인 이스탄불에서 소아시아(아나톨리아)의 중심지인 앙카라로 옮겼는데, 이 때문에 터키는 서서히 소아시아에 깊숙이 뿌리박힌 이슬람 문명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정기적으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와중에 민주주의가 들쭉날쭉 발전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오히려 반미, 반이스라엘 정서를 강화하고 터키를 이슬람 문화권에 결속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오늘날 터키가 에르도안 대통령을 중심으로 이슬람 종교국가로 회귀하는 듯한 모습은 지리에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미래에 관하여 이 책은 어떤 힌트를 줄까? 그는 엄청난 군사력과 증오가 밀집한 한반도의 군사분계선 역시 지리의 힘을 무시하고 인간적 힘으로 형성된 장벽이므로, 결국은 20세기의 베를린 장벽처럼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지리는 이미 통일 한국(Greater Korea)을 예고하고 있다. 분단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든 통일의 힘은 결국 예기치 않게, 또 때로는 폭력적이고 매우 빠른 속도로 개가를 올릴 것이므로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트럼프 시대, 미국은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21세기 초 9.11 사태 이후 사람들은 향후 세계가 미국에 의한 단극 질서로 나아가는 것인지, 미국은 ‘제국’인지 아닌지 궁금해했다. 미국이 제국의 전범인 로마와 비교되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십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나온 이 책에서, 카플란은 미국의 운명에 관한 두 가지 치명적인 선고를 내린다.
카플란이 미국의 상대적 쇠퇴를 인정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의 관심사는 미국 국력의 구체적인 쇠퇴의 증거를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미국의 외교적 자원이나 군사력, 보편적 가치에는 여전한 신뢰를 보낸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미국의 ‘지리’ 자체다. 미국이 축복받은 입지에서 일찌감치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팽창을 마치고 대양에서 우월적 지위를 누렸다면, 이제 유라시아가 긴 시간에 걸친 ‘세계섬’으로서의 대두를 앞두고 있다는 것이다. 카플란은 유라시아가 단독 패권 세력의 손에 넘어가는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철도, 도로, 파이프라인들이 중앙아시아와 특히 아프가니스탄 허브를 통해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모든 곳을 연결할 것이고, 통합에는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만약 유라시아가 유기적으로 통합된다면, 미국은 그에 발맞추어 일종의 균형추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제 미국 단독으로 그것이 가능한 시대는 끝났다. 카플란은 미국이 이 위협을 상쇄하려면, 무엇보다 아메리카에서 ‘통합세력’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멕시코와 중남미 등의 주변국을 조화롭게 포섭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장벽은 자연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다

 

카플란의 다른 한 가지 치명적인 선고는 트럼프 대통령의 공약과 관련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왜 멕시코와의 국경지대에 ‘장벽’을 세우려는 것일까? 세계 전역에서 경찰 역할을 자임하던 미국이 왜 갑자기 멕시코 문제에 그렇게 집착하게 된 것일까? 이 또한 지리가 미국에 부여한 ‘운명’과 유관하다. 답은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은 인간이 얼마든지 넘을 수 있는 ‘인위적 국경’이라는 것이다. 일부 미국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멕시코인들의 이주는, 과거 미국에 빼앗긴 지역들에 대한 일종의 레콩키스타(영토 회복 운동) 성격마저 띠면서 미국-멕시코 국경을 더욱 흐릿하게 만들고 있다. 한편으로 멕시코인들의 이주는 멕시코 정부가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만약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에서 갱단이 이긴다면 “미국은 초국가적 마약 카르텔의 통제를 받는 마약 국가와 3,200킬로미터 길이의 국경을 공유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것 같은 일이 미국의 뒷마당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국경 장벽 건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카플란은 미국이 자신의 힘을 과신하여 미국의 이상을 전 세계를 상대로 투사하는 일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에서 인식을 공유한다. 그러나 트럼프의 국경 장벽 건설은 아메리카의 통합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단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카플란이 제안하는 방향과는 반대된다고 할 수 있다.
카플란은 미국이 유라시아에서는 균형화 세력, 아메리카에서는 통합 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유라시아 지리가 야기하는 연쇄적인 효과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의 유력한 결론이 될 것이다. 덧붙여 카플란은 말한다. 미국은 역내 세력 통합이 달성된 후에는 해양세력으로서, ‘중부 유럽’의 자유주의적, 지적 대의 못지않은 대의를 지구 전역에 투사해야 한다고. 결국 ‘지리의 복수’를 피하거나, 피하지 못하더라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중요한 한 결론이다.

 

 

*      *      *

 

지은이  로버트 D. 카플란(Robert D. Kaplan)

외교 문제와 여행 관련 저작 14권을 저술한 미국의 저명한 작가 겸 저널리스트. 2011년 <포린폴리시>에 의해 ‘세계 100대 사상가’에 선정되었으며, 시사 월간지 <애틀랜틱>의 해외 특파원으로 25년 이상 활동한 제3세계 전문가이기도 하다. 2006~2008년에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의 특임 객원교수로 국가 안보를 강의했고, 2009년에는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에 의해 국방정책위원회 위원으로 발탁되어 2011년까지 활동했다. 2008년 이래 워싱턴에 본부를 둔 신미국안보센터의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한 그는 현재 전략정보전문 분석업체 스트랫포의 지정학 담당 수석 애널리스트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발칸의 유령들』, 『로버트 카플란의 타타르로 가는 길』, 『무정부 시대는 오는가』, 『제국의 최전선』, 『승자학』, 『몬순』 등 다수가 있고, 이 중 많은 책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옮긴이  이순호

전문 번역가. 홍익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였으며 미국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서양사를 공부하고 석사 학위를 받았다. 『로버트 카플란의 타타르로 가는 길』, 『제국의 최전선』, 『살라미스 해전: 세계의 역사를 바꾼 전쟁』, 『살라딘』, 『위대한 바다: 지중해 2만 년의 문명사』, 『발칸의 역사』, 『완전한 승리, 바다의 지배자: 최초의 해상 제국과 민주주의의 탄생』, 『로마 제국과 유럽의 탄생』, 『비잔티움』, 『현대 중동의 탄생』, 『이슬람 제국의 탄생』, 『다이너스티: 카이사르 가문의 영광과 몰락』 등을 번역하였다.

 

 

교보문고 바로가기

알라딘 바로가기

예스24 바로가기

인터파크 바로가기


 

『중간착취자의 나라』

비정규 노동으로 본 민주공화국의 두 미래

이한 지음 | 미지북스 | 228쪽 | 13,800원 

 

 

비정규직 문제의 레드라인은 어디인가?

격화되는 비정규직 갈등, 하지만 해법은 있다!

 

'노동생산성 증가'냐 '노동 압착'이냐, 기로에선 한국 경제

경제적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을 모두 만족시키는 비정규직 해법!  

 

한국 경제는 오래전부터 성장 둔화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의 동력인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려는 노력보다는 노동 압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왔다. 오늘날 첨예한 사회 갈등의 원인이 되는 비정규직 문제나 양극화 같은 사회적 불평등은 그러한 시도의 역사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절반의 고용과 삶의 안정성이 극도로 낮은 처지로 떨어졌고, 고용 시장에서는 비숙련 노동력을 주로 공급하는 부문이 급격하게 성장했다. 이들은 실제 국민경제에 아무런 생산적 기여를 하지 않으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기생하는 존재이며, 우리 사회의 ‘중간착취자’들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정치 문화는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이분법적 사고와 폐쇄적인 진영 논리로 갈라졌지만, 정작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올바른 답을 내놓고 있지는 못하다. 한편에서는 경제적 효율성을 이유로 비정규직 제도의 확대를 이야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적 충격을 이유로 비정규직 제도의 폐지를 주장한다. 『중간착취자의 나라』의 저자 이한 변호사는 비정규직 제도의 사회적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부정적 충격과 고통을 최소화하는 새로운 해법, 즉 경제적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을 모두 만족시키는 비정규직 해법을 제시한다.

풍부한 실증 자료를 바탕으로 저자가 제안하는 해법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중간착취자’로 상징되는 현재의 경제구조, 즉 생산성 증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간접 고용 부문을 제거해야 한다. 둘째, 생산성 증가를 위해 가장 많은 부담을 지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 저자는 우리의 미래가 ‘특권층이 나머지 구성원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나라가 될지, 아니면 공정한 조건에서 협동하는 사회가 될지’는 우리가 이 중대한 문제의 고통을 제대로 포착하고, 고통을 완화하는 대안을 경제적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에 따라 수립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고 말한다.

