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의 「소나기」란 작품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애초에 이런 질문을 감당할 만한 작품조차 거의 없다는 점에서 「소나기」의 인지도는 그만큼 독보적입니다. 앞의 질문은 「소나기」가 그만큼 널리 알려져 있고 또 사랑받는 작품이기에 나올 수 있는 물음일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소나기」의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도시 출신의 한 소녀와 시골 소년이 만나 짧은 시간 동안 애틋한 감정을 나누는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럼 「소나기」와 관련해서 다른 질문을 하나 내볼까 합니다. 「소나기」는 언제 발표된 작품일까요? 난이도가 높은 질문으로 생각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아마 대다수가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시대적 배경 또는 작가가 언제 글을 썼는지 알 필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소나기」에서 시대적 배경은 어떤 이유에선지 생략되어 있습니다. 즉 「소나기」는 시대적 배경을 기억할 이유도 없고 기억하기도 어려운 그런 작품이었고, 따라서 작품이 언제 발표됐는지 관심을 둘 이유도 별로 없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덕분에 「소나기」는 오늘날까지 ‘풋사랑’ 이야기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질문을 던졌으니 답을 말해야겠죠. 「소나기」는 1953년 5월, 한국전쟁이 진행 중인 시기에 발표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전쟁 통에, 전쟁이 끝날 무렵에 쓰였습니다. 황순원은 지난 약 3년간의 전쟁을 뒤로 하고 한가로워 보이는 시골을 배경으로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흔히 「소나기」는 순수문학의 대표작으로 거론됩니다. 혹 황순원은 전쟁에 지친 나머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고, 그런 심정이 「소나기」로 나타난 것일까?

 

그런데 황순원은 같은 해 1953년에 『카인의 후예』도 발표했는데, 겨우 몇 달 간격을 두고 발표된 이 작품을 보면 황순원이 현실을 도피 또는 외면하고 있었다고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카인의 후예』는 「소나기」와 달리 시대적 배경을 뚜렷이 하고 있고 작품 분위기도 사뭇 다릅니다. 이 작품은 이념적 계급 투쟁이 불꽃 튀기 시작하는 시기 북한의 어느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직한 일을 다루고 있고, 인물들은 형제나 이웃으로 존재하던 관계에서 서서히 적대와 투쟁의 관계로 변해갑니다. 결국 인물들은 ‘살의’를 품게 되고, 그 가운데 주인공은 가족 같았던 이웃을 상대로 살인을 시도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카인의 후예』는 「소나기」와 달리 살벌한 분위기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황순원이 세상을 등지고 순수문학에 골몰했다는 전제는 매력을 상실합니다. 혹 「소나기」의 시골 배경이 그의 펜대 끝에서 건설된 인위적인 장막이라면 어떨까요? 만약 「소나기」의 시골 배경이 산 너머 현재진행형의 일을 감추고 있었다면? 작가가 원고지 위에 언뜻 평화로운 공간을 구축하고 있었는지 몰라도 작가의 등 뒤에선 전쟁의 참상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황순원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생깁니다.

 

아무래도 더 본격적인 이야기는  최정운 교수(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가 쓴 『한국인의 발견』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최정운 교수는 「소나기」라는 문학 작품이 ‘역사 현실’과 만나면 어떻게 이해되는지 이야기합니다. 그에 따르면, 1953년에 나온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소녀는 그간 한반도 땅에서 '개화'를 이끌어온 도시 부르주아를 상징하고, 소녀의 죽음은 그들이 그 시점에 이르러 일상의 시련인 '소나기'조차 이기지 못하고 나약해진 모습, 그런 그들이 현실에 맞서 비극을 이루기는커녕 존재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황순원은 왜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이 또한 따져볼 문제겠죠. 최정운 교수의 안내로 다시 한 번 작품을 따라가보겠습니다.




보통 전쟁이 끝난 후의 시대를 낭만적으로 들리는 프랑스어 ‘아프레게르(apres guerre)’라고 불러 독특한 의미를 담는다. 평화가 다시 찾아온 시대지만 사람들이 전화(戰禍)로 가난해진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은 흩어지고 모든 전통적 사회 윤리가 도전받고 사회 질서가 흔들리는 상태를 말한다. 전쟁이란 사회의 근간을 흔들고 세상을 위태롭게 만든다. 대한민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가족이 파괴되어 수많은 고아들이 생기고, 이산가족들은 삶의 희망과 의미를 잃었다. ‘아프레게르’라는 말에 내포된 일반적인 상황은 한국의 전후(戰後)에도 해당이 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한국전쟁이 독특한 전쟁, ‘전쟁이라 부를 수 없는 전쟁’이었기에 ‘아프레게르’ 또한 독특했다. (...)

 

황순원의 「소나기」—1953년

 

전쟁이 끝나갈 무렵 중견작가 황순원(1915~2000년)은 두 편의 명작을 써냈다. 단편 「소나기」와 장편 『카인의 후예』이다. 우선 「소나기」는 한국 청소년들이 교육과정에서 꼭 읽어야 할 필독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으로, 이름 없는 한 소녀와 소년이 한적한 농촌 마을에서 처음 만나 친밀한 관계를 엮어가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소녀는 ‘윤 초시의 증손녀’로 흰 얼굴의 예쁜 소녀였다. 그들은 처음 대하는 사이였는데 소녀가 먼저 “이 바보!”라고 놀리며 장난을 걸어 서서히 얼굴이 검은 농촌 소년과 가까워진다. 수줍은 소년은 검은 얼굴이 부끄러워 달아나다 넘어져 코피가 흐르기도 하고, 소녀가 넘어져 무릎에 피를 흘리자 소년이 입술로 빨아주기도 했다. 소년은 송아지를 타는 모습을 소녀에게 자랑스레 보여주어 자존심을 세우고 인정받기도 했다. 



그리고 소년과 소녀가 다정스레 들판을 걷는데 소나기가 온다. 소나기를 맞자 소녀는 입술이 파래지며 몸을 떨었고 그 모습을 본 소년은 쇠락한 원두막으로 소녀를 데려가 비를 피하게 했다. 소년은 소녀의 어깨를 저고리로 싸주었다. 비가 더 세어지자 소년은 소녀를 수수밭으로 데려가서 수숫단을 쌓아 비를 가려주었다. 소녀는 소년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좁은 곳에 둘이 쪼그려 앉자, “비에 젖은 소년의 몸 내음새가 확 코에 끼얹어졌다. 그러나 소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도리어 소년의 몸 기운으로 해서 떨리던 몸이 저이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비가 그치자 그들은 각자 돌아갔다. 그 후로 소녀는 며칠 보이지 않는다. 다시 본 소녀는 아픈 기색이 뚜렷했다. 소녀와 소년의 대화 사이로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년은 소녀네가 이사해 오기 전에 벌써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윤초시 손자가 사업에 실패해가지고 고향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이번에는 고향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게 된 모양이었다.

_황순원, 「소나기」, 18쪽


그리고 소년은 윤 초시네가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집이 ‘악상’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어서 소년의 귀에 다음과 같은 말이 들린다.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두 변변히 못 써 봤다더군. 지금 같애서는 윤초시네두 대가 끊긴 셈이지. ……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입던 옷을 꼭 그대루 입혀서 묻어달라구…….”

_황순원, 「소나기」, 20쪽


소녀는 ‘죽었다’고 알려졌을 뿐이다.


문제는 그간 이 소설이 천편일률적으로 학생들의 교과서에서나 참고서에서나, 대학에서나 한국문학사 책에서나 한결같이 고집스럽게 소년과 소녀의 풋사랑을 묘사한 한국 최고의 순수문학 작품으로 평가받아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문학 작품의 의미를 해석해낼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우리 국문학계의 부끄러운 지적 수준을 드러낸다. 그저 아름다운 문장으로 쓴 어린 남녀 간의 민망스런 이야기라는 해석을 반복해온 것이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쓰인 이 이야기의 중요한 의미는 그 얼굴 흰 소녀의 죽음, 소나기라는 일상의 시련도 견디지 못하고 스러져간 죽음에 있고 그래서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이 소녀는 이 시대를 견디지 못하고 쇠락하여 멸망해간 도시 부르주아의 마지막 자손이었다. 소녀는 처음부터 자신이 먼저 소년에게 다가갔고, 죽을 때도 ‘잔망스러움’으로 동네 어른들을 당혹케 함으로써 자신의 진취적 계급의 정체를 드러내고 지켰다. 그 소녀에게 작가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것은 그 소녀의 계급적 정체만으로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소녀의 죽음은 아무런 ‘소리’도 ‘분노’도 없는 너무나 조용한 사그라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약도 ‘변변히 써보지 못한’ 조용하고 쓸쓸한 소녀의 죽음과 그 죽음이 상징하는 윤 초시네 집안 전체의 쇠락과 몰락과 단손(斷孫), 그들의 사라짐을 조용히 애도한다. 결국 소녀의 죽음은 이 땅을 그간 ‘개화’로, ‘계몽’으로 이끌어온 도시 부르주아가 일상적 소나기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나약해지고 비극도 이루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이야기였다.




위 부분은 『한국인의 발견』, 96쪽, 99-102쪽을 인용한 것입니다. 최정운 교수는 『한국인의 발견』에서 1945년 해방 직후 이태준의  「해방 전후: 한 작가의 수기」 부터 1999년 공지영의 「고등어」에 이르기까지 주요 현대 소설을 순례하며, 각 작품에 새로 해석과 역사적 좌표를 부여합니다. 황순원의 「소나기」는 그 가운데 아주 특정한 1953년 시기를 다루기 위해 찾은 작품입니다. 황순원과 그의 작품들은 물론 한국 문학사의 중요한 작품들에는 예외 없이 역사와 사상으로의 길이 나 있고, 최정운 교수는 『한국인의 발견』에서 차근차근 그 길로 독자들을 안내합니다. 


책에 관한 좀 더 큰 소개는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mizibooks.tistory.com/126


한국인의 발견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힘의 정체를 찾아서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688쪽 | 25,000원

 

 

만약 우리가 역사를 다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삶일까?


해방과 전쟁 후 혼돈과 죽음이 편재하던 세상에서

오늘날 우리가 있기까지

문학으로 본 한국인 굴기의 대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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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강석훈 2021.01.15 22:29

    광고성 글이라는 것이 아쉽네요.

    모든열매가 딸기랑 같은 철에 열린다고 알고있는 사람은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 겁니다.

한국인의 발견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힘의 정체를 찾아서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688쪽 | 25,000원

 

 

 

만약 우리가 역사를 다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삶일까?


해방과 전쟁 후 혼돈과 죽음이 편재하던 세상에서

오늘날 우리가 있기까지

문학으로 본 한국인 굴기의 대서사 

 

 

이 책은 우리 한국인이 해방 이후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새롭게 발견한 시대정신을 소개하며, 나아가 한국인들이 20세기를 통해 형성한 ‘힘’, 즉 ‘사상’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역사를 이야기한다. 한국인들의 사상과 정체성에 접근하기 위해 저자 최정운 교수가 찾아낸 중요한 경로는 한국 현대 소설이었다. 현대 소설에 담긴 ‘픽션’은 소설가들이 당대 현실과 조응하며 기록한 가장 온전한 ‘사상’의 모습이고, ‘픽션’의 밑바닥에는 늘 시대적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은 이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새롭게 일주하며 그 과정에서 발견된 우리 역사는 ‘예술 작품’의 연속이다. 이리하여 저자 최정운 교수는 전작 『한국인의 탄생』과 이 책 『한국인의 발견』을 통해 20세기 한국인들이 걸어온 근대로의 여정을 하나의 대서사로 완성했고, 이로써 한국 근현대 사상사의 발굴과 정립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열었다.  

 

 


 

 

20세기 한국인들의 근대로의 여정

우리의 비틀거린 반세기 현대사는 원치 않았던 거칠고 넓은 세상을 두루 여행한 역사였다. 우리 민족은, 좌우의 이데올로기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아와 죽음의 공포에서부터, 전쟁도, 어두운 죽음의 세계도, 부활도, 혁명도, 쿠데타도, 희망의 세상도, 내전도, 계급 갈등도,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죽음을 넘어선 투쟁도, 군사독재도, 민주주의도 경험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시련을 두루 겪었다. 그렇다고 모든 시련을 섭렵했다고 안도할 수도, 자만할 수도 없다. 자랑스러운 역사라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피와 눈물이 흘렀고, 부끄러운 역사라 하기에는 너무나 영웅적인 투쟁의 연속이었다.

이 책의 부제에서 ‘힘의 정체’란 일차적으로 20세기 역사의 주인공 한국인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힘의 정체’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현실에 균열을 내고 사건을 만든 근본적인 힘으로서 한국인의 시대정신을 뜻하며, 나아가 시대정신을 담고 그것을 끊임없이 갱신해온 한국인의 내면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힘의 정체’는 ‘사상’이라는 범주로 합류한다. 그런데 그 ‘힘’이란 당대 현실에 반응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 책을 통해서도 확인하게 되지만 사실 ‘사상’의 변화가 가장 심대하게 일어나는 때는 세상을 뒤바꾸는 역사적 정치적 사건의 전후 시기였다. 결국 이 책은 사상의 탐사 과정에서 발견된 역사적 현실, 주요 정치적 사건에 대해서도 그 어느 역사서보다 근본적인 이해를 독자들에게 선사할 것이다.


외국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우리 현대사에도 '신화'들이 존재한『한국인의 발견』은 우리 역사에서 '신화'들이 만들어지고, 왜곡되고, 감추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물론 '신화'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해방 직후의 분위기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의 분위기는 오늘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환희와 축제의 시간만은 아니었다. 해방 후 남한은 아수라장이었다. 그리고 해방 공간에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마음대로 편안하게 자기 생각을 펴지 못하고, 일제가 물러가는데도 서로 눈치를 보며 자유를 느끼는 게 아니라 더욱 무시무시한 시대를 예감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그들은 당시 정치 문제, 즉 건국의 문제에 대해서는 말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당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주변의 조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믿을 수 없었다. 한편 해방 공간의 한국인들은 ‘국가’나 ‘나라’, ‘관(官)’에 대해 전혀 신용하지 않았고, 그런 그들에게서 ‘우리가 대한민국을 만든다’라는 뚜렷한 의식을 찾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오늘날 현실 인식에 기대어 우리는 종종 한국인들이 ‘강한 국가’를 원하는 ‘국가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때 한국인들은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로크적 자연상태와 유사했던 해방 공간

일제가 물러간 해방 공간에는 권력 공백이 생겼고 ‘자연상태’가 돌아왔다. 그러나 해방 공간의 자연상태는 구한말의 ‘홉스적 자연상태’는 아니었고 ‘로크적 자연상태’에 가까웠다. 그 속에서 한국인들은 앞다퉈 수많은 정치 단체와 정당들을 만들어냈다. 해방 공간의 자연상태와 그로 인한 혼란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홉스적 사회 계약’이 필요했고 이는 자연스레 미국에 대한 의존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미군정은 홉스적 사회계약에 의거한 전제군주로서 남한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법치주의로 남한을 다스렸고 따라서 한국인들끼리 정치가 가능한 하위 정치 공간이 열렸다. 한국인 정치 집단들은 한편으로는 미군정의 지배를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하위 정치 공간에서 자기 보호를 위한 단체 결성과 테러 등 권력 투쟁을 벌였다. 해방 공간은 이러한 이중적인 정치 행위가 구조화된 공간이었다.


로크적 자연상태는 홉스적 자연상태와 달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아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보호연합'을 만들어, 한편으로는 협상하고 한편으로는 투쟁한다.

 

취약국가로 태어난 민족국가 대한민국

신생 대한민국은 분명 민족국가로 만들어진 나라였다. 하지만 건국 과정에서 자원의 부족을 급박하게 보충하기 위해 취한 초기 조치들은 장기적으로 대한민국 국가 전체에 광범위한 결과를 야기했다. 결국 대한민국은 ‘취약국가’로 태어났다. 우선 대한민국은 ‘친일파’를 대거 재등용했고 이 때문에 정통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채 역사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국가로서의 능력도 형편없었다. 재정이 없어서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눈감아줄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정부 사업은 싸구려로 부실하게 집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모든 부분은 ‘부실과 부패의 온상’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또 폭력 수단의 보유라는 측면에서도 대한민국의 상황은 너무나 열악했다. 대한민국이 폭력적 행위를 저지르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무력, 폭력적 능력이 많고 넘쳐서가 아니라 폭력 수단과 국가로서의 능력이 모자란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전쟁의 주체가 되지 못한 한국인들

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국에서 꾸어 오는 식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바로 민족적 주체 의식이었다. 대한민국은 시작에서 민족주의가 부족한 나라였지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오히려 민족, 대중을 두려워했다. 민족적 주체 의식의 결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주체 의식의 부족은 국민의 생명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졌고, 거창 양민 학살, 보도연맹원 학살, 국방경비군 아사 사건 등은 모두 이로 인해 저질러진 역사였다. 대한민국은 모든 젊은이들의 생명과 자원을 총동원하여 휴전선을 다시 긋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존재는 생존자들의 경우에도 긍정되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에게 여러 층위의 온갖 악몽을 심어놓았다. 우리는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가해자였고, 형제를 학살한 살인자들이었다. 열심히 싸워 나라를 지켰지만 영웅도 없었다. 한국전쟁은 흡사 패전이었다.


1950년 9월 서울 수복 당시 서울 시가와 사람들

 

아프레게르와 한국인의 부활

전후 한국은 공동묘지 같은 을씨년스런 폐허였다. ‘재건’의 구호도 들리지 않았다. 한국이 겪은 아프레게르(après guerre)는 한 점의 빛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죽음만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1950년대 전반 손창섭, 황순원, 김동리 등이 그린 우리의 모습은 죽음이었고 한국은 죽음이 편재하는 세상이었다. 이 시기 손창섭과 장용학 등이 수행한 문학적 실천의 핵심은 괴롭고 암울한 현실을 더욱 괴롭고 무겁게, 도망갈 곳 없이 끝없이 반복될 현실로 만들어 한국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현실을 대안이 없는 무게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문학적 실천은 죽은 시체 같은 한국인들을 되살리는 부활의 마법이 되었다. 한 문학가는 1950년대를 단순히 서양 문학을 모방하는 데 그쳤을 뿐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 한심한 시대였다고 회고했지만 손창섭을 위시한 이 시대의 작가들이야말로 우리 현대사 최고의 영웅들이었다.

 

부활을 넘어서―욕망하고 분노하는 한국인

1950년대 후반부터 출간된 대부분의 소설들에서 한국인은 욕망의 주체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1950년대 말이 되면 한국 사회는 여전히 가난했지만 그야말로 욕망의 도가니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욕망하는 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욕망은 좌절의 계기였고 계속된 좌절은 분노로 이어졌다.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여 선우휘의 「불꽃」, 장용학의 「역성서설」 같은 작품이 발표되었고 1958년 9월에는 드디어 손창섭의 「잉여인간」이 나왔다. 「잉여인간」의 채익준은 한국 문학에서 최초로 등장한 ‘분노하는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낼 인물이었다. ‘영겁회귀’의 사상적 결과로 한국인은 부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절대 빈곤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영겁회귀’가 가능했던 사상적 조건과 본질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었다. 한국인은 부활을 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했다.


화폭을 찢고 뛰쳐나올 것 같은 이중섭의 황소. 이 그림들이 그려지던 시기에 '한국인의 부활'이 이루어졌다.

 

먼저 당도한 혁명 4·19

1950년대의 비참함을 자각한 우리 민족은, 한편에서는 민중의 분노가 무르익어감을 통해, 또 한편에서는 민족을 이끌고 나갈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혁명에 다가갔다. 먼저 당도한 혁명은 4·19였다. 그런데 4·19는 민중의 폭발을 두려워한 언론계 지식인들(특히 『사상계』)에 의해 ‘대학생들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하여 일으킨 의거이자 혁명’이라는 해석을 부여받았고, 이 해석이 요지부동으로 모든 교과서와 담론에서 공식 정론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 정론은 4·19의 힘을 두 단계에 걸쳐 거세한 것이었다. 첫 단계에서 언론계 지식인들은 대학생들을 긴급하게 무대에 투입하여 그동안 시위의 주된 참가자였던 고등학생과 도시 빈민들의 존재를 지우는 한편, 대학생들로 하여금 ‘민주주의’ 구호를 외치게 함으로써 시위의 성격을 바꾸었다. 다음 단계에서 그들은 권력을 기성 정치인들의 손에 넘겼고, 그렇게 사태는 종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개입은 의도치 않은 정치적, 역사적 왜곡을 가져왔다. 권력을 넘겨받은 민주당과 제2공화국은 4.19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고 지식인들의 각본에 따라 외쳐진 ‘민주주의’를 위한 ‘놀이’를 벌였다. 그들은 고등학생과 민중들의 좌절과 분노가 폭발한 원인, 이승만 시대를 통해 쌓이고 쌓인 사회 구조적 문제들을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제2공화국은 역사를 4·19 이전, 원점으로 되돌리고 있었고, 혁명은 다시 시작되어야 했다.

 

‘붉은 심장의 설레임’을 가진 세대의 등장

4·19의 가장 의미심장한 결과는 바로 4·19세대의 출현이었다. 4·19와 5·16 사이의 일 년 남짓한 기간에 최인훈은 「가면고」와 『광장』을 발표했는데 두 작품은 최근 민족적 영웅에서, 스타로, 그리고 한낱 배우로, 꼭두각시로 전락한 ‘4·19세대’ 젊은이들의 고뇌를 다루고 있었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4·19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4·19에서 그의 세대는 혁명을 목전에 앞두고 무대에서 끌어내려졌다. ‘혁명’ 후에 발표된 『광장』에서 이명준은 미리 포기하지 않고 직접 제 발로 계시 받은 특별한 운명을 찾아 ‘광장’을 찾아가봐야 했다. 그러나 4·19세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위기를 극복할 힘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붉은 심장의 설레임’을 느낀 세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꿈과 희망에 찬 젊은 세대’였다. ‘붉은 심장의 설레임’은 그 자체로 혁명이었고, 4·19는 혁명임에 틀림없었다.


위 사진은 4.19 당시 사태의 중심이 '대학생'이 아니었고 누군가는 '수습'을 고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혁명 5·16

5·16 주체 세력은 제2공화국의 무능과 실패를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5·16 쿠데타는 제2공화국의 실패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 5·16의 음모는 이미 1950년대 중반, 거의 1956년쯤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4·19와 5·16은 프랑스 혁명기의 혁명들처럼 반동으로 이어진 사건들이 아니었다. 즉 4·19의 실패가 5·16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었다. 4·19와 5·16은 이미 1956년경에 따로, 다른 방식으로, 서로 중간에서 엮이지 않고 준비되고 이뤄진 이란성 쌍둥이였다. 5·16은 물론 불법 쿠데타였다. 하지만 5·16은 분명히 ‘혁명’이었다. ‘산업 혁명’이 혁명이었다면 5·16은 분명히 혁명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대한민국은 ‘혁명을 못 겪은’ 나라가 아니었다. 독특한 방법으로, ‘두 개의 혁명’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겪었다. 프랑스 혁명, 중국 혁명, 러시아 혁명처럼 많은 사람이 죽지도 않았고 역사적으로 떠들썩하지도 않았지만 ‘두 개의 혁명’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혁의 정도는 전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할 규모였다. 5·16의 성공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시대를 열었다. 5·16은 구경꾼이었던 한국인들에게 ‘붉은 심장의 설레임’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노란 욕망’의 시대를 열었다.


5.16 쿠데타의 성공, 그리고 '선글라스'를 낀 주모자의 등장은 한국인들에게 너무도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욕망의 시대가 열리다

1960년대에 지식인들은 한국의 후진성을 의식했고 서둘러 근대화시킬 수 있는 성마른 인물들을 만들어 나갔다. 1960년대의 한국인들은 분명 전과는 전혀 다른 활기찬 모습이었다. 혁명 과정에서 욕망을 발산하기 시작했고 역사와 현재의 발견을 통해 희망을 얻었으며, 이 희망을 지키기 위한 한국인들의 결의는 진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독했고, 그들의 정서를 품어줄 공동체는 거부되었다. 한국인들은 모두 가족도, 공동체도, 윤리도, 도덕도, 심지어는 민족도 벗어버린 가벼운 군장으로 욕망을 향해 잠시의 휴식도 거부하고 달려 나갔다. 이것이 1960년대 ‘한국주식회사’라 불렸던 ‘민족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가벼운 군장으로 너무나 빠르게 달려 나갔기에 ‘타임머신’에서 빨리 늙어버렸다.


한국 사회의 분열

1970년대에 한국 사회는 ‘세대’, ‘성(性)’, ‘지방’, ‘계급’ 등 다양한 이름의 정체성과 계급으로 분열되었다. 무엇보다 1970년대에는 노동자, 빈민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이 독자적인 문화, 생활양식을 드러내며 등장했다. 노동자, 빈민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은 분명히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 빈민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에는 수많은 계급들, 수많은 종류의 ‘쁘띠부르주아’들이 서로 직접 충돌하며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계급의 등장은 사회의 분열을 보여줌과 동시에 한국인들의 고통과 고뇌가 깊어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한편으로 1970년대는 순수와 참회의 시대였다.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에서는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랑’이 분열되어 가는 사회를 통합하는 기제로서 부각되었다. 그간 강하고 거칠어져만 가던 한국인들은 이때부터 순수하고 부드럽고, 서로를 돌보고 사랑하는 사람들로 되어 갔다. 한편 전상국의 「아베의 가족들」 같은 작품은 한 가족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과거에 내다버린 ‘아베’를 찾아나서는 이야기였다. 1970년대에 한국인들은 순수하고 싶어 했고 ‘참회’하고 죄악을 씻고 싶어 했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에는 예외 없이 중요한 시대적 함의가 담겨 있다. 


인간을 위한 싸움의 다른 시작들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이 가시화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1970년대 황석영의 『장길산』과 최인훈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훠이」 같은 작품들은 유신 이후에도 한국인들이 당분간 정치적, 조직적 저항 운동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가운데 분열된 계급들을 연합하고 저항을 조직하는 움직임이 느리지만 뚜렷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977년에 발표된 윤흥길의 연작 소설 네 편은 당시 계급 분화의 모습과 계급들 간의 연합과 동맹이 형성되는 모습, 노동자들의 정체성 형성과 투쟁의 연원을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에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970년대 말 ‘운동권’의 등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이었다.

1970년대 한국인들의 고통과 고뇌에 찬 여정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귀결되었다. 이 시점에서 한국인들은 그들이 대적해야 할 권력의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깊고 넓은 속성을 이해하는 인식 수준에 다다랐다. 그리고 중요하게는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서 좀처럼 형용하기 어려웠던 인간 존재와 존엄성의 가치를 발견했다. 그들이 발견한 인간이란 자신의 존재 가치와 존엄을 위해 생명까지 내던질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폭력적 죽음의 공포로 스스로를 유지하던 권력은 이제 목숨을 건, 경악할 만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1979년 YH사건은 노조뿐만 아니라 종교계, 보수 야당을 아우르는 투쟁으로 발전했다.