 


 

▲ 흑사병으로 중세 유럽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자 봉건 영주들은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일부 영주는 현금으로 일정한 지대를 내게 하고 나머지 수확물을 농노가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방식은 농업 기술 혁신과 생산성 증가를 가져왔다. 그러나 많은 영주들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대응했다. 예전만큼 수확물을 얻기 위해 농노들에게 더 많은 영지에서 일하게 했다. 농노들의 예속은 강화되고 노동은 핍진적으로 착취되었다. 당연히 수많은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역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이 사회는 생산성 증가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노동 압착의 길로 갈 것인가?   

 

왜 ‘중간착취자의 나라’인가?

‘중간착취자’란 스스로는 생산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가 생산한 몫에서 일부를 가져가는 존재를 말한다. 한마디로 기생충 같은 존재다. 『중간착취자의 나라』에서는 노동시장에서 도급계약을 맺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원청 업체에 제공하는 ‘인력 공급 업체’를 중간착취자로 보고, 그와 관련된 이슈에 집중했다.

중간착취자는 농경사회에도 있었다. 바로 마름이란 존재가 그것이다. 마름은 소작인과 지주를 연결시켜주고 ‘계속해서’ 대가를 받았다. 그래서 소작인이 지주에게 바치는 지료에는 늘 지주가 마름에게 주는 중간착취의 대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땅이 없는 소작인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지주에게 착취당하고, 생산수단과의 연결 고리에 들어앉아 중간착취를 하는 마름에게 다시 한 번 착취당했다. 더 큰 문제는 마름의 존재가 개별 지주와 소작인과의 관계에서만 끝나지 않고 농업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생산의 주체인 소작인에게 농업기술의 혁신을 통해 생산성에 기여할 유인誘因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중간착취자가 존재했던 농경사회는 생산성의 발전이 없거나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다.

오늘날의 인력 공급 업체 역시 농경사회의 마름과 다를 바 없다. 마름이 그랬듯 인력 공급 업체 역시 원청 업체와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력 공급만을 담당하며 중간착취를 통해 노동생산성을 낮추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미 여러 실증 자료들에서 이러한 ‘근로자 공급’이 노동생산성을 낮춘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데도, 왜곡된 신화(비정규 노동의 확대가 노동생산성을 높여줄 것)에 의해 오히려 그 범위가 더욱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낮은 소득 때문에 부채를 지고, 자살하고, 범죄를 일으키고, 내수는 침체되고, 혁신이 감소되고, 출산율이 계속해서 하락하고, 부패가 증가할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은 경찰의 권력 범위를 확대하고, 사적 경비원을 고용하고, 외국에서 노동력을 들여와 노동 압착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흑사병 이후 중세 봉건 영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른 길은? 이 사회가 동등하고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이라는 원리 위에 정초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길이다. 이득과 부담이 공정하게 할당되고, 존엄을 유지할 수 있고, 숙련과 지식을 형성할 만한 여유를 가지며, 합당하고 충분한 소득을 받고, 자신이 제대로 대우받고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에 혁신에 기여하려고 근면을 끌어내며, 내수가 활성화되고, 혁신이 증가하고, 출산율을 하락시키는 경제적 장애들이 완화되고, 부패는 감소하고, 이는 다시 생산성의 향상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두 미래 중 하나는 우리의 현실이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중간착취자의 나라’가 그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비정규직 제도의 순기능과 사회적 충격

지금의 비정규직 문제는 비정규직 제도 자체에 있지 않다. 비정규직 제도에는 역기능뿐 아니라 분명 순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비정규직은 노동력의 유연한 공급을 가능케함으로써 전체 국민경제에서 경제적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노동시장이 산업구조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자본이 노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고용하게끔 한다. 또한 수요가 쉽게 변하는 부문의 산업 활동이 증가하도록 돕는다. 이는 비정규직을 수용함으로써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길 수 있으며,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직업 경험을 쌓아감으로써 정규직으로 이전할 수 있는 기회가 창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지금의 비정규직 제도가 한 사회의 경제성장 동력인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방식 대신 오히려 떨어드리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데 있다. 비정규직 제도는 숙련 형성과 지식 축적을 저해함으로써 사회 전체적으로는 인적 자본의 감소를 불러온다. 여러 실증 연구들은 비정규직이 대폭 증가할수록 그 사회의 생산성이 낮아진다는 유력한 근거들을 보여준다. 또한 비정규직은 고용 안정이 필요한 경기 하강기에 공격적인 해고를 초래하고 이는 총수요의 감소와 결부된 경기위축을 심화시킨다. 개별 기업 입장에서 합리적인 것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다(이른바 ‘구성의 오류error of composition’이다). 더 나아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노동소득 분배율을 하락시키고 이는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제도는 노동자의 건강과 삶의 안정성을 크게 해침으로써 비정규직 노동자 자신에게 가장 큰 고통과 위험을 가져온다. 이러한 비정규직 제도의 부정적 효과와 악순환은 인력 공급 업체가 ‘중간착취자’로서 기능하는 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고 미래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경제 성장, 양립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해법은 단순하다. 비정규직 제도의 순기능을 제대로 활용하면서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비정규직 제도를 재설계하는 것이다. 새로 설계 되는 비정규직 제도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이득이 되는 제도라면, 설사 불평등한 제도일지라도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해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이익이 증진되는 경우에만 불평등이 정당화된다는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의 원칙’을 준용한다. 비정규직 제도의 문제 해결은 경제적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 둘 다를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충분히 고안될 수 있다.

그렇다면 생산성을 높이는 비정규직 제도는 어떻게 설계되어야 하는가? 『중간착취자의 나라』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 생산성 증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간접 고용은 금지한다. 둘째, 생산성 증가를 위해 정규직보다 더 큰 부담을 지는 만큼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동일 노동에 대해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한다. 그에 대한 적정한 임금은 정규직의 130퍼센트이다. 셋째, 특수 고용직 등 그 실질이 노동자인 사람들의 법적 근로자로서의 보호가 이뤄져야 한다.

이 모든 개혁을 관통하는 핵심은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공정한 협동 조건’의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질문을 통해 모든 비정규직 제도를 검토하고,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 첫째, 그 고용 형태는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통해 생산을 증가시키는가? 둘째, 증가된 생산물은 가장 많은 부담을 지는 이들을 더 열악하게 만들지 않고, 적정한 보상과 기회를 줌으로써 그들에게도 이득이 되는가?

이 두 질문 중 하나라도 ‘아니오’라는 답이 나온다면, 그 비정규직 제도는 정당화될 수 없다. 모두 ‘예’라는 답이 나올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일부 사회 구성원들이 나머지 사회 구성원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말대신 모든 구성원들이 협동적 과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이 어떤 보상도 없이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불평등과 부담을 강요하는 비정규직 제도가 아니라, 그들이 지는 위험과 부담에 걸맞은 합당한 보상을 주는 방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비정규직 제도는 부당하게 축소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자유를 복구시킬 방안을 담고 있어야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숙련 과정을 쌓고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공정한 기회 균등을 도모해야 한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노동조건 차이가 그러한 불평등 체계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비정규직에게도 이익이 되는 원칙으로 규율되어야 한다.

 

왜 비정규직은 정규직 임금의 130퍼센트를 받아야 하는가

비정규직 제도는 노동 유연성을 통해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달성하는 데 이바지한다. 즉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고용 안정을 대가로 전체 노동생산성 증가를 위해 가장 크게 부담을 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가장 크게 부담을 지는 만큼 가장 큰 보상을 받아야 한다. 부담을 더 진다는 이유로 삶의 기회가 축소되거나 굴곡되지 않는 것에 더하여, 더 많은 보상을 합당하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종류의 유사한 업무를 하는 비정규직은 정규직보다 임금을 얼마나 많이 받아야 하는 걸까? 1배로 받는 것, 똑같이 받는 것은 부정의하다. 그러면 부담을 더 많이 지는 사람이 부담을 덜 지는 사람과 동일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1.5배 이상을 받는다면 비정규직의 고용 유발 효과가 사라진다. 이렇게 되면 정규직에게 1.5배의 임금을 주고 초과 노동을 시키는 것이 사용자에게 더 이익이 된다. 이는 사람들을 과로에 시달리게 하고, 일부 사람들에게는 취업할 기회를 주지 못할 가능성을 증대시킨다. 그러므로 1배와 1.5배의 중간 정도인 1.3배가 적정한 비정규직 임금이 될 수 있다.