 

투쟁의 시대

'오공'(제5공화국)은 폭력과 금력에 매료된 괴물이었다. 1980년 5월 광주 시에서는 현대 민족국가의 군대가 군복을 입고 상관의 명령에 따라 시내 번화가의 대로에서 시민들을 닥치는 대로 패고 찌르는 엽기적인 폭력 극장을 만들고, ‘우리는 너희들 씨를 말리러 왔다!’고 외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5·18은 열흘 후 5월 27일에 끝났지만 그 경험은 끝날 수 없는 것이었고, 잊을 수도 없었다. 5·18의 힘은 광주 시민들의 죽음을 뛰어넘은 투쟁에 있었고, 그들의 ‘피의 값’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였다. 그 후 출범한 오공은 5·18에 대해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도록 온갖 폭력을 동원하여 정적을 강요했다. 그러나 5·18이 초자연적 경험이었던 만큼 5·18의 진실은 장벽을 뚫고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공은 결국 5·18의 진실과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한국인들, 대학생들의 목숨을 건 투쟁과 시민들의 저항에 의해 붕괴되었다.

 

한국인들의 정체성 위기

1980년대 투쟁의 시대는 한편으로 한국인들이 극도의 의식 혼란 속에 정체성 위기를 겪은 시대였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는 작가의 의도와 별개로 1980년대 한국 사회가 모든 이념과 가치가 붕괴되고 말과 사물이 따로 놀며 세상이 의미를 잃는 이른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임을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이 시대에 한국 지식인들은 헤테로토피아를 극복하고자 수많은 최신의 이론들과 이념들을 전 세계에서 게걸스레 수입하는 마구잡이 ‘르네상스’를 열었고 한국 사회는 더욱 심각한 이념의 혼란을 겪었다. 영화 《고래사냥》은 1980년대 중반 운동권 대학생들의 충동이 세속화되는 흐름의 중요한 계기를 포착하고 있었다. ‘대체물’을 대량으로 제공하는 일은 오공이 줄기차게 시도한 전략이었고 이는 1980년대 학생 운동권의 저항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결국 1980년대를 통한 한국인들의 정체성 위기는 이문열의 『변경』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식했지만 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한국인들이 스스로를 증오하고 정체성을 잃어가는 가운데 물질적 풍요, 쾌락은 마약일 뿐이었다.


1980년대는 승리의 시대이자 온갖 극단의 물질주의와 정신주의가 한국인들을 휩쓴 시대였다.

 

근대로의 진입―정체성 만들기와 민족 공동체의 복원

1990년대는 우리에게 근대화(modernization)의 결정적 단계였다. 서구의 근대성을 흉내 낸 짝퉁 근대화를 넘어서 근대성의 근본 문제의식이 내화되어 ‘근대’라는 시대의 문턱을 넘어 진입하는 시대였다. ‘근대’로의 완전한 진입을 위해서는 정체성 만들기를 위한 수단이 마련되어야 했고 한편으로 민족 공동체가 복원되어야 했다. 우리 문학에서는 이를 위한 사상적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 저자는 그동안 한국 사회가 문학가들의 실천에 기대어 사상적 전진을 이루어왔다면 1990년대부터는 지성과 학문이 필요한 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 앞서 ‘반지성주의’가 우리의 거친 역사를 통해 형성되어 우리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박힌 현실을 깨우쳐주며 이를 극복한 후에야 본격적으로 지성을 세울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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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최정운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거쳐 시카고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랫동안 서양 정치사상을 연구하면서 정작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한국 근현대 사상사의 부재를 깨닫고 이를 발굴, 정립하는 연구에 매진해왔다. 전작 『한국인의 탄생』과 이 책 『한국인의 발견』은 그러한 지적 여정의 결과물이다.

지은 책으로 『한국인의 탄생』(2013년) 『오월의 사회과학』(1999년), 『지식국가론』(1992년)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푸코의 눈: 현상학 비판과 고고학의 출발」, 「새로운 부르주아의 탄생: 로빈슨 크루소의 고독의 근대사상적 의미」, 「개념사: 서구 권력의 도입」, 「국제정치에 있어서 문화의 의미」, 「권력의 반지: 권력담론으로서의 바그너의 반지 오페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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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주의에 대하여

 

반지성주의는 민중의 언어가 될 수 없다. 민중은 이성을 거부해서 얻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민중이 이성을 거부하게끔 함으로써 권력자들이 모든 것을 얻는다. 민중이 반지성주의를 자신들의 언어로 받아들이면 다음과 같은 일이 생긴다.

 

첫째, 중요한 문제와 사소한 문제를 구분하지 못한다.

둘째, 세속적인 문제의 근거로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느낌을 제시한다.

셋째, 합의된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 전혀 엉뚱하고 부적절한 수단을 채택하는데도 그것이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넷째, 갈등의 당사자 중 약자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다섯째, 고통과 곤경을 낳는 구조적인 부정의가 자연의 질서처럼 불변의 것으로 여긴다.

여섯째, 무비판적인 복종과 무조건적인 근본주의 중 어느 하나에 가까워진다.

 

결국 이성의 거부는 언제나 민중이 자신들의 삶의 가치를 훼손하는 결과로 귀착된다.

 

민중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는 삼척동자도 다 알 만큼 분명하고 손쉬운 것이 아니다. 고통은 그것을 겪는 사람에게 자명하게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개인이 느끼는 고통은 자명하지만 의사소통되고 공론화된 고통은 자명하지 않다. 언제나 고통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부당하고 부정확할 수도 있고, 정당하고 정확할 수도 있다. 고통을 해석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그것을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만들어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전혀 다른 원인에서 발생한 것으로 왜곡하고 엉뚱한 해결책을 끌어들이려는 이데올로기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작동한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의 빈곤과 차별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 생긴 인과응보로 사소화한다. 양육비를 부모들이 사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사회 구조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여성이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왜곡한다.

 

어떤 중요한 문제도, 지성(intelligence)의 틀을 통해 해석하고 해결책의 규범적 정당성과 사실적 효과성을 공적으로 논증하며 합리적인 수단을 궁리하지 않고서는 다루어질 수 없다. 이런 단계와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관으로 바로 해답이 도출된다는 생각은, 전제들이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곧바로 답에 도달했다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즐겨 착각하는 사람들이 민중의 친구임을 자처하면서 반지성주의를 퍼뜨린다.

 

반지성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요지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탐구 활동은 반지성주의자 자신이 탐구 없이 갖게 된 확신을 뒷받침하고 추종하며 확산하는 일에 종속되어야 한다. 반지성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우연히 지니게 된 앎 없는 확신( doxa)에 결론이 부합하면 그 탐구 과정을 칭찬하고, 일부분이라도 자신들의 확신에 어긋나면 비난한다. 그들에게 탐구는 탐구가 아니다. 탐구는 공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리를 알아내는 체계적인 활동이다. 반지성주의자들에게 탐구란, 그들이 사적으로 갖게 된 확신을 강조하는 탄창, 우리 편에 또 한 명이 붙었다고 선전할 수 있는 전단지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검토되지 않은 신념과 가정이 주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둘째, 반지성주의자들은 본인이 즉시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개념과 논증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지식인들이 ‘음모’를 가지고 인위적으로 만든 쓰레기 같은 것이라고 여긴다. 그들이 수학이나 자연과학에 대해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법학, 철학, 사회학, 경제학에 대해서는 이런 주장을 줄기차게 한다. 그들은 자신이 배운 것이 아니면 일단 거부 반응을 보인다. 이런 모습은 그들이 사회경제적 질서와 관련된 문제들을 인간의 탐구 영역에서 분리하여 비지성적인 문제로 다루고 싶어 함을 보여준다. 또한 반지성주의자들은 논의에 쓰이는 개념을 설명해달라고 요구하는 대신 아예 그 개념을 쓰지 말라고 하고, 논증의 도구를 모조리 배척한다. 그들은 개념과 논증의 도구들은 효율과 간명함을 위해 기호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쓸모없는 것을 쓸모있게 보이도록 하는 음모가 존재한다고 시나리오를 쓴다.

 

만약 <반지성주의 철학 논고>라는 책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명제로 요약될 것이다.

 

1. 세계는 내가 아는 것들의 총체다.

   1.1 세계는 내가 아는 것들의 총체이지, 다른 이들이 아는 것들과는 관계없다.

2. 사실이란 내가 있다고 믿는 사태들의 존립이다.

3. 내가 확신하는 것들을 지지해 주는 것이 사고이다.

4. 내 확신을 지지해 주는 것이 참인 명제이다.

5. 명제는 내 확신에 부합하는가를 요건으로 하는 진리함수이다.

6. 사람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의 주요 명제들을 패러디한 것이다)

 

(...중략...)

 

거듭 강조하지만 무지와 어리석음은 같지 않다.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각자 여러 분야에 무지하지만, 우리 모두가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때로는 깨닫지 못한 채 부분적으로는 어리석을 수도 있지만, 우리 모두가 총체적으로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부분적인 쟁점에 대하여 일시적으로 어리석음에 빠지더라도, 어리석음 자체를 기본적인 태도로 삼고, 어리석음을 근거로 들며, 어리석음을 오히려 찬양하지 않는다면 반지성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다른 부분에서 얻은 이해를 근거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교정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반지성주의자들은 단순히 무지하거나 부분적으로 어리석은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반지성주의는 어리석음을 자랑스러운 것, 찬양해야 하는 것, 지적 힘을 가진 것으로 내세운다. 반지성주의자들에게는 어리석음이 거짓 신념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며 오히려 진리를 보증하는 기반이다.

 

- 이한, 『삶은 왜 의미 있는가』, 282~289쪽

 

 


 

 

정치적 책임을 이행하는 일이 즐거울 수 있을까?

 

정치적 책임을 다함으로써 사회의 질서를 개선하는 일은 가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는 일을 저어하곤 한다. 우리가 주저하고 저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타당한 것일까?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책임을 수행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반대와 비난에 부닥친다는 것이다. 타인의 반대와 비난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세계의 불의를 교정하는 일이 아무런 장애 없이 매끄럽게 이루어지는 세계는 정말 멋진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러한 세계가 아니다. 현실의 장애를 이유로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지 않는 것은 실존을 부정하는 자기 탐닉이다. 세계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므로 세계의 불의와 부당함, 고통을 줄이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사고방식이다. 애초에 이 전제는 증명된 적 없다. 세계가 한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갈 리는 만무하다. 설사 그 사람이 명석하고 훌륭한 대안을 가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의 바람은 운동을 하지 않고 복부 비만이 해결되리라고 기대하는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정치적 반대와 장애는 우리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도전할 대상일 뿐, 도전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두 번째 이유는 냉소와 절망이다. 지성으로 사회를 관찰하는 사람은 큰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좌절스러운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진다.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의 토대가 허물어지고, 그 중요성이 경시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은 투표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 다수결로 승자가 나왔다는 사실로 환원되어 버린다. 투표 과정에서 사회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책이 무엇인지 투명하고 진지하게 토론하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국가 기관이 선거에서 여론을 조작하고 선동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사람들이 직접 투표한 이상,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민주주의의 의미가 이미 많이 사라졌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란 경제 성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권위주의적인 지배자를 뽑는 일로 흔히 여겨지고 있다. 사회의 정당성 또한 경제 성장에 좌우된다. 그 결과 사람들의 부당한 고통을 줄이고 각자가 더 풍요로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 즉 자유의 조건을 형성한다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대한 목표가 소흘히 다루어진다.

 

그 결과 ‘정치’와 ‘민생’을 전혀 별개로 파악하는 용법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 정치는 정치인들의 파벌 싸움이나 여야 간의 무익한 대립 같은 의미로 축소 왜곡되고, 민생이란 민주적인 정치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곧바로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전에서 ‘민생’은 구성원들의 삶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구성원들은 각자 다른 신념과 선에 대한 관점, 사회적 위치를 갖고 있으며, 구성원들의 삶과 관련하여 국가가 추구해야 하는 목적이나 동원하는 정책 수단의 규범적 타당성과 효과에 관해서도 상이한 생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주장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조건은 서로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실은 민생이란 민주적 정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러나 민생과 정치를 서로 별개의, 오히려 충돌하는 개념으로 대립시킬 때 민생이란 경제 성장의 극대화를 주도할 권위주의적 지배자가 지정하는 정책적 해결책으로 환원된다. 그러므로, ‘민생 문제’ 자체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일은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이 배제를 통해 광범위한 영역에서 참정권, 자유권, 사회권으로 구성된 시민의 지위가 반복적으로 침해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양심적인 시민에게 냉소와 절망을 안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그 일로 이룰 수 있는 결과의 간극이 심각한 무력감을 낳는 것이다. 스스로의 삶이 점차 노예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노예에게나 어울릴 법한 삶을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여기게 된다. 민주주의 같은 집단의 문제를 다루는 일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치부하고, 자신은 사회를 품평하고 비평하는 소비자의 자세에 만족한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안위를 살피기에도 바쁘지 않은가. 아이리스 영은 이런 생각이 잘못임을 지적한다.

 

잘못이 일어나는 대부분의 사회적 상황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만한 이유들이 있었다. 고립되어 있는 개인이 기관들, 강력한 관료들, 국가 간의 상호작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정치적 책임은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집단 행동을 함께 할 것을 권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비교적 드물게 일어나지만 일단 일어나기만 하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국면 전환의 힘에 종종 크게 놀라곤 한다. (아이리스 영,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구조는 인간 행위의 집합적 결과이며, 우리 모두는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상호작용으로 인한 변화는 국면 전환의 불꽃 같은 순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꾸준히 진행되는 것이다. 기저의 변화가 축적될 때만 겉으로 보이는 뚜렷한 변화도 발생할 수 있다.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에 의해서도 변화가 축적된다. 이 변화는 토대를 침식하고 퇴락시키는 변화이다. 이 변화가 토대에서 발생하면, 국면 전환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즉 당연하게 여겼던 공식적 질서 아래 보장되었던 시민의 지위가 한순간에 붕괴하는 것이다. 냉소와 절망은 토대를 변화시키는 상호작용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확산할 잠재력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의 몫을 수행할 이유를 제공한다.

 

- 이한, 『삶은 왜 의미 있는가』, 241~244쪽

 

 


황금 족쇄 

금본위제와 대공황, 1919~1939년

배리 아이켄그린 지음 | 박복영 옮김 

미지북스 | 803쪽 | 38,000원




전간기 금본위제가 대공황을 초래했다!

국제 금융의 대가 배리 아이켄그린의

학문적 정수이자 가장 정확한 대공황의 역사

 

이 책 『황금 족쇄』는 국제 금융의 대가 배리 아이켄그린(UC 버클리대 경제학과 교수)이 대공황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분석한 역작으로 금본위제 연구의 기초가 되는 저작이다. 저자는 1929년의 불황이 왜 대공황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금본위제라는 세계적 범위의 고정환율제가 정책 당국의 손발을 묶는 족쇄 역할을 함으로써 팽창적 경제 정책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 핵심이었다고 말한다. 금본위제하에서라도 국제적 정책 공조가 이루어졌다면 대공황을 피할 수도 있었는데, 1차 대전이 남긴 국가 간의 반목과 갈등, 그리고 글로벌 경제에서 자신이 가진 지위와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미국의 협소한 시각이 국제적 협력을 불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계속되는 경기 침체로부터 회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금본위제의 역사는 확장적 경제 정책과 국제적 협력 및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역사의 전범(典範)으로서 중대한 경제사적 통찰을 제공한다. 




 

국제적 시각에서 대공황을 분석한 최초의 경제사,

황금 족쇄가 드디어 한국어로 출간되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특히 주목받은, 국제 금융 및 통화체제 전문가 배리 아이켄그린의 역작  황금 족쇄: 금본위제와 대공황, 1919~1939년이 한국어로 출간되었다. 황금 족쇄는 1930년대 대공황을 국제적 시각에서 해석한 최초의 책으로, 미국 중심적 시각에서 대공황을 이해한 밀턴 프리드먼과 안나 슈워츠의 대공황, 1929~1933년』 등의 기존 입장을 뒤집는 ‘가장 정확한 대공황 역사서’이다. 1992년에 미국에서 첫 출간된 이 책은 배리 아이켄그린의 학문적 정수이자 이후 집필한 모든 도서의 바탕이 되는 책이다.

 

과연 금본위제의 붕괴가 금융 위기의 도화선이었는가?

그동안 금본위제가 붕괴되면서 금융 안정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자본 도피가 일어나는 금융 위기가 전 세계로 번졌다고 흔히 생각해왔다.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금본위제를 금융 안정과 동의어로 여기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1920년대 금본위제는 안정의 동의어이기는커녕 전간기 금융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위협하는 일차적 요인이었다.

 

대공황은 1914년 1차 대전 발발 이후 전개된 

일련의 세계적 사건들이 낳은 필연적 결과였다

황금 족쇄는 미국의 주식시장 폭락으로 인한 거대 경제 불황으로 바라보는 기존 대공황론을 뒤집는 세계사적 관점의 ‘대공황의 역사’를 쓰고 있다. 저자 아이켄그린은 대공황을 1차 대전 발발 이후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불안정 요인들이 상호작용한 결과이며 1914년 이후 전개된 일들의 필연적 결과였다고 본다. 특히 1차 대전 이전의 세계 경제를 뒷받침하는 통화체제인 금본위제가 대공황을 일으킨 주요 요인이었음을 보여주고, 금본위제와 다른 요인들이 대공황을 발생, 증폭시킨 과정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1차 대전 이전 사반세기 동안 세계 경제 안정을 이끌던 국제통화시스템, 즉 금본위제가 어떻게 대공황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바뀌게 되었을까? 아이켄그린은 금본위제의 성공적 작동 요인들이 1차 대전 이후 크게 약화되었다고 한다.

 

전전(戰前) 금본위제는 왜 성공적이었는가?

1차 대전 이전의 금본위제(전전 금본위제 또는 고전적 금본위제라고도 한다)를 설명하는 일반적 설명은 ‘헤게모니 안정론’에 기초한 찰스 킨들버거의 설명이었다. 경제 안정을 제공할 자세와 능력을 가진 압도적 경제 강대국, 즉 헤게모니 국가인 영국이 있었기에 금본위제가 잘 작동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전간기에는 영국이 너무 약해져서 안정시킬 능력이 없었고, 새로 부상한 미국은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아이켄그린은 전전 금본위제의 역사적 과정을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안정의 결정적 요인은 신뢰와 국제 협력이었음을 밝혀냈다. 즉 전전 금본위제의 안정은 영국과 잉글랜드은행의 헤게모니 때문이 아니라 신뢰와 국제 협력 덕분이었다.

 

전전 금본위제의 신뢰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금본위제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정부가 국제수지 균형을 우선적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중심부 국가에서 정책 당국이 중앙은행의 금 준비금을 방어하고 통화의 금 태환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금본위제 방어와 실업률 감소 사이에 정책 갈등이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실업은 개인의 실패 문제라고 생각했고 경기 변동이 고용 전망에 영향을 미친다거나 경기 변동을 이자율이나 통화 조건과 연관 짓는 인식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금본위제 방어를 위한 긴축적 통화정책으로 실업이 야기되는 것을 반대할 수 있는 사람들(노동자 계급)이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러다 1910년대 무렵부터 노조 설립과 선거권의 확대로 일자리 상실에 취약한 사람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향상되었고, 높은 이자율이 투자 위축과 경기 둔화를 가져온다는 인식이 퍼졌다. 그럼에도 국내 목표보다 국제수지 균형을 우선하는 중앙은행가들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고용과 경제 안정 등 국내 목표에 대한 요구가 반영되지 않는 특정한 정치권력 지형과 국제수지 균형을 우선시하고 경기 변동, 통화 조건과 고용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한 인식 틀의 결합이 금본위제에 대한 신뢰의 기초가 되었다.

 

전전 금본위제의 위태로운 시기마다 국제 협력이 위기를 막았다

1차 대전 이전의 국제통화체제는 런던의 헤게모니적 지배 체제가 아니라 선도적 국제 금융 중심지인 런던과 라이벌인 파리, 베를린이 함께 이끄는 ‘분산된 다극 체제’였다. 평온한 시기에는 잉글랜드은행이 국제적 최종 대부자 기능을 하면서 국제 통화 체제를 이끌었지만, 1890년과 1907년처럼 세계 신용 상황이 심하게 위축된 시기에는, 각국 중앙은행과 정부들이 명시적이고 의식적인 협력을 함으로써 위기를 막았다. 어음을 할인하거나 금을 빌려주는 식으로 다른 금본위제 국가의 자원까지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는 잉글랜드은행이 국제적 최종 대부자가 아니라 국제적 최종 차입자가 되어 프랑스, 독일 등의 지원에 의존했다.

 

전쟁 후 정치적 경제적 변화가 전간기 금본위제의 불안정을 불러왔다

1차 대전으로 일련의 정치적 경제적 변화가 발생했다. 전시 정부의 조합주의 전략, 선거권의 확대와 노동자 정당의 성장으로 ‘고용을 목표로 하는 정책’ 채택 압박이 강해졌다. 이제는 국제수지 목표가 우선시될지가 명확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신뢰성이 의심받았다. 중앙은행은 과거와 같은 독립성을 갖지 못했고, 몇몇 나라에서는 인플레이션의 대혼란과 경제적 혼돈이 1926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자 프랑스와 독일 등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위해 중앙은행의 손을 과도하게 묶는 법률을 도입했고, 이는 국제 협력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재정 부담의 합의가 깨졌다. 수입 관세에 의존하던 세금이 수준과 구성 모두에서 급격히 변했고, 소득이 대대적으로 재분배되었다. 1차 대전 이후 재정 부담의 분담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없었기 때문에, 금본위제 방어를 위해 세금 인상이나 정부 지출 삭감을 한다는 보증이 없어졌고, 그에 따라 금본위제에 대한 신뢰성이 약해졌다.

다시 말해서, 전전 금본위제의 안정이 특수한 경제적 정치적 세력 배치 덕분이었듯이, 전간기 금본위제의 불안정 역시 정치적 경제적 변화 때문에 생겨났다. 국내의 정치적 압력이 정부의 국제경제정책 선택에 영향을 미쳤고, 정부 정책 의지의 신뢰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로 정책의 효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공황에 맞선 국제 협력을 가로막은 세 요인

국내의 정치적 압박, 전쟁 채무와 배상금 문제, 모순된 인식 틀

변화된 정치 환경에서, 잃을 게 많은 국내 이익집단들은 국제 협력에 필요한 경제정책 조정을 지연시켰고, 전쟁 채무와 배상금 문제는 늘 국제 협상을 가로막았다. 또한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각국의 서로 다른 인플레이션 경험은 금융과 경제의 관계, 통화 관리를 위한 역할에 대해 서로 다른 인식을 하게 했다. 인플레이션을 지속적으로 겪은 프랑스는 국제 협력 때문에 금본위제의 제약이 무력화되었다고 판단한 반면, 지속적 인플레이션 없이 전전 평가를 회복한 영국은 금본위제에 대한 맹목적 집착 때문에 필요한 유동성이 공급되지 못한다고 봤다. 게다가 미국 연준의 국제무대 등장 또한 이전의 협력적 분위기가 유지되지 못하게 했다.

한편, 1920년 브뤼셀 국제회의와 1922년 제노아 국제회의 등 국제 협력을 위해 제도를 마련하려는 회의가 있었지만, 서로 다른 인식 틀과 전쟁 채무/배상금 논란 때문에 이 회의들은 좌초되었다. 유일한 협력 제도가 1930년 국제결제은행(BIS) 설립이었으나, 이 또한 마찬가지 이유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국제 정치적 논란은 개별 국가 간 협력조차 무산시켰는데, 1931년에 프랑스, 영국, 미국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협조 융자를 하려던 시도가 좌절된 것이 그 예이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관세 동맹을 포기해야 한다는 프랑스의 주장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융자는 이뤄지지 않았고, 독일의 배상금 문제가 독일에 대한 융자를 막았다.

 

1929~1930년 경기 침체는 미국의 긴축정책 전환 결과가 아니라 

세계적 긴축정책 전환의 결과였다

1차 대전 이후 국제수지 결제 패턴의 변화가 있었다. 1차 대전으로 제조품과 농업 분야의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전쟁 배상금이 전쟁 채무의 상환 형태로 미국으로 유입되면서 미국의 포지션은 크게 강화되었다. 전후 초기에는 미국의 대부가 이어졌고, 그 덕분에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 재건과 1차 산품 생산국인 남미 국가들의 가격 대응이 가능해졌다. 즉 1924~1927년 미국은 저금리와 확장적 통화정책으로 세계 경제의 회복을 도왔다. 그러다가 1928년 연준의 관리들은 1920년대 월가의 대활황에서 보이는 변덕스런 금융 투기를 문제 삼으면서 돈줄을 죄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대량 금 유입까지 겹치면서, 여타 나라들은 금과 외환 준비금을 잃고 통화의 금 태환성이 위태로워졌다. 금본위제가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자 일부 유럽 국가들과 많은 남미 국가들 또한 긴축적 재정정책을 도입했다. 이 같은 전 세계적 정책 전환이 긴축의 충격을 가져왔고, 1929년 경기 후퇴의 서막을 열었다.

따라서 1929~1930년 경기 침체는 단순히 미국이 통화정책을 긴축으로 전환한 결과가 아니라 세계적 긴축정책 전환이 낳은 결과였다. 1929년 늦여름 혹은 초가을에 미국에서 시작된 경기 하락은 세계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12개월 동안이나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정책이 국제금본위제를 매개로 미국 정책과 연계되어 있음으로써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연준이 월가 붐이 가라앉을 때까지 이자율을 계속 인상하자 유럽과 남미의 충격은 증폭된 것이다. 흑자 국가가 조정의 부담을 적자 국가에 전가하여 긴축을 강요하는 금본위제의 비대칭성이 1928~1929년에 발생한 것이다.