 

노동생산성이냐 노동압착이냐, 우리에게 펼쳐진 두 미래

흑사병은 중세 유럽 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불러왔다. 그런데 이러한 인구 감소는 두 가지 대응과 연결되었다. 하나는 자유와 생산성을 높이는 대응, 다른 하나는 자유와 생산성을 낮추는 대응이었다. 일부 영주는 현금으로 일정한 지대를 내게 하고, 나머지 수확물을 농노가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이런 경우 농노는 농업 기술을 혁신하여 더 많은 수확을 하려는 유인을 갖는다. 이러한 변화는 영주의 땅에 예속되어 강제로 일하던 과거보다 훨씬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많은 영주들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대응했다. 즉 농노의 자유와 농업 생산성을 낮추는 방식으로 대응한 것이다. 인구가 줄어드니 같은 시간을 영지에서 일해도 수확이 예전보다 못하게 되었다. 영주들은 예전만큼 수확물을 얻기 위해 농노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영지에서 일하게 했다. 그 결과 노동은 핍진적으로 착취되었다. 당연히 수많은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성장의 둔화를 맞이하고 있다. 성장의 둔화는 이 사회에 두 가지 갈림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성장의 근원적인 동력인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생산성’은 그대로 두고, 동일한 노동비용으로 더 많은 산출을 강요하는 ‘노동 압착’을 실시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 사회의 권력층은 흑사병 이후 많은 중세 봉건 영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후자의 방향을 취하고 있다. 이는 이 사회의 장기적인 미래를 조망하고 기획하는 능력이 이들에게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들은 추상적인 용어로 구체적인 현실을 호도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던져야 할 최종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특권층이 나머지 구성원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나라인가, 아니면 공정한 조건에서 협동하는 나라인가?’ 이 두 미래는 열려 있다. 이 중 어느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는 우리가 이 중대한 문제의 고통을 제대로 포착하고, 고통을 완화하는 대안을 경제적 효율성과 정의의 원칙에 따라 수립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      *      *

 

지은이 이한

변호사이자 시민교육센터 대표이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민주주의와 정치철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을 하고 있으며,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 어떻게 하면 그런 사회를 이룰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삶은 왜 의미 있는가』(2016년),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2016년),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2012년), 『이것이 공부다』(2012년), 『너의 의무를 묻는다』(2010년), 『철학이 있는 콜버그의 호프집』(2005년), 『탈학교의 상상력』(2000년), 『학교를 넘어서』(1998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사치 열병』(2011년), 『포스트민주주의』(2008년), 『이반 일리히의 유언』(2010년), 『계급론』(2005년) 등이 있다. 시민교육센터 바로 가기 

 

 

교보문고 바로가기

알라딘 바로가기

예스24 바로가기

인터파크 바로가기

 

 

 

『살게 해줘!』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

아마미야 가린 지음 | 김미정 옮김 | 미지북스 | 344쪽 | 15,000원 

 

 

우리 세대는 어쩌다 이 지경이 돼 버린 걸까?

평범하게 일하는 것의 의미가 무너진 사회

 

프레카리아트 운동의 상징 아마미야 가린의

21세기 청년 불안정 노동자 르포르타주

 

21세기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의 절망적인 현실을 집요하게 파헤친 충격의 르포르타주. 우리 세대는 왜 이 지경가지 추락한 걸까?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려지는 청년들은 노예가 아니다. 일본 프레카리아트 운동의 상징 아마미야 가린이 생생하고 속도감 있는 인터뷰를 통해 "제발 좀 살게 해달라"는 붕괴된 세대의 실상을 폭로한다. 

 

 

문재인 대통령 추천 도서

문재인 대통령은 2011년 <시사인>에서 이 책을 추천했고,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출간한 『문재인의 서재』에서 다시 한번 첫번째 추천 책으로 소개했습니다. (이 책은 2011년에 출간된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의 개정판입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우울한 노동의 디스토피아

주위를 둘러보자. 저임금 비정규직 생활에 찌들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20대와 30대 청년들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제는 40대와, 노동 시장에 대거 들어온 노년층까지 여기에 포함된다. 계약직, 파견, 하청, 아르바이트…… 이들 앞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우울한 노동의 디스토피아가 펼쳐져 있다. 일 년 일 년 시간이 지나도, 직장을 옮겨봐도 달라지는 건 없다.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고 건강은 점점 나빠져 간다. 꿈은 시들어가고 마음의 병이 깊어간다. 당일 해고와 임금 체불 같은 일들이 버젓이 횡행하고, 노동 조건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도시에는 불안정 노동자들을 위한 고시원과 원룸촌이 요처마다 들어서고, 한편에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홈리스들이 모습을 드러내 서성이고 있다.

정규직 사원이라고 해서 사정이 좋은 것은 아니다. 한번 정규직에서 밀려나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능력을 증명하고 경력을 만들기 위해 과로사 직전까지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혹 그런 가혹한 노동 조건이 싫어서 그렇게는 일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니트족’으로 분류되어 이내 ‘쓸모없는 사람’으로 매도당한다. 무엇보다, 몇 안 되는 정규직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젊은이들이 있다. 모두가 적 아니면 경쟁자가 되는 와중에 고독이 깊어간다.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자기 책임’이라고 스스로를 탓하며 마음이 병들어간다.

 

평범하게 일하는 것의 의미가 무너진 사회

한때 일본에서는 ‘프리터’가 자유롭게 일하는 새로운 노동 방식으로 널리 환영받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도 ‘프리랜서’ 등의 노동 방식이 주목받은 적이 있었다. 원할 때 일하고 남는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다는 환상적인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었다.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프리터의 수입은 겨우 생존을 보장할 정도에 불과하고,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언제 잘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프리터는 직장에 애착을 가질 수 없고 숙련도도 좀처럼 늘지 않는다. 고용도 수입도 불안정하기 때문에, 생활도 주거도 싸구려로 채워지고, 삶은 불안정해진다. 내일에 대한 희망도 가질 수 없다.

여기에다 사람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이상한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항간에서 ‘자기 책임’, ‘노력’이라는 말을 자주 마주친다. 문제는, 사회 구성원 중 일부는 무조건 비정규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기 책임’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런 현실을 잊는다. 무의미한 노력을 강요당하는 것만큼 심한 고문도 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가 자기 잘못인지 다른 누구의 잘못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분노를 쌓아간다. 때로 그 분노는 자기를 향한다. 때론 자살을 결심하고 동반자를 찾는다. 때론 타인을 향해 무차별적 비방과 폭력을 휘두르고, 때론 가까운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식으로 폭발한다. 산발적으로, 자기만의 방에서, 집 안에서, 인터넷에서, 거리에서. 개개인 삶의 ‘불안정’이 다른 사회적 단위의 ‘불안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프레카리아트, 만들어진 불안정 노동자층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돼버린 걸까? 예전에는 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이 취직할 수 있었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다르지 않았다. 기업들은 갓 졸업한 사람을 대거 채용했고 처음부터 일을 가르쳐주었다. 지금같이 ‘현장에 투입되어 즉시 일할 수 있는 능력’만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취직하면 사실상의 종신 고용제 아래 연차가 쌓이면서 급여가 올랐고, 장래 설계도 가능했다. 그런데 이게 언젠가부터 엉망진창이 되었다.

사람들은 종종 자유로운 삶의 방식으로 ‘프리터’를 택했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처지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 ‘불안정 노동자층’은 일본 기업과 정부의 장기적인 기획의 결과로 등장했다. 지난 세기에 일본 기업들은 불황의 타개책으로 ‘고용 유연형’ 노동자층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정부와 정치권은 기업의 요구에 부응해 오랜 기간에 걸쳐 노동 관련 법규를 손질했다. 즉, 프리터 등 일본 사회에 출현한 수많은 비정규직은 그들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만들어진 불안정층’이었다. 그러나 비정규직은 그들의 기여와 희생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인정받지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정규직과 구분되어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죽거나 죽도록 일하거나 : 과로사와 과로 자살

경제 구조가 재편되면서 ‘고용 유연형’ 노동자층을 관리하는 새로운 기업들이 등장했다. 바로 중간 도급 업체(파견·청부 기업)들이다. 『살게 해줘!』에서는 우엔단 유지의 사례를 소개한다. 니콘에서 일하는 파견직 노동자였던 그는 제대로 된 노무관리를 전혀 받지 못하고 죽도록 일했다. 그는 주야 교대근무와 철야 근무를 강요당하고, 반도체 제조공장의 ‘클리닝룸’에서 일하면서 서서히 몸의 감각을 상실해갔다. 나중에 유지는 자신이 기본적인 인지 기능조차 손상을 입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살을 택했다. 니콘은 그를 사용할 뿐 관리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었고, 파견업체 쪽은 그가 어디서 일하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그는 죽어갔던 것이다. 유지의 마지막 말은 “헛되이 시간만 보냈다”였다. 정규직의 경우도 얼마든지 사정이 나빠질 수 있다. 승승장구하던 스와 다쓰노리 씨는 ‘재량 노동제’하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과로를 거듭했다. 성과를 내는 데 실패한 후 그가 찾은 유일한 해결책은 ‘자살’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죽을 것 같으면 직장을 그만두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과로 자살의 경우 사안이 단순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피해자 대부분이 심신이 망가진 채로 극심한 우울증을 겪기 때문이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

문재인 대통령은 『문재인의 서재』(2017년)에서 이 책 『살게 해줘!』를 추천하며 이렇게 썼다. “취업하지 못한 젊은 사람들이 자기 탓을 너무 많이 한다. 그것이 그들을 더 괴롭히고 있다. 문제는 그들 탓이 아니다.” 그렇다! 잘못한 것은 결코 청년 불안정 노동자들이 아니다.