 

대공황기 정부의 늑장대응은 금본위제 때문이었다

대공황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미국, 프랑스, 영국의 통화정책은 소극적이었다. 반면에 세금 인상과 지출 축소를 하면서 재정정책은 긴축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결국 정책은 수요의 위축을 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했다. 그런데 이런 대응은 금본위제를 유지하면서 벌어진 것이었다. 즉 한 나라의 일방적인 통화량 확대나 공공 지출 증가는 국제수지를 적자로 만들어 금본위제를 위태롭게 할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방향의 통화정책/재정정책은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기 부양을 위해 금본위제를 희생하느냐 아니면 금본위제 방어를 위해 경제 안정 조치를 포기하느냐의 딜레마가 있었고, 이 딜레마를 피하는 길은 국제 협력에 있었지만 그 유일한 기회였던 1933년 런던 경제 회의는 전쟁 채무 문제와 서로 모순된 인식 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전간기 금본위제의 특수한 구조인 금환본위제가 국내 금융시스템의 취약성을 가중시켰다. 주로 미국 달러, 프랑스 프랑, 영국 파운드를 태환성 있는 외환으로 보유할 수 있게 되면서, 어느 한 나라가 어려움에 직면하면 약세가 된 그 통화를 팔아치우는 일이 벌어졌고, 그래서 대외 포지션의 사소한 악화라도 외국 중앙은행들이 외환 준비금의 구성을 바꾸기로 마음먹으면 심각한 문제로 변할 수 있었다. 즉 로버트 트리핀이 강조한 대로, 금 태환에 입각하지만 유동성 증가를 위해 외환에 의존하는 독특한 구조가 동태적 불안정 문제를 드러냈던 것이다.

 

금본위제의 소멸이 대공황에서 회복하는 전제조건이었다

1930년대에 금본위제 포기로 가능해진 환율 절하가 금본위제 이탈 국가들의 상황을 개선시키지도 못한 채 남은 국가들의 불황만 악화시켰다는 일반적 인식은 실제 증거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금본위제에서 이탈한 나라들에서 물가는 안정되었고 산출, 고용, 투자, 수출은 금 평가를 고수한 나라들보다 더 신속히 회복했다. 이는 통화 절하 덕분에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확정적 조치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금 태환을 방어하기 위해 국내 신용을 축소할 필요가 더 이상 없었고, 더 이상 공공 지출을 줄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경기 회복은 느리게 진행됐는데, 이는 통화 절하 자체가 아니라 더 확장적인 정책을 추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중과 정책 결정자들 모두에게 금본위제의 포기가 인플레이션의 위협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은이

배리 아이켄그린(Barry Eichengreen)

국제 금융과 통화 체제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는 미국 경제학자이며, UC버클리대 경제학과 교수이자 경제사학회 회장이다. 광범위한 역사 분석을 통해 현재의 금융시스템을 살피는 연구를 해왔다. 1997~1999년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수석정책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전미경제연구소(NBER) 연구위원이다. 2010년에 국제슘페터학회로부터 슘페터상을 수상했고, 포린폴리시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 100명’에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은행의 자문 교수이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는  글로벌라이징 캐피털 달러 제국의 몰락 글로벌 불균형 등이 있으며,  파이낸셜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포린어페어스 신디케이트프로젝트 등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옮긴이

박복영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대공황기 유럽의 금본위제 붕괴 과정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는 이 책의 저자인 배리 아이켄그린의 초청으로 UC버클리대에서 방문학자로 1년간 체류하면서 공동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서 10여 년간 재직했으며, 특히 글로벌 금융 위기와 유럽 재정 위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국제경제실장을 맡아 세계 경제 동향을 면밀히 분석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이며,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의 관계, 국제 통화 질서, 세계적 빈곤 문제 등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국제경제 환경의 변화와 한국의 대외경제정책 방향』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글로벌 불균형 대공황 전후 세계경제(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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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이념적 동지들 - 혐오정치를 부추기는 미국 극우파들의 목소리


 

막장에 가까운 막말과 혐오, 선동을 일삼는 트럼프의 인기는 식을 줄 모릅니다. 사회적 불평등의 확대라는 수십년 동안 누적된 문제가 기저에 놓여있습니다만, 이러한 극우파 정치의 부상은 오랫동안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미국 극우파들은 수십 년 동안 방송을 통해 혐오와 선동 작업을 해왔고, 마침내 불평등 문제를 자신들의 이념에 연결시키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주류 정치에 대한 불신, 날 것 그대로의 불만이 터져나와 트럼프의 지지도를 견고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그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봅니다.

 


 

“성병 외에도 멕시코에서 유입되는 수입품이 계속 늘고 있습니다. 성병에서 턱수염까지 달린 여자들, 이제는 돼지독감까지 있습니다. 우리가 미개인들을 끌어들이는 매력 덩어리인 모양이지만, 저는 그저 저들은 미개하구나. 생각할 뿐 다른 감정은 없습니다. 미개한 것은 잘못은 아니므로 그것 때문에 비난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 모 미개 국가에서 오는 사람들은 단순한 미개인이 아닙니다. 우리한테 들러붙어 피를 빨아먹는 수백만 마리의 거머리들입니다. 게다가 학교, 병원은 물론 미국인의 각종 생활을 파괴하고 있지요”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 제이 세베린

 

“미국을 위해 멕시코 국기를 한 장씩 불태웁시다.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멕시코 국기를 불태웁시다. 우리는 민족 의식과 주권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거리로 나가서 여러분이 진짜 남자라는 사실을 보여주세요. 가능하면 멕시코 국기 열 장을 태우라고 권하는 바입니다. 멕시코 국기 하나를 유리창에 거꾸로 붙이고,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써 놓으세요!”

-방송인 마이클 앨런 위너

 

“화물처럼 배에 실어 돌려보내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 생각해보세요. 우선, 멕시코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돌려보내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세요. 그렇다면, 니카라과,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멕시코 등지로 반송되기만을 기다리는 1100만 명의 히스패닉들을 어디에 보관할까요? 그들을 어디에다 보관해요? 바로 뉴올리언스에 있는 슈퍼돔입니다! 그래요. 그리고 휴스턴의 아스트로돔입니다. 바로 거기가 히스패닉들을 밀어넣을 적당한 장소입니다.”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 닐 부르츠

 

“밀입국자 사면 법안을 무효화시키고, 환영 푯말들을 없애버리면, 그들이 모두 멕시코로 돌아가기 시작할 겁니다. 그때 고별 선물로 다들 핵폐기물 한 상자씩을 주도록 합시다. 작은 핵폐기물 상자를 주고 멕시코로 돌아가는 길에 가져가게 합시다. 그걸로 또띠아를 데울 수 있다고 말해주세요.”

- 닐 부르츠

 

“캘리포니아, 뉴멕시코를 비롯해 미국 서남부의 여러 지역을 멕시코에 넘겨주었으면 하는 멕시코인과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은 이를 레콩키스타라고 하는데, 스페인어로 재정복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수백만에 달하는 멕시코 불법 이민자들, 특히 미국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을 영토 탈환을 위한 잠재적인 군대로 간주합니다.”

-폭스 비즈니스 네트워크 진행자 루 돕스

(원래 레콩키스타는 8~15세기 동안 800년에 걸쳐 스페인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세력을 몰아낸 역사를 말함)

 

“국경의 무력 강화 외에는 다른 대책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일종의 인종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상황이 그렇습니다. 인종 전쟁입니다. 지금 우리는 로스앤젤레스에 50만 명이나 되는 이민자들이 나타나 멕시코 국기를 흔드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봐, 우리는 여기 있을 권리가 있다고’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불법으로 들어온 사람이라면, 여기 있을 권리가 없지요.”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 빌 오라일리

 

“그보다 더 심하게도 하자면 할 수 있어요. 이들 구리빛 피부의 나치들한테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꺼져. 당장! 눈치가 그렇게 없어? 얼른 돌아가라고!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강제추방 당하기 전에 알아서 떠나시죠.’ 정도가 좋겠네요. 저는 진심입니다. 우리 미국인은 지금 나치한테 억압당하던 유대인 꼴이니까요.”

-합법 이민을 위한 미국인 연합 회장 윌리엄 긴

 

“이제 한때 서구가 지배했던 아프리카, 아시아, 이슬람, 중남미 사람들이 식민 모국의 인구를 채우고 있다. 현재 서구 문명의 위기는 세 가지 치명적이고 절박한 위험으로 구성된다. 바로 인구 감소와 문화적 분열, 침략에 대한 무저항이다. 로마가 사라졌던 것과 같은 이유로, 서구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도나우 강과 라인 강이 로마에게 그러했듯이, 리오그란데 강과 지중해는 미국과 유럽에게 방어하지 않는 문명의 변경이다. ... 광신적인 멕시코계 애국주의자들과 멕시코 첩자들은 선조들이 전쟁에서 패해 빼앗긴 땅을 인구와 문화를 통해 되찾겠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지금 야만적인 문화전쟁 한가운데 있으며, 우리의 전통 가치들이 벌써 두 세대에 걸쳐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레이건 정부 수석고문 패트릭 뷰캐넌

 


 

저명한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이미 30여 년 전에 저서 『미국 역사에서 반지성주의』와 「미국 정치의 편집증」이라는 글에서 혐오 정치의 세계관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오늘날 트럼프는 엘리트와 주류정치에 대한 환멸에서 에너지를 얻는 아래로부터의 극우파적 힘을 대변하고 있다. 그들의 세계관에 대해 호프스태터가 어떻게 일갈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편집증적인 대변인은 음모의 최종 결과를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본다. 그는 온 세상, 모든 정치 질서, 모든 인간 가치 체계의 탄생과 죽음을 몰래 거래한다. 그는 항상 문명을 지키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에 산다. 종교에서 천년왕국주의자들이 그렇듯이 그는 마지막 날에 살아있을 사람들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때로 세상의 종말 날짜를 정하려 한다. ... 필살의 각오로 되찾으려 하고 파멸을 부를 최후의 파괴적인 행동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그들은 이미 미국의 많은 부분을 빼앗겼다. 과거 미국의 미덕들은 세계주의자와 지식인들에 의해서 이미 훼손된 상태다. 자유 경쟁을 중시하던 과거 자본주의는 계획을 중시하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 의해 기반이 서서히 침식되고 있다. 과거 탄탄하던 국가 안보와 독립은 반역 음모들로 서서히 약화되었다. 이런 반역 음모의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은 물론 우리 사회의 아웃사이더와 외국인들이다. 이들은 원래부터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니 놀랄 것은 없다. 하지만 미국 권력의 핵심에 있는 주류 정치인들까지 이런 음모에 가담하고 있다. 그들의 전임자들은 우연히 외부인의 음모들을 발견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현대 극우파들이 발견하는 음모는 윗사람들의 배신이다.”

 

크리스천 퍼렌티, 『열대는 왜 죽음의 땅이 되었나』에서 인용.


(이미지를 클릭하면 도서 상세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로버트 하일브로너, 윌리엄 밀버그 지음 | 홍기빈 옮김 

미지북스 | 571쪽 | 20,000원

 

시장 경제의 출현에서부터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한 권으로 읽는 자본주의 오디세이!


『세속의 철학자들』저자 로버트 L. 하일브로너 필생의 역작!

1962~2012년까지 13번의 개정을 거친 경제사의 고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종언이 회자되면서, 자본주의가 앞으로 어떤 모습과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 많은 물음들이 있어 왔다. 이 책은 인류의 여명기에서부터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의 역사를 돌아봄으로써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대답하는 책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하일브로너가 1962년에 초판을 펴낸 이래로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에 발맞추어 5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13번의 개정과 보증을 거친 살아있는 경제사 고전으로, 하일브로너 최고의 인기작 『세속의 철학자들』과 쌍벽을 이루는 저작이다 (신자유주의의 발흥까지 다루던 12판에 이어 최근의 13판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내용이 추가되었다). 마치 재미난 ‘경제사 산책’과 같은 범속한 외양을 하고 있지만, 이 책의 목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조금씩 만들어왔던 물질적 생산과 분배를 둘러싼 극적인 사회적 힘들을 다시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것이다. 저자들은 자본주의가 여러 개의 상충되는 이념들로 구성되며 진화해왔음을 보여주면서, 자본주의는 경제학 교과서의 추상적이고 완결된 이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여러 아이디어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지난 역사에서 맞닥뜨린 수많은 문제들과 정치적 사회적 압력에 대처하며 자신의 모습을 유동적으로 변모시켜 왔음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켜준다. 



▲ 경제적 인간의 해부에 대한 대담 : (왼쪽부터) 애덤 스미스, 토머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 제러미 벤덤, 존 스튜어트 밀, 프랑수아 마리 샤를 푸리에, 클로드 앙리 생시몽, 오귀스트 콩트, 칼 마르크스, 피에르 조세프 프루동

▲ 해부 연구를 이어가다 : (왼쪽부터) 토스타인 베블런, 요제프 슘페터, 존 메이너드 케인즈, 앨프리드 마샬

 

'경제학'이라는 씨줄과 '경제사'라는 날줄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경제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독자들도 '경제학 이론'과 '경제의 역사'를 포개놓고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하일브로너 교수는 현대의 경제학 이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해 왔다. 현실의 경제생활과 유리되어 자신만의 독자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체제로 자본주의를 묘사하는 경제학은 자본주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일브로너의 시각은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은 물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도 이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신고전파 경제학이나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경제’라는 영역이 그 자체로 운동 법칙을 내장한 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 경제는 일종의 초역사적인 것으로 변하여 시간적 차원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고유한 구조와 논리를 가지고 있지만, 또한 다른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힘들에 의해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계속 진화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경제 체제가 아니라 사회 속에 묻어 들어있는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 즉 자본주의 자체의 역사적 변화를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일브로너는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경제학 이론과 경제사를 반씩 섞어서 이론을 통해 역사를 조망하고, 또 역사를 통해 이론을 조망하는 복합적인 방법으로 자본주의 경제에 접근하는 것을 목표로 이 책『자본주의 :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서술했다.

 

 

인류는 오직 세 가지 방식(전통, 명령, 시장)으로 생산과 분배의 문제를 해결해왔다

한 사회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조달과 사회의 재생산이라는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 필요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는 이러한 생산과 분배의 문제를 풀기 위한 인류의 오랜 노력에 있어서 독특한 단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회들을 전부 돌아보아도, 인류가 생산과 분배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방식은 오로지 세 가지(혹은 그 세 가지의 조합)밖에 없었다. 전통에 의해 운영되는 경제, 명령에 의해 운영되는 경제, 시장에 의해 운영되는 경제가 바로 그것이다.

 

전통의 방식이란, 아주 먼 옛날에 발명되어 오랜 역사 속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관습과 신앙이라는 강력한 힘으로 유지되어온 여러 절차들에 기초하여 생산과 분배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들의 삶의 방식에서부터 오늘날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이 사무직을 선호하는 경향까지, 이 방식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아주 최근까지 압도적으로 지배적이었던 방식이다. 그런데 이 메커니즘은 경제 문제에 있어 정태적이며 보수적이다. 전통은 그 본질상 변화를 억제하기 때문에 이 경우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경제적 진보는 포기해야 했다.

 

경제적 존속의 문제를 해결하는 두 번째 방식은 권위적인 명령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이집트와 로마, 중국의 거대한 고대 건축물들에서,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노예 경제에서, 그리고 소비에트연방의 계획 경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명령 방식은 ‘조세’라는 완곡한 방식으로 살아있다. 전통 방식과 달리, 명령의 방식은 본질적으로 경제적 변화를 억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사회가 스스로에게 경제적 변화를 강제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바로 명령이다. 전통 방식을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저지하는 거대한 제동 장치에 비유한다면, 경제적 명령이라는 방식은 변화를 재촉하는 거대한 박차에 비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시장의 방식이 있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서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겠지만, 시장은 사회로 하여금 전통이나 명령에는 최소한만큼만 의지하면서도 그 스스로의 필요를 조달하는 실로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애덤 스미스가 갈파한대로, 시장 체제는 혼란과 무질서는커녕 자기 조정 메커니즘을 갖춘 실로 가장 질서정연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 경제사는 시장 체제가 그렇게 완벽하거나 완결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들로 가득하다. 시장의 작동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날 여러 가지 문제를 겪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경제학이 주요하게 다루는 문제들이다.


이륙을 위한 고통 - 발전하고자 하는 그 어떤 사회도 피할 수 없는 결정

한 사회가 대중들의 생활 수준을 올리고자 할 때 제일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더 많은 생산’이다. 개개인들의 생활이 개선되려면 재화와 서비스 생산이 인구보다 빠르게 증가해야 한다. 18세기 말에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 혁명은 바로 그러한 생산의 증대가 비약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노동 현장은 실로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장시간의 고한 노동, 공장이 사방에 토해내는 소음,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는 작업장, 4살배기까지 동원되는 아동 노동 등, 이 모든 것들은 초기 산업 자본주의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켰고, 그러한 평판은 결코 만회되지 않았다.

 

여기서 하일브로너는 가난한 경제가 성장하는 경제로 전환하기 위해 거칠 수밖에 없는 과정에 대해 지적한다. 생산을 증대하고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자본재에 대한 투자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저축이라는 행위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저축은 곧 투자를 위해 현재의 소비를 미래로 미루는 것이다. 그래서 최초의 저축 수준이 낮다면 성장률도 따라서 낮아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산업 혁명이 터져 나올 당시에는 그것으로 인한 어려움이 극도로 부각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혜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산업 혁명의 성과는 개개인의 후생과 관련해서 대략 1870년대에는 두드러졌다. 산업 혁명은 또한 장기적으로는 세계 전체의 후생을 증진시켜 이는 오늘까지도 우리에게 남아 지속되고 있다. 다시 말해, 산업 혁명기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통해 이루어졌던 강제적 저축으로 마련된 자원으로 미래를 위한 산업적 기초가 세워진 것이었다.

 

하일브로너는 이러한 쓰라린 선택은 산업화를 겪는 사회라면 자본주의이건 사회주의이건 민주주의이건 전체주의이건 모두 직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말한다. 오늘의 필요를 충족할 것이냐(소비) 아니면 내일을 위한 자본을 만들 것이냐(저축)는 것이야말로 개발을 시작한 사회가 마주칠 수밖에 없는 가장 중대한 결정 사항이라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잠시 개괄했던 경제 사회를 조직하는 세 가지 방식과도 연관된다.

전통에 속박된 사회는 생산 요소들을 성장에 필요한 방식으로 재배치할 수 있는 직접적인 사회적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전통적인 관습과 종교는 이러한 전환에 걸림돌로 종종 작용할 뿐이다.

 

반면, 명령 사회에서는 성장을 위해 저축을 강제하는 방식이 가능했다. 우리는 근대에 들어와서 산업화를 촉진하는 매개체로서 명령의 방법이 활용된 충격적인 경우를 목도한 바 있다. 소련에서는 강제적인 명령을 통해 농업 사회를 한 세대 만에 아주 극적으로 산업화하였다. 오늘날의 중국 역시도 명령 방식을 사용하여 역동적인 시장 부문을 창출한 경우이다.

 

마지막으로 서구의 산업화에서 주된 매개체 역할을 한 것은 시장 방식이었다. 초기 기업가들은 새로운 기술이 여는 시장의 가능성과 이윤의 전망을 보고 위험을 무릅쓰며 투자를 했던 것이다. 산업 혁명은 한 분야의 혁신이 다른 분야의 혁신으로 이어지는 연쇄 반응을 통해 막대한 자본 형성을 이룩해온 과정이었다.

 

그러나 성장 초기 단계의 그 힘든 순간이 가진 구조는 본질적으로 모두 동일하다. 맨체스터로 이주한 영국 노동자들에게 그 누구도 저축하기를 원하느냐고 묻지 않았던 것처럼, 원시 스텝을 떠나 마그니토고르스크로 온 소련의 노동자들도 자신의 노동 조건이나 임금에 대한 발언권이 없었고, 그러한 상황은 오늘날 중국의 거대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일브로너는 어떤 사회든 (자본주의이건 사회주의이건)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강제 저축의 시기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순수한 자본주의란 없다. 자본주의는 계속 진화할 뿐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자본주의 전반의 역사를 깊이가 있으면서도 간결하고 명쾌하게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의 독점 자본주의와 대공황이 거시경제학(케인즈주의 경제학)의 성립과 공공부문의 거대한 성장으로 이어지고, 정부와 중앙은행의 역할이 크게 증대되는 오늘날의 경제 현실의 얼개를 만드는 과정을 설명한다. 또한 유럽의 부흥과 역사상 최장 기간 진행된 호황인 자본주의 황금시대(1945~1973년)가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졌고, 또 베트남 전쟁과 오일쇼크 등으로 어떻게 저물어갔는지 살핀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경제 제도로서 현실사회주의 체제의 흥망, 지구화와 신자유주의의 질서의 확대를 거쳐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20세기 후반의 경제적 격변들을 개괄한다.

 

이 책은 지난 역사의 경제적 흥망성쇠 스토리 속에서 단순히 과거사의 나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경제적 현실에도 큰 시사점을 준다. 하일브로너와 밀버그는 충격적인 대공황과 전후 장기 호황(자본주의 황금시대), 그리고 최근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소득불평등과 성장률의 관계, 산업구조의 변화라는 일관된 관점으로 설명함으로써 현재 우리가 처한 경제적 문제들과 관련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자본주의는 각 시대와 국가, 각각의 사건들의 외양은 다를지언정, 한편으로는 그 내부에 비슷한 메커니즘과 문제를 안고 있었고, 이는 오늘날 세계 경제가 당면한 저성장의 국면에서 고민하는 지점과 깊이 맞닿아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 책은 자본주의는 단일하게 정의할 수 있는 순수한 이론적 구성물이 아니며, 인간이 처한 각각의 시대와 지역,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모델로 발전해왔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자본주의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끝없이 진화한다고 할 수 있다.

 

하일브로너와 밀버그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가 여러 개의 상충되는 이념들로 구성되며 진화해왔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자본주의는 경제학 교과서의 추상적이고 완결된 이론 속에 있지 않다. 자본주의는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여러 아이디어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지난 역사에서 맞닥뜨린 수많은 문제들과 정치적 사회적 압력에 대처하며 자신의 모습을 유동적으로 변모시켜왔던 것이다. 따라서 진보적 경제학자인 저자들은 유토피아적 이상으로서의 사회주의라는 구호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인간적 가치가 최고도로 실현될 수 있는 최상의 형태로 자본주의를 바꾸어나가는 것을 당면한 실천적 과제로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자체의 끊임없는 역사적 변동을 그려내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지은이

로버트 L. 하일브로너 Robert L. Heilbroner

미국의 진보 경제학계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사학자. 하버드대학교에서 폴 스위지, 조지프 슘페터 등 기라성 같은 경제학자들 아래서 공부하고 1940년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2차 세계 대전 동안 저명한 제도주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가 지휘하는 연방물가관리국에서 일했다. 1963년에 이 책『자본주의』로 박사 학위를 받고 뉴스쿨 교수로 재직했으며, 1971년에는 미국 경제학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2005년 85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일브로너는 대가다운 문제의식과 글 솜씨로 독자들을 정치 경제학과 공공 정책이라는 복잡한 문제로 이끌고 가서는 핵심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능력 때문에 그는 경제학을 넘어서 현대의 위대한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20여권의 책을 썼으며 그의 책들은 전 세계적으로 1000만부 이상이 팔렸다. 주요 저서로는 『세속의 철학자들』(2008년), 『경제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가』(2009년), 『비전을 상실한 경제학』(2007년),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2001년) 등이 있다. 

▲ 생전의 로버트 하일브로너. 2005년에 작고했다.  


윌리엄 밀버그 William Milberg

럿거스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시건대학교 교수, 유엔개발계획UNDP,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세계은행IBRD, 국제노동기구ILO 등의 관리를 거쳐 1996년부터 뉴스쿨의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해왔다. 저서로는 『비전을 상실한 경제학』(2007년), Labor and the Globalization of Production(2004년), Megacorp and Oligopoly (1992년)이 있다.


 

옮긴이

홍기빈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와 외교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요크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지구 정치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일본 자본주의의 소유 구조, 금융 체제, 지배 블록의 역사적 융합을 논한 ‘자본 통합 복합체’ 이론을 구성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장기적인 관심사는 지구화라는 이름의 새로운 서구 지배 체제에 맞서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대체 세력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동북아시아 국가들 간의 평화적인 경제 안보 체제 구축과 급변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과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치 경제학에서의 이론적 혁신은 어떻게 가능한가 등이다. 현재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2015년),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2011년), 『자본주의』(2010년)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경제인류학 특강』(2016년), 『E. K. 헌트의 경제사상사』(2015년), 『거대한 전환』(2009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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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워하고 나중에 고마워해

내면이 강한 아이로 키우는 사랑과 책임의 육아

로빈 버먼 지음 | 하윤숙 옮김 미지북스 | 328쪽 | 13,800원

 

상처받은 내 아이, 지금 개입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부모의 권한'이 독립적인 아이를 만든다.

UCLA 정신과 교수 로빈 버먼이 말하는 진정한 사랑의 육아

*

오늘날 자녀 교육이 지닌 커다란 문제는 부모가 아이 곁을 맴돌면서 과도하게 개입한 결과 아이가 완전하게 부화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미 닭이 병아리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도록 내버려두듯이 부모는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대신 혼자 걸어다니도록 놔두어야 한다. 과잉보호는 심리적으로 취약한 아이를 만든다. 아이를 취약한 존재로 대하면 이후 아이는 살아가는 동안 계속 취약한 존재로 남는다. 아이는 스스로 뭔가를 배울 때 많은 것을 얻으며, 역경을 통해 배움이야말로 아이를 어른으로 성장시킨다. 정신과 의사이자 UCLA 교수 로빈 버먼은 미국의 자녀 교육 전문가 집단, 부모와의 상담을 통해 얻은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며 ‘부모의 권위’가 자녀 교육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현명한 육아란 무엇인지 소개한다.

 




내 아이에게 필요한 건 '램프의 지니'가 아니라 부모다

자녀 교육에 대해 배우고 싶다면 엄마들이 아이 손을 잡고 모이는 곳으로 가면 된다. 조금만 기다리면 한 아이가 떼를 쓰기 시작하고 그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엄마가 보인다. “난 둘 다 먹고 싶어. 엄마가 뭔데 나한테 하나만 고르라고 하는 거야. 나쁜 엄마야!” 어느 누구도 나쁜 엄마가 되고 싶진 않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아이가 상처받지 않을지, 엄마의 사랑을 이해해줄지 당황스러운 시간이 흘러가고 많은 엄마들은 아이를 위해 져주는 선택을 하고 만다. 

『지금은 미워하고 나중에 고마워해』 저자 로빈 버먼 교수는 이런 결정이 인생이란 긴 여행을 떠나야 할 아이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누군가 자신을 책임지는 사람이 있다는 느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원한다. 부모가 자녀와 논쟁하거나 협상하지 않고 자녀의 행동에 명확한 한계선을 그을 때, 아이들은 매우 안전하다고 느낀다. 반면 권한이 없는 부모를 둔 아이는 불안을 느낀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만능 해결사 ‘램프의 지니’가 아니라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부모’라는 존재인 것이다. 