이 책에서 당사자들이 증언하는 ‘살기 힘듦’의 문제, 즉 불안정한 일자리, 불안정한 삶, 빈곤, 우울, 연애와 결혼, 출산의 포기, 과로와 과로 자살 등은 어느 사이엔가 한국에서도 일상적 상황이 되어버렸다.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의 긴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사람들은 ‘살기 힘듦’의 문제를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단순히 노동 양태나 계급 규정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삶이나 존재 양식 자체의 ‘불안정함’이 바로 핵심이라는 것, 즉 ‘프레카리아트’란 말과 문제의식이 비교적 널리 공유되고 있다. 젊은 프리터(비정규직)의 문제가 나이 든 빈곤층의 문제로 이행, 접속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 사회는 지켜보고 있다. 우리가 신자유주의의 터널 어디쯤에 와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회 구조가 대대적으로 재편된 결과 살기 힘들어졌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다.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 밥은 먹을 수 있게 해줘라!

누군가는 왜 지금 젊은이들은 거리에 나서서 싸우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폭동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산발적이고 또 폭발적인 모습으로. 히키코모리라 불리면서 집 안에 틀어박혀서. 니트족이란 이름으로 조용히 파업을 일으키면서. 지도자 하나 없이, 누구의 지침도 없이, 사람들은 그냥 이렇게 이 사회를 포기하고 있다. 젊은이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런 상황은 지금 ‘평범하게 일한다’는 것의 의미가 붕괴된 것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책은 구체적인 현장의 당사자들 목소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깨닫게 해준다. ‘을 대 을’ 또는 ‘을 대 병’ 구도에 갇혀 서로 갈등하고 남에게 억압을 떠넘기는 게임을 반복할 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위계를 세분화하고 공고하게 만드는 세력을 향해 항의해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의 목소리들은 일깨운다. 이 시대 우리가 겪는 살기 힘듦의 문제는 결코 개인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고, 구조적, 공동체적 모색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고 이 책은 강력히 주장한다. 저자 아마미야 가린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이제껏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막연하게 느껴졌던 것이 지금은 분명하게 구조의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싸움의 테마는 단지 ‘생존’이다. 살 수 있게 좀 해달라는 것이다.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내놔라. 밥은 먹을 수 있게 해줘라.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일은 시키지 마라. 나는 인간이다. 슬로건은 단지 이것뿐이다. 이 책의 목적은 단 하나, 마땅히 해야 할 반격을 시작하는 것이다.”

 

▲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가 날로 커져가고 있으며, 비정규직의 규모도 증가하고 있다.

 

*      *      *

 

 

지은이 아마미야 가린(雨宮処凛)

1975년 일본 홋카이도 출생. 작가이자 반빈곤 운동 활동가. 스무 살 무렵 ‘살기 힘듦’의 문제에 눈을 뜬 후 처음에는 우익 단체 활동을 통해 사회와 접속했다. 우익 펑크밴드 보컬로 활동하는 등 남다른 이미지 때문에 ‘미니스커트 우익’이라 불리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 헌법 전문을 우연히 읽은 것을 계기로 생각의 방향이 바뀌었다. 26세에 출간한 자전적 에세이 『생지옥 천국』(2000년)이 주목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때부터 일본 사회가 외면하는 격차 및 빈곤 문제에 적극 이의를 제기하며, 끈질기게 취재하고 저항하고 책을 썼다. 2011년 3월 11일 대지진 이후로는 탈원전 운동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2007년에 출간한 이 책 『살게 해줘!: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은 일본저널리스트회의(JCJ)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 『1억 총빈곤 시대』(2017년), 『98%의 미래, 중년파산』(2016년), 『성난 서울』(2009년) 등 40여 권의 책을 썼다.

현재 반빈곤네트워크 간사, 『주간금요일』 편집위원, 프리터전반노조 조합원, ‘부서진 사람들의 제전’ 명예회장, ‘공정한 세금 제도를 요구하는 시민연락회’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이 김미정

성균관대 및 동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도쿄대 총합문화연구과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문학평론을 하고 있고, 플랫폼 〈문학3〉을 만들고 있으며, 대학에서 학생들과 배움을 주고받고 있다. 문학을 매개로 활동하고 있지만 정체성주의적 문학을 넘어선 ‘문학’에 대해 늘 상상, 고민하고 있다. 사람들과 그 감수성의 ‘조건’에 관심이 많다. 최근 쓴 글로는 「‘기억-정동’ 전쟁 시대와 문학적 항쟁」, 「운동(movement)과 문학」, 「‘나-우리’라는 주어와 만들어갈 공통성들」, 「여성교양소설의 불/가능성」(이상 2017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군도의 역사사회학』(2017년), 『정동의 힘』(2016년), 『전후라는 이데올로기』(2013년) 등이 있다.

 

 

교보문고 바로가기

알라딘 바로가기

예스24 바로가기

인터파크 바로가기

 

『바다의 습격』

인류의 터전을 침식하는 해수면 상승의 역사와 미래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360쪽 | 15,000원 

 

 

이번 세기에 바다는 더 강력한 모습으로 공격해올 것이다.

몇몇 국가와 도시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

 

세계적인 고고학자 브라이언 페이건 신작

바다의 습격에 맞선 인류의 새로운 응전을 준비하라! 

 

 

이 책은 마지막 빙하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바다와 인류의 관계를 ‘도전과 응전’의 서사로 풀어낸 책이다.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해수면 상승의 역사를 소개하고,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위험한 미래에 대해 경고한다. 1만 5천 년 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거침없이 상승하던 바다는 약 6천 년 전에 상승을 멈추었고, 그동안 인류는 거대한 문명을 쌓아올렸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바다가 꿈틀대며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고, 이제 인류는 ‘새로운 해수면 상승’의 시대에 이주냐 방벽 건설이냐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저자는 지난 역사 속에서 바다가 야기한 파괴의 긴 목록을 소개하며 말한다. 바다는 언제나 문명의 발치에 있어 왔고 본질적으로 변한 게 없다. 변한 것은 해안과 저지대에 거대한 삶의 터전을 쌓아올린 인류이다.

 


 

 

122미터 아래로부터 바다가 차오르다

지금으로부터 2만 1천 년 전 해수면은 정확히 122미터 아래에 있었다. 인류가 겪은 마지막 빙하기는 1만 5천 년 전에 막을 내렸다. 그와 함께 대해빙이 시작되었고 막대한 양의 융해수가 북반구 바다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 후 바다는 9천 년 동안 거침없이, 때로는 속도가 정체되었지만, 오늘날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속도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 급격한 상승(펄스)은 1만 9천 년 전에 있었다. 해수면은 단 5세기 만에 10~15미터 상승했다. 두 번째 펄스는 1만 4,600년~1만 3,600년 전에 있었는데 해수면이 16~24미터 상승했다. 마지막 펄스는 기원전 6200~기원전 5600년 사이에 있었고 약 1미터 안팎의 소규모 상승이었다.

기원전 4000~기원전 3000년 무렵부터 지구의 해수면 상승은 사실상 멈추었다. 로마 제국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대의 바다나, 1천 년 전 노르드인들이 북대서양을 탐험하던 시기의 바다는 오늘날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유럽의 대항해 시대 뱃사람들이 누비던 바다도 마찬가지였다. 지구의 해수면 상승 속도는 19세기 중반 인류가 산업혁명의 절정기에 진입하기 전까지 매우 느리게 유지되었다.

 

바다의 도전과 인류의 응전

인류의 터전 바로 곁에는 언제나 바다가 있었다. 바다는 언제나 육지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옛날에는 바다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빙하기 말 해수면이 상승하는 동안에는 지구에 인간이 매우 적었고, 그들의 공동체는 새로운 해안선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식량원을 찾아서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지만 그들 주변에는 얼마든지 이주할 공간이 있었다.

해수면 상승이 멈춘 동안 인류는 문명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터전’을 지키기 위한 바다와의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초기 문명이 ‘대홍수’를 겪었음은 틀림없다. 그 기억은 후손에게 전해져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같은 ‘신화’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았고 아직 소규모였다. 그들은 ‘대홍수’의 기억을 뒤로 하고 자연의 변덕에 적응하는 길을 택했다. 그들은 풍요로운 강 하류 삼각주와 해안 저지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천천히 인구와 도시 규모를 늘려나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역사에는 ‘바다가 야기한 파괴’의 목록이 길게 나열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바다의 습격’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게 된 것은 불과 수백 년밖에 되지 않았다. 바뀐 것은 바다가 아니라 인류였다. 늘어난 인류의 숫자와 커진 도시의 규모가 곧 ‘재앙’의 인질이었다. 유사 이래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문명과 도시를 건설했지만, 어느덧 고정불변의 상수였던 ‘바다’ 또한 이제 변수가 되어 문명에 도전할 채비를 마쳤다. 우린 새로운 해수면 상승의 시대를 맞이했고, 바다가 제기하는 매우 어려운 딜레마 앞에 서 있다. 우리 문명의 일부를 지킬 것인가, 버릴 것인가? 우린 선택해야 한다. 

 

 

선사 시대 대홍수의 기억

기원전 5500년 무렵, 영국 뭍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도거랜드’는 바다에 잠겨 완전히 사라졌다. 마지막 빙하기의 절정기에 북해는 육지였다. 그리고 거의 최후에 잠긴 ‘도거랜드’는 대륙의 일부로 한때 사람이 살던 땅이었다. 하지만 해수면이 상승함에 따라 도거랜드는 점차 바닷물에 포위당해 도거 힐스(Dogger Hills)가 되었고, 결국 섬이 되었다가 물결 아래로 사라졌다. 이때 인간들은 워낙 소규모 공동체였고 수렵 생활 위주였기 때문에 해수면 상승에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새로 이주하거나 고지대로 야영지를 옮기는 일은 큰 희생이 필요 없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일이었다.

▲ 지금보다 해수면이 122미터나 낮았던 선사시대에 인간은 해안가 저지대에서 풍요롭게 살았다. 해수면이 상승해도 인구가 희박했기 때문에 더 높은 지대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에욱시네 호수’(오늘날 흑해) 근처에 살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에욱시네 호수는 민물 호수로 초기 농경 인구의 터전이었다. 그런데 해수면 상승의 여파로 지중해의 바닷물이 건너편 방벽을 넘어 급격히 쏟아져 들어오면서 호수는 순식간에 짠물이 되었다. 독한 바닷물 때문에 농경은 불가능해졌다. 물고기가 떼죽음을 맞았고 식물들은 죽어갔다. 에욱시네 호수는 바다가 된 것이다. 새로운 해수면 상승의 시대의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거의 최초의 사례였다. (노아의 방주 신화의 역사적 근거이기도 하다).

 

 

해수면 상승이 멈춘 동안 인류가 문명을 건설하다

공교롭게도 해수면이 상승을 멈춘 시기에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남아시아에서 도시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해안선이 차올라 점점 터전을 잠식하면서 여러 공동체들이 합쳐지는 경우가 생겨났고, 공동체의 바깥 세계 또한 점점 다른 인구로 채워졌다. 육지의 인구는 점점 조밀해졌고, 인류는 문명을 본격적으로 건설하며 공동체의 몸집을 급속도로 불려나갔다. 바다 수위가 높아졌기 때문에 나일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의 유속이 느려지고 엄청난 양의 퇴적물이 강어귀에 쌓이면서 광활한 삼각주가 발달했다. 농경 문화의 보급과 함께 삼각주는 대규모 인구를 부양하는 토대가 되었다. 저지대에 인류가 매혹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농경을 위해 주기적인 홍수와 범람은 축복일 수 있었다. 상류로부터의 퇴적물은 하류의 지반을 느리게 상승시키고 바다에 대한 완충지대를 두텁게 형성했다. 습지와 늪지, 맹그로브의 식생이 다시 한번 바다로부터의 충격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도시화, 산업화와 함께 자연의 마법이 깨지면서, 바다는 예전과 달리 살벌한 투쟁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곳곳의 댐 건설과 수로 및 제방 축조 때문에 상류로부터의 토사 퇴적이 멈추고, 오히려 바다에 의한 침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간은 바다의 편이 되었다. 거대한 규모였던 습지와 늪지, 맹그로브는 꾸준히 줄어들었고, 기상이변을 동반한 바다의 공격은 점점 더 강해졌다.

 

 

산업화로 새로운 해수면 상승의 시대가 시작되다

산업 혁명의 절정기인 1860년경부터 새로운 해수면 상승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후로 세계는 현저히 따뜻해졌고, 대양은 다시금 거침없이 상승하고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 인류는 최근 수십 년간 가속화된 온난화에 일조해왔다. 해수면의 변화는 누적적이고 점진적이다. 상승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 상승이 우리 생전에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최근까지 해수면 상승에 대한 빙하의 기여도(남극과 그린란드의 빙하)는 극히 일부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빙하의 기여도가 과거의 두 배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린란드 빙하가 완전히 녹는다면 지구 해수면은 7미터 상승할 것이다. 남극의 동남극 빙상이 이번 세기에 다 녹을 일은 없겠지만 만약 전부 녹는다면, 해수면 높이는 50미터가량 상승할 것이다. 반면 해저에 잠긴 형태의 서남극 빙상은 보다 빠르게 녹을 텐데, 이것이 전부 녹는다면 해수면은 대략 5미터 상승할 것이다. 만약 서남극 빙상이 1,200년 이내에 사라진다고 가정하면, 대양은 1세기에 대략 30~50센티미터씩 상승할 것이다. 그 기간이 500년이면 1세기에 1미터 정도 상승할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2100년까지 2미터 상승을 전제로 미래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오늘날 수십억 명의 인구와 거대한 부가 해안가 저지대에 집적되어 있다. 뉴욕, 상하이, 홍콩 같은 글로벌 메가시티 뿐만 아니라 광활한 거주지와 농경지가 새로운 해수면 상승 시대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주냐 방벽 건설이냐

바다가 따뜻해지면서 북극에 면한 알래스카 땅은 얼음이 녹아 바다가 찰랑거리는 기간이 길어졌다. 해수면 상승과 급속하게 진행되는 침식 때문에 북극해 근처의 여러 마을은 시간문제일 뿐 곧 바다에 함락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 속한 이 공동체들은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다. 부유한 조국이 이들을 지원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평양과 인도양의 섬나라들은 사정이 다르다. 여러 섬들이 불확실한 미래와 대면하고 있다. 금세기에 물에 잠길 것이 거의 확실한 투발루와 키리바티는 그럭저럭 ‘이주’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구 1만 명의 투발루는 뉴질랜드의 확약을 받았고, 인구 11만 명의 키리바티는 “품위 있는 이주”를 꿈꾸며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움을 구하고 있다. 반면 인구 30만 명 규모의 몰디브는 사정이 좋지 않다. 고도가 2.4미터에 불과한 이 섬나라는 국토의 상실을 피할 수 없지만 아직 뚜렷한 이주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뭍의 도시도 안전하지 않다. 지중해의 베네치아와 양쯔 강 하류의 상하이는 현재 가라앉고 있다. 두 도시의 고민은 거의 같다. 지반이 꾸준히 침하하고 있고, 여기에 해수면 상승이 결합한다. 두 도시의 대책도 거의 같다. 두 도시는 ‘방벽’을 선택했다. 베네치아는 ‘모세 프로젝트’를 마련해 바다와의 긴 싸움에 임하고 있지만, 2012년에 도시의 70퍼센트가 다시 물에 잠겼다. 전문가들은 베네치아가 퇴적 능력을 강화하지 않으면 40년에 걸쳐 15~20센티미터 가라앉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만약 수문과 배리어로 바다를 막을 수 없을 때 베네치아에는 어떤 선택이 남아 있을까? 해수면은 계속 상승하고 있고, 여기에 밀물과 기상이변이 어우러진 ‘도전’은 더 강해질 것이다. 상하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도시 주변의 해안선 절반이 ‘침식’ 상태에 있고, 전문가들은 해수면이 1미터 상승하면 상하이 전체가 물밑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가 단위의 파멸적 경고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는 방글라데시이다. 방글라데시는 다음 세기에 예상되는 1미터 이상의 해수면 상승을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방벽을 건설할 재원도 없는 이곳에서는 몇십 년 내에 1천만 명 이상의 난민이 생길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이 나라는 비우호적인 인도와 미얀마 사이에 있다.