부모의 권한을 행사해도 좋습니다

오늘날 부모는 권위를 내세우는 데 겁을 먹은 것 같다. 자녀 주변을 맴돌면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고, 안 된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은 채 행여 내 아이가 자존감을 다치지나 않을까 염려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우리는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로 아이를 내몰고 있다. 부모를 흔드는 데는 능숙하지만 정작 인생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부서지기 쉬운 아이들로 성장하고 마는 것이다. 

끊임없는 회유와 협상에 지친 부모들에게 버먼 교수는 수많은 상담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부모의 권한을 행사해도 좋습니다.” 실제로 상담 의사들은 부모들에게 이와 비슷한 처방전을 내주고 있다. 부모는 자녀의 불만감을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아이에게 ‘한계’를 제시할 때 생기는 불편한 마음을 부모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부모-자녀 간 유대는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자녀는 정신적으로 더 건강한 발달 단계를 거칠 수 있다. 아이에게 부모의 권한을 행사할 때는 “지금은 내가 미워도 나중에는 고마울 거야”라고 생각해야 한다. 부모로서 당신의 임무는 자녀가 스스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회복하는 법을 배우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의 분노, 상처받은 감정, 실망감을 감내할 줄 아는 사랑의 여유를 지녀야 한다. 아이의 감정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와중에도 방침을 고수해야 한다. 계속 밀고 나가야 하며, 나쁜 부모가 되는 건 아닐까 염려하는 두려움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져야 한다. 인기 없는 부모가 되어도 좋다. 당신의 자녀는 어른 친구가 필요한 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당신보다 훨씬 멋진 친구들이 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다.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날 줄 아는 아이로 키우기

온갖 노력을 쏟았으니 아이들이 고마워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부모들은 시간이 지나 자녀의 버릇없는 행동에 자주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정직한 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을 더욱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었는데 왜 아이들이 고마워하겠는가? 과잉보호는 아이를 취약하게 만들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아이는 자신이 의존하는 부모에게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실패하지 않게 막아주는 것은 부모가 할 일이 아니다. 실패가 성공으로 향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아이를 취약한 존재로 대하면 아이는 살아가는 동안 계속 취약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 어미 닭이 병아리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도록 내버려두듯이 부모는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대신 혼자 걸어다니도록 놔두어야 한다. 모서리를 잘 피해가는 것도 삶의 한 부분이다. 부모가 나서서 모서리를 제거하면 아이는 위험을 판단하고 관리하는 훈련을 해볼 기회를 빼앗긴다. 아픔은 교훈을 준다. 아이는 신체의 아픔을 느낄 때 위험을 피해가는 법을 배운다. 무릎이 멍들고 타박상으로 아파보면 아이는 삶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 역경을 통한 배움이야말로 아이를 어른으로 성장시킨다. 아이는 스스로를 믿고 세상의 길을 찾아나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실패는 아이들이 끈기를 배우는 방법이다. 실패와 실망을 딛고 다시 벌떡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알면 내적 회복 능력을 배울 수 있고, 이를 통해 진정한 자존감을 구축할 수 있다. 진정한 자존감은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상태에서 사회적, 육체적, 정서적으로 능숙해질 때 생긴다. 아이들은 좌절할 때 성장하며 그 과정을 통해 심리적 보호재가 두터워진다. 


책임지고 규율하고 사랑하라

우리는 자녀가 평생토록 머리와 가슴속에 내면화해 품고 다니는 다정한 부모의 모습이 되고자 한다. 이처럼 든든한 사랑의 느낌을 심어주는 것이 훌륭한 자녀 교육의 핵심이다. 사랑은 자녀가 성장할 수 있는 강한 토대를 만들어낸다. 아이들은 항상 당신이 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며 잔소리는 더더욱 원하지 않고 그저 귀 기울여 들어주기를 원한다. 자녀를 진심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 그로 말미암은 사랑이 사랑의 최고 형태다. 자기 말을 진심을 다해 들어주고 이해해주면 자녀는 부모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속에 위안을 받는다. 이처럼 따뜻하고 다정한 유대감은 당신의 자녀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는가에 영향을 미치며 이는 심리의 시멘트 같은 것이다. 그리고 자녀는 이 유대감을 주재료로 평생토록 충격을 보호해주고 정서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감정의 집을 짓는다. 부모의 할 일은 자녀가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게 책임지고 사랑으로 규율하고 추억을 만들어주는 데 있는 것이다. 


내 아이가 고귀한 자아를 가진 아이가 되길 원한다면

당신은 아이의 영혼에 무엇을 새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 스스로 고귀한 자아를 갖춰라.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할 때 내 아이가 정말 좋은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면 부모 스스로 좋은 사람, 그리고 아이에게 좋은 품성을 익히게 도와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녀 교육은 아이를 기르는 문제이기 이전에 부모 당신의 성장에 관한 문제이다. 당신이 가장 고귀한 자아를 바탕으로 자녀 교육을 할 때, 가장 소중한 임무 즉 영혼을 돌봐달라고 임무를 맡겨준 아이들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아이가 아이답게 살 수 있도록 부모는 성숙한 감정을 지닌 어른이 되어야 하고 그런 다음에야 아이가 비에 젖지 않도록 우산을 씌워 줄 수 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거래 관계가 아니며 오로지 사랑을 베푸는 노력으로 가득 찬 여정이다. 우리가 좋은 부모가 되면 아이들은 우리 곁에 계속 머물 만큼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을 떠날 만큼 강해지는 것이다.





지은이 로빈 버먼 (Robin Berman)

정신과 의사이자 UCLA 데이비드게펜 의과대학 부교수이다. 미국 시카고의 러시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학부와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으며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의과대학에서 아동 정신의학을 연구하면서 아이들이 건강한 내면을 가지고 자라도록 돕는 최선의 방법은 아이가 아니라 부모를 코치하는 데 달려 있음을 깨닫고 올바른 훈육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연구와 상담을 평생의 소명으로 삼았다. 버먼 교수는 종종 부모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양극단의 양육 방식, 즉 자녀 곁을 맴돌며 자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고 싶어 하는 ‘헬리콥터맘’ 유형과 자녀를 부모의 잣대에 따라오게 만드는 ‘타이거맘’ 유형의 양육법 사이에 보다 균형 잡힌 길이 있다고 말한다. 아이에게 ‘한계’를 제시할 때 생기는 불편한 마음을 부모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부모-자녀 간 유대는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자녀의 건강한 정신 발달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그는 UCLA에서 아동과 산모의 정신 건강을 위한 상담 진료를 하고 있으며 로스앤젤레스에서 남편 및 세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옮긴이 하윤숙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불평등의 창조』, 『밤, 호랑이가 온다』, 『깃털』, 『진화의 종말』, 『선의 탄생』,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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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국가, 작은 국가, 그리고 브렉시트

 

유럽연합에서 탈퇴할지 의사를 묻는 영국의 국민투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탈퇴를 주장하는 쪽은 영국이 독자적인 길을 걷던 시절의 옛 영광을 그리워하는 노년층이 중심이며, 이들은 이민자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주권국으로서의 통제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면 잔류를 주장하는 쪽은 주로 젊은 세대로서, 유럽연합에 속함으로써 얻는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중시하고, 유럽이라는 새로운 통합 체제의 미래적 비전에 더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영국의 주류 정치인들과 경제학자들, 지식인들은 탈퇴시 영국의 쇠락을 우려해 잔류에 투표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상황인데요, 심지어 프랑스 경제장관(에마뉘엘 마크롱)은 브렉시트가 되면 영국은 변방의 작은 섬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브렉시트는 유럽연합을 둘러싼 구심력과 국민주권이라는 원심력이 작용하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만약 영국민이 브렉시트를 선택하게 된다면 유럽연합이라는 큰 국가 연합체를 버리고 영국이라는 작은 나라로 돌아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스코틀랜드까지 독립해버리면 영국은 정말로 유럽 변방의 왜소한 나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리처드 로즈크랜스 교수(하버드대)는 『서양의 부활』(미지북스, 2015년)에서 시대별로 유리한 국가의 크기가 달랐다고 이야기합니다. 크게는 큰 나라(제국이나 왕국)가 유리한 시대와 작은 나라(도시국가나 무역국가)가 유리한 시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크기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국제 상업의 개방성이었습니다. 교역이 자유로운 시대일수록 작은 나라가 유리했고, 그렇지 않은 시대는 영토가 크고 자원이 풍부한 큰 나라가 유리했습니다.

 

로즈크랜스의 기준에 따르면, 기원전 2000년에서 서기 1000년경에는 큰 나라의 시대였습니다. 고대 제국의 시대였죠. 그다음 500년은 다시 베네치아, 제노바,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같은 작지만 강한 무역국가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500년은 그보다는 더 큰 국민국가의 시대가 펼쳐졌고, 그러한 경향이 강해져서 20세기 초반에 대영제국을 필두로 하는 제국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20세기 중반에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양대 강국의 시대가 되었구요. 그러다가 다시 20세기 중후반에는 일본과 아시아의 호랑이들 같은 무역국가들이 잘나가는 막간극 시대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다시 영토와 인구가 광대한 대국들(미국, 중국, 인도, 러시아 등)과 국가연합체(유럽연합)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세계사의 흐름이 상업에서 다시 정복으로 회귀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정복이 아닌 경제적 통합을 통해 몸집 불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 아시아에서 중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무역연합이 경쟁하고 있고, 각국이 경제적 블록을 더 크게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움직임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로즈크랜스 교수에 따르면, 아무리 몸집이 크더라도 단일 국가의 역량만으로는 현재 직면한 도전에 대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부활』에서 로즈크랜스 교수는 21세기에 서양 세계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은 중국과 인도 등을 필두로 한 동양의 눈부신 부상이라고 진단합니다. 떠오르는 동양과 쇠퇴하는 서양 사이의 힘의 균형이 자칫 잘못하다가는 1차 세계대전과 같은 군사적 재앙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당시에는 패권국 영국과 도전국 독일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로즈크랜스 교수는 미국과 유럽연합이 더 심도 깊은 경제적 정치적 통합을 이루어냄으로써 힘의 불균형을 창출하고, 서양이 동양을 공동 번영할 수 있는 체제 속으로 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자의 바람과는 달리 현실은 유럽 내에서의 구심점이 와해될 수도 있는 결정적인 이벤트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과연 영국민들의 선택은 무엇이 될까요? 그들은 당면한 사회적 갈등과 문제를 유럽연합 내 잔류하면서 스스로 소화하고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유럽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꽤 험난해 보이는 독자적인 길을 가는 쪽을 택하게 될까요? 

 

 

서양의 부활

 

리처드 로즈크랜스 지음 | 유강은 옮김 | 미지북스 | 252쪽 | 15,000원

 

 

범대서양연합은 어떻게 전쟁을 방지하고 미국과 유럽을 복원할 수 있는가

 

★★★★ 유명 외교 저널 『포린어페어스』2013년 올해의 책 ★★★★

 

 

 

 



강남의 탄생

대한민국의 심장 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한종수, 강희용 지음 

미지북스 | 332쪽 | 15,000원





강남은 달린다!


 ‘강남’이란 말조차 없던 시절의 미개발 불모지에서

수도 서울의 ‘특별구’가 되기까지

강남 개발의 역사


원래 ‘강남’이란 말조차 없던 시절이 있었다. 이 책은 한강 이남의 미개발 불모지였던 강남이 우리나라와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역사를 소개한다. 아직 ‘영동’이라 불리던 시절, 장차 경제 성장을 견인할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장벽 같던 한강을 건널 수 있게 해준 제3한강교가 완공되면서 강남은 본격적인 개발 시대를 맞는다. 대대적인 수방 사업과 공유수면 매립, 택지 조성 사업을 통해 강남은 거대한 개발 부지로 재탄생하고 변변한 건물 하나 없던 허허벌판에는 격자형으로 도로가 깔렸다. 그리고 오늘날 강남을 있게 한 주인공들―유명 아파트와 거리들, 빌딩들, 그리고 수많은 사건들―이 공간을 채우기 시작한다. 




현대사를 증언하는 강남 개발의 역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형제 중 공부 잘하는 아들이 있으면 온 집안이 그를 위해 희생을 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지역으로 치면 아마 강남이 그런 ‘잘난 아들’에 해당할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명문 학교와 국가기관이 옮겨 갔고 각종 특혜가 퍼부어졌기에 지금의 강남이 존재할 수 있었다. 강남에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했던 꿈틀대는 힘과 욕망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책은 새로운 화해의 시대를 예감하며 여유로운 시선으로, 질시와 지탄의 강박을 벗고서 숨 가쁘게 달려 온 강남 개발의 역사를 돌아본다. 강남은 한국 현대사의 얼굴이다. 강남을 안다는 것은 한국 현대사를 안다는 것과 같다.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서울, 어디를 개발할 것인가?

1960년대에 서울은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포화 상태였다. 인구 급증은 주택난 등 각종 도시 문제를 낳았는데, 특히 수도 방위 차원에서 심각한 안보 문제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휴전선에서 불과 4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강북에 지나치게 많은 인구와 중요 시설이 집중되는 형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은 서울의 도심 기능을 분산시켜 안보상의 부담을 줄이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어디를 개발할 것인가? 만약 우리나라가 분단국가가 아니었다면 국토의 전통적인 중심축인 서울-개성-평양 축에 있는 은평, 고양, 파주 쪽이 서울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먼저 개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한강을 건너지 못한 1백만 명가량의 시민이 공산 치하에 남겨져 고초를 당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때였고 1960년대 후반은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던 시기였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한강 남쪽, 강남으로 눈을 돌렸다.