 

 

터전을 지키기 위한 인류의 무기

해수면 상승은 해저 지진과 쓰나미가 불러일으키는 위험을 증대시킨다. 지반 침하, 만조, 계절 기후, 기상이변 등 여러 조건이 맞물려 해수면 상승의 위협은 증폭된다. 서구의 여러 도시들은 1백 년에 한 번, 1천 년에 한 번 찾아올 ‘재앙’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심지어 1천 년에 걸친 바다와의 싸움 끝에 ‘조수를 다스리게 된’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12만 5천 년에 한 번 찾아올 ‘재앙’에 대한 고려도 시작했다.

바다의 습격은 우리에게 이주냐 방벽이냐 선택을 강요한다. 문제는 우리가 쉽게 ‘터전’을 버릴 수 없다는 데 있다. 2005년 지형을 바꿔놓을 정도로 강력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겪으면서, 미국 뉴올리언스의 주민 수십만 명은 이주를 택했다. 하지만 현재 그들 중 절반 이상은 다시 되돌아왔다고 한다. 돌아온 이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제방’, 즉 방벽 건설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바다의 도전에 맞서 우리는 어떤 방어 수단을 갖고 있을까? 늪지와 습지, 맹그로브는 언제나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늪지와 습지는 퇴적물의 자연적인 누적을 통해 지반이 상승하는 토대가 되어주고, 침식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에도 인류가 준비할 시간을 벌어준다. 맹그로브 숲은 쓰나미가 일어난 여러 곳에서 그 효과를 가시적으로 입증했다. 맹그로브와 늪지, 습지대 등 자연 방벽들은 바다의 맹습에 맞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들이다.

베네치아나 상하이, 미국 루이지애나 주는 값비싼 비용을 들여 방벽을 만들었고 계속 보강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방비 수단들은 ‘충격의 완화’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아가 ‘확률 게임’에 모든 것을 건 도박과 비슷한 데가 있다. 네덜란드인들이 수행한 거의 1천 년에 걸친 ‘바다와의 싸움’의 핵심은 거대한 재앙과 희생에 대한 기억을 ‘지속적인 집단의 기억’으로, 나아가 문화의 일부로 만든 데 있다. 값비싼 비용의 투입과 사회적 차원의 지속적인 노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집단의 동의와 정치가 필요하다.  

▲ 우리 문명의 일부를 지킬 것인가, 버릴 것인가? 부유한 국가들은 엄청난 돈을 들여 방벽을 건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방비 수단들은 충격 완화에 관한 것이 아니다. 확률 게임에 모든 것을 건 도박과 비슷하다. 

 

 

 

*      *      *

 

지은이 브라이언 페이건(Brian Fagan)

고고학과 인류학계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펨브로크 칼리지에서 고고학과 인류학을 전공했다. 1967년부터 2003년까지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바버라 캠퍼스에서 인류학 교수로 있었고, 현재 명예 교수로 있다. 학생과 일반인을 상대로 수많은 고고학 개론서와 교양서를 집필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중세 온난기를 다룬 『뜨거운 지구, 역사를 뒤흔들다』(2008년)가 『뉴욕타임스』 논픽션 부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인류의 대항해』 『위대한 공존』 『고대 문명의 이해』 『세계 선사 문화의 이해』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크로마뇽』 등의 책을 썼다. 고고학자인 지은이가 바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이다. 여덟 살 때 어부였던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항해술을 배웠고, 이후 바다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혼자 GPS 없이 영국에서 미국까지 대서양을 횡단하기도 했다. 『바다의 습격』에서 지은이는 견고한 자료에 의지해 논지를 전개하며, 전 세계 도시와 정부들에 경고한다. ‘지금 당장 행동하라. 방비 태세 구축에 나서라. 그렇지 않으면 피할 수 없는 대재앙의 홍수에 직면할 것이다.’

 

옮긴이 최파일

서울대학교에서 언론정보학과 서양사학을 전공했다. ‘바른번역’에서 번역을 공부했고, 역사 분야를 중심으로 해외의 좋은 책들을 소개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 축구와 셜록 홈스의 열렬한 팬이며, 1차 대전 문학에도 관심이 많다. 옮긴 책으로 『인류의 대항해』 『시계와 문명』 『아마존』 『근대 전쟁의 탄생』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십자가 초승달 동맹』 등이 있다.

 

 

알라딘 바로가기

예스24 바로가기

교보문고 바로가기

인터파크 바로가기

 

"김주열 군의 죽음 사진을 시작으로 하여 이기붕 일가의 자살 현장 사진이 대단원을 장식한 사건으로, 국민들은 '4.19'를 기억했다. 한 편의 드라마였다."

                                                                            _최정운,『한국인의 발견』, 214쪽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은 '학원의 자유'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학생들의 시위는 곧 경북 지역과 서울 지역, 3월 중순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다 3월 중순에 마산 사태가 터지고 4월 11일 김주열 군이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되어 그 사진이 전국 일간지에 실리면서, 드디어 사태는 우리가 4.19라 부르는 '사건'의 완결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힘으로, 마치 고삐 풀린 것처럼 치닫게 됩니다. 


2.28 당시 대구의 고등학생들


정치적 사건은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그 사건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합의'를 이루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건을 '날짜'로 호명하는 식으로 타협을 합니다. 3.1(만세운동), 6.25(사변), 5.16(군사쿠데타) 5.18(광주민중항쟁) 등이 그러하고 4.19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4.19의 경우 다른 사건들과 달리 선정된 날짜가 특이합니다. 보통은 사건이 시작된 날이나 끝난 날이 선택되는 데 비해 4.19의 경우 4월 19일은 사건이 시작된 날도 끝난 날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가장 격렬한 싸움이 있었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은 날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4.19라 부르는 이 사건은 2.28 또는 3.15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지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


사건으로서의 4.19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는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의 선거연설이 있었는데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런데 이날 대구의 고등학생들은 일요일임에도 등교 지시를 받았다. 경북고등학교는 학기말 시험, 대구고등학교는 토끼 사냥, 경북사대부고는 임시 수업, 대구상고는 졸업생 송별회, 대구여고는 무용 발표 등의 일정을 마련했고 전교생을 등교시켰다.[각주:1] 이에 항의하며 고등학생들은 오후 1시 20분경 열을 지어 학교 교문을 나와 도청으로 몰려들었고 "신성한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데모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그들을 막기 위해 출동한 경찰관 약 200명과 충돌했고, 경찰관들의 구타로 약 20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학생들의 데모는 곧 경상북도와 서울 지역으로 퍼졌고, 3월 중순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여기까지는 4.19 사건 진행의 첫 단계에 해당한다. 이 시기까지 시위 양상을 보면, 경찰의 폭력 때문에 다친 사람은 있었지만 죽은 사람은 없었다. 고등학생들의 폭력도 돌을 던지거나 구타를 가하는 정도였다. 또 시위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고등학생들이었고 그들의 구호는 "민주주의 살리자" 같은 내용이 없진 않았으나 주로 '학업'을 방해하는 "학원 내 정치적 간섭을 배격한다", "신성한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2월 28일부터 4월 내내 고등학생들은 사건의 중심에서 싸웠다.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3월 14일 서울 곳곳에서는 "대학생들은 썩었다"고 질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또 연세대학교 입구에는 "학도들이여 일어나자"는 제목의 호소문이 붙었다. 하지만 대학생들은 조용했다. 


사태는 정부통령 선거일인 3월 15일을 기점으로 '일반 시민'들이 시위에 대거 합류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자유당은 시민들을 3인조, 5인조 등으로 짝을 만들어 투표장에 투입시켜 이승만과 이기붕을 찍으라고 강요하고, 또 사전에 투표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을 찍은 투표를 넣었다가 총유권자 수보다 투표자 수가 더 많이 나오는 사태가 벌어지자 투표함을 불태워 이를 은폐하려 하는 등 노골적으로 부정선거를 진행했다. 이에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들은 오전에 일찌감치 더 이상의 투표가 의미없다고 판단하고 선거를 포기했다. 그리고 '부정선거 정지'를 요구하는 데모를 시작했다. 학생과 시민 약 1천 명으로 시작한 참여인원은 저녁쯤에는 약 1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승만 대통령 사선 확정" "부통령엔 이기붕 씨". 동아일보 1960년 3월 17일자이다.



시위 주체만 달라진 게 아니라 시위 양상도 변했다. 군중은 "부정선거를 즉시 정지하라"는 구호 등과 함께 전날 3월 14일까지와는 다르게 경찰서를 파괴하고 불태우는 등 폭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분노해 있었고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었다. 이날 경찰에 의한 발포가 있었고 사망자가 발생했다. 밤이 깊어가며 폭력이 고조되었고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마산총국 등이 시위대에 의해 파괴되었다(제1차 마산 사건).


3월 15일 북마산 파출소는 시위대의 손에 불에 타 전소되었다.



4월 초에 이르러 마산 사태는 진정되는 것 같았다. 여전히 곳곳에서 시위가 있었으나 폭발력은 가라앉는 듯했다. 그런데 4월 11일 밤 행방불명이던 김주열 군이 시체로 발견되고 전국 일간신문에 크게 실리면서 사람들의 분노가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살인범을 잡아내라" "선거 다시 하라" "희생자를 살려내라" "악독한 고문경찰관을 잡아 죽이자" "경찰은 잘못을 알고 사과하라"고 외쳤고, 폭력 행위를 불사하며 경찰서나 자유당과 유관한 건물들을 파괴했다. 경찰 또한 다시 발포를 시작했다(제2차 마산 사건). 


제2차 마산 사건 이후 며칠 동안 대대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4월 14일쯤부터 17일까지는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4월 18일에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고려대 학생들이 데모를 일으킨 것이다. 그때까지 대학생들은 쥐 죽은 듯 침묵을 지켜왔는데 이때 처음으로 거리로 나선 것이었다. 특히 사달은 이들이 데모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생겼다. 종로4가쯤에서 대학생들은 유지광이 이끄는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았고 많은 학생이 죽고 다쳤다. 이 소식에 격분한 대학생들은 4월 19일 드디어 데모대를 조직하여 대규모로 서울 시내로 몰려나왔고, 그 외에 도시 빈민, 청소년들이 가담한 가운데 진압 경찰들과 격전을 벌였다. 오후에는 경찰이 발포를 개시하였고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이날 대학생을 포함하여 1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그리고 이날 처음으로 '민주주의'가 구호로 등장했고, 바로 이날이 이 사건을 대표하는 날이 되었다. 


시위는 4월 20일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4월 25일에는 <사상계> 동인들이 주동이 된 대학교수단의 모임에 이어 '시국선언' 발표와 데모가 있었고 이때 처음으로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가라"를 외쳤다. 다음 날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틀 후 4월 28일 이기붕 일가가 자살하고 그 처참한 광경이 일간신문에 실림으로써 사태는 종결되었다. 



상식의 점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4.19에 대해 나누는 이런저런 얘기들은 결국 '학생들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로 요약된다. 그런데 2월 28일부터 4월 28일까지 이 사건의 전모를 음미해보면 "그게 과연 그런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1. 우선 '대학생'은 이 4.19라는 사건에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시위의 주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4월 18일에야 사건에 모습을 드러내고 19일에 비로소 사건의 중심에 선다. 


2. 4.19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4월 12일 마산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 이전까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최소한 중심적인 구호가 아니었다. '민주주의'가 사건의 중심 구호로 등장한 것은 '대학생'이 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이다.


3. 물론 고등학생들도 '학생'이고 그들은 가장 일찍부터 사건에 참여한 주체였다. 하지만 그들의 구호는 '학원의 자유화' 범주에서 맴돌았으며 '민주주의를 요구한 학생'은 아니었다. 고등학생들이 '민주주의'를 구호로 내걸기 시작한 것은 4월 12일 이후부터로 판단된다. 


4. 즉 4.19에서 시위 주체로 '학생'을 거론할 때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구분되며, 고등학생의 경우 '민주주의'에 집착한 주체가 아니었다. 이 말은 '우리의 상식'이 사실상 '대학생'을 4.19의 주역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5.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발생한 마산 사태의 경우 '부정선거'가 기폭제가 되어 일어났다는 점에서 참여자들의 의식 저변에 '민주주의'에 관한 판단 기준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후 그들이 보여준 '폭력'이 과연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적 폭력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확실한 건 시위대는 분노해 있었고 따라서 주체하지 못하고 폭력이 터져나왔으며 중간중간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가도 새로 '연료'가 주입되면 다시 활활 타오르며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그 '분노'와 '힘'만은 진짜였다.


아래 인용문을 보자.


“폭력은 안 된다. 부셔서는 안 된다”고 목이 터지도록 외쳤지만 (…) 이미 우체국 앞에는 한 대의 차가 불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불을 본 시위대는 흥분하여 경찰서 마당에 주차해 있는 차들을 마구 부셔대기 시작했고 일부 시위대는 현관문을 열고 경찰서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서 쏘는 총소린지 모르겠습니다만 ‘땅, 땅, 땅’ 하고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_1960년 4월 11일, 마산, 당시 21세, 1994년 인터뷰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일까? 다시 정리하면, 2월 28일부터 3월 14일까지 벌어진 전국적인 시위의 주체는 고등학생들이었고, 3월 15일 마산 사태부터는 일반 시민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4월 18일부터야 대학생이 등장한다. 평이하게 쓴 이 문장에서 '일반 시민'은 누구일까? 여기서 '시민'은 결코 지식인 부르주아들은 아니었다. 최초에는 정당에서 앞장섰지만 그들도 주체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신문팔이, 구두닦이, 넝마주이, 껌팔이 등이 포함된 '도시 빈민'이었다. 


‘양아치’란 (…) 정처 없이 부랑하는 소년, 구두닦이, 신문 파는 아이들의 불량성에 치중한 호칭이다. 3.15 마산 데모, 4.19 이래의 서울 부산 등지의 데모에 이 소년들이 단단하게 한 역할을 한 것은 우리들이 본 그대로다. 남루한 옷을 입은 소년들이 스크럼을 짜고 거리를 행진하고 트럭이며 지프차며를 징발해선 타이아가 터지도록 가득 타고 질주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리고 이들이 시위에 나선 목적이 과연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였을까? 이에 대해 그들의 구호도, 행동도 만족할 만한 답이 되지 못한다. 나아가 이들이 어떤 '결말'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어떤 '목표' 아래 단일한 '대오'를 이루었는지도 의문이다. 아마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거리를 메우고 있었으나 학생들같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산발적으로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별로 말도 없이 그저 침울한 표정으로 흘러가는 대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면 옆에서 따라서 박수도 쳐주고 하는 정도였다.

_4월 19일 서울 광화문 방면, 경찰 발포 전, 당시 명성여고 2학년 학생 일기


이들은 4월 19일에도 시위의 주된 참가자였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들은 '학생'들과 섞인 존재도 아니었다. 



정론이 만들어지다 : 우리가 아는 4.19


한편 북한은 남한에서 '인민 봉기'가 일어났다고 보도하고 있었고 일부 해외 언론도 한국의 상황이 '공산당'의 조종에 의한 게 아닌지 의심하는 보도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은 '질서'를 회복할 명분을 찾고 있었다. 이승만은 제2차 마산 사건 이후 시점에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가 있으며 어떤 난동이든 그것은 '이적 행위'라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앞서 보았듯이 정부 측의 이러한 규정이 '진실'과 다르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일단의 지식인들이 있었다. <사상계>를 중심으로 한 이들 언론계 지식인은 1950년대를 통해 쌓여온 한국인들의 좌절과 분노를 알고 있는 사람들로 이들 또한 정부와는 다른 차원에서 사태를 통제하고 '질서'를 회복할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들은 결코 '정부'와 같은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이승만 정권의 사건 규정에 반박하며 "마산 사람들의 행동은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기본적 자유권을 회복하려는 타당한 행동"이라는 전혀 다른 규정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틀대로 4.19는 완성되어 갔다. 시위 참여자들이 뚜렷한 '목표'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동안 누군가는 이를 '자유민주주의' 운동으로 조정하고 있었다. 우선 4월 18일을 기점으로 대학생이 등장한다. 대학생들은 어느 집단보다 <사상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집단이었다. 사실 앞선 시기까지 대학생에 대한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평가는 결코 좋지는 않았다. 한때 정치권을 풍미하며 역사의 적자를 자처한 4.19세대를 우리는 4.19의 주역이자 영웅으로 기억한다. 또 1960년대 한일협정 반대나 1969년 삼선 개헌 반대 등에서 보았던 것처럼 1950년대에도 그들이 사회를 '선도하고 행동하는 지식인' 역할을 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50년대에 그리고 4.19 와중에, 대학생이라 하면 '무기력' '무실력' '무가치'의 집단으로 항상 비판의 대상이었고, 고등학생들도 대학생들의 '침묵'을 비판했다. 