1965년 당시 '서울은 만원'이었다. 윤치영 서울시장은 인구가 늘어나지 않도록 전입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 '강남'이란 말조차 없던 시절

1963년 이전까지 오늘날 우리가 ‘강남’이라 부르는 곳은 경기도 광주군과 시흥군에 속한, 논밭이 대부분이고 달구지나 지나다니는 소로(小路)들로 마을과 마을이 이어진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지금은 이곳을 ‘강남’이라 부르지만 예전에는 ‘영등포 동쪽’ 또는 ‘영등포와 성동(城東) 중간’이라는 뜻의 ‘영동(永東)’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실제로 1970년대에 시작된 개발 계획의 정식 명칭도 ‘강남 개발’이 아닌 ‘영동 개발’이었다. 다시 말해 ‘강북’이 곧 서울이었고, 한강 이남의 사람들은 강 건너를 ‘서울’이라고 불렀다.

 

커지는 개발 규모

1963년 1월 1일 서울시 행정구역이 변경되면서 드디어 오늘날 강남에 해당하는 지역들이 대거 서울에 편입되었다. 1966년 9월 서울시는 반포에서 삼성동에 이르는 800만 평을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정해 달라고 건설부에 요청해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강남 개발이 시작되리라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강남 개발을 밀어붙일 힘과 속도가 제대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이 열린 다음 날, 영동구획정리지구 시행 공고가 났다. 맨 처음 영동구획정리지구는 313만 평 규모였다. 하지만 정부가 지시한 고속도로용 부지 9만 평과 공공용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구획정리지구는 520만 평으로 늘어났고 1970년 후반에는 무려 937만 평에 이르게 되었다. 사대문 안 면적이 500만 평에 불과함을 떠올리면 강남의 면적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할 수 있다. 이렇게 되자 서울시는 적당한 면적 단위로 점진적으로 개발한다는 당초 계획을 바꿔 이 엄청난 공간을 시가지화할 필요가 생겼다. 정부와 서울시는 강남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많은 정책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그리고 불과 10여 년 만에 강남은 완벽하게 현대 도시로 탈바꿈한다.


1960년 당시 강남

 

강남과 강북을 이어준 제3한강교

강남은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이었고 그것만으로도 개발 잠재력이 엄청났다. 하지만 한강이 큰 장벽이었다. 오늘날에야 한강 다리가 흔하지만 이 당시만 해도 한강에 다리를 놓는 일은 국가적 대역사였다. 1917년 건설된 최초의 한강 다리인 제1한강교(한강대교) 이후 두 번째 다리인 제2한강교(양화대교)가 건설되기까지는 거의 반세기가 걸렸다. 그렇지만 한강에 다리를 놓을 수만 있다면 강남은 기존 도심에서 지척이었다. 1969년 12월 25일 마침내 제3한강교가 준공되었다. 이 다리는 한강을 넘어 진정한 의미에서 ‘강북’과 ‘강남’을 이어준 첫 번째 다리였다. 훗날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는 땅값 폭등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그보다 먼저 착공한 경부고속도로와도 이어져 그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제3한강교는 ‘강북’으로부터 ‘강남’이라는 지역을 잉태하는 탯줄이 되었다.

 

거대한 개발 부지로 재탄생하다

강남의 또 다른 약점은 지대가 낮아서 자주 물에 잠긴다는 것이었다. “남편이나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할 정도로 강남은 대대적인 수방(水防) 대책 없이는 도시로서 기능할 수 없는 땅이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겪고 나서 일제가 쌓은 제방이 있었지만 그것은 원효로와 영등포, 노량진 일대만 겨우 지킬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마포, 뚝섬, 광진, 강남, 여의도, 잠실 일대는 홍수가 나면 모두 물에 잠겼다. 한강을 서울의 중심 생활권으로 만들기 위한 한강 개발이 1967년부터 시작되었다. 강변1로를 제방도로 형태로 건설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제방도 제방이지만 한강의 수량과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거대한 댐이 필요했는데 마침 소양강댐이 1973년에 완공되었다. 이러한 수방 사업을 거쳐 서울 시민들은 홍수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가장 큰 혜택을 본 지역은 물론 강남이었다. 이어서 ‘공유수면’ 매립을 통한 택지 조성이 뒤따랐고 강남은 진정한 의미에서 거대한 개발 부지로 거듭났다. 동시에 강남에는 폭 40~90미터의 광로(廣路)와 대로 등 무려 37개의 간선도로가 격자형으로 깔렸다. 이런 식의 도로망은 한국에서는 처음이었는데, 특히 제대로 된 건물과 시설들이 들어서기도 전, 허허벌판에 시원스레 뚫린 도로는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도대체 이렇게 넓은 도로가 왜 필요한 걸까?”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가졌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강남의 도로들은 자동차들로 가득 찼고 휑하던 거대 블록마다에는 근사한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며 고층 빌딩들이 들어섰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인물과 기업들이 이야기를 남겼고 랜드마크가 될 건물들이 속속 등장했다.



아파트 지구가 만들어지다

수방 사업과 공유수면 매립을 마쳤지만 한강변에서 좀 안쪽의 반포, 서초동 일대는 여전히 강변도로보다 지대가 낮았다. 원칙대로라면 제대로 매립을 해서 지대를 높여야 했지만 서울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심한 홍수가 나거나 벼락이 쳐서 배수펌프장에 전기 공급이 중단되면 저지대는 꼼짝없이 물이 찰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 서울시장 양택식은 저지대 지역은 모두 3층 이상으로 집을 짓게 하는 고육지책을 내놓았다. 최악의 경우 주민들이 3층 이상으로 대피하면 인명 피해는 없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이리 하여 침수되는 지역까지 전부 아우르는 엄청난 규모의 ‘아파트 지구’가 강남에서 공식 탄생하게 된다.

한편 순조로운 개발을 위해선 아주 많은 주민들이 필요했다. 초기에 강남 최초의 아파트 단지인 논현동 공무원아파트가 지어졌고 영동 주택단지가 조성되어 성공리에 분양을 마쳤지만 이것들은 규모가 너무 작았다. 그 정도로는 강남의 넓은 공간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6년 8월 공식적으로 ‘아파트 지구’가 고시된다. 반포 지구 167만 평, 압구정 지구 36만 평, 청담 지구 11만 평, 도곡 지구 22만 평, 잠실 지구 74만 5천 평 등 강남에 설정된 아파트 지구는 다른 지역과 비교를 불허하는 단연 압도적인 규모였다. 이곳에 오늘날 강남을 대표하는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위) 1978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건설 당시 (아래) 오늘날의 모습


사대문 안 구도심과 영등포를 따라잡다

원래 정부는 영동 개발을 시작하면서 서울시청을 비롯한 112개 국가기관을 모조리 옮기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많은 국가기관이 강남으로 이전했다. 대법원, 서울고등법원, 검찰청, 국정원, 한국은행 전산본부 등이 강남에 자리 잡았다. 한편, 1974년에 서울시장에 부임한 구자춘은 ‘3핵 도시론’에 미쳐 있었다. ‘3핵 도시론’이란 사대문 안 기존 도심을 첫 번째 핵으로, 여의도와 영등포 산업 지대를 두 번째 핵으로 삼고, 세 번째 핵으로 강남을 건설한다는 도시계획안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지하철 2호선의 노선을 강남을 관통하는 순환선으로 바꿔 버리는 한편, 적극적으로 명문고의 강남 이전을 추진했다. 그에 따라 경기고, 서울고, 숙명여고 등 이른바 강북의 명문고들이 옮겨간 강남구와 서초구는 유명한 ‘강남 8학군’과 ‘강남 교육특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 강남은 점점 대형 병원의 메카로 변해갔다. 건설회사들에 이어 백화점 기업들이 굴지의 대기업으로 커가는 곳이 되었으며, 고급 음식점과 카페가 생기고 외국 외식 문화가 도입되며 한국 소비문화를 선도하는 공간이 되어 갔다. 강남에 자리 잡은 대형 교회와 성당 또한 신자들이 급격히 늘어나며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또 강북에서 신설 및 이전이 금지된 유흥업소들이 몰려들어 신사, 압구정, 논현동 일대는 화려한 유흥가로 변해 갔다.

 

더 커지는 강남: 잠실, 수서, 분당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던 영동 개발은 놀랍게도 10여 년 만에 완료되었다. 하지만 개발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고 강남은 계속 확장되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잠실을 개발했다. 이때 지어진 아시안선수촌아파트와 올림픽선수촌아파트는 아파트 문화를 진일보시켰고 무엇보다 잠실이 강남권에 묶이는 데 있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 외에도 잠실종합운동장을 비롯해 예술의전당과 코엑스 등 오래도록 강남의 간판이 될 랜드마크들이 전두환 정권 시기에 자리를 잡았다. 노태우 정권 시기에 들어서도 강남 개발은 수서와 일원, 분당 등으로 확대되어 갔다.


1980년대에 강남은 잠실 개발 및 지하철 2호선 개통을 계기로 더 성장했다.

 

개발의 그늘: 사라져버린 것들과 어두운 기억들

이 책은 강남 개발 시기를 거치며 사라져버린 옛 기억의 장소들을 차근차근 돌아본다. 수방 사업의 일환이었지만 한강변에 제방을 쌓고 강변도로를 만들면서 사라져버린 옛 한강변의 풍경에 대한 아쉬움이라든지, 1970년대 초 압구정동과 옥수동 사이에 있던 저자도(楮子島)가 아파트 대단지 건설을 위해 골재로 채취되어 사라져버린 이야기, 여의도 개발 당시 저자도와 비슷한 운명을 맞았던 밤섬 이야기, 잠실 물막이 공사의 결과로 잠실섬 아래를 흐르던 송파강이 사라지고 석촌호수로만 남게 된 이야기 등을 빠짐없이 소개한다. 그 외에도 강남 개발 장면마다 수많은 뒷이야기들이 독자들을 기다린다. 정부 유력 인사가 주도한 부동산 투기,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일으킨 수서 사건, 끊어진 성수대교와 무너진 삼풍백화점에 얽힌 사연 등 강남 곳곳에 남겨진, 이제는 역사가 된 에피소드들 또한 강남 개발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기록에 남겼다.


가장 서울다운 서울은 강남이다

조선 시대 이래 서울은 조금씩 영역이 확장되어 왔다. 조선의 수도가 ‘사대문 안’ 한양이었다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명동을 중심으로 한 신시가 형성을 주도했다. 그리고 현대에 강남이 새로이 편입되어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보면 가장 서울다운 서울은 어쩌면 조선 시대의 한양도 아니고, 일본이 만든 경성도 아니며, 강남이다. 하지만 강남의 성공은 우리나라 도시사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한때 서울을 강타한 뉴타운 광풍은 강남에 역전당한 강북 사람들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였다. 언젠가부터 부산과 대구 등 광역시는 물론이고 소도시들조차 모두 마치 비법이라도 배운 것처럼 강남 개발 과정을 본 따 신도심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지방 도시들은 구도심이 죽어 버리고 특징이 없는 그저 그런 붕어빵 도시들이 되어 갔다. 최근에 와서는 어떤 개발론자도 63빌딩과 올림픽도로, 잠실 주경기장을 서울의 자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책은 강남의 역사를 말하는 데서 조금 더 나아가 강남에 끌려가는 우리 사회를 성찰하며 우리 도시들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으로 변모한 강남



★★★★ 박원순 서울시장 추천의 말


"이 책에는 우리가 잘 몰랐던 강남의 살아 있는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합니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강남의 공간을 새롭게 마주하게 됩니다. 경부고속도로와 제3한강교, 유명 아파트와 거리들, 빌딩들, 그리고 수많은 사건들이 과거로부터 말을 걸어 옵니다. 따듯한 봄날, 이 책을 들고 천천히 강남의 거리를 걸어보면 어떨까요? 잊고 있던, 모르고 있던 강남의 과거가 여러분의 현재로 펼쳐질 것입니다." 









지은이

한종수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롯데관광과 한국토지공사(현 LH)에서 일했으며, 현재 세종시 도시재생센터 사업지원 팀장으로 재직 중이다. 대중 역사책을 쓰는 작가로서 거창한 역사 담론보다는 그 사이에 파묻힌 사람들의 흔적과 일화를 발굴해 새로 생명력을 부여하는 작업을 해왔다. 한국토지공사 재직 중에 도시사(都市史)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특히 서울 토박이이자 세종시 건설의 참여자로서 서울과 세종의 주요 공간과 그에 관한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2차대전의 마이너리그』(2015년), 『제갈량과 한니발, 두 남자 이야기』(2013년), 『세상을 만든 여행자들』(2010년)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환관 이야기』(2015년), 『제국은 어떻게 망가지는가』(2012년)가 있다.

 

강희용

한양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한양대학교 도시공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강남과 인접한 동작구에서 제8대 서울시의원을 지냈고, 서울시 재개발 및 균형발전위원회 위원, 서울시도시계획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서울시 도시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관여해 왔다. 2013년 미국 국무부에 의해 세계 차세대 지도자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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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egirl1003/220735869071?60509 BlogIcon 1466262483 2016.06.19 00:08

    좋은글 감사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aa105965/220736072299?110078 BlogIcon 1467022285 2016.06.27 19:11

    알찬 정보 좋네요~

  3. 일산 2021.03.26 08:01

    아니 강남이 심장의도시 라고 하는 글이나 책만든 사람이 생각을 하시고 만드는건지 참 어이가 없네요 서울에선 심장의 도시는 종로 인데 잘알고선 애기 하는건가요 강남은 개발도시로 되서 성공을 한건데 어떻해 강남이 심장의도시 라고 글을 쓴건지 참어이가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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