그러나 대학생들이 아무런 사회적 의식이 없는 존재는 아니었다. 


혁명. 피. 역사. 정치. 자유. 그런 낱말들이 그들의 자리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었으나, 그것들이 장미꽃, 저녁노을, 사랑, 모험, 등산 같은 말과 얼마나 다른지는 의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 무거운 낱말들-혁명, 피, 역사, 정치, 자유와 같은 사실의 책임을 질 만한 실제의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언어뿐이었다. '사실'에 영향을 주고, '밖'을 움직이는 정치의 언어가 아니라 제 그림자를 쫓고 제 목소리가 되돌아온 메아리를 되씹는 수인(囚人)의 언어 속에 살고 있었다. 그 속에서 그들이 몸부림치면 칠수록 현실은 더욱 멀어 보였다. 언어와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골짜기를 뛰어넘는 길은 막혀 있었다. 그 골짜기를 이을 수 있는 다리를 놓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초라한 '아이들'이었다. 

                                                                            _최인훈, <회색인> 중


최인훈의 회색인은 1963년에 쓰인 작품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대학생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다면 바로 '1958년 가을'이다. 1963년과 1958년 사이에는 4.19와 5.16이 있었다. 즉, 최인훈은 '혁명'과 '쿠데타' 이후 시기에 그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절의 기억을 회색인에 담았는데, 그 속에서 대학생들은 현실을 개탄하지만 그저 '말잔치'일 뿐이었고 무엇보다 그들 자신이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비참하고 그렇기에 "그들은 너무나 초라한 '아이들'이었다." 1958년의 그들에게는 존재감을 채울 계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4월 18일의 일을 계기로 그들은 '계기'를 확보했다. 반공청년단 정치깡패들은 데모에 참가한 고려대 학생들을 쇠파이프, 쇠갈고리, 몽동이, 벽돌 등으로 공격했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습격 사건으로 대학생들은 드디어 직접적인 '분노의 당사자'가 될 자격을 얻었다. 다음 날 419일에는 약 10만 명 규모의 대학생 데모가 서울에서 일어났고 그들은 시가행진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들은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라2월부터 고등학생들이 사용했던 구호와 함께 ' 민주주의'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구호로 사용했다.


이리하여 2월 28일부터 4월 말까지, 장차 한국 현대사에서 최초의 '혁명'으로 기록될 사건이 하나의 '규정'을 얻었다. '대학생들이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일으킨 의거이자 혁명'이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것은 이미 4월 19일부터,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4.19를 정의하는 '정론'이 되었다.


그렇다면 일단의 지식인이 급조한 '민주주의'라는 대의와 '대학생'들이 주체로 자리매김하면서 어떤 다른 '이유'와 '주체'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4.19는 왜 일어난 것일까? '일반 시민', 아니 '빈민'들의 분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은 어디서 왔고 4.19 이후 어디로 갔을까? 또 하나 생기는 질문은, 그렇다면 우리가 현대사를 통해 존경심을 아끼지 않던 '대학생 영웅전'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     *     *


이상의 이야기는 최정운 교수의 『한국인의 발견』과 그 제자인 시모카와 아야나의 석사학위 논문 「4.19 해석의 재해석: 『사상계』지식인이 만들어낸 4·19 민주혁명」에 의존한 글입니다. 결국 위 이야기를 제대로 마무리하려면 '한국인의 시대정신'을 건드려야 하고 실로 적잖은 지면이 필요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한국인의 발견』을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책에 관한 좀 더 큰 소개는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mizibooks.tistory.com/126


한국인의 발견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힘의 정체를 찾아서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688쪽 | 25,000원

 

 

만약 우리가 역사를 다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삶일까?


해방과 전쟁 후 혼돈과 죽음이 편재하던 세상에서

오늘날 우리가 있기까지

문학으로 본 한국인 굴기의 대서사 


알라딘 바로가기

교보문고 바로가기

예스24 바로가기

인터파크 바로가기



  1. 이재오 <한국학생운동사 1945~1979년> (파라북스, 2011), 147쪽. [본문으로]


 

만약 우리가 역사를 다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삶일까?

 


 

주요 국가들의 근현대 역사에는 신화들이 존재한다. 구체제를 무너뜨린 프랑스에도

 

사회주의 국가를 창건한 러시아에도

 

자유 세계를 승리로 이끈 미국에도 신화가 존재한다.

 

 

우리 현대사에도 이와 같은 신화들이 존재한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화'들은 만들어지고, 왜곡되고, 감추어지는 과정이 있었다.  

 

독일 철학자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경험을 통해 정신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해방 후 한국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만들어왔고, 한국인만의 시대정신을 구축해왔을까?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1950년대의 한국인들은 죽음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1950년대 예술가들은 소설 문학과 예술을 통해 좀비 상태에 있던 한국인들을 부활시키려 노력했다.

 

문학인들은 극도의 리얼리즘 충격 요법을 통해 한국인들을 깨우고 생명을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부활한 한국인들은 욕망했고, 욕망의 좌절을 겪으면서 분노했고, 분노는 혁명을 예비했다.

 

4.19는 좌절한 한국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대학생들을 앞세워 혁명의 테마를 '민주주의'로 치환시켜 버렸다.

 

 

 5.16 군사 쿠데타는 4.19가 실패하여 나타난 반동이 아니었다. 4.19와 5.16은 1950년대가 각기 다르게 배태한 쌍생아, 즉 2개의 혁명이었다.

 

혁명을 경험한 한국인들은 1960년대에 시간과 역사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개성과 욕망이 분출했다. 한국인들은 가벼운 군장으로 욕망을 향해 잠시의 휴식도 거부하고 달려나갔다.

 

1970년대는 분열과 연합의 시대였다. 한국인들은 세대, 성(性), 지방, 계급 등 다양한 이름의 정체성으로 분화되었다.

 

"우리는 너희들 씨를 말리러 왔다!" 1980년 5월 광주는 '오공'이라는 악마의 폭력에 파괴된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

 

가공할 폭력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절대공동체를 경험한 현대사의 분수령이었다.

 

1980년대를 통치한 '오공'은 폭력과 금력에 매료된 괴물이었다.

 

'오공'은 물질주의와 쾌락이라는 대체물을 대량으로 쏟아냈다.

 

한편으로, 1980년대는 투쟁의 시대였다.

 

해외에서 마구잡이로 수입한 이념의 르네상스로 한국인들은 극도의 의식의 혼란 속에서 정체성 위기를 겪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인들은 고유한 정체성 만들기와 민족 공동체의 복원 작업에 착수한다. 이 시대에 한국인, 한국 사회는 진정한 근대로 진입하게 된다.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한국인의 발견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힘의 정체를 찾아서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688쪽 | 25,000원

  

 

만약 우리가 역사를 다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삶일까?


해방과 전쟁 후 혼돈과 죽음이 편재하던 세상에서

오늘날 우리가 있기까지

문학으로 본 한국인 굴기의 대서사 

 

 

지은이 최정운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거쳐 시카고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랫동안 서양 정치사상을 연구하면서 정작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한국 근현대 사상사의 부재를 깨닫고 이를 발굴, 정립하는 연구에 매진해왔다. 전작 『한국인의 탄생』과 이 책 『한국인의 발견』은 그러한 지적 여정의 결과물이다.

지은 책으로 『한국인의 탄생』(2013년) 『오월의 사회과학』(1999년), 『지식국가론』(1992년)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푸코의 눈: 현상학 비판과 고고학의 출발」, 「새로운 부르주아의 탄생: 로빈슨 크루소의 고독의 근대사상적 의미」, 「개념사: 서구 권력의 도입」, 「국제정치에 있어서 문화의 의미」, 「권력의 반지: 권력담론으로서의 바그너의 반지 오페라」 등이